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쓴다는 건 너를 사랑한다는 말
⊙ 시인은 휘어지기 쉬워 詩라는 척추를 하나 더 가진 장애인이 아닐까
김이듬
⊙ 부산대 독문학과 졸업. 경상대 국문학 박사.
⊙ 2001년 《포에지》로 등단, 순천대·경상대 출강.
⊙ 시집 《별 모양의 얼룩》 《명랑하라 팜 파탈》 《말할 수 없는 애인》 《베를린, 달렘의 노래》
《히스테리아》, 장편소설 《블러드 시스터즈》 출간.
⊙ 김달진창원문학상, 시와세계작품상, 올해의좋은시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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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왜 시를 쓰는가?”는 질문은 ‘너는 왜 내가 아니고 너인가?’ 혹은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물음처럼 들린다. 나에게 ‘시’는 ‘사람+사랑’의 동의어다. 어쩌면 영원한 미지의 그것일지도. 까닭도 시작과 끝도 모른 채 시를 쓴다, 사랑한다. 나를 가리켜 “육체의 감각 밑에서 시를 발굴하는 시인”(황현산 비평가), “세이렌의 노래를 부르는 시인”(이광호 비평가), “시 앞에서 날마다 허물어지는 영혼”(조재룡 비평가) 등으로 부르지만, 난 그저 진주 남강 언저리에서 시를 짓는 여자일 뿐.
진주에 기생이 많았다고 해도
우리 집안에는 그런 여자 없었다 한다
지리산 자락 아래 진주 기생이 이 나라 가장 오랜 기생 역사를 갖고 있다지만
우리 집안에 열녀는 있어도 기생은 없었단다
백정이나 노비, 상인 출신도 없는 사대부 선비 집안이었다며 아버지는 족보를 외우신다
낮에 우리는 촉석루 앞마당에서 진주교방굿거리춤을 보고 있었다
색한삼 양손에 끼고 버선발로 검무를 추는 여자와 눈이 맞았다
집안 조상 중에 기생 하나 없었다는 게 이상하다
창가에 달 오르면 부푼 가슴으로 가야금을 뜯던 관비 고모도 없고
술자리 시중이 싫어 자결한 할미도 없다는 거
인물 좋았던 계집종 어미도 없었고
색색 비단을 팔러 강을 건너던 삼촌도 없었다는 거
온갖 멸시와 천대에 칼을 뽑아들었던 백정 할아비도 없었다는 말은
너무나 서운하다
국란 때마다 나라 구한 조상은 있어도 기생으로 팔려간 딸 하나 없었다는 말은 진짜 쓸쓸하다
내 마음의 기생은 어디서 왔는가
오늘밤 강가에 머물며 영감(靈感)을 뫼실까 하는 이 심정은
영혼이라도 팔아 시 한 줄 얻고 싶은 이 퇴폐를 어찌할까
밤마다 칼춤을 추는 나의 유흥은 어느 별에 박힌 유전자인가
나는 사채 이자에 묶인 육체파 창녀하고 다를 바 없다
-‘시골 창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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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펴낸 시집과 작고노트. |
어둠 속에서 불편하게 부끄러움을 타며 첫 행을 쓰지만, 쓰다 보면 격렬하게 온몸으로 쓰는 나. 온 힘을 다하지 않으려 하지만, 일단 쓰기 시작하면 달의 테두리에서 달빛이 다 흘러나오게 몰두하게 된다. 시를 쓰는 동안은 시간이 정지한다. 이 과정에서 불안과 열정은 사그라져 패배자가 느끼는 일종의 체념 같은 평화로 바뀌기도 하지만, 애당초 시는 승리와 패배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트로피나 면류관, 꽃다발과 무관하다. 시는 덧없다. 수상이나 문단의 평가도 마찬가지.
