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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2020. 3. 24. 7:52 AM
거리 : 16.9 km
소요 시간 : 9h 38m 11s 이동 시간 : 7h 24m 44s 휴식 시간 : 2h 13m 27s
평균 속도 : 2.3 km/h 총 획득고도 : 935 m 최고점 : 363 m
난이도 : 힘듦
70대 이후의 실버가 한양도성길 제1구간(북악산길)과 제4구간 (안왕산길)을 한 번에 걸을 경우에는
시계반대방향 즉 혜화문에서 숭례 문으로 걷는 것이 쉽다. 나의 경우 난이도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느낌이 었다
-작성자 dooldadooly, 출처 램블러
한양도성길제1구간 백악산길
한성대역5번출구-혜화문-(창경궁로 35다길)-혜성교회-경신중.고등학교- 서울과학교-서울국제고등학교-
와룡 공원(말바위)-말바위안내소-숙정문- 북악산(백악산)-창의문
한양도성길 제4구간 인왕산길
창의문( 윤동주문학관)-청운공원-치마 바위(기찻길)-인왕산삿갓-홍란파가옥(월암공원)-돈의문박물관-
경교장(강북 삼성병원)-정동길-정동공원(구러시아공사관)-이화여고-정동극장-정동교회 -덕수궁길-서울시립미술관-배제학당
역사박물관-러시아대사관-순화어린이 공원-평안교회-순화타워-신한은행-남대문지하도-남대문시장-숭례문
혜화문 惠化門: 한양도성길 1구간(백악산길)의 도착지이나 오늘은 출발지로 삼다. 북악산-인왕산-숭례문코스가 좀 덜 가파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397년(태조 5)에 도성을 에워싸는 성곽을 축조할 때 4대문과 4소문이 설치했는데, 동문과 북문 사이에 있어서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한다.
당시 북대문은 일반인 통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혜화문은 양주·포천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출입구 구실을 하였다.
원래는 홍화문(弘化門)이었는데 1483년(성종)에 새로 창건한 창경궁 동문을 홍화라고 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1511년(중종)에 혜화로 고쳤다.
혜성장로교회: 북악산 중턱의 난민들을 위하여 설립된 교회.
1960년대. 고 박찬목목사님이 섬겼던 전통이 있는 교회. 그 분의 설교를 들으며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엊그제 같다.
후임자가 대안학교를 비롯해 지역사회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어서 감사하다.
역시 코로나 때문에 본당은 폐쇄하여 1층 휴게실에서 잠간 머물며 충전과 휴식의 시간을 갖다.
경신중. 고등학교 儆新學校Kyungshin Middle School,
1885년.미국북장로교회 원두우(H.G.Underwood) 선교사가 정동 32번지에 설립하고 언더우드 학당이라고 불렀다.
1905년 경신학교로 교명을 개명. 1941년 3월 정릉동으로 이전, 1951년 8월 중·고 분리.
1955년 4월 현재 위치로 이전. 교훈은 '기독적 인격'이며, 교목은 느티나무, 교화는 장미이다.
말바위쉼터: 국제고등학교. 말바위가 어디 있난는가 살펴보다. 이건가? 아닌것 같다. 말바위로 올라가다 잠간 쉬는 곳인 것 같다.
좌편에 과학고등학교, 국제학교가 연이어 있어서 거대한 교육 단지같이 보였다.
와룡공원(臥龍公園); 화장실 관리가 잘되고 있다는 느낌.
와룡공원(臥龍公園])에서 본 성외곽길
취병翠屛: 비취색 푸른 병풍; 덩굴성 식물 가지를 틀어 올려 병풍모양으로 만든 울타리로 한국 전통 정원의 한 형태. 궁궐과 상류층 저택에 설피
밖에서 내부를 직접 보는 것을 방지하는 가림막 역할과 공간을 분할하는 담의 기능을 하면서 경관을 조성하는 기능을 한다.
오르막 계단, 우드데크라 밟는 느낌이 좋다.발은 무겁고 숨도차서 몇번이나 쉬고야 올랐다.
실버임을 확실하게 자각하게 한다.
계단을 올라 삼청공원 윗부분 전망: 좌로부터 북악산. 북악팔각정. 삼청각. 보현봉
우편 기슭의 유명한 삼청각. 북악 팔각정으로 가는 사람도 적지 않은듯
다시 계단을 올라서 본 바위와 소나무를 보며 숨고르기.
