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로 풀어 본 교과서 속 문학 이야기 3-3
여성동아/ “젠더특위는 젠더 갈등 외면 않겠다는 정부의 의지”
⑤ 전혀 교과서적이지 않은 소녀들
앞에서도 말했듯이 양적으로 보면 문학 제재에서 여자 주인공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작은 게 사실이다. 그런데 차지하는 비중에 비하면, 문제적인 여자 주인공들이 차지하는 바가 적지 않은 편이다. 인종 간의 차별이 합법이었던 시절, 악법은 법이 아니라며 ‘짱돌’을 던졌던 사람(윌리엄 밀러 「사라, 버스를 타다」, 5-2), 바이올린 연주자를 시키려는 엄마를 향해 화려한 축구 드리볼로 맞서는 롤라(로드리고 무뇨스 아비아 「나는 천재가 아니야」, 4-2, 국활), 당당한 주체로 거듭난 카밀란(데이빗 새논 「줄무늬가 생겼어요」. 5-2, 국활), 떼쟁이 동생을 시장판에 내놓겠다며 길을 나섰던 짱짱이(임정자 「내 동생 싸게 팔아요」, 3-1) 등은 어느 남자 주인공 못지않게 개성과 호기가 넘친다. 이들은 적어도 ‘교과서적’이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들이다.
그리고 지금 소개할 주인공들은 좀 더 각별한 관심을 갖고 보아 주길 바란다. 첫 번째는 화려한 궁중 의상이 아닌 종이 봉지를 걸치고 왕자를 구출하러 나섰던 ‘종이 봉지 공주’(로버트 문치 「종이 봉지 공주」, 3-2). 서구 로맨스의 역사에서 ‘왕자―공주―용’이라는 삼각형 구도는 가장 애용되었던 페이지 중 하나다. 악으로 대변되는 용이 아름다운 공주를 잡아가면, 정의의 사자(왕자, 기사)가 나타나 악을 응징하고 공주를 구출하는 이야기 말이다. 이 삼각형은 남성 중심 서사를 구축하는 단단한 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즘에는 이 시스템에 고장을 일으키려는 시도가 제법 있는데 「종이 봉지 공주」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더군다나 교과서에서 만나는 것이기에 기쁨은 두 배가 되는 듯하다.
첫 번째 장을 열자마자 하트가 만발하는 공주와 시크하게 다른 쪽을 응시하는 왕자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친숙한가 싶으면서도 뭔가 낯설다. 우리가 알던 공주는 이토록 적극적으로 애정을 표현하지 않거니와 훨씬 더 화려하고 예쁘게 치장돼 있기 때문이다. 엉뚱한 상상력은 용이 공주가 아닌 왕자를 잡아가면서부터 도약하기 시작한다. 용이 내뿜은 불에 옷이 홀라당 타 버린 공주, 왕자를 구하러 가기 위해 종이 봉지로 된 옷을 입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빛나는 갑옷으로 상징되는 남성의 허식을 폭로하기 위한 장치로 읽히기 때문이다. 종이 봉지 공주는 남성들과는 전혀 다른 싸움의 기술을 보여 준다. 강인한 완력과 용맹성이 아닌 말(지혜)로 싸워 이기는 방식인 것이다.
진정한 반전은 마지막 장에서 완성된다. 자신을 구하러 온 공주를 대하는 왕자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그의 표정에는 고마움은커녕 불만이 한가득이다. 왕자는 이 와중에 공주답지 못한 그녀의 행색이 마뜩지 않았던 것이다. 공주는 비로소 자기가 그토록 사랑했던 왕자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된다. 왕자를 찾으러 갔다가, 진짜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을 얻게 된 것이다. 요컨대 「종이 봉지 공주」는 여성이 남성을 구원하는 서사이자 남성에게 예속되었던 자아가 당당한 주체로 거듭나는 이야기인 것이다.
다음으로 소개할 주인공은 「무기 팔지 마세요!」(위기철, 5-2, 국활)에 나오는 보미와 제니이다. 이 작품이 『국어활동』에 실린 게 다소 아쉽지만, 공교육에 진입한 것만으로도 문학 제재의 평수가 한층 넓어진 기분이다. 두루 알다시피 이 작품의 주제는 ‘어린이의 작은 힘이 세상을 바꾸고 평화를 이룰 수 있다’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진짜 판독해야 할 의미는 따로 있다. 세상을 바꿔야 평화가 올 수 있고, 그것은 불가불 싸움을 동반할 수 있다는 것.
