2024년 4월 21일
큰돌개혁장로교회 주일예배 ▣주일경독시간 인도: 심진희 집사 ▶시편찬송 시편80편(제네바) 다같이 ▶경 독 시편80편 고린도전서15장 다같이 ▶합심기도 다같이 ① 성령과 말씀의 예배 / 설교자와 회중을 위해 ② 성찬의 예배/ 은혜언약 안에서의 하나님의 영광과 성도의 교제가 풍성하게 드러나는 예배를 위해 ③ 믿음과 순종의 예배/ 배움(교리)과 실천(삶)이 있는 예배를 위해 ▶목사;“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갈1:3) ▶회중;“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2) * 예배부름과 송영 시편104편(제네바) * 사도신경 다함께 *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제16주일 * 십계명낭독 다함께 * 참회기도 다함께 * 시편찬송 시편3편(B)(연합) 헌 상 심진희 집사 목회기도 담임목사 말씀의 강설 요일2:12-17⑭ 요한일서 강해(36) 주의만찬 레24:5-9 다함께 * 찬 송 찬송가 313장 다함께 * 강복선언 설교자 * 교제의 인사 다함께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12:10) * 표는 기립해주시기 바랍니다. ☞ 헌금은 미리 준비해 미리 봉헌함에 넣어주세요. *주일 오후 교리공부: “성경과 교리”(62) 교리와 함께 읽는 야고보서 본문연구 |
제2부 인간의 구원 제16주일 하나님 아들에 관하여 제40문: 왜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길로 가셔야만 했습니까? 답 :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즉,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하는 방법 외에는 우리의 죄에 대한 값을 지불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기기 때문입니다. 제41문: 왜 그리스도는 “장사지내”졌습니까? 답: 그의 장사는 그의 죽음이 실제적으로 사실이라는 것을 증거해 줍니다. 제42문: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죽어야 합니까? 답: 우리의 죽음은 죄 값을 치루는 행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로 더 이상 범죄하지 않게하여 영생으로 인도하는 관문인 것입니다. 제43문: 십자가를 통한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으로부터 얻게 되는 또다른 유익은 무엇입니까? 답: 우리의 옛 자아가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죽고 묻힘으로써 육신의 악한 욕망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되고 그 대신 우리 자신을 감사의 제물로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제44문: 왜 사도신경에는 “음부에 내려가셨다가”라는 귀절이 덧붙여져 있습니까? 답: 내가 개인적인 유혹과 위기에 처해있을 때마다 주 그리스도께서 그 삶을 통하여 특히 십자가상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영혼의 슬픔과 고통을 겪으심으로써 지옥의 고통과 슬픔으로부터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기 위해서 입니다. (즉 실제적으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의미가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
▣성찬본문/ 레24:5-9
▶『 (레24:5-9) 너는 고운 가루를 가져다가 떡 열두 개를 굽되 각 덩이를 십분의 이 에바로 하여 (6) 여호와 앞 순결한 상 위에 두 줄로 한 줄에 여섯씩 진설하고 (7) 너는 또 정결한 유향을 그 각 줄 위에 두어 기념물로 여호와께 화제를 삼을 것이며 (8) 안식일마다 이 떡을 여호와 앞에 항상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 (9) 이 떡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리고 그들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 그에게 돌리는 것으로서 지극히 거룩함이니라 이는 영원한 규례니라 』
▣설교본문/ 요일2:12-17⑭
『 (요일2:12-17)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우리는 지금 사도가 경고하는 세상성의 실체를 파해 쳐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사귐을 방해할 뿐 아니라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받은 영원한 생명을 포기하고 그의 옛적 본성이 욕망하는 세상과의 사귐 안으로 들어가게 만드는(원리상 불가능하지만)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가장 사악하고 치명적인 유혹에 관하여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정욕, 타락한 세상을 지탱하는 원리
지난 시간에 우리는 사도가 해명하는 이 세상 성의 구성요소인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의 특징을 살펴보았습니다.
