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목교회와 참부모님의 섭리, 최초의 독생녀 선포 말씀(1959년)
1. 야목에 대한 참부모님 말씀
가) 말씀집 444-047. 2004.3.27.
“하늘과 땅을 비로서 연결시켜 교육하던 첫 번째 정착의 요지가 야목이에요. 야.. 자는 들 ‘野’자이고, 목(牧)이예요. 야목교회에서 수련한 거예요. 거기의 산을 보나 들을 보나 강을 보나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창조하고 바라보던 그 본연의 땅과 비슷하기 때문에 야목을 중심삼고 선생님도 교육을 비로소 한 거예요. 통일교회 제1차 수련회와 2차 수련회까지 마친 것을 알아야 됩니다.
거기에서 통일교회가 없어지느냐, 도의적인 기준에서 천리와 인륜과 하늘이 갈라지느냐 하던 와중에 책임을 진 참부모의 이름이 정착하느냐 못하느냐 하면서 심각하고 숨 가쁜 수련들을 보냈습니다.
이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야목의 수련... 1차와 2차의 수련을 받은 사람들이 전세계 통일교회의 조상의 자리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천사 세계를 대신하는 심정적 내용을 지녔지만 정착은 못했어요. 미래를 향해 가야할 출발의 그 기지가 다 나눠져 버렸어요.“
나) 말씀집 595-320. 2010.12.30.
“그래서 어제 그제부터 야목을 창건해야 되겠기 때문에... 그 야목을...”
2. 참부모님 현몽(황재성 야목교회 목사님의 꿈에 나타나심)
가) 목적 : 야목성지를 중심한 모든 영인 해원 해줘라
(해원일시 : 2009.7.10.)
1) 일시 : 2009.6.25. 현몽하심(야목성지 집회 중)
2) 꿈의 내용
ㆍ 성지근처 억울한 죽음 8t 3트럭
ㆍ 해원해 주라고 명령과 축도
ㆍ 억울한 죽음의 장소를 교회장은 모름
ㆍ ‘주’씨와 ‘박’씨를 찾아 같이 가라고 하시면서 한 사람 손을 쥐어주심
ㆍ 한 사람 손을 붙잡고 문 밖을 나서면서 꿈이 깨어남
나) 꿈의 내용이 너무 생생하고 이상해서 사실 확인 함
1) 6ㆍ25 전쟁 때 피난민들에게 폭력
2) 희생자의 시체를 바다와 야산에 버림
3) 야목식구에게 광고한 결과 120만원의 해원비 모금
4) 해원해 주기 위해서 계산했더니 약 360만원 소요
5) 참부모님 직접 명령으로 120만원에 모두 해원 완료
다) 모두 해원해 주니까 영계가 역사함
1) 참부모님 하사 해 주신 간판
2) 분실된 지 오래 되었음(10년)
3) 간판 소지자가 교회로 가져와 저절로 찾게 됨(2011.9.5.)
3. 야목교회 역사
가) 차상순 목사는 평양에서 참아버님께 전도되어 제자가 됨
1) 1946년 6월 평양에서 참부모님에게 전도됨
2) 참부모님을 만나시기 전 성경을 30번 정독
3) 참부모님을 메시아라고 증거한 최초 인물
4) 1948년 참부모님 흥남 감옥 수난 중 평양에서 헤어지심
5) 1950. 12. 5. 부산으로 피난 제3부두에서 노동일
6) 대전에 장로교 친구권유로 목회 시작함
7) 대전 가월리 교회 세움
8) 1953년 봄 야목 감리교회 부임
9) 참부모님을 찾기 시작 함
10) 1954년 11월 청파동에서 아버님 상봉
11) 유효원 전협회장님께 원리 말씀과 동산의 노래 배움
12) 남한에서 참부모님과 재회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함
나) 차상순 목사 중심으로 야목감리교회 복귀 결심
1) 야목감리교회 복귀 결심, 원리 말씀과 성가(동산의 노래) 전함
2) 1955년 강현실, 강경렬 속장(문상희 교수의 어머니), 김순겸 등 겨울부흥회로 심령의 불길로 휩싸임
3) 1956. 12.3~10. 7일간 이요한 목사님 대구에서 초청하여 부흥회 말씀을 듣고 식구들이 차상순 목사님을 더욱 신임함
4) 감리교회 신학생이 감리교중앙재단에 신고함
5) 차상순 목사님 예배 도중 쫓겨 남
6) 1957.4.7. 123명의 교인 중 120명이 통일교회로 넘어옴
7) 성전이 없어서 차목사님 임시거처의 마당에서 멍석을 깔고 예배드림
8) 모든 식구들 입에서 교회 건축하자고 결의함
다) 식구들이 직접 재료를 확보하여 건축
1) 약정헌금 50만원(곡식, 가축...)
