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작가의 말마따나 시는 세상을 썩지 않게 하는 최상
의 방부제다. 시는 무통분만이 불가능한 예술이다.
설망어검(舌芒於劍), 혀는 칼보다 날카로운 법인데 정제되지
않은 군말만 주워섬긴 게 아닌가, 적이 두렵기만 하다.
달빛 서정…. 형광등 불빛 아래 글쓰기 공작을 하고 있지
만 결코 달빛 서정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이 배
를 띄우지만, 때로는 물이 배를 뒤집기도 한다는 사실을 잊
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미 나는 워커홀릭(workaholic)이 되어 있는 것일까?
글쎄.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간단없이, 정형시 거
룻배를 저어가기를 희망하고 희망한다. 나는 아직도 진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숙맥(菽麥)이 아닌가 싶다.
- ‘시인의 말’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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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기러기 필법(筆法)/ 윤금초
발목 스릇 번져나는 해질 무렵 평사낙안
시계 밖을 가로지른 큰기러기 어린진이
빈 강에 제 몸피만큼 갈필 긋고 날아간다.
허공은 아무래도 쥐수염 붓 관념산수다.
색 바랜 햇무리는 선염법을 기다리고
어머나! 뉘 오목가슴 마냥 젖네, 농담으로.
곡필 아닌 직필로나 허허벌판 헤매 돌다
홀연 머문 자리에도 깃털 뽑아 먹물 적시고*
서늘한 붓끝 세운다, 죽지 펼친 저 골법(骨法).
*큰기러기는 공중을 날 때 사람인(人)자 모양 어린진을 친다. 대오 가운데 맨
우두머리가 항상 앞장서서 리더 역할을 한다. 큰기러기는 잠시 머물다 간
자리에도 깃털을 뽑아 떨어뜨려 두는 습성이 있다. 이른바 ‘유묵(遺墨)’처럼
제 다녀간 흔적을 남겨 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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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너울, 강너울 14/ 윤금초
으악새 길 닿게 욱어 칼질하는 뚝방 너머
자고 이는 마파람결 물너울 되우 되작이고
벼린 칼 저 샛대 숲은, 그예 엉켜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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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만돌린/ 윤금초
느닷없는 작달비가
만돌린을
타고 있다.
뼈마디
꺽 꺽 마치는
여름 나절
젖은 탄주,
작달비
만돌린 뜯고
속사람
뼈울음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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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뿔싸!/ 윤금초
눈도 코도 뜰 새 없이 몰아치는 쿠데타다.
무가내 서울 점령한 게릴라 같은 눈보라,
발 동동 해토머리에 넉장거리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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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개울물/ 윤금초
이제 더는 맵짠 바람 하 견디기 버거워서
눈꽃송이 숭어리째 뚝 뚝 꺾여 떨어지고
떨어져 반짝이는 꽃, 종소리 맑은 울음이라니.
살얼음 밑 개울물은 나직나직 종알거리고
서산 너머 잰걸음 치는 저어새 저 날갯짓
해 설핏 종알거리는, 개울물 내 입술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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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 산지기/ 윤금초
곰솔나무 푸른 바늘 이슬이나 꿰는 걸까.
새경 한 푼 받지 못한 선돌바위 산지기가
밤새껏 반쯤 문드러진 달빛 하냥 줍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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