축하해
잘해봐
이 소리가 비난으로 들리지 않을 때
누군가 꽃다발을 묶을 때
천천히 풀 때
아무도 비명을 지르거나 울지 않을 때
그랬다 해도 내가 듣지 못할 때
나는 길을 걸었다
철저히 보호되는 구역이었고 짐승들 다니라고 조성해놓은 길이었다
-‘꽃다발’ 전문
다만 태초에 사랑이 있었고(비록 착각이라고 해도) 모든 게 노래였으니(불가해한 무형의 그것이), 어떤 경험은 시를 발생시킨다. 첫사랑은 나를 상하게 하고 때때로 달콤하게, 다소 느리거나 발랄하게 낭만적으로 나를 다루기 어려운 상황으로 몰고 갔다. 나는 영원보다 순간을, 기쁨보다 슬픔을 지지하였으나 그것은 대립 쌍이 아니었다.
무대에서 내려왔어 꽃을 내미네 빨간 장미 한 송이 참 예쁜 애구나 뒤에서 웃고 있는 남자 한때 무지 좋아했던 사람 목사가 되었다 하네 이주 노동자들 모이는 교회라지 하도 괴롭혀서 도망치더니 이렇게 되었구나 하하하 그가 웃네 감격적인 해후야 비록 내가 낭송한 시라는 게 성직자에게 들려주긴 참 뭐한 거였지만
우린 조금 걸었어 슬며시 그의 딸 손을 잡았네 뭐가 이리 작고 부드러울까 장갑을 빼려다 그만두네 노란 코트에 반짝거리는 머리띠 큰 눈동자는 내 눈을 닮았구나 이 애 엄마는 아마 모를 거야 근처 미술관까지 차가운 저녁 바람 속을 걸어가네 휴관이라 적혀있네 우리는 마주 보고 웃다가 헤어지려네 전화번호라도 물어볼까 그가 나를 위해 기도할 거라 하네
서로를 등지고 뛰어갔던 그 길에서 여기까지밖에 못 왔구나 서로 뜻밖의 사람이 되었어 넌 내 곁을 떠나 붉게 물든 침대보 같은 석양으로 걸어가네 다른 여자랑 잠자겠지 나는 쉬겠네 그림을 걸지 않은 작은 미술관처럼
-‘겨울휴관’ 전문
나의 시 중 ‘언령(言靈)이 있어’가 있다. 그 시는 “가수는 제가 불렀던 노래처럼 살다 사라지고/ 말이 씨앗이 되고// 내 말이 엉뚱하게 노래가 되었다면/ 고스란히 나를 싣고 간다면”으로 시작하는데, 실제로 시의 ‘언령’이 시인을 데려가기도 하는 것 같다. 첫 시집에 실린 시 ‘마지막 연인’에서 나는 썼다. “날 데려가줘, 오! 당신, 맙소사, 사랑해”라고. 그리고 근 십 년 후에 나는 뜻밖에 놀랍게도 그토록 가고 싶었던 도시, 베를린에서 한 학기 동안 생활하게 된다. 그 이듬해 2013년 크리스마스 즈음엔 스웨덴 스톡홀름의 국제 시 페스티벌에도 참가하여 시 낭독을 하였다. 아래는 낭송했던 작품들 중의 한 편으로 독일에서 썼던 시.
자두가 열렸다
자두나무니까
자두와 자두나무 사이에는 가느다란 꼭지가 있다
가장 연약하게
처음부터 가는 금을 그어놓고
두 개의 세계는 분리를 기다린다
이것이 최고의 완성이라는 듯이
난 말이지
정신적인 사랑, 이런 말 안 믿어
다행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카페 루이제에서 자두나무가 있는 정원까지 오는 동안
혼자 흐릿하게 떨리는 게 순수한 사랑이라고
나는 우스운 생각을 했다
시시각각 자두가 붉어지고 멀어지고
노을 때문에 가슴이 아픈 거다
최고의 선은 각자의 세계를 향해 가는 것
그러나 가끔 이상하게
멈춘 채 돌아보게 된다
자두나무는 자두를 열심히 사랑하여 익히고 떨어뜨리고
나는 사랑을 붉히고 보내야 한다
사람이니까
그리고 망설일 줄 아는 능력이 있다
-‘다소 이상한 사랑’ 전문
나는 나약하니까, 상처받기에 완전 유리한 심장이니까, 작은 경험도 대단한 속도로 강렬하게 오는 것 같다. 시인들은 대부분 울보에다 비판적이고 휘어지기 쉬우니까 시라는 척추를 하나 더 부여받은 장애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혹은 그러므로 나는 시를 쓴다. 너를 사랑한다는 말이다.