2) 남자들은 나무기둥 및 서까래 준비
3) 여자들은 돌을 치마와 삼태기로 나름
4) 청년들은 돌을 쌓거나 목수일을 함
5) 조순길을 목수 감독으로 세워 이복례, 윤준식, 이재룡, 이순희, 이용희, 김정렬, 윤복례, 박승관, 주희영, 윤길순 등이 합십하여 건축함
4. 야목교회의 의의
가) 야목이 없으면 통일교회의 역사가 성립이 안 돼(595-320. 2008.8.14.)
“야목에 가서 감리교가 30년 닦아 나온 것을 한 달 이내에 인수해 버렸어요. 그러니까 기성교회가 반대를 안 할 수 없어요... 야목이 없으면 통일교회의 역사가 성립 안 돼요. ‘야목’하면 벌판의 목사 아니에요? 산중의 목사, 산목이 필요하고, 들의 목사, 야목이 필요하고, 강의 목사, 강목이 필요해요. 동물은 산에서 해방을 받는 거예요. 고기는 물에서 해방을 받고, 들에서도 해방을 받는 것이 있어야 돼요.”
나) 독생녀를 찾기 위한 수련 실시(1959.7.20. ~ 8.31.)
“참부모의 이름이 정착하느냐, 못하느냐 하면서 심각하고 숨 가쁜 수련들을 보냈습니다. 야목은 말과 소가 뛰는 그런 목장지대니까 말이에요. 소도 벗고 살고, 돼지도 벗고 살고, 말도 벗고 사니까 야목에서 천법에 안 걸린다고 해서 그 아줌마들이 러닝 요런 것을 입고 팬티를 입고 그러니 젖어 놓으면 새까만 것이 보이겠어요, 안보이겠어요?”(394-280. 2002.10.13.)
“예수가 독생자라 하였으니 하나님은 그 앞에 독생녀도 보내셨을 것입니다. 전도서 7장 28절에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2천년 역사는 신부 찾는 역사입니다. 신부 찾는 거예요. 그걸 부인하겠어요? 신부 찾는 역사입니다. 예수는 참다운 아들의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참다운 딸의 모습이 없으니 하나님은 뜻을 못 이룬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천년 역사는 딸 찾는 역사입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앞으로 싸우게 되는 것도 이 문제 때문입니다. 성신은 하나님의 딸로서 오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해원의 그날은 어떠한 날일 것인가? 어린양 잔칫날이라 하였습니다. 일천 남자 중에 택한 한 남자로 주님이 나타나시면 그의 한 신부가 어디 있을 것인가? 성신이 와서 2천년 동안 이 지상에 해야 할 것은 신부를 준비해 놓는 것입니다.” (말씀선집7권 304 p. 1959.10.11)
다) 야목은 1차 수련소 기지(444-047. 2004.3.27.)
“이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야목의 수련... 1차와 2차의 수련을 받은 사람들이 전세계 통일교회의 조상의 자리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천사 세계를 대신하는 심정적 내용을 지녔지만 정착은 못했어요. 미래를 향해 가야할 출발의 그 기지가 다 나눠져 버렸어요. 그래서 이제 그제부터 야목을 창건해야 되겠기 때문에... 그 야목을... 제1차에서부터 수련소 기지예요.”
라) 본부 짓기 전에 야목을 먼저 지어야(395-144. 2002.10.18.)
(소제목 : 야목이 본부)
“여기 본부를 짓기 전에 야목을 지어야 돼요. 본부가 문제가 아니에요. 본부야 이곳(한남동 공관)에서 본부 다 할 수 있잖아요? 본부를 미국으로 해도 될 것 아니에요? 그래서 내가 야목에 갔더랬어요... 우리 통일교회가 맨 처음 출발할 때에... 수산산업을 경영하기 위해서 젊은이들을 데려다 교육하면서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 야목이라는 곳에 참 물이 많아요... 그곳을 습격하는 거예요.”
