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식 이름 석호필(石好必)
국적 영국→캐나다
직업 독립운동가, 선교사, 수의학자, 세균학자
종교 장로교
상훈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1968)
" 당신이 교회에는 올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천만 조선 동포에게 사과하기 전에는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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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팩트폭력이네요,
또한 부끄러운 역사의 아이러니지요.
3.1운동을 이끈 34번째 민족대표는 영국 혈통의 외국인이고,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은 조선혈통의 검은머리 한민족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생각도 문득 듭니다,
앨버트 테일러, 언더우드, 호머 헐버트, 어니스트 베델, 후세 다츠지..
대한민국은 참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사랑을 받았던 나라였구나,
그 많은 기대와 사랑 속에 우리가 독립을 하였구나.. 음..
1. 생애..
영국 출생으로 집안이 여의치 않아 대학진학을 못하였고,
한 농장에서 식사를 제공받는 조건으로 고용되었다
1907년 캐나다로 이민하여 토론토대학교 수의과에 입학한다.
1910년 소아마비를 앓아 지팡이를 짚게 되었다.
1911년 수의학 박사 학위를 받고
1913년에 앨리스 스코필드(Alice Schofield)와 결혼하였다.
- 1916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으로부터
일제강점기의 조선으로 와 달라는 권유 서신을 받게 된다.
- 1916년 11월에 아내와 함께 캐나다의 감리교 선교사이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처음 조선에 왔다.
세균학과 위생학을 강의하였는데,
영어를 할 줄 알았던 목원홍에게 한국어를 배워 한국어로 강의했다.
- 1917년 1년 만에 ‘선교사 자격 획득 한국어 시험’에 합격하고
‘석호필(石虎弼)’이란 한국식 이름도 만들었다.
성인 ‘石’은 그의 종교적 굳은 의지를 의미하고
‘虎’는 호랑이, ‘弼’은 돕는다는 뜻으로,
한국인을 돕겠다는 마음을 나타낸 이름이라고 한다.
3.1운동(1919)
- 한국의 여러 인사와 교제를 넓혀
1919년 2월 5일 3.1운동 거사 준비로 이갑성과 몰래 만났으며,
3.1운동을 위한 해외 정세파악 일을 맡게 된다.
3월 1일엔 탑골공원에서 만세시위를 하는 일제의 탄압을
사진으로 찍고 글로 적어 기록으로 남겨 해외에 알렸다.
제암교회 모습(1908)
- 4월에는 수원군 '제암리 학살 사건'에 충격을 받고 잿더미가 된 현장을 촬영,
'제암리/수촌리에서의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전 세계로 알렸다.
스코필드가 촬영한 '제암리 학살 현장'(1919)
“.. 그는 일생 동안 선교와 장학사업을 통해 사랑과 나눔을 설파하고,
우리나라의 독립과 발전에 헌신했다.
일제강점기에 틈만 나면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 나가 일본의 만행을 기록하여
이를 전 세계에 알림으로써 독립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의 한국에 대한 애정은 지극했고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한결같았다.."
-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정운찬 -
- 5월 일본인이 운영하는 영자신문 'Seoul Press' 지에
서대문 형무소에 대한 글을 올리고
당시 노순경, 류관순, 어윤희, 엄영애 등이 갇혀있던 서대문 형무소
여자 감방 8호실을를 직접 방문하여 고문 여부를 확인한 뒤
하세가와 총독과 미즈노 정무 총감 등을 방문하여
일본의 비인도적 만행의 중지를 호소하였다.
물론 그가 활발한 독립운동 기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영일동맹으로
영국계 캐나다 사람인 그를 일제가 간섭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1920년 3.1운동 견문록 원고의 제목을 '끌 수 없는 불꽃(Unquenchable Fire)'라 하고
그해 4월, 강도를 가장한 스코필드 암살미수 사건이 숙소에서 일어나
그 달 학교와의 근무 계약을 마치고 캐나다로 돌아갔지만
그는 꾸준히 편지를 통해 조선인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1926년 한국에 일시 방문하기도 했다.
독립된 한국을 방문한 박사의 환영회(1958)
- 1958년 광복을 맞이한 대한민국 정부의 초청에 따라
국빈 자격으로 돌아와
서울대 수의학과 외래교수에 임명되었다.
석호필,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 1959년 한국일보에 2.4 정치파동에 관한 소견을 기고하는 등
후학양성과 함께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글을 쓰기도 하고,
고아를 돌보는 사업에 헌신하며 일생을 한국에서 보낸다.
남북미와 유럽에 있던 그의 친구들이
'스코필드 기금(The Schofield Fund)'을 설치하여 그를 돕기도 했다.
스코필드 박사 장례식(1970)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 주시오.
내가 도와주던 소년, 소녀들과 불쌍한 사람을 맡아 주세요.”
- 석호필(石好必) -
- 한국의 독립운동에 기여한 업적을 존중하여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에 더하여 ‘제34인’으로 부르기도 하며,
1968년엔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 1970년 사망 후에는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끝까지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하고자 했는데,
마지막 책 한 권, 구두 한 켤레까지 주위의 사람들에게 나눠주었고,
재산 모두를 보육원과 YMCA에 헌납하고 떠났다.
