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우세하였다.>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17,8-13
그 무렵 8 아말렉족이 몰려와 르피딤에서 이스라엘과 싸움을 벌였다.
9 그러자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
“너는 우리를 위하여 장정들을 뽑아 아말렉과 싸우러 나가거라.
내일 내가 하느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언덕 꼭대기에 서 있겠다.”
10 여호수아는 모세가 말한 대로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후르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우세하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우세하였다.
12 모세의 손이 무거워지자,
그들은 돌을 가져다 그의 발 아래 놓고 그를 그 위에 앉혔다.
그런 다음 아론과 후르가 한 사람은 이쪽에서,
다른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두 손을 받쳐 주니,
그의 손이 해가 질 때까지 처지지 않았다.
13 그리하여 여호수아는 아말렉과 그의 백성을 칼로 무찔렀다.
제2독서
<하느님의 사람은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됩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입니다.3,14─4,2
사랑하는 그대여, 14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확실히 믿는 것을 지키십시오.
그대는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15 또한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16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17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
4,1 나는 하느님 앞에서, 또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리고 그분의 나타나심과 다스리심을 걸고 그대에게 엄숙히 지시합니다.
2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복음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을 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신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8,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2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3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4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5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6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7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마지막 심판 때 믿음이 있다고 인정받으려면?
다큐멘터리 작가 박지현의 "참 괜찮은 태도"에서 소개된 사연입니다.
2008년 청주 여자교도소로 촬영하러 갔을 때였습니다. 교도관이 말했습니다. 딱 한 사람만 조심하면 된다고.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그녀는 어느 날 남편이 외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불륜상대자는 바로 그녀의 친구였습니다. 충격을 받은 그녀는 남편을 죽이고 자수했습니다. 교도소에 들어온 그녀는 모범적이고 성실한 사람으로 통했고 몇 년 후 가석방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유를 얻은 첫 날 그녀는 남편의 외도 상대였던 친구를 죽이고 다시 자수했습니다.
문득 그녀를 다시 떠올리게 된 건 한참 후인 2020년 장동익을 인터뷰하게 되면서부터였습니다. 그는 부산 낙동강 변사 살인사건의 범인이라는 누명을 쓰고 22년간 억울하게 옥살이해야만 했습니다.
이 사건은 1990년 1월 부산 낙동강 근처에서 한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특진에 눈이 먼 경찰은 무고한 시민 두 명을 용의자로 추정해 무자비한 고문 끝에 허위자백을 받아냅니다. 두 명은 사건 당일 현장에 없었지만 계속되는 고문과 폭행을 견디다 못 해 허위자백을 했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들은 복역하던 중에 모범수로 감형되어 21년 5개월을 살고 출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2019년 뒤늦게 사건이 주목받으며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고문으로 범인이 조작되었다고 인정했고 부산고등법원에서 재심이 열렸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장동익입니다.
살인 누명을 쓰고 20년 넘게 감옥살이를 한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않을 어린 딸은 어느덧 커서 어른이 되었고 멋진 아빠가 되기를 꿈꾸었던 서른셋의 그는 어느덧 50세가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가 무죄판결을 받는 것을 보지 못 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왜 하필 나일까?'라는 생각을 수천 번도 더 했다는 그는 재심이 결정되었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용서해야겠다. 마음속에 품고 있어 봐야 나 자신이 힘드니까 놓아야겠다.'
