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자녀
에베소서 6;1-4절(22.5.8.오전)
옛날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는 죄수들에게 감옥에서 복역대신 시에서 청소부 일을 하게 하였습니다. 어느 날 수상이 우연히 창밖을 보다가 훌륭한 옷을 입은 젊은 남자가 눈을 쓸고 있는 청소부에게 다가가 그의 손에 입을 맞추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수상은 그 청소부가 위험한 살인범인지라 젊은이는 분명 그의 부하 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장 젊은이를 불러들여 죄수인 청소부에게 한 행동을 설명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젊은이는 조금도 망설임도 없이 각하 그 분은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수상은 살인범으로서 청소부가 된 아버지에 대해 조금의 부끄러움도 갖지 않고 공경하는 젊은이의 효성에 감동하여 이 일을 황제에게 아뢰었습니다. 황제 또한 이토록 자식을 훌룡히 교육시킨 사람이라면 근본적으로 나쁜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여겨 그 죄수를 즉시 석방 시켜 주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자식의 마음이 아버지를 자유케 했습니다.
부모에 대한 공경심이 사라져 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비록 못 배우고 나쁜 부모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네 부모는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부모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10달을 품고 나를 낳은 부모입니다. 그 자체로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 자신을 공경하는 일로 생각하십니다.
본문을 통해 자녀들은 어떻게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지? 또 부모는 어떻게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좋은 부모가 되고, 좋은 자녀가 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첫째, 자녀는 어떻게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까? 1-3절에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이 말씀을 보면 자녀들은 어떻게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지 그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습니까?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들과의 관계의 계명입니다. 첫 번째 계명부터 네 번째 계명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계명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숭배하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5번째 계명부터 10번째 계명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계명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첫 번째 계명으로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그래서 부모에 대한 효는 인간의 모든 행위에서 첫 번째로 중요합니다.
효란 만행의 근본입니다. 그렇다면 부모를 어떻게 공경해야 합니까? 먼저 부모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모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헬라어에서는 순종이란 의미를 ‘문에 응답 한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문이란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부모의 말씀이고, 두 번째는 그 말씀에 응답해야 하는 내 마음입니다.
부모의 말씀은 내 마음에 노크하는 소리입니다. 노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음의 문을 열고, 내 말을 듣고, 내 말대로 살아라입니다. 내 말대로 살면 네가 잘 되고, 행복해 지고,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노크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노크 소리조차 귀찮아 합니다. 듣기 싫어합니다. 또, 잔소리, 아 진절머리나, 여길 떠나고 싶어, 그래서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 가지고 고향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잔소리를 안 들어서 살겠다는 것이고, 자유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비참하고,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2절에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합니다. 공경이라는 말은 자녀가 왜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지 그 동기에 대해서 말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헬라어에서 공경이란 ‘가격을 정하다’입니다. 이 말은 내가 부모의 가격을 어떻게 정했느냐에 따라 그 공경도가 다릅니다. 내 부모가 대통령이라면 절대 공경할 것입니다. 내 부모가 살인자라면 증오하고 멀리할 것입니다. 부모가 부자라면 매일, 귀찮을 정도로 찾아올 것입니다. 부모가 가난하다면 민폐로 생각하여 멀리하고 연락도 끊을 것입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노인의 고독사가 그 증거입니다. 앞서 예화에서 설명한 대로 살인자 아버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훌륭한 자식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를 잘 공경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복을 받습니다. “이것은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부모님을 하나님처럼 섬기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약속된 복이란 다른 복이 아니라, 100%, 반드시 하나님이 복을 주겠다는 복입니다. 장수한다는 것은 오래 사는 것도 있지만, 하는 일들이 형통하고 오랫동안 잘 되는 것을 말합니다.
신명기 7:9절에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느리라”고 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면 복을 받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고, 인애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천대까지란 반드시 복을 주겠다는 언약을 이해하겠다는 확실성, 불변성, 지속성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인애란 하나님이 약속한 언약에 근거하여 그 언약을 기억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온갖 긍휼과 친절 그리고 풍성한 은혜를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부모공경은 부모공경으로 끝나지 않고, 내가 하나님께 천대까지 복을 받는 확실한 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둘째, 부모는 어떻게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까?
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왜 어미들아, 아비들아 하지 않고, 아비를 강조합니까? 성경에서는 한 가정의 언약과 축복의 전달자로서 아버지를 축복하여 대표로 세웠고, 축복을 받았으니 축복을 전달하는 통로로서 아비들을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신명기 32:7절에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축복의 전달자로서 사명을 가진 아버지가 자녀를 양육할 때 주의할 점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경고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면 어떻게 됩니까? 화가 난 자녀는 아버지의 말씀을 더 이상 듣지 않게 되고, 아버지를 통해서 들어야 할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의 말씀에서 멀어집니다.
