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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달의 무협지 '무인향' 명조시대(明朝時代)의 개막과 함께 대륙의 한 귀퉁이에서 은밀히 일어나기 시작한 대겁난지계(大劫亂之計)! 더 이상 강해질 수 없는 미증유 초인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위대한 신화를 예고하며 그렇게 시작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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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신동욱, 현재 사마달프로의 대표이다. 무협 1세대 작가로 수백 권의 소설과 이천여 권의 만화스토리를 집필하였다. 소설로는 국내 최장편 정치무협소설 <대도무문>,<달은 칼 끝에 지고>(스포츠서울 연재), <무림경영>(조선일보 연재)등의 대표작이 있다.만화로는 <용음붕명>(일본 고단샤 연재), <폴리스>,<소림신화>,<무당신화>등 다수의 신화시리즈가 있다. |
무인향 제1권
제 목: 무인향 제1권 (전3권)
지은이: 사마달·고월
- 차 례 -
序 章
第 1 章 運命의 만남
第 2 章 칼만 안 든 强盜
第 3 章 여우와 늑대
第 4 章 초야 속의 방문객
第 5 章 소림사
第 6 章 또 하나의 비밀
第 7 章 사투
第 8 章 산 너머 산
第 9 章 받은 것은 돌려준다
第 10 章 英雄인가, 姦雄인가
序 章
<구천십왕사해마루(九天十王四海魔樓)!>
당신은 불더미 속에서 자신의 살이 타들어가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소?
당신은 날생선을 회치듯 자신의 살갗을 무자비하게 도려내는 칼을 보았소?
당신은 수십 일을 굶어 종국에는 자신을 낳은 부모의 몸뚱이가 음식으로 보인 적이 있소?
그것은 지옥이었소.
지옥에선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소.
눈물… 고통… 슬픔…….
그건 행복한 세상 사람들의 사치스런 감정들일 뿐이오.
아시오? 우리는 그 지옥에 구천십왕사해마루(九天十王四海魔樓)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였소.
거기에는 악마의 숨결 속에서 탄생한 십왕(十王)이 있음을 기억하시오.
십왕(十王)!
그들은 하나의 음모를 품었소.
구천(九天)과 사해를 지배하는 마(魔)의 신대륙을 탄생시키기로 말이오.
그렇소…….
그렇소…….
구천십왕사해마루(九天十王四海魔樓)!
그 이름은 그렇게 해서 등장했던 것이라오.
용세옥(龍世玉)!
이것은 한 인간의 이름이오.
그러나 단언컨대 그는 결코 인간이 아니오.
그의 살은 어떤 도검(刀劍)에도 찢겨지지 않으며, 악마의 불 속에서 태어난 그의 육신은 어떤 불에도 타지 않으며, 그의 위장 구조는 매우 특별해서 일년을 굶는다 해도 기름기를 잃지 않소.
그는 눈물을 모르며, 그는 고통이란 단어의 의미조차 모르오.
그는 지옥, 바로 구천십왕사해마루에서 탄생했소.
그는 그곳의 지배자 왕으로 성장했소.
십왕!
그 가운데 다시 으뜸인 십왕지존(十王至尊) 용세옥!
결국 그에게는 이 어마어마한 칭호가 붙고 만 것이오.
그러나 이 가공할 칭호조차 결코 그에겐 부족하오.
기억하시오…….
기억하시오…….
용세옥이라는 한 이름을…….
지금 그가 막 우리들의 세상을 향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소.
* * *
이것은 전설이 아니다.
명조시대(明朝時代)의 개막과 함께 대륙의 한 귀퉁이에서 은밀히 일어나기 시작한 대겁난지계(大劫亂之計)!
그렇다. 더 이상 강해질 수 없는 미증유 초인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위대한 신화를 예고하며 그렇게 시작되었다.
第 1 章 運命의 만남
섬서성(陝西省).
함양(咸陽)!
일찍이 군웅할거의 춘추전국시대가 중원대륙을 풍미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는 없다.
그리고 풍운의 춘추전국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대륙 최초로 천하통일을 이룩했던 유사최강(有史最强)의 한 절대자를 모르는 인물은 더더욱 없으리라.
진(秦)의 시황제(始皇帝).
천하의 모든 권력을 한손에 움켜쥐고 전 대륙을 질타했던 진시황제 역사의 거인.
그가 도읍했던 곳이 바로 이곳 함양 땅이었다.
함양.
지금은 유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 진시황제의 영화는 씻은 듯 찾을 길이 없다.
그러나 또 다른 한 가지 사실로 인하여 함양의 이 두 글자는 세인들의 뇌리 속에 더욱 깊이 새겨져 있었으니…….
― 상(商)!
황금.
오직 황금만을 위해 목숨까지도 기꺼이 버리는 이질의 집단― 대상계(大商界)!
그렇다. 함양은 진(秦) 이래로 천하의 황금을 주무르는 최고 거상(巨商)들이 웅거해 오던 대상계의 땅이었다.
남으로는 거대한 대륙 중원을, 북으로는 광활한 변방이역을 연결하는 최상의 적점(積點).
그곳이 바로 이 함양이기 때문이다.
천하의 모든 황금이 함양에 모아지고 함양을 거치지 않은 황금은 황금도 아니라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다.
중원은 물론 광활한 대초원, 열사의 사막…….
그리고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오지까지 함양에서 출발한 물자로 황금을 긁어 들인다.
실로 황금의 빛으로 눈을 뜨고, 그 찬란한 빛으로 인해 결코 잠들지 않는 대도(大都).
그것이 바로 이곳 함양이었다.
* * *
함양의 중심지에서 약간 동으로 치우친 지점.
수려한 야산(野山)을 끼고 한 채의 거대한 장원(莊院)이 자욱한 석양빛 속에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석양을 받아 황금빛 휘황하게 빛나는 장원의 현판.
그 위에 쓰인 용(龍)이 날고 봉(鳳)이 춤추는 듯 웅혼수려한 네 개의 글씨가 보인다.
<추성대가(秋星大家)!>
추성대가!
천하인들이 모두 함양을 알고 있다면 이곳 함양에선 그보다 더욱 확실히 추성대가의 명성이 알려져 있다.
함양에 있는 무수한 거상대가(巨商大家) 중에서도 단연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상가(大商家).
중원은 물론 천하 각지를 종횡무진하는 휘하 상단(商團)이 무려 이천(二千), 하루 동안 추성대가를 출입하는 황금의 액수는 기천만 냥의 천문학적 숫자다.
더불어 추성대가와 관련을 맺고 거래하는 상인들의 숫자는 아예 헤아릴 수조차 없는 터였다.
그런데 이러한 그 무엇보다도 추성대가의 명성을 더욱 드높이는 것은 그 가주(家主)가 여인이라는 사실이었다.
여인…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엄청난 규모의 추성대가를 이끌고 있는 가주는 분명 여인의 몸이었다.
― 추성대부인(秋星大夫人) 모용상하(慕容霜霞)!
바로 이 여인이다.
그 호쾌한 성격은 어느 사내에 못지않고 또한, 천지의 모든 아름다움을 독차지한 듯한 그 절염한 미태는 어느 미녀도 감히 견줄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실로 사내의 호쾌함, 여인의 아름다움을 두루 갖춘 것이다.
뿐인가? 상인만이 가지는 천부적인 상술 감각을 한몸에 응집시킨 화려한 대부인은 한마디로 천년에 한 번 태어나기도 어려운 여호걸이었다.
그리고 이제 막 중년으로 접어든 그녀의 그 모든 것이 오늘날 추성대가의 신화가 있게 만든 것이다.
그렇다.
석양에 짙게 감싸인 추성대가의 한곳.
바로 그곳에서부터 한 영웅의 길고 긴 여정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 * *
정실(靜室).
쌍촛대 위에서 두 개의 황촉이 소리 없이 불꽃을 밝힌다.
단아하고 운치 있게 꾸며진 실내는 어느 심산의 선방(禪房)처럼 그윽함이 흐르고 있다.
중앙의 태사의.
일신에 입은 옷은 자의궁장(紫衣宮裝).
그러나 그녀의 궁장 차림은 보통의 것처럼 거추장스럽지도 호화롭지도 않았다.
궁장의 은은한 멋과 동시에, 어떤 날렵하고 호쾌한 느낌마저 들게 하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다.
궁장의 여인.
나이는 이제 막 서른 고비를 넘었을까?
무어라 감히 함부로 형용할 수 없는 빛나는 아름다움이 눈부신 광휘처럼 그녀의 전신에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중년 여인들이 흔히 풍기는 풍염하거나 난요한 미태는 결코 아니었다.
감히 손 닿을 수 없는 고고함…….
은연중 망인을 휘감는 위엄과 혜지…….
그리고 한편으론 예리하고 호쾌한 듯한 형용키 어려운 느낌이 여인의 아름다움 속에 안개처럼 스며 있었다.
특히 한담(寒覃)처럼 서늘한 한 쌍의 봉목은 상대의 저 깊은 가슴속까지 거울처럼 담아 낼 듯 너무도 맑고 그윽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여인.
대체 이토록 아름답고 특출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중년의 궁장여인은 누구인가?
일세의 여걸이며, 이 시대 추성대가가 있게 한 신화의 장본인.
그녀가 바로 추성대부인 모용상하(慕容霜霞)였다.
이때 추성대부인 모용상하는 왠지 기이하고 침중한 눈길로 전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추성대부인 모용상하의 전면, 귀한 자단목을 깎아 만든 탁자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 탁자 위에는 기이하도록 정교하게 만들어진 아주 작은 태사의(太獅椅) 하나가 놓여져 있었으니…….
앙증맞도록 작은 태사의, 그것은 실로 기이하고 특이했다.
전체는 천하에서 가장 희귀한 옥석인 백유석(白乳石)으로 깎여져 우윳빛 광채를 발하고 있었고, 사면에는 하늘을 지킨다는 사천신장상(四天神將像)이 작으나 웅혼한 기상으로 생생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일견 범인 같으면 평생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진귀한 보물이 분명했다.
그런데 더욱 놀랍고 기이한 것은 그 작은 태사의 위에 한 작은 아이가 단정히 앉아 있고, 또랑또랑한 눈빛으로 추성대부인 모용상하를 마주 직시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이!
이제 갓 세 돌이나 지났을까?
흑백이 분명하고 또랑또랑하게 뜨고 있는 두 눈, 그 눈은 추성대부인 모용상하의 눈빛보다 더욱 맑고 서늘했다.
귀엽게 포동포동 살이 오른 얼굴은 관옥을 깎은 듯한 영준함을 미리 보이는 듯 반듯하게 균형이 잡혀 있었고, 두 손을 의젓하게 팔걸이에 얹은 모습은 더없이 앙증맞기까지 했다.
실로 한 폭의 그림이 아닌가?
추성대부인 모용상하는 그렇다치고 갓 세 살을 넘긴 듯한 이 귀엽고 앙증맞은 아이의 아름다움은 가히 눈이 어찔어찔할 정도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
추성대부인 모용상하와 아이는 마치 서로 눈싸움이라도 하듯 서로를 직시하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아이는 가끔씩 귀엽게 눈을 깜빡거릴 뿐 전혀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는다.
"후……."
일순, 추성대부인 모용상하는 돌연 깊고 낮은 탄식성을 흘렸다. 동시에 그녀는 눈가에 한 줄기 그늘을 소리 없이 스치우며 천천히 탁자 위로 한 손을 뻗었다.
탁자 위, 아이의 발 앞에는 한 통의 봉서(封書)가 놓여져 있었다.
추성대부인 모용상하는 서찰을 꺼내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무슨 연유인가?
천하의 대상계를 주름잡는 이 여걸의 손끝이 가늘게 경련하며 서찰을 읽어 가는 눈빛이 눈에 띄게 파랑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이는 두 눈을 귀엽게 깜빡거리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내 추성대부인 모용상하는 서찰을 모두 읽은 듯 착잡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 순간이었다.
팟―!
서찰 끝에 한 줄기 불꽃이 일어나며 이내 위에서부터 재로 변해 사라져 갔다.
아이는 여전히 움직임 없이 그것을 지켜보았다.
화르륵…….
이윽고 재로 화해 사라지는 서찰의 마지막 한 부분이 뒤틀리며 불붙은 채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찰나, 언뜻 불길 속에 사그라지는 몇 자의 짤막한 글귀가 보였다.
<… 그대가 본 문(本門)을 잊었듯이 이 아이도 분 문의 모든 것을 잊고 자랄 수 있도록 해주시오… 본인의 처음이자 최후의 간절한 부탁…….
검(劍) 서(書).>
화르르르…….
마침내 그 마지막 글귀가 재로 변해 사라졌다.
순간, 착각이었을까?
추성대부인 모용상하의 봉목 깊숙이 한점 반짝이는 물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결국 그분마저 실패하셨구나… 이 아이는 그분이 남기신 최후의 혈육이 분명한 터…….'
추성대부인 모용상하 그녀만이 알 수 있는 무수한 상념이 그녀의 가슴속에 회오리치며 스치고 있었다.
또한 그것은 일세의 여거상 추성대부인이 과거 어떤 또 하나의 비밀 신분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내심의 독백이기도 했다.
추성대부인 모용상하.
그녀는 천천히 눈길을 다시 아이에게로 돌렸다.
처음으로 한 줄기 부드러운 미소가 입가에 떠올랐다.
"아가야, 이곳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구나. 이름을 알려 주지 않으련?"
순간 아이는 해맑은 미소를 얼굴에 떠올렸다.
미소! 그것은 마치 막 떠오르는 밝은 햇살을 보듯 더없이 환한 느낌을 자아냈다.
추성대부인 모용상하는 그 미소에 자신도 모르게 밝고 따스한 미소를 마주 지어 보였다.
아이는 귀엽게 입술을 방긋 열었다.
"내 이름은 검운강(劍雲 )… 성은 검(劍)이고 이름은 운강(雲 )이야!"
마치 영롱한 구슬이 울리듯 아이의 음성은 너무도 맑고 또렷했다.
"그렇구나, 운강!"
추성대부인 모용상하는 신기하고 대견한 듯 밝게 응답했다. 그녀는 사랑스런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없느냐, 운강?"
그러자 아이 검운강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배가 고파… 그리고 마려워."
"마렵다니? 무슨 말이지?"
추성대부인 모용상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 검운강은 수줍게 웃었다. 양뺨에 계집아이처럼 볼우물이 쏙 들어가는 미소.
"이거……."
검운강은 얼굴을 돌리며 자신의 어떤 부분을 가리켰다.
찰나, 추성대부인 모용상하는 나직이 실소를 발하였다.
"풋……!"
바로 소피가 보고 싶다는 뜻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알았다… 가자!"
추성대부인 모용상하는 검운강을 자신의 품으로 안아 올렸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낳은 아이인 듯 착각이 들 정도로 삽시간에 검운강에게 지극한 친밀감과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후후… 이제부터 너는 추성대가의 식구가 되는 것이다."
추성대부인 모용상하는 검운강을 꼬옥 끌어안으며 아름다운 교성을 발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투는 영락없는 사내의 그것이었다.
이윽고 그녀와 검운강은 밖으로 사라졌다.
석양빛이 유난히도 붉게 타오르던 이날.
일세의 여거상 추성대부인 모용상하와 검운강이라는 이름의 세살박이 한 아이는 인연의 풀지 못할 끈에 의해 이렇게 기이한 만남의 장을 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세월이 흘렀다.
第 2 章 칼만 안 든 强盜
비…….
먹구름이 무겁게 드리워진 하늘 아래, 대지는 암울하고 스산한 가을비로 차갑게 적셔지고 있었다.
스으으… 스스스……!
가느다란 빗줄기는 차가운 추풍(秋風)에 날려 소리 없이 허공 가득히 흩날리고 있었다.
음울한 정서가 가슴속까지 깊이 파고드는 가을비 속.
하나의 긴 행렬이 비를 맞으며 조용하고 무겁게 함양성의 중심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행렬의 선두에는 가을비에 축축이 젖은 붉은 깃발 하나가 억겁처럼 무겁게 늘어져 있었다.
그 속에 씌어진 글자는 단 하나.
<조(弔)!>
이 뜻은 장례! 바로 장례의 행렬이었다.
스으으… 스스스…….
가을비는 오열처럼 소리 없이 뿌려지고, 그 속으로 하나의 상여가 일백여의 인물에 둘러싸인 채 깃발의 뒤를 따라 느리게 전진하고 있었다.
수많은 갖가지 조화(弔花)로 장식되어 웅장하고 장엄하기까지 한 상여.
고인은 생전에 결코 예사 인물이 아니었던 듯했다.
기이하게도 상여를 호위한 인물들은 문사(文士), 상인(商人), 무인(武人)… 등 각양각색의 신분이었고, 그 중에서도 상인 차림의 인물들이 단연 많았다.
정작 장례 때 갖춰 입는 갈포의(葛布衣)를 입은 인물은 극소수에 불과한 것이다.
그 극소수 포의인들 속의 단 한 명.
마치 눈에 박히듯 너무도 선명하게 드러나는 하나의 인영이 있었다.
소년! 그는 나이 십오 세 가량 된 소년이었다.
무어라 표현해야 좋을까?
마치 투명한 빙옥으로 조각한 듯한 절세의 용모!
일신에 입은 옷이 더없이 우중충하고 암울한 갈포상복임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모습은 오히려 신비로운 광휘를 발하고 있었다.
특히 무한한 정감이 뻗어 나올 듯한 소년의 서늘 다감한 두 눈빛은 한 번만 대하면 누구라도 절로 친근감이 차 오를 듯한 유현하고 따스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소년은 지금 그렇게 슬프지도 담담해 보이지도 않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조금만 눈여겨본다면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깊은 슬픔을 애써 감추고 있는 얼굴임을 알 수 있으리라.
금방이라도 왈칵 눈물을 쏟아 낼 듯 깊고 다정한 그의 눈빛이 그것을 증명했다.
스으… 스스스…….
음울한 가을비는 쉴새없이 소년의 머리카락을 타고 얼굴 위로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소년의 손에는 역시 비에 젖은 하나의 깃발― 만장(萬丈)이 슬프도록 긴 깃대에 매어져 있었다.
<추성대부인 모용씨 영전.>
추성대부인 모용씨 영전!
그렇다. 바로 오 일 전.
함양성 전체 아니, 천하의 대상계 전체를 충격 속에 몰아넣으며 추성대부인 모용상하는 돌연히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십여 년 전부터 타인에게 숨겨 온 불치의 병마와 싸워 왔다는 소문이 숨진 뒤에야 은근히 흘러 나왔다.
일세의 여걸, 천하의 대상계를 질타하던 여거상(女巨商).
그 화려한 명성의 추성대부인 모용상하가 이렇듯 허무하게 가 버린 것이다.
그녀가 남긴 혈육이라곤 단 두 명의 딸, 그리고 양자로 키워 온 검운강이라는 십오 세 소년이 전부였다.
검운강(劍雲 )!
어찌 벌써 잊었을 이름인가?
십이 년 전, 추성대부인 모용상하와 숙명적으로 만나야 했던 그 세돌박이 어린아이를…….
검운강!
바로 이 순간 만장을 들고 상여를 따르는 슬프고 다감한 눈빛의 미소년, 그인 것이다.
상여의 행렬은 연도에 늘어선 함양성민들의 애도 속에 천천히 전진해 갔다.
상여의 뒤로는 만장의 행렬이, 그리고 이십여 명의 악공(樂工)들이 구슬픈 장송곡을 연주하며 따랐다.
그 와중에서 검운강은 여전히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검운강은 깊고 우수 어린 눈빛으로 상여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바보 같은 어머니… 나에게 무거운 짐만 남기고 이렇게 떠나시다니…….'
의모 추성대부인 모용상하, 그녀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가 아직도 검운강의 가슴속에 울려 오고 있었다.
― 추성대가의 신화는… 그 신화는 겨우 이렇게 끝나선 안된
다… 운(雲)아… 네가… 네가 반드시… 추성대가의 신화를 이어라… 그, 그리고…….
마지막 말은 끝내 맺지 못하고 모용상하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운강은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기려 하신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 운강은 그때 일을 결코 잊지 않았어!'
검운강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찰나, 그 자신 외엔 아무도 알 수 없는 의미의 한 줄기 강렬한 광채가 검운강의 두 눈에서 환상처럼 뻗쳐 나왔다.
검운강은 까마득한 어린 시절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왜 추성대부인 모용상하와 숙명적으로 만나야 했는지도…….
그러나 이제는 추성대부인 모용상하도 이미 이승을 떠나 천지간에 남은 것은 오직 자신 검운강 혼자뿐이었다.
상여의 행렬은 어느덧 함양성을 벗어나고 있었다.
연도의 문상객 중 누군가 한숨 짓는 소리가 우중(雨中)으로 흘러 나왔다.
― 휴우… 이제 추성대가의 운도 다했군.
― 그러게 말일세. 쯧쯧…….
스으으… 스스으…….
음울한 가을비는 여전히 추적대며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 * *
스산하게 뿌려지던 가을비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그쳤다.
뒤이어 때늦은 석양이 함양의 하늘 위에서 멋쩍은 듯 삐죽이 고개를 내밀었다.
축축이 젖은 대지 위에 물감처럼 붉게 번져 오르는 석양.
그것은 아름답다기보단 기이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석양은 추성대가의 위에도 여지없이 비치고 있었다.
추성대가.
헤아릴 수 없이 찾아들던 문상객들의 발길도 뜸해진 시각, 대사(大事)를 치른 뒤의 쓸쓸한 여운이 추성대가 전체에 감돌고 있었다.
하운각(霞雲閣).
과거 추성대부인 모용상하가 추성대가의 대소사를 처리하던 곳이다.
또한 접빈청을 겸하고 있어 천하 각지 상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곳이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 이 하운각의 접빈청에는 삼 인의 인물이 원탁을 사이에 두고 대좌하고 있었다.
삼 인.
검운강, 그리고 두 명의 장년인이었다.
나이는 삼십대, 하나같이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얼굴에 화려한 비단장삼을 전신에 두른 인물들이었다.
그 중 좌측의 위인, 비대한 체구에 둥근 얼굴, 파묻히듯 가느다란 세모꼴의 두 눈이 쉴새없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두터운 비곗살 때문에 이 늦가을의 쌀쌀한 날씨에도 더위를 느끼는 것인가?
위인은 연신 커다란 백옥선으로 얼굴을 부치고 있었다.
그 옆, 비대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역시 살집이 푹신한 인물이 앉아 있었다.
약간 흰 피부와 가는 손가락이 일견 풍류남아의 인상을 풍긴다.
그러나 얄팍한 입술과 짙은 광채가 감도는 두 눈은 상인들만이 풍기는 그 어떤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이들은 바로 추성대부인 모용상하의 친혈육인 두 딸의 남편들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검운강의 매형뻘이다.
좌측의 비대한 위인은 둘째 매형인 황양만(黃陽滿).
낙양(洛陽)에서 포목점을 운영하여 제법 기반을 단단히 다진 인물이었다.
우측은 바로 첫째 매형인 위연청(魏蓮靑)이란 자였다.
연경(燕京)에 세 개의 주루를 운영하는 알부자로 그의 장사 수완은 일찍이 추성대부인 모용상하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러나 큰그릇이 되기엔 부족하다며 늘 아쉬운 표정을 짓던 모용상하이기도 했다.
그런데 무엇 때문인가?
삼 인의 사이엔 왠지 묘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문득, 검운강이 먼저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이기에 본인을 긴밀히 만나자 한 것입니까?"
낭랑한 그의 음성은 조용하고 담담했다.
잠시 어색한 표정을 짓던 황양만이 헛기침을 토했다.
"큼큼… 그러니까 그게… 에… 말하자면……."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황양만은 부채질도 잊은 채 애꿎은 주먹만 폈다 쥐었다 하며 말을 꺼내지 못했다.
위연청은 답답하다는 듯 황양만을 쳐다보았다.
이어 그는 검운강을 향해 차가운 눈길을 던지며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열었다.
"처남은 우리의 의중을 전혀 짐작치 못하겠단 말인가?"
검운강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형님들의 그 살찐 뱃속을 무슨 재주로 들여다본단 말입니까?"
"음……!"
황양만은 불쾌한 듯 시선을 돌렸다.
그는 습관적으로 불쑥 튀어나온 자신의 배 위로 손을 가져갔다.
위연청은 안색을 찌푸리며 냉랭한 어조를 발했다.
"우리는 고인이 되신 장모님과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처남이 이곳 추성대가의 모든 재산을 집어삼키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네. 그 재산은 당연히 우리에게 돌아와야 하는 것이니까."
"흠흠… 그렇지. 바로 그거야… 암……."
황양만은 옆에서 지당하다는 듯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검운강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러는 당신들의 혈관엔 어머님의 피가 덩어리째로 흐르는 것 같군요."
순간, 위연청은 안색을 차갑게 굳히며 강압적으로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우리는 장모님의 피를 이어받은 딸과 같이 살고 있단 말일세."
"그렇다면 본인은 당신들이 누이들과 혼인도 하기 훨씬 전부터 어머님을 모시고 살았소. 아시겠소?"
검운강은 전혀 흔들림 없이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위연청은 그런 검운강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좋아! 자네에게 황금 백만 냥을 주겠네. 더 이상은 결코 안되며 또한 쓸데없이 고집을 부린다면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일세."
큰 적선이라도 하듯 선심 어린 표정이었다.
그러나 옆의 황양만은 그것도 아깝다는 눈빛이었다.
추성대가의 재산은 어림잡아도 수천만 냥이다.
황금 한 냥이면 삼년은 남부러울 것 없이 살 수 있는 터에 백만 냥이나 수천만 냥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거금이었다.
위연청과 황양만은 그 엄청난 재산을 송두리째 차지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일순, 검운강은 입가에 한 줄기 소리 없는 담담한 미소를 피워 물었다.
"대단한 인정이신 듯하오만 본인은 당신들에게 황금 한 냥 이상은 결코 나누어 줄 생각이 없소. 그것이 어머님의 유언이었고 본인도 같은 뜻이었소."
"무… 무엇?"
"무슨 소리냐?"
위연청과 황양만은 동시에 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폭탄선언, 검운강의 말은 그야말로 생각지도 않은 폭탄선언이었다.
장모님이 그런 유언을 남겼다니…….
황양만은 이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고, 위연청은 같잖다는 듯 경멸의 눈빛을 보이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검운강은 일점의 동요도 없이 여전히 냉연하고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만일 욕심을 부려 추성대가에 일점의 치욕이라도 남긴다면 나는 당신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까지 빼앗아 버릴 자신이 있소."
나직한 음성.
그러나 그 속엔 칼날보다도 더한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순간, 무어라 반박을 가하려고 하던 위연청과 황양만은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눈빛!
이 순간 검운강의 두 눈에서 폭사되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이 기이한 광채들.
그 광채와 시선이 맞부딪치는 순간, 둘은 전신이 돌처럼 굳어 버릴 듯한 강렬한 충격에 휘말려 버렸다.
'으… 이 어린 놈이?'
'으음…….'
동시에 그들의 내심에서 신음성이 터졌다.
진정 그들은 태어난 이래 이날까지 이토록 무서운 눈빛은 본 적이 없었다. 더욱이 겨우 십오 세 소년에게서…….
위연청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이때, 검운강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하운각을 나서기 시작했다.
"개에게 던져 줄 황금은 있어도 당신들에게 줄 황금은 없소. 더 이상 본인을 피곤하게 하지 마시오."
마지막 냉담한 한마디를 끝으로 검운강은 문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위연청과 황양만은 머리가 텅 빈 느낌이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후에는 밑도 끝도 없는 분노가 그들의 머리끝까지 솟구쳐 올랐다.
"이놈이……!"
그들은 주먹을 부르르 떨며 어금니를 갈았다.
그러나 그 분노를 행동으로 표현할 용기는 어느새 그들의 가슴속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 * *
추성대가의 깊숙한 후원.
아름드리 노향목으로 이루어진 울창한 수림이 있다.
제상림(帝上林)!
그윽한 향나무 향이 사철을 두고 감돌아 마치 속세와는 먼 기품 높은 노학자(老學者)가 학(鶴)과 더불어 은거하는 듯한 곳.
그 숲 사이로 한 줄기 오솔길이 나 있고, 오솔길이 끝나는 곳에 한 채의 아담한 장원이 고즈넉이 자리잡고 있다.
제상헌(帝上軒)!
바로 검운강의 거처인 제상헌이었다.
밤.
늦가을의 밤은 깊고 빠르게 추성대가의 위로 찾아들었다.
추성대가는 어둠과 적막 속으로 빠져들었다.
휘이잉―!
쓰스스스―!
가끔씩 차가운 야풍(夜風)이 어둠 속으로 휘돌고, 밤하늘의 뭇별빛만이 바람에 흔들리며 차갑게 빛날 뿐이었다.
그러나 이 시각, 잠들지 않은 채 고요히 빛나는 한 쌍의 맑은 눈빛이 있었다.
침실.
창 밖으론 달빛이 하얗게 반사되는 울창한 노향목 숲이 보이고, 약간 열려진 창 틈으로 야풍과 더불어 그윽한 향기가 스며드는 침실이었다.
굵은 황촉 한 개가 벽에 길다란 그림자를 드리우며 소리 없이 타오르는 정적 속.
검운강은 침상을 버려 둔 채 한쪽 벽에 등을 기대고 홀로 쪼그려 앉아 있었다.
손으로 양무릎을 감싸고 앉은 채 그는 맞은편의 벽 위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곳.
한 아름다운 중년미부의 초상화가 그윽이 미소 띤 얼굴로 걸려 있었다.
사자(死者)임을 뜻하는 검은 천이 양쪽으로 길게 늘어뜨려져 있는 초상화.
바로 추성대부인 모용상하, 그녀의 초상화였다.
이 깊은 적막의 밤.
사자와 무언의 대화라도 나누는 것인가?
검운강, 그는 벌써 오랜 시간을 이렇게 앉아서 묵묵히 의모 모용상하의 초상화를 응시하고 있었다.
문득, 검운강은 초상화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툴툴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빌어먹을! 이젠 그야말로 완벽한 외톨이가 되고 말았어……."
미소. 언뜻 보기엔 전혀 슬퍼 보이지 않는 미소!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더욱 외롭고 슬퍼 보이는 그런 미소였다.
검운강은 쓸쓸한 독백을 이었다.
"가문을 등지고 여기에 보내지는 순간 네 운명은 이미 정해졌던 거다, 검운강! 그러나… 난 운명 따위에 순종하고 싶지는 않거든."
자신에게 말하고 자신이 대답한다.
검운강의 두 눈이 깊숙이 젖어들었다.
"나의 친부모님께서도… 의모께서도 내가 가문의 일을 철저하게 잊어 주길 원하셨지… 그리고 대상가의 후예로서 일생을 마치기를 원하셨다."
검운강은 언뜻 긴 회상에 잠겨 들었다.
아주 어릴 적, 이곳 추성대가에서 의모 모용상하와 만나기 전까지의 그 보석 같은 소중한 나날들…….
가슴이 아리도록 소중했기에, 아무도 몰래 꽁꽁 가슴속 깊이 묻어 두었던 추억의 회상이었다.
이 순간, 연기처럼 망막 속에 피어 오르는 그 추억의 파편들을 보며 검운강은 소리 없이 탄식했다.
"그러나 나는 결코 잊을 수가 없었기에 결심을 했지……."
검운강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언젠가 내가 완벽한 외톨이가 되는 순간 아버님이 이루지 못한 일을 시작하기로."
번쩍!
찰나간 검운강의 깊숙한 눈빛에 한 가닥 기이한 광채가 어렸다.
눈빛! 그것은 한없이 유현하고 강렬한 의지의 광채였다.
그러나 그 빛은 이내 말할 수 없는 고독의 빛으로 바뀌고 독백이 이어졌다.
"그래야만 설혹 실패한다 해도 나로 인해 슬퍼하거나 나처럼 외톨이가 되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툴툴……."
검운강은 웃었다. 그것은 더할 수 없는 고독의 미소였다.
그리고 검운강은 잠시 침묵하며 초상화 속에 그려진 의모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초상화 속의 두 눈은 생전의 그녀처럼 따뜻한 미소를 담고 검운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검운강은 다시금 나직이 탄식하듯 말했다.
"의모님도 아시겠지만 아버님은 최강의 절대자(絶代者)가 되길 원하셨지요."
― 최강의 절대자!
"그러나 아버님은 결국 실패하셨지. 바로 구천십왕사해마루(九天十王四海魔樓)에 의해……."
일순, 무릎을 감쌌던 검운강은 두 주먹을 손톱이 박히도록 불끈 말아 쥐었다.
형언할 수 없는 격정의 빛이 찰나간 그의 전신을 섬뢰처럼 휩쓸고 스쳐 갔다.
그런데…….
오오! 들었는가?
― 구천십왕사해마루(九天十王四海魔樓)!
손. 보이지도 느낄 수도 없는 한 거대한 손이 은연중 전 무림을 움직이고 있다면 그대는 믿을 수 있겠는가?
물론 믿을 수 없다. 그러나 믿어야 한다.
단지 그대의 눈에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서 불신한다면 그대의 목숨은 내일 아침 귀신도 모르게 시궁창에 처박히고 말 것이다.
바로 구천십왕사해마루, 그들에 의해.
천하에서 그들을 거역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하늘마저도 땅에서만큼은 그들의 발 아래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들에겐 정(正)도 사(邪)도 없다.
절대자에겐 전혀 쓸모 없는 잡동사니에 불과하니까.
그렇다. 보이지 않는 절대자.
그렇기에 꺾을 수도 반항할 수도 없는 절대자.
그러나 그들의 신경세포는 천하 구석구석까지 미세하게 퍼져 있고, 바로 그대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닿아 있다.
구천십왕사해마루!
그것은 아예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은 채 천하를 지배하는 가공할 힘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검운강의 가문과 그 구천십왕사해마루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분명하고 중요한 것은, 검운강! 그가 바로 구천십왕사해마루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엄청난 사실이었다.
"구천십왕사해마루를 꺾는 날, 그날이 바로 아버님의 꿈이 이루어지는 날이며 나, 검운강이 최강의 절대자가 되는 날이다."
불길.
검운강의 두 눈에서 홀연 거센 불길이 무섭게 활활 불타올랐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불길은 눈빛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검운강은 거짓말같이 처음의 담담하고 고요한 신색으로 되돌아왔다.
검운강은 조용히 모용상하의 초상화를 응시했다.
"죄송하지만 그 동안 어머님도 모르게 약간의 무공과 무림에서의 생활을 익혀 왔습니다. 후훗… 어머님은 저에게 무학의 무(武)자도 일러주길 싫어하셨으니까요."
그렇다면?
"그러나 추성대가의 신화를 이으라는 어머님의 유언도 결코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비록 거추장스럽고 힘이 들지만 말입니다."
순간, 착각이었을까?
검운강은 자신을 향해 미소짓는 모용상하의 초상화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되도록 빨리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의 원제들을 결말지어야겠지요. 그래야 저도 무림에서 마음놓고 활동할 수 있을 테니까요."
검운강은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추성대부인 모용상하의 초상화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지켜봐 주십시오. 후훗… 이놈은 그래도 배짱 하나는 두둑하니까요."
검운강은 살아 있을 때의 의모 모용상하를 대하듯 맑고 다감한 미소를 던졌다.
검운강은 침상 위가 아닌 밖으로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어디로 향하는 것인가?
바로 이 시각.
추성대가 깊숙한 또 하나의 정실에서는…….
* * *
정실.
사면 벽에 걸쳐 중원천하와 사해(四海), 그리고 이역(異域)의 거대한 지도가 그려진 외에는 일체 아무런 장식도 보이지 않는 실내.
삼 인의 인물이 대좌하고 있었다.
무언가 심각한 분위기가 감도는 표정들이었다.
그 중 정면, 붉은 대춧빛 얼굴에 장대한 체구의 중년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짙은 구레나룻이 매우 인상적이며, 두 눈에서는 범인은 감히 마주칠 수 없는 강인한 광채가 뻗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강철과도 같이 단단하게 느껴지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 좌측에는 자색 유삼을 걸치고 훤칠한 키에 마른 체구의 인물이 앉아 있었다.