인왕산으로 가는 성곽길: 문득 내가 북악산을 올라서 저기까지 갈 수 있을까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들다.
말바위; 고관들이 말타고 올라와서 놀았다고 말바위라는 설과 북악산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좌청룡의 꼬리(末)에 해당하는 바위라한다는 설.
그러나 모양이 말처럼 보여서 말바위라고 했을 것 같다. 좌편으로 내려오지 말고 직진해야 하는데.
그 방향에 앉아있는 커풀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하다가 삼청공원 방향 내리막길을 들어서 한바퀴 돌게되다. 소위 알바를 하다.
말바위에서 삼청공원 방향으로 알바를 하고 되돌아가다가 숨고르기를 하다.
"알바"에 대한 나의 정의는 "알고도 바보노릇하다"
말바위안내소: 통행증을 받은 후 검색대 통과. 직원들(?)이 아주아주 친절하다
숙정문(肅靖門):성안에서. 성곽의 사대문(四大門) 가운데 하나. 1396년(태조 5) 9월 삼대문과 사소문(四小門)이 준공될 때 함께 세워졌다.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인데 북쪽에 있어 북대문·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숙정문: 성밖에서.중계동에서 온 두분과 한동안 동행하였는데 한 분이 강권하여서 인증샷을 찍다.
평소 도보여행할 때는 내 인물사진은 찍지 않는데 호의가 감사해하여 오늘은 예외로하다. 잘했다.
1.21 소나무 혹은 총탄소나무: 1968년 1월21일 북한특수부대 124군 소속 공작원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국군복장을 하고 기관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침투.자하문(창의문)에서 경찰이 불심검문을하면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도주하던 그들과 벌어진 총격전 자국이 남아있는 소나무다. 당시 국군과 시민 32명 미군 4명 사망. 52명이 부상당했다.
공작원도 28명은 사살 두명은 북으로 도주 그리고 나와 동갑인 김신조씨는 귀순한 후에 기독교인이 되고 목사가 되었다.
1.21 사태 후 군목무 기간이 연장되고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어 말년 병장들과 입대하는 청년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나는 그전에 의병제대하여서 해당되지 않았다. 그후 도민증과 시민증 대신 주민등록증이 생겼다.
김신조씨와는 한두번 대면하였으나 신앙 성격이 좀 달라서 더이상 만나지 않게 되었다.
북악산(北岳山)=백악산(白岳山)342.5m. 인왕산(仁王山)·낙산(駱山)·남산 등과 더불어 서울 분지를 둘러싸고 있다.
1394년(태조 4년)에 아래에 경복궁을 축성하였고, 광복후 경무대(景武臺)에 이어 청와대가 이산아래 있다.
북악산 정상 바위: 바위마다 젊은이들이 올라가 인증샷을 찍고 있어 피하기가 한쪽으로 비켜나다.
북악산 오르는 994계단: 이 오르막을 피하기 위해 역방향 내리막길을 선택했다.
무릅이 부실한 실버에게는 내려가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도 올라오는 길이 훨씬 힘들것 같아서 나의 선택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다.
그러나 한번 올라왔더라면 더 강한 추억이 되었겠는데 하는 생각도 들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내려 놓는 것이 힘들다.
창의문(彰義門): 인의예지신 중에 의(義)에 해당하는 문: 이곳에서 통행허가증을 반납하다.
사소문(四小門)의 하나. 흔히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불린다.
1623년 인조반정 때 반군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반정에 성공하다.
최규식崔圭植경무관 동상; 종로경찰서 서장.
1968년 1월 21일 국군으로 위장한 북한 특수부대인 124군 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을 검문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총격전으로 순직하다.
사후 경무관으로 특진,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한양도성길 제4구간(인왕산길) 종착지점:좌편 윤동주문학관; 최규식경무관 동상에서 건널목을 건너면 우편에 있다.
오늘 내게는 4구간 출발지다. 역시 코로나19 때문에 폐쇄.
한양도성길 제4구간(인왕산길) 안내지도
청운공원(靑雲公園); 6.25 이후에 들어서기 시작한 무허가 판자촌이 있던 곳이다.
바로 뒷편에 스승이신 차남진박사님이 "삼애 교회(하나님사랑. 사람사랑.자연사람)"를 설립하셔서 몇번 왔었다.
