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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여성시문학의 사적 고찰 1950년대
1950년대 한국현대여성시의 전개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문학은 문학으로서의 독자성을 주장할 만한 충분한 예술성을 인정받으면서도 사회와의 관계를 쉽게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작가의 삶의 양식 또는 사상적 태도의 진술이라는 입장으로 파악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현실과 문학은 상응적인 관계를 지닌다. 문학은 현실을 수용하여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며 변혁과 지속의 미학을 형성해 가는가 하면, 현실은 문학형성의 토양을 이루면서 문학에 의한 가변성을 지닌다. 문학은 내일의 성취를 가로막는 현실을 고발하거나, 보편적인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여 인간존재를 해명하기도 하고, 현실은 변혁적인 문학의 질서나 세계관에 의해 변모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격동의 변동 속에서 피어린 삶의 현장인 현실은 문학의 단순한 제재로 수용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에서 절규하는 삶의 아픔을 수용하고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사람의 자세와 변혁의 역동성을 제시하게 된다. 전쟁이란 역사적 아픔을 되새기며, 그 아픔을 노출시키고 그 상흔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작업은 분단시대의 한국적 상황에서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1950년대는 혼란 시대였다. 민족분단이 더는 피해 볼 수 없는 동족상잔의 결과로 치달았으며,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도 역시 한 하늘 아래 살 수밖에 없는 적대관계로 떨어진 상태에서의 문학적 표현의 자유란 한정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았다. 한쪽은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조정, 지원을 받는 38선 이북의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으며, 또 한쪽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국들과 손잡은 민주공화국으로 자리 잡기 시작함으로써 정신 내용의 가치 있는 민족 동일성을 유지 보존하기가 어려운 지적 풍토가 더욱 절망적인 국면으로 고착되었다.
소설과 현실은 언제나 상응적 관계를 지닌다. 소설이 현실의 반영이건 현실의 투시이든간에 소설과 현실은 상호 견인 작용을 하면서 자기의 세계를 견지한다. 그것은 소설이 아무리 현실적이라도 현실 그 자체는 아니고 현실이 아무리 소설적이라고 해도 현실이 소설 그 자체일 수도 없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아무리 상상에 의한 소설이라도 현실을 떠나서는 소설이 존재할 수 없다. 이 말은 소설은 현실의 모사가 아니고 새로운 질서의 창조요, 현실을 토대로 한 가공의 세계임을 의미한다. 6.25라는 역사적 현실을 여성작가들은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파악하기 전 단계로서, 당대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아아 50년대!>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논리를 등지고 불치의 감탄사로서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은은 50년대를 감탄사 없이는 부를 수 없는 시대로 규정하고, 50년대는 무엇보다도 두 가지 즉 처절하고 무모한 듯한 죽음과 삶의 근원으로 만들어졌다고 쓰고 있다. 정영자 교수는 문학사 시대를 구분하면서 1950년대 문학을 전란기 문학으로 규정하였다. 아시다시피 1950년대는 6.25동안으로부터 시작되어 60년 4.19혁명으로 이어지는 다사다난한 연대였다. 전쟁에 의한 참혹한 피해와 이의 복구는 50년대를 관통하는 시대적 명제였다고 할 수 있다. 고은은 <1950년대>에서 1950년대의 처절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전쟁터에서 스러진 청춘,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청춘, 누구나 보완할 수 없게, 수정할 수 없게 이지러진 청춘이 하나의 비극적 연대기를 만든 것이다.
1950년 여름, 전쟁은 그 우기의 여름 어느 날 새벽에 그 때에야 겨우 잠들 수 있던 해방의 혼란과 언제나 불안하지만 어느 정도 안정되려던 사회적 질서의 일체를 무너뜨렸고 처음에는 하나의 급성 풍문이었던 것이 뜻밖에 전쟁 자체가 무엇인가라는 전체적인 모습을, 역사와 역사의 몰락이 무엇인가를, 확실한 5천 년의 역사였지만 그 역사 속에는 자연밖에 들어 있지 않았던 오랜 습관에 대한 커다란 공포를, 그리하여 절망과 폐허가 무엇인가를 가장 신랄하게 알려 주고 그 전쟁은 전쟁의 50년대로서 쉼표 없이 끝나고만 것이다. 모든 곳은 전쟁이었고 전쟁 속의 시장이었다. 생활은 허물어진 집터와 참호에서 가능했다. 참호의 아들로서, 바라크의 아들로서 50년대의 실향세대는 태어난 것이다. 50년대란 바로 전쟁이 만들고 전쟁이 버린 고아의 시대인 것이다.
역사가 인간을 버리고 예술 자체가 인간을 버린 유기의 시대인 이처럼 195년대는 전쟁을 빼놓고는 결코 논의될 수 없다. 이데올로기를 전면에 내세운 6.25동란은 민족상잔이라는 비극을 낳았으며, 이로 인해 민족분단 체재는 고착화 되었다. 그 결과 안보의 논리는 어떤 통일론에도 우선 하는 절대불가침의 신성화를 초래하였다. 민족해방의 논리이거나 절대 안보의 논리이건간에 모두가 6.25동란을 발판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50년대의 시대사를 개관하는 중요한 관점이 된다.