“태어나는 일도 죽는 일도 어떤 먼 곳에서 오는 인간에 대한 복수일지 모른다.(중략) 우리는 사라져 간다. 충실히 소모될 것이다. 너를 사랑해, 이 기막힌 재난과 함께”
-‘막’ 중에서⊙
詩人이 만난 詩人
“(제가) 이상해요? 원체 삐딱해요”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파견작가로 독일베를린자유대학에서 修學
⊙ 예술은 頂上에 올라가면 뛰어내리는 일밖에 없어
⊙ 詩만 빼고 모든 게 詩… 고정관념을 깨라
⊙ 작업에 필요한 건 종이, 담배, 커피 그리고 약간의 위스키와 소주
아무래도 고독하니까, 시를 쓰겠죠. 왜 다작(多作)하고 시집도 자주 내냐고 물으신 거, 맞죠?
알다시피 저는 진주, 그 작고 오래된 도시에 살잖아요. 거기서는 딱히 만날 문인(文人)도 없으니까 외톨이로 강의하고 책 많이 읽고 산책하고 담배 몇 개비 피우다가 외로워지면 맥주 한 캔을 따서 마시곤 해요. 술이 떨어지면 슬리퍼 끌고 나가 구멍가게에서 술을 사오죠. 괜히 슬프잖아요. 그러면 시 써요. 자꾸 쓰게 되는데, 정신적 중독 같아요. 아직까지 시 쓰는 게 좋아요. 괴로움과 즐거움을 동시에 느끼지만, 가장 강렬하게 몰입하거나 깨어 있는 순간이라고 할까? 그러니 타고난 천재성이죠! 아, 이 얘기 넣으면 안 돼요. 제 이미지 좋게 하려고 지금 인터뷰하는 건데. 좋은 이미지로 대중성을 노리면서. 이렇게 화장하고 옷 갈아입고 서울에 오면 밝고 건강하고 멀쩡한 인간으로 보이고 싶어요.
호호, 담배요? 첫 담배는 부산대학교 다닐 때, 숨소리문학회에서였어요. 엄청 잘생긴 선배가 신입생을 모집한다고 해서 들어갔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까 데모를 치열하게 하는 문학회였던 거예요. 선배 따라 시위현장에 가서 최루탄 맞은 어느 날인가, 다 같이 모여 있는데 선배 언니가 “야! 너 시 쓰고 문학한다고 하면 담배 정도는 피워야지, 지금 목 아프지? 최루탄 힘들지? 담배 한번 피워볼래?” 해서 그날 처음 피워봤는데 기침하다가 토할 뻔했죠. 요즘엔 목도 아프고 체력도 따라주지 않으니, 차차 끊어야죠. 담뱃값이 오른다고 하니까, 정치적인 소견으로 이제는 끊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주량이요? 다들 저한테 술 세게 생겼다고 하는데, 술은 많이 못해요. 소주 한 병 정도. 근데 술자리를 좋아해서 천천히 오래 마시는 편이에요. 마지막까지 남아 다들 차 태워 보내드려요. 예전에 실수를 많이 해서. 술 먹으면 선배들 멱살 잡고 그랬죠. 철이 없었죠. 간이 부었던 시절입니다.
