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10월 15일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Teresa) 신분: 설립자, 신비가, 교회학자 활동지역: 아빌라(Avila) 활동연도: 1515-1582년 같은이름: 대 데레사, 대데레사, 테레사, 테레시아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Teresia)
에스파냐 카스티야(Castilla)의 아빌라에서 태어난 성녀 테레사(Teresia, 또는 데레사)는 알론소 산체스 데 세페다와 그의 두 번째 부인 베아트릭스 다빌라 이 아우마다의 딸이다. 성녀 테레사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녀들로부터 교육을 받았으나, 건강이 나쁘다는 이유로 1532년에 아빌라에 있던 수녀원을 떠나야 했다. 오랫동안 수도생활을 갈망해오던 그녀는 1536년에 아빌라에서 카르멜 수녀가 되어 다음 해에 서약하였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1538년에 수녀원을 떠났다가 1540년에 다시 들어갔다.
그녀는 1555년과 1556년 사이에 환시를 보았고 신비스런 음성을 들었는데, 알칸타라(Alcantara)의 성 베드로(Petrus, 10월 19일) 신부의 영적 지도를 받을 때까지는 불안에 떨어야 했다. 성 베드로 신부는 그 모든 환시가 진실한 것임을 그녀에게 확신시켰다.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는 그 당시의 다소 느긋한 수도생활보다 더욱 엄격한 봉쇄 생활을 원하는 수녀들을 위하여 아빌라에 성 요셉 수도원을 세웠다(1562년).
1567년 카르멜의 총장인 루베오 신부는 성 요셉 수도원과 같이 엄격한 규칙을 따르는 다른 수도원을 세우도록 그녀에게 허락하였으므로, 메디노 델 캄포에 제2의 수도원을 세울 때 십자가의 성 요한(Joannes a Cruce, 12월 14일)이란 젊은 수도자를 만났으며, 1568년에는 두루엘로에 남자를 위한 최초의 수도원을 세웠다(이것이 최초의 개혁 카르멜 수도원이다).
성녀 테레사는 에스파냐 전역을 다니면서 카르멜의 개혁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1575년의 총회는 그녀의 개혁 그룹을 제한하였다. 1580년까지 카르멜 내부의 보수파와 개혁파간의 투쟁은 격심하였다. 이윽고 그레고리우스 13세(Gregorius XIII)는 맨발의 개혁파를 독립 관구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테레사는 수많은 편지와 책을 지었는데, 이 모두는 영성 문학의 고전이 되어 널리 읽혀지고 있다. "자서전"(1565), "완덕의 길"(1573), "영혼의 성"(1577) 등이 특히 유명하다.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돋보이는 신비가 중의 한 명인 성녀 테레사는 지적이고 빈틈없는 사람이었으며, 매력적이나 깊은 영성을 지녔으므로 차원 높은 관상생활과 더불어 수준 높은 활동생활을 성공적으로 조화시켰던 위대한 성녀이다.
그녀는 에스파냐의 알바 데 토르메스에서 선종하였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에 의하여 1622년에 시성되었다. 그리고 1970년에는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하여 교회의 여성으로는 최초로 교회학자로 선언되었다. 그녀는 '예수의 성녀 테레사'로 불린다.
성녀 데레사와 창(화살) [성화해설: 권용준 안토니오]
그녀는 이즈음의 수도원이 너무 세속화하여 세속적인 향락에 도취되기 쉬운 곳에 있음을 느끼고는 교회와 수도원의 개혁을 절실하게 원한다. 그러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그 쇼크로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결국 혼수상태에서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사람들은 병자성사를 청하고 그녀의 무덤을 준비한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회복한 그녀는 3년 동안을 온몸이 마비되는 고통 속에서 살았다. 이런 시련은 오히려 영적으로 도움이 되어 그녀는 4년 간 오로지 기도에만 매달리게 된다. 그녀는 기도 중에 하느님의 빛을 체험하는 등 신비한 체험을 많이 한다. 특히 그녀의 자서전에는 1560년 4월의 어느 날 신비한 체험이 기록되어 있다.