이번에 꼭 들릴 계획이었는데 깜빡하고 지나쳤다. 허참이다.
길고 급한 오르막길; 계단 높이가 내 보폭과 맞지 않아서 내려갈 때는 충격이 크다.
소위 숏다리의 비애를 느끼는 유일한 경우다.
뾰족한 산이 보현산인가? 난 산에 대하여는 무식하다.
연리지: 한양도성 부부소나무
연리지(連理枝) 이을 연(連) : 이치 리(理) 나뭇가지 지(枝) .
뿌리가 다른 나뭇가지가 서로 엉켜 마치 한나무처럼 자라는 현상이다.
희귀하여서 남녀 사이 혹은 부부애가 좋은 것과 효성이 지극한 부모와 자식을 비유하기도 하였다
삼애교회 방향인데 확실하지 않다. 이제 내렸갔다 오기에는 너무 멀리왔다.
인왕산이 바로 눈 위다. 몇 십년만인가? 신학생 시절 교회 학생들을 데리고 왔다가 내가 제일 힘들었던 기억.
산을 잘타는 여대생들과 단체 데으트로 왔다가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고 몸살을 했던 추억이 생각나서 웃었다.
지나간 내 청춘은 다 아름답다.
50년 전에는 이런 발딛는 홈도 잡을 줄도 없었는데. 팔과 다리 힘이 약한 70대에게는 힘들다.
종로(서대문)에서 올라온다면 3배나 힘들 것이며 위험할 것이다.
그러므로 팔다리의 힘이 약하다고 느끼는 실버라면 창의문에서 오를 것을 권한다.
기차바위로 가는 길: 시간도 없었으나 그보다는 겁났던 기억 때문에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다.
그 옛날에는 등산용 신발도. 스틱도, 옷도, 물통도 없이 올라왔었다. 무식하게 용감하기만 했다.
옆의 60대 초반의 두자매와 서로 위험을 무릎쓰고 갈 필요는 없다고 합의(?)하고 사진만 찍기로 하다.
또 긴 계단 그러나 마지막인 것 같다. 엣날에 이런 인공계단이 있어다면 뛰어 올랐을까?
인왕산仁王山( 338.2m)정상: 젊은 커플과 서로 찍어주기
언제 또 올라올지 몰라서. 어쩌면 마지막이겠지.아니야 사람일 모르지.
인왕산 정상 바위; 인증샷을 찍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서 이렇게 옆으로 비켜서다.
북악산 방향 길을 돌아보다. 유달리 뾰족한 봉우리가 보현산인 것 같다.
매바위에서 내려가야 할 길을 내려다보다.
매바위: 인기가 자리잡은 사람이 많아서 올라갈 틈이 없다.
내려온 길을 올려다보니 몇사람이 기다시피 오른다.
이후에도 이런 길이 또 있어서 팔다리 힘이 약하거나 균형감각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다.
그러면서도 한번 도전해볼까하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다.
그래도 가능하면 시계방행 곧 인왕산 - 북악산의 급 오르막길을 걸어야 '자랑질'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범바위로 오르다. 여자들이 절반이다. 걷는데는 남녀평등이다.
범바위에서
뒤돌아보다. 좌편이 범바위. 우편이 인왕산
인왕산 등반 입구: 이제 평지가 시작되다. 서대문방향과 숭레문방향 중에 숭례문 방향 서울성곽길로.
벛꽃이 활짝 피었다.
올라가는 성곽길이 시작하는 지점
월암근린공원
홍난파(洪蘭坡)가옥; 종로구 홍파동의 근대적 건축물.
1930년 독일 선교사가 지은 붉은색 벽돌 벽체에 기와를 얹은 서양식 건물
봉선화,고향의 봄의 작곡자 홍난파(1898~1941)가 말년 6년을 보낸 집이다.
독립운동가로서의 생애보다는 말년의 친일 행위를 부각하여 그와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것을 독하게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당시 상황에서 그가 겪었을 갈등과 고민을 생각하면서 동정한다. 그리고 내게 익숙한 그의 음악을 여전히 좋아한다.