나이는 역시 중년, 신경질적으로 날카로운 인상이었고 두 눈은 예리하고 깊숙이 빛나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자색의 주판을 들고 있었다. 그 주판 때문인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듯한 고리대금업자와 같은 삭막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깊숙한 두 눈은 어쩐지 그 이상의 더 무서운 느낌을 가져다 주는 그런 인물이었다.
마지막 우측의 인물은 백의유삼에 단아한 얼굴의 초로인이었다.
반백의 희끗희끗한 머리가 보기 좋게 빗겨 올려져 있고, 입가에는 습관처럼 부드러운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중후하고 인자한 분위기가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인물.
그러나 두 눈에는 모든 세상에 달관하고 초연한 듯한 담백한 광채가 감돌고, 그 눈빛은 오히려 만인을 압도하는 어떤 위엄을 풍기고 있었다.
죽음의 막다른 순간 앞에서도 한점 흐트러짐이 없을 것 같은 그런 눈빛인 것이다.
그렇다.
이들 삼 인.
추성대가의 명성을 들어 본 인물이라면, 그는 이 삼 인의 이름도 반드시 들어 보았으리라.
― 추성삼상백(秋星三商伯)!
추성대가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위대한 이름의 인물들.
추성대부인 모용상하와 함께 추성대가의 신화를 있게 했던 상술의 절대귀걸(絶代鬼傑)들― 그들이 바로 지금 이곳에 있는 추성삼상백인 것이다.
추성삼상백!
먼저 전체적으로 강인하고 단단한 인상의 흑삼중년인.
철혈상백(鐵血商伯) 하후노적(夏侯老赤)!
바로 추성대가 소속의 전 상단(商團)을 지휘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얼굴과 명성은 이미 천하 각지에 알려져 있으며, 그의 발이 닿지 않은 곳은 지옥과 극락 외에는 없다.
그리고 좌측의 자색유삼인.
자전상백(紫電商伯) 궁운도(弓雲道)!
그는 그렇게 불린다.
추성대가의 모든 재화(財華)를 관리하며, 추성대가를 출입하는 막대한 황금과 물자 모두가 그의 주판에 의해 명확하고 철저하게 계산된다.
지금껏 그의 계산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고 또한 틀릴 수도 없다. 그의 허락이 없으면 설사 황제가 된다 해도 추성대가에서 먼지 한점 가져갈 수 없을 정도이다.
마지막 우측의 백의초로인.
그는 가장 조용하면서도 무서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뇌우상백(雷雨商伯) 혁유붕(赫幽鵬)!
추성대가에 소속된 모든 인물의 생사대권을 한손에 쥐고 있는 인물.
그의 휘하에는 비밀스럽게 키워진 철저한 조직망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 조직으로 인해 추성대가 모든 인물들의 동태가 파악될 뿐 아니라, 추성대가와 거래를 원하는 인물이라면 우선 뇌우상백 혁유붕의 철저한 조사와 허락을 거쳐야만 한다.
설령 귀신이라 해도 추성대가와 거래를 하려면 일단 뇌우상백 혁유붕의 조사와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들 추성삼상백!
비록 설명은 간단하였으나, 이들이 지닌 권한과 위력은 실로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 깊은 심야!
그런 추성삼상백이 한자리에 모여 있음은 매우 중대한 의미가 아닐 수 없는 터.
일순, 철혈상백 하후노적이 침중하나 분명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제는 우리가 결정을 내릴 때요. 비록 우리가 정을 쏟아 기른 소가주(小家主)이지만 대부인의 뒤를 이을 재목이 아니라면 가차없이 제거해야만 추성대가가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이오."
무서운 의미의 말이 아닌가!
추성삼상백.
이들은 오늘날까지 추성대부인 이상으로 소가주 검운강에게 정을 쏟아 온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정은 사사로운 것일 뿐, 이들은 검운강의 능력을 기준으로 그의 생사를 결정지으려 하는 것이다.
자전상백 궁운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황금과 물자를 본가에 보내지 않으려는 자들이 각지에서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으니 사태가 더 커지기 전에 단안을 내려야 하오."
한점의 감정도 느낄 수 없는 나직한 어조였다.
탁… 탁…….
그는 습관처럼 수중의 주판알을 퉁기고 있었다. 이어 자전상백 궁운도는 주판알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더욱이 본가를 넘보던 자들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어 수입이 벌써 십만 냥 정도나 감소했소."
자전상백 궁운도는 미간을 깊숙이 찌푸리며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일 뿐, 시일이 흐를수록 타격이 엄청나게 커질 것은 자명한 일인 것이오."
자전상백 궁운도의 어조에는 심각한 우려와 곤혹이 깃들어 있었다.
순간이었다.
콰악!
철혈상백 하후노적은 탁자 위에 얹은 두 손을 힘주어 깍지꼈다.
"대백(大伯)이 결정을 내린다면 우리는 두말 없이 따를 것이오. 추성대가가 이대로 주저앉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일이오."
낮으나 격렬한 감정의 말과 함께 철혈상백 하후노적은 타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뇌우상백 혁유붕!
그는 이들 사이에서 대백으로 통한다.
가장 연장자였으며, 또한 절대적인 권한이 그에게 있는 것이다.
일순, 지금껏 침묵만 하던 뇌우상백 혁유붕의 입가에 한 줄기 가는 미소가 맺혔다.
그는 눈앞의 이 인을 차례로 일별하며 비로소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이제 나이가 먹어 머리가 많이 망가진 모양이군. 하긴… 나이가 들면 눈과 귀도 점차 망가지는 게 당연하지."
마치 혼잣말처럼 나직한 한마디.
그는 두 사람이 가엾다는 듯한 눈빛이기까지 했다.
하후노적과 궁운도는 멍청한 표정이 되었다.
뇌우상백 혁유붕은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우리 삼 인이 모여 이런 쓸데없는 소리나 지껄인 걸 소가주님이 아시면 아마 대단히 실망하실 걸세. 쯧쯧……."
뇌우상백 혁유붕은 말끝에 끌끌 혀를 찼다.
"무슨… 말씀을?"
하후노적과 궁운도는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곤혹스런 눈빛을 발했다.
순간, 혁유붕은 정색하며 그들을 향해 말했다.
"그대들은 다른 세상 사람들처럼 소가주께 속고 있었어. 도대체 그대들의 눈에는 그분이 냄새나는 책장이나 넘기는 십오 세 학동으로밖에 보이지 않나?"
나직한 어조였으나 예리한 추궁이었다.
하후노적과 궁운도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무슨……?"
순간 두 사람의 눈빛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으로 물들고 있었다.
뇌우상백 혁유붕.
그는 담담한 어조를 발했다.
"그대들은 이런 걸 본 적이 있겠지. 소가주님을 시중드는 시비가 청소하다가 무심코 버린 것일세."
혁유붕은 말과 함께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것은 양피지로 만들어진 찢어진 책장 조각이었다.
아마도 겉장이었던 듯, 그 위엔 서경(書經)이란 제목이 씌어져 있었다.
순간, 철혈상백 하후노적은 그게 무어 그리 대단하냐는 듯 기막힌 어조로 반문했다.
"서경? 그것은 사서오경 중 그 서경이 아닙니까?"
"끙……."
은근히 긴장했던 자전상백 궁운도 역시 김빠지는 표정이었다.
뇌우상백 혁유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물론 평범한 책장에 불과하지… 그러나!"
말과 동시에 혁유붕은 돌연 찢어진 책장을 촛불 위로 가져갔다.
화르륵……!
양피지는 당장 불이 붙으며 연기가 피어 올랐다.
양피지는 검은 재로 변하며 이내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이때였다.
돌연 철혈상백 하후노적과 자전상백 궁운도의 두 눈에 가득히 경악의 빛이 떠오르는 게 아닌가.
철혈상백 하후노적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맙소사!"
그것은 불신에 가까운 비명이었다.
재로 변해 가는 양피 책장.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에 또 하나의 또렷한 은색의 글자가 나타나는 것이었으니…….
<법왕대수공(法王大手功)>
놀라운 일!
서경이라는 제목은 단지 눈가림이었을 뿐, 진짜 제목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백은사(白隱絲)로 써 넣어 뜨거운 열기를 받아야만 그 글씨가 나타나게 만든 것이다.
"법왕대수공이라면 바로 서장(西藏)의 포달랍궁(布達拉宮) 궁주만이 익힐 수 있는 비전지학(秘傳之學)이 아닌가!"
자전상백 궁운도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듯 신음했다.
서장의 포달랍궁!
이곳은 무림인은 물론, 상인들조차도 상대하기를 꺼려하는 이색(異色)의 밀교대종파(密敎大宗派)였다.
그 포달랍궁의 궁주만이 익힐 수 있는 비전무학이 외부에 유출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
그러나 눈앞에 나타난 양피 책장의 이름은 분명 포달랍궁의 법왕대수공이었다.
하후노적과 궁운도는 점차 더욱 선명하게 표출되는 법왕대수공의 글씨를 망연히 쳐다보았다.
원래 상인들은 상술뿐만 아니라 일신에 각기 고절한 무예를 지녀야만 한다.
이유는 단 하나, 무림인들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지만, 상인들은 황금을 위해 때때로 피 튀기는 혈전을 벌여야만 하는 때문이었다.
하여 이들이 법왕대수공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봄은 당연지사.
또한 경악의 표정을 짓는 것도 매우 당연한 반응이었다.
뇌우상백 혁유붕이 진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소가주께서 어떻게 하여 이런 것을 손에 넣었는지에 대해선 노부도 결코 알아낼 수가 없었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이것은 겨우 거대한 빙산 중 손톱만한 조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일세."
철혈상백 하후노적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소가주는……?"
"맞아, 소가주님의 일신에 어느 정도의 화후가 깃들여져 있는지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가 없네. 그분은 그만큼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고 살아온 것이지."
"음……."
하후노적과 궁운도의 표정이 굳어 들었다.
화르르……!
순간 은색의 글자가 다시 희미해지며 양피지는 완전히 재로 변해 버렸다.
뇌우상백 혁유붕은 깊숙한 눈길로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은사의 글씨가 나타나는 시간은 겨우 단 이 각 정도… 그 안에 어떠한 무학이든 완벽하게 암기한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그, 그런 일이……."
"더욱이 불(火)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고 익힐 수 있고, 그 흔적조차 남기지 않으니 실로 완벽한 방법이지."
이것은 실로 범인이라면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자전상백 궁운도는 고개를 흔들었다.
"믿을 수 없군."
그러나 그의 눈빛은 이미 불신의 빛을 지우고 있었다.
타 버린 양피지.
그것은 뇌우상백 혁유붕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완벽한 증거물인 것이다.
뇌우상백 혁유붕은 담담한, 그러나 엄숙함이 깃든 어조를 이었다.
"마지막으로 본인이 소가주님에 대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세 가지가 있네."
"그, 그건 또 무엇입니까?"
"첫째는 자신을 철저히 감추고 있다는 것과, 둘째는 추성대부인으로부터 모든 상술을 전수받았고… 마지막으로 그분의 학문과 무학이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일세."
순간 궁운도는 부지중 신음성을 터뜨렸다.
"그럴 수가? 계산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오."
철혈상백 하후노적은 아예 입만 쩍 벌리고 있었다.
뇌우상백 혁유붕은 문득 예의 습관과도 같은 온화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알겠나? 사실 처음부터 결론을 내리고 어쩌고 할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일세. 우리는 단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우리 각자의 일에만 충실하면 되는 거지."
담담하고 온후한 음성.
그러나 누구라도 그대로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강한 설득력이 배인 음성이었다.
하후노적과 궁운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이때, 가벼운 발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 왔다.
시비의 청아한 음성이 곧 뒤를 이었다.
"가주님께서 오셨습니다."
가주!
검운강에 대한 호칭은 이제 소가주가 아닌 가주였다.
삼 인은 흠칫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어 그들은 재빨리 자세를 바로하고 자리에서 기립하듯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문이 열리며 검운강이 미소 띤 얼굴로 나타났다.
"어서 오십시오, 가주님!"
"가주님을 뵈옵니다."
삼 인은 일제히 예를 취하며 검운강을 맞아들였다.
검운강은 그들의 맞은편 태사의에 자리잡았다.
삼 인을 둘러보는 그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맑은 정감의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얼굴들을 보니 세 할아범들이 심각한 일을 의논하고 있었던 듯한데 본인이 눈치없는 호랑이가 된 기분이군요."
검운강은 농담처럼 말을 꺼내며 씨익 웃었다.
순간, 삼 인의 얼굴이 기묘해졌다.
눈치없는 호랑이!
이 말은 곧,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는 속담을 풍자한 것으로 이미 추성삼상백이 자신에 대한 의논을 하고 있었음을 알아차린 뜻이 아닌가?
"무, 무슨 말씀을……!"
"험험……."
혁유붕이 당황하여 더듬거리고 하후노적은 헛기침을 터뜨렸다.
"후후……."
검운강은 말없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잠시 어색하고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하후노적과 궁운도는 마치 뒤통수를 누가 잡아당기는 듯한 편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빌어먹을… 어린 뱃속에 구렁이 서너 마리를 키우고 있는 것 같군.'
두 사람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때 검운강은 비로소 침묵을 깨며 낭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사실은 본가의 불행을 틈타 일을 꾸미는 자들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소."
뇌우상백 혁유붕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매우 심각한 상태입니다, 가주… 거기에 대해 궁상백이 자세히 설명드릴 겁니다."
"부탁하오."
검운강은 자전상백 궁운도를 향했다.
궁운도는 일순 혁유붕 쪽을 응시하더니 이내 검운강을 향해 정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본가와 강력한 경쟁을 벌이던 만백상원(萬栢商院)이 본가와 거래하던 상인들을 무차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또한……."
"또한?"
"절강성의 대륙교장(大陸交莊)에선 본가 전체를 사들이겠다고 정식 통보까지 보내 왔을 정도입니다."
궁운도는 소태를 씹은 듯 씁쓸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을 맺었다.
혁유붕과 하후노적 역시 입맛을 다셨다.
만백상원(萬栢商院)!
이곳은 함양 제일의 거상가(巨商家)였다.
역사는 이미 이백여 년, 실로 그 뿌리가 추성대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튼튼한 대상가였다.
대륙교장(大陸交莊)!
이곳은 동해와 남해, 그리고 대운하 전역을 장악한 대해상(大海商)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내륙으로의 진출을 위해 부심하고 있으며, 그를 위해 막대한 자금을 동원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 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 거대한 두 세력이 추성대부인 모용상하의 별세와 더불어 제각기 추성대가를 집어삼키기 위해 한꺼번에 덤벼들고 있는 것이다.
"원래 만백상원은 본가와 상호 불침의 협정을 맺고 있었으나 대부인이 작고하시자 당장 이빨을 드러낸 것입니다."
궁운도는 분노를 억제하듯 낮고 감정 없는 어조로 말했다.
검운강은 독백하듯 담담하게 말했다.
"그 일을 주도하는 자는 만위룡(萬威龍)이란 위인이 틀림없겠군."
만위룡!
그는 만백상원의 소원주(少院主)로 야심에 찬 이십대 청년이었다.
그는 언제나 추성대가의 신화에 불만이었고, 언제고 자신이 그 신화를 뒤엎는 멋진 신화를 창조하겠다는 야망에 불타고 있었다.
이때, 철혈상백 하후노적이 문득 할말이 있는 듯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검운강은 눈길을 그에게로 돌렸다.
철혈상백 하후노적은 걸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또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가주."
"말씀하시오."
"바로 대부인께서 애써 추진하셨던 천축 나량국(那良國)과의 교역 건입니다."
순간, 검운강의 얼굴이 처음으로 가볍게 굳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확인할 수 없는 찰나간의 변화였다.
검운강은 담담하게 반문했다.
"나량국과의 교역 건은 왜?"
"그 건에 만백상원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본가를 방해할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음… 그건 문제가 있군."
검운강은 검미를 가볍게 찌푸렸다.
나량국과의 교역…….
그것은 추성대부인 모용상하가 최후까지 심혈을 기울였던 대사업이었다.
나량국!
천축의 동남부에 위치한 인근에선 손꼽히는 대국이었다.
더욱이 묘안석, 야명주, 취리옥… 등 값진 보석이 많이 생산되기로 유명하다.
또한 그런 것 때문에 항상 주위 국가들의 놀림을 받기도 하는 나라였다.
그런 이유로 나량국은 항상 막대한 병장기를 필요로 하는 터, 추성대부인 모용상하는 거기에 착악, 중원의 병장기를 나량국에 공급하는 대가로 그곳에서 생산되는 각종 보석들을 독점할 수 있는 교섭을 벌여 왔었다.
만일 성공한다면 누구든 추성대가를 통하지 않고선 어떠한 보석도 손에 넣을 수 없게 되는 것.
실로 그것은 막대한 황금을 한손에 움켜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엄청난 권익이었다.
그런데 그 교역이 성사되기 일보 직전에 추성대부인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제 보름 후면 나량국의 사신들이 도착할 예정이나 만백상원에선 그것까지 알아내고 단단히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철혈상백 하후노적.
그는 분통이 치미는 듯 붉게 상기된 얼굴로 거칠게 내뱉었다.
검운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 문제는 내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소."
미소.
검운강의 입가에 한 줄기 잔잔한 미소가 소리 없이 피어 올랐다가 사라졌다.
그것은 분명 어떤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순간, 추성삼상백은 은연중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검운강.
그는 전혀 흔들림 없는 신색으로 삼 인을 돌아보았다.
"문제들은 크지만 그리 어려운 것만도 아니오. 일단 세 할아범들이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은 본가 소속의 상단들의 동요를 막는 일이오."
동시에 추성삼상백은 동감의 표정을 지었다.
검운강의 지적은 매우 명확한 것이었다.
검운강은 말을 이었다.
"그러나 결코 강압적인 힘을 사용해서는 안되오. 인간은 원래 부드러운 것에 약하고 강한 것에 반발하는 심리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럼……?"
뇌우상백 혁유붕이 방법을 묻듯 쳐다보았다.
검운강은 빙긋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능력이 허락하는 대로 그 동안의 노고에 답례하는 식의 보상금을 지급하는 게 좋을 것이오. 그래도 따르지 않는 자들은 혁상백이 처리할 일이고……."
궁운도가 난처한 얼굴로 무언가 말할 듯 입을 열었다.
"그건 좀……."
그러나 재빨리 눈짓으로 그를 제지한 혁유붕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습니다."
문득 검운강은 잠시 말을 끊더니 맑고 다감한 눈빛으로 삼 인을 돌아보았다.
그의 입가에 유현한 미소가 소리 없이 떠올랐다.
"본인은 할아범들을 굳게 믿고 있소. 그러나 할아범들에게 굳이 나를 믿어 달라고는 하고 싶지 않소."
말. 매우 묘한 의미가 담긴 한마디였다.
순간 혁유붕, 하후노적, 궁운도, 삼 인은 무언가 예리한 것에 찔린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때였다.
돌연 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시비 하나가 나타나 뇌우상백 혁유붕에게 봉해진 명첩 하나를 건네 주었다.
명첩을 보는 순간 혁유붕의 안색이 차갑게 굳어졌다.
"대륙교장의 작자들입니다."
"벌써……?"
바로 그때, 궁운도의 안색도 차갑게 굳어졌다.
"이놈들이……!"
철혈상백 하후노적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평소에도 삼 인 중 가장 화급한 성격의 하후노적이었다.
그러나 검운강은 여유로웠다.
"그런 일은 오히려 빨리 끝날수록 좋으니 잘됐군."
검운강은 자리에서 일어서 유유히 밖으로 향했다.
"먼 길을 달려온 손님이니 정중히 만나야 하겠지."
추성삼상백은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고는 급히 검운강의 뒤를 따라 나섰다.
맨 마지막으로 일어선 자전상백 궁운도는 수중의 주판알을 신경질적으로 퉁겨 냈다.
좌르르르륵…….
第 3 章 여우와 늑대
행렬.
눈이 번쩍 뜨일 만큼 화려무쌍한 행렬이었다.
맨 먼저 줄을 잇고 나타난 것은 금사옥주(金絲玉珠)로 현란하게 장식된 열두 대의 팔두마차(八頭馬車).
그 좌우로 일백여 명의 기마호위가 위풍도 당당하게 늘어섰다.
늘씬한 검은색 준마에 검은 무복(武服).
그리고 불빛 아래 번뜩이는 장검과 장창으로 무장한 기마호위대.
그들은 모두 이십대 초반의 미청년이었고, 웬만한 무림고수도 놀랄 정도의 강렬한 예기가 그들에게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
마차의 마부석에도 또한 한결같이 꽃다운 소녀들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더욱 두 눈에 확 박혀 드는 현란한 광경이 있었으니…….
화간(花竿).
그것은 마차 행렬의 중앙에 자리한 하나의 화간이었다.
그 크기가 우선 주위 팔두마차의 동체보다도 오히려 더 큰 가마.
사면은 정교하게 꽃무늬가 새겨진 보옥들로 꿰어 만든 피진사(避塵絲)가 늘어져 있고, 전체는 은은한 향기가 백 장 밖에서도 느껴진다는 서천축 특산의 향유목으로 만들어져 있다.
좌우에서 화간을 떠받들고 있는 것은 열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었다.
그들은 아예 윗통을 활짝 벗어 던진 모습이었다.
벗어붙인 그들의 상체는 온통 현란한 꽃무늬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고, 근육이 꿈틀거릴 때마다 마치 수십 송이의 꽃송이가 화려하게 피어나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대체 이토록 거창한 행렬과 함께 등장한 화간 속의 인물은 누구인가?
쫘르륵… 쫘르륵…….
피진사는 더없이 맑은 음향을 발하며 흔들리고, 화간 속의 인물은 피진사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단지 주위에 그윽한 사향이 떠도는 것으로 미루어 여인이라 짐작될 뿐이었다.
화려하고 엄청난 행렬은 바로 하운각의 정면 화원에 멈추어져 있었다.
하운각 주위에 둘러선 추성대가의 인물들은 아연 긴장된 신색으로 이 거창한 방문객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추성삼상백에 둘러싸인 검운강이 하운각의 접빈청 중앙에 마련된 태사의에 나타났다.
추성삼상백은 공손히 태사의 뒤에 시립했다.
검운강은 조용한 눈길로 전면의 행렬을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이 행렬 전체를 스쳐 중앙의 화간에 이르는 순간, 언뜻 한 줄기 흥미롭다는 듯한 눈빛이 그의 눈가를 스쳤다.
"제법 괜찮은 미모로군."
혼잣말 같은 낮은 중얼거림.
그렇다면 검운강, 그는 저 화간의 피진사를 뚫고 안의 인물을 볼 수 있었단 말인가?
바로 그때였다.
촤르르륵…….
한 줄기 명쾌한 음향이 주위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화간 우측의 피진사가 살짝 걷혀지며 하나의 섬세한 인영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착각이었을까?
화간 속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주위는 홀연 찬란한 광채가 밝혀진 듯 더없이 환해졌다.
소녀.
일신에는 꽃무늬가 수놓인 화려한 궁의를 날아갈 듯 차려 입고 있다. 머리엔 금사로 엮은 둥근 태모자를 멋들어지게 눌러쓴, 눈부신 광휘를 몰고 나타난 화간 속의 인영은 십칠팔 세 가량의 아름다운 절세 미모의 소녀였다.
"아……!"
"음……!"
주위에 서 있던 추성대가의 인물들은 자신도 모르게 넋 잃은 탄성을 흘려냈다.
이때, 막 시선을 드는 소녀와 검운강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생긋!
말할 수 없이 밝고 화려한 미소가 그 순간 소녀의 입가에 꽃잎처럼 맺혀졌다.
지극히 우호적이고도 유혹적인 미소다.
그러나 검운강은 짐짓 못 본 척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화간 앞의 마차에서 두 여인이 내려 소녀의 곁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홍의궁장에 풍염한 몸매가 두드러진 중년미부들이었다.
두 여인 역시 보기드문 절염한 미색이었다.
그런데 두 중년미부는 일견 평범한 눈매가 아니었다.
담담한 가운데 어떤 차가운 예기가 깊숙이 응축되어 빛나는 눈빛.
그것은 무림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절정의 고수자만이 보일 수 있는 눈빛이었다.
추성삼상백의 뇌우상백 혁유붕.
그는 소녀와 두 중년미부를 주시하며 눈가에 빠르게 이채를 스쳐 보냈다.
'저 소녀는 바로 대륙교장의 절세재녀(絶世才女)라는 설난향(雪蘭香)인 것 같군. 그러나 저 예사롭지 않은 두 여인의 정체는 미처 알 수 없군.'
찰나간 혁유붕은 뇌리 속에 최근 자신의 정보망에 의해 파악된 대륙교장의 상황을 떠올렸다.
대륙교장.
일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대해상벌(大海上閥).
그러나 당금에 이르러 대륙교장은 한 가지 큰 문제에 봉착했으니… 바로 대륙교장의 대장령(大長領)인 설한도(雪閑都)에게 자식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의 혈육이라고는 오직 딸 셋.
해서 대장령 설한도는 출가한 두 명의 딸과 사위들에게 각각 일을 맡겨 장차 대륙교장을 이끌어 갈 역량을 키워 주느라 애쓰고 있다.
특히 그는 아직 혼인하지 않은 마지막 셋째딸에겐 각별한 기대를 쏟고 있었다.
― 삼녀(三女) 설난향!
그녀는 이미 절강성 인근에서 절세재녀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터였다. 게다가 일년 전부터 대륙교장의 실권을 거의 다 이어받았다는 후문도 사실성 있게 전해지고 있었다.
쓰윽!
소녀는 두 중년미부를 거느리고 접빈청 위로 올라섰다. 그녀는 검운강 앞에 자리잡고, 두 중년미부가 그 뒤에 시립했다.
소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일단 검운강을 응시했다.
검운강의 나이가 자신보다 어린 때문인가?
소녀의 그런 태도는 몹시 당돌하고 거침이 없어 보였다.
검운강은 특유의 부드럽고 담담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문득, 소녀는 활짝 미소를 피워 물었다. 동시에, 소녀는 맑고 짤랑짤랑한 옥음으로 입을 열었다.
"본녀는 대륙교장의 제 삼영주(三領主)인 설난향이에요."
영주!
이것은 대륙교장에서 대장령 다음의 권위를 지니는 막강한 직책이었다.
검운강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은 검운강이오. 또한 본가의 세 분 상백에 대해선 익히 그 명성을 들어 아시리라 믿소."
검운강은 말과 함께 두 중년미부를 가볍게 일별했다.
설난향은 그 뜻을 알고 생긋 웃으며 답했다.
"두 분은 본녀를 호위하는 화정부인(花精婦人)과 화우부인(花雨婦人)이세요."
"아… 그렇소?"
검운강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두 미부는 전혀 변함이 없는 태도로 그린 듯 서 있었다.
이때, 시비가 향차를 날라 왔다. 때문에 좌중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설난향이 먼저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본 대륙교장의 제의를 생각해 보셨는지?"
일체의 군더더기를 생략한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다.
또한 그녀의 음성엔 은연중 한껏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러나 검운강은 짐짓 의아한 얼굴을 지었다.
"제의? 글쎄… 들은 적이 있소?"
검운강은 등뒤의 뇌우상백 혁유붕에게 의혹의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일고의 가치도 없던 것이라 그 동안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가주."
혁유붕은 이렇게 대답하며 짐짓 기억을 더듬는 표정까지 지었다.
'요것들 봐라!'
설난향은 내심 기막힌 심정이 되었다.
검운강은 잠시 깊숙한 눈길로 그런 설난향을 응시했다.
이어 그는 돌연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본인이 짐작하건대 사실 그런 문제는 대륙교장의 가주와 직접 상의해야 할 문제 같소만……."
"그러나 가주께선 거동이 불편한 관계로 본녀가 직접 나선 것입니다."
설난향은 그럼 그렇지, 하는 듯 지체 없이 대답했다.
검운강은 향차 한 모금을 입으로 가져갔다.
"이렇게 서두르는 것은 그쪽의 사정이 그토록 급하다는 뜻이오?"
순간, 설난향은 입가에 언뜻 한 줄기 미소를 베어물었다. 이제 본격적인 흥정이 시작되었다는 직감이었고, 거래와 흥정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설난향은 한결 더 품위와 무게를 보이며 지극히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런 문제는 서로가 빨리 결론을 내리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물론 우리의 조건은 그쪽에 최대한 만족을 드릴 것입니다."
"음……!"
검운강은 잠시 말없이 심각하게 생각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어 검운강은 등뒤의 추성삼상백을 돌아보았다.
"세 분의 생각은 어떻소?"
추성삼상백은 일순 곤혹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가주… 설마?"
설난향은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검운강과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검운강은 어깨를 으쓱하며 반문했다.
"세 분의 생각은 아직 때가 이르다는 것입니까?"
"말도 안되는 말씀이오, 가주!"
순간, 철혈상백 하후노적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신음성을 흘려냈다.
붉으락… 푸르락…….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검운강의 이러한 태도에 하후노적은 내심 노화가 들끓어 얼굴색이 말이 아니었다.
'제기랄… 좀 전과는 완전히 백팔십도 다른 태도이니 대체 무슨 꿍꿍이속이란 말인가?'
이때, 검운강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설난향을 향했다.
"들으셨소, 소저?"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가주의 결정이지요."
설난향은 미소를 잃지 않고 여유를 보였다.
그녀가 보건대 검운강은 틀림없이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검운강은 난색을 표하며 입맛을 다시는 것이었으니…….
"쩝… 소저 정도라면 생각해 볼 만도 하나 아직 본인의 나이도 있고 하니… 쩝……!"
매우 아쉬운 듯 검운강은 설난향의 얼굴을 보며 재차 입맛을 다셨다.
설난향은 언뜻 당혹의 표정을 떠올렸다.
"지금 무슨 말을……?"
그녀뿐만 아니라 화정부인과 화우부인은 물론, 추성삼상백까지도 동시에 의혹에 찬 얼굴이 되었다.
좌중의 시선은 일제히 검운강의 입술에 집중됐다.
검운강, 그는 일순 씨익 웃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소저와 본인의 혼사 문제를 진지하게 의논한 것이 아니겠소?"
"어맛!"
순간 설난향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터뜨리며 얼굴이 새빨개져 버렸다.
곤혹과 당혹으로 뒤덮인 표정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아름다운 옥용 전체를 뒤덮으며 떠오른 것은 참을 수 없는 분노의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본색을 회복하는 데 거의 일 각의 시간이 소요됐다.
"큭큭……."
"푸후훗……."
철혈상백 하후노적과 자전상백 궁운도는 억지로 웃음을 참느라 입을 틀어막았다.
뇌우상백 혁유붕은 역시 웃음을 참기 위해 얼굴을 기묘하게 일그러뜨리며 헛기침을 터뜨렸다.
"험… 험험……."
결국 검운강은 지금까지 설난향을 완전히 가지고 논 셈이었다.
화정부인과 화우부인.
두 여인의 눈빛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파르르…….
바람도 없는데 두 여인의 소맷자락이 펄럭거렸다.
검운강은 약간 미안한 듯한 표정까지 지었다.
"그러게 대륙교장의 가주와 직접 상의할 일이라 하지 않았소. 본인이 직접 들으면 이렇게 실망할 줄 알았거늘……."
한껏 기품 서린 음성이었다.
설난향은 쌕쌕 숨소리만 거칠게 가빠졌다.
도대체가 이 엄청나게 맹랑한 현실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얼른 판단이 안 서는 그녀였다.
"하지만 이삼 년만 기다려 준다면 어찌해 볼 수도 있는데……."
점입가경!
검운강은 아쉬운 듯 말끝을 흐리며 설난향에게 눈길을 던지는 것이었으니…….
'이… 이 맹랑한 꼬마 녀석을 그냥…….'
설난향은 잡아먹을 듯 검운강을 노려보았다.
빙긋!
검운강은 그런 그녀에게 여유 있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그의 눈길을 대하는 순간, 설난향은 어쩐지 가슴속의 분노가 송두리째 녹아내려 버리는 느낌이었다.
눈빛!
무한한 정감으로 가득 찬 듯한 검운강의 서늘 다정한 두 눈빛.
기억컨대, 설난향은 저렇듯 슬프도록 다감하고 친근감을 안겨 주는 눈빛을 본 적이 없다.
'사내 녀석의 눈빛이 뭐 저렇다지? 보아하니 여인깨나 울리겠는걸!'
설난향.
그녀는 언뜻 그런 생각을 했고, 자신도 모르게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는 왠지 모를 한숨이 터져 나왔다.
"좋아요. 오늘은 본녀의 깨끗한 참패를 시인하겠어요. 하지만……."
설난향은 말끝에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무언가 자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그 모습은 자신만만하고 화려한 광채를 발하던 좀 전과는 또 다른 가슴 떨리는 미태를 자아냈다.
검운강은 싱긋이 웃으며 반문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본녀에게 굴복할 날이 있을 거예요."
"후후… 이삼 년 후라면 충분히 생각이 있소."
검운강은 씨익 미소하며 또다시 시치미를 뗐다.
그러나 설난향도 더 이상 분노치 않고 쌩긋 웃는 여유를 보였다.
"좋아요. 그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하지요.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우호적인 것이라면 얼마든지……."
"본녀와 수행원들이 거처할 장소를 물색해 주셨으면 해요. 함양은 처음이라 미처 마땅한 숙소를 찾지 못했어요."
검운강은 별로 어렵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된다면 본가에 숙소를 정하는 게 어떻소? 장래의 부인과 미리 합환주 비슷한 술 한잔 하는 것도 운치가 있지 않겠소?"
검운강은 장난스런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설난향은 주저없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술이라면 본녀도 자신이 있으니… 좋아요."
활달하고 호쾌한 태도!
마치 작은 여걸을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검운강은 언뜻 한 줄기 보이지 않는 이채를 스쳐 올렸다.
'어머님의 성격을 닮은 여자가 있을 줄은 정말 뜻밖인걸. 제길, 일이 이상하게 되는 거 아냐?'
검운강은 내심 슬며시 어떤 우려가 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자신감이 가슴속에 있는 검운강이었다. 그리고 한 가닥 빠른 계산이 이 순간 검운강의 뇌리에서 섬광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대륙교장 정도라면 후일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나에게 찾아온 가장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것…….'
검운강.
그는 오히려 역으로 대륙교장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이때, 밖에서 이미 혁유붕의 지시에 따라 설난향 일행의 숙소를 정리하느라 시비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동안에도 설난향의 눈길은 검운강의 얼굴을 놓치지 않고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
검운강은 그런 설난향을 향해 싱글싱글 웃었다.
"내 얼굴이 그렇게 잘생겼소?"
순간, 설난향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훗!"
어느덧 그녀의 표정은 한결 밝아져 있었다.
* * *
하운각에서 제상헌으로 향하는 소로(小路).
주위에 심어진 화초들의 꽃잎 위에서 밤이슬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검운강과 뇌우상백 혁유붕.
둘은 소로 위를 산책하듯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도련님. 평범한 여자아이는 결코 아닙니다."
뇌우상백 혁유붕은 친손자를 대하듯 자상하게 말했다.
혁유붕은 검운강이 어릴 적부터 둘만이 있을 때는 언제나 도련님이라고 불렀다.
그것이 오히려 검운강의 마음을 편하게 했고, 추성삼상백 중에서도 유난히 혁유붕을 더 따르게 됐다.
검운강은 혁유붕의 말에 빙긋 미소를 떠올렸다.
"할아범도 그렇게 생각하는군. 어머님이 젊으셨을 땐 아마 지금 그녀의 성격과 비슷하셨을 거야."
혁유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에 조심해야 됩니다. 야망을 가진 여인은 그 누구보다 무서운 적일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백 명의 적을 만들긴 쉬워도 한 명의 친구를 만들긴 어려운 것……."
검운강은 시선을 들어 조용히 허공을 응시했다.
차가운 밤바람이 흐르는 야공 위로 뭇별들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검운강은 심유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에겐 커다란 전화위복이 될지도 모르오."
혁유붕은 언뜻 의아로운 빛을 떠올렸다.
"그 말씀은?"
순간, 검운강은 싱긋 소리 없이 웃으며 혁유붕을 돌아보았다. 어딘지 깊은 의미가 담긴 미소였다.
그리고 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함양 제일의 거상으로 만족하지 않소. 나 검운강의 진정한 목표는 바로 천하 이계(二界)의 절대자가 되는 것이오."