보미와 제니는 그 투쟁의 대열에 앞장선 아이들이다. 「무기 팔지 마세요!」에서 무기는 폭력과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남성’들로 대변된다. 무기를 지지하는 정치인들을 늑대에 비유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반면에 무기의 반대편에는 ‘자매들’이 자리한다. 비비탄 총알 하나로 시작된 보미의 싸움은 단짝 민경이, 전교 어린이 회장 단비가 합세하면서 여자들로만 구성된 28명의 ‘평화 모임’이 결성되기에 이른다. 한편 지구 반대편에서는 평화 모임의 기사를 접한 제니가 평화의 시발점이 된다. 여기서 제니의 연설에 감동한 앤더슨 아줌마 덕분에 ‘늑대 손’을 가려내기 위한 평화운동은 정치인 낙선운동으로까지 이어진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진짜 엄마’의 구성원이 노인들이라는 것, 그중에서도 할머니들이 모임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무기 팔지 마세요!」는 무기로 상징되는 폭력에 대항하는 자매들의 힘을 보여 주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보미, 제니, 앤더슨 아줌마는 각각 소녀와 할머니라는 정형화된 유형를 과감하게 벗어던진 인물들이다. 여성주의 관점에서 이 작품은 다시금 주목받아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⑥ 교과서 밖에서 풀어야 할 숙제
이데올로기는 일상의 안온한 힘과 자연스러움을 통해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미디어는 그 단적인 사례다. 세계 여러 나라를 대표하는 패널들이 죄다 남자들인 상황을 보면서도(JTBC 토크쇼 「비정상회담」), 우리는 그들의 입담과 다양한 문화에 감탄하기에 바쁘다. 성적인 대상으로 타자화했던 외국인 여성들의 수다(KBS 토크쇼 「미녀들의 수다」)를 떠올릴 겨를은 더더군다나 없다.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굴절된 관습은 누군가 끄집어내기 전까지는 매우 정상적인 가치로 작동하기 마련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다르지만 교과서도 일면 미디어와 유사한 운명을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가치로 포장된 채 은밀하게 이데올로기를 실어 나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해 봐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들은 그 은밀함의 최소 깊이만을 파고든 것에 불과하지만 서둘러 재고해야 할 지점이기도 하다. 시적 화자의 성별을 삽화로 유형화하는 양상은 우리가 관습적으로 받아들이는 성역할의 단면을 보여 준다. 시와 그림의 친연성을 감안하여 삽화는 세심하게 고민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여성(어머니, 할머니)과 남성(아버지, 할아버지)을 부정과 긍정의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것, 여성을 모성과 희생의 범주 안에서만 그 가치를 인정하려는 왜곡된 모성주의는 시급히 벗어나야 할 기율들이다. 덧붙여, 역사동화에 유독 남자 주인공들이 많은 것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겠다.
반대로 문학적 가치가 높은 작품들은 그 활용 방안에 대한 적극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제재 비평을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줄거리 간추리기’라는 도구적 기능에 머물렀던 「종이 봉지 공주」를 떠올려 보자. 비평적 인식을 공유했을 때 닫혀 있던 텍스트가 또 다른 상상력의 세계로 확장되지 않는가. 기존의 공주 캐릭터들과 종이 봉지 공주를 비교해보는 수업도 흥미로울 듯하다. 애니메이션도 그렇고, 동화, 그림책, 캐릭터 등에서 할 얘기가 많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 일상에 고착화된 성역할의 사례를 하나 둘 끄집어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그 사이 아무도 모르게 달성된 학습목표는 덤일 뿐이다.
교육현장에서 이른바 ‘온작품 읽기’를 하고 있는 「무기 팔지 마세요!」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교과서로는 다 볼 수가 없으니, 원문 전체를 읽혀 보자는 것이 기본 취지인 게다. 온작품 읽기는 문학교육의 새로운 희망으로 부상하고 있으며, 실제로 교과서의 한계를 상당히 보완해 줄 것으로 보인다. 이때에도 교사의 비평적 안목은 상당히 중요한 덕목이다. 평화에서 젠더에 이르기까지 이 작품을 수업에서 어떤 방식으로 연주할지는 작품의 심연을 들여다본 후에야 가능할 것이다. 교육과정을 재구성하고 수업 지도안을 고민하는 것은 그다음이다.
신구 교육과정이 교차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비평적 소명이 더욱 활성화되어야 할 때다. 부디 많은 관심과 함께 정치적 논의가 이어지길 기대한다. < ‘어린이 문학의 현실과 미래, 통증의 맛, 이충일 평론집(이충일, ㈜창비, 2019)’에서 옮겨 적음. (2023. 8.25.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