서울자유시민대학본부와 서울시교육청 앞 송월길
돈의문(敦義)박물관마을: 삼일운동 기념벽화와 독립운동가의 집
돈의문마을의 돈의문구락부;
2천년대 초반까지 새문안동네로 불린 곳을 박원순시장 시절 수백억을 투자하여 마을 단위 역사문화공간으로 조성했다.
부실공사를 하여 큰 보수공사를 했다고 들었는데 요즘은 어떤지 모른다.
성북삼성병원내의 경교장(京橋莊);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백범(百凡) 김구가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하였던 저택이다.
우남(雩南) 이승만의 이화장(梨花莊),우사(尤史) 김규식의 삼청장(三淸莊)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 건국 활동의 중심을 이룬 대 요람이었다.
단아한 2층 양관으로 전면 분할의 비례가 아름답다. 김구선생이 반탁·건국·통일 운동을 주도할 때는 '서대문 경교장'이라고 불렸고 민족진영 인사들의 집결처로 이용되었다. 1949년 6월 26일 집무실에서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했다.
부모님과 함께 그 장례행열을 따라가던 기억이 왠지 생생하다.
부모님에게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름이었기 대문이다.
여한중화기독교한성교회. 여한중화기독교연합회;
중국(중공)과 외교관계를 체결하기 전에는 장개석총통의 대만을 중화민국으로 불렀다.
정동 캐나다대사관 앞 보호수 회화(槐花괴화)나무: 키 17m. 둘레 516cm. 1976년 지정당시 520세(2020년 현재 564세)
2003년 캐나다 대사관 신축 당시 상태가 좋지 않아다. 캐나다 대사관이 뿌리의 위치를 감안해서
건축 디자인을 수정하고, 지지대를 강화하고, 우물을 확장하는 등의 노력을 하여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다고 한다.
홰나무를 뜻하는 한자인 '槐'(괴)자는 나무 목과 귀신 혼을 합쳐서 만든 글자다.
잡귀를 물리치는 나무로 알려져서 궁궐의 마당이나 출입구 또한 서원이나 향교 등 학생들이 공부하는 학당에도 심었다.
그래서 창경궁을 비롯한 궁궐과 마을 어귀에 오래된 회화나무를 많이 볼 수 있다.
정동공원: 공사관 사진전과 둘러친 펜스를 보고 구러시아공사관 보수공사를 하는 것으로 알고 지나쳤다.
'을씨년스럽다'의 기원을 아시나요?
아관파천 당시(?)의 러시아공사관의 풍경
이화여고(梨花女子高等學校) 교문(동문); 덕수궁 돌담길을 돌때에 늘 들렸던 곳인데 오늘은 코로나 때문에 바라다보고 지나다.
1886년 5월 31일 여선교사 스크랜턴이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으로 설립.
1887년 10월 22일 고종황제가 '이화학당'이란 교명을 하사. 1910년 고등과로부터 대학과를 신설분리,
분리된 이화전문학교는 신촌으로 이전하여 이화여자대학교가 되다.
1951년 6·25전쟁으로 부산 영도로 갔다가 1953년 환도하여 복교하고 자매학교 서울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1974년 독립 투사인 유관순 동문을 추모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유관순 기념관을 건립했다. 교훈은 자유 사랑 평화
이화여고와 정동교회 중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사였던 박에스더(본명은 김점동)이 봉사하였던 장소다.
에스더는 세례명이고 남편 박유산의 성을 따른 것이다.
아버지가 감리교 초대 선교사였던 아펜젤러의 집에 들어가 일을 하게 되면서 서구 문물과 인연을 맺었다.
감리교 선교사였던 스크랜턴 부인이 이화학당을 설립하고 학생을 모집하자 아버지의 후원으로 입학했다.
언니는 정신여학교 교사였고 동생은 세브란스 간호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교육열이 높은 집안이었다.
이화학당 시절 영어 실력이 뛰어나 교사이자 의사인 셔우드(Rosetta Sherwood)의 통역을 맡았다.
그의 주선으로 미국에서 의학 공부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부모의 권유로 병원 동료 박유산과 결혼해서 함께 떠나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현 존스홉킨스)에 입학했다.
남편은 농장에서 일을 해가며 후원하다가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고생 끝에 의대를 졸업하고 한국 최초로 양의사 자격을 얻게 되었다.
한국 최초의 양의로 알려진 서재필이 미국에서 의대를 졸업한 지 7년만의 일이었다.