너무도 담담하고 조용한 한마디.
그러나 혁유붕은 보았다.
눈빛! 검운강의 맑고 서늘한 두 눈 깊숙이에서 소리 없이 뻗어 나오는 타는 듯한 열망의 빛을.
쿵…….
혁유붕은 가슴속이 소리나게 진동했다.
'역시…….'
자신도 모르게 터지는 탄성!
그러나 동시에 그는 갑자기 형언할 수 없는 무서운 느낌이 전율처럼 전신에 확 끼쳐 드는 것을 느꼈다.
― 천하 이계(二界)의 절대자(絶代者)!
무릇 천하엔 세 개의 각기 다른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
그 첫째가 절대권력의 상징인 황제와 국가.
둘째는 생(生)과 사(死), 검과 명예에 모든 것을 건 승부사(勝負士)들의 세계― 바로 대무림계(大武林界)였다.
그리고 세 번째는 황금의 세계― 즉 모든 가치, 심지어 목숨까지도 오직 황금의 가치 아래 두는 절대의 부(富)를 추구하는 집단, 대상계(大商界)였으니…….
비록 형태는 다르나 한 방면의 절대자는 그야말로 절대의 절대자였다.
또한 단 일인이 한꺼번에 두 세계의 절대자로 탄생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엄청나고 믿을 수 없는 야망의 한마디가 검운강― 이십오 세 어린 소년의 입에서 서슴없이 흘러 나온 것이다.
"도련님의 말씀은?"
혁유붕은 한참 후에야 반문하듯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의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한 말이기도 했다.
검운강은 씨익 웃었다.
"후훗… 사실은 세 자리가 모두 흥미있지만 남들이 욕할 것 같아서 그 중 가장 고리타분한 것 하나는 양보하기로 한 것뿐이오."
점입가경.
그러나 혁유붕은 검운강과 같이 웃을 수가 없었다.
감히 검운강은 황제의 자리를 고리타분하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뿐인가? 다음 순간, 이어지는 검운강의 말은 더욱 놀랍고 충격적인 것이었으니…….
"할아범도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나는 벌써부터 많은 준비를 해왔소. 사실은 무림이란 곳에도 이미 작은 안배를 해놓았소."
순간, 혁유붕은 가슴속이 무너질 듯 진동했다.
'설마……!'
그것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니, 그런 일을 벌이기엔 검운강은 아직 너무도 어린 나이였다.
"도… 련님……!"
혁유붕은 마침내 떨리는 신음성을 흘려냈다.
"그녀와 약속한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오늘의 이야기는 할아범만 알고 있어야 되오."
검운강은 그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더니 제상헌 쪽으로 유유히 걸음을 옮겨 사라져 갔다.
"세상에……."
홀로 남은 혁유붕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마치 쇠뭉치로 뒤통수를 세차게 강타당한 그런 기분이었다.
그는 한참 동안 미동도 없이 멀어지는 검운강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리고 혁유붕은 한참 후에야 자신도 모르게 한 줄기 독백을 흘려냈다.
"역시 피는 속이지 못한다는 말이 맞군."
독백.
무슨 뜻인가?
이는 분명 무언가 알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의미심장한 독백이었다.
* * *
수빈각(秀賓閣).
검운강의 거처인 제상헌의 우측 산기슭을 끼고 외따로 호젓하게 지어진 전각.
추성대가를 방문하는 귀빈들의 숙소로 사용키 위해 특별히 지어진 건물이었다.
특히 사면에 극히 아름답게 꾸며진 인공호수가 있어 매우 운치가 감도는 곳이었다.
이곳에 오늘은 대륙교장의 설난향 일행이 묵고 있었다.
청수정(靑水亭)!
인공호수 위에 지어진 아름다운 수상정자(水上亭子).
수빈각과는 무지개 형상의 부교(浮橋)로 연결되어 있고, 짙푸른 호수에 등불빛이 일렁이는 모습은 가히 환상과도 같은 절경을 자아낸다.
지금 등불빛과 함께 선녀처럼 아름다운 한 소녀의 얼굴이 호수의 수면에 비치고 있었다.
설난향.
바로 그녀였다.
저녁 호수의 절경을 감상하듯 휘황한 등불에 싸여 그린 듯 앉아 있는 설난향.
그녀의 모습은 오히려 등불이 무색토록 화려하고도 수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는 어김없이 조용히 시립한 화정부인과 화우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설난향의 시선은 가끔씩 수면을 떠나 부교 위로 던져졌다.
그녀는 지금 검운강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일순, 궁등을 손에 든 소비 한 명이 부교 위로 나타났다.
그 뒤로 미소를 띤 검운강의 수려한 얼굴이 설난향의 시야를 채우며 들어왔다.
설난향은 문득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했다.
처음 추성대가를 찾았을 때의 어딘지 오만했던 기색은 이미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의 한 쌍 봉목엔 오히려 강력한 적수를 대하는 듯한 한 가닥 긴장감까지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설난향은 입가에 한 줄기 화사한 미소를 띠우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이윽고 검운강은 설난향 앞에 당도했다.
"본인이 약간 늦은 것 같소."
검운강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
설난향은 화사한 미소를 보였으나 반짝이는 봉목엔 언뜻 한 가닥 기이한 이채가 스쳤다.
이 순간, 아까와 달리 백의유삼 대신 칠흑처럼 검은 흑의를 입고, 단정히 묶어 올렸던 머리도 어깨 위에서 검은 흑건(黑巾)으로 느슨하게 묶은 검운강의 모습.
그 칠흑같이 검게 차린 모습은 투명하도록 흰 피부의 준미한 얼굴과 어울려 기묘하고 특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 모습은 그를 처음 대했을 때와는 전혀 또 다른 느낌으로 설난향에게 다가왔다.
뭐랄까?
이미 십오 세 소년이 아닌 마치 성숙한 이십대 청년을 대하는 듯 설난향은 기이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 작은 사내는 자신에게서 풍기는 기도와 느낌을 너무도 쉽게 바꾸는군… 역시 보통의 재목은 아니야.'
설난향은 내심 경이의 어조로 중얼거렸다.
설난향.
그녀는 결코 많은 나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나이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을 경험했고, 검운강만큼 이토록 신비한 분위기를 지닌 인물은 본 적이 없었다.
'아버님조차도 이 작은 사내를 대하면 감탄하실 거야. 다른 여인에게 뺏기기엔 너무 아까운걸!'
설난향의 뇌리에 자신도 모르게 이런 엉뚱한 생각이 스쳤다.
그때였다. 돌연 검운강의 얼굴이 예고도 없이 그녀의 눈앞에서 크게 확대되는 것이 아닌가?
"어멋!"
설난향은 부지불식간에 흠칫 뒤로 물러섰다.
어이없게도 검운강이 돌연 그녀를 향해 얼굴을 불쑥 내민 것이다.
"후후… 아예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게 어떻소? 아마 이 정도로 잘생긴 얼굴도 보기드문 것임은 확실하오."
싱글싱글…….
검운강은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 채 짓궂은 웃음을 흘렸다.
설난향은 비로소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옥용을 살포시 붉히며 자세를 바로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쾌활한 태도로 말했다.
"호홋… 가주께선 거울을 다시 보셔야 될 것 같군요."
검운강은 씨익 웃었다.
"가주란 호칭은 쑥스러우니 그냥 공자라 부르도록 하시오. 서방님이란 호칭도 별로 나쁜 건 아니지만……."
검운강은 말꼬리를 흐리며 다시 짓궂게 씨익 웃었다.
설난향은 하얗게 눈을 흘겼다.
"공자의 방정맞은 입술에 벌주를 한 잔 드려야겠군요."
설난향은 그 동안 시녀들이 마련해 놓은 술상에서 검운강의 술잔에 술 한 잔을 가득 따랐다.
포르릉…….
은은한 호박빛의 액체가 술잔에 담겨지자 주위엔 향긋한 주향이 퍼졌다.
추성대가에서 귀빈에게만 대접하는 최고급의 화향백로주(花香百露酒)였다.
검운강은 단숨에 자신의 벌주를 마셨다.
"본인의 눈을 어지럽히는 소저의 아름다운 얼굴에도 벌주를……."
검운강은 싱글 웃으며 설난향의 잔에도 한 잔의 술을 따랐다.
설난향의 옥용이 또다시 살짝 노을빛으로 붉어졌다.
결코, 아니 절대로 싫은 말은 아니었다.
설난향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는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긴장이 풀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오히려 검운강에게 빨려들고 있었고 문제는 이 순간 자신이 그것을 전혀 의식치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설난향이 술잔을 내려놓는 순간, 검운강은 문득 정색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 본인은 소저께서 본가를 방문한 본래의 목적을 잘 알고 있소."
설난향은 흠칫 빠르게 긴장의 빛을 떠올렸다.
검운강은 담담한 어조를 이었다.
"또한 본인은 그것에 대해 전혀 기분 나쁜 감정은 가지고 있지 않소."
담담하나 진실함이 깃든 음성이었다.
"고맙군요. 사실은 그것을 가장 걱정하고 있었어요."
설난향은 온유한 음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검운강은 그녀를 깊숙이 직시하며 자르듯 말했다.
"추성대가의 가주인 본인은 소저와 대륙교장의 제의를 명확히 거절하오."
한 올의 틈도 엿볼 수 없는 단호무비한 어조.
설난향은 일순 엄청난 위압감이 자신을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대단하다!'
설난향은 순간적으로 내심 경탄성을 터뜨렸다.
그녀를 호위하는 두 부인 역시 만면에 긴장의 빛을 떠올렸다.
설난향은 할말을 잊은 채 잠시 침음에 빠졌다.
실로 이것은 그녀의 생애 최초로 겪는 완전한 패배였다.
'작지만 강한 사내야!'
설난향은 내심 불쾌 이전에 감탄을 느꼈고, 기이하게도 왠지 흐뭇한 기분이었다.
이때, 검운강은 한 줄기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그는 맑고 다정한 눈빛으로 설난향을 감싸듯 응시했다.
"그러나 본인은 대륙교장과 소저의 최후 목적에 대해선 도움을 줄 수 있소. 물론 소저가 본인에게 협조한다면 말이오."
이제 상황은 역전되었다.
이젠 검운강이 오히려 설난향을 설득하게 된 것이다.
설난향의 눈빛이 언뜻 보이지 않게 흔들렸다.
그러나 설난향은 짐짓 싸늘한 어조로 반문했다.
"최후 목적이라면?"
대륙교장의 최후 목적… 그것은 물론 내륙 진출의 야심이었다.
순간, 검운강의 안색이 냉랭히 굳어졌다.
"소저는 본인을 너무 얕잡아보는군. 그런 식으로 본인을 판단하고 상대하려 한다면 대륙교장과는 더 이상 할말이 없소."
나직한 어조였다.
그러나 감히 범할 수 없는 엄청난 위엄이 이 순간 검운강의 전신에서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설난향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검운강은 말과 함께 오연히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찰나, 두 부인이 그를 제지할 듯 불쑥 앞으로 한발을 내디뎠다.
검운강은 유현한 눈빛으로 그녀들을 일별했다.
'억…….'
'무서운 예기… 절정의 예기가 아닌가!'
두 부인은 전율하듯 긴장에 휩싸이며 전신이 일순간에 굳어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검운강은 어느새 무심히 등을 돌렸고, 시립해 있던 소비가 쪼르르 달려와 그의 발밑에 궁등을 비췄다.
'흥! 까불다 큰코다칠 줄 알았어!'
소비는 고소하고 통쾌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때였다.
"잠깐… 공자!"
설난향이 다급한 음성으로 검운강을 불렀다.
검운강은 그러나 대꾸 없이 걸음을 옮겼다.
설난향은 당황한 나머지 부르짖듯 외쳤다.
"벌주 두 잔으로 무례를 용서하실 순 없나요? 대장부의 걸음을 멈추게 한 죄로 다시 벌주 두 잔을 추가하겠어요."
항복!
무조건의 항복이었다.
검운강은 입가에 언뜻 한 줄기 보이지 않는 미소를 스쳐 물었다.
그는 천천히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본인이 경솔했소. 하여 본인도 벌주 두 잔을 들겠소."
그는 설난향의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설난향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불어 냈다.
모욕감 따위는 이 순간 아예 느껴지지도 않는 그녀였다.
화정부인과 화우부인은 아까의 충격 때문인 듯 기이한 눈길로 검운강을 주시하고 있었다.
'결코 환각은 아니었어. 분명 일신에 고절한 무예를 익힌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기도였는데…….'
두 여인은 머릿속에 혼란을 느꼈다.
검운강의 이 순간 눈빛은 다정다감하기만 했고, 좀 전의 그 엄청난 위압감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때, 검운강과 설난향은 나직한 음성으로 밀담을 시작했다.
머리가 맞닿을 듯한 자세였으나 서로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설난향은 연신 감탄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녀는 검운강의 말에 걷잡을 수 없이 빨려드는 듯했다.
밀담은 깊어 가고, 호수에 어린 궁등의 불빛은 밀려드는 바람에 따라 아름답게 일렁이고 있었다.
第 4 章 초야 속의 방문객
다음날 아침, 설난향 일행은 친숙한 우호의 분위기 속에 추성대가를 떠났다.
그녀와 검운강 사이에 오간 마지막 약속― 그것은 검운강이 가까운 시일 내에 대륙교장을 방문한다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 검운강이 추성대가의 가주의 위(位)를 정식 계승했음이 각지의 상인들에게 알려졌다.
― 추성대가의 제이대 가주.
추성대상후(秋星大商侯) 검운강!
이것이 바로 검운강의 새로운 공식 명칭이었다.
그리고 추성대가의 전 소속 상단에게 그 서열과 공로에 따라 일찍이 없던 후한 상금과 포상이 대대적으로 주어졌다.
그에 따라 추성대가 전체는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소속된 상단들은 더욱 활발히 천하 각지를 누비기 시작했다.
마침내 함양의 다른 거상가(巨商家)들은 질투에 가까운 놀라움의 시선으로 추성대가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추성대상후 검운강!
정녕 이 어린 십오 세 소년은 그들에게 있어 전혀 예기치 못했던 거대한 변수였다.
* * *
지옥전막(地獄戰幕)!
일명 악마의 전단(戰團)이라고도 부르는 세력이 이 땅에 존재한다.
그 역사는 이미 오백여 년.
그들이 하는 일은 전쟁청부업(戰爭請負業), 즉 대가를 받고 대리로 전쟁을 하는 것이었다.
지옥전막!
피와 싸움이 있는 곳이라면 천하 어디에든 그들은 간다.
실로 소림을 위시한 구파일방과 사도(邪道)의 뭇 거파들이 공인된 강자라면 지옥전막, 그들은 공인되지 못한 최강자였다.
아니, 공인된 것보다 더 확실한 최강 집단이었다.
신화!
그들에 관한 신화는 무수히 많았다.
그러나 그 중 단 두 가지만 들어도 세인들은 벌써 금할 수 없는 공포와 전율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었으니…….
백년 전.
화산파(華山派)의 전대 장문인이 지옥전막을 모욕하는 단 한마디의 발언을 했다.
그리고 그날 밤 자시경.
전차(戰車)!
핏빛 바탕에 반쪽의 칠흑색 암월(暗月)이 그려진 깃발을 꽂은 오백 대의 육중한 철갑전차(鐵甲戰車)!
구파일방의 일원이며 혁혁한 명문거파인 화산파는 그 오백 대 철갑전차에 의해 철저히 유린되고 말았다.
시간은 단 한 시진.
그 짧은 시간에 장문인은 전차 바퀴에 전신이 갈가리 찢긴 채 참혹한 모습으로 죽었고, 대화산파는 거의 전멸 직전에 이르는 참화를 당한 것이다.
가공(可恐)!
정녕 그 한마디 말 외에는 표현할 수조차 없는 공포의 집단 지옥전막이었다.
그런데 그 후, 다시 오십여 년이 흐른 어느 날.
당시 사도대총사(邪道大總師)인 묵검패황(墨劍覇皇) 우문유(宇文有)가 자신의 회갑연에서 호기 있게 외쳤다.
― 본좌의 회갑을 기념키 위해 천하무림에 한 가지 약속을 하
노니… 금후 삼년 이내에 지옥전막을 사도대총사의 이름으로 제거할 것을 약속하노라!
사실 묵검패황 우문유는 자신감이 있었다.
당시 그의 사파(邪派)는 정파(正派)를 누를 정도로 엄청난 힘을 축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막 잠자리에서 일어난 묵검패황 우문유에게 하나의 목함이 전달되었다.
목함!
가공하게도 그 속에는 그가 가장 신뢰하던 초강 실력자인 수하의 수급이 들어 있었다.
그로부터 백일 간.
목함은 하루 한 번씩 어김없이 사도대총사 우문유의 침상 앞에 당도하였다. 또한 그 안에는 어김없이 그의 수하의 수급이 하나씩 들어 있었다.
결국 사도대총사 우문유는 공포로 인해 거의 미칠 지경에 이르렀고, 그는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어 공포로부터 탈출하고 말았다.
― 지옥전막!
명실공히 그들은 이 시대 최강의 공포였다.
그리고 그들에 대해 정작 알려진 사실이 별로 없다는 것은 또 하나의 가슴 떨리는 전율이었다.
공포와 전율.
그리고 신비의 이름― 지옥전막!
그런데…….
* * *
눈. 첫눈이었다.
그야말로 새하얀 백설이 이날 저녁 함양성 전체를 온통 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마치 함양 전체를 하얀 물감으로 칠해 놓은 듯, 백설에 뒤덮인 함양성의 정경은 경건하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난리옥!
이곳은 황금의 대도 함양에서도 가장 호화로운 주루였고 거상대부(巨商大富)들만이 출입하는 곳이었다.
난리옥 앞.
점소이 한 명이 잔뜩 부은 얼굴로 거칠게 눈을 쓸고 있었다.
"떡을 칠… 내장에 기름이 줄줄 흐르는 놈들은 눈이 오면 좋다고 지랄들 하지만… 에이, 빌어먹을!"
팍… 팍… 팍…….
점소이의 신경질적인 비질에 바닥의 눈들이 사방으로 퉁겨 날아갔다.
그렇지 않아도 쉴 틈이 없는데 눈이 오는 날이면 일이 적어도 세 배는 많아지니 점소이는 보통 울화가 치미는 게 아니었다.
"어이구, 허리야!"
점소이는 잠시 손을 멈추고 허리를 폈다.
그 순간이었다.
"억!"
점소이는 돌연 두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지더니 비명을 지르며 뒤로 벌렁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어… 어……!"
넘어진 채 비명도 아닌 괴상한 소리를 더듬대는 점소이는 아예 반쯤 정신이 나간 표정이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점소이의 전면.
두 명의 인물이 칠흑 같은 검은 말을 타고 소리도 없이 나타나 있었다.
이 인.
소리도 없이 돌연 불쑥 눈앞에 나타난 것도 놀랍거니와, 점소이를 더욱 질리게 만든 것은 다른 것이었다.
주위의 백설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며 서 있는 칠흑색 흑마. 그야말로 잡털 하나 없는 완벽한 암흑빛의 흑마였다.
그 위에 마치 말과 한 덩어리 동체처럼 짙은 먹물의 암흑색 무복을 걸친 한 인물이 앉아 있었다.
일견 이제 막 중년을 넘어선 듯한 나이.
몹시 수려한 이목구비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오른쪽 얼굴에 미세하게 그어진 검흔 하나로 인해 어떤 차가운 느낌이 배어져 나오고 있었다.
눈.
그의 눈빛은 매우 특이했다.
더없이 무심한 듯하면서도 다감해 보였고, 그런가 하면 끝없는 빙동(氷洞)처럼 차갑게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다.
보면 볼수록 전혀 아무것도 추측할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그런 눈빛이었다.
때에 따라선 어떤 전율감마저도 느끼게 하는 무서운 눈빛인 것이다.
흑마, 흑의무복은 물론이요, 앉아 있는 안장 역시 묵빛 안장. 그리고 그 안장의 좌우엔 또한 완전한 칠흑빛의 기광이 감도는 한 자루의 검과 도가 비스듬히 꽂혀 있었다.
그 완벽한 암흑빛으로 인하여 한 번 보면 다시는 잊을 수 없도록 너무도 강렬히 특징지워지는 흑마의 흑의중년인.
더욱 그 짙은 암흑의 모습은 특이한 눈빛과 어우러져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분위기를 주위에 안개처럼 자아내고 있었다.
점소이의 눈에는 그의 그런 모습이 마치 유부(幽府)에서 갓 나온 유령처럼 보였다.
흑의중년인.
그는 점소이의 과민한 반응에도 전혀 무감동한 듯 무심한 눈길로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따각…….
흑의중년인의 뒤에서 한 명의 인물이 앞으로 모습을 내밀었다.
역시 칠흑의 흑마에 흑의무복을 걸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인물은 붉은 동안에 주독으로 절은 새빨간 딸기코를 지닌 희끗한 머리의 초로인(初老人)이었다.
머리칼은 멋대로 흐트러진 모습이었고 두 눈은 일견해서도 치기 어린 장난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런데도 그 또한 어김없이 검은 안장에 칠흑같이 검은 검과 도를 메고 있는 것이었으니…….
일견 노인의 용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었다.
점소이는 노인을 보자 약간 정신을 차렸다.
딸기코 노인은 점소이를 향해 장난스럽게 웃었다.
"클클… 그 녀석, 가랑이에 오줌이나 지리지 않았는지 모르겠군."
매우 인간적인 웃음과 음성이었다.
"씨이……."
점소이는 볼멘 소리를 발하며 얼굴이 시뻘개졌다.
사실 너무 놀라 오줌을 지린 것이다.
그때, 엉덩이의 눈을 툭툭 털며 일어서는 점소이 앞에 묵직한 은자 주머니 하나가 털썩 던져졌다.
"옛다, 이걸로 죽엽청이나 한 병 주고 나머지는 네 옷이나 한 벌 사 입어라."
"어? 헤헤헤……."
점소이는 삽시간에 공포 따윈 씻은 듯 잊어버리고 은자의 매력에 황홀해졌다.
점소이는 허리가 꺾어져라 노인을 향해 절을 했다.
"어서 들어가시죠. 멋있는 나으리……."
딸기코 노인은 피식 웃었다.
"그놈 아부하는 거 하난 제대로 배웠군. 그냥 죽엽청이나 가져와."
"예에……?"
점소이는 노인의 의중을 얼른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내 또 한 번 꺾어져라 절을 했다.
"그럼 잠깐만… 아주 아주 잠깐만 기다려 주십쇼."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점소이는 바람같이 주루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바지가 왜 젖었냐고 묻는다면? 눈 위에 넘어졌다고 품위 넘치게 말해 주리라!'
치밀하게 그런 대답도 준비했다.
잠시 후, 점소이는 술병을 안고 쪼르르 뛰어나오며 이번엔 아예 의식적으로 흑의중년인 쪽은 외면하였다.
'또 한 번 지릴라…….'
"여기 있습니다. 헤헤……."
"음, 좋아."
노인은 술병을 받더니 단숨에 한 병의 죽엽청을 비워 버렸다.
"와……!"
점소이의 입이 쩍 벌어지며 탄성이 터졌다.
점소이 생활 십여 년이 넘는 지금껏 이렇게 멋들어지게 그 독한 죽엽청을 해치우는 술꾼은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것도 마상(馬上)에서…….
"어… 시원하다!"
노인은 마치 냉수 한 사발을 들이킨 것처럼 술병을 다시 점소이에게 건네 주었다.
점소이는 완전히 존경에 가까운 감탄의 시선이 되었다.
그때, 노인이 문득 질문을 던졌다.
"한 가지만 묻자. 여기 추성대가가 어디 있지?"
"이 길로 쭉 가시면 열두 개의 큰 장원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엄청나게 큰 대장원이 바로 함양 제일의 거상가인 추성대가입니다. 추성대가 하면 함양에선 이겁니다."
점소이는 단숨에 긴 설명을 주워삼키며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 올렸다.
"호… 그래?"
노인은 눈가에 이채를 떠올렸다.
"그 집 어린 가주님은 인심 좋고 총명하시고… 에… 또… 아무튼 딸 가진 거상들은 벌써부터 군침을 흘리고 있지요."
점소이는 더욱 신바람이 나서 제자랑하듯 떠들어댔다.
노인도 흥미있는 표정이었다.
그때였다.
흑의중년인.
미동도 없이 서 있던 그가 돌연 소리도 없이 말을 움직여 그 자리를 떠나 갔다.
마치 말과 한 몸인 것처럼 너무도 자연스럽게…….
노인은 흠칫하더니 자신도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다음에 보자. 아가야……."
그는 점소이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고는 흑의중년인의 뒤를 따라 멀어져 갔다.
점소이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허… 귀신 같은 사람과 진짜 사람 같은 사람이 함께 다니는군. 제길, 오늘따라 눈이 오더라니……."
그러나 주머니에 느껴지는 은자의 묵직한 감촉은 또다시 점소이의 가슴을 황홀하게 만들었다.
"으히히… 우선 젖은 옷이나 말려야지."
점소이는 좋아라 주루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러나 점소이는 이 순간 한 가지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흑마의 이 인.
그들이 멀어지는 동안 말발굽 소리가 단 한점도 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만일 그것을 깨달았다면 진짜 귀신을 보았다고 졸도하고 말았으리라.
이 인.
마치 어둠의 숭배자처럼 암흑 일색을 하고 소리 없이 나타난 흑마의 중년인과 노인.
과연 추성대가를 찾는 그들은 누구인가?
* * *
흑의중년인과 초로인.
그들은 마치 물이 흐르듯 유연한 속도로 눈 속을 전진해 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고, 한점의 소리도 없었다.
그것은 매우 기이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광경이었다.
게다가 이 인은 물론 두 필의 흑마 또한 한점의 눈도 맞지 않아 마치 흩날리는 눈송이조차 묘하게 피해서 떨어지는 듯 보였다.
일순 등뒤로 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선 한 채의 거대한 장원이 그들의 시야 속으로 빨리듯 들어왔다.
육중한 정문의 좌우로 밝은 궁등빛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불빛 속에 새하얀 눈송이들이 춤추듯 낙화하고 있었다.
<추성대가>
현판 위로 눈송이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그 현판을 일견하며 초로인은 흑의중년인에게 눈길을 돌렸다.
"클클… 제법 거창한 곳에 살고 있군요. 더구나 가주 나으리라니……."
감탄인지 비꼬는 것인지 모를 아리송한 말투가 그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중년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초로인은 말을 이었다.
"그가 그렇게도 중요한 인물입니까, 막주? 쓸데없는 일로 근 일년을 허비한 것이 아니면 좋을 텐데……."
막주(幕主)!
그렇다면 저 기이하고 형용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는 흑의중년인은 어느 일파의 종사(宗師)란 말인가?
중년인.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빌어먹을! 녀석의 정체와 거처 따위를 알아내는 데만 꼬박 일년을 허비했으니, 만약 거절이라도 당하는 날이면 우리는 오뉴월 개똥 신세밖에 안되는 것인데……."
초로인은 혼자서 불만스럽게 투덜댔다.
그것은 분명 검운강을 두고 한 말이었다.
검운강.
그를 찾기 위해 이들은 일년의 세월을 소비한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알 수 없는 기이한 노릇이 아닌가?
천하 도처에 널려 있는 상인들에겐 검운강, 하면 아무리 길게 잡아도 단 반 각이면 모든 것이 훤하게 밝혀질 텐데 무려 일년이라니…….
그때였다.
도무지 무심하기만 하던 흑의중년인이 문득 소리 없이 빙긋 미소를 떠올렸다.
그러나 미소는 나타낼 때보다 더 빠른 순간에 자취를 감춰 버려 아예 웃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지옥전막(地獄戰幕)에 꼭 필요한 인물이다, 적풍."
극히 저미하게 흘러 나오는 무감정한 어조.
그런데도 믿을 수 없으리만큼의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뿐인가?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그의 입에서 흘러 나온 한마디의 명칭이었다.
지옥전막!
그렇다면 이 신비 기도의 인물은 지옥막주?
― 제팔대 지옥전막 막주.
전사신황(戰士神皇) 담휘웅(潭煇雄)!
그렇다. 바로 이것이 이 인물의 정확한 명칭이었다.
그러나 전사신황 담휘웅,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었다.
단지 이십 세의 약관에 지옥전막의 막주 위(位)에 오른 경이적인 인물이며, 그에게 검을 들이대고 살아 남은 자가 결코 없다는 정도였다.
극히 간략한 이 두 가지 사실.
그것은 곧 일인의 거대한 문파를 상징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사실이었다.
진정 공인되기를 거부한 최강자!
타인이 자신을 평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절대강자!
전사신황 담휘웅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그런데 첫눈이 풍성하게 쏟아지는 이날 저녁.
이 시대 최고의 공포와 신비집단 지옥전막의 막주, 전사신황 담휘웅이 검운강을 찾아 함양성으로 들어왔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적풍(赤風).
붉은 바람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초로인.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탄성을 흘렸다.
"허허… 그래도 그렇지. 막주께서 이렇게 직접 찾아오셔야 하다니……."
적풍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때 전사신황 담휘웅의 흑마가 조용히 발을 멈췄다.
이미 추성대가의 정문 앞이었다.
전사신황 담휘웅은 깊숙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위의 현판을 응시했다.
"지금은 천하의 아무도 상상조차 못하고 있지만 본좌는 단언할 수 있다. 적풍! 늦어도 십년이다."
십년.
그것을 확신하듯 전사신황 담휘웅은 일순 말을 끊었다.
적풍은 언뜻 두 눈을 크게 벌려 떴다.
그가 알기로 자신이 하늘처럼 존경하는 막주가 이렇게 많은 말을 한꺼번에 쏟아 놓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전사신황 담휘웅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늦어도 십년 안에 암향비도 단유림, 아니 암향비도 검운강은 천하를 능히 경략할 거대한 대륙의 산맥으로 성장할 것이다!"
미소.
확신의 미소가 또다시 보일 듯 말 듯 전사신황 담휘웅의 입가를 스쳐 갔다.
적풍은 고개를 삐딱하게 꼬았다.
'암향비도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그는 곧 정문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육중한 정문을 두드렸다. 왜 그렇게 조심스럽게 행동을 하는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날씨 탓인가? 제기랄!'
적풍이 내심 투덜거리는 그때였다.
구… 웅!
추성대가의 육중한 정문이 좌우로 조용히 열렸다. 동시에 앳되나 정중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안쪽으로부터 들려 왔다.
"어느 귀인의 왕림이신지요?"
'음…….'
적풍은 적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문 안쪽, 양옆으로 앳된 소동과 소녀가 반쯤 허리를 숙인 자세로 서 있었다.
깨끗하고 단정한 백의.
귀엽고 홍조 띤 얼굴엔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그 집의 하인배를 보면 집주인의 성품을 알 수 있다 했거늘…….'
적풍은 경탄의 눈빛을 떠올리며 일단 무게 있게 헛기침을 했다.
"험험… 우리는 가주님을 만나러 먼 길을 왔으니 늦은 시각에 방문한 결례를 용서하시라고 전해 주게나."
장담하건대, 이것은 적풍 그가 평생 해본 말 중 가장 정중한 말이었다.
전사신황 담휘웅이 소리 없이 빙긋 웃는 것도 그 순간이었다.
추성대가의 소비는 적풍의 말에 생긋 미소하며 말했다.
"그러신가요? 가주께선 마침 빈청에 계시니 안으로 드십시오."
전혀 스스럼이 없고 경계의 기색도 없는 태도였다.
적풍은 내심 갸웃했다.
'이 정도쯤의 대상가라면 경호무사들이 득실거릴 텐데… 이상하군!'
더욱이 말을 탄 채 들어서도 제지를 가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적풍은 대문 안쪽 깨끗하게 닦여진 대리석의 도로를 지나며 연신 머리를 갸웃거렸다.
같은 시각. 문제의 주인공 검운강은 하운각에서 추성삼상백과 함께 있었다.
짜르륵…….
짜르르륵…….
주판알이 구르는 명쾌한 음향이 연신 하운각을 울리고 있었다.
하운각의 접빈청.
둥근 원탁을 중심으로 사 인이 빙 둘러앉아 있었다.
전면 중앙의 태사의엔 단아한 백의 차림의 검운강이, 좌우론 철혈상백 하후노적과 뇌우상백 혁유붕이 자리했다.
그들은 모두 느긋한 얼굴로 향차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 목하 자전상백 궁운도가 신명나게 주판알을 퉁기고 있었다.
쫘르르륵… 쫘륵……!
"천축 방면의 제팔상단(第八商團)에서 황금 이천 냥이 입금되었고 대막의 제삼상단에서 오백 냥!"
주판알이 한차례 퉁겨질 때마다 궁운도의 입에서 신나게 입금액이 흘러 나왔다.
"좋아… 아주 좋아… 훌륭해."
철혈상백 하후노적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고 뇌우상백 혁유붕은 담담한 미소를 시종 띠고 있었다.
그때였다.
"조용히 좀 해!"
궁운도가 하후노적을 힐끗 노려보며 신경질을 부렸다.
"좋아! 음? 뭐라고 녀석아!"
뭣도 모르고 또 고개를 끄덕이려던 하후노적은 불끈했다.
혁유붕은 연장자이나 하후노적과 궁운도 둘은 원래 친구 이상의 사이였다.
그때 혁유붕이 재빨리 눈짓을 보내자 하후노적은 검운강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약간 머쓱해진 표정으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음… 음… 두고 보자, 말라깽이!"
"말라깽이? 돼지 같은 녀석!"
궁운도는 지지 않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검운강이 함께 있기 때문에 평소처럼 투닥대고 마음껏 싸우지 못하는 것이다.
검운강은 그들의 치기 어린 언쟁에 희미하게 웃었다.
사실 이런 일은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었다.
쫘르르륵……!
이윽고 마지막 신나는 주판음과 함께 궁운도의 계산이 떨어졌다.
"이로써 금일의 총수입은 이천삼백구십이냥 이십전 반푼이며 지출된 것은 일천백오십냥인고로 순수익은 일천이백냥 오십전 반푼이 되겠습니다, 가주님!"
탁!
주판 위에 놓여진 모든 숫자가 명쾌하게 떨어졌다.
검운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궁 할아범은 항상 정확해. 천하에서 할아범만큼 정확한 계산을 하는 사람은 단연코 없을 것이오."
"험험……."
궁운도는 어깨를 으쓱하며 품위 있게 헛기침을 했다.
사실 검운강의 말은 전혀 틀림이 없는 사실이었다.
다른 상가에서는 자전상백 궁운도와 같은 계산의 귀재를 가지지 못한 게 불운이라고 스스로를 탄식할 정도였다.
그때, 철혈상백 하후노적이 한마디 끼여들었다.
"녀석, 네놈에게 그 흐뭇한 계산을 하게 하는 사람은 바로 나라는 것을 명심해라."
자존심.
추성대가 소속 전 상단을 지휘하는 인물의 자존심이 불쑥 솟구친 것이다.
그러나 궁운도는 즉각 반격을 가했다.
"머리 나쁜 놈은 말도 비뚤게 한다지?"
"뭐야? 이 말라깽이……."
"돼지야!"
바야흐로 또 한차례 언쟁이 시작될 모양이었다.
그러나 뇌우상백 혁유붕이 그들의 언쟁을 말리듯 재빨리 검운강을 향해 입을 열었다.
"뭐 하명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가주?"
검운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날씨가 차가워질 것이니 관부(官府)의 군졸들이 입을 방한복과 쌀 한 섬씩을 보내 주도록 하지요. 아울러 본가의 그 누구도 추위에 떨게 해서는 안됩니다."
검운강은 철혈상백 하후노적을 쳐다보았다.
"이 일은 철혈 할아범이 맡는 게 가장 적합할 것 같소."
철혈상백 하후노적.
그는 성미는 불 같지만 반면 인심 좋은 호인으로 정평이 난 인물이었다.
"험… 알겠습니다."
철혈상백 하후노적은 큰기침과 함께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궁운도는 이미 거기에 드는 비용을 계산하고 있었다.
쫘르르륵… 쫘르륵…….
원래 함양의 거상가들은 관부의 고관들에게 무슨 이유가 생길 때마다 후한 뇌물을 주어 왔다.
그러나 정작 그 밑에서 고생하는 말단 군졸들에겐 냉랭하여 은자 한 닢도 주지 않는 그들이었다.