“나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한 천사를 보았다. 아주 작고 잘생긴 귀여운 천사로, 불붙은 것 같은 그의 얼굴이 지체 높은 신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끝에 불이 붙은 긴 황금 쇠창이 들려있었다. 그 창은 내 몸을 아주 여러 번 아주 깊숙이 관통했는데, 그때마다 내 몸은 온통 하느님에 대한 위대한 사랑으로 불붙었다. 그 고통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내 입에서는 신음소리가 절로 나오고, 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이 가져다주는 달콤함이 지극해 이 고통이 완화되지 않기를 얼마나 바랐는가! 이 고통은 결코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다. 이는 하느님과 내 영혼이 나눈 지극히 감미로운 사랑이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1515년 스페인의 아빌라에서 태어났다. 가르멜 수도회에 들어가, 완덕의 길에 크게 정진하여, 신비적 계시를 받는 은총을 누렸다. 수도회 개혁을 추진하여, 수많은 곤경에 부딪쳤으나, 불굴의 용기로 이를 극복하였다. 드높은 가르침과 자신의 체험을 담은 훌륭한 저서들을 남겼다. 1582년 알바에서 세상을 떠났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의 저서에서 (Opusc., De libro vitae., cap., 22,6-7. 14)
언제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간직하도록 합시다
그렇게도 좋은 벗이고 그렇게도 훌륭한 지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곁에 계신다면 무슨 일도 견디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분은 늘 도와주시고 견고케 해주십니다. 필요할 때 돌보아 주시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그분은 참되시고 성실하신 벗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많은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란다면, 하느님의 엄위께서는 당신 마음에 드는 분이라고 말씀하신 이 거룩한 인성의 손을 빌어 그것을 주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나는 명백히 보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자주자주 체험했습니다. 주님께서도 나에게 그것을 말씀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엄위께서 우리에게 크나큰 신비들을 보여 주시길 우리가 원한다면 바로 이 문을 통해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관상의 정상에 이르렀다 해도 다른 길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이 길로 가면 틀림이 없습니다. 선한 모든 것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은 이 주님을 통해서입니다. 그분이 그것을 가르치실 것입니다. 그분의 생활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좋은 모범이 없습니다.
이렇게도 좋은 벗이 우리 곁에 계시는 것 이상으로 더 바랄 게 더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분은 우리가 수고와 근심 걱정 가운데 있을 때 세상 사람들이 하듯 그렇게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그분을 참으로 사랑하며 항상 자기 곁에 모시고 있는 사람은 복됩니다. 영광스러운 바오로를 생각합시다. 마음속에 늘 예수를 모신 사람으로서 그의 입에서 주님의 이름이 떨어질 날이 없었습니다. 내가 이런 것을 깨달은 후 성 프란치스꼬와 파도바의 성 안또니오, 성 베르나르도,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와 같은 관상 생활에서 뛰어난 이들의 생활을 유심히 보았는데, 그들이 가는 길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 길로 걸어갈 때에는 하느님의 손에 의탁하여 언제나 자유로움을 느껴야 합니다. 엄위께서 우리가 당신의 밀실로 들어가기를 원하신다면, 우리는 거기에 기꺼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그분이 얼마나 큰사랑으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숱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 생각하고 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도 큰 사랑의 보증을 주실 때 얼마나 큰 사랑을 보여 주셨는지 명심합시다. 사랑은 사랑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항상 생각하여 우리 마음에서 그런 사랑을 일으키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은총으로 우리 마음에 이 사랑을 한 번 새겨 주신다면, 우리는 만사가 용이하게 되어 짧은 시간에 발전을 거두며 아무 어려움 없이 일할 것입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 배문한(수원 가톨릭 대학장 · 신부)
가르멜 수녀회의 개혁자요 교회 학자란 칭호를 받았을 만큼 저술가로서 유명한 성녀는 1515년 3월 28일 스페인 아빌라의 상류 가정에서 태어났다. 소화 데레사와 구별하기 위해 대 데레사라고도 불린다.