귀국하여 여성전용병원인 보구여관(동대문부인병원의 전신)에서 진료를 했다.
연간 수천 명의 환자를 휴일도 없이 돌보고 평안도, 황해도 지역으로 가마나 당나귀를 타고 진료하러 다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진료뿐 아니라 영어교재를 한글로 번역하고 성경과 위생교육도 해가며 과중한 업무를 했다.
박에스더는 안타깝게도 삼십 대의 이른 나이에 폐결핵과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참으로 존경스럽고 위대한 선구자이다. 좀더 눈에 띄는 시설을 할 수는 없었을까?
정동극장; 한국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원각사의 복원 이념 아래 1995년에 건립.
전통예술의 발전과 보급, 생활 속의 문화운동, 청소년 문화의 육성을 위해 다양한 공연예술 프로그램을 개발보급,
주변의 다른 문화공간과 함께 도심의 문화관광 명소가 되었다.
덕수궁돌담길(가을단풍길); 이제는 영국대사관(?)의 배려로 일주를 할 수 있다.
일주를 하려고 하다가 문득 다음 주에 아내와 함께 추억을 새기며 걷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나서 되돌아오다.
덕수궁 대한문(Deoksugung Daehanmun Gate , 德壽宮大漢門)까지 가려다가 돌아서다.
서울시립미술관: 역시 코로나로 문을 닫았다.
정동제일교회 벧엘에배당;
1885년 우리나라 교육계와 기독교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미국감리교 아펜젤러와 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가 인천을 통해 입국하였다.
이들의 주 활동무대가 정동 지역이었다. 언더우드는 1887년 정동 13번지에 위치한 한옥 사랑채에서 시작하여 1910년 신문로1가에 새문안교회,
그리고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전신)를 세웠다.
아펜젤러는 1885년에 한옥을 구입한 후 방을 나누어 남녀를 구분해 전도하면서 베델(Bethel 배재) 예배당이라 하였다.
1887년 정동 37번지 일대에 배재학당을 세우고 지금의 정동교회 자리에 있던 한옥을 개조해 최초의 감리교 교회를 설립하다.
신도가 200명을 넘어 교회당을 신축하였는데 지금의 정동교회이다.
일본인이 설계한 이 건물은 5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연면적 110평 규모로 1897년 10월에 완공,
1926년 175평으로 증축하였는데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빅토리아식 예배당이다. 붉은 벽돌을 사용한 단층 건물로 중후한 외관을 간직하고 있다.
남쪽 모퉁이에 솟은 사각의 종탑이 평탑인 것이 건물의 특색이다. 창문은 뾰족아치(pointed arch)에 나뭇가지무늬를 넣어 장식하였다.
천장은 평천장으로 처리하였고 기둥은 장식 없는 간결한 모습이다. 1987년 3월 화재로 건물 내부가 훼손되었으나 원형대로 보수하였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우편 뒤가 배재중.고등학교의 현대식 건물;
아펜셀라 선교사는1858년 2월 6일 펜실베니아주에서 출생. 27세에 조선에 와서 17년 동안 복음과 사랑을 전하다가 44세의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했다. 1902년 어느 날 서울 근교의 무치내 교회로 예배를 인도하기 가다가. 일본인 노동자에게서 구타 당하여 병원으로 실려와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완전히 치료도 받지 못한채,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비서와 정신학교 여학생 하나를 데리고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목포로 가다가 짙은 안개 속에서 일본 상선과 충돌하였다. 수영에 능한 아펜셀라는 살 수 있었으나 비서와 여학생을 구해내려다가 목숨을 잃었다.
소식이 감옥에 있던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전해지자 모두 통곡을 하면서 슬퍼하였다.
특히 평소에 그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이승만 박사는 음식을 먹지 않고 하루종일 땅을 치면서 통곡을 했다고 한다
참으로 고맙고, 존경스럽고 부러운 삶을 산 진정한 위인이다.
배제어린이공원길
이화여고와 주한러시아대사관 가는 입구 페쇄
도회지에서 이 표식을 보고 길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평안교회:1951년 부산에서 피난민들(특히 평안도)이 설립한 교회;
초대 김윤찬목사님은 설교가와 교회 행정가로서 유명하였다. 학생 시절 이런저런 사연으로 여러번 방문하였다.
1967년 장로회총회가 이곳에서 열렸을 때 깊은 상처를 받기도 한 추억의 장소다.