박 작가가 처음 그를 봤을 때 몇 분동안 말을 잇지 못했던 것은 그의 평온한 표정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억울하다고 내 과거를 망가뜨린 사람을 원망해봐야 이미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않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나를 괴롭힌 사람을 위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저지른 짓에 면죄부를 쓰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장동익의 말처럼 마음속에 품고 있어 봐야 나 자신이 힘드니까 나를 위해 용서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용서하되 잊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박지현 작가가 처음 만났던 남편과 친구를 살해한 여성은 자신이 심판관이었습니다. 자신이 심판관이 되면 판사는 의미 없어집니다.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판 때 그 사람을 역시 무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장동익씨는 심판을 심판관에게 넘겼습니다. 심판관이 그의 피해를 다 보상해 줄수는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자신이 심판관의 지휘에 서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래도 판사와 하늘이 올바른 심판을 내려줄 거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불의한 재판관에게 과부가 끊임없이 올바르게 판결해달라고 청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지치지 않고 청하면 불의한 재판관도 올바르게 판결해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칫 믿음이 어떤 것을 들어줄 때까지 청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믿음이기는 하지만 오늘 복음은 그런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은 '심판'에 관한 내용의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 바로 앞에는 노아의 홍수와 소돔의 멸망과 같은 심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무언가를 얻을 때까지 꾸준히 청하면 믿음이 있다는 내용이 아닙니다. 나의 심판을 심판관에게 맡겨야만 믿음이 있다는 내용입니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입니다. 바리사이는 하느님 앞에서 이미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라 심판해 놓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의미 없는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세리는 자기 심판을 주님께 맡깁니다. 그래서 의로운 사람으로 심판받는 사람은 세리가 되는 것입니다.
"개는 훌륭하다"에서 강형욱 조련사가 역대급 분노를 표출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 반려견끼리 싸우는데 보고만 있는 보호자가 있었기때문입니다. 보호자는 개들끼리 싸워서 서열을 정리하기를 바랐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개들끼리 서로 판사가 되라는 의미이고 이는 자기가 판사의 권위를 버리겠다는 뜻입니다. 개가 주인 앞에서 서로 싸우면 주인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심판하면 하느님을 심판관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심판관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자체가 믿음이 없음을 증명합니다. 다시 말해 이웃을 판단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심판관으로 인정하지 않기에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이웃을 심판하는 사람이 될때 종말이 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끝맺으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루카18,8)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한한 힘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힘을 가지고만 있을 뿐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어렸을 때 성당 신부님의 강론을 통해, “가진 것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물론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더 큰 일을 해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우리가 자주 하는 이 말을 멈춰야 합니다. ‘이 정도면 충분해.’, ‘여기서 더 하는 것은 욕심이야.’, ‘남들 정도만 하면 되지.’ 등의 말은 우리가 할 일을 더 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돈을 많이 벌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또 높은 지위에 오르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중요한 것은 많이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이 될 수도 있지만, 봉사, 희생, 사랑도 그렇습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 할 수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은 계속해야 합니다. 쉽게 포기하고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그 모든 것을 하지 않고 소홀히 한다면, 분명히 직무 유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일을 더 우선시하면서 우리는 이 직무 유기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하느님에 관해 관심도 없고 인정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이 자기만 생각하는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그 재판관에게 올바른 판결을 요구하는 보잘것없는 과부는 재산관리에 있어서 억울한 상황에 있습니다. 물론 고약한 재판관이 일 처리를 피합니다. 이 과부가 어떤 억울한 일을 당했는지, 또 재판관이 왜 자기 임무를 유기했는지, 그 과부를 억울하게 한 사람이 누구인지, 이러한 것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약한 재판관도 끊임없이 성가시게 졸라대는 바람에 그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가시게 구는 과부의 요청은 난관을 극복하는 신앙생활의 집요한 노력으로 상징합니다.
기도는 늘 하느님을 생각하고 하느님께 의지하고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끈질긴 요청에 굴복한다면 진실되고 의로우신 하느님이 신자들의 기도를 안 들어 주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말하는 기도는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 나중으로 미뤄서도 안 됩니다. 이렇게 포기하고 미루다가는 하느님으로부터 은총과 사랑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일 역시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선한 일이란 인간이 본질적으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며, 반대로 악한 일이란 인간의 존재 의미의 실현을 방해하는 것이다(빅터 프랭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