어렸 때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특히 순교자전 읽기를 좋아하여, 7살 때 순교자들의 장렬한 죽음을 읽고 감동한 뒤 자기도 순교하기로 결심하였다. 오빠를 설득시켜 순교자를 내는 아프리카로 향해 가출한 적도 있었으니 어릴 때부터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2살 때 어머니를 잃은 충격이 컸으나 성모님께 어머니가 되어 달라고 간청하며 의탁하였다. 14살 때 아버지는 딸의 교육을 위해 아우구스띠노 수녀회에 맡겼다. 그때만 해도 수녀가 될 생각은 없었으나 5년 후엔 자신의 구령을 위해 가르멜 회에 입회하였다. 입회 후 2년 만에 중병을 얻어 수녀원에서 나와 쉬면서 치료하여 죽을 고비를 넘기고서 다시 입회하였다. 처음 15년간 그의 영성 생활은 미지근한 편이었으나 45세 때 주님의 현시를 받게 되면서 회개하여 신비적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의 자서전에 “그때까지 나의 생활은 나 자신의 것이었으나, 그 후부터 나의 생활은 내 안에 계시는 예수의 생활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때 그가 느낀 것은 가르멜 회의 개혁이었고, 초창기 정신으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당시 수녀원은 수녀가 너무 많아 수녀들 간에 경제적 불균등이 있었고, 내방객이 많고 기도 시간이 짧았다. 그 점을 고치기 위해 더욱 엄격하고 봉쇄적이고 청빈을 실천하며 묵상 기도에 전념하는 소수의 공동체로서의 수녀원으로 개혁코자 결심했다.
많은 반대와 오해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562년에는 성 요셉 새 수도원을 세웠으며, 그 후 20년간 17개의 수녀원을 설립하였고 남자 수도원 개혁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의 표어는 “활동하고 고통당하고 사랑하는 것”이었으며 죽을 때까지 이를 생활화하였다.
바쁜 생활 가운데서도 편지를 쓰고 글을 썼다. 편지 내용은 요리법, 약초에 의한 치료법, 경제와 결혼을 위한 지침, 외교적인 처세술, 농담과 훈계 등으로 꾸며져 있어 그의 다양한 지식을 말해 준다. 그의 저서 중에는 “자서전” “영혼의 성” “완덕의 길”이 유명하다.
“완덕의 길”은 영성 생활의 초보자에게, “영혼의 성”은 기도 생활을 더 깊이 하기를 원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고 그의 문장은 뛰어나 읽는 이들을 매혹시켰다. 카나다 시인 오 하간 박사는, “그는 글을 쓴 여인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까지 칭찬했다.
그의 저서는 지금까지 신비 신학의 기초로서 존중되고 있으며 이는 전지하신 하느님께서 그에게 심오한 진리를 계시하시고 가르쳐 주시는 대로 기록한 책으로서, 말하자면 그 안에 계신 주님 자신의 저작이라고도 한다. 그의 신비 생활의 근본이 되는 것은 “하느님 없는 나는 무요, 나에게는 하느님이 전부”라는 사상이며 모든 것에 있어서 주의 뜻을 이행함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용모와 여러 방면의 깊은 지식은 물론, 왕이나 고위 성직자에게도 바른 말로 충고할 수 있는 용감성과, 어려움을 뚫고 나가는 백절불굴의 투지와 사람을 다루는 재치도 겸비하였다. 일부 수녀들이 그가 원장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을 때, 원장 자리에 성모상을 안치하고 수녀원 열쇠를 바치며 ‘이분이 여러분들의 원장’이라고 하여 사태를 수습하는 역량을 보였다.
그는 또한 바위에 깔려 죽은 조카를 안고 기도하여 소생시킨 일도 있고, 유명한 조각가 베르니니의 작품으로 된 그의 성상과 같이 기구 중에 불창을 든 천신이 나타나 그의 심장을 찔러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불탔다고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왜 예수의 친구가 못되는가에 대해 답하길, 예수께서 고통을 주는 것이 친구를 대접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라 했다. 그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기에 주님의 고통에 동참하기를 원했다.
“주여! 당신을 위해 고통을 받겠나이다”라고 기구하며 고통 아니면 죽음을 간청할 만큼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고통을 기원했다. 고통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임종 전에 남긴, “내 영혼아! 아무 것도 근심 말고 아무 것도 두려워 말라. 모든 것은 지나가고 하느님만이 변함이 없으시다. 인내는 모든 것을 얻는다. 하느님을 얻은 사람은 그 외 아무 것도 필요치 않으며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는 말로 주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를 표현하였다.