그러나 추성대가는 그와 정반대였다.
하급 관리나 말단 군졸들에겐 일년에 수십 차례씩 뇌물 아닌 도움을 후하게 베풀어 왔다.
해서 다른 상가의 상인들이 술에 취해 말썽이라도 부리면 군졸들에게 신물이 나도록 얻어터지지만, 일단 추성대가의 소속이면 정중하게 마차까지 태워서 집까지 데려다 주는 친절을 아끼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전인 관부대인들 등뒤에다 침을 뱉고 욕을 해도, 추성대가의 가주에겐 진심 어린 고마움의 인사를 보냈다.
또한 전날의 추성대부인이나 검운강은 그들의 순수한 마음을 항상 잊지 않고 있었다.
"자… 이제 그만 쉬도록 하시지요."
검운강은 따뜻하고 다감한 눈길을 던졌다.
추성삼상백.
그들은 언제나 검운강의 그 눈빛만 대하면 하루의 피로가 싹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럼……."
"가주께서도 편히 쉬십시오."
추성삼상백은 인사를 남기고 접빈청에서 떠났다.
그들이 사라짐과 거의 같은 시기.
검운강의 동공 깊숙한 곳에서 찰나간 한 줄기 이채가 반짝 스치는 게 아닌가!
"모두 삼 인이로군. 한 명은 본가의 시비이고 나머지 두 명은……?"
검운강은 입가에 극히 흥미로운 미소를 피워 물었다.
"추측할 수 없는 초강자의 기도가 발걸음에서 풍기는 인물이 하나… 누구인가? 이 시각에……."
검운강은 천천히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는 향차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 순간, 의문의 주인공들이 접빈청에 들어서며 검운강의 망막 속으로 빨리듯 쏘아져 들어왔다.
전사신황 담휘웅과 검운강.
이 인의 눈빛이 찰나간 허공에서 교차되었다.
정적!
한순간, 모든 시간이 정지된 듯한 기이한 정적이 사위를 휘감았다.
검운강은 입가에 한 줄기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그러나 그는 내심 가벼운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초강의 고수다. 그리고 절대자의 기질이 숨쉬고 있다. 이 인물에게서…….'
검운강은 두 눈에 아무런 감정도 나타내지 않았다. 단지 그 특유의 부드러움만이 흐르고 있었다.
전사신황 담휘웅.
그 또한 물처럼 담담한 기색 속에 흔들리는 내심을 감추고 있었다.
'승천(昇天) 직전의 천룡이 꿈틀대는 기상… 이 순간에도 미소를 머금을 수 있는 여유라니.'
상념.
그것은 일수유의 극히 짧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시비의 청아한 음성이 그 상념의 끝을 가르고 있었다.
"가주님이십니다."
전사신황 담휘웅과 검운강, 그리고 적풍.
삼 인은 자리에 앉은 순간까지도 기이한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검운강은 시종 밝고 부드러운 미소를 습관처럼 띠고 있었다.
전사신황 담휘웅은 예의 형언키 어려운 무심 냉엄한 표정이었다.
그 사이에서 적풍만이 노골적으로 검운강의 요모조모를 뜯어보며 때로는 기막히다는 표정을, 때로는 감탄 비슷한 표정을 짓곤 했다.
검운강.
그는 내심 전사신황 담휘웅을 보면 볼수록 강렬한 흥미를 느꼈다.
'지금껏 많은 인물을 대했지만 이런 정도의 인물은 처음이다. 아무튼 결코 평범한 일로 나를 찾은 것은 아닌 것 같구나.'
검운강이 이윽고 낭랑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본인을 찾아오셨는지……?"
그러자 전사신황 담휘웅은 그 냉연한 얼굴 위에 문득 한 줄기 담담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 순간 그의 웃음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표정이 그의 얼굴 위에 찰나적으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그의 굳게 닫혔던 입술을 뚫고 흘러 나온 음성은 여전히 무정토록 담담했다.
"본좌는 지옥전막의 담휘웅이라 하네."
순간, 검운강은 검미를 소리 없이 찡긋 움직였다.
"그렇다면 귀하가 바로 지옥전막의 막주 전사신황?"
해연한 반문이었다.
전사신황 담휘웅!
신룡과도 같이 지옥전막을 이끌며 타인 앞에 별로 그 모습을 드러내 놓지 않는 이 시대의 절대강자.
그의 위명 앞에 아니, 그의 방문 앞에 천하의 그 누가 경악실색을 금할 수 있으랴?
그러나 검운강의 반응은 약간 달랐다.
놀라움도 아닌… 그저 약간은 의외라는 듯한 어조와 표정일 뿐이다.
"그런데 전사신황께선 무슨 사업이라도 하실 의향이신지? 이곳은 원래 상거래를 하는 사람만 오는 곳이라서……."
검운강은 싱긋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전사신황 담휘웅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우리도 한 가지 거래를 하려 하네."
"호……!"
"그러나 추성대가의 가주가 아닌 그대의 또 하나의 다른 이름, 암향비도 단유림과 할 거래일세."
번쩍!
순간 검운강의 두 눈을 꿰뚫을 듯 응시하는 전사신황 담휘웅의 시선 깊숙이에서 한 가닥 의미를 알 수 없는 강렬한 광채가 스며 나왔다.
그러나 검운강은 순간 피식 웃었다.
"암향비도란 이름은 그리 쉽게 찾을 수 있는 이름이 아닌데 지옥전막의 이목이 놀랍군요."
놀랍다고 말하나 오히려 놀랍도록 담담한 이 말.
그렇다. 그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자신의 또 다른 하나의 정체를 부인한다는 것이 너무도 어리석은 일임을.
보다 중대한 문제― 그것은 지금 이들이 자신에게서 무엇을 원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너무도 쉽게 시인해 버리는 그의 태도가 전혀 의외였던가?
전사신황 담휘웅과 적풍은 오히려 안색이 일순 기묘하게 변했다.
적풍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기막히다는 듯 중얼거렸다.
"제길, 도둑놈 배짱은 땅가죽보다 두껍다더니……."
도둑놈 배짱?
그럼 검운강이 도둑놈이란 말인가?
그렇다.
암향비도 단유림! 그가 가진 이 또 하나의 신분은 분명 도둑놈의 이름이었다.
도둑.
한마디로 괴상한 도둑놈.
― 暗香秘盜!
이제부터 그를 소개한다.
第 5 章 소림사
암향비도(暗香秘盜) 단유림!
일명 중원의 검은 향기로 불리는 그가 중원에 출현한 지는 이미 삼년 여.
하지만 그 정체에 관해 알려진 것이라고는 철저하게 아무것도 없었다.
완벽한 어둠 속의 향기―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나타나는 순간부터 구파일방과 사파연합맹은 물론, 전 무림의 이백여 문파는 발칵 뒤집힌 채 초긴장이 되고 말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삼년 전 어느 날.
호북성에 위치한 성하검문(星河劍門)에 돌연 한 장의 밀봉 서찰이 날아들었다.
<본인에게 황금 십만 냥을 지불한다면 적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겠소. 물론 대금은 일이 완벽하게 마무리된 후에 받겠소.
암향(暗香).>
성하검문은 호북성에서 사방 오백 리를 장악한 문파로써 당시 사파(邪派)의 한 세력인 천궁마문(天弓魔門)에 의해 거의 멸문 직전의 위기에 몰려 있었다.
하여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랄까?
아니면 최후의 발악이었을까?
성하검문의 문주, 성하검군(星河劍君) 북궁무악(北宮武嶽)은 밑도 끝도 없는 그 황당한 제의를 수락하였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성하검군 북궁무악은 거의 졸도 직전의 엄청난 경악에 휩싸이고 말았다.
밀지(密地).
천궁마문이 자랑하는 십여 종의 독문기공들이 초식의 변화는 물론 그 치명적인 약점과 파해법까지 깡그리 수록된 밀지가 성하검군 북궁무악 앞에 보내진 것이다.
뿐이랴?
밀지는 상대의 전술을 깰 수 있는 필승의 공격전술법까지 자상하게 알려 주고 있었다.
결과 두말할 것도 없이 성하검문은 멸문 직전에서 대역전승을 거두는 감격의 주인공이 되었고, 오히려 천궁마문은 완전히 멸파되어 버렸다.
이후 그러한 류의 황당한 일은 수도 없이 일어났다.
― 적수를 꺾기 위한 무공을 익히고 싶으면 암향(暗香)… 검
은 향기를 찾아라!
무림은 이렇게 외치며 들끓었다.
단 일인이 천하 각파의 절공(絶功)을 깨우쳐 약점을 알아낸다는 것.
그것은 상식이든 비상식이든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불가능을 뒤엎는 사실은 분명히 일어나고 있었고 또한 결코 과장된 것도 아니었다.
불마현천경(佛魔玄天經)!
대소림이 그야말로 아무도 모르게 고이고이 숨겨 두었던 거세비학(巨世秘學)!
그 불마현천경이 어느 날 불쑥 무림에 나타나고, 대무당파의 삼재검진(三才劍陣)이 이름도 없는 무명소졸에게 무참히 깨어졌다.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마침내 천하 각파는 자신들의 무공을 꽁꽁 숨겨 놓고 암향을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암향은 그 꼬리는 물론 그림자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학은 그야말로 귀신처럼 도난당하기만 했다.
그 목에 엄청난 현상금이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암향은 끝내 오리무중이었다.
오히려 암향에게서 무학을 사려는 위인들만 늘어갔다.
정녕 상상불허의 전무후무한 무공 도둑.
그것이 바로 암향비도 단유림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장본인이 겨우 십오 세 나이의 어린 소년이며, 바로 당금 추성대가의 후계자 검운강이었다면 아마 당신조차도 두 귀를 의심하고 믿어지지 않으리라.
"그런데 도둑놈과 무슨 거래를 원하시오? 설마 막주께서 무공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닐 테고……."
검운강은 적풍의 말을 받아 신비롭게 웃으며 반문했다.
전사신황 담휘웅의 안색에 언뜻 기이한 빛이 스쳤다.
'왠지 내 쪽이 자꾸 말려 들어가는 느낌이군…….'
느낌.
그것은 대화의 주동이 아닌 피동이 되는, 이를테면 유도심문을 당하는 듯한 그런 비슷한 느낌이었다.
전사신황 담휘웅은 그러나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한 권의 책자… 소림의 장경각 십팔층 지하무고에 비장되어 있는 천무영웅보(天武英雄譜)를 구하고 싶네."
찰나, 검운강은 눈가에 한 줄기 보이지 않는 기광을 번쩍 스쳐 올렸다.
"천무영웅보라면 무림사에 존재했던 영웅들의 서열을 정해 놓은 것인데… 이상한걸?"
검운강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기이한 눈초리로 전사신황 담휘웅을 응시했다.
전사신황 담휘웅은 그 눈초리 앞에 왠지 뒤꼭지가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천무영웅보!
한 권의 책자.
이것은 무림사 일천칠백 년의 그 무수한 세월 속에 명멸했던 영웅, 거마효웅들의 서열과 기병, 마병을 막론한 천하 명기(名器)들의 서열을 기록한 고서였다.
그러나 이미 오래 전에 실전된 것으로 알려져 있던 터.
그런데 전사신황 담휘웅은 뜻밖에도 그 정확한 소재지를 밝히며 그것을 훔쳐 달라고 하는 것이다.
검운강.
그는 전사신황 담휘웅을 지그시 응시하더니 천천히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천무영웅보 자체로는 막주의 흥미를 끌 수 없을 터인데 본인이 만일 거절한다면 막주께서 노리는 그 무엇도 말짱 그림의 떡이 아니겠소?"
말과 함께 검운강은 여유로운 미소를 띠우고 한 눈을 찡긋해 보였다.
협박.
바른 대로 말하라는 은근한 협박이 아닌가!
"으음……."
"떡을 칠……."
전사신황 담휘웅은 나직한 침음성을 흘리고 적풍은 옆에서 잔뜩 뒤틀린 얼굴로 꿍얼꿍얼댔다.
검운강은 아예 시선을 돌려 한가로이 화원에 떨어지는 눈송이를 응시했다.
별반 흥미가 없다는 의미의 표정이었다.
적풍은 그런 검운강의 모습이 더욱 얄미운 듯 콧방귀를 끙끙 뀌어댔다.
"흥흥… 더러워서 원……."
이때, 전사신황 담휘웅의 그 차갑고 무심한 안면에 어떤 짧고 복잡한 갈등의 빛이 스치고 있었다.
그는 무거운 침묵 끝에 잠시 후 침중히 입을 열었다.
"그대는 전사대신총(戰士大神塚)의 전설을 알고 있겠지."
순간, 검운강의 눈이 거의 반사적으로 그를 향해 돌려졌다.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아이처럼 반짝이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검운강은 입을 열지 않은 채 무언으로 전사신황 담휘웅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천무영웅보에 바로 그 전사대신총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단서가 있네."
"전사대신총의 위치가……!"
검운강은 가벼운 탄성을 터뜨렸다.
그의 빙옥과 같이 수려한 얼굴은 단숨에 강한 흥미와 관심의 빛으로 뒤덮였다.
이때, 적풍은 검운강에게 그 사실을 알려 준 것이 못내 아쉬운 듯 한껏 뒤틀린 얼굴로 변했다.
"떡을 칠…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게 아예 속편하지. 빌어먹을."
적풍은 불안한 눈초리를 전사신황 담휘웅에게 향했다.
담휘웅은 미동도 없이 검운강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저의 빙담(氷潭)과도 같이 가라앉은 냉연한 신색.
그 모습은 마치 주사위를 던지고 그 결과를 지켜보는 절세 도박사와도 같은 자세였다.
"전사대신총이라… 전사대신총……!"
검운강은 마치 맛있는 요리를 씹듯 연신 전사대신총을 되뇌이고 있었다.
대체 전사대신총이 무엇이기에?
전사대신총!
그것은 전설.
환상의 전설이었다.
무림사 일천칠백여 년.
그 무수한 세월의 공간을 질타하던 영웅기걸들이 있다.
각기 일세를 독패하며 인세(人世)는 물론 하늘마저 두려움에 떨게 했던 최강의 절대자들이 존재했었다.
최강의 절대자.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무학과 현공들은 가히 인간의 능력과 상상력을 초월한 것.
그러나 그들 역시 인간이었고, 인간이었기에 언젠가는 공허한 죽음의 그림자를 맞이해야만 했다.
또한 그러한 순간에 어쩔 수 없이 일개 허약한 인간으로 돌아와 자신의 무기력한 죽음을 타인에게 보여 주어야 하는 절망감에 휩싸여야 했다.
치욕.
그것은 진정 일세를 풍미한 최강의 절대자들에겐 죽음보다 더 치욕스런 일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누군가 죽음을 앞둔 절대자들의 최후 자존심을 지켜 주기 위한 영원한 안식처를 안배하였으니…….
최후의 순간, 외부와 일체 단절된 채 자존심을 지키며 조용히 영면에 들 수 있는 절대자들만의 묘역(墓域).
그것이 바로 전사대신총인 것이다.
당연히 그 안에는 절대자들만이 가졌던 통천가공의 무학은 물론 온갖 기진이보가 산처럼 쌓여 있으리라.
만약 그러한 전사대신총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 후의 일은 상상만으로도 능히 황홀지경 속에 푹 빠질 일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정작 전사대신총을 보았다는 사람도, 거기에 들어가 보았다는 사람도 지금까지 전혀 한 사람도 없었다.
해서 전사대신총의 전설은 오직 전설 그 자체로만 여겨질 뿐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그 전사대신총이 한 겹 신비와 환상의 껍질을 벗고 나타나는 것이란 말인가?
침묵.
검운강은 한동안 입을 굳게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이 인은 은연중 긴장에 휩싸인 채 그를 주시하고 있었으나 아무도 그의 내심을 추측할 수가 없었다.
눈빛.
이 순간 검운강의 맑은 눈빛은 도무지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기광이 깊숙이 빛나며 추측할 수 없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문득 적풍이 참을 수 없다는 듯 침묵을 깨고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이러다간 늙은이 숨넘어가겠군."
검운강은 비로소 그를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싱긋!
검운강은 웃고 있었다.
"흥… 도둑놈!"
적풍은 고개를 외로 꼬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놀랍고도 신비한 인물이야.'
검운강은 그런 적풍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적풍.
지옥전막에선 신(神)과도 같은 전사신황 담휘웅 앞에서 이런 거리낌없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인물은 아마도 적풍, 그 외엔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물일수록 사실은 더욱 무서운 인물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지.'
검운강은 내심 이렇게 미소하며 적풍에게 깊숙한 눈빛을 던졌다.
그때였다.
전사신황 담휘웅이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성공한다면 모든 것의 반을 그대와 나누겠네. 그대라면 능히 성공할 수 있다고 보네."
여러 가지 깊은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사실 소림의 장경각은 말할 것도 없고 전사대신총은 그 위치를 밝혀낸다 해도 엄청난 기관매복이 중첩되어 있을 것은 불문가지.
하여 전사신황 담휘웅은 검운강이 그런 모든 것까지 해결해 주기를 은연중 암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그 대가는 상상할 수 없이 엄청난 것이다.
절대 부족하다 할 수가 없는 정도인 것이다.
"어떤가?"
전사신황 담휘웅은 검운강을 지그시 응시하며 반문했다.
거래를 매듭지으려는 듯 그의 어조엔 힘과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검운강은 싱긋 웃으며 유유히 말문을 열었다.
"그 정도라면……."
"그 정도라면?"
적풍이 옆에서 말을 따라 되뇌이며 이미 결정은 난 것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검운강의 얼굴에 언뜻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물론 거절이로소이다."
순간, 적풍은 두 눈이 튀어나올 듯 확 부릅떠지고 전사신황 담휘웅도 흠칫 안색이 일변했다.
적풍은 버럭 욕설을 퍼부었다.
"뭐라고? 이 도둑놈! 벌써 딴 생각을 품었구나."
결국 우려하던 일이 일어났다는 듯 적풍은 분개한 얼굴로 펄쩍 뛰었다.
검운강은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후후… 이런 거창한 과정이 전혀 필요 없이 본인이 가지고 싶은 것은 모조리 가질 수 있는 게 본인의 장점이 아니겠소?"
"뭐라고?"
전사신황 담휘웅은 어이가 없어 멍한 얼굴이 되었다.
"도… 둑… 놈……."
적풍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나 전사신황 담휘웅은 곧 원래의 표정으로 빠르게 되돌아왔다.
"본좌는 그대와 말장난을 하고 싶지 않네.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밝히게."
전사신황 담휘웅은 검운강의 거절이 진의가 아님을 간파한 것이다.
검운강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잠시 전사신황 담휘웅을 응시했다.
침묵.
찰나 같기도 하고 억겁의 시간이 흐른 것 같기도 한 침묵이 한데 뒤엉켜 지난 다음 마침내 검운강은 요구를 밝혔다.
"지옥전막을 주시오. 대신 지옥전막을 천하최강의 전단(戰端)으로 만들겠소."
꽝! 꽈꽈꽝―!
순간 이 인은 뇌리 속에서 엄청난 폭약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소리를 들었다.
"억!"
적풍은 사정없이 비명을 내질렀다.
"흐윽……!"
전사신황 담휘웅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처음으로 그의 냉연한 표정이 흔들리며 짙은 당혹의 빛이 만면을 가로질렀다.
검운강.
그는 이미 예상했던 반응인 만큼 유유히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당장 달라는 것은 아니오. 언제든 막주가 원하는 시기에 주어도 상관은 없소."
이어 그는 씨익 웃으며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였다.
"어차피 나이로 보아 막주보다 본인이 더 오래 살 자신이 있으니까… 헤헷!"
개구쟁이처럼 기묘한 웃음소리가 말꼬리에 뒤따랐다.
실로 얄밉도록 유들유들한 태도였다.
전사신황 담휘웅은 다시금 멍한 얼굴이 되어 검운강을 응시했다.
"도둑놈 배짱도 왕도둑놈 배짱이군. 떡을 칠……."
적풍은 아예 상대하기를 포기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전사신황 담휘웅은 문득 무언가 심각한 기색이 되며 긴 침묵을 지켰다.
'이 정도의 재목이면 지옥전막을 맡겨도 오히려 크나큰 득이 있다. 좋아! 오히려 내가 원하던 일인지도 모른다.'
결정!
이것은 긴 침묵 끝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전사신황 담휘웅은 냉연하고 담담한 태도로 검운강을 향했다.
"또 다른 조건은?"
이 말은 명백한 수락의 의사였다.
검운강은 빙긋 서슴없이 웃으며 말했다.
"물론 한 가지 조건이 더 있소."
"맙소사!"
적풍은 완전히 질렸다는 듯 비명을 질렀다.
"말해 보게."
"다륜(多輪) 개적왕(介赤王)이란 인물을 찾아 주시오. 물론 극비이며 실패해도 상관은 하지 않겠소."
언뜻 말하는 검운강의 눈가에 한 가닥 기광이 스쳤다.
전사신황 담휘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륜 개적왕이라… 그대와 아주 특별한 관계의 인물인 모양이군."
검운강은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미소, 그것은 더없이 싸늘한 미소였다.
"아주 특별한 관계가 있소. 나의 목숨이 있는 한 끊지 못할 관계가……."
이 인은 물론 어느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저미한 독백.
그러나 이 순간 그의 전신에서 은연중 풍기는 무섭도록 싸늘한 압박감은 느낄 수가 있었다.
"음… 놀라운 화후로다!"
전사신황 담휘웅은 자신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어조로 감탄성을 터뜨렸다.
적풍 또한 해연한 눈길을 검운강에게 던졌다.
그러나 적풍의 그러한 눈빛은 나타나는 순간보다 더 빠르게 씻은 듯 지워졌다.
검운강은 전사신황 담휘웅을 응시했다.
"더 할말은 없소?"
전사신황 담휘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림의 일이 성공하면 태산(泰山) 중극봉(中極峯)으로 오게."
"그때 다시 보자, 도둑놈!"
적풍은 한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검운강은 싱긋 미소했다.
"그땐 좋은 술 한 병 선사하지요."
"조오치… 그댄 역시 밉지 않은 도둑놈이야."
적풍은 노안에 피실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더할 수 없이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는 사이, 전사신황 담휘웅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접빈청을 나서고 있었다.
적풍이 황급히 따라 나섰고, 멀어지는 그들의 발자국 위로 하얀 눈송이가 하늘거리며 떨어졌다.
검운강은 열려진 문 밖의 내리는 눈송이를 응시했다.
"실로 묘한 인연을 맺게 되었군. 그러나 든든한 발판 하나는 마련된 셈이겠지."
무심한 독백.
밖은 하얀 눈송이가 화원을 순백의 세계로 바꿔 놓고 있었다.
검운강은 언뜻 싱긋이 미소지었다.
"이제부턴 조금 바빠지겠군. 아름다운 밤이야……."
검운강은 천천히 화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어깨 위로 하얀 눈송이가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사락… 사라락…….
* * *
여명.
기나긴 밤의 어둠을 젖히고 밝은 빛 한 자락이 마악 동녘 하늘에서 움터 오고 있었다.
간밤에 내린 함박눈으로 사위는 아름다운 은백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새벽의 맑은 적막감이 감도는 이 시각.
휘익!
그 하얀 새벽의 공기를 가르며 돌연 유성처럼 소리 없이 추성대가를 벗어나는 한 명의 인물이 있었다.
검운강, 바로 그였다.
"이번의 강호행은 나에게 최대의 고비이자 기회가 될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나의 계획이 적어도 십년은 늦어지리라!"
수북히 쌓인 눈.
차가운 겨울의 새벽이라 아직 거리엔 행인의 그림자가 없었다.
문득 검운강은 신형을 세우고 천공을 응시했다.
까마득히 높은 허공 위에서 드문드문 박힌 새벽별이 마지막 희미한 잔광을 뿌리고 있었다.
검운강의 눈빛은 더없이 심유하고 강렬하게 빛났다.
"나는 하고야 만다. 나의 길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불끈!
검운강은 두 주먹을 힘차게 말아 쥐었다.
이어 짧고 경쾌한 파공음을 끝으로, 검운강의 신형은 삽시간에 아득한 허공 속으로 빨리듯 사라져 버렸다. 그것은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초절정의 경공신법이었다.
우웅―!
검운강이 사라진 얼마 후, 돌연 그 자리에서 거의 감지할 수 없는 미세한 진동음이 들리는 게 아닌가?
이어 한 가닥 흐릿한 안개 같은 것이 스산하게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스스스―!
스으으― 으―!
다음 순간, 어느새 그 자리에 한 명의 인물이 유령처럼 나타나 있었다.
일신에 백설과도 같은 은의를 걸친 인물.
얼굴엔 역시 시리도록 하얀 복면을 쓰고 있었다.
오직 보이는 것이란 무저의 동공과도 같이 무심하고 차갑게 가라앉은 한 쌍의 눈빛뿐.
마치 한 덩이 얼음과도 같이 차갑고 어떤 형언할 수 없는 귀기로운 기운이 전신에서 안개처럼 감돌고 있었다.
일순, 복면인은 힐끗 추성대가 쪽을 일별하더니 검운강이 사라진 방향으로 차가운 시선을 쏘아 보냈다.
"후후후… 십여 년을 찾아 헤맨 네가 겨우 이런 곳에 숨어 있었더란 말이냐?"
말할 수 없이 차갑고 저미한 웃음.
무저의 동공 같은 복면 속의 두 눈에서 음산무비한 살기가 전율스럽게 뻗쳐 나왔다.
"설령 저승으로 도망친다고 해도 결코 구천십왕사해마루(九天十王四海魔樓)의 눈과 귀는 속이지 못한다… 이제 남은 일은 완벽하게 뿌리를 뽑아 버리는 것이겠지, 후후… 크ㅋ……."
마치 주술사의 저주처럼 한마디 한마디 전율스럽게 흘러 나오는 음성.
구천십왕사해마루!
그렇다면 구천십왕사해마루에서는 지난 십여 년 동안 검운강의 행방을 끈질기게 추적해 왔단 말인가!
"기다려라, 꼬마. 네 아비가 그랬듯이 너도 역시 십왕의 이름 아래 죽으리라."
몸서리치도록 음산 무정한 이 한마디를 끝으로 복면인은 소리 없이 검운강이 사라진 방향으로 멀어져 갔다. 일체의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였다.
무심한 삭풍 한 자락만이 그 자리에 남아 휘돌고 있었다.
휘이잉…….
그와 같은 시각.
뇌우상백 혁유붕은 막 한 장의 서찰을 읽고 있었다.
<믿고 뒷일을 부탁하겠소.
앞으로의 상세한 계획은 내 침상 위에 따로이 적어 두었소이다.
검(劍) 서(書).>
극히 간단한 내용이었다.
뇌우상백 혁유붕은 천천히 서찰을 접었다.
그의 눈빛이 깊숙이 빛나고 있었다.
"드디어 소주께서 무언가 결심을 하신 모양이군."
소주(少主)!
검운강을 가주가 아닌 소주라 칭하다니.
그렇다면 혁유붕, 그는?
그때, 뇌우상백 혁유붕은 낮고 심유한 독백을 이었다.
"주군께서는 소주가 일개 범무로서 살아가도록 하라는 유시를 남기셨지만 역시 피는 속이지 못하는 것!"
뇌우상백 혁유붕은 지그시 허공을 응시했다.
"이젠 아무도 소주를 막을 수 없다. 나 뇌정마환(雷霆魔環) 혁유붕 역시 소주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으니까."
일순 뇌우상백 혁유붕은 한가닥 허허로운 웃음을 스쳐 올렸다.
그러나 그토록 맑고 담백하던 그의 두 눈에선 이 순간 가공할 폭염이 소리 없이 이글대듯 뻗어 나오고 있었다.
그렇다.
뇌정마환(雷霆魔環)!
그것은 십여 년 전까지 불리던 혁유붕 자신의 별호였다.
그러나 지난 십여 년 동안은 애써 억눌러 숨겨야만 했던 피끓는 이름이기도 했다.
뇌우상백, 아니 뇌정마환 혁유붕.
그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나의 주군과 어린 소주를 위해!"
― 나의 주군과 어린 소주를 위해!
뇌정마환 혁유붕은 천천히 문 밖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그의 등은 한없이 강하게 비춰지고 있었다.
* * *
중악(中嶽) 숭산(嵩山).
중원 오악 중의 하나로 명성이 드높은 대산이다.
그러나 보다 더 숭산의 명성을 높여 주는 절대적인 명소가 숭산에 있었으니…….
대소림(大少林)!
바로 그것이다.
무림사의 시초와 더불어 존재해 온 무림의 대종주!
꺼지지 않는 등불과 같이 무림의 정의를 비추며 이끌어 온 태산북두!
실로 대소림을 형용키 위해선 너무도 수많은 찬사가 필요하다.
오늘도 수많은 분향객과 무공을 익히기 위해 청운의 꿈을 품은 젊은이들이 대소림의 산문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불래각(佛來閣).
숭산 소실봉이 바로 뒷산처럼 올려다보이는 거리.
좀더 말하면 소림사를 오르는 입구에 자리잡은 주루 겸 객잔이었다.
원래 소림사의 분향객들을 위해 세워진 곳으로 화려하지는 않으나 그 규모가 크고 매우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시각.
불래각은 그야말로 초만원인 채 왁자지껄한 소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승(僧), 도(道), 속(俗)…….
손님들의 신분도 천양각색이었다.
비록 소림사의 분향객이 많다 하나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인 터.
그 불래각의 이층.
대로(大路)가 보이는 창가의 좌석에 한 명의 흑의소년이 앉아 있었다.
나이는 십오 세 정도.
마치 아버지 것을 몰래 주워 입은 것처럼 헐렁한 흑의에 윤기나는 흑발은 어깨 위에 아무렇게나 묶여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소탈하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차림이었고, 더더욱 언뜻 스쳐 지날 땐 모르나 한 번 시선을 주면 더없이 빼어난 용모에 서늘하고 다감한 눈빛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안겨 준다.
검운강… 바로 그였다.
검운강 앞에는 소금에 절인 편육 한 접시와 기름에 튀긴 소채 한 그릇만이 덜렁 놓여 있었다.
그리고 검운강은 왠지 미간에 한 가닥 곤혹의 빛을 떠올리고 있었다.
"난감한 일이군… 하필이면 이런 때에 소림의 용비사문방(龍飛四門房) 불제(佛祭)가 열린다니……."
독백.
적이 당혹스런 음성이었다.
그런데 용비사문방이라면?
― 용비사문(龍飛四門)!
이것은 소림에서 십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최대의 행사였다.
바로 엄선되어 뽑혀진 뛰어난 청년불승(靑年佛僧)들이 십년 간 폐관수련한 후 밖으로 출관하는 날 열린다. 그리고 각자의 성취에 따라 몸에 하나에서 아홉 개까지의 용비(龍飛), 즉 용의 문신이 새겨지게 된다.
그러나 일단 용비사문에 들게 되면 세 개 이상의 용비가 새겨져야 출관의 자격이 주어진다.
또한 지금껏 아홉 개 전체의 용비를 받은 무승도 없었다.
그만큼 피나는 수련을 거쳐야 하며, 출관 후에는 명실공히 소림사를 이끌 기둥으로 공인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해서 대소림의 용비사문 불제가 열리는 날이면 무림 각파의 명숙들이 초청되어 출관한 용비사문들의 무예를 평가하는 의식이 거행되어 왔다. 때문에 그 때면 각파의 종사들이 소림에 집결됨은 물론, 만약을 대비하여 경계도 더없이 삼엄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문제의 용비사문방 불제가 바로 사흘 후에 열리는 것이다. 때문에 수많은 무림의 거물들이 그 시간을 맞추기 위해 속속들이 소림을 향해 밀어닥치고 있는 것이다.
"으음……."
검운강은 창 밖의 대로를 응시했다.
인마의 행렬이 끊임없이 숭산을 향해 이어지고 있었다.
하나같이 모두 범상치 않은 위용을 가진 자들의 당당한 행렬이었다.
문득 검운강은 두 눈에 담담한 빛을 뿌렸다.
"그러나 용비사문보다 더한 불제가 열린다 해도 결과엔 변함이 없다. 단지 조금 신경이 쓰일 뿐이다."
나직하나 자신감이 충만한 어조였다.
"여하튼 모든 것은 오늘 밤이 지난 후에 결말이 나겠지. 밤은 항상 나의 친구였으니까."
검운강은 홀로 조용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어 검운강은 앞의 식탁 위에 놓인 요리를 여유 있게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과연?
* * *
밤.
휘영청 밝은 만월의 밤이었다.
숭산 대소림.
만월의 야색에 한껏 휘감긴 소림의 웅자는 고요한 정적 속에 파묻혀 있었다.
정적은 사흘 후의 불제를 위해 유시 이후로 일체의 통행을 금했기 때문이었다.
단지 경호를 맡은 무승들의 엄중한 그림자만이 곳곳에서 어른거릴 뿐, 그들은 방대한 소림 전체를 포위하듯 매우 엄밀하고 삼엄한 호위를 펴고 있었다.
소림은 그야말로 철옹성으로 변해 있는 것이다.
설사 신이라 해도 경호승들의 이목을 속이고 소림 내로 잠입하는 것은 불가능할 듯싶었다. 마치 바늘 끝 하나 떨어지는 소리라도 들릴 듯한 정적이었다.
푸드드득…….
한 마리 야조가 정적을 가르며 소림의 상공을 빠르게 가로질러 날아갔다.
찰나, 경호무승들의 시선이 일제히 빠르게 허공으로 치켜올려졌다.
반사적인 긴장의 눈빛들이었다.
그러나 야조는 달빛 속으로 유유히 사라져 갔다.
"오늘따라 잠 못 이룬 산새들이 많군. 아미타불……."
나직한 젊은 무승의 음성이 산문 뒤에서 흘러 나왔다.
"아미타불… 오랜만에 무림의 명숙들이 한자리에 모이니 산새들도 놀란 것인 게야, 사제."
약간 나이 든 음성이 뒤따랐다.
사제를 깨우치듯 한껏 위엄을 부린 음성이었다.
"그럴까요, 사형?"
"틀림없을 걸세. 산새들에게 물어 보게나. 어험……!"
고개를 갸웃하는 듯한 사제의 반문에 사형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는 듯 큰기침을 울렸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다시 몇 마리의 야조가 그들의 머리 위로 날갯짓하며 날아오르고 있었다.
꾸워억!
푸드득… 푸드득…….
그러나 두 무승은 이젠 흥미를 잃은 듯 야조에 무관심해졌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산문에서 백여 장 가량 떨어진 울창한 수림 속.
한 쌍의 빛나는 눈동자가 야조들과 소림의 반응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어둠처럼 짙은 흑의를 전신에 두른 채 조용히 소림을 응시하고 있는 작은 인영.
검운강.
그는 역시 검운강이었다.
그때, 그의 한 손엔 커다란 그물이 들려 있었고, 그 속에는 아직 잠이 덜 깬 듯한 십여 마리의 야조가 갇혀 있었다.
아마도 포근한 잠자리에서 불시에 검운강에게 납치된 듯했다.
"자… 잠시만 기다리면 곧 끝난다."
검운강은 그 중 한 마리 야조를 꺼내 날리며 위로하듯 속삭였다.
푸드드득…….
휘― 이― 익―!
검운강의 손에서 벗어난 야조는 곧바로 소림의 상공을 날아 가로질러 갔다.
사실 그물 속의 새들은 소림의 반대편 숲에서 생포한 것들이었다.
그래야만 둥우리로 돌아가기 위해 소림의 상공을 지나기 때문이었다.
"산문까지의 거리가 백 장… 산문에서 장경각까지의 거리가 백오십 장… 도합 이백오십 장의 거리……."
검운강은 새를 날림과 동시 무언가 계산하고 있었다.
이백오십 장의 거리.
지금 검운강이 있는 위치에서 목적지까지의 거리는 이백오십여 장인 것이다.
그러나 그 이백 장이 넘는 거리를 경호무승들의 눈을 피해 잠입해 들어가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완전히 불가능했다.
아무리 경공 방면에 있어 조화경에 이른 고수라 할지라도 불과 일 장 간격으로 쫘악 깔리다시피한 소림 무승들의 이목을 속이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검운강.