▶(요일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정욕들은 세상으로 하여금 여전히 세력을 떨치며 하나님께 대한 반역적 질서와 체계를 작동하게 하는 힘의 원천입니다.
마치, 저주받은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고 마침내 육신을 삼키는 것처럼(창3:18-19) 인간의 타락한 본성 안에도 이런 죽음의 매카니즘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이 정욕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될 때 하나님만을 지향하도록 내재된 인간의 본성의 경향성이 아담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왜곡되고 변질된 결과였습니다. 이 ‘정욕’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아닌 ‘자아’를 지향하는 자기성의 욕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원죄의 근원인 ‘자기애성’(自己愛性)이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정욕의 발전적 성격을 주목해야 합니다.
▶다윗이 시편1편에서 묘사한 것처럼 악인의 꾀에서 죄인의 길로 들어서고 그리고 마침내 오만한 자의 자리로 이르게 되는 여정입니다.(시1:1-2)
▶또한 사도야고보가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 여정이 그것입니다. (약01:15)
정욕은 쉬지 않고 일합니다. 정욕이 이르는 목적지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아는’ 주체적 존재(왕)가 되는 것이었고 아담과 그의 아내의 욕망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수의 열매를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주시했습니다.(창3:5-6)
그리고 아담과 그의 아내의 욕망(지성의 부패)은 점차 강화되어(정서의 충동) 마침내 당돌하고 무모한 반역(노예적 의지)을 감행하게 했던 것입니다. 인간본성의 ‘지-정-의’의 체계인 자원의지(自願意志)는 ‘정-의-지’의 왜곡된 ‘노예의지’(奴隸意志)상태가 된 것이었습니다.1)
아담의 욕망을 답습하다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인간의 부패한 욕망(정욕)은 멈추지 않는 자기성(세상성)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정욕은 아담이 욕망했던 자기숭배적 성향을 무한히 확장합니다.
▶창1-11장까지의 원시역사는 이런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는 그대로 보여집니다. 원시역사는 인간의 타락의 연대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3장의 에덴의 타락기사가 마친 후 4장부터 인간의 악의 연대기가 기록됩니다.
① 육신의 정욕(자기보존의 욕망) 동생 아벨을 살해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는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던 하나님의 복된(?) 권징을 저항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땅의 보복으로부터 보존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창4:12,15)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의 약속에 맡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그가 행한 첫 번째 일은 에녹성을 짓는 것이었고 이는 최초의 도시문명이었습니다. 그는 아벨의 피로 더럽힌 땅을 보금자리로 삼고 안전지대로 삼습니다. 물질을 자신의 구원자로, 이 땅을 존재의 뿌리로 선택했습니다. 그가 땅의 소산을 자신의 존재의 가치로 하나님께 드릴 때부터 땅에 대한 숭배는 시작된 셈이었습니다.(창4:3) 이것이 ‘육신의 정욕’ 곧 땅과 물질에 대한 우상숭배적 욕망이었습니다.
② 안목의 정욕(자기확장의 욕망); 가인의 욕망을 따르는 인류는 성적욕망으로 이어집니다.(창6장)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불법적인 혼인관계가 시작되었고, 이것은 자기성의 확장을 추구하는 보다 발전된 반역이었습니다. 이것이 ‘안목의 정욕’입니다.
▶(창6:2) 하나님의 아들들2)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③ 이생의 자랑(자기완성의 욕망); 마침내 인간의 욕망은 홍수이후에 끝없이 강화됩니다. 창11장의 바벨성의 반역은 그들의 이름을 높여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려는 가장 정치적이고 권력지향적인 욕망을 추구합니다.(창11:4) 이것이 사도가 가르치는 ‘이생의 자랑’입니다.
▶(창11: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하늘’은 그들의 욕망이 하나님의 보좌를 욕망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우리 이름’은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정치권력적 욕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원시역사는 인간의 신성화의 욕망의 연대기 곧 타락한 인간이 욕망하는 자력구원의 연대기인 것입니다.