마) 해양섭리 시작할 곳으로 야목을 낙점하고 땅 100만 평 매입 지시(2002.10.12. 야목)
1) 야목성지 중심으로 화성시에 수련소 부지 100만평 이상 땅을 사라고 지시하심(2012.10.12 오전 9시)
2. 큰 땅이 없어서 참부모님 헬기로, 양창식, 유정옥, 황선조 회장님 고향을 둘러보시고 여수 청해가든을 매입하셨음
5. 야목과 정주는 비슷한 형상
• 야목의 풍경이 아버님의 고향 정주와 비슷하다.
• 정주 가고 싶으실 때마다 야목에 오셨는데 하루 걸러 한번씩 오셨다.
• 야목에 오셔서 오늘날에 이루어질 섭리적 구상을 다 하셨다.
6. 치유의 역사가 있는 야목교회 마루 꺼진 곳
• 다리를 넣고 기도하면 치유된다.
• 머리가 아픈 분은 다리를 넣고 기를 보내면 된다. <끝>
* 증언1. 야목교회를 집단 복귀시킨 원리수련회
(천애로 인도받은 삶 - 이요한 선생 증언 p.198)
내가 뜻길을 걸어 오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성사된 많은 경험이 있다. 그 중 하나가 겅기도 화성군 매송면 양목리 야목교회 사건이다. 기성교단이 몽땅 통일교회로 넘어온 것이다. 야목교회는 본래 감리교 소속이었다. 이 교회는 1946년 6월 평양에서 참아버님을 만난 차상순 목사가 시무하고 있었다. 차 목사님은 1910년 황해도 신천군 화산리 3대째 장로교를 신봉해온 가문에서 태어나셨으며, 만주 동북 신학원을 다니면서 전도사 생활을 한 분이다. 그리고 참아버님을 만난 뒤에는 손수레를 끌면서 물건을 팔아 경제적으로 도우셨다.
1954년 11월경 나는 참아버님의 지시로 야목에 가게 되었다. 평양에서부터 참아버님을 따랐던 차상순 목사님이 야목 감리교회에서 목회자로 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나를 보내셨던 것이다. 차 목사님은 1953년 봄부터 이 교회를 맡아 이끌어 오셨다. 나는 차 목사님을 만나 참아버님께서 찾으신다는 말씀을 전했다. 차 목사님은 그 말을 듣고 바로 서울 흥인동 교회로 올라와 유효원 협회장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재출발을 하였다. 차 목사님은 야목교회를 하나님 앞에 복귀시키겠다는 다짐을 한 뒤, 신도들에게 원리강의를 하고, 동산의 노래를 가르쳤다.
1955년 겨울에는 강현실 전도사와 강경렬씨, 김순겸씨가 찾아와 부흥회를 하면서 성령의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지만, 반발 역시 나타났다. 차 목사님은 1956년 12월 3일부터 1주일 원리수련회를 요청하여 내가 직접 가서 말씀을 전했다. 꼬리가 길면 밟히다는 옛말처럼 한 두 명도 아니고 교회 전체를 놓고 원리말씀을 전하자, 그 사실이 곧 감리교회 교단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원리를 듣고, 감화를 받은 차 목사님과 120여명의 감리교인들은 1957년 4월 17일 감리교회 교단의 제재와 압력행사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통일교회로 집단 회심하여 식구가 되었다.
당시 청년 식구였던 주희영 장로는 당시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해 주고 있다. 당시 원리수련을 통해 교인 대부분은 성령과 불 체험을 했다. 신령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하얀 불줄기가 교인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고, 말씀은 떡 같은 불덩이가 되어 교인들에게 먹혀졌다. 기적이 일어났고, 모두가 중생을 통해 심령이 부활되는 현상이 계속되었다. 저도 그때 체험을 했는데, 스스로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때를 기점으로 우리는 변신이 되었다.