그는 대체 이러한 상황하에서 야조들을 이용해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이 순간, 검운강은 소림을 응시하는 일면 연신 천공을 살피고 있었다.
"자… 자… 어서……!"
뭔가를 기다리는 듯 검운강은 나직이 초조한 어조로 중얼댔다.
바로 그때였다.
스으…….
천공에서 한줌의 구름이 흐르며 만월을 휘감았다.
순간, 달빛이 흐릿해지면서 사위의 어둠이 짙어졌다.
"이때다!"
검운강은 번개같이 그물을 풀어 나머지 산새들을 일제히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꾸워어…….
푸드득― 푸드드드득!
상공은 삽시간에 요란한 날갯짓 소리로 뒤덮였다.
"음……?"
"뭐, 뭐지?"
경호무승들은 흠칫하며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시선을 돌렸다.
이젠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무승들의 반응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팟―!
검운강은 허공을 향해 신형을 일직선으로 뽑아 올렸다.
파공음도 없었다.
섬전일순.
이미 검운강의 신형은 야조들이 날아가는 바로 그 위의 허공을 날고 있었다.
그림자마저 야조들의 날갯짓에 가려졌고, 어느새 검운강은 산문을 지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거리는 백이십여 장.
일순 검운강은 바로 발밑을 날고 있는 야조의 등을 가볍게 찍어 눌렀다.
파팟!
동시에 검운강은 그 반탄력으로 더욱 빠르게 소림의 중앙을 향해 쏘아갔다.
휘이익―!
"됐다!"
검운강은 언뜻 섬연한 미소를 피워 물었다.
그와 동시에 검운강은 한 고색창연한 전각의 지붕 위에 사뿐히 내려서고 있었다.
장경각.
바로 목적지 장경각이었다.
때를 같이하여, 야조들은 검운강의 머리 위를 지나고 있었다.
푸드득… 푸드드득!
검운강은 전신을 최대한으로 웅크려 장경각의 지붕에 밀착시켰다.
'하나… 둘… 셋…….'
검운강은 내심 숫자를 세어 나갔다.
그러나 열을 셀 동안까지도 주위엔 아무런 움직임도 일어나지 않았다.
"완벽한 성공이다. 자, 그럼……."
검운강은 회심의 표정으로 지붕의 기와를 조심스럽게 들어내기 시작했다.
곧 몸 하나 드나들 수 있는 구멍이 뚫어졌다.
아래는 먹물과도 같은 짙은 어둠과 서책의 부식을 막기 위한 채유의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슷―!
검운강은 웅크린 자세 그대로 빨려들 듯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第 6 章 또 하나의 비밀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지독한 암흑.
강렬한 채유의 냄새.
그리고 끝을 알 수 없는 정적만이 무덤 속처럼 감도는 밀폐된 공간.
바로 소림의 절대금역인 장경각― 그 장경각 중에서도 심장부인 십팔층 지하무고의 정경이었다.
한순간이다.
파악…….
한 줄기 기음이 정적을 깨며 울렸다. 동시에 화섭자의 환한 불빛이 무저의 암흑마저 집어삼키듯 사위를 밝히며 나타났다.
그 불빛 바로 앞에 검운강의 준수한 얼굴이 있었다.
주위는 일천여 권이 넘을 듯한 고서들로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이곳의 고서들은 소림이 가장 아끼는 절급(絶 )들이다… 아마 다른 곳의 서책까지 합친다면 수만 권은 족히 될 것이다."
사실이었다.
지상에서 보이는 장경각의 모습은 단지 조금 큰 전각일 뿐이었다.
그러나 정작 장경각의 그 실체는 지하에 있었다.
모두 십팔층으로 이루어진 엄청난 규모의 지하무고들.
그 중에서도 지금 검운강이 잠입해 들어온 십팔층 지하무고는 가히 소림의 생명이며 소림의 역사가 숨쉬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만큼 실로 이런 곳에 외인이 들어온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절세의 비학들이 먼지에 묻힌 채 썩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런 것을 모두 재질이 있는 자들에게 나누어 준다면 중원의 힘은 엄청나게 거대해질 것을……."
검운강은 주위의 고서들을 둘러보며 나직이 탄식했다.
"서로 명문대파임을 내세워 무학을 감추기만 한다면 오히려 힘이 허약해질 뿐이다."
검운강은 진심으로 안타까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암향비도 단유림!
검운강이 지닌 또 하나의 이름!
그는 먼지에 묻혀 썩어 가는 비학들을 무림에 퍼뜨려 널리 익히도록 하고, 그래서 무림을 일깨우고 각파를 자극하는 유일한 인물이리라.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중원의 잠재력을 키우기 위한 검운강의 안간힘인지도 몰랐다.
"후후… 그러나 그런 나의 뜻을 아는 인물은 정녕 몇이나 될까?"
검운강은 언뜻 자조의 웃음을 피워 물며 뇌까렸다.
아마도 그런 인물은 단연코 없을 것이다. 아니면 그야말로 극소수만이 어렴풋이 짐작하든지…….
"그러나 전사대신총의 무학을 얻으면 이런 일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 안의 실전된 절공(絶功)들을 무림에 돌려주면 될 테니까."
검운강은 선연하고 밝은 미소를 떠올렸다. 이어 검운강은 자르듯 말했다.
"그것들을 나 혼자 차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의 말은 실로 아무나 생각할 수 없는 대범하고 놀라운 말이 아닌가!
전사대신총의 무학!
그것은 한 시대의 절대자들만이 사용했던, 그야말로 무림인들에게 있어 꿈과 환상의 무학들이었다.
때문에 무림에 몸담고 있는 인물이라면 그 누구라도 전설적인 그 절세신학들을 남과 공유할 생각은 결코 품지 못하리라.
자고로 무슨 보물이나 절급이 등장할 때마다 피 튀기는 처절한 혈전이 벌어졌던 무수한 과거의 무림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런데 검운강은 그 엄청난 전설의 전사대신총을 찾아 그것을 만인과 나눌 생각을 하는 것이다.
"구천십왕사해마루! 그들을 이기기 위해선 나 혼자의 힘으론 안돼. 중원 전체가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잠재력을 키워야만 한다."
검운강의 만면에 일순 강렬한 신념의 빛이 뒤덮였다.
― 구천십왕사해마루!
그렇다. 목표는 바로 구천십왕사해마루였다.
이윽고 검운강은 빠르게 주위의 빽빽한 고서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대략 이 각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흠… 이것이군!"
검운강은 우측의 서가에서 두터운 먼지에 뒤덮인 빛바랜 고서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고서의 표면에는 전자체의 웅후한 글씨가 씌어져 있었다.
<천무영웅보(天武英雄譜)>
문제의 전사대신총의 위치를 알 수 있다는 보급(寶 ).
검운강은 선 채로 천무영웅보의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거기에 몰두해 들었다.
천무영웅보!
그것은 크게 오부로 나뉘어져 있었다.
제일부(第一部)― 웅걸편(雄傑篇).
여기엔 천하를 섭렵했던 거마효웅과 기인괴사들의 행각과 무학들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제이부(第二部)― 열위편(列位篇).
제일부에 수록된 인물들은 물론 천하 무학의 서열이 일백 위까지 정해져 있었다.
그 중, 무학은 사마외공(邪魔外功)과 정종현공(正宗玄功)의 두 부문으로 나뉘어 있었다.
제삼부(第三部)― 신병록(神兵錄).
일백 개의 뛰어난 병장기가 서열이 정해져 수록되어 있는 부분이었다.
제사부(第四部)― 보열전(寶列傳).
범인이라면 평생 보기는커녕 듣기도 힘든 기진이보들의 장(章).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오부(第五部)― 기사괴담지(奇事怪談誌).
여기엔 무림에 전해져 오는 전설과 괴담, 그리고 기사의 내막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일순 검운강은 두 눈에 반짝 기광을 담았다.
"바로 이곳이로군! 그러나 너무 막연한걸……."
제오부 기사괴담지의 후반부.
그곳에 희미한 고서체의 짤막한 글귀가 씌어져 있었다.
<대당(大唐) 현종 삼년(玄宗三年).
복우악(伏牛嶽) 사해곡(四海谷)에서 살아 있는 듯한 한 구의 시체가 발견되었더라.
그런데 그 시체의 두 주인은 육백 년 전 실종되었던 제초량(齊草梁)이란 강호의 기인이었더라…….>
너무도 간단한 글귀― 그것이 전부였다.
어찌 보면 전혀 눈길을 끌 가치도 없는 평범한 얘기 한 토막이다.
"복우악은 복우산이란 뜻이고, 복우산 사해곡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며 제초량이라면 바로 천현기자(天玄機子)를 말하는 것인데……."
검운강은 나직한 독백을 발하며 미간을 좁혔다.
― 천현기자(天玄機子) 제초량(齊草梁).
그는 지금으로부터 육백 년 전 정도제일의 최강고수였다.
무학은 물론, 신산성복(神算星卜)과 학문에서도 달통하여 천하에 명성을 떨쳤던 인물.
소림의 속가제자로서 그가 작성한 소림무학주서, 즉 소림무학을 풀이한 책은 소림 유수의 비전절급으로 지금도 전해지고 있었다.
또한 천현기자 제초량, 그는 제일대 정도대맹주(正道大盟主)이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천현기자 제초량의 시신이 살아 있는 듯이 발견되었다는 것이었고, 더더욱 그 시신이 복우산에서 발견될 하등의 이유가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결국 복우산 사해곡이 바로 전사대신총이 있는 곳이란 뜻인데… 그러나 복우산에 사해곡이란 지명은 없다."
그렇다. 검운강의 나이 불과 십오 세라 하나 그의 견문과 지식은 가히 천하의 대석학이나 강호의 노웅(老雄)들과 비견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뇌리 속에 든 복우산에 대한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도 사해곡이란 이름은 전혀 그 존재가 없는 것이다.
검운강은 짙은 곤혹에 휩싸였다.
그러나 언제까지 여기에서 머뭇거릴 수는 없는 것.
"여하튼 천천히 되새겨 보면 무언가 나오겠지."
검운강은 심유한 눈빛을 발하며 일단 책을 덮고 품속에 깊숙이 갈무리했다.
바로 그때였다.
쿵… 쿠쿵!
돌연 지하무고 전체에 연속적인 거대한 진동이 이는 게 아닌가?
"아니?"
검운강은 흠칫하며 하마터면 손의 화섭자를 떨어뜨릴 뻔했다.
검운강은 아연 안색이 일변했다.
"지하무고가 진동을 일으키다니……!"
이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검운강은 자신도 모르게 나직이 신음했다.
아까보다는 극히 미약하나 또다시 자신의 발밑에서 분명한 진동이 전해져 왔다.
"이 지하무고의 밑에 또 다른 무엇이 있단 말인가?"
진정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이해할 수 없는 괴사가 다시 한 번 검운강의 눈앞에서 일어났다.
덜컹…….
돌연 서가의 한쪽에서 무언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기음이 들려 왔다.
구르릉……!
한 줄기 기관 동작음과 함께 한쪽의 벽면이 쫘악 갈라지며 음습한 바람이 와락 끼쳐 나왔다.
후웅… 후우웅!
그리고 곰팡이가 썩는 듯한 지독한 악취가 그 음습한 바람 속에 실려 있었다.
검운강은 망연한 얼굴로 밀려난 벽면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좁은 돌계단 하나가 먹물과도 같은 어둠에 싸인 채 밑으로 향해져 있었다.
일순, 검운강은 눈가에 한 가닥 빠른 이채를 담았다.
"장경각에 비밀통로가 있다더니… 이것은 분명 어떤 충격으로 인해 감추어졌던 기관이 움직인 게 틀림없다."
장경각!
이곳에는 본래 소림 각처로 통하는 비밀통로가 만들어졌다 한다. 그것은 외인의 눈을 피해 무학을 연구하기 위한 출입구였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외인의 잠입을 도울 우려가 있다 해서 언제부터인가 소림에서는 모든 비밀 출입구를 폐쇄시켰다.
그런데 지금은 그 중 미처 완전히 폐쇄되지 못한 통로 하나가 어떤 충격으로 인해 기관이 작동된 것이다.
"음… 어쩐다?"
검운강은 잠시 망설였다.
이 통로가 어디로 통하는지는 전혀 미지수인 것이다.
"불확실한 것은 항상 위험이 있게 마련인데……."
그러나 검운강은 저 통로에 대해 가슴 한구석에서 솟구쳐 오르는 강렬한 호기심을 누를 수가 없었다.
"좋아! 이것도 석존의 뜻이요, 인연이라면 굳이 피할 이유는 없어!"
검운강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성큼 통로의 안으로 들어섰다. 삽시간에 검운강은 어둠에 감싸이듯 사라져 버렸다.
과연 이 뜻밖의 모험을 유혹한 통로는 어디로 향하는 것인가?
검운강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미끄러지듯 신형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거의 감지키 어렵지만 코끝으로 스며드는 한 가닥 신선한 공기로 미루어 이제 통로의 끝이 다가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검운강은 긴장으로 인해 어느덧 얼굴에 한 줄기 땀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이윽고 검운강은 처음으로 몸을 세우고 전면을 응시했다.
"이곳이 통로의 끝이로군."
전면.
거대한 석문이 가로막혔고 기관을 움직이는 듯한 철삭 하나가 달려 있었다.
"이곳까지 와서 물러설 수는 없지."
검운강은 주저 없이 그러나 신중하게 철삭을 움켜쥐었다.
쿠르르르릉……!
순간 석문이 좌우로 쩌억 벌어지며 뭔가가 울부짖는 듯한 기광음이 터져 울렸다.
번― 쩍!
환한 야명주의 광채가 통로의 어둠을 밀치며 뻗쳐 나갔다.
검운강은 최대한 벽에 몸을 밀착시킨 채 주위의 동정을 기다렸다.
그러나 석문 너머에서는 전혀 아무런 반응도 나타나지 않았다.
검운강은 이내 빠르게 스며들 듯 석문을 넘어섰다.
찰나, 검운강은 가벼운 탄성을 터뜨렸다.
"아……!"
석전(石殿).
그곳은 하나의 거대한 지하석전의 입구였다.
그 지하석전의 정면에 새겨진 글을 발견하는 순간, 검운강은 아연한 기광을 발하며 침음하고 말았다.
"공교롭군. 이곳이 바로 용비사문방이라니……!"
― 용비사문방!
금강지력(金剛指力)으로 석전의 정면 벽에 웅혼하게 새겨진 글자는 바로 용비사문방이었다.
소림의 제일신비라 일컬어지는 용비사문방.
뜻밖에도 통로는 바로 그 용비사문방과 연결된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 용비사문방의 신비가 통로를 발견했을 때보다 더욱 강렬하게 검운강을 유혹하고 있었다.
"좋아! 용비사문방이 과연 어떤 것인지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검운강은 싱긋 미소를 떠올렸다. 이어 미끄러지듯 유연하게 지하석전 용비사문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이었다.
검운강의 전신은 금세라도 폭발할 듯한 팽팽한 긴장으로 뒤덮였다.
"뭔가? 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압력은… 마치 엄청난 힘의 덩어리가 전신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다."
마치 누군가 등뒤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위기의 느낌이었다.
그러나 사위는 바늘 끝 하나 떨어지는 소리라도 들릴 정도로 고요한 정적뿐이었다.
검운강은 검미를 안으로 좁혔다.
"이미 십여 장을 전진했는데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누군가가 있다!"
그것은 전신에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강한 직감이었다.
그때였다.
검운강은 언뜻 정면을 향해 한 줄기 이채를 빠르게 스쳐 올렸다.
"혹… 바로 저곳이?"
그의 시선이 향한 곳.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정경이 펼쳐져 있었다.
밝은 야명주 불빛 아래 두터운 휘장이 드리워져 있고, 한 가닥 그윽한 불향(佛香)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발끝으로 전해지는 한 가닥 미미한 진동.
그것은 바로 십팔층 지하무고에서 느낀 그 진동이었다.
'드디어 왔다!'
검운강은 지극히 느리게 휘장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한 손으로 슬쩍 휘장의 한쪽을 젖혔다.
순간, 검운강의 눈에 휘장 안의 모습이 언뜻 비춰졌다.
'헉!'
검운강은 자신도 모르게 두 눈에 거센 파문을 일으켰다.
'저럴 수가?'
내심에서 터지는 강한 충격의 신음이었다.
휘장 속에 가려진 용비사문방!
대체 그 안에 어떤 모습이 펼쳐져 있기에?
* * *
두터운 휘장의 안쪽.
그곳엔 실로 엄청나고도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벽을 향해 일렬로 놓여진 열 개의 연화불단(連火佛壇).
그 위에 열 명의 황의가사 승인들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한결같이 적어도 세수 백이십은 넘었을 듯한 노승들이었다.
서리처럼 흰 백미(白眉)는 귀밑까지 늘어졌고, 가사를 두른 전신에서는 고승들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청고(靑高)함이 엿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은 도저히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것이었다.
열 명의 노승들.
그들의 황의승포는 차라리 승포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찢겨져 걸레가 되어 있고, 그 사이로 드러난 전신은 살점 하나 없이 모든 뼈가 앙상하게 튀어나와 완전히 해골의 형상이었다.
뿐인가?
뼈에 가죽을 입혀 놓은 듯한 전신의 피부는 금세라도 가루로 부서져 내릴 듯 미세한 균열이 수없이 나 있었다.
"저것은 전신의 모든 진원지기를 일시에 소모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 저들은 이미 살아 있지 않다."
검운강은 굳어진 안색으로 신음했다.
정녕 전율스런 광경이었다.
연화불단 위의 노승들.
그들은 전신의 진기를 짧은 순간 극도로 소모한 채 앉은 자세 그대로 숨이 끊어진 것이다.
이제 얼마 후면 이들은 그나마 형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한줌 가루로 부서져 버릴 것이다.
그 처절함 앞에 검운강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검운강은 이미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런데 저들은 대체 어찌해서 저런 모습으로 죽어 간단 말인가?"
검운강은 강한 곤혹감 속에 주위를 예리하게 살폈다.
다음 순간 검운강은 눈가에 한 가닥 기광을 번뜩 스쳐 올렸다.
"역시… 저들 십 인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진기를 주입해 주고 숨이 끊어졌다!"
열 개의 연화불단 아래, 누군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던 흔적이 미세하게 남아 있었다. 또한 장경각까지 들려 왔던 그 충격은 바로 그 진기이신(眞氣移身)을 시전하던 여파임이 분명했다.
"저 열 명은 다른 열 명의 인물에게 자신들의 진원지기를 모두 전수했다. 그리고 그 열 명의 인물은 다름아닌 사흘 후 이곳을 출관하기로 된 십 인의 용비사문……."
그것은 거의 확실한 추측이었다.
순간 검운강은 왠지 전신이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용비사문 유래에 이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이것은 분명한 살인이 아닌가?"
살인!
그렇다. 이유가 무엇이든 십 인의 용비사문을 위해 다른 십 인이 죽어 간 것이다.
검운강.
그의 눈빛이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것은 결코 범상한 일이 아니다. 이런 희생을 하면서까지 십 인의 용비사문을 탄생시킨 배후엔 분명 거대한 무엇이 있다."
배후의 거대한 무엇!
과연 그것은 무엇인가?
그때 검운강의 눈빛이 다시 한 번 흠칫 흔들렸다.
열 명의 노승들.
그들의 전신이 한순간 서서히 가루로 화해 부서져 버리는 것이었다.
스스슷… 우수수… 스스…….
먼저 가장 위의 머리 부분이 형체도 없이 가루로 흘러내리고, 이어 어깨와 가슴이… 허리 부분이 차례로 한줌 가루로 사라져 갔다.
우수수수… 우스스…….
그들의 형체가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채 일 각도 소요되지 않았다.
마침내 열 명 노승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들이 앉아 있던 연화불단의 위엔 한줌의 재만이 허무하게 남아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검운강은 고개를 저었다.
"이런 희생을 하면서까지 탄생시킨 십 인의 용비사문! 그들은 또한 용비사문의 역사상 가장 극강한 화후를 이루었을 터……."
검운강의 가슴속에서 구름 같은 의혹이 솟구쳤다.
"과연… 과연 무엇 때문에 그들은 이렇게 탄생되었단 말인가?"
아무도 알 수 없다.
어쩌면 십 인의 용비사문 자신들도 알지 못할 일인지도 모른다.
검운강.
그는 일순 눈빛을 깊고 유현하게 반짝였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한 번쯤은 그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군."
강렬한 흥미가 일었다. 아니, 흥미라기보다는 강한 자에 대한 본능적인 승부욕이 꿈틀대며 솟구치고 있었다.
"아무튼… 두고 볼 일이야!"
검운강은 주위를 둘러보며 나직이 독백을 흘렸다.
이어 검운강은 등을 돌리고 소리 없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직후였다.
스스슷!
홀연 한 가닥 미풍과 함께 승인 한 명이 기척도 없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약간 마른 몸집에 후리후리한 모습의 노승!
굵은 백미 아래 두 눈에서 형형한 안광이 빛나고 있었다.
"분명 무슨 소리가……!"
노승은 나직이 뇌까리며 검운강이 있던 자리를 예리하게 살폈다.
어느 한순간, 어떤 흔적을 찾기라도 한 것일까?
노승의 두 눈에서 한 줄기 기광이 강렬하게 폭사되었다.
"아미타불… 이곳에 외인이… 이럴 수가?"
노승은 충격이 큰 듯 전신을 부르르 떨며 한 손으로 허공섭물의 자세를 취했다.
스윽!
노승의 수중으로 빨려들 듯 날아든 것은 눈에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새의 깃털 조각 하나였다.
분명 검운강의 옷에 묻어 있다가 떨어진 것인 듯했다.
"아미타불… 이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노승의 얼굴이 하얗게 경직되었다. 동시에 그의 노안에 어떤 결연한 기색이 떠올랐다
노승은 잠시 주위를 더 살피더니 이내 황급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휘장 안에는 다시 정적이 깔리고, 그윽한 불향만이 정적 속에 감돌고 있었다.
스으으으… 스스… 스스…….
* * *
불향림(佛香林).
소림의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을 구분하는 울창한 수림이다.
원래 소림은 내원과 외원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 중 내원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외인은 결코 들 수가 없는 금지지역이었다.
방장실을 비롯, 조사동(祖師洞), 장경각… 등등 중요한 건물들은 모두 내원에 자리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반면 외원은 일반 분향객이라도 출입할 수 있도록 완전히 개방되어 있었다.
용비사문방의 불제도 예외없이 외원에서 열리고 있었다.
그러나 무림의 명숙들이 모인 때문에 요즘은 외원도 삼엄한 경호에 싸여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불향림은 물론 외원조차 마음대로 다니기에 껄끄러울 정도였다.
하물며 내원이야 말할 것도 없는 완전한 금성철벽의 형상이었다.
그러나…….
석양.
숭산의 하늘 위로 붉은 석양이 타오르고 있었다.
불향림의 수목(樹木)들도 석양빛을 받아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스읏…….
일순 한 인영이 소리 없이 불향림 안으로 스며들었다.
헐렁한 흑의를 걸친 미소년.
바로 검운강이었다.
"이거 장경각의 채유 냄새가 가시려면 시일이 좀 걸리겠군. 덕분에 소림의 비전들을 마음대로 섭렵할 수는 있었지만……."
검운강은 사방의 기척을 살피는 일변 소리 없는 미소를 지었다.
사실 검운강은 지난 사흘 간 장경각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홀로 호젓하게 소림의 절학들을 두루 섭렵하는 한편 천무영웅보에 실린 전사대신총에 관해 연구를 하는 데에 시일을 보낸 것이다.
그리고 용비사문의 불제가 열릴 시기를 맞추어 밖으로 나온 것이다.
쓰윽!
검운강은 재빠른 동작으로 흑의를 뒤집어 입었다.
그러나 그의 옷은 당장 허름한 백의로 돌변했다.
얼마나 낡아빠졌는지 아예 회의(灰衣)로 보일 지경의 옷이었다.
검운강은 소리 없이 씨익 웃었다.
"자… 이 정도면 설사 뇌정마환 할아범이라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겠지?"
꿈틀… 꿈틀… 쓰스스슷… 슷슷!
일순 검운강의 얼굴과 전신의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극고의 변골공(變骨功)!
그것은 바로 암향비도라는 오늘의 신비도명을 있게 한 검운강의 절기였다.
다음 순간 검운강의 몸집은 헐렁한 의복에 딱 들어맞도록 순식간에 커졌다. 어림잡아도 십팔구 세 정도 청년의 몸집이었다.
"흐음… 잘 되었을까?"
검운강은 궁금하다는 듯 이리저리 얼굴을 더듬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돌연 한 명의 인영이 소리 없이 검운강의 등뒤로 솟아나듯 나타났다.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중년승인이었다.
한 손에 날렵해 보이는 계도를 움켜쥐고 있는 그는 일견키에도 불향림 주위를 경호하는 무승임이 분명했다.
중년승인은 매섭게 검운강을 응시하며 소리 없이 등뒤로 접근했다.
"시주, 거기서 무얼 하시오?"
중년승인은 위압적인 경계의 음성으로 짧게 외쳤다.
검운강이 향하고 있는 방향― 그곳은 바로 소림의 내원 쪽인 것이었다.
검운강의 등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러자 중년승인의 눈빛이 찰나 더욱 강렬하게 빛을 뿌렸다.
"저… 저요?"
검운강의 얼굴이 중년승인을 향하여 천천히 돌려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검운강의 얼굴은 전혀 검운강,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약간 덜된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하나 빠진 듯한 멍청한 청년의 얼굴이 그곳에 있는 것이었다.
그 얼굴이 중년승인을 향해 겸연쩍게 일그러지는 것이었으니…….
"사실 이래서는 안되는 것인 줄 알고 있지만… 쩝… 그게 그러니까… 너무 급하다 보니……."
말을 하며 검운강은 한 손으로 연신 바지춤을 올리고 있었다.
맙소사!
굳어 있던 중년승인의 얼굴이 어이없다는 듯 검운강을 쏘아보았다.
'기가 막히는군! 유사 이래 본 소림의 불향림에 소피를 본 인물은 이 멍청이가 최초이리라!'
중년승인은 내심 고개를 흔들며 두 손을 합장해 보였다.
"아미타불… 빨리 이곳에서 떠나도록 하시오."
말과 함께 중년승인은 뒤돌아섰다.
검운강은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으며 멍청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헤헤헤……."
영락없이 바보스런 웃음소리였다.
뿐만 아니라 시원해 죽겠다는 듯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바로 그때, 중년승인의 눈빛이 예리한 광채를 담고 다시 한 번 확인하듯 힐끗 검운강을 되돌아보았다. 검운강의 그 바보스런 행동은 그 순간과 묘하게 일치되었다.
중년승인은 결국 완전히 의심을 지우고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그는 수림 사이로 사라지며 나직이 혼잣말로 뇌까렸다.
"아미타불… 골치 아픈 중생이로다."
골치 아픈 중생 검운강.
그는 확실히 당금의 소림사에 있어 골치 아픈 중생임이 분명했다.
그때였다.
둥― 둥― 둥― 둥―!
돌연, 웅장한 북소리가 소림사 전체에 울려 퍼지며 들려 왔다. 이제 일 각 후면 용비사문이 열린다는 신호의 북소리였다.
그 동안 각지에서 모여든 무림의 명숙들은 이미 대연무장에 운집하여 용비사문방의 불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운강은 깊숙한 눈빛을 발했다.
"과연 그들의 화후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군."
이어 그는 언뜻 보면 용모에 어울리게 바보스러운 걸음이나 극히 조심스럽게 대연무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소림의 대연무장.
외원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요한 불제는 항상 이곳에서 열린다.
이 대연무장의 중앙 석단.
만인이 바라보이는 그 위에 일견해서도 범상치 않은 기도의 고승들이 주욱 태사의에 좌정하고 있었다.
그들…….
바로 당금 소림의 방장인 각우선사(覺憂禪師)를 비롯한 소림의 대장로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 열 명의 청년승들이 좌정하고 있었다.
열 명의 청년승.
그린 듯 가부좌를 하고 일점의 미동도 없다.
마치 일심무아(一心無我)의 경지에 빠진 고승과도 같은 자세였다.
뿐인가?
이 순간 그들의 전신에서 뿜어지고 있는 기도는 실로 형용불가의 엄청난 것이었다.
명경처럼 맑은 듯하면서도 심해처럼 깊다.
그런가 하면 금세라도 폭풍이 몰아칠 듯한 엄청난 패도지기(覇道之氣)가 소용돌이치는 듯하는 것이었으니…….
이곳 대연무장에 운집한 쟁쟁한 각파의 명숙들조차도 그들에게 압도된 듯 숨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있었다.
실로 상상치 못할 가공할 위용이 단 십 인에 의해 뿜어지고 있었다.
용비사문!
그들이야말로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용비사문의 출관자들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석단 위의 그들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연무장의 삼면으로는 넓게 차일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곳에는 무림 각지에서 초청되어 온 군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시각.
연무장은 물론 그 주위까지 횃불이 대낮처럼 밝혀져 있었고, 타오르는 횃불과 함께 용비사문의 불제는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어느덧 시각은 술시를 넘어 해시에 가까웠고, 불제가 계속될수록 탄성과 경탄의 신음성으로 연무장이 가득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군호들 틈에 섞여 있는 검운강은 얼굴은 굳어져 있었다.
"정녕 이곳의 군호들은 저들에게 속고 있단 말인가? 저들이 펼치는 것은 일신 화후의 오성(五成)조차도 채 되지 못한다!"
검운강은 홀로 무겁게 침음하며 단상을 깊숙이 응시했다.
실로 엄청난 사실이 아닌가!
천하의 뭇 군웅들 앞에서 자신의 성취를 시전해 보이고 있는 용비사문들.
그들은 자신의 진정한 화후를 숨기고 절반 정도밖에 드러내 놓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능히 군웅들을 참을 수 없는 경탄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검운강 자신마저도 용비사문방에서 목격한 사실이 없었다면, 그들이 진정한 화후를 숨기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더욱이 일곱의 용비를 받은 인물들이 저러할진대 최고의 구문용비(九紋龍飛)를 받은 인물은… 대체 소림이 왜 이런 일을 하는지 실로 의문이로군."
검운강은 참을 수 없는 곤혹감에 내심 고개를 흔들었다.
구문용비!
바로 구룡의 문신을 새긴 용비사문이 탄생되었다는 말이 아닌가!
용비사문의 역사상 지금까지 여섯 개의 용비를 받은 인물조차 겨우 다섯 손가락에 꼽힌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의 용비사문에서는 단 일인을 제외한 구 인이 모조리 일곱의 용비를 받았다.
그것은 실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성과였다.
그러나 더더욱 나머지 한 명은 용비사문방 최초의 구문용비를 받았으니!
진정 이 모든 것은 소림 초유의 일이었고 천하가 경동할 사실이었다.
하물며 지금까지 차례로 등장한 칠문용비의 승인들이 지닌 신위가 저렇다면 최고의 구문용비는 감히 상상조차 못할 가공의 경지이리라.
"그러나 문제는 저 자들이 자신이 가진 무학의 반을 숨기고도 뭇 군호들을 압도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검운강.
그는 그 한 가지 섬뜩한 사실에 가벼운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 만약 그들이 지닌 모든 화후를 드러낸다면 전부 구문용비 이상의 실력일 것임은 자명한 터.
즉, 오늘의 용비사문들은 사실 구문조차도 뛰어넘는 초절가공의 성취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정녕 이해도 짐작도 할 수 없는 이 비사들.
대소림!
천년무림의 꺼지지 않는 등불로 천하 정도를 이끌어 왔던 대소림.
과연 그들은 무엇 때문에 이런 용비사문들을 탄생시키고, 천하의 뭇 군웅들 앞에서 연극을 하고 있단 말인가?
그때였다.
둥……!
일순 또 한 번의 웅장한 북소리가 장내를 울리며 터져 나왔다.
연무장의 군웅들은 일제히 눈빛이 긴장되었다.
드디어 소림 최초로 탄생한 구룡비사문이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장내는 바늘 끝 하나 떨어지는 소리라도 들리 듯 숨을 죽였다.
그때였다.
스윽!
마침내 만인의 눈길을 한몸에 받으며 한 명의 승인이 석단의 중앙에 모습을 나타냈다.
"아미타불……!"
청년승.
대략 이십칠팔 세쯤 되었을까?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다 낡아빠진 일신의 잿빛 승포였다. 그것은 아예 승복이라고 할 수도 없을 지경으로 걸레처럼 낡아 있었다.
그리고 약간 비대해 보이는 몸집과 불그레한 혈색이 보기 좋게 감도는 둥근 얼굴이 보였다. 이어 서기가 감도는 듯한 서늘한 두 눈, 웃음기가 감도는 입술이 차례로 중인들의 시야를 점령하며 비쳐 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인들의 시선을 압도하는 것은 낡은 승포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문신이었다. 마치 금세라도 살아 승천할 듯 꿈틀대는 용비가 곳곳에서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아홉 마리의 용이면 아마도 전신에 문신이 있으리라.
"아……!"
군웅들은 숨을 죽인 채 문제의 청년승을 응시했다.
역사 최초로 탄생된 구문용비의 청년승.
그는 천천히 군호들을 향해 합장의 예를 취했다.
"아미타불… 소승 무각(無覺)이 인사드리오."
장중한 음성이었다.
무각(無覺)!
아무것도 깨우친 것이 없다는 뜻인가?
그런데 무각이 입을 여는 순간, 군웅들은 모두 만면에 의아한 기색을 떠올렸다.
주향(酒香)!
돌연 어디선가 지독한 주향이 풍겨 나옴을 느낀 것이다.
"설마……?"
군웅들은 이내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무각을 주시했다.
순간, 무각은 그런 군웅들을 향해 싱긋 미소를 던졌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술을 마셨다는 무언의 시인이 아니겠는가?
"맙소사……."
"그럴 수가!"
당장 사방에서 어이없는 탄성들이 터져 나왔다.
경악! 불쾌감!
그리고 너무도 어이없음과 경이로움 등…….
중인들은 제각기 한꺼번에 복잡한 표정을 떠올렸다.
도대체 이것은 말도 안되는 노릇이었다.
대소림의, 그것도 이제 십년의 폐관수련을 마친 용비사문의 승인이 까마득히 높은 사문의 방장과 장로 앞임에도 불구하고 술을 마시고 나오다니!
"으음……."
군웅들의 신색은 점차 뚜렷이 불쾌감으로 물들어 갔다.
그러나 검운강만은 이 순간 전혀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역시……."
검운강은 무각을 주시하며 침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많은 군웅들을 오시할 정도로 거대한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미 다른 구 인과는 달리 홀로 용비사문의 최절정인 아홉 개의 용문을 받은 인물이 아닌가!
더욱이 무각의 그런 태도에도 방장을 비롯한 소림의 수뇌들은 전혀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저 자는 분명 소림을 이끌… 아니, 무림 전체, 천하까지도 넘볼 재목임이 틀림없다."
검운강은 두 눈에 강렬한 광채를 떠올렸다.
그런데 바로 그 찰나, 우연이었는가?
중인들을 일별하던 무각과 검운강의 시선이 일순간 허공에서 딱 맞부딪쳤다.
파앗―!
순간, 검운강은 보았다.
자신을 향한 무각의 두 눈에서 한 가닥 기이한 섬광이 환상처럼 번쩍이는 것을.
"음? 저 자가 왜 유독 나에게 저런 눈빛을?"
검운강은 내심 자신도 모르게 당혹했다.
그러나 바보스럽게 변한 얼굴은 처연하도록 한점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무각의 입가에 언뜻 빙긋 미소가 떠오른다 싶은 순간, 어느새 그의 시선은 다른 곳으로 돌려지고 있었다.
"으음……!"
검운강은 무언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이제, 순서에 따라 무각이 자신의 무학을 군웅들 앞에 펼쳐 보일 차례였다.
군웅들은 침묵한 채 무각을 노려보듯 주시했다.
비록 아홉 개의 용문을 받았다고는 하나 이토록 방약무인한 태도를 보이니 어디 한번 보자는 식의 눈빛들이었다.
무각.
그는 장내에서 시선을 돌려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그 시선은 더할 수 없이 무심한 것.
무저무심(無底無心).
일체무상(一體無想)의 심유한 기운이 그의 전신에서 안개처럼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천수를 다한 고승이 점멸하기 직전과 같은 장엄한 자세였다.