교수 생각 접어, 詩나 쓰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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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남강 의암에서 유안진 선생님과 함께. |
근황은, 글쎄요. 아버지께서 위암 수술을 하셨는데, 폐색증(막힘 증상)이 있어서 어제도 병원 가서 자고 오늘 서울 온 거예요. 편찮으시니까 평소에 잘해드리지 못한 게 후회돼요. 오늘 이 인터뷰 마치면 방송 녹음하러 가야 하고요. 지난달에 다섯 번째 시집 《히스테리아》를 출간해 특강과 문학행사 초청이 몇 군데 있어요. 다음달 중순엔 교도소 가서 재소자들에게 문학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했고요. 살짝 떨리긴 해요. 하지만 범죄자와 예술가는 한 끗 차이 아닌가 싶어요. 음, 그리고 아까 좀 일찍 와서 이 동네 월세, 전세 알아봤어요. 홍대 근처에 작업실을 얻어 내년부터 서울살이 시작해 볼까 하거든요. 혹시 월세 적고 전망 좋은 방 없을까요?
맞아요. 저는 지금 진주에서 대학 강의하고 있어요.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시간강사 생활이 벌써 13년째예요. 저요? 박사학위도 받았고 사립대학 한 군데에는 서류심사 통과하고 최종면접까지 본 적 있어요. 면접관이 교육관이나 학교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 교수로서의 품위와 자질 등을 자꾸 물어오는 거예요. 그때 느꼈어요. 나는 훌륭한 교육자가 되기에는 준비도 마인드도 부족하구나. 이 제도에 편입해서 교수가 된다 한들 그게 무엇이 중요한가. 그걸 진짜로 원하는가. 그냥 좋은 시인이나 되자 싶었죠. 훌륭한 시인이 교수 되고 나서 시를 더 잘 쓰는 경우를 그다지 못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제 생각에 시인은 다소 불편하고 더러운 곳에 머물러야 하지 않나 싶어요. 시인의 지옥이 시의 낙원이라고 하잖아요. 시는 시인이 처한 시궁창처럼 어둡고 막막한 토양에서 생겨나 활짝 퍼지는 게 아닌가 싶어요. 아직 젊음이 남았으니 고생 좀 더할 수 있어요. 만약 서울에 작업실을 얻어 생활하게 되면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방학 때만 하던 강의를 보통 때도 할 수 있고 마포구청 교육원에서도 강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른 밥벌이가 될 만한 일 있으면 소개해 주실래요?
아! 그건 어쩌다가 운이 좋았던 거죠. 아니다, 재밌는 해프닝이랄까? 그 거창한 문학상에 그저 들러리 세워준 게 아닐까요? 저는 그야말로 변방의 시원찮은 시인인데…. 지금 하고 있는 《월간조선》 인터뷰 섭외 받았을 때도 깜짝 놀랐어요. 심사숙고해서 선택한 인터뷰이라고요? 믿기지 않지만 기분은 좋네요.
제가 답변을 잘하고 있나요? 그냥 편하게 솔직하게 말하죠, 뭐. 지난 2012년에 미당문학상 최종심 후보로 올랐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무척 설어요. 당시 베를린에 있었는데, 전화를 걸어온 《중앙일보》 기자한테 “진짜예요?” 여러 번 물었다니까요. 촌스러웠죠. 이번에 다시 미당문학상 최종심 후보로 선정되었지만 별다른 감흥도, 동요도 없어요. 소외된 지역 시인에게 좀 더 열심히 써봐라 자극하고 격려해 주는 차원으로 받아들여요. 그래도 이름이 신문에 나오면 나 같은 시골뜨기 작품도 누군가 읽는 계기가 되잖아요. 그런 면에서는 감사하지만 상을 받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으니까 좌절도 없어요.