1582년 10월 4일 저녁, 알바 데 또르메스에서 67세로 세상을 떠났고, 1617년 스페인 국회는 그를 스페인 주보로 선언하였으며 1622년 사후 40년 만에 시성되고 1970년 9월 7일 교황 바오로 6세는 그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축일은 10월 15일.
우리도 성녀처럼 고통을 청하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우리가 당하는 매일의 고통과 십자가를 사랑할 줄 알아야겠다.
[새로 보는 교회사] 가톨릭교회의 개혁 / 성녀 데레사 구본식 안드레아/ 대구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수 · 신부
관상 수도생활의 변화와 완덕으로 나아가려는 신비사상의 발전은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와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공이 아주 크다. 이들은 기존의 가르멜회를 쇄신하고 관상수도회의 수도생활을 더욱 깊이 있게 하였다.
가르멜회의 역사
가르멜회는 창설자가 없다. 수도회의 명칭은 엘리야 예언자가 살던 동굴이 있는 가르멜 산에서 유래하는데, 팔레스티나에 있는 이 산에 3~4세기경부터 사막의 은둔자들처럼 혼자서 동굴이나 초막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자가들끼리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12세기경부터 순례자들과 십자군에 의해 서로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한곳으로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경당을 지어 성모님께 봉헌하고는 엘리야 예언자의 모범을 따르기로 하였다. 이때 예루살렘의 총대주교가 간단한 회칙을 만들어주었고 공동체 생활을 위하여 원장을 선출하였다. 그들은 세상에서 떨어진 수도원에서 관상기도 생활로 침묵과 가난한 삶을 지향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유럽에 정착되는 수도원들은 탁발수도회로 분류된다.
1226년 호노리오 교황이 처음으로 규칙을 인준해 주었고 뒤에 여러 교황들이 가르멜회의 완화된 규칙을 인정하였다. 따라서 이전처럼 한적한 곳에 있는 수도원에서 은수자적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었고, 탁발수도회처럼 사목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활동을 위하여 그들은 옥스포트, 파리, 볼로냐 등지에 학문을 연구하는 집을 지었다.
가르멜 수도회는 첫째 관상생활과 형제애를 추구하면서 설교와 사목도 하였다. 영성에서는 성모님과 엘리야의 정신을 추구하면서 이름도 ‘가르멜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수도회’로 하고 성모님을 주보로 모셨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가르멜회도 쇠퇴기에 이르러서는 완화된 규칙을 선호하는 공동체와 좀더 엄격하게 살려는 공동체로 분리된다. 이때 바로 예수의 대 데레사 성녀와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가르멜회를 신비적인 관상생활을 하는 수도회로 개혁한다.
신비신학의 발전
라틴계 나라 곧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들이 교회를 개혁하는 데 큰 몫을 담당하였다. 더욱이 스페인은 루터가 나타나기 전부터 교회개혁에 앞장서고 있었다. 특히 잘 조직되고 능동적인 살라만카 대학을 중심으로 훌륭한 학자들을 배출함으로써 루터파가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였다. 물론 유명한 스페인의 종교재판소의 이단 색출도 한몫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 스페인에서는 신비주의가 성행하였다. 감성적이고 체험적이며 직접적인 종교심은 흔히 이단으로 흐르기 쉽다. 종교의 피상적인 관점만 취하면서 자신들의 감정에 치우치고 마귀적인 요소가 겹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으로 이단적인 신비주의를 추종하는 비밀단체(Alumbrados)가 형성되었는데, 이는 스페인 사람들의 종교적인 성향에서 유발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때문에 스페인에서는 이단적인 신비주의자들의 위험에 대항하고 기도생활을 구체화하기 위한 정통 신비주의가 발달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비적인 체험과 관상생활의 발전을 바로 예수의 대 데레사 성녀가 높은 경지로 이끌어올린다. 신비신학적인 저술은 주로 기도로 나타나고 종교 재판소는 이런 기도가 미신적인지 이단적인지를 면밀히 검토하는 작업을 하였다.