교회 수리와 코로나 때문에 들어갈 수 없어서 유감스러웠다.
순청(巡廳)터; 야간 순찰을 맡아보던 조선시대의 관아를 의미한다. 오후 10시경부터 오전 4시경까지 순찰하였다.
조선 초기에 설치 1465년 세조 때 좌,우순청을 두었고 1894년 갑오개혁 때 내무아문(內務俄門) 산하 경무청 소관이 되다.
강희맹(姜希孟)집터: 순화공원; 조선 세종-단종-세조 삼대에 벼슬을 하였던 명신 중의한 사람
순화어린이공원의 어린이스러운 조각품들; 6.25 당시 이 부근에 살았기에 추억이 많은 지역이다
9.28 수복 당시 이근처에 B-29가 폭격을 하여 작은 공장과 집 몇채가 무너져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물건을 줍던 기억이 나다.
순화동(巡和洞) 세종대로7길; 숭례문방향으로;
국민학교 2학년 때, 우편 순화타워. 에스원. 사이의 적산가옥에서 6.25를 맞이하였다.
이길을 통하여 태평국민학교에 다녔던 추억의 길이다.
2층이 제일 높았던 당시와 비교하면 천지개벽이 일어난 것이다.
남대문국민학교 옛터:
신한은행 자리의 남대문국민학교와 남대문지하도를 지나 남대문시장에서 노점을 하던 어머니를 찾아가 밥을 사먹던 기억이 새롭다
. 6.25 당시 이 남대문국민학교에 인민군이 주둔하였다. 동네 아이들이 구경하러 가면 무슨 과자를 주면서 인민군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남대문지하도가 그 잦은 도시정비사업에서도 살아남았다는 게 신기하다.그러나 내부에는 노숙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벌써부터 볼박스 집을 세우고 잘 준비를 하고 있다. 동영상 생략. 이들은 누구인가. 무슨 사연이 있어 노숙을 하는가. 왜 벌써 자리를 잡고 눕는가.
왜, 서울특별시는 무상으로 지급하는 그많은 돈을 이 사람들에게는 쓰지 않는가. 아니면 포기한 것인가? 갑자기 답답하고 우울해지다.
남대문시장: 상인들은 그래도 열심히 산다. 그러나 한산하다
그 옛날처럼 골목식당으로 들어가다.
싸지만 푸짐하고 맛있다. 이골목 식당은 모두 다 맛집이다.
난 전통시장에서는 전통에 따라서 현금만 쓴다.
1904년의 숭례문: 대문안으로 전차가 통과한다.
6.25전쟁 당시 파손된 숭례문; 우편에 보이는 건물이 전차표 파는 곳이었을 것이다.
6.25 이전에는 전차아저씨들에게 "아저씨, 아저씨 태워주세요"하면 공짜로 태워주었다. 그래서 노량진과 뚝섬까지 가서 물놀이하고 왔다.
이곳으로 국군이 후퇴하고 인민군이 들어오고 또한 인민국이 후퇴하고 국군이 들어오던 광경을 보았다.
심지어 5.16 때 군인들이 들어오는 것도 보았다. 옛날 이야기다. 문득 그 국군아저씨와 인민군 아저씨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하는 생각이 들다.
어린 내게는 그 누구도 무섭게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양도성길2구간(낙산길)-3구간(남산길)을 걸을 때는 밤이 다 되어서 도착했다. 그래서 가까이 들어가지 못했다.
오늘 은근히 걱정을 하였다. 2-3코스는 무난하게 걸었는데, 북악산과 인왕산을 오르내리는 1구간과 4구간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대학생 때에도 인왕산과 북악산은 힘들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 집을 나서서 한성대역에서 오전 8시 이전에 출발하였다.
인왕산을 내려오면서 멋진 황혼을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끝나서 황혼은 볼 수 없었다.
시계방향으로 걸었다면 더 힘들었겠으나 북악산에서 황혼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만족스럽고 감사한 하루였다.
언제 하루 한구간만 느릿느릿 걸으면서 황혼을 보아야겠다. 그런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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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주 다니는 길인데 상세한 설명과 같이보니 제가 너무 무관심하게 다닌거같네요
올려주신 내용 보면서 조만간 다시 걸어보겠습니다~^^
그렇군요. 제게는 고향길과 같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