그 끝없이 심유한 기도에 뭇 군호들은 부지중 탄성과 침음성을 흘렸다.
순간, 무각의 한 손이 가볍게 허공으로 펼쳐져 올라갔다.
일체의 변화를 배제한 극히 간단한 동작.
찰나, 그의 손이 가리키는 허공 아득히 한 무리 현란한 자색의 광채가 무지개처럼 펼쳐지는 게 아닌가!
번― 쩍!
츠와와― 왓―!
"아……!"
군웅들의 안면이 금할 수 없는 경이로 덮였다.
광채 속에서 피어 오르는 한 줄기 섬연한 광휘.
그것은 불존(佛尊). 그 속에서 피어 오르는 것은 장엄한 하나의 불상이었다.
"오오!"
"오……!"
군웅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소림의 수뇌들은 허공의 불존을 향해 장엄한 합장배례를 올리고 있었다.
"아미타불……."
순간 불상은 서서히 아니, 기실은 눈이 어리는 찰나의 속도로 확산되어 무수한 불상들이 피어나 허공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고오오―!
장내의 허공을 뒤덮고 환출된 불상은 모두 백팔 개.
기이한 서기가 주위를 감돌고 엄청난 강기가 석단의 주위를 회초리치고 있었다.
군웅들은 완전히 넋을 잃었다.
그들은 대부분 소림에 이런 가공할 기공이 과연 존재하는지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순간, 그들 중 누군가의 입에서 돌연 경악에 뒤덮인 외침이 떨리는 음성으로 터져 나왔다.
"오오! 저… 저것은 바로… 보리… 제존강(菩利制尊 )!"
보리제존강(菩利制尊 )!
이것은 그 이름조차 거의 실전된 소림의 정종기전무학(正宗奇傳武學)이었다.
소림을 대표하는 백팔나한진(百八羅漢陣)이 여기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위력의 차이는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다.
원래 그 수련이 너무도 어려운 보리제존강은 거의 실전되고 그보다 훨씬 쉬운 백팔나한진만이 소림의 대표기예로 전승되고 있는 터였다.
그러한 시기에 무각의 보리제존강 터득은 엄청난 의미를 갖고 있었다.
무각의 보리제존강.
그것은 바로 소림의 일대 중흥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쨌든 누군가의 외침이 터지는 그 순간이었다.
쓰으…….
백팔 개의 불상들은 마치 거짓말처럼 허공 전체에서 사라져 버렸다.
눈을 어리게 하는 엄청난 자색의 광휘만이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곧이어 그 광휘마저 씻은 듯 자취를 감추었다.
"후……!"
"으음……!"
비로소 경악을 추스리는 긴 장탄식이 군호들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그러나 아직도 그들의 얼굴에는 미처 지울 수 없는 경악과 경탄의 빛이 짙게 깔려 있었다.
"흠……!"
검운강은 깊숙한 시선으로 무각을 응시했다.
"무각! 저 자로 인해 분명 소림은 풍운에 휩싸일 것이다. 그것이 천하무림에 복인지 화인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은 검운강의 뇌리에 너무도 선명하게 자리잡는 예감이었다.
무각!
그는 이 순간 보리제존강 외에도 여러 가지 실전되다시피 했던 소림의 비전무학을 차례로 펼쳐 보이고 있었다.
춤.
그의 한동작 한동작은 차라리 장엄한 춤사위였다.
그것이 과연 몇 성 정도나 겉으로 드러나는 성취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느덧 장내는 완전히 무각 그 한 인물에게 몰입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자리를 빌어 새롭게 눈을 뜨고 있었다.
대소림!
그 천년을 넘게 이어오는 불멸의 위명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그 동안 자신들만이 알고 있던 소림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수박 겉핥기식이었던가를…….
아무도… 더 이상 무각이 이 자리에 술을 먹고 나타났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그 엄청난 경악과 감동 속에서 용비사문의 불제는 서서히 막을 내려가고 있었다.
第 7 章 사투
녹담하(綠潭河)!
숭산을 끼고 흐르는 황하의 지류였다.
그리 큰 물줄기는 아니나 안휘성의 소호(巢湖)를 거쳐 장강(長江)의 대수로까지 연결되어 있다. 숭산을 오가는 분향객들이 많이 이용하는 수로 중 하나였다.
밤.
가끔씩 잠 못 이루는 산짐승들의 고독한 울부짖음만이 들려 올 뿐이다.
천지는 심야의 깊은 어둠과 적막 속에 잠들어 있었다.
짙은 어둠에 싸인 녹담하 또한 인적은 물론 오가는 범선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쏴아아…….
맑은 물소리만이 조용하게 울려 퍼지는 그때였다.
뎅… 뎅…….
숭산의 소림사에서 자정을 알리는 인경 소리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 온다.
그 소리의 마지막 여운이 막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휘익!
문득, 한 명의 검은 인영이 깊이 잠든 녹담하의 포구에 나타났다.
바로 변장한 모습 그대로의 검운강이었다.
검운강은 용비사문의 불제가 막을 내린 직후 기척 없이 소림을 벗어나 이곳으로 향한 것이다.
검운강은 녹담하의 이름과 동시에 재빨리 포구 주위를 살폈다.
곧 그의 눈가로 안도의 기색이 스쳤다.
"그대로 남아 있군."
포구의 한쪽.
한 척의 낡은 목선이 물결에 흔들리며 매어져 있었다.
그것은 사흘 전 검운강이 소림으로 올 때 바로 이 수로를 이용해 타고 온 목선이었다.
스윽!
검운강은 지체 없이 목선으로 향했다.
그런데 막 목선 앞에 당도하는 순간, 검운강은 자신도 모르게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으응?'
느낌.
일순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괴이한 느낌이 등뒤에서 강렬하게 전해져 왔다.
'그럴 수가?'
검운강은 내심 반신반의하며 등뒤로 신형을 돌렸다.
찰나, 검운강의 눈가에 한 가닥 짧은 이채가 섬광처럼 스쳤다.
'으음… 무언가 일이 잘못됐군. 그렇지 않다면 이 자가 나를 미행했을 리가 없는데……!'
검운강은 내심 소리 없이 침음했다.
이 순간, 그의 눈앞에는 전혀 뜻밖의 한 인물이 소리 없는 미소를 빙긋 띠운 채 검운강을 응시하고 있었다.
짙은 야음 속에서도 파랗게 깎은 머리가 너무도 선명하게 부각되는 인물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바로 무각이었다.
진정 검운강으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
무각의 전신에서는 여전히 지독한 술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미행 중이던 지금까지는 본신 진기로써 그 냄새를 감춘 것이 분명했다.
'역시 대단한 인물이다. 이토록 철저하게 나의 이목을 속이고 미행할 수 있다니…….'
검운강은 언뜻 무거워지는 심중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일점 흔들림도 없이 조용하게 무각을 응시했다.
무각은 용비사문의 불제에서 본 모습보다 더욱 뛰어난 기도의 모습이었다.
마치 어둠 속에서 거대한 태산이 웅크리고 있는 듯, 무각의 모습은 형언할 수 없는 압박감을 풍기며 그의 시야에 부각되었다.
이윽고 무각은 검운강을 향해 짙은 미소를 떠올렸다.
"허허… 본불과 시주는 아마 특별한 인연이 있는 듯하오만… 혹시 시주께서 바로 암향비도라 불리는 그 장본인이 아니신지?"
친근한 느낌이 들 정도로 부드러운 음성.
그것은 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다는 어조였다.
검운강은 씨익 미소지었다.
"그런 것을 묻기 위해 굳이 이곳까지 본인을 쫓은 것은 아닐 터… 귀하의 용건을 알고 싶소."
단도직입적인 반문이었고 또한 거침없는 시인이었다.
무각은 입가에 미소를 더욱 짙게 피워 물었다.
"아미타불… 시주는 오지 못할 장소에서 보지 못할 장면을 목격한 것이 결정적인 불행이었소."
여전히 온화한 이 말과 동시에 합장한 무각의 수중에서 돌연 무언가 검운강을 향해 섬전같이 날아들었다.
쉬쉬쉭!
검운강은 우수를 쭉 뻗어 기쾌하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극히 작은 새의 깃털 한 조각이었다. 바로 검운강이 용비사문방에서 떨어뜨렸던 것이었다.
"그랬었군."
검운강은 나직이 독백성을 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아까의 불제에서 무각과 눈길이 마주친 것이 결코 우연히 아니었음을 알 것 같았다.
"또한 용비사문방에 감도는 수미보리향(須彌菩利香)의 향기는 일단 몸에 배이면 쉽게 지워지지 않는 특성이 있음을 시주는 미처 알지 못했을 것이오."
무각의 설명이었다.
검운강은 피식 실소하듯 웃음을 머금었다.
'장경각의 채유 냄새 때문에… 그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군…….'
이어 검운강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이미 본인의 정체가 드러난 이상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소. 문제는 귀하와 소림이 본인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하는 것이오."
무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두 눈이 깊숙한 광채를 발했다.
"본불이 원하는 것은 그대의 입… 곧 그대가 본 것을 타인에게 말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오."
살인멸구(殺人滅口).
바로 검운강을 죽이겠다는 명확한 의미였다.
"후후……."
검운강은 나직이 웃었다.
"그 말은 필히 기억해 둘 필요가 있겠군."
너무도 담담하고 태연한 음성.
검운강의 눈빛은 어느새 한 올의 감정도 없이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순간, 무각의 두 눈에 빠르게 의혹의 빛이 스쳤다.
'본불의 진위를 알고 있을 이 자가 이리도 당당하다니… 무언가 의지할 것이 있다는 뜻인가?'
무각은 잠시 혼란을 느꼈다.
사실 무각은 지금까지도 검운강에게서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소림 내에서는 물론, 이곳까지 오는 동안도 검운강은 자신의 무학을 드러내거나 은연의 기도를 표출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때문에 무각이 알 수 있을 것이라곤 암향비도란 별호와 지금의 어설픈 검운강의 용모뿐이었다.
'암향비도란 자가 그 명성과는 달리 상상외로 보잘것없다 느꼈거늘… 역시 범상치 않은 구석이 있다는 말인가?'
그는 짧은 순간 검운강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스쳐 보냈다.
그러나 종국에는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묘한 인물이라는 느낌만 남을 뿐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검운강의 눈빛이 언뜻 찰나적으로 흔들렸다.
어둠 속에서 포구를 향해 좁혀 오는 또 다른 인기척들을 감지한 것이다.
'하나… 둘… 다섯… 아홉……!'
검운강은 내심 인기척의 숫자를 세며 가슴이 침중해졌다.
'십 인의 용비사문에 의해 완벽하게 포위당했군.'
그것은 직감이었다.
검운강은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자신을 포위한 인물들이 바로 나머지 구 인의 용비사문임을 간파한 것이다.
검운강은 이내 신비롭게 웃었다.
"후후후… 제법 튼튼한 그물을 마련했지만 대어를 잡기엔 아직 부족한 것 같소이다."
무각은 그 말에 희미한 눈웃음을 지었다.
"시주는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군. 본불이 보기에 시주는 단지 맑은 물을 어지럽히는 미꾸라지에 불과하오."
이 말은 짐짓 검운강의 심기를 찔러 보는 소리였다.
그러나 검운강은 주저 없이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다면 귀하는 미꾸라지도 잡지 못하는 형편없는 어부가 될 것이오. 자… 본인은 무척 분주한 몸이니 빨리 그물을 던져 오도록 하시오."
"모든 것은 인과응보라… 시주가 던져 시작한 일이니 과히 본불을 원망하지는 말기 바라오."
무각은 조용한 한마디와 함께 검운강을 향해 합장을 취해 보였다.
그것은 죽을 자에 대한 마지막 예의 같은 것이었다.
순간 검운강은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압박감과 형언할 수 없는 살기가 전신에 엄습함을 느꼈다.
동시에 지금껏 일체 어떠한 기운도 드러내 놓지 않던 주위의 아홉 용비사문으로부터도 엄청난 압박감이 해일처럼 쏟아져 나왔다.
우우우우웅……!
일대의 밤 공기가 소리 없이 격탕치고, 사위는 삽시간에 살갗을 에일 듯한 가공할 살기로 뒤덮였다.
'과연 대단하다… 그러나…….'
검운강은 전신이 터져 나갈 듯한 긴박감 속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로선 강호 출도 후 한 번도 맞아 보지 못한 최대의 위기였다.
그렇다.
무각과 나머지 구 인의 무승들을 물리치고 살아날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었다.
'무각 혼자라면 어쩌면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나 나머지 아홉 명은 어쩔 도리가 없다. 모든 것은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순간이다.
무각의 입가에 감돌던 미소가 돌연 씻은 듯 사라졌다.
"아미타불… 조심하시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콰우우…….
한 줄기 무서운 강기가 폭풍처럼 검운강의 심장을 노리고 짓쳐들었다.
"호… 소림은 기막힌 제자를 두었군."
검운강은 호방한 일갈을 터뜨리며 짓쳐드는 강기를 향해 벼락같이 일장을 마주쳐 갔다.
우웅…….
꽈― 과― 광!
벼락치는 듯한 굉음이 터져 울리며 사방으로 미친 듯한 회오리가 퍼져 나갔다.
쏴아아…….
포구 근처의 녹담하 물결이 용트림하며 튀어올랐다.
쿵! 쿵!
검운강은 충격으로 인해 두 발자국이나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무각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엄청난 내공! 용비사문방에서 목격한 것이 이것으로 정확히 입증되었다!'
검운강은 내심 경악하며 신음했다.
서로의 강력이 격돌하는 순간 마치 숨이 콱 막히는 듯한 엄청난 충격이 심맥에 전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미꾸라지치곤 제법이오. 이번엔 이것도 받아 보시오."
아마도 처음의 일장은 검운강의 내력을 시험해 보려는 것이었던 게다.
무각은 칭찬인지 조롱인지 모를 외침과 함께 잠시의 여유도 주지 않고 양손을 합장한 채 천천히 앞으로 내밀었다.
청광!
눈부신 청광이 합장한 그의 양손에서 자욱하게 피어났다.
"제마불영수(制魔佛影手)!"
그것을 본 검운강은 나직한 침음성을 발했다.
― 제마불영수(制魔佛影手)!
그런데 바로 소림무예칠십이종 중 무려 서열 삼 위의 무학이 아니던가!
백 장의 거리 밖에서 스치기만 해도 천하에서 가장 단단한 오강석(烏剛石)에 한 자 깊이의 푸른 수인(手印)이 찍힌다는 극고의 강기공( 氣功)이다.
하물며 이 순간 상상할 수도 없는 내력을 지닌 무각의 손에서 펼쳐지는 그 위력이야 불문가지인 것.
순간, 무각이 낭랑한 웃음을 발했다.
"암향비도란 칭호답게 아는 것도 많군. 하면 제마불영수의 위력도 익히 알고 있을 터……."
위이잉―!
쿠쿠쿠쿠…….
귀청을 진동하는 기음이 터지고, 수백 수천의 푸른 수영이 야공을 뒤덮으며 피어 나왔다.
천라지망―!
천지는 그야말로 한치의 틈도 없는 손 그림자 속에 뒤덮이고, 방원 백여 장은 가공할 암경의 폭풍 속에 휘말렸다.
그 자체만으로도 가공할 위력의 제마불영수가 이 순간 무각의 손에서 상상할 수 없는 통천가공의 위세로 쏟아지고 있었다.
찰나, 검운강의 눈빛은 강렬하게 빛났다.
'저 중 단 하나만이 진정한 살초(殺招)… 나머지는 눈을 어리는 허초(虛招)일 뿐이다!'
동시에 검운강은 신형을 움직였다.
순간, 무각은 두 눈에 기광을 떠올렸다.
"분광취리보(分光醉 步)! 본불 앞에서 감히 소림의 무학을?"
너무도 어이없다는 음성이었다.
― 분광취리보!
검운강이 펼친 신법은 진정 어이없게도 소림 비전의 경신법인 분광취리보였던 것이다.
스읏…….
무각의 신형도 검운강과 똑같이 움직였다.
동시에 검운강은 제마불영수의 손 그림자 속에 완벽하게 포위되었다.
"이젠 끝났소, 시주!"
무각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검운강은 담담히 대꾸했다.
"하하하… 자만하지 마시오, 무각! 그대가 아는 무학을 본인 역시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을 뿐이오."
검운강의 낭랑한 웃음이 들렸다 싶은 순간이었다.
번― 쩍!
청광이 폭발하는 듯한 강렬무비한 광채가 피었다.
쾅쾅쾅!
콰― 콰― 쾅!
굉음!
천번지복의 굉음이 그 순간 환상처럼 터지고, 무각의 입에서 분노의 침음성이 새어 나왔다.
"으음……!"
검운강.
그가 너무도 교묘하게 무각의 공세를 피해 버린 것이다.
어느새 검운강은 원래의 자리에 태연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었다.
제마불영수는 우측으로 석 자 가량이나 떨어진 엉뚱한 곳의 땅바닥만 움푹 뚫어 놓았다.
검운강은 일그러진 무각의 얼굴을 향해 빙글빙글 웃었다.
"후후… 제법 재미있지 않소, 무각?"
"재미있군."
무각은 내뱉듯 대꾸했다.
그의 미간에는 선연한 살기와 분노가 피어 올랐다.
'어이없게도 우롱당하다니!'
"아미타불… 이젠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
무각은 살기 어린 불호를 발하며 한 손을 천천히 허공으로 치켜 올렸다.
마치 거대한 태산이 움직이듯 장중한 동작!
검운강조차도 어떤 무공을 펼치려는 것인지 미처 알 수가 없었다.
단지, 그 단순한 한 동작만으로도 엄청난 살기와 압력이 주위에 파도처럼 밀려 나오고 있었다.
후우웅… 쿠우우…….
'으음……!'
검운강은 또다시 전신을 긴장시킨 채 타는 듯 무각의 거동을 주시했다.
* * *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이 인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단지 죽이려는 자와 살아 남으려는 자의 결사적인 몸부림 속에 시간은 억겁처럼, 그리고 찰나처럼 흘러갔을 뿐이었다.
"지독한……!"
일순, 무각은 모든 공세를 멈추고 검운강을 노려보았다.
그의 전신은 땀으로 젖었고 극도의 내공을 소모한 듯 얼굴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지독히도 끈질긴 목숨을 지니고 있는 자로군."
무각은 기막힌 어조로 내뱉듯 말하며 얼굴의 땀방울을 한 손으로 문질러 닦았다.
검운강은 그런 무각을 향해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후후… 당연하지. 본인의 성복술(星卜術)에 의한 점괘에 의하면, 능히 이백의 천수를 누릴 장수의 운세였으니까."
여전히 여유롭고 태연한 어조였다.
그러나 실상 이 순간 검운강의 모습은 무각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밀랍 같은 안면 위로 머리카락은 봉두난발처럼 흐트러졌고, 입가에는 연신 실낱 같은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뿐인가?
전신의 흑의는 휘몰아치는 경력과 강기를 견디지 못하고 갈기갈기 찢겨져 아예 걸레쪽이 되어 있었다.
이것은 검운강과 무각의 연실한 내공 차이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검운강이 결코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고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검운강은 한점 흐트러짐이 없는 깊숙한 시선으로 무각을 응시하고 있었다.
심해처럼 담담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은 무각에게 차라리 어떤 한기마저 느끼게 했다.
'이런 상황하에서도 저런 눈빛을 보일 수 있다니… 본불이 저 자를 너무도 과소평가했다.'
무각은 내심 신음했다.
바로 그때였다.
둥… 두둥!
새로이 신시(申時)를 알리는 북소리가 소림사로부터 웅장하게 터져 울렸다. 동시에 동녘의 하늘에 여명이 움트고 있었다.
"벌써 시각이 이렇게?"
무각의 시선이 흠칫 동쪽으로 향해졌다. 동시에 검운강의 눈길도 여명이 움트는 하늘로 향했다.
'됐다! 새벽이 되어 소림을 떠나는 군호들이 이곳으로 온다면 저들도 나를 어쩌지 못한다.'
그렇다.
검운강은 지금껏 전력을 다해 시간을 끌어 왔다.
각파의 군호들이 움직일 시간이면 이들은 타인의 이목이 두려워 자신을 어쩌지 못할 게 자명한 사실인 것이다.
더욱이 다행하게도 나머지 아홉 명의 무승들은 자존심 때문인지 지금까지 주위를 포위만 했을 뿐 합공을 취해 오지 않았다.
사실 그들로선 합공을 취하기엔 검운강이 너무도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그때 무각은 눈가에 초조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어 마지막 내공까지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듯 무각의 승포가 팽팽하게 부풀었다.
"아미타불… 잘 가시오, 시주."
콰― 아― 아―!
무각의 마지막 음성은 채 들리지도 않았다.
혼백을 떨어 울릴 듯한 굉음과 함께 노도와 같은 일장이 돌연 숨쉴 겨를도 없이 그의 쌍장에서 쏟아져 나온 것이다.
순간 가공할 암경의 회오리가 방원 백여 장을 뒤덮고 막막한 어둠이 주위를 뒤덮었다.
경천동지할 위력의 일장.
무각은 이 일장에 검운강의 생사를 가름하려는 듯했다.
"어딜!"
그러나 이미 대비하고 있던 검운강은 미끄러지듯 신형을 움직여 무각의 장력을 피해 냈다.
바로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무각의 짧은 웃음이 들리는 게 아닌가?
"후훗!"
그와 동시에 그토록 엄청나던 공세가 홀연 씻은 듯 사라지며 무각의 얼굴이 그림자처럼 검운강 앞에 나타났다.
속임수.
조금 전의 공세는 완전한 속임수였던 것이다.
'아뿔싸!'
검운강은 내심 크게 당혹했다.
찰나, 이미 엄청난 강기가 전신을 뒤덮어 오고 있었다.
콰과과아아…….
그 속에서 무각의 입술에 맺힌 짙은 득의의 미소가 검운강의 두 눈에 크게 확산되며 비쳐 오고 있었다.
실로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후후……."
뜻밖에도 검운강은 한 줄기 차가운 미소를 피워 물었다.
"아직 기뻐하기엔 이르다, 무각!"
꽈르릉! 꽈과과과―!
천지가 한꺼번에 뒤집히는 듯한 굉음이 환청처럼 터졌다.
"흐으윽!"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신음이 굉음 속에 뒤섞였다.
주위의 모래먼지가 하늘을 가릴 듯 솟구쳤다.
녹담하의 물결은 광란하듯 파동쳤다.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아홉 명의 무승들조차 무엇이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먼지와 혼란이 가라앉으며 장내의 광경이 명확히 드러났다.
검운강― 그의 모습은 너무도 처참했다.
뒤로 일 장 가량이나 물러선 그의 안색은 백짓장보다 더 창백하고 앞섶은 완전히 검붉은 선혈로 뒤덮여 있었다.
어깨는 아직도 미미한 진동을 보이고 있어 엄중한 내상을 입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무각 또한 뒤로 다섯 발자국이나 물러서 있었다.
그의 만면은 경악의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럴 수가? 그 와중에서도 내공을 아끼고 있었다니……!"
경탄에 가까운 신음성이었다.
정녕 그는 검운강의 내공이 이토록 거셀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지막 전 내력을 쏟아 낸 회심의 살초가 또다시 무위로 돌아가다니…….
그때, 검운강은 무각을 향해 한 줄기 창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고통 때문에 약간 구부리고 있던 가슴을 천천히 폈다.
순간, 그 깊은 내상에도 불구하고 검운강의 전신에 한 가닥 의연한 기상이 피어 올랐다.
마치 상처를 입고도 그 절대의 위엄을 잃지 않는 백수지왕(百狩之王) 사자의 모습이랄까?
추호도 위축됨이 없는 그 모습은 감동적이고 장엄하기까지 했다.
검운강은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선언하듯 말했다.
"본인이 내공에선 약간 뒤질지 모르나 초식의 변화무쌍함은 분명 그대보다 한 수 위… 오늘의 승부는 무승부요."
"으음……!"
무각은 순간 전신에 미세한 떨림을 일으켰다.
검운강의 말― 그것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비록 죽이려 했던 자이지만 뛰어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어쩌면… 이 시대가 탄생시킨 또 하나의 영웅일지도…….'
이 시대가 탄생시킨 또 하나의 영웅!
'어쨌든 저 자의 진체를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 너무도 큰 실수였다.'
무각은 내심 고개를 흔들며 탄식했다.
실로 무승부란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문득 무각은 뇌리에 어떤 결심을 떠올렸다.
'저런 정도의 인물이라면 결코 입을 가벼이 놀리지는 않을 터… 어차피 죽이지 못할 바엔 최소한 적으로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
무각은 곧 검운강을 지그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대가 한 가지 약속을 해준다면 본불은 이 자리를 물러날 용의가 있소."
살의가 사라진 조용한 음성이었다.
검운강은 싱긋 미소지었다.
"서로가 만족할 수 있는 조건이라면 들어 볼 만하겠지."
무각은 눈빛을 깊숙하고 강렬하게 빛냈다.
"용비사문방의 일을 타인에게 발설치 않으며 차후론 소림에 절대 잠입하지 않겠다면 본불은 물러날 것을 약속할 수가 있소."
검운강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면 어려운 것이 아니군. 용비사문방의 일은 이미 흥미를 잃은 지 오래이고, 소림의 무학 역시 이미 거의가 내 머릿속에 들어 있으니까."
너무도 쉽게 흘러 나오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 말에 무각은 내심 아연하고 말았다.
'소림의 무학을 거의 기억하고 있다고?'
실로 황당무계한 소리가 아닌가?
그러나 무각은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눈으로 이미 직접 확인한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펼치는 무학을 검운강은 모조리 알고 있었다. 때문에 검운강을 쉽사리 어쩌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였다.
검운강은 문득 기이한 눈빛으로 무각을 직시했다.
"본인도 대신 한 가지 알고 싶은 것이 있소."
"알고 싶은 것이라면……?"
"십 인의 노승들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대들이 탄생된 이유는 무엇이오?"
나직한 이 말은 무각의 귀에만 들리는 전음지성이었다.
순간, 무각의 안색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무각은 굳은 눈빛으로 타는 듯 검운강을 직시했다.
"알려 줄 필요는 없지만 한 가지는 알려 줄 수 있지. 그대는 천조대유림(天祖大儒林)이란 이름을 알고 있는가?"
역시 전음지성의 반문이었다.
검운강은 고개를 갸웃했다.
"천조대유림이라… 무림의 일맥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데……."
검운강은 검미를 좁히며 곤혹의 빛을 떠올렸다.
진정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순간, 검운강을 주시하고 있던 무각의 눈빛이 약간은 부드럽게 풀어졌다.
"모른다니 다행이군. 우리는 바로 그들을 막기 위해 탄생되었다는 것만 알아 두시오."
"그랬었나? 하지만 대체 그들이 무엇이기에?"
검운강은 또 한 번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이름― 천조대유림!
무각의 입에서 흘러 나온 이 경악스런 이름의 의미를 안다면 검운강은 결코 이렇게 태연할 수 없으리라.
아니, 그것은 사실 극소수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가공할 이름이었다.
천조대유림!
그들은 흔히 서생이라 일컫는 유사(儒士)의 집단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엄청난 힘을 가진 보이지 않는 절대의 세력이었으니…….
자고로 최고의 권좌라 일컫는 황제와 황실이 있다.
그러나 절대권력의 자리인 만큼 그처럼 흥망성쇠의 변화가 무쌍한 것도 없다.
피와 죽음. 그리고 치열한 암투 속에 무수한 황조가 이 땅을 거쳐 아득한 망각의 나락으로 떨어져 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황조가 일어선 뒤에는 항상 천조대유림이 존재한다는 것이었으니…….
천조대유림.
그 힘을 얻지 못하면 결코 황조를 열지 못한다. 또한 천조대유림을 거역하면 결코 황조를 존속시킬 수도 없다.
믿기지 않는 사실이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절대의 권력이라 말하는 황권.
그러나 천조대유림은 그 절대황권의 위에 군림하는 또 하나 절대 중의 절대권력이었다.
단지,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황권은 눈에 보이되, 천조대유림의 절대권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천조대유림!
정녕 아무도 그들의 힘과 실체를 아는 인물은 없었다.
단지 극소수 중의 극소수만이 그들의 가공하고 엄청난 힘을 알고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무각의 입에서 놀랍게도 그 가공할 이름이 튀어나왔다.
운명!
이것이 바로 운명이라 이름하는 천의인 것인가?
마침내 검운강은 천조대유림이란 존재를 알았고, 검운강의 뇌리에 그 이름은 너무도 선명하게 낙인찍혔다.
그런데 검운강이 무각과 서로 타협의 대화를 나누는 이 순간, 돌연 한 명의 인물이 유령처럼 검운강의 등뒤로 다가섰다.
스으……!
너무도 돌연하고 짧은 순간이라 무각조차 미처 눈치채지 못한 움직임이었다.
일순, 검운강은 무언가 섬광처럼 엄습하는 불길한 예감에 홱 고개를 돌렸다.
'누가……?'
바로 그 일수유.
번― 쩍!
파공음과 두 눈이 멀 듯한 강렬무비한 섬광이 일었다.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엄청난 강기의 힘이 검운강의 등에 그대로 작렬하였다.
꽈― 광!
"우욱!"
검운강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성이 터졌다.
선렬한 피분수가 비명과 함께 솟구치고, 검운강은 전신이 칠흑의 어둠 속으로 추락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다음 순간, 검운강은 회오리에 휘말린 낙엽처럼 십여 장의 허공으로 퉁겨 오른 후 그대로 포물선을 그리며 녹담하 중앙의 물 속으로 거꾸로 처박히듯 추락하였다.
휘이익! 풍덩!
수면 위로 곧 선렬한 핏물이 파문처럼 번져 오르기 시작했다.
"사… 사제… 이 무슨 짓… 아미타불!"
무각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검운강을 암습한 인물을 응시하였다.
너무도 돌발적인 사태.
이것은 정녕 무각 자신도 상상치 못한 불상사였다.
"그 자를 살려 두기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소, 대사형! 또한 그 자는 죽어 마땅한 무림의 공적인 것이오."
암습자는 한 올의 가책도 없이 극히 태연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이십대 후반의 청년무승이었다.
각이 진 얼굴, 길고 예리한 눈매, 두 눈은 승인답지 않게 극히 무감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법명은 무운(無雲).
용비사문방 서열 네 번째이며, 간밤의 불제에서도 가장 패도적인 기도를 나타냈던 인물이었다.
"아미타불……."
무각은 당혹스런 불호를 외며 검운강이 떨어진 녹담하의 물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사제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어찌 암습을? 우리는 소림의 제자이며 승인의 신분이 아닌가?"
무운은 그 말에 차갑게 웃었다.
"천조대유림을 멸살하기 위해선 어떤 실수도 용납될 수 없소. 우리가 소림의 승인이 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음을 벌써 잊으셨소?"
오히려 당당하게 무각을 질책하는 어조였다.
"아미타불……."
무각은 침중한 어조로 불호를 외웠다.
왜인가?
어떤 불길한 예감이 이 순간 그의 가슴으로 소리 없이 엄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만 돌아가자."
말과 동시에 무각은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러나 무운은 쉽게 장내를 떠나지 못하고 멈칫거렸다.
그의 시선은 날카롭게 번뜩이며 검운강이 떨어진 녹담하의 물결 근처를 살피고 있었다.
"나한천강수(羅漢天 手)에 정통으로 격중되고도 살아날 수는 없겠지… 더욱이 내상이 극심한 상태였으니까."
무운은 스스로를 안심시키듯 나직이 뇌까렸다.
나한천강수!
소림무예칠십이종 중 서열 칠 위.
그 위력이 극히 패도적이며, 천근 바위라도 단숨에 밀가루처럼 부셔 버리는 극강지공(極强之功)이었다. 하물며 그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던 검운강에게 있어선 절대적 회생 불능의 치명적 살수였으리라.
'시간이 촉박하지 않았다면 시신을 확인해 보련만…….'
무운은 잠시 더 머뭇거리다가 아쉬운 눈길을 뒤로 던진 채 그 자리를 떠나갔다.
팟―!
모두가 떠난 장내엔 정적이 내려앉고, 그 위로 어스름한 여명이 소리 없이 덮이고 있었다.
쏴아아…….
흐르는 물결 위에 주인을 잃은 낡은 목선만이 무심히 흔들리고 있었다.
第 8 章 산 너머 산
안휘성(安徽省) 청양부(靑陽府).
소호에서 십여 리 남짓 떨어진 곳이다.
각지에서 소호로 흘러드는 계류들의 절반 가량은 이곳 청양부를 감돌아 흐르며, 또한 복우산의 유려한 산세가 병풍처럼 주위에 뻗어내려 있다.
해서 이곳 청양부는 중원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절경을 지닌 곳으로 유명하다.
아울러 그런 이유로 황궁의 고관대작이나 상계의 거부들이 가장 많이 별장을 짓는 곳으로도 으뜸이었다.
심지어 역대의 황제들조차도 어김없이 이곳 청양부에 별궁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정오의 맑은 햇살이 물살 위에 보석처럼 부서졌다.
"호호호… 저 물고기 좀 봐. 꼭 언니의 속살처럼 하얀 걸!"
햇살만큼이나 발랄한 소녀의 교성이 햇살 부서지는 물결 위로 싱그럽게 울려 퍼졌다.
"청(靑)아는 또 이 언니를 놀리고 싶은 모양이지?"
부드럽고 다감한 옥음이 뒤를 이어 흘러 나왔다.
호수.
소녀들의 명랑한 음성이 들리는 곳은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인공호수 위였다.
근처에 흐르는 계류의 물결을 지하수로로 뚫어 연결한 듯, 호수의 물결은 마치 심산의 계류처럼 맑고 깨끗했다.
퐁… 포르릉…….
아름다운 은빛 잉어들이 물방울을 퉁기며 튀어오르고, 색색의 각종 물고기가 꼬리를 흔들며 노니는 광경이 거울 속처럼 비춰지고 있었다.
아마도 어느 고관대작의 별장인 듯, 호수의 주위로는 화려하게 꾸며진 화원이 있고, 호수 위엔 무지개 다리로 연결된 연화 모양의 정자가 세워져 있었다.
지금 연화정자 위에는 두 명의 아름다운 소녀가 정답게 담소하고 있었다.
십삼 세 가량 된 취의궁장 소녀와, 역시 취의궁장 차림을 한 십팔 세 가량의 소녀.
모두 빼어난 미모에 각기 뚜렷한 개성의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었다.
그 중 어린 소녀는 귀엽고 발랄하기가 마치 천상옥녀와도 같은 깜찍한 모습이었다. 발그레한 뺨과 크고 서글서글한 봉목이 유난히 돋보이는…….
반면, 십팔 세 정도의 소녀는 창백할 정도의 흰 피부에 어울리는 청초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다.
마치 찬 이슬에 젖은 백합과 같은 인상이랄까?
어딘지 우울해 보이는 깊은 눈망울이 매우 매력적인 소녀였다.
아마도 이들 두 소녀는 자매간인 듯, 개성은 각기 달라도 얼굴 모습은 매우 닮아 보였다.
그때, 어린 소녀는 연신 즐겁게 종알대며 정자의 이곳저곳을 나비처럼 돌아다니고 있었다.
"언니, 저 물고기는 참 이상하지? 눈이 톡 튀어나온 게 꼭 언니가 놀랐을 때의 얼굴 같거든. 호호호……."
소녀는 앙증맞은 손으로 자신의 눈동자를 동그랗게 만들며 깔깔댔다.
언니는 짐짓 화난 표정을 지었다.
"청아, 너 까불면 혼내 줄 거야!"
"흥! 하나도 겁 안 난다. 나는……."
어린 소녀 청아는 어리광스럽게 고개를 흔들며 언니의 등뒤로 폴짝 돌아섰다.
그리고 재빨리 언니의 두 눈을 손으로 가렸다.
"요 녀석이?"
언니는 청아의 다리를 간지럽히는 것으로 반격했다.
"호호호… 간지러워!"
청아는 뒤로 물러나며 또르르 구슬방울 같은 교소를 터뜨렸다.
퐁… 포르릉…….
잉어들이 퉁기는 물방울 위로 한낮의 태양은 눈부시게 쏟아지고 생기발랄한 소녀의 교소가 맑게 울려 퍼지는, 한 폭의 그림 같은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응?"