▶세상에 속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일정한 악의 체계와 질서를 추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상 곧 자기성을 지향합니다. 악인의 꾀가 죄인의 길로 연속되고, 죄인의 길은 오만한 자의 자리를 지향하는 것처럼 점진적으로 악화되어 갑니다. 그러나 이런 자기숭배적 욕망의 끝은 ‘죄의 삯은 사망’(롬65:23)이라는 파국적 말로일 뿐입니다. 이것이 사도요한의 공동체를 위협하는 영지주의 이단이 유포하는 거짓 복음의 길입니다.
돈(경제), 섹스(종교), 권력(정치)
그렇다면 인간의 정욕은 우리들의 삶을 어떻게 좀먹고 파괴하는 것일까요? 사도가 경고하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는 욕망이 삶을 어떤 방식으로 격동하는지에 관하여 경건한 신자들은 전통적으로 세 가지 범주로 묘사하곤 했습니다. 그것은 ‘돈, 섹스, 권력’으로 범주화하기도 했습니다.
① 인간은 육체에 속한 것, 곧 물질가치에 자신의 존재의 연속을 추구합니다. 사도는 이것을 ‘육신의 정욕’이라고 말합니다. 육신의 기본적인 생존욕구, 미래를 저항하는 생존본능으로서 모든 물질에 대한 탐심을 품습니다. 인간에게 물질은 구원의 수단입니다. 그러나 흙으로 창조된 인간이 흙을 추구함의 끝은 흙이 되는 것이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창03:19)
하나님을 상실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고결한 정체성을 상실합니다. 그리고 흙에 기생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원초적 존재로 전락합니다. 오늘날 인간의 원초적인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을 대변하는 것이 ‘돈’입니다. 맘몬은 우리를 세상에 기생하는 존재로 전락시킵니다. 물질에 관한 인간의 원초적 욕망은 인간타락과 비참의 상태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떡의 시험)
② 그러나 이 욕망은 보다 정신적이고 무형적 욕망으로 확장되는 데 이것이 ‘안목의 정욕’입니다. 인간은 자아를 더욱 아름답고 만족스럽게 하는 모든 심미적 욕망을 추구합니다. 모든 지적만족을 위한 욕망, 정신적이고 심미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예술적인 욕망, 그것이 퇴폐적이고 찰라적인 기쁨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욕망은 하나님을 밀어낸 영혼의 허기를 반드시 다른 방식으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기쁨들이 자신을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확인시키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대변하는 욕망이 ‘섹스’입니다. 성적욕망은 실상 종교적인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을 주인공으로, 자아를 독립적인 주체로 인식하려는 수단과 욕망으로 작동되기 때문입니다. 이 ‘안목의 정욕’은 중독적 특징을 갖습니다.(☞ 예수의 두 번째 성전에서의 시험)
③ 세 번째로 인간은 자아의 궁극적인 완성의 자리를 욕망하는데 이것이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것은 타인과 세계를 지배하는 제왕적 자리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아는 하나님적 존재로 확장되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대변하는 현대인의 욕망이 ‘권력’입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높은 산위에서의 시험)
사람아, 무엇을 욕망하는가
17세기 근대철학의 아버지인 데카르트는 말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러나 4세기에 교부 어거스틴의 인간에 관한 정의에 비하면 한 조각의 진실이었을 뿐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나는 내가 무엇인가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과 그 인식하는 것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나는 존재한다’ 즉 내가 존재하는 것은 내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이해하고 있음을 통해 확인되고, 그 대상을 욕망한다는 사실에서 나는 존재하는 것입니다.