자녀를 화나게 만드는 구체적인 것은 부모의 잔소리입니다. 자녀가 잘못을 했거나,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경우 대다수의 부모들은 잔소리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사실 잔소리는 별로 효과적이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소리를 하는 것은 불행하게도 부모 세대가 자라는 과정에서 답습해온 결과이고, 다른 대화방법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자녀들은 부모의 잔소리에 만성이 되어 있습니다. 부모의 잔소리가 시작되면 자녀들은 자동적으로 마음의 귀가 닫힙니다. 셔터 문을 내립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이 부모에게 듣는 메시지는 여러 가지인 것 같지만, 단 하나일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너를 믿을 수 없다”입니다. 자녀를 더 이상 믿지 못할 자로 인정하게 되면, 모든 기대는 사라지고, 내 잔소리를 통해서 자녀의 운명을 바꾸고 싶어 합니다. 부모의 착각은 이렇게 하는 것이 부모로서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이때 자녀들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경험하게 되고, 그 정도가 심하면, 자기감정 조절 및 우울증 등으로 악화되기도 한다. 자녀가 이러한 부정적인 정서로 인해 부모에 대한 거부감을 형성하게 되고 대화를 거부하거나 싫어한다면, 부모의 양육 방식을 점검해야만 합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좋은 대화법을 익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버드대학에서 가르치는 6가지 대화 원칙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Smile, 미소를 띄 얼굴입니다. 둘째, Open mind, 열린 마음입니다. 셋째, Forward, 몸을 앞 쪽으로 가야 합니다. 넷째, Touch, 가벼운 접촉이 필요합니다. 다섯째, Eye, 눈을 마주보아야 합니다. 째려보면 안됩니다. 여섯째, Nod, 고개를 끄덕거랴야 합니다. 긍정하고 동의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대화법을 잘 익혀두면, 사랑의 대화를 할 것이고, 갈등의 폭을 줄이고, 자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일방적인 대화는 자녀를 화나게 합니다. 잠언16:32절에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합니다.
끝으로 그렇다면, 성경에서 강조하는 부모 공경과 부모의 양육 방식은 무엇입니까? 1절에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4절에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합니다.
주 안이라는 의미는 부모 공경과 자녀 양육에 대한 기준점을 말합니다. 큰 틀입니다. 유대인들은 교육은 모세 오경을 중심으로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 중심이지만, 특히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공경과 양육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삶, 성령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삶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죄 용서함을 받고, 구원의 확신, 영생을 얻은 자로서의 삶을 말합니다.
지난 주 레갑족속의 생존전략에서 살펴보았듯이 세속화를 경계하며,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임을 확신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생명처럼 여기며 사는 삶을 말합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을 삼고, 살아갈 때,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는 회복이 되고, 행복한 가정,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가정이 될 것입니다.
화가 홀만 헌터가 1904년에 그린 ‘세상의 빛’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요한계시록 3:20절을 배경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림의 내용은 예수님이 어느 집 문 밖에서 등을 들고 서 있는 모습입니다. 어느 날 홀만 헌터의 친구는 이 그림을 감상한 후에 문에 문고리가 없기 때문에 잘못 그렸다고 지적합니다. 그러자 헌터는 친구에게 이 그림의 문고리는 보이지는 않지만 문 안에 있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문고리가 안에 있기 때문에 밖에서는 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안에서 열어줄 때까지 밖에서 문만 두드리면 문을 열어달라고 말만 하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예수님의 음성과 그 노크 소리를 듣는다면, 그 문을 여는 순간, 예수님과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며, 천국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자녀가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려면 굳게 닫힌 내 마음의 장벽을 열어야 합니다. 부모도 자녀를 사랑하려면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누가 열어야 합니까? 우리 각자가 열어야 합니다. 사랑합니다.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오랫동안, 외롭게 밖에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양방향에서 함께 열면 최고의 순간이 되겠지만, 적어도 한 쪽에서라도 문을 열면,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부모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를 주 안에서 부모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고, 자녀가 나를 배척한다고 해도 나는 주 안에서 자녀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그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주 안에서 온전히 세워지는 가정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충분히 부모를 영접하고, 자식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위로하시길 원합니다. 날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져 가는 건강한 가정, 복된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