호수를 바라보던 언니의 두 눈에 반짝 이채가 스쳤다.
"청아, 호수 속에 저게 뭐지?"
호수 밑으로 언뜻 검은 그림자 하나가 보이고 있었다.
"뭐가? 물고기 아냐?"
청아는 폴짝 앞으로 내달아 호수와 언니를 번갈아보며 물었다.
언니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뭐가 보였는데… 착각일까?"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돌연 청아의 두 눈이 크게 확대되었다.
"저… 저… 저게 뭐야?"
그녀의 눈앞에서 돌연 검은 물체 하나가 호수의 수면 위로 쓰윽 떠오른 것이다.
"아악!"
그 물체의 형태를 확인하는 순간, 청아는 자지러질 듯 비명을 지르며 후다닥 언니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언니는 아예 두 눈을 감아 버렸다.
가뜩이나 하얀 얼굴이 더욱 한점의 핏기도 없이 창백해졌다.
'물에 빠져 죽은 시체가 분명해. 이를 어쩌지……?'
그녀는 너무도 놀라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미처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입술을 꼬옥 깨물며 간신히 두 눈을 떴다. 이어 뛰는 가슴을 억지로 누르며 가만히 시체를 응시했다.
시체는 기이하게도 잠이 든 듯 반듯하게 물 위로 떠올라 있었다.
나이는 십오륙 세 정도 되었을까?
밀랍 같은 얼굴.
그러나 흔히 볼 수 없는 뛰어나게 준수한 용모였다.
누군가?
그렇다. 그것은 다름아닌 검운강의 얼굴이었다.
본래 나한천강수에 격중되는 순간 내력이 흩어지며 변장이 풀린 것이었다.
"어쩜 저렇게 살아 있는 것 같을까? 혹시 꼬마들이 장난하는 게 아닐까?"
청아의 음성이 조그맣게 들렸다.
청아는 어느새 무서움도 잊은 채 짙은 호기심으로 똘망똘망한 눈빛을 반짝이며 검운강을 응시하고 있었다.
언니는 아미를 살포시 찌푸렸다.
"글쎄… 물에 빠져 죽은 시체는 보기가 흉하다고 하던데……."
그녀는 선뜻 판단이 서지 않은 기색이었다.
물에 빠져 죽은 시체라면 전신이 물에 퉁퉁 부어오른다는 건 누구나 아는 일이다.
그러나 검운강은 일신의 옷이 걸레처럼 찢겨 나가고 곳곳에 상처가 나 있는 것 외엔 너무도 깨끗한 모습이었다.
그때였다.
"맞아, 꼬마 녀석들이 장난하는 거야. 이 녀석들, 어디 혼 좀 내줘야지."
청아는 언니의 품속에서 빠져 나와 어디론가 쪼르르 달려갔다.
잠시 후, 청아는 긴 대나무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요 녀석!"
청아는 대나무 끝으로 검운강을 찰싹 때렸다.
그러나 검운강은 미동도 없었다.
"흥! 얼마나 더 시치미를 떼는가 보자!"
철썩!
청아는 더 힘껏 검운강의 가슴팍을 내리쳤다.
하지만 역시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청아는 얼굴이 멈칫 굳어졌다.
"어… 언니… 정말… 그거… 시, 시첸가 봐!"
청아는 다시금 무서움에 사로잡힌 듯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며 더듬거렸다.
지켜보던 언니도 얼굴이 굳어지며 꺼림칙한 시선을 검운강에게로 던졌다.
그런데 그 순간 미동도 없던 검운강의 손 하나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게 아닌가!
"엉? 시체가 아니잖아!"
그것을 본 청아는 어이없고 화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물고기가 검운강의 손을 건드려 일어난 움직임인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나를 두 번씩이나 놀라게 하다니… 어디 두고 보자!"
청아는 즉시 장대로 검운강을 정자 쪽으로 끌어당겼다.
"처, 청아……!"
언니는 뭔가 꺼림칙한 느낌에 만류하듯 동생을 불렀다.
그러나 청아는 들은 척도 않고 끙끙거리며 검운강을 정자 위로 끌어올렸다.
이어 그녀는 검운강의 코를 힘껏 비틀었다.
"흥! 맛 좀 봐라. 이 녀석!"
그러나 검운강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고 싸늘한 감촉만이 전해질 뿐이었다.
"응……?"
청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검운강의 코에 살며시 손을 갖다 대 보았다.
"이상한걸… 숨을 안 쉬는데?"
청아는 언니 쪽을 돌아보았다.
순간 언니는 얼굴이 해쓱하게 질리며 말도 못하고 주춤 뒤로 넘어질 듯 물러섰다.
청아는 다시 검운강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숨을 안 쉰다면… 숨을… 안… 쉰다면… 아악!"
청아는 비로소 기절할 듯 비명을 터뜨리며 다시 언니의 품속으로 미친 듯 뛰어들었다.
그녀의 귀여운 옥용은 공포로 인해 완전히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뒤이어 두 자매는 뒷걸음질로 정자에서 도망치듯 사라졌다.
두 소녀의 다리는 금세라도 쓰러질 듯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천공의 태양은 여전히 눈부신…….
이곳은 아름다운 한낮의 청양부였다.
* * *
그 후, 다시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검운강은 전신을 엄습하는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서서히 의식을 회복하고 있었다.
'으… 으……!'
가슴이 형용할 수 없이 답답했다.
심맥의 기혈이 온통 뒤집힌 느낌이었다.
'으… 역혈회령대법(易血回靈大法)이 아니었으면 죽어도 백 번은 더 죽었을 것이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으리라… 놈!'
검운강은 입술을 꽉 짓깨물었다.
그러했던가!
역혈회령대법!
이것은 중원의 무학이 아니었다.
바로 이역의 신비지문, 서장 포달랍궁의 비전밀공이었다.
이 대법의 원리는 극히 간단했다.
적에게 돌연한 암습을 받아 반격할 기회가 전혀 없는 절대절명의 순간.
오히려 급속히 상대의 내력을 몸 안으로 흡수하는 것이다.
동시, 자신의 진기를 최대한 역류시켜 심맥에 모으는 동시에 심맥 자체의 손상을 최대한 방어하는 것이다.
그리 되면 적의 내력은 전신혈맥으로 흩어져 그 힘이 크게 감소되고 만다.
해서 심맥만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 않게 된다.
그러나 자칫하면 진기의 역류로 오히려 주화입마의 화를 당하게 되기도 한다. 동시에 역류된 진기의 힘이 오히려 심맥을 파열시켜 스스로 목숨을 잃게 되는 현상까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이 역혈회령대법은 근원지인 포달랍궁 내에서도 섣불리 익히기를 두려워하는 극히 난해 위험한 무학이다.
그런데 검운강은 무운의 암격을 받는 그 치명적 위기의 찰나에 역혈회령대법을 펼친 것이다. 그리하여 녹담하의 물줄기를 타고 이곳 청양부까지 흘러 내려왔던 것이다.
실로 그토록 엄중한 내상을 입은 상태하에서 펼친 역혈회령대법은 그야말로 생사를 하늘에 맡긴 일대의 도박이었다.
그때, 검운강은 애써 뒤틀리는 기혈을 억누르며 천천히 눈을 떴다.
눈에 비치는 정경으로 보아 지금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은 화려하게 꾸며진 누군가의 침실인 듯했다. 또한 코로 스며드는 그윽한 사향 냄새는 이곳이 여인의 침실임을 느끼게 해주었다.
"어쩌다 내가 이런 곳에?"
검운강은 힘겨운 어조를 발하며 의아해 했다.
바로 그때, 언뜻 문 밖으로부터 인기척이 들려 왔다.
검운강은 부지중 재빨리 다시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이 인의 음성이 귓전에 날아들었다.
일남일녀였다.
"호호홋… 어린 녀석의 몸에 이토록 막대한 내공이 잠재해 있다는 건 큰 수확이야!"
교성!
요염하기 이를 데 없는 여인의 흐드러진 교성이었다.
"헤헤… 석대감의 별장에서 발견했을 때는 죽은목숨이나 다름이 없었는데 살아났다는 건 기적과 같지요. 헤헤헤……."
이어진 것은 간교스런 사내의 음성이었다.
석대감의 별장― 그곳은 아마도 두 자매에 의해 검운강이 발견된 곳인 듯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이 나를 이곳으로… 그런데 별로 좋지 않은 무리들 같군!'
검운강은 왠지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다.
그때, 예의 요염한 여인의 음성이 이어졌다.
"목숨이 끈질기다는 것은 그만큼 내력이 심후하다는 뜻이겠지. 얼굴도 반반하고 오랜만에 본 월화요니(月花妖尼)를 만족시키는 물건이야!"
"헤헤… 마음에 드신다니 감사합니다."
사내는 연신 굽신대며 아부하는 형상이었다.
"자… 이 정도면 사례로는 충분하겠지?"
여인 월화요니의 말과 함께 황금덩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헤헤헤… 이렇게나 많이… 감사, 감사합니다. 그럼……!"
역겹도록 비굴한 웃음소리에 이어 사내가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한편 검운강은 내심 기가 콱 막히는 심정이었다.
'월화요니… 하필이면 요녀의 손에 떨어지다니……!'
월화요니!
원래 그녀는 아미파의 비구니, 즉 여승이었다.
그러나 천성이 음탕 사악한 그녀는 타인들의 눈을 속이며 인근의 사내들을 유혹, 닥치는 대로 음행을 일삼았다.
급기야는 방문좌도의 채양보음술까지 익혀 반반한 청년무사들을 닥치는 대로 섭렵하는 것이었다.
월화요니.
그녀의 치마폭에 한번 감싸인 인물들은 그날로 모든 내공을 흡수당한 채 피골이 상접한 폐인으로 화해 갔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마침내는 그 정체가 발각됐고, 아미파는 물론 전 정파의 추적을 받고 어디론가 잠적해 버렸다.
그런데 기막히게도 검운강은 하필 이 지독한 음적의 손에 걸려든 것이다.
'산 너머 산이라더니…….'
검운강은 내심 난감지경이었다.
그 순간, 나긋하고 새하얀 옥수가 검운강의 얼굴을 미끄러지듯이 쓰다듬어 왔다. 동시에 더할 수 없이 요요롭고 끈적한 교성이 귓전을 간지럽혀 왔다.
"홋홋… 요 귀여운 것… 흐흥!"
검운강은 전신의 솜털이 곤두서도록 징그러운 전율을 느꼈다.
"아무리 급해도 목욕은 해야지. 후훗… 귀여운 아이, 잠시만 기다려라."
월화요니는 검운강의 단단한 상체를 한차례 어루만지더니 몸을 돌렸다.
그녀는 침실 한곁의 휘장을 걷고 욕탕으로 들어갔다.
항시 그녀는 뜨거운 정사를 펼치기 전엔 따뜻한 욕조에서 몸을 덥히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욕조에는 따뜻한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스르륵… 스륵…….
월화요니는 옷을 훌훌 벗어 내렸다.
그러자 드러나는 적나라한 나신.
믿어지지 않으리만큼 탄력 있고 눈부신 육체였다.
터질 듯 팽팽한 가슴… 길고 희며 눈부신 목덜미.
그리고 절묘하다 못해 환상적으로 뻗어내린 허리와 아랫배의 곡선…….
"후훗……."
월화요니는 거울에 자신의 나신을 비추어 보며 뇌쇄적으로 웃었다.
스스로의 나신에 취했는가?
그녀의 얼굴이 발그레한 홍조로 물들고 눈에는 물기가 축축히 어렸다.
그녀는 욕조 속으로 풍염한 나신을 천천히 담그었다.
"아아… 좋은 밤이야!"
그런데 욕조 속에서 채 일 각도 흐르기 전이었다.
느닷없이 욕조의 물이 펄펄 끓는 듯한 기세로 뜨거워지는 게 아닌가?
"앗, 뜨거!"
월화요니는 화들짝 놀라 욕조 안에서 뛰쳐나왔다.
"아니, 이 병신 같은 자식이 누굴 추어탕으로 만들려나!"
월화요니는 노화를 참지 못했다.
일단 폭발하면 아무도 못 말리는 게 그녀의 성미였다.
그녀는 대충 옷을 걸치고 침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휘익!
"충소(忠素), 이놈! 병신을 만들어 줄 테다."
충소.
바로 검운강을 이곳에 데려왔던 사내의 이름이었다.
본래 충소의 직분은 월화요니의 욕조 담당이었다.
영악한 충소는 욕조에 불을 때는 것만으로 얻어지는 수입은 충분치가 않았던 게다.
그는 월화요니를 무공 사부로 모심과 동시에 숱한 사내들을 헌상해 왔다.
꽈앙!
이윽고 월화요니가 침실 문을 닫고 나간 순간이었다.
"기회로군!"
검운강은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영문인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다!'
검운강은 충격을 받았다.
월화요니가 이미 그의 몸에 수작을 부려 놓았던 것이다.
바로 그 시각.
충소는 바로 옆 침실 안에서 멍청한 신색으로 서 있었다.
"이 계집들이… 어디로 증발했지?"
당혹으로 부릅뜨여진 그의 두 눈은 텅 빈 침상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석상서의 별장에서 검운강을 데려올 때 그 두 자매도 함께 납치해 왔었다.
물론 귀신도 모르게 미약(迷藥)으로 두 자매를 혼절시킨 후에 말이다.
"크… 큰일났다!"
충소는 벼락에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석상서의 자매를 자신이 납치했다는 게 알려지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그는 그 두 자매를 귀신도 모르게 해치우고 본래의 자리에 갖다 놓을 참이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스륵…….
실내 밖에서 미약하게 옷자락 끌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음?'
충소의 두 눈에 순간 흉험한 광채가 어렸다.
휙!
그는 번개같이 실내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그의 시야에 두 자매가 바로 옆 침실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아니……!"
충소는 묘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그 침실은 바로 월화요니가 있는 곳이었다.
'불벼락이 떨어지겠군! 한창 열이 올라 있을 텐데……!'
그러나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어찌 된 판국인지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충소는 본능적으로 뭔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월화요니의 침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스윽…….
순간이다.
"어서 오게."
퍽……!
뭔가 거대한 쇳덩어리 같은 게 그의 얼굴에 작렬했다.
'끄윽!'
엄청난 고통.
충소는 비명을 지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바람일 뿐이었다.
그는 사지에서 기운이 쭉 빠져 나가는 것을 느끼며 혼절했다.
쿵……!
쓰러지는 그의 몸뚱이 위로 유령처럼 나타나는 인물.
놀랍게도 그는 바로 뇌정마환 혁유붕이 아닌가?
"허허… 그리 떨 것 없다, 아이들아."
혁유붕은 한옆에서 창백하게 질린 채 몸을 떨고 있는 두 자매를 응시하며 너털웃음을 흘려내더니 몸을 돌렸다.
스윽…….
그는 침상 위에 누워 있는 검운강에게로 다가갔다.
검운강은 크게 반갑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했다.
"어떻게 여기에?"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허어……!"
"우선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합니다. 월화요니는 무공으로 상대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무공이 고강해도 그녀의 미약에 잘못 걸리면 봉변을 당하는 터… 빠져 나가는 게 상수입니다."
말과 함께 그는 재빠르게 검운강의 혈도를 풀어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검운강의 입에 뭔가 알약 같은 것을 집어넣었다.
"저 자의 품에서 꺼낸 해약입니다."
"아……."
검운강은 재빨리 그것을 복용했다.
그러자 금세 기혈이 운용되며 사지가 자유로워졌다.
검운강이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혁유붕은 쓰러진 사내를 보며 난감한 어조로 독백했다.
"월화요니의 성미로 보아 금세 눈치를 채고 끈질기게 추격해 올 텐데… 어떡한다?"
"그건 나에게 방법이 있소."
검운강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는 재빨리 쓰러진 사내를 침상 위에 옮겨 눕혔다.
이어 품속에서 매미처럼 엷은 인피면구(人皮面具) 하나를 꺼내더니 사내의 얼굴에 씌운 후 몇 번 주물렀다.
그러자 놀랍게도 사내의 얼굴이 검운강의 얼굴과 똑같이 변하는 게 아닌가!
"어떻소, 내 방법이?"
검운강이 몸을 돌리며 묻자, 혁유붕은 놀랍다는 듯 고개를 내흔들었다.
'귀신이 곡할 솜씨군!'
두 석상서의 자매는 아예 넋을 잃은 표정이다.
'똑같아!'
'세상에……!'
바로 그때였다.
침실 밖에서 월화요니의 인기척이 들려 왔다.
"충소, 이놈이 도대체 어디로 갔지?"
혁유붕의 안색이 흠칫 굳어졌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침실에는 애초에 창문 같은 것도 없었다.
결국 혁유붕은 월화요니와 한바탕 싸움을 벌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급한 상황에 강한 면모를 보이는 검운강이었다.
그는 어느새 한쪽 벽 구석의 모퉁이에 선 채 빙긋 웃고 있었다.
"여기 비밀통로가 있소. 월화요니 같은 존재는 항시 위급한 때를 대비하여 이런 통로를 만들어 두는 법이오."
스르릉…….
말과 함께 그가 어딘가를 누르자, 벽면이 좌우로 쫙 갈라지며 어두컴컴한 비밀계단이 나타났다.
그것은 실로 간발의 차이였다.
검운강 등이 비밀통로로 사라지고 원래대로 거짓말처럼 벽면이 닫힌 순간, 월화요니가 아직도 노화를 참지 못한 채 침실 안으로 불쑥 들어왔기 때문이다.
대략 차 한 잔 마실 시각이 흘렀을까?
열풍(熱風)!
침상 위에서는 실로 뜨거운 열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하아… 보면 볼수록 잘생겼어!"
전라의 남녀.
어느새 그의 옷을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벗겨 내린 그녀는 자신의 몸을 한치 틈도 없이 바싹 밀착시켰다.
단언컨대, 월화요니는 근래 들어 이토록 황홀한 기분은 정녕 처음이었다.
"아아… 귀여운 것……."
어디를 어떻게 한 것인가?
혼절한 사내가 돌연 불끈 용트림을 했다.
월화요니는 참을 수 없는 욕구로 뱀처럼 몸을 비틀었다.
이어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몸에 자신을 실었다.
그녀의 몸이 꿈틀거렸다.
"아……!"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바야흐로 돛은 올려지고 배는 긴 항해를 하려는데…….
혼절해 있던 충소가 그만 의식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눈을 뜬 충소는 우선 아랫배의 뿌듯한 느낌에 놀랐다.
그러나 월화요니를 확인한 순간, 충소는 그야말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놀라고 말았다.
"주, 주인님!"
"그래… 귀여운 것… 뭐라고 했지요?"
"으악! 주… 주인님!"
"음?"
월화요니의 동작이 일순 얼어붙은 듯 딱 정지되었다.
그 다음 순간 월화요니의 표정이 얼마나 처참하게 변했는지는 말하지 않기도 하자.
"너… 너……!"
"살려 주십시오!"
"살려 준다. 단 일이 끝날 때까지만이다!"
밤.
한 사내가 기묘한 최후를 맞이한 밤은 그렇게 익어 갔다.
그리고 그날.
검운강을 처음 발견했던 자매에게는 어디선가 한 가지 선물이 전해졌다.
선물.
그것은 일국의 황녀라 해도 평생 구경하기도 힘든 진귀한 보옥과 패물 한 쌍이었다.
두 소녀는 그로 인해 다시 한 번 가냘픈 다리가 후들거리는 고된 수난(?)을 당하였다고 한다.
第 9 章 받은 것은 돌려준다
이곳은 어느 이름 모를 야산의 중턱.
뇌정마환 혁유붕.
그의 입에서 격동의 떨리는 음성이 흘러 나왔다.
"용천신문(龍天神門)의 제십삼대 수석호법(首席護法) 혁유붕이 이제야 정식으로 소주님을 배알하나이다!"
검운강은 아연히 혁유붕을 응시하였다.
"할아범이 본문의 인물이었다니… 본문에서 살아 남은 자는 나 혼자인 줄 알고 있었거늘……!"
검운강의 음성은 나직이 떨려 나왔다.
그 속엔 선연한 격동의 기색이 실려 있었다.
그런데 용천신문(龍天神門)이라니?
그렇다면 검운강의 출신은 바로 용천신문이었단 말인가?
― 용천신문(龍天神門)!
무릇 천하무림을 웅패하는 데는 두 가지의 길이 있다.
그 하나는 정명한 방법을 택하는 제왕지도(帝王之道)!
또 다른 하나는 목적을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과 수단도 가리지 않는 패왕지도(覇王之道)였다.
무림 유사 이래 이 두 가지 상극의 길을 극단으로 추구하는 두 개의 절대세력이 존재하였으니…….
그 중 패왕지도의 길을 택한 세력이 바로 구천십왕사해마루였으며, 극단의 제왕지도를 택한 세력이 용천신문이었다.
― 구천십왕사해마루와 용천신문!
자고로 극과 극은 상통하는 것인가?
그 두 세력은 서로 누구도 상대를 완전히 꺾을 수가 없었다. 해서 서로가 무림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끊임없이 암중의 대접전을 벌여 왔다.
그런데 그 박빙의 호각지세는 마침내 검운강 부친의 대에 와서 깨어졌으니…….
용천신문은 흔적도 없는 몰락의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바로 십여 년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반면에 영원한 숙적을 물리친 구천십왕사해마루는 이미 가장 적절한 시기를 택하여 일시에 천하를 제패할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으니…….
일순 검운강의 눈빛이 더없이 심연하게 가라앉았다.
그 곁으로는 짙은 우수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나는 알고 있어. 그들을 상대하기엔 나의 힘이 너무도 미약하다는 것을……."
나직한 독백.
하지만 그 속엔 절절한 통한이 깃들어 있었다.
혁유붕은 할말을 잊은 채 부르르 격동만 일으켰다.
검운강은 언뜻 슬픈 미소를 피워 물었다.
"아버님이 나에게 모든 것을 잊으라 하신 것도 이미 그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지. 하지만……!"
검운강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한 줄기 강렬한 광채가 그의 심연한 눈빛 속에서 환상처럼 폭출되었다.
"나는 내가 살던 곳, 용천신문을 잊을 수가 없어."
"좌하……!"
"맹세코 나는 그들에게 잃어버린 모든 것을 꼭 되찾고 말 것이오!"
절규. 그것은 차라리 절규였다.
이 순간, 추수처럼 맑고 심연한 검운강의 동공에선 끝없는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잃어버린 것.
그것은 고향이요, 부모의 따스한 손길… 그리고 수많은 정다운 사람들이었다.
혁유붕은 그윽히 검운강을 응시했다.
"속하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좌하께서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에……."
언뜻 혁유붕의 노안에 뜨거운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에도 용천신문을 떠나던 최후의 날… 그 지옥 같은 광경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고 있었다.
"속하 역시 그날 죽어야 했을 목숨이나 좌하를 모시라는 엄명을 받고 다른 네 명의 호법과 함께 지금껏 목숨을 이어 온 것입니다."
혁유붕은 나직이 탄식하듯 말했다.
죽어야 할 때에 죽지 못한 것.
그것은 진정 무림의 사나이로서 혁유붕에게 무엇보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검운강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할아범과 네 명의 호법마저 없었다면 나는 너무나 외로웠을 것이오. 그러나 지금은 결코 외롭지 않소."
검운강은 깊은 정감이 일렁이는 눈빛으로 혁유붕을 응시했다.
그리고 따스한 온기가 전해지는 손으로 혁유붕의 손을 마주잡았다.
"좌하……!"
혁유붕의 입에서 감동의 떨리는 음성이 흘렀다.
혁유붕은 결국 뜨거운 눈물을 마주잡은 손길 위로 떨구고 말았다.
검운강은 더없이 온유하고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할아범……!"
이 인은 손을 굳게 맞잡은 채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 만가지 웅변보다 더 깊이 가슴으로 통하는 침묵의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잠시 후, 혁유붕은 자신의 내력으로 검운강의 상세를 말끔히 치료해 주었다.
실로 혁유붕의 전신내력은 검운강의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것이었다.
문득 검운강은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네 명의 호법은 지금 어디에 있소?"
"두 명은 본가에서 백상무단(白商武團)을 수련시키고 있으며, 다른 두 명은 무림에서 신분을 숨긴 채 암약하고 있습니다."
"흐음……."
혁유붕은 언뜻 담담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사실 오늘 좌하의 행적을 발견한 것도 그들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검운강은 의아한 눈빛을 떠올렸다.
"그들이 어찌 나의 행적을?"
혁유붕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지금 무림의 명숙으로 신분을 감추고 있어 이번의 용비사문방 불제에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소림의 기이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음……!"
검운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혁유붕은 문득 은은히 안색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들과 속하가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최근 본가의 주위에 수상한 그림자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속하의 예상으로는……."
혁유붕은 말끝을 어둡게 흐리며 검운강을 응시했다.
순간 검운강은 번뜩 뇌리를 스치는 직감이 있었다.
"구천십왕사해마루가 어떤 냄새를……?"
검운강은 이내 나직이 침음했다.
"언젠가 이런 일이 닥치리란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시기가 너무 빨라!"
그렇다. 구천십왕사해마루에서 그 동안 자신의 행방을 끈질기게 추적하고 있었고 마침내는 정면으로 마주치리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과 정면으로 맞서기엔 아직 검운강 자신의 능력이 너무도 미약했다.
검운강은 어떤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그의 상념 속으로 혁유붕의 우려 어린 음성이 들려 왔다.
"현재 좌하의 화후로선 결코 그들의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속하들과 백상무단의 힘으로 그들을 얼마 간 막을 수는 있겠으나……."
말끝을 흐리는 혁유붕의 노안 가득히 그늘이 어렸다.
백상무단!
이것은 추성대가 내에서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는 뇌정마환 혁유붕 휘하의 비밀조직의 이름이었다.
그들이 추성대가에 속한 천하 각지의 상단을 보호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맡고 있음은 이미 나타난 사실.
그러나 혁유붕이 백상무단을 남몰래 수련시켜 온 것은 바로 오늘을 대비키 위한 복안이었다.
백상무단!
그들의 진정한 위력은 실로 아무도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인 것이다.
그러나 적은 너무도 빨리 닥쳐 오고 있었다.
검운강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전사대신총에 들어갈 시간 여유만 있다면……!'
검운강은 깊숙이 안타까운 고뇌의 그림자를 떠올렸다.
그렇다면 검운강, 그는 마침내 전사대신총의 위치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었단 말인가.
어찌 됐든 검운강은 잠시 간 침묵 속에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는 심유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혁 할아범은 무림의 모든 활동을 중지하시오. 최대한 그들이 우리의 종적을 찾지 못하도록."
혁유붕은 흠칫하는 눈빛을 떠올렸다.
"무림의 일은 그렇다치고 본가의 일은?"
검운강은 두 눈에 깊숙한 광채를 담았다.
"대륙교장의 설소저에게 당분간 본가의 일을 일임할 계획이오. 그녀라면 무난히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오."
순간, 혁유붕은 아연 안색이 일변했다.
폭탄선언.
검운강의 말은 실로 전혀 예상치 못했던 폭탄선언이었다.
혁유붕은 이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녀의 진의를 알지 못하고 있고 더욱이 대장령 설한도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는 상태인데… 위험 부담이 너무 큰 모험이 아닐까요?"
그러나 검운강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대장령 설한도는 본인이 설득시킬 자신이 있소. 대신 할아범은 대륙교장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수집해 주시오."
자신감.
검운강의 어조에는 누구도 이의를 발할 수 없는 신뢰를 안겨 주는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알겠습니다."
혁유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한 가닥 우려의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나는 곧 항주로 가겠소. 연락은 백상무단을 통하여 수시로 해주시오."
일사천리.
한번 결정된 일에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는 검운강의 마지막 한마디였다.
'역시… 주군의 성격 그대로를 닮으셨군!'
혁유붕은 언뜻 그 옛날의 주군을 대하는 듯한 착각이 느껴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고 정중한 외침을 발했다.
"존명!"
이때, 검운강은 다시 무언가 생각난 듯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혹시 할아범은 천조대유림이란 세력에 대해 알고 있소?"
이 돌연한 질문에 혁유붕은 의혹의 눈길로 검운강을 쳐다봤다.
"알고는 있습니다만?"
혁유붕은 의아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천조대유림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유사(儒士)들의 집단이며, 역대의 황조들을 움직여 온 절대 중의 절대권력을 지닌 세력이라는 것을…….
"음! 그랬던가?"
검운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들과 무각은 어떤 관계이기에?"
무각을 떠올리는 순간, 검운강의 두 눈에 강렬한 화염이 솟구쳤다.
'받은 것은 그대로 돌려준다!'
쓰으…….
검운강의 전신에서 만년한빙보다 더 차가운 냉기가 안개처럼 피어났다.
그것은 결코 평소의 검운강의 모습이 아니었다.
순간 혁유붕 역시 똑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건방진 땡중놈들… 감히 좌하를… 용비사문방이든 용비사문방의 할아비든 결코 용서할 수 없다!'
혁유붕.
그의 노안에는 선연한 분노의 광염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검운강이 하마터면 천추의 고혼으로 화할 뻔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실로 상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일이었다.
과연 단 한차례의 실수로 인해 무각 등의 용비사문들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 모를 일이다.
* * *
칼날!
검운강을 향한 죽음의 칼날은 이미 전율스런 핏빛의 광채를 뿌리기 시작했으니…….
* * *
밀실.
어딘지 알 수 없다.
또한 알 필요도 없다.
단지 실내는 극히 웅장 화려했고, 때문에 누구라도 일단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 웅장함 앞에 심혼(心魂)마저 압도될 정도라는 느낌뿐이다.
그리고 그 넓은 실내에는 오직 단 하나의 태사의만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이곳 주인의 앞에 마주하고 앉을 수 있는 자격의 사람이 결코 없다는 의미이다. 즉 태사의의 주인은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절대유일의 지고한 존재임을 나타내는 광경인 것이다.
지금 그 절대유일한 의미의 태사의 위에 한 명의 인물이 좌정하고 있었다.
우람한 체구를 화려한 금의용포로 휘감은 노인!
나이는 이제 막 초로로 접어든 듯했다.
그러나 얼굴은 붉은 혈색이 감도는 동안이었고, 굵은 눈썹 아래 한 쌍의 눈은 물빛처럼 잔잔하고 고요했다.
그러나 너무도 고요해서 오히려 차갑고 전율스러운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눈빛이었다.
턱밑으로는 은실 같은 수염이 곱게 손질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풍겨지는 기도는 지극히 온유하면서도 유려한 느낌!
그러나 그 속에 절대자의 장엄함이 깊숙이 갈무리되어 있었다.
그의 앞에는 이 순간 한 여인이 얼굴조차 바닥에 파묻은 채 깊숙이 부복대좌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복한 여인의 몸매.
그것은 지극히 뇌쇄적이었다.
궁장으로 틀어올린 머리카락 아래 분가루라도 묻어날 듯 희디흰 목덜미.
우아한 곡선을 이루는 어깨의 선.
그리고 곧게 뻗어내린 등의 곡선과 잘록한 허리, 눈에 확 파고드는 풍만한 둔부.
뿐인가!
몸 옆으로 언뜻 드러나는 선연하고 풍염한 가슴의 곡선은 천하의 어떤 사내라도 단번에 침몰시킬 듯 격한 색정을 뿜어내고 있었다.
짐작컨대, 바닥에 깊숙이 묻고 있는 여인의 용모 또한 결코 흔히 찾아볼 수 없는 절염지색(絶艶之色)일 것임이 분명했다.
"흐음… 천룡승후(天龍昇候) 검무작(劍無爵)의 후예가 살아 있음이 발견되었다고 했느냐?"
태사의로부터 온유하면서도 만인을 압도하는 위엄의 일성이 흘러 나왔다.
금의용포의 노인.
그의 고요한 시선은 아예 여인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순간 여인의 얼굴이 더욱 바닥에 깊숙이 파묻어졌다.
"이름은 검운강이라 하고 현재 추성대가의 가주로 있다 합니다."
극히 조심스럽고 공경한 복명.
그러나 일세의 우물(尤物)과도 같은 그 모습과는 달리 일체의 감정도 깃들지 않은 차가운 음성이었다.
용포노인은 자신의 손끝을 매만졌다. 마치 여인의 그것처럼 희고 유려한 선을 가진 손마디였다.
"그리고?"
용포노인은 조용하고 간단한 반문을 던졌다.
여인은 지체 없이 대답을 했다.
"그 자는 지금까지 신분을 숨기고 비밀리에 무학을 수련하고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화후는 현 무림에서 상위의 고수급에 도달해 있다 합니다."
"음……."
일순, 용포노인의 눈길이 허공 한 자 위의 지점에서 고정되었다.
어떤 상념에 잠긴 듯 그의 고요한 눈가에 아련한 회상의 그늘이 피어 올랐다.
'끈질긴 생명력이다. 본좌 다륜 개적왕을 패배시켰던 유일한 무인인 그 자가 남긴 핏줄이 아직 이 세상에 남아 있다니…….'
다륜 개적왕!
검운강의 입에서 무서운 한기를 품고 언급되었던 이름.
이 용포노인이 바로 그 다륜 개적왕이란 말인가?
꿈틀―!
다륜 개적왕의 눈썹이 한차례 용트림을 일으켰다.
'용은 용을 낳고, 산중지왕 맹호는 역시 맹호를 낳는다. 호랑이는 그 발톱이 완전히 자라기 전에 꺾어야 하는 법…….'
다륜 개적왕.
그는 손가락으로 태사의의 모서리를 툭툭 치기 시작했다.
토톡… 토토톡.
산발적인 기음이 거북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일전에는 십왕(十王)의 협공으로 겨우 놈을 죽일 수 있었으나 이번은… 나 다륜 개적왕이 맡고 있는 중원에서 일을 마무리한다.'
일순 다륜 개적왕은 두 눈 깊숙이에서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섬광을 폭출시켰다.
― 십왕(十王)!
그것은 십 인의 제왕을 일컬음이며, 또한 구천십왕사해마루를 이루는 핵심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다륜 개적왕.
검운강이 겨냥한 첫번째 목표인 그가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며, 이 순간 오히려 그는 검운강을 향해 죽음의 검을 뽑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일순 다륜 개적왕은 비로소 부복한 여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물러가라!"
"복명!"
짧은 대답과 동시에 여인은 몸을 일으키지도 않은 채 부복한 그대로 미끄러지듯 밀실에서 사라졌다.
다륜 개적왕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조용한 음성을 발했다.
"들었느냐?"
"명(命)!"
어디선가 극히 간단한 응답이 지체 없이 울렸다.
다음 순간, 언제 어디에서 나타난 것인가?
다륜 개적왕 앞에는 어느새 이 인의 그림자가 환영이 솟아나듯 소리 없이 나타나 있었다.
나타난 이 인.
그들은 너무도 기이한 대조를 이루는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또한 형용할 수 없는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일남일녀― 그들은 한 명의 여인과 한 명의 청년이었다.
여인.
이십 세쯤 되었을까?
마치 천하의 모든 아름다움을 한 몸에 지닌 듯 너무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화용월태, 침어낙안, 빙기옥골…….
천하의 모든 형용사를 다 동원한다 해도 모자랄 만큼 극치의 미모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악하고 요기로운 아름다움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보고 있자면 전혀 사악함을 느낄 수가 없었으니…….
사악함이 지나쳐 오히려 지극히 선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리고 청년.
그는 핏빛 혈의를 걸쳤다.
칠흑 같은 장발을 어깨 위에서 느슨하게 묶고 있는 그의 얼굴은 매우 준미하고 수려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안색은 시체의 그것처럼 창백했고, 한 올의 감정도 그 얼굴에서 읽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눈.
그의 깊고 깊은 회색의 동공은 모든 안광을 철저하게 죽여 버린 절대무심의 눈빛이었다.
단지 전율스러운 죽음의 그림자만이 그 회색의 동공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또한 어깨 위에 뱀처럼 칭칭 감겨 있는 핏빛의 철삭은 청년을 더욱 전율스럽게 꾸며 주었다.
여인과 청년.
그들은 나타났다 싶은 순간 이미 다륜 개적왕 앞에 깊숙이 부복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다륜 개적왕은 깊숙한 시선으로 이 인을 응시했다.
