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첫사랑밖에 없다
너에게 주었다. 편지 한 통과 함께
너는 받지 않았고, 내 사랑은 사라졌다
주어버린 사랑은 결코 되돌릴 수 없으니.
편지는 삶의 몽상처럼 얄팍하고
사랑은 모든 이별처럼 슬프다
편지를 주머니에 깊숙이 감추고
수 백 번을 고쳐 쓴 다음에야 전한다.
부끄러운 마음이 어리석은 편지를 따라
너에게 다가가 돌아올 줄 모른다
너는 젊은 마음을 찢어버렸고
그날 구름은 계곡을 덮었다
운 좋게도 내 마음은 아직 젊으니
봄의 피는 꽃을 맺지 못했다
비 오는 정원에 아직도 새가 지저귀니
사랑도, 봉선화도, 석류도 필요 없다
그러나 꽃과 나비를 사랑할 때도
수 천 번이나 꿈을 꾸는 듯 하였고
두 눈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두 손은 감히 붙들지도 못했다
나는 아직도 어릴 때의 장난같이 생각되는데
언제 사랑이 깨졌단 말인가!
눈은 말랐지만 수천의 눈물방울이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첫 번째 꽃은 정백한 향을 담고
초봄은 깨끗하고 단조롭고
초향(初香)은 쇠처럼 단단히 새겨졌다
대보름 안개는 온 세상을 희미하게 한다.
사랑의 편지가 잘못 흘러갔으니 우울하고
아침 해도 빛을 잃고
나는 오직 첫사랑밖에 없었고
너에게 주었다. 나는 사라졌다.
말해야 한다
애끓도록 사랑해요, 그런데도 모자란단 말입니까?
당신은 욕심이 너무 많아요,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해요
안다, 네가 사랑한다고 말한 것을
그런데 왜 지난 얘기를 되새기는 건가요?
애끓도록 사랑하지만 여전히 충분치가 않구나
네가 사랑한다면서 마음속에만 두고
말하지 않으면 사랑은 없는 것이며
잘난 외모도 단지 돌과 같은 것이다.
나는 완전하고 무한함을 원한다
너는 아니? 내가 너를 찾았다는 것을
오늘의 사실은 내일까지 이르지 못하니
어찌 사랑이 헌것이 있겠나?
애끓도록 사랑하지만 여전히 충분치가 않구나
사랑한다고 말해야 해, 백 번 천 번이라도
영원히 봄밤을 지키도록 뜨거워야 해
사랑의 정원에 나비를 놓아줘야지
너는 말하고 또 말하고, 말해야 해
눈으로, 눈썹으로
사랑의 몸짓으로, 수줍은 자태로
의지하는 몸짓으로, 웃음으로, 손을 잡음으로
침묵으로, 내가 알 수 있는 것으로.
그러나 겨울처럼 차갑게 하지 말고
속 타는 이에게 무정하게 굴지 말며
잠자는 호수처럼 조용히 있지 마라
애끓도록 사랑하지만 여전히 충분치가 않구나
시인 평
한때 친구 후이껀의 월급으로 살았던 베트남 ‘현대시의 왕자’ 수언 지에우
배양수
본명은 응오 수언 지에우(Ngô Xuân Diệu 1916-1985).
1916년 2월 2일 빙딩성 뚜이 프억현 뚱쟌면 고보이 마을에서 출생하였고,
아버지는 하띵성 깐록현 짜오냐면 출신으로 이름은 응오 수언 토이며
한학을 공부하고 빙딩성에서 선생으로 지내며 응웬 티 히엡과 결혼하였다.
어렸을 적에 수언지에우는 아버지와 함께 국어와 한자 그리고 불어를 공부하다가
1927년에는 뀌년(중남부 지역)으로 가서 1934년에 중학교를 졸업했다.
이 시기에 수언지에우는 전통시를 쓰기 시작하였고 딴다(Tản Đà)를 아주 흠모했다.
1935-1936까지는 하노이에서 고등학교 기초과정을 공부하였고,
1936년, 1937년에는 후에에 있는 카이딩 고등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거기에서 2년 후배인 후이껀(Huy Cận)을 만나서 친구를 맺고
그 우정은 1982년까지 45년 동안 변치 않았다.
1938년 크리스마스 날에 테르(Thể Lữ)가 서문을 쓰고
르엉 수언 니(Lương Xuân Nhị)가 표지를 디자인한 시집『터터』(Thơ Thơ)를 출판했다.
1938-1940년에는 수언지에우는 하노이의 탕롱사립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후이껀은 농림전문대에서 공부하면서 함께 지냈다.