즉 어거스틴은 ‘나는 욕망(사랑)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반드시 사랑해야하는 대상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그 대상을 이해하고 그 대상을 욕망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존재를 가장 확실하게 정의하는 개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어거스틴이 말한 존재의 지향성입니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욕망(사랑)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욕망하고 의지하고 지향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존재하는 양식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본성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아를 지향하기 시작했고 자신에게로 가는 길로서 세상을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에게 모든 피조물들은 자신에게로 가는 길입니다. 자아를 욕망하고 사랑하는 파괴적인 사랑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 탕자가 선택한 낯 선 자아를 찾아 ‘먼 나라’로 떠난 ‘길’이었습니다.
존재의 무게, 나는 하나님을 욕망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불행과 비참을 묵상해보십시오.. 그가 요람으로 태어난 에덴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절정으로 그분의 거룩하시고 자애로우신 속성들이 전시된 공간입니다. 에덴에서 목격하는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신적인 기쁨으로 충만한 공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창조의 위계와 질서의 최상층에서 신적인 사랑과 영광의 빛으로 충만한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며 영육복합단일체로서의 인간은 그 아래 동물들과 식물등과 광물계와 기타의 모든 무생물적 존재들을 다스립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거룩한 욕망은 피조물을 향한 정욕으로 전락하고 이것은 인간을 인간이하로 전락시키는 창조위계의 전복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스스로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려했던 아담의 부패한 욕망은 도리어 모든 만물보다 저열한 존재로 전락하는 결과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 세상을 추구하던 탕자가 맞이한 ‘큰 흉년’처럼 말입니다.(눅15:14)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이 되려했던 인간은 오히려 존재의 비하를 경험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되기는커녕, 땅을 섬겨야 하는 노동의 저주를 받습니다.
▶(롬1: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그리고 마침내 흙에서 창조된 인간은 그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망의 비참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저열한 무생물인 존재인 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육신의 비참은 인간이 직면해야하는 영혼의 비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히0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이 창조의 위계와 질서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추구하는 존재의 욕망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창조사상에 입각해서 본다면 인간 외의 동식물 심지어 무생물까지도 존재를 보존하고 소멸을 기피하며, 또 감각하지 못하나 감지되고, 인식하지 못하나 인식된다는 점에서, 상위존재의 감각과 인식에 참여하여 자체의 존재를 완성시키려는 성향을 가진다. 진리에 대한 사랑은 만물의 공통된 성향이다!”(고백록 3.6.10)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 상태를 지향합니다.3)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 안에 거하는 상태가 구원이고 영광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만이 자신의 존재의 지향성을 거부하고 자아를 향한 우상 숭배적 욕망을 품었습니다. 인간은 그 영혼이 지향해야 하는 하나님을 상실한 즉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상실하는 유리하는 별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재창조(구속)는 창조의 역순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구원이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의로움을 전가받은 의로움과 자녀 된 신분입니다. 이것은 결정적이고 번복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구원의 모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다시 창조의 본래적 목적과 질서로 회복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의인이요 자녀 된 신분으로부터 시작된 구원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그 창조의 목적에 부합된 상태로 나아갑니다. 최초의 아담의 상태를 뛰어넘어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아들의 성품에 참여하며 그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는 것입니다.(엡4:13;벧후1:4) 이것이 지상교회가 경험하는 성화역정의 여정입니다.
귀로(歸路)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이 부재한 이 세상을 타매(唾罵)합니다. 지금의 이 세상은 그들의 창조주를 추방하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욕망의 바벨성을 건설한 곳입니다.
▶ 어거스틴은 그의 신국론에서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의 이용(usus)의 대상으로 수단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오직 신자에게 향유(fruitio)의 대상은 하나님뿐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유함이란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만족 안에서 더 이상 다른 것을 추구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사도요한이 말하는 하나님 안에 거함,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다윗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희구법으로 더 바랄적인 없어라!는 의미)
▶그러므로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이 지상적 삶의 가치를 폄하하거나 지상에서 누리는 행복의 무가치성을 조장하는 말이 아닙니다. 신자가 먹고 마시고 입고, 소유하고 누리는 모든 세상적 가치들은 그것이 소유가치가 되거나 행복을 위한 소비적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존재의 지향성을 격려하고 자극하고 조력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맛있는 것을 먹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의 속성의 달콤함을 느낍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은총의 자원들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풍요로움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밥을 먹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욕망합니다.