데레사 성녀의 “완덕의 길”이 나오기 전에도 이미 신비신학에 관한 많은 사람들의 저술이 있었다. 마드리드의 알퐁소(1485-1570년)나 오수나의 프란치스코(1492-1540년), 라레도의 베르나르디노(1482-1540년) 등이 침묵 속의 기도 등과 같은 신비적인 체험에 관한 저술을 하였다. 1535년에 저술한 베르나르디노 신부의 “시온산에 올라서”라는 책에 대한 데레사 성녀의 표현을 보면 그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데레사 성녀는 “이 책을 읽고 나는 내 기도의 방향을 알 수 있는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이 책에서 나는 하느님과 영혼 일치의 방법을 볼 수 있었는데, 나는 그 일치를 내 안에서 느끼고 있었고 여러 번 표현한 적도 있었습니다.”(STORIA DELLA CHIESA, Vol. VIII. Ed., S.A.I.E.P. 266)라고 한다.
신비체험을 깊이 있게 하고 그것을 표현한 데레사 성녀 이전에 관상기도에 관한 연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이들 가운데는 수도자와 사제들도 있었지만 살체도의 프란치스코같이 결혼한 사람들도 있었다.
신비주의 수도영성
스페인에서 데레사 성녀 이전에 더욱 심오한 영성으로 수도생활을 할 것을 요구하고 수도회를 개혁한 사람도 있다. 예를 들면 알칸타라의 베드로는 자신의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루었을 뿐 아니라, 1560년경부터 데레사 성녀와 친분을 가지면서 가르멜회를 개혁하도록 용기를 불어넣은 사람이다.
그는 프란치스코회 사람으로 스페인 왕과 교황 바오로 4세의 후원을 입어 프란치스코회를 옷에서부터, 공동체가 가난을 실천하는 데까지 더욱 영적인 공동체를 이루도록 하였다. 이러한 개혁은 스페인과 포르투갈뿐만 아니라 아메리카와 필리핀에까지 그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개혁의 바탕에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체험하는 영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육체와 물질에 대해서도 초자연적인 관점으로 살아가라는 요구가 담겨있다.
“기도와 묵상에 관하여”라는 책으로 그는 하느님의 뜻을 기쁘고 완전하게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일반 신자들이 영성의 깊이를 가지도록 설교하였다. 피상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친교할 수 있는 영혼의 깊은 기도생활과 복음에 근거한 윤리생활을 요구한 것이다. 내적 생활의 강조는 데레사 성녀가 수없이 반복한 “수도복이 수도자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l’abito non fa il monaco)”라는 정신이었다.
도미니코회 출신으로는 그라나다의 루이지가 1554년에 일반 신자들을 대상으로 “기도에 대하여”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기도하는 방법을 여섯 단계로 나누고 있는데, ‘주제 준비’ ‘주제를 위한 독서’ ‘주제에 대한 묵상’ ‘감사의 기도’ ‘봉헌’ ‘청원’ 등이다. 여기서 그는 정신적인 기도는 다른 의무를 다 관면할 만한 것이라고 하여 종교재판소의 지적을 받고는 1559년에 수정하여 새로이 책을 출간하였다.
그의 관상기도 방법은 주제를 준비하고 주제를 위한 독서를 천천히 하면서 독서를 통해 묵상에 빠져들고 계속 주제에 머무르는 묵상기도이다. 이를 위해서는 사람의 지성과 의지와 기억이 한꺼번에 작용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느님 현존 앞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예수의 성녀 대 데레사
성녀는 1515년 3월 28일에 출생하여 1582년 10월 4일에 사망하였다. 데레사 성녀가 살아 있는 동안 온 스페인 사람들은 그녀를 알았다. 또 가르멜회의 개혁에 대해서 찬성하는 편과 반대하는 편이 갈라져 있었기 때문에 유명세를 치르기도 하였지만, 데레사 성녀는 가장 스페인적이면서도 전 세계적인 특성을 가진 성인이다. 프로테스탄트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으면서도 교회의 본질을 찾아 들어감으로써 가톨릭교회 일치에 큰 기여를 한 분이다.
