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과 지체 : “지금 내게 주소서”(수14:6-15)
2024.2.25 김상수목사(안흥교회)
“기다림”이라는 말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뉘앙스에서 묘한 차이가 느껴지는 표현이 있다. “지체”라는 말이 그것이다. 지체라는 말로 연관된 말 중에 “게으름을 슬럼프로 착각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다. 이 말처럼 지체는 슬럼프도 아니고, 단지 태만이나 게으름과 같은 과(科)일 뿐이다. 우리는 돈 버는 일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조금도 지체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나 자신의 영혼과 내면의 성장을 위한 일에는 각종 핑계로 지체하는 경우는 많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마치 무슨 깊은 생각이 있어서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이 시대 기독교인들의 민낯이다.
그렇다면 기다림과 지체의 차이점을 무엇일까? 오늘 이 시간에는 정복해야할 가나안땅을 앞에 두고 극명한 태도의 차이를 보였던 갈렙(Caleb)과 이스라엘의 여러 지파들의 모습을 통해서, 기다림과 지체의 차이점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우리(나 교회)는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지를 함께 나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정복전쟁의 선봉에 섰던 갈렙이 85세 때 여호수아에게 그 당시에 가장 점령하기 어려웠던 헤브론 산지를 지금 자신에게 줄 것을 요청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때 갈렙의 나이가 85세였다(수12:7-12).
“7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 10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수 14:7-12)
이 말씀을 보면, 갈렙은 40세 때 하나님께 받은 꿈을 무려 45년 동안이나 품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꿈이 이루어지기까지 45년을 인내하면서 기다렸던 것이다. 갈렙은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Now give me this hill country)”라고 했다. 본설교자는 오늘 설교 본문을 묵상하면서, 갈렙의 이 말 중에서도 “지금(Now)”이라는 말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는 85세 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때가 되었다고 판단이 섰을 때, 그는 지체 없이 이 산지를 “지금” 자신에게 달라고 요청했다. 이러한 갈렙의 모습은 “기다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잘 말해준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가 험한 산지 헤브론을 달라고 했던 이유이다. 그가 험한 산지를 요구한 이유는 그곳에 거인 아낙족속 중에서도 가장 큰 사람들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했기 때문이다(수14:15). 쉽게 말하면, 너무 어려운 지역이라서 자신이 하겠다는 말이다. 갈렙은 그야말로 앞뒤 좌우 상황보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다. 요즘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것이 나이에 상관없이 청년의 기백과 담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동일한 시대, 동일한 상황에서 요셉지파(므낫세, 에브라임)를 비롯한 나머지 지파사람들은 갈렙의 태도와는 사뭇 달랐다. 그들은 가나안 땅을 정복해 가는 것을 지체했다. 여호수아는 이들의 태도를 강력하게 지적했다(수18:3,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렇게 머뭇거리면서 지체했을까? 그들은 하나님 보다 가나안 족속들이 가진 철병거를 먼저 보았기 때문이다(수17:16).
“요셉 자손이 이르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주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에게는 벧 스안과 그 마을들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다 철 병거가 있나이다”(수 17:16)
그런데 문제는 철병거를 보면서 지체하는 동안 가나안 족속들이 결심하고 그 땅에 눌러앉아 버린 것이다(수17:12).
“그러나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수 17:12)
동일한 시대 동일한 상황에서 대조적이었던 갈렙과 지체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정리하면 이렇다(도표).
기다림 | 지체 | | 기다림 | 지체 |
중심에 하나님이 계심 | 중심에 자신 있음 |
내려놓음 | 욕심 |
하나님을 때를 바라봄 | 현재의 상황과 조건을 바라봄(철병거) | 좁은 길을 마다하지 않음 | 꽃길만 희망함 |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움 | 자기생각이나 고집을 앞세우며 버팀 | 찬송과 감사의 말 | 불평과 거친 말 |
“지금” | “나중에”, “천천히” | 선한 영향력을 끼침 | 분열과 다툼을 유발시킴 |
할 수 있는 이유를 먼저 찾음 | 핑계꺼리를 먼저 찾음 | 덕을 세움 | 비난을 받음 |
하나님과 친밀함 | 하나님과 멀어져있음 | 권리포기와 자기부정 | 권리주장과 타인부정 |
평안과 안정감 | 두려움과 조급함 | 잠잠함 | 시끄러움 |
이 도표를 볼 때, 지금 우리(나)의 믿음은 주로 어느 쪽에 가까운가? 갈렙과 나머지 다른 지파 사람들의 태도에서 오늘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돌아보고, 믿음의 결단을 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 만약 우리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지역과 사회 속에서 철병거같은 상황이나 조건들만을 본다면, 하나님이 주신 땅을 정복하기는커녕 지체하다가, 오히려 나중에는 그들의 문화에 동화되어 버렸던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볼 때,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은, 현재 우리교회 대부분의 성도님들은 갈렙과 같은 “기다림”쪽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영혼구원의 꿈을 품고, 전도와 선교사역을 이끌어 가셨다. 앞으로도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매일 중보기도에 힘쓰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비전이며, 우리교회를 이곳에 세우신 이유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 태안군기독교협의회에서 3.1절 행사를 위해 후원을 요청해 왔다. 후원을 하면 안내책자에 뒷면에 우리교회 사진도 넣어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장로님들과 협의하여 연합행사에 후원을 결정하고, 교회사진도 보내주었다. 그때 교회 사진 위에 이런 문장을 적어 넣었다.
“십자가의 복음으로 지역과 조국과 열방을 섬기는 안흥성결교회”
지난 주간에도 15명의 성도님들과 함께 캄보디아 단기선교를 다녀왔다. 또한 단기선교 기간 동안 국내에 남은 모든 성도님들이 교회와 가정에서 중보기도에 힘썼다. 모두가 믿음으로 똘똘 뭉쳐서 하나 된 승리의 사역이었다.
선교사님들의 말에 의하면, 우리 팀이 캄보디아 현지를 가기 전에 왔던 선교팀들은 모두가 중고등부 학생들이거나 청년들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장년부에서 선교를 오니까 선교사님들이나 다른 분들이 너무 좋아하셨다. 학생이나 청년들과는 달리 오히려 부모의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고, 인생의 연륜에서 묻어나는 경험과 믿음에 선교사님들이 현지인들이 더 많은 공감을 했다. 올해 3-4월에는 서울 양화진 선교사 묘지를 방문할 예정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들 모두는 갈렙처럼 하나님이 주신 비전과 꿈을 품은 믿음의 군사들이 분명하다.
그러나 신앙에는 굴곡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성령충만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더욱더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만약 지금 자신의 영적인 상태가 주로 “지체”나 “영적인 침체"쪽에 가깝다면, 마음의 시선과 귀를 하나님을 향해서 돌이켜서, 첫사랑과 열정을 회복해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기다림과 지체는 분명히 다르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불신앙으로 지체하면 안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지역복음화, 민족복음화, 세계복음화의 꿈과 비전을 이룸에 있어서 갈렙처럼 지체하지 말고, 담대하게 “이 산지를 지금(Now) 내게 주소서”라고 간구하며 나아가자.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