1939년에 수언지에우는 자신의 단편들을 신문 ‘오늘 날(Ngày nay)’에 연재하고
『펀통방』이란 이름으로 출판하였다.
1940년 초에는 식민당국의 공무원으로 미토(남부지역)에서 4년간 근무하였다.
이것은 후에 “베트남 남부와 남부 베트남인”이라는 글과
많은 통일투쟁의 시를 쓰게 되는 기반이 되었다.
1943년 후이껀은 영농기사 자격을 취득하였고,
수언지에우는 공직을 그만두고 하노이로 돌아와서 후이껀의 월급으로 함께 생활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돈으로 1939년에 ‘후이-수언 출판사’ 명의로
『터터』시집의 재판을 찍었다.
수언지에우와 후이껀은 그 당시에 비밀로 되어있던 월맹전선에 참가하였다.
1945년에는 산문시집인『쯔엉 까』와『향기를 바람에 날리고』라는 시집을 출판(시대출판사)하였다.
1945년 2월에 수언지에우는 베트남학생총회가 주최한 연설회에서
자신의 인생에서 최초로「대학생과 국문(國文)」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고,
이 연설문은 그 후에 『청년과 국문』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1945년 8월 혁명 이후 이념을 지지하는 시를 발표하였고,
1946년 1월 6일 총선에는 자신이 초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이 흥 성(省)〕했으며,
1946-1960년까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1946년 5월 팜반동을 단장으로 한 베트남 국회의원 일행이 프랑스를 방문할 때
수언지에우는 기자의 자격으로 동행하였다.
그 방문 이후에 수언지에우는 구국신문에「비행장에서 비행장까지」라는 제목으로
1940년에서 1946년까지 프랑스에 있던 베트남 교포들의 투쟁 및 생활에 관한 기획기사를 썼으며
『천리길 베트남』라는 책으로 출판하였다.
대불항전 시기에 9년 동안 그는 북베트남 전구(戰區)에 있었으며
1947년에는 ‘베트남의 소리’ 매주 한 번씩 ‘문화에 관한 이야기’라는 프로그램을 담당했다.
이때 썼던 글들을 모아서 후에『베트남의 진통』을 출판하였다.
그는 베트남 항전문예회 집행위원이었다.
그는 잡지『문예』에 많은 시를 썼고,
노동자, 농민, 병사의 시운동(詩運動)을 고무시키고 소개하였다.
1949년에 응웬 딩 티와 응웬 후이 뜨엉의 소개로 공산당에 입당을 하게 된다.
토지개혁 때 그는 타잉호아와 예안의 ‘발동대’(發動隊)의 대원으로 있었고,
농민과 토지를 제재로 한 『모자』(母子)라는 시집을 출판하였다.
1949년부터 그는 일반 대중들과 시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다.
1981년 9월과 10월에는 프랑스의 초청을 받고 베트남시에 대해서 발표하였다.
1954년 제네바회담 후에 전투지역에서 하노이로 돌아온 후에는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에 대항하며 통일을 염원하는 시를 쓰기 시작하였고
그것을『까마우곶』이라는 시집으로 출판(1962)하였다.
인문-가품(佳品) 운동이 일어났을 때,
거기에 대항하는 많은 글을 쓰고, 그것을 모아『나의 사상의 길』이라는 책으로 냈다(1958년).
1958년 그는 응웬 주 사망 138주년 기념행사의 주최자였으며,
그때 민족의 전통시에 대한 많은 글을 썼다.
그는 약 450수의 서정시를 지었고, 30수는 시집『껌따이』(1962)에 그리고
나머지는 다른 책에 끼워넣거나 인쇄하지 않은 것도 있다.
15권의 시집과
단편소설『펀통방』산문시『쯔엉까』수필, 평론, 회고록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는 여러차례 러시아를 방문하고 러시아 문학을 번역 소개하기도 했고,
헝가리, 불가리아, 쿠바의 작품을 베트남에 소개했다.
1958년 그는 뉴델리에서 열린 아시아문학가 주비(籌備)회의에 참가하고,
인도를 2달 동안 방문하고, 타골의 시를 번역 소개(1961)하였다.
1980년에는 소피아에서 열린 제2차 평화보위 세계문학가회의에 참석하여 연설하였다.
주요 논문으로
「판보이쩌우와 동유운동의 의미」(2002)「문학작품을 통해 본 오늘의 베트남」(2002)
「도이머이 이후의 베트남 소설에서의 관념변화」(1998) 외 다수와
저서로『여행 베트남어』(2003) 공저로『동남아의 인간과 문화』(2001)
『베트남의 이해』(1999) 역서로『정부음곡』(2003)『베트남 베트남 사람들』(2002)
『춘향전』(1994)『베트남 법규모음』(1991)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