성녀는 20세 되던 때에 강생 가르멜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아빌라의 가르멜회는 부패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너무 많은 수도자가 1432년에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이 인가한 완화된 규칙을 따랐기 때문에 공동체의 분위기가 느슨하였다. 봉쇄구역에도 외부사람들의 방문을 허용하는 등 가르멜회의 엄격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데레사 성녀는 어릴 때부터 신심서적을 즐겨 읽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랐다. 훌륭한 신비주의 학자들의 영향으로 완덕을 향한 갈망이 생성되어 있던 성녀는 유명한 사람들의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이냐시오 성인의 “영성수련”도 데레사 성녀에게 영향을 준 책 가운데 하나다. 성녀는 영성 서적을 탐독하면서 하느님 안에 머물 줄 알았고, 상상이나 감정을 동반하지 않으면서 신비주의를 자신 안에 종합할 줄 알았다. 긍정적이고 확실한 사고를 가진 여성으로서 교리의 진리와 가톨릭 신심을 융합할 줄 알았다.
성녀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1537년과 1538년 사이의 겨울에 심한 열병에 걸려서 수도원이 아닌 시골에서 요양을 하였다. 요양하는 3년 동안 데레사 성녀는 하느님과 더욱 깊은 일치를 체험하고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내어맡길 줄 알게 되었다. 병이 나은 뒤에는 그 체험을 살려서 영적 수련을 더한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만나고 어울리며 대화를 즐겼다.
이렇게 1542년부터 1543년 사이에 느슨한 생활을 하던 데레사 성녀는 하느님과 세상 사이의 싸움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강하게 체험하였고 겸손을 알게 되면서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체험하게 되었다.
1560년 관상기도를 깊이 체험할 즈음, 옆에 늘 있던 조카가 더욱 엄격하게 은둔의 삶과 관상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자는 제안을 하여 수도회 장상들에게 이 제안을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러나 당시 프란치스코회를 개혁한 알칸타라의 베드로와 예수회원인 보르지아와 도미니코회의 루이지의 후원으로 1562년 8월 24일에 개혁된 가르멜 공동체를 시작하였다. 이 첫 수도원을 요셉 성인에게 봉헌하였다.
그때 그녀의 나이 47세였고, 이후 열여섯 개의 수도원을 더 창설하였다. 이들 새로운 여자 가르멜회를 이전과 구분하여 ‘맨발의 가르멜회’라고 하였고 데레사 성녀와 뜻을 같이한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맨발의 남자 가르멜회’를 창립하여 지도하였다.
성녀는 사망한 지 40년 뒤 로욜라의 이냐시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1622년에 시성되었고 1970년 바오로 6세는 데레사 성녀를 ‘교회박사’로 선포하였다. 데레사 성녀는 관상생활에 대한 깊이 있는 체험과 많은 저술활동을 통해서 수도자들이 추구해야 하는 이상과 걸어야 할 ‘완덕의 길’을 제시하였다. 루터가 하느님의 정의로운 심판의 두려움에서 구원의 길을 찾는 방법 때문에 교회에서 분리되었다고 한다면, 데레사 성녀는 인간의 의지와 신적 은총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완덕에 이르는 길을 찾아내었다. 따라서 수도자들이 노력해야 하는 방향이 설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성녀는 완덕에 이르는 기도의 상태도 단계가 있다고 한다. 그 단계를 정원에 물을 주는 방법으로 비유하고 있다. “정원에 물을 주는 방법에는 네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힘든 일은 샘에서 물을 긷는 것이고, 좀더 쉬운 일은 양수기를 통해 배수관으로 물을 주는 것이고, 그 다음은 강이나 시냇물을 끌어들이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이면서 땅을 흠뻑 적실 수 있고 자주 물을 줄 필요가 없으며 정원사가 할 일이 별로 없는 마지막 방법은 바로 충분히 내린 비입니다. 이 경우에 주님께서 우리를 적셔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런 수고도 느끼지 않습니다”(상게, pp. 282-283).
|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자세한 자료., 이미지 감사합니다.
찬미예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