2. 석호필 이야기..
1919년 3.1 운동의 민족대표 33인에 푸른 눈의 외국인 한 명을 더하여 민족대표 34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민족대표 33+1인 푸른 눈의 외국인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제암리 학살사건을 전 세계에 고발한 사람이기도 하며 3.1 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에 얽힌 프랭크 스코필드(석호필) 박사의 활동을 소개한다.1919년 3.1 운동은 역사적으로 매우 소중하고 가치 있는 높은 사건이며, 정치가가 잃은 나라를 국민이 나서서 되찾는 투쟁의 역사이기도 한다. 정치가는 사리사욕을 탐하고 무능했지만. 국민은 그렇지 않았음을 증명한 사례이다.당시 조선의 백성들은 민족대표 33인을 중심으로 뭉쳤고, 이 사건에는 조선인도 아닌 독립운동에 참여한 푸른 눈의 외국인이 있었으니, 이 분이 33+1번째 민족대표로 알려진 프랑크 스코필드 박사이다. 또한 그는 한국식 이름을 석호필로 정한 것에는 깊은 듯이 있다.그는 스코필드의 음을 따서 반드시 좋아한다는 뜻을 가진 石好必로 지었지만, 조선의 비참한 현실에 공감하고는 조선을 돕겠다는 의지로 용맹하게 돕는다는 뜻을 가진 石虎弼로 바꿔서 이름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조선에 온 프랭크 스코필드3.1 운동이 일어나기 3년 전 조선에 온 프랭크 스코필드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중,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의 제약부에서 일하던 이갑성을 알게 됐다. 이갑성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다.이갑성은 외군인이 알 수 없던 불행한 조선의 강제 병합을 이야길 했고,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함께 분통해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도와주기로 했다. 3.1 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는 외국에 대한 정보도 필요했는데 프랭크 스코필드는 국외의 정황을 파악해 3.1 운동의 시점과 방법 등을 정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이갑성은 외국인이 알 수 없던 불행한 조선의 강제 병합을 이야기했고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함께 분통해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도와주기로 했다. 또한 외국에 대한 정보도 필요했는데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국외의 정황을 파악해서 3.1 운동의 시점과 방법 등을 정할 수 있도록 협조하고 노력했다.한편 일제는 조선을 고립시키고 외부적으로는 조선도 동의해서 합방을 한 것으로 흥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3.1 운동을 해외에 알리는 것도 매우 중요해기에 이갑성은 학생시위와의 연결고리가 되어 전단지를 뿌리며 독립선언 사실을 알리는 역할을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에게 부탁했다.민족대표 33인 중 이갑성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고, 그동안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이 상황을 사진으로 남겨 해외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이 일로 인하여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민족대표 33+1인으로 불리게 됐다.프랭크 스코필드 박사, 제암리 학살사건 사진을 찍어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로 알리다.1919년 3월 31일,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인 제암리에서는 장날에 모인 군중들이 만세운동을 펼쳤다. 만세운동은 천도교, 유학파, 전도교, 기독교 지도자들에 의해 주도했는데, 밤마다 봉화를 올리고 시위를 하다가 주민 천여 명과 함께 일제의 관청을 부수기도 했던 민중운동이다.그런던 중 인근 수촌리에서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수촌리 학살사건은 일제가 마을에 방화하여 대부분을 불타게 하고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이 사건 소식을 서울에까지 알려졌지만 일본은 사실을 은폐하려고 했다.소식을 접한 스코필드 박사와 선교사, 영국 공사관, 기자 등 외국인들이 직접 확인하려 출발했고 스코필드 박사와 외국인 일행들은 수촌리를 방문했을 때 또 하나의 슬픈 소식을 접하게 됐다. 즉 제암리 학살 사건을 접한 것이다.제암리 사건은 일본 경찰이 제암리 마을 주민들의 분노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치는 일 이 발생했다. 며칠 후 일본군은 제암리를 방문하여 진압과정에서 과격한 폭력을 가한 것을 사과한다며 마을 사람들과 대화의 기회를 갖자고 제의했다.처음부터 마을 주민들을 학살하기 위해 일본군의 계획적인 흉계였다. 이날 일본군은 15세 이상의 마을 남자들을 교회로 모이게 했고. 일본군 장교가 교회에 들어가 기독교 교리에 대한 몇 마디 이야기를 잠깐 나누고 나와 교회를 포위하고 대기하던 일본군들에게 집중사격하게 하고, 기름을 부은 후 불을 질러 학인 사살까지 저질렸다.스코필드 박사와 외국인들은 급히 제암리 확살사건의 현장으로 향해 참담한 만행에 충격을 받았고, 일행들은 3.1 운동 때처럼 이를 기록하여 세계에 알려야겠다고 사진으로 남겼다. 그리고 이 사진과 사연을 보고서로 작성하여 수원 잔악행위에 대한 보고서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알렸다.제암리 사건은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가 없었다면 세계가 일본의 말만 믿고 주민들의 원통한 죽으로 잊힐 뻔한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