"사요(邪妖), 그리고 사빙(邪氷)! 너희들에게 십 인의 수하를 주겠다."
"예!"
"어떤 이유도 조건도 없다. 단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그 자의 목숨을 본좌 앞에 바쳐라."
극히 간단한 명령이었다.
"존명!"
역시 명료한 대답을 끝으로 이 인의 모습은 연기처럼 그 자리에서 증발했다.
스스스슥!
일순 다륜 개적왕은 입가에 지극히 유려한 미소를 피워 물었다.
"잡초의 뿌리는 어릴 때 뽑아야 효력이 확실한 것, 적에게 죽음을 안겨 준다는 것은 그래서 편리한 것이지."
웃음.
지금까지와는 너무도 판이하게 다른 전율스런 웃음이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형용할 수 없는 마기(魔氣)가 솟구쳐 나왔다.
암회색의 전율스러운 마기!
그것이 이내 엄청난 회오리로 변해 밀실 전체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쓰으으으…….
그리고 한 줄기 악마의 광소가 그 회오리 속에 끝없는 여운을 남기며 터져 울렸다.
"크핫핫핫!"
검운강을 향한 죽음의 손길이 이렇게 선연한 핏빛을 뿌려 내는 이곳.
이곳은 다륜 개적왕… 바로 그가 주재하는 절대자의 밀실이었다.
* * *
절강성(浙江省) 항주(抗州).
섬서성의 함양이 대륙의 모든 황금이 모이는 곳이라면, 항주는 곧 바다의 모든 황금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삼해(三海)… 북해, 동해, 그리고 남해.
그 삼해의 광량한 파도를 헤치며 황금을 건져 올리는 상선들의 출발지가 바로 이곳 항주인 것이다.
해서 항주는 황금과 황금을 따라 흘러드는 꽃과 나비로 항시 번화함을 이루었다.
천하제일의 기루(妓樓)와 청루(靑樓), 그리고 절세의 미녀들을 고루 갖춘 색향임은 이미 자타가 공인하고 있는 터.
그러나 그것들보다 더욱 중요한 것… 그것은 삼해의 바다를 움켜쥔 거대한 황금손들이 항주에 웅거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바로 대해상벌(大海上閥)이라 이름하는 그들.
그들은 일국의 군선(軍船)보다 많은 상선단을 보유하고 있으며, 바다와 황금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손을 뻗친다.
대해상벌.
그들은 바다의 패자이며 황제였다.
그리고 그런 유수의 해상벌 중에서도 단연 우뚝 솟은 거대한 산맥이 있었으니…….
대륙교장(大陸交莊)!
바로 그곳이었다.
항주에 들어서면 처음 절세미녀의 이름보다 먼저 듣는 것이 바로 대륙교장의 이름인 것이다.
항주의 남사단.
울창한 송림이 둘러쳐진 하나의 구릉을 끼고 웅장한 장원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가히 하나의 성채와도 비견될 거대하고 웅장한 규모의 장원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문루는 황금빛으로 번쩍였고, 암청색으로 단장된 기와 담장은 마치 용의 꼬리처럼 좌우로 끝이 보이지 않게 뻗어 나가고 있었다.
그 담장 너머로 언뜻언뜻 보이는 것은 수많은 전각과 고루(高樓)의 지붕들…….
실로 거대한 부(富)의 위용을 한눈에 느낄 수 있는 이곳.
대륙교장!
바로 항주 제일의 대해상벌… 대륙교장이었다.
동으로는 수많은 범선들이 오고가는 포구와 짙푸른 바다의 물결을 한눈에 굽어보고, 그 반대편으로는 항주의 번화함까지 일목요연하게 응시할 수 있는 위치.
진정 위치까지도 항주 제일의 대해상벌임을 과시하는 듯했다.
정오.
한 명의 흑의소년이 대륙교장의 정문 앞에 나타났다.
칠흑과 같이 윤기 흐르는 머리는 흑건으로 단정히 묶고, 천성의 고귀한 기품이 전신에서 자연스럽게 발산되는 수려 준미한 미소년.
그는 대륙교장의 문루 위에 높게 걸린 화려한 황금빛 현판을 일별하며 담담한 독백을 흘렸다.
"역시 명불허전이로군."
더없이 낭랑하고 맑은 음성.
그는 바로 단신으로 대륙교장을 찾아온 검운강이었다.
잠시 후, 아연히 놀란 설난향이 안으로부터 달려나오고, 시종들이 부산을 떠는 속에 검운강은 설난향의 안내로 빈청으로 들어섰다.
설난향.
그녀는 이미 어제 검운강이 대륙교장을 방문한다는 사실을 혁유붕으로부터 통보받았다.
그러나 그만이 홀홀단신으로 올 줄은 진정 천만뜻밖의 일이었다.
화려한 행렬을 기대하며 검운강을 마중하려던 시종들은 아직도 항주성의 입구에서 눈이 빠지도록 검운강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빈청.
실내는 대해상벌답게 바다를 상징하는 장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선 정면 벽에 시선을 압도하며 걸려 있는 것은 상아처럼 거대한 해표의 어금니.
바닥은 고래의 가죽을 다듬어 만든 듯한 기이한 질감의 검은 융단으로 빈틈없이 깔려 있었다.
뿐인가!
중앙에 마련된 탁자와 의자까지도 모두 화려한 산호로 조각되어 있었다.
마치 용궁 속과도 같은 해음 물씬한 분위기였다.
그리고 빈청에는 검운강과 설난향이 마주앉아 있었다.
설난향.
그녀는 여전히 화려하고 찬란한 광휘를 발하는 듯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검운강은 그런 설난향을 특유의 맑고 담담한 미소를 띤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 동안 무고하신 듯하니 반갑구려. 이곳의 소식은 가끔 듣고 있었소."
검운강의 음성은 다감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은연중 뭔가 깊은 뜻이 깃든 듯한 여운이 느껴졌다.
순간 설난향은 화사한 옥용에 언뜻 한 줄기의 그늘을 드리웠다.
"가주께서 보름만 일찍 오셨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을… 여하튼 가주를 뵈니 반갑군요."
설난향은 독백과도 같은 쓸쓸한 어조를 발하며 미소를 지었다.
검운강은 조용히 설난향을 응시했다.
'대륙교장에 심상치 않은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더니 사실인 모양이군. 잘못하면 일이 어긋날지도 모르겠는걸!'
검운강은 뇌리에 이곳으로 오기 직전 혁유붕으로부터 전해 들은 한 가지 정보를 떠올렸다.
― 대륙교장의 내부에선 목하 어떤 심상치 않은 사건이 전개
되고 있는 듯합니다.
그 일이 후계자를 둘러싼 어떤 암투인 듯한데 시간이 촉박하여 좀더 자세한 사실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단지 어느 때보다도 대륙교장 내부의 분위기가 심각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후계자!'
검운강은 일순간 짧은 상념을 스쳤다.
그러나 전혀 내색함 없이 설난향을 향해 따스한 눈길로 미소를 보였다.
"몇 가지 소식은 알고 있으나 자세한 것을 말해 줄 수 있겠소? 어쩌면 본인이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
순간 설난향은 한 쌍 봉목에 기이한 광채를 찰나적으로 빛냈다. 동시에 그녀의 입에서 전혀 뜻밖의 반문이 흘러 나왔다.
"가주께선 소녀를 어찌 생각하시는지… 지금까지의 문제는 바로 그것 때문에 벌어진 것이지요."
검운강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무슨 말씀이시오?"
설난향은 시선을 피하듯 아래로 깔았다.
언뜻 그녀의 옥용이 노을빛으로 붉어지는 게 보였다.
잠시 얼마 간의 침묵이 흐른 후, 설난향은 입술을 가만히 깨물며 다시 검운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실은 지금 소녀의 혼사가 오가는 실정이에요. 그것은 본장의 가업을 잇기 위한 아버님의 뜻이지만……."
이 말과 함께 설난향의 눈길은 무언가를 바라듯 검운강의 시선을 찾고 있었다.
"그랬었군."
검운강은 단지 담담한 그 말뿐이었다.
설난향의 눈가에 언뜻 실망의 그늘이 스쳤다.
그녀는 한숨을 쉬듯 나직한 어조를 발했다.
"하지만 아버님이 혼인을 추진하는 사람은 소녀로선 감당키 어려운 인물… 어쩌면 그는 본장 전체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는지도 몰라요."
순간 검운강은 두 눈을 깊숙하게 빛냈다.
'여장부풍인 설소저조차 감당키 어렵다고 실토할 정도의 인물? 그의 재목이 그토록 뛰어나다면 후계자로 고심하고 있는 대장령 설한도는 이미 그 자에게 마음을 굳히고 있을 게 분명하군!'
이때 검운강의 상념을 뚫고 설난향의 옥음이 이어졌다.
"또한 그는 이미 본장 내부에 자신의 손발을 만들어 두고 있는 듯해요. 요즘 소녀가 느끼는 어떤 압박감이 그걸 증명하고 있어요."
설난향.
그녀의 음성은 우울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검운강은 내심 혀를 찼다.
'사태는 과연 심각하군!'
검운강은 이내 심유하고 다감한 눈빛으로 설난향을 직시했다.
"본인이 소저에게 무엇을 해주길 바라오?"
낭랑한 음성.
그 속엔 누구라도 의지할 수 있게 만드는 강한 신뢰감을 자아내는 힘이 있었다.
순간, 설난향의 두 눈에 돌연 반짝 생기가 돌았다.
설난향은 빛나는 눈동자로 한동안 미동도 없이 검운강을 응시했다.
다음 순간, 그녀의 입에서 당돌한 한마디가 흘러 나왔다.
"소녀를 일생 동안 가주의 곁에 있게 해주세요."
"아니……!"
검운강은 그만 흠칫 멍한 얼굴이 되었다.
이것은 바로 명확한 구혼이 아닌가?
"지금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시오?"
검운강은 아연한 심정에 가까스로 반문을 던졌다.
설난향은 자신보다 연상이다.
비록 추성대가에서 농담으로 그런 말을 한 적은 있으나 진심은 결코 아니었다.
가슴속에선 천하웅패(天下雄覇)의 절대자를 향한 대야망이 불타고 있으며, 저 거대한 구천십왕사해마루와 맞부딪쳐 처절한 혈투를 벌여야 할 자신이 아닌가?
그런 검운강에게 있어 혼인이란 단어는 너무도 멀고 낯선 말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설난향의 눈은 단호히 빛나고 있었다.
"소녀가 믿을 분은 오직 가주밖에 없어요. 가주께선 적어도 여인을 존중할 줄 아는 분이기에……."
나직한 옥음.
그 속엔 굳은 결의가 충만했다.
검운강은 난감한 심정이 들었다.
"이 일은 본인이 대장령을 만나 본 후 상의토록 합시다. 성급히 결론을 지을 일은 결코 아니니까."
검운강은 고개를 흔들며 최대한 완곡하게 말했다.
"하지만 소녀가 본심을 밝힌 이상 가주께선 허락하실 것으로 믿어요."
설난향은 물러서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검운강은 그만 고소 어린 심정이었다.
'세상에 이런 괴상한 경우도 다 있군…….'
졸지에 한 여인을 평생의 반려자로 맞아야 하는 위기가 닥쳐 온 것이다.
하지만 천하의 뭇남성들이 본다면 이 얼마나 행복스런 고민이냐?
그들은 검운강이 부럽다 못해 불공평한 세상이 원망스러울 것이다.
그들로선 평생 머리를 싸매고 달려들어도 설난향 같은 절대재녀를 얻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일 테니…….
이때였다.
"추성대가와 본장의 관계는 물론 소녀의 일도 가주께 달려 있어요. 가주께서 아버님의 뜻을 꺾을 수 있을 것을 굳게 믿어요."
설난향은 마지막으로 다짐하듯 못을 박으며 검운강을 응시했다.
검운강은 싱긋 담담한 미소를 피워 물었다.
이미 내심의 평온을 되찾은 미소였다.
"본인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할 뿐… 너무 과분한 기대는 하지 마시오."
그러나 설난향의 안색은 소리 없이 환하게 피었다.
그녀는 검운강의 담담한 미소 속에서 오히려 절대적인 신뢰감을 얻은 것이다.
이어 두 남녀는 나란히 빈청을 나섰다.
第 10 章 英雄인가, 姦雄인가
해황전(海皇殿)!
대륙교장에서도 가장 호화롭고 웅장한 삼층 전각.
바로 대장령 설한도가 대륙교장의 대소사를 주관하는 곳이었다.
또한 삼해의 거친 파도를 누비는 대륙교장의 상선들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하는 심장부이기도 했다.
여기에 명실공히 바다의 패자, 대장령 설한도가 그 웅체를 담고 있었다.
해황전 중앙의 한 정실.
사방은 두터운 붉은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다.
실내를 밝히고 있는 것은 커다란 야명주였다.
그 광채 아래 금빛 휘황한 탁자를 사이에 두고 거대한 두 개의 태사의가 놓여 있었다.
그 중 정면의 태사의.
일인!
육중한 기도의 한 인물이 깊숙하게 몸을 파묻고 앉아 있었다.
우람한 체구.
일신에 금포를 입고 있는 육순 가량의 노인.
송충이처럼 굵고 시커먼 눈썹.
그 아래 횃불같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한 쌍의 호목이 빛나고 있었고, 꽉 다문 입가에는 어떤 위엄과 냉오한 기질이 배어 있었다.
일견키에도 첫눈에 상대방을 압도하고 말 듯한 강렬한 위압감의 소유자이다.
이런 기도의 인물은 어느 계통의 세계에서도 결코 흔할 수 없다.
대장령 설한도!
바로 대해상벌 중의 해상벌로 군림하고 있는 당금 대륙교장 설한도의 모습이었다.
그는 무언가 깊은 상념에 잠긴 모습이었다.
그는 부리부리한 호목을 반쯤 내려감은 채 태사의 속에 온몸을 파묻다시피 앉아 있었다.
"연하의 어린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셋째가 그토록 미련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면 만나 볼 필요는 있으리라."
나직한 독백이 흘러 나왔다.
"허나 만에 하나!"
대장령 설한도의 안색이 문득 싸늘해졌다.
"기대에 한치라도 어긋난다면 심기를 어지럽힌 죄! 추성대가의 뿌리를 흔들어 그 죄를 응징하리라."
단호한 어조.
자신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독백이었다.
또한 무서운 선언이기도 했다.
이때 밖에서 설난향의 공손한 음성이 들려 왔다.
"아버님, 함양에서 추성대상후 검운강, 검가주께서 당도하셨습니다."
대장령 설한도는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이 입을 열었다.
"이리로 모셔라."
위압감 넘치는 묵직한 음성이었다. 동시에 검운강이 안으로 들어섰다.
스읏…….
검운강은 유려한 걸음으로 대장령 설한도 앞의 태사의에 다가와 앉았다.
찰나 대장령 설한도의 두 눈이 번쩍 떠지고, 실낱 같은 섬광이 짧은 순간 빠르게 검운강의 전신을 훑어 갔다.
"흠……."
대장령 설한도는 눈 속에 깊숙한 기광을 떠올렸다.
일순 이 인의 눈길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눈.
대장령 설한도의 눈길이 노련하고 노회한 것이라면 검운강의 눈길은 가을 하늘보다 더 맑고 유현하게 깊었다.
그리고 검운강은 대장령 설한도의 그런 눈길에 한 가닥 담담한 미소를 던져 주고 있었다.
부드러우나 전혀 내심을 추측할 수 없게 만드는 신비로운 미소였다.
대장령 설한도는 자신도 모르게 눈빛에 꿈틀 파랑을 일으켰다.
'어린 나이답지 않은 고요한 눈빛, 셋째가 사람을 잘못 보지는 않은 것도 같군!'
그러나 대장령 설한도는 아무런 말문도 꺼내지 않았다.
마치 검운강의 심중을 압도하려는 듯, 대장령 설한도는 불꽃 같은 눈초리로 더욱 강렬하게 검운강을 주시했다.
검운강.
그 역시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깊은 눈빛으로 대장령 설한도의 강한 눈빛을 직시했다.
이 인.
그들은 마치 필생의 적수를 만난 듯 서로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묘한 침묵이 실내에 감돌았다.
그 침묵 속.
문 밖에서 이 인을 지켜보는 설난향의 가슴만 애꿎게 콩콩 뛰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한참 만에 대장령 설한도가 먼저 장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본 대장령은 검가주의 방문을 환영하오."
대장령 설한도는 말과 함께 앉은 채로 정중한 목례를 취했다. 이것은 바로 검운강을 일가의 종주로서 대한다는 뜻이었다.
검운강은 빙긋 웃으며 역시 정중한 목례를 취했다.
"대장령의 후의에 감사하오."
대장령 설한도는 검운강을 깊숙이 직시했다.
"일전의 귀 가주와 본장과의 일은 심히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소. 허나 아직 가주에게 선택할 기회를 드릴 용의는 있소."
또다시 추성대가를 대륙교장에 흡수하겠다는 강력한 의사 표시였다.
검운강은 씨익 미소를 떠올렸다.
"그 말씀은 듣지 않은 것으로 하지요. 허나 또다시 그런 말이 나왔을 때 벌어질 사태에 대해선 본 가주도 어쩔 수 없는 것임을 명심해 주시오, 대장령."
못을 박듯 당돌한 대꾸였다.
또한 그런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말은 더 이상 입에 담지도 말라는 단호한 쐐기이기도 했다.
순간 대장령 설한도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이 자가…….'
의외의 일격을 받은 것이다.
대장령 설한도.
그에게 있어 이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어느 그 누구도 감히 그 앞에서 이런 태도를 갖지 못했다.
검운강은 입가에 언뜻 의미 깊은 미소를 피워 물었다.
"본 가주는 이미 이곳 향주에 관한 정보를 상세히 알고 있소. 만약 귀장에서 계속 본가를 경시한다면……."
검운강은 잠시 말을 끊고 대장령 설한도를 응시했다.
"본가는 귀장의 적이 될 수도 있음을 알려드리겠소."
일순 자르듯 단호한 선언이 검운강의 입에서 냉막하게 흘러 나왔다. 동시에 검운강의 전신에서는 일순 무형의 막대한 위엄이 구름처럼 피어 올랐다.
그것은 일생을 대상계에서 군림해 온 대장령 설한도에 한치의 눌림도 없는 일세의 거상(巨商)다운 기도였다.
"으음……!"
대장령 설한도는 내심 가볍게 진동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그의 표정에는 한올의 변화도 일지 않았다.
그는 단지 웅혼한 눈길로 검운강을 직시할 뿐이었다.
"항주의 정세라… 허허… 가주는 그런 정도의 일로 본 대륙교장이 어찌 될 줄 착각하는 게 아니오?"
담연한 어조.
바다의 거센 풍랑을 딛고 우뚝 선 노웅의 위엄이 그 속에 흘러넘쳤다.
그런데 항주의 정세란 대체 어떤 것인가?
검운강이 백상무단을 통해 알아낸 정확한 정보에 따르면 현재 대륙교장은 내외로 격심한 도전을 받고 있었다.
먼저 외적인 도전을 보면, 항주엔 어림잡아 수십여 개의 해상벌들이 웅거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오랜 세월 이어진 대륙교장의 독주에 서서히 불만을 나타내고 있었다.
급기야 대륙교장을 제외한 그들 해상벌들은 비밀리 연합하여 대륙교장에 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니…….
비록 하나하나로선 대륙교장 앞에 어쩔 수 없으나 그들이 연합한다면 그 힘은 실로 엄청난 것이 아닐 수 없다.
연합한 그들과의 상전(商戰)에서 대륙교장이 이길 수 있다는 장담은 결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대륙교장 자체 내에서도 일고 있었다.
후계자…….
바로 아직까지도 불투명한 대장령 설한도의 후계자 계승 문제였다.
대장령 설한도가 셋째인 설난향의 혼사를 서두르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대장령 설한도가 자신의 핏줄로서 가장 적합한 후계자는 바로 설난향이라는 심중을 굳혔기 때문이었다.
해서 하루빨리 설난향의 혼사를 매듭지어 확실하게 자신의 뒤를 잇게 하려는 보안인 것이다.
검운강.
그는 이 모든 상념을 짧게 스쳐 올리며 대장령 설한도를 향해 유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고로 상(商)을 함에도 지켜야 할 도리가 있어 그것을 상도(商道)라 했소이다."
대장령 설한도는 말없이 검운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검운강은 조용하고 낭랑한 어조를 이었다.
"상도의 가장 기본은 같은 상인의 터전을 빼앗지 않는 것. 그러나 대륙교장은 지금껏 세력을 넓힌다는 이유로 많은 다른 해상벌들의 터전을 빼앗아 왔기에 그들이 불만을 가진 것이지요."
"흐흠… 그런데?"
일순 대장령 설한도에게서 최초의 반응이 보여졌다.
어느새 검운강의 언변에 끌려들고 있는 것이다.
검운강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만약 다른 곳에서 막대한 이익을 취하는 대신 얼마간의 양보를 그들에게 베푼다면 불만이 쌓일 이유가 전혀 없소. 그것이 바로 대륙교장에서 취해야 할 상도인 것이오."
추호도 흠잡을 데 없는 정연한 논리의 이 말.
대장령 설한도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다른 곳에서 이익을 취한다 해도 역시 타인의 상권을 빼앗는 것이 아니겠소?"
대장령 설한도는 심각한 어조로 반문했다.
이미 검운강이 지닌 형용할 수 없는 마력에 깊숙이 빨려들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제 검운강은 이 자리의 분위기를 완전히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검운강.
그는 대장령 설한도의 반문에 밝은 미소를 지으며 힘있게 말했다.
"허나 본가에서 이룩한 상계의 신화는 결코 타인의 이득을 빼앗아 쌓은 것이 아니었소. 본가는 언제나 스스로 새로운 터전을 개척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오."
그렇다. 그것은 진실이고 사실이었다.
이어 검운강은 나량국과의 교섭에 관해 상세히 설명을 시작했다.
대장령 설한도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추성대가에서 돌아온 설난향에게서 들은 바 있었으나 그냥 흘려 버렸던 말을…….
그러나 검운강 스스로의 입을 통해 듣자 전혀 새로운 사실처럼 가슴속에 부각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군… 이 작은 소년의 어디에서 이토록 상대를 설복시키는 천부의 힘이 솟아나는 것인지…….'
대장령 설한도는 언뜻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자신이 느낄 수 있는 것은 단지 한없이 깊고 서늘 다감한 눈빛뿐.
그런데도 검운강의 그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더없이 진실되게 들려 왔다.
설령 자신이 뻔히 알고 있는 거짓말을 한다 해도 그 말이 마치 진실처럼 들릴 듯한 그런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타고난 거상의 재목이 아니면 희대의 간웅(姦雄)! 분명 둘 중의 하나이리라!'
대장령 설한도는 내심 강한 경이감 속에 신음했다.
이때 검운강은 모든 설명을 마치고 잠시 간 대장령 설한도를 조용히 직시했다.
대장령 설한도는 의아한 시선을 발했다.
검운강이 뭔가 또 새로이 할말이 있음을 느낀 것이다.
검운강은 입을 열었다.
"또한 본인은 대장령이 허락하신다면 이번 일에 관한 본가의 모든 권한을 귀 대륙교장의 삼영주인 설소저께 맡길 의향입니다."
검운강은 말끝에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순간이었다.
"그게… 무슨?"
대장령 설한도는 흠칫 안색이 진동했다.
충격적인 한마디였다.
검운강의 말… 그것은 바로 추성대가 전체를 설난향의 손아귀에 맡긴다는 의미가 아닌가?
문 밖에서 귀기울이고 있던 설난향도 아연한 얼굴로 놀라고 말았다.
'세상에……!'
검운강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평범한 아녀자로 일생을 보내기엔 설소저가 너무도 아까운 그릇임을 본인은 알고 있소. 그것은 작고하신 어머님과 설소저가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오."
검운강은 눈빛 깊숙이 짙은 우수의 그림자를 떠올렸다.
찰나적이었으나 그것은 아픈 상흔처럼 대장령 설한도의 눈에 선연히 비쳐들었다.
'어쩐지… 그런 사연이 있었군!'
그런 줄도 모르고 추성대부인 모용상하의 죽음을 이용해 추성대가를 흡수하려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느낌이었다.
'허허… 이런 인간적인 감정을 느낀 지도 실로 오랜만이군.'
대장령 설한도는 내심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검운강은 담담한 어조를 잇고 있었다.
"이제 대장령의 결정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결코 성급한 판단을 바라는 건 아니니……."
검운강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이만……."
정중한 목례에 이어, 검운강은 유연한 걸음으로 등을 돌리고 떠났다.
"음……."
대장령 설한도.
그는 무언지 모를 침음성과 함께 검운강의 뒷모습을 깊숙이 응시했다.
'놓치기엔 너무도 아까운 재목이다. 과연… 어찌해야 하는가?'
대장령 설한도는 한 겹 고뇌의 표정으로 천천히 두 눈을 내리감았다.
정적.
깊은 정적이 노거상의 고뇌 속에 실내 가득 감겨들고 있었다.
* * *
해황전 앞의 넓은 화원.
수많은 기화이초가 제각기 뽐을 내듯 만발한 가운데 심신이 취할 것 같은 화향이 진동하고 있었다.
그 화원 사이의 소로 위.
두 남녀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검운강과 설난향이었다.
이 순간, 설난향은 고개를 반쯤 숙인 채 검운강의 그림자를 그윽히 응시하고 있었다.
문득 설난향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가주… 고마워요."
들릴 듯 말 듯한 조그만 어조.
그 속엔 은은한 감동의 파랑이 실려 있었다.
검운강이 자신을 그토록까지 생각할 줄은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검운강은 씨익 웃으며 유들유들하게 대꾸했다.
"소저가 나를 그토록 좋아하는 게 약간 측은해서 한 일일 뿐이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좋아해도 괜찮소."
"뭐라구요!"
설난향은 순간 아미를 상큼 치켜떴다.
"어어… 별로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소?"
검운강은 짐짓 겁먹은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풋……."
설난향은 그 모습에 그만 실소를 터뜨렸다.
검운강도 이내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호호……."
설난향은 검운강에게 다가서며 정겨운 교소를 발했다.
실로 그녀로선 오랜만에 웃어 보는 후련한 웃음소리였다.
이어 설난향은 빛나는 한 쌍 봉목에 그윽한 정감을 담고 누가 볼세라 조심스레 검운강의 얼굴을 더듬었다.
'작지만 든든한 사내.'
설난향은 더없이 행복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젠 검운강의 눈길만 받아도 따스하고 편안히 젖어드는 자신의 가슴이었다.
'오늘 밤 나만의 님을 위해… 나의 굳은 결심을 증명해 드리겠어요!'
설난향은 소리 없이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언뜻 그녀의 얼굴에 노을빛 홍조가 스치고 있었다.
굳은 결심의 증명.
그게 과연 무엇이기에……?
이때 검운강은 다른 상념에 빠져 있었다.
'전격적인 선언이랄 수 있는 나의 말을 듣고도 대장령이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설소저와 혼담이 오가던 그 자의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 과연 어떤 자인가?'
검운강은 내심 깊은 의혹을 느꼈다.
하지만 가벼이 물어 볼 수는 없는 문제였다.
설난향은 생각에 잠긴 검운강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혹시 가주께선……."
설난향은 검운강의 상념이 무언지 짐작되는 듯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생각하기도 싫은 악몽이라도 되뇌이는 듯한 표정이었다.
검운강은 숨김없이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소. 나는 바로 그 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소."
설난향은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자의 이름은 벽군명(碧君明)… 대대로 한림원(翰林院) 대학사(大學士)를 배출한 명문가의 후예라 했어요."
"흠……."
검운강은 강한 흥미의 눈빛이 되었다.
무엇 때문인가……?
― 벽군명!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선연히 뇌리 속에 새겨지는 듯한 이 느낌은…….
또한 그런 정도의 거대한 가문의 후예라면 더욱 문(文)에만 치중할 뿐, 상(商) 쪽으로 눈길을 돌리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
2권으로 이어집니다
무인향 제2권
제 목: 무인향 제2권 (전3권)
지은이: 사마달·고월
- 차 례 -
第 11 章 운명의 조우
第 12 章 죽음의 숨바꼭질
第 13 章 잃어버린 고향
第 14 章 살인광상곡
第 15 章 巨人과 小人의 차이
第 16 章 수수께끼의 秘密
第 17 章 무서운 陰謀
第 18 章 戰士大神府
第 19 章 인간과 악마의 차이점
第 20 章 무(武)와 무(無)
第 11 章 운명의 조우
설난향은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자를 처음 보는 순간 왠지 소녀는 숨이 콱 막히는 듯한 두려움을 느꼈어요. 그는 가주에게서 느끼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소유자예요."
설난향은 말을 멈추고 검운강을 다시 한 번 일별했다.
"타인이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압박감과 숨막힐 듯한 위엄을 그는 극히 자연스럽게 내뿜고 있었어요."
설난향은 이 말과 함께 몸을 가볍게 떨었다.
검운강은 그녀의 눈에서 언뜻 스쳐 가는 두려움의 기색을 읽을 수가 있었다.
검운강은 내심 기이한 예감이 솟구쳤다.
'음… 일개 서생의 신분으로 그 정도의 기도를 발할 수는 없을 터.'
설난향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만약 그때 가주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소녀는 지금……."
설난향은 생각하기도 싫은 악몽이라는 듯 표정까지 굳어졌다.
순간 검운강은 입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를 떠올렸다.
"소저의 말이 그 자보다 본인이 더 만만하다는 뜻이라면… 그건 대단한 오산인데?"
"훗! 사내들이란 그저 자존심 덩어리군요."
설난향은 금세 악몽을 떨쳐버린 듯 밝은 표정으로 혀를 쏙 내밀었다.
그러나 검운강의 내심은 무겁게 굳어들고 있었다.
'벽군명… 어쩐지 철저히 조사해 볼 필요가 있는 인물이란 예감이 드는군!'
방금의 장난스런 말은 설난향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설난향 역시 그런 검운강의 배려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는 한층 밝아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더욱 섬뜩한 것은 그 자가 어느새 본 교장에 자신의 수족들을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이에요. 그 짧은 시간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이 말은 이미 빈청에서 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들으면서도 검운강은 그 말이 더욱 새롭게 뇌리에 박혀들었다.
'불가사의한 인물이군. 어쩌면 이번 일로 인해 그 자와 정면으로 한 번쯤 부딪칠 가능성이 있다!'
자신이 목표로 한 여인을 빼앗기고도 태연할 사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이 거기에 치밀한 계획과 야심이 깃들어 있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검운강의 이러한 예감은 머지않아 곧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니…….
아무튼 이 순간 검운강은 검미를 깊숙이 좁혔다.
'수상한 냄새가 짙게 풍기는군. 설소저만을 목적으로 했다면 그토록 치밀한 계획을 세울 리는 결코 없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거의 확실한 직감이었다.
검운강은 곧 설난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이 기회에 그 자의 하수인이 된 인물들을 철저히 제거해야 하오. 물론 그것은 대장령이 결정할 일이지만……."
설난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이 지나면 아버님도 결국 우리와 뜻을 함께하시게 될 거예요."
설난향은 오늘 밤이란 말에 특히 힘을 주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생각해 둔 그 무엇이 있는 듯…….
문득 검운강은 어깨를 으쓱하며 씨익 웃었다.
"그건 그렇고 이젠 본인에게 휴식할 여유를 주는 게 어떻소? 이래서 처가살이는 어렵다지만……."
"어멋… 바보 같은 말이에요!"
설난향은 귀엽게 혀를 쏙 내밀었다.
이어 설난향은 앞장서서 화원 속을 걸어갔다.
그녀의 얼굴은 활짝 핀 꽃처럼 해맑게 빛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이 있던 자리엔 어디서 날아왔는지 한 쌍의 벌과 나비가 정겹게 날고 있었다.
묵란각(墨蘭閣).
사방에 잘 가꾸어진 묵란(墨蘭)으로 인해 이름붙여진 듯한 화려하고 거대한 전각이었다.
강남의 항주는 함양과는 달리 한겨울임에도 기후가 매우 온화하여 목하 묵란이 만개해 있었다.
묵란각은 원래 대륙교장을 방문하는 귀빈을 위한 전각이었고, 더욱이 검운강과 그의 수행인들을 위해 특별히 새로 단장까지 한 터였다.
그런데 검운강만 덜렁 혼자서 이 거대한 전각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만일 시중드는 시비까지 없었다면 검운강은 매우 외로운 신세가 될 뻔했다.
청지(靑池).
그것은 묵란이 만발한 화원의 중앙에 꾸며진 아담한 인공호수였다.
비취빛 푸른 물결이 난향과 더불어 그윽한 정취를 자아내는 이곳.
주위 곳곳엔 편안한 안락의자까지 배려되어 있었다.
어느덧 시간은 이슥해 붉은 노을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 노을빛 아래.
검운강은 편안한 자세로 안락의자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왠지 그의 표정은 별로 편안치가 못한 듯했다.
"역시… 나를 대하는 시비들의 눈빛에 적의가 느껴지는군."
검운강은 얼핏 곤혹의 표정을 떠올렸다.
적의!
그것은 극히 미세한 것이었으나 또한 확실했다.
"더욱이 그 중 몇 명은 꽤 고강한 무학을 숨기고 있는 듯한데……."
검운강은 입맛이 떨떠름했다.
"벽군명의 영향력이 벌써 이렇게까지 깊이 스며들어 있을 줄이야."
예측 이상의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설난향조차 오히려 과소평가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검운강은 두 눈을 깊숙이 반짝였다.
그런데 이러한 상념의 순간이었다.
"응?"
검운강은 돌연 번뜩 기광을 스쳐 올렸다.
"이런 발자국 소리는 고도의 수련을 거친 척살자들만이 가진 것… 이미 오래 전에 매복해 있었다."
검운강의 안색이 싸늘해졌다.
그의 등뒤 십여 장.
검운강조차도 겨우 감지할 정도의 미세한 움직임이 극히 조심스럽게 일고 있었다.
"벽군명, 기막히게도 빠른 행동을 보이는군."
검운강은 서서히 분노를 느끼기 시작했다.
등뒤의 움직임은 오 장의 거리로 가까워져 있었다.
"좋아, 어디 두고 보기로 하지."
검운강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더욱 편안한 자세로 안락의자에 몸을 실었다.
그때였다.
돌연 검운강의 등뒤 오 장여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소리 없이 솟아올랐다.
스슷…….
핏빛 혈의에 역시 핏빛의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인물.
전형적인 살수 특유의 냄새가 그의 전신에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검운강이 아니라면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극단적으로 갈무리된 것이었다.
혈의복면인은 일체의 감정이 배제된 메마른 눈빛으로 검운강의 뒷모습을 지그시 응시했다. 마치 맛있는 먹이를 눈앞에 둔 야수처럼 혈의복면인의 전신 모든 신경이 기이한 흥분으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리고 혈의복면인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앞으로 미끄러져 갔다.
삼 장… 이 장…….
마침내 검운강은 죽음의 사정권에 들어섰다.
그러나 검운강은 마치 잠이라도 청하듯 한 팔로 턱을 괴고 졸고 있는 모습이었다.
'가엾은…….'
혈의복면인은 언뜻 그런 눈빛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의 살객 생애 중 최초로 느끼는 인간적인 감정이었다.
그러나 그 눈빛은 나타나는 순간보다 더 빠른 순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동시에 혈의복면인의 손등에 푸른 힘줄이 불끈 솟아올랐다.
찰나였다.
츠츳!
한 가닥 창백한 섬광이 혈의복면인의 허리 어림에서 환상처럼 폭사되었다.
일체의 소리도 없었다.
그리고 혈의복면인은 자신 있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끝났다!"
쾌감!
무언가 자신에게 예리한 면도(面刀)로 박혀드는 전율적 쾌감이 전해졌고, 그 쾌감은 그의 직업상 매우 익숙하고 친근한 것이었다.
면도는 이미 거짓말같이 허리 속으로 회수된 뒤였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전면을 응시했다.
검운강은 안락의자 밖으로 나동그라져 있었다.
손으로는 가슴을 불끈 움켜쥔 채였다.
첫댓글 새로운 무협지 잘 보고 있습니다..고맙습니다^^
오랫만에 다시봐도 재미있네요... 잘볼께요!!!!
즐독.
즐감
잘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