겨울방학을 맞아 서울에서 신학교를 다니던 청년교인이 통일교회는 나쁜 곳이며, 이단이라는 반론을 폈지만 누구 한 사람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듣지 않았다. 그 학생은 감리교회 중앙재단에 보고하게 되었고, 문제는 확대되어 소송으로까지 갔다. 수원지청에서는 화해를 하거나 떠나가라는 것이었다. 결국 1957년 5월 사택까지 내어주고 물러났다. 그후 온 식구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12일 만인 1957년 6월 7일 새 건물을 지어 기념예배를 올리게 되었다.
순수하게 원리말씀을 듣고, 죽었던 심령이 되살아난 야목교회 식구들을 생각하면, 기독교 전체가 참아버님 앞으로 다시 돌아와야 할 복귀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실체사건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서 참아버님께서는 야목교회를 자주 찾으셨다. 1959년 5월 서울교회와 인근 7개 교회 청년들과 함께 찾아와 모내기를 하셨다. 1959년 7월 20-8월 31일 제2회 전국전도사 40일 수련회를 개최하셨다. 참아버님은 40일 수련 기간 중 21일을 이곳에서 보내셨다.
새마을 운동의 시발점이 야목교회다. 야목에서 낚시를 하시며 환태평양 섭리와 해양섭리를 구상하셨다. 야목은 해양섭리의 전초기지다. 야목은 제2의 정주다. 야목에 수련소를 지어 남북의 지도자들이 수련을 받아야 한다.
* 증언2. 전도사 훈련, 원리수련의 산실 - 윤준식(72가정) 증언
북한에서 참아버님으로부터 전도된 차상순 목사는 6·25전쟁으로 참아버님의 생사를 알 수 없는 가운데, 남하 후 경기도 야목에 감리교회를 세웠다. 참아버님의 근황을 듣게 된 차 목사는 120명의 신도들을 대동하고 입교하였다. 야목교회는 1959년 협회 제2차 40일 전도사 수련회 등 교육의 산실로 거듭났다. 참아버님께서는 야목을 제2의 정주라고 말씀하시며 앞으로 남북의 지도자들을 이곳에서 교육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 증언3. 윤준식(72가정), 증언1권
협회 제2차 전도사 수련회를 야목교회에서 개최했을 때 다시 없는 은사의 기간을 갖게 되었다. 선생님께서 40일 수련기간 중 15일이나 계시면서 밤에는 말씀, 낮에는 고기잡이를 하시며 역사적인 인연을 맺으셨다.
수련기간 중 잊혀지지 않는 것은 15년간이나 사람들의 발길이 없었던 큰 연못에서 가물치를 잡을 때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그 연못에 마음대로 들어가지도 못했고 감히 그 큰 그물을 치고 고기를 몰아 잡는다는 것은 유교사상이 짙은 그 마을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더구나 여자들끼리 들어가 텀벙거리게 되는 것을 볼 때 아연실색할 노릇이었다.
3~4m의 물 속 그 위에는 수십 년 묵은 가시돋힌 연꽃이 피어 있었다. 선생님이 먼저 들어가시니 어이 그 길을 안 들어 갈 수 있으랴! 이것 또한 그 내용을 마을 사람들이 알 리가 없었다. 우리들 수련생 자신들도 그 순간에는 고기 잡는 재미에 살갗에 사정없이 박히는 가시의 아픔도 잊었지만 밤에 누워 잠을 자노라면 온통 몸이 따갑고 쑤신다. 모기 중에는 울릉도 모기가 제일 무섭다지만 거기에 비하랴! 밤새껏 말씀 하시다가 ‘출동이다!’ 하면 또 따라 나가야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쉰다거나, 못한다거나 이유가 없다. 모두가 수련이라는 말씀에 기인했기 때문이다. 큰 갯둑에 그물을 쳐 놓으시고 물이 다 쓸 때까지 고기를 잡고 있는 수련생들에게 말씀을 하여 주실 때는 마치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은혜를 주시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많았다.
신앙이란 어휘조차 생소했던 내게 스승의 말씀과 원리의 뜻을 알게 되자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 야목교회(40일 수련장소 겸 성전) 오시는 길
● 주 소 : 경기도 화성시 야목리 363-1번지 야목교회
● 문 의 : 야목교회 031-295-7272 | 황재성 교회장 010-8705-5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