예술에는 일등도 꼴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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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2006년 주최한 한강 문학나눔 큰잔치 행사에서(맨 왼쪽). |
작품에 물이 올랐다고요? 오히려 민감했던 감수성이 무뎌지지 않았는지 반성하는 중인 걸요. 등산은 올라가면 내려오는 것이지만 제가 생각하는 예술은 정상에 올라가면 뛰어내리는 거밖에 없거든요. 그러니 정상을 향해 굳이 빠득빠득 인맥(人脈), 지연(地緣), 혈연(血緣) 다 동원해서 최고의 뭐가 되려 오르고 싶지도 않고요. 그렇잖아요? 욕심을 내려놓고 천천히 즐기며 자유롭게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창작을 묵묵히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해보는 게 옳지 않을까요? 게다가 수천만 원 상금을 걸고 최고의 작품 한 편을 뽑는다는 건 누가 봐도 무리수가 있죠. 예술은 상품도 마라톤도 아닌데 일·이등이 어디 있고 꼴찌가 어디 있나요? 모두가 열광한다고 최고의 예술은 아니죠. 그런 건 없어요. 단지 취향의 차이라고 봐요.
201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파견작가로 선정돼 독일베를린자유대학에서 한 학기 동안 있었어요. 베를린 생활은 낭만적이거나 드라마틱하지 않았어요. 최정례 시인은 떠나는 제게 “베를린은 예술가들이 엄청 모이는 멋진 곳이니까 가서 연애도 하고 여행도 많이 다녀!”라고 조언했지만 제가 멍석 펴놓으면 움츠러드는 면이 있나 봐요. 특히 사실상 한국 정부가 파견한 작가로 갔기 때문에 행동거지를 자발적으로 조심하게 되더군요. 베를린자유대학 한국학과에 있는 연구실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고, 학생들 논문도 봐주고, 축제 때 연극 지도도 했어요. 특강도 몇 차례 하느라 학교, 도서관, 수퍼, 게스트하우스만 자전거로 왔다 갔다 했어요. 시간이 나면 벼룩시장에 가서 음반도 코트도 사고 무작정 버스 타고 종점까지 가보기도 했어요. 우연히 누드 호수에 닿아 발가벗고 혼자 헤엄친 경험은 기억에 남아요. 웃지 마세요. 거기서는 옷 입고 놀면 오히려 실례예요.
여행요? 암스테르담에 가서 대마초도 피워보고 싶었고 터키 쪽으로 가보고도 싶었는데,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없었어요. 독일 뮌스터에 사시는 허수경 시인 댁에 가서 며칠 지내다 온 걸로 충분히 행복했어요. 귀국을 앞둔 어느 날, 학과장이 저녁 만찬에 저를 초대했어요. 베를린 각계 인사들과 긴 만찬을 즐겼죠. “내가 만나본 파견 작가 중에 당신이 가장 성실하고 다정했다. 고마웠다”며 선물도 주시더군요. 음, 근데 다시 가게 되면 방탕하다 싶을 정도로 신나게 놀다 올 거예요. 은근 후회돼요.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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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파견작가로 선정돼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에서 공부도 하고 강의도 했다. |
최근에 《히스테리아》 나오고 나서 한 신문에 “한층 아름다워진 충격파로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에너지를 보여주며, 다른 한편에서는 감정의 긴장, 고조, 완결에 이르는 리듬이나 색조의 아름다운 변화가 원숙해진 필치로 펼쳐진다”, 또 다른 지면은 “김이듬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자주 미혼모, 창녀, 장애인, 이혼녀, 동성애자, 정신질환자 등 사회적 소수자들이 등장한다. 사회의 주류에 편승하지 못하고 중심에서 거듭 밀려난 이들이다. 김이듬은 이들에게로 뛰어들어 시를 쓴다”고, 종종 성적 도발성과 여성성을 강조한다는 평가가 많은데…. 대부분 시인이 그렇듯이 저도 시를 쓸 때는 독자(讀者)를 의식하지 않아요. 바깥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깨닫지도 못하죠. 시의 지평에는 규칙도 규범도 없고, 검열관도 경찰도 문지기도 없잖아요. 일종의 해방구죠. 그러니까 과감하게 때론 과격하게 쓰게 되나 봐요. 여자니까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던 문제들, 가령 섹스는 왜 할까, 노출증은 뭘까 혹은 서로 왜 질투하고 싸우고 죽일까, 끝과 시작은, 죽음과 삶은, 빈곤과 부는, 자아는, 무아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은 등 수많은 질문 속에서 흥분하기도 하고 사지(四肢)가 갈가리 찢어지는 느낌 한가운데서 쓰고 쓰면서 빨려들기도 해요. 시를 발표하고 나서 독자나 비평가들이 이런저런 말들을 하면 그때야 ‘내가 그렇게 썼나? 정말 그런가?’ 어리둥절해 해요.