주기도문의 세계가 그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이 기도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녀들 가운데서 어떤 분으로 환대받아야 하는지 말입니다.
우리는 떡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떡을 추구함이 아니라 이 나그네 된 삶을 위해 떡을 먹어야합니다. 그렇습니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은 하나님께로 가는 이 이민자의 여로에 소용되는 ‘노잣돈’이면 충분합니다.
▶시영이가 입대한 후 전화할 때마다 이렇게 말합니다. ‘빨리 집에 가고 싶어요. 엄마 아빠한테 할 말이 너무 많아요. 나 엄청 수다 떨게 많아요.’ 그리고 1박2일 휴가 기간 동안 쉬지 않는 군대썰(?)을 풀었습니다. 저는 아들에게서 사도가 가르치는 ‘페레그리니’(이민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읽습니다. 이 아이는 군 생활을 마쳐야 집으로 오게 될 겁니다. 그러나 아들의 군생활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돌아갈 집이 있어 군대생활은 사명이 되고 무용담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귀로(歸路)의 여정입니다. 우리는 이 여로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해야합니다. 나는 무엇을 희망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가?
-----------------------
1)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에게 모사 될 때, 인간의 지성은 세 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 ‘사유’(믿음) 둘째,‘기억’(소망) 셋째,‘의지’(사랑)이다. 인간은 어떤 사물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것을 기억하며 그것을 욕망한다.(신국론 11.26) 다시 말해 인간은 이해(믿음)하는 것을 기억(소망)하고, 기억된 것을 욕망(사랑)한다. 인간에게 하나님은 영혼의 좌소에 철필로 기록한 기억된(말씀으로) 존재로서 인간은 항구적으로 그분을 욕망(사랑)하는 지복을 추구한다.(신6:6;출39:30)
2)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신)’이 되려했던 타락한 인간의 욕망을 상속한 가인의 후손들을 의미한다.(기동연) 창3:5 참조, ‘하나님과 되리라’고 할 때 ‘단수로서 신(god)을 의미한다. 그리고 딸들은 ’사람(아담)의 딸들‘(창6:1)인데 이들은 5장 아담의 계보와 연속해서 이해할 때, 경건한 아담의 경건한 후손들이 낳은 딸들을 의미한다.
3) 어거스틴은 이것을 ‘존재의 무게’라고 말했고, 이것은 모든 존재하는 것은 그 무게가 이끄는 일정한 지향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보다 거의 1000년을 앞서 철학적 만유인력의 법칙을 주창한 셈이다.
▣말씀의 반추를 위한 생각들
▣ 시편으로 기도하기!(피터 버미글리)
시편81편
1. 오 위대하시고 선하신 하나님
우리가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당신을 찬양하며 기념하는 데에는 결코 적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선하심으로 우리를 죄의 노예상태와 마귀의 폭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고백함으로, 우리가 오직 당신에게만 귀를 기울이고 경배하며, 다른 그 어떤 것도 당신과 동등하거나 더 낫게 여기지 않도록 기쁘게 허락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때때로 우리가 감히 그런 일을 저질렀을 떄, 우리는 결코 가볍지 않은 혹은 범상치 않은 처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하나님이신 당신 없이 우리 자신만 남겨졌을때, 우리는 음란한 욕망들에 빠져들어 천박한 욕정들을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그 역병보다 인간에게 닥칠 더 큰 재난이 없을 것이라고 이제 우리가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말씀을 듣고 그런 다음에 당신의 길을 따라가도록 거듭 반복하여 요청하게 합니다. 그 일이 이루어지면, 당신의 약속들을 실천하셔서 우리의 구원의 원수들을 억제하시고 마침내 우리를 형용할 수 없는 달콤한 즐거움들에 영원히 참여하게 하실 것을 우리가 확실히 압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