그을린 영혼, 결핍자에게 마음 가
사회적 소수자요? 트라우마가 있느냐고요? 이번 시집에 장애우, 창녀, 미혼모, 무면허 침술사, 이민자, 빈민 등 그런 이가 많이 나오는데 내가 왜 썼는가를 생각해 보니까 제 내면에 죄의식이 있고 그 심연(深淵)에는 나 또한 그런 사람이라는 동류의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어렸을 때 주변에서 ‘결손가정 아이’라고 손가락질하더라고요. 그때 이미 저는 험한 세상에 버림받은 존재라는 자각과 슬픔을 알았어요.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유난히 저는 아픈 사람, 결핍을 지닌 사람에게 시선이 갔어요. 따돌려져 주변부로 내몰린 이들, 피 흘리는 친구, 그을린 영혼이라고 할까, 연민보다 깊은 마음이 먼저 가요. 너무 무거워지니까 가볍게 말하자면, 주류 대중음악보다 인디밴드 음악에 끌리고 일류(一流)대학 출신 부자(富者) 남자보다 대머리에 비만하거나 깡마른 가난한 예술가를 향해 가슴이 뛰어요.
이상해요? 원체 삐딱해요. 남성보다는 여성, 버림받은 여성이나 성적 소수자들에게도 관심이 많아요. 제 박사학위 논문이 ‘한국페미니즘 시 연구’인 것도 우연은 아니죠. 사회의 모순에 맞서 싸워가는 시인들을 흠모해요. 저는 그들처럼 투쟁하지는 못하지만 나름 ‘시적 혁명’을 해나가고 있어요. 그건 ‘시’라는 텍스트 내부의 혁명을 말하는 건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시의 틀을 깨는 작업 같은 거예요.
어렵다고요? 그러니까 시에 대한 사전적인 지식을, 그 기대치를 갱신해 보자는 거죠. 아름답다는 말에는 추미(醜美)가 포함되듯이, 언어에는 사투리와 비속어가 존재하듯이 위안과 감동, 깨달음을 주는 시 외에도 읽는 이를 불편하게 하거나 놀라게 만드는 시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뭐? 이게 시야?’ 피식 웃거나 이해가 안 되어서 쩔쩔 매다 던져버리거나 소설인지 시인지 일기인지 낙서인지 헷갈리는 시도 있어야 해요. 시가 천편일률일 수는 없어요. 독자의 구미에 맞출 수도 없고요. 우리 모두는 다 예술가예요. 시의 씨앗을 갖고 태어나죠. 그것을 발현하느냐 마느냐는 다른 문제지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시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라는 거예요. 문득 칠레 시인 니카노르 파라의 말이 떠오르네요. “시만 빼고 모든 게 시”라는 말.
평화·고독·가난한 즐거움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나 바람이라뇨? 당황스럽습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간 줄 몰랐어요. 귀중한 인터뷰에 불러주시고 사려(思慮) 깊은 질문 준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인적인 바람은 별로 없어요. 지금 이 순간에 든 기분은 사랑한 바 없는 세상으로부터 분에 넘치는 관심과 애정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고, 바람이라면 시를 오래 쓸 수 있는 건강과 환경 정도죠.
윌리엄 포크너의 말을 빌려 끝인사를 할까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그가 먼저 해버렸거든요. “예술가가 필요로 하는 유일한 환경은 평화, 고독, 너무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즐거움뿐입니다. 나쁜 환경이란 혈압이 올라가는 상황, 즉 좌절하고 분노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 상황이겠지요. 제 작업에 필요한 것은 종이, 담배, 음식과 약간의 위스키뿐입니다.” 여기에 소주하고 커피 추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