이 비극적인 전쟁을 통한 민족분단은 돌이킬 수 없는 만큼 고착화 되었고, 이를 빌미로 두 쪽으로 갈린 정치체제는 권위주의적이며 독재적 권력의 아성을 확고히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양극화 현상은 전쟁을 유발한 북쪽이나, 유엔군의 도움을 얻어 겨우 원상회복을 한 남쪽이나 양측 모두에게 적용될 것이다. 어쩌면 6.25동란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조국이 38선을 경계로 남쪽에 미국이 북쪽엔 소련군이 분할 점령하였다는 사실에 원천적으로 기인하고 있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한반도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냉전체제에서 강대국들의 세력 쟁탈전의 대상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대다수 국민들은 공산주의나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대다수 국민들은 공산주의나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전쟁의 와중에 휩쓸려 들어갔으며, 이 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수백만의 죽음을 과연 이데올로기 그 자체 명분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정호웅은, 한국전쟁은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강대국의 대리전이라든지 민족해방전쟁이라든지 또는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든지, 해석이야 어떻든 그것은 남과 북 모두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긴 가공할 폭력이었다. 쓰고 있으며, 막대한 인명, 재산상의 피해, 수많은 이산가족, 그리고 아직도 여전히 한반도를 근본 구속하고 있는 분단의 고착화 등, 전쟁 수행에 주체적으로 임했던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의 문인에게도 폭력으로 작용했고 또 그렇게 인식되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하고, 정운삼, 전봉래의 자살과 서정주의 발광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고 했다.
전쟁의 폭력적 작용은 모든 것을 휩쓸어 파괴하고 뒤죽박죽으로 뒤섞어 버렸다. 파괴와 함께 한국 사회의 엄청난 지각 변동이 급속도로 이루어진 것이다. 일제의 구속에서 풀려나자마자 닥쳐온 것이어서 그 변동의 진폭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현실은 거대한 혼란 덩어리로 작가들 앞에 놓여 있었다.
전쟁의 한복판, 그리고 이후의 폐허 위에 선 50년대 작가들을 근본 구속한 것은 이렇듯 엄청난 현실의 지각 변동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전쟁이란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린 터이라 냉정하게 현실을 탐구할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할 수 없었다. 전쟁터를, 포로수용소를 적 치하 골방을, 대구, 부산으로 이어지는 피난길을 익명으로 떠돌며 살아남아야 하는 극한 상황 속에 있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 경험의 자장으로부터 풀려나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자라났기에 작가의 제일 요건인 모국어 능력에서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유종호는 50년대를 <오문 및 악문>의 범람시대라 했다. 일제강점기 국어말살정책에 따라 모국어의 자유로운 구사능력을 갖추지 못한, <모국어 감각의 불구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로 안한 묘사의 제약은 현실의 구체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관념으로 현실을 재단하는 경향을 띠었다.
50년대의 여류시는 김남조와 홍윤숙으로 대표된다. 6.25의 비극적 체험이 인간실존의 어려움과 그 무의미성에 대한 뿌리깊은 허무와 절망을 심어 주었다. 일제 36년의 식민지 체험이상으로 패배주의와 절망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김남조는 인간생명에의 유일성과 그 한계성에서 오는 허무의지를 신앙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기도시의 전형을 보여주면서 사랑과 생명에 대한 끈질긴 탐구를 모색하고 있으며 홍윤숙은 초기시의 감상적인 애련을 극복하고 여성심리의 정확한 표현과 함께 풍자적인 현실인식을 뚜렷이 하여 우리 의식의 동참을 노래하고 있다.
한국현대여성문학은 제1기의 김명순, 김원주, 나혜석, 제2기 작가로 박화성, 강경애, 백신애, 최정희, 김말봉, 시인으로는 김오남, 노천명, 모윤숙, 백국희 주수언, 장정심, 제3기의 김남조, 홍윤숙, 제4기는 60년대의 여성시의 전성기로 나눌 수 있다. 개화기인 한국현대문학 초창기에서부터 주로 해발 이전까지의 여류문학을 통시적으로 보면서 개개인의 작가별로 공시적으로 본 결과는 다섯 항목의 결론을 주장할 수 있다.
1. 개인 실력으로 문단에 진출했다.
2. 전 여류문인은 지식층에서 나왔다.
3. 전체적인 주류가 없다. (사상성의 빈곤)
4. 문학평론가가 없다.
5. 시보다 서설이 우세하다.
이상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제1기의 여류문인은 작품이 별로 없는 문학생활과 기질적 개성, 시대적 환경, 남성들의 무분별성의 관점에서 예술과 생활을 혼동한 비극적 삶을 살았던 여류시인이었으나 그들은 종속적이 아니었고 몸 전체를 현실 속에 던졌던 것이다. 따라서 그로 인한 여하한 패배도 스스로의 책임으로 돌려 그 아픔을 지녔던 것이다. 제2기는 여류소설이 왕성하게 발표되던 시기였으나 이 시기의 모윤숙과 노천명은 가장 여류다운 모습을 여성시사에 기록한 시인이었다.
해방과 광복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갖가지 소요로 세상이 어지러웠고, 민족분단의 결과가 빚어낸 6.25동란 전후의 과도기에 활약한 제3기 여류시인으로 김남조와 홍윤숙은 노천명의 뒤를 이어 공허한 수식어의 남발과 감상주의를 절제하고 사회와의 관계를 정립해 나간 특성 있는 여류시의 한 흐름을 보이고 있는 여류시인이다. 초창기의 제1기의 여류시인, 그리고 민족저하기의 제2기의 여류시인의 뒤를 이어 제3기 쌍벽을 이루고 나타난 여류시인인 것이다.
홍윤숙은 1947년에『문예신보』에 <낙엽의 노래>를 발표한 이후 다시 195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분에 <원정>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그녀는 다분히 개성적이며 타오르는 생명의 불꽃을 차가운 이성과 의지로 억누르면서 커다란 고민을 한 겹 두 겹 벗겨내는 냉철한 지성의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는 견해와 전통적인 서정과 평화로운 정서로 인간의 본성을 회복시키는 시의 본질에 보다 투철한 시인들 중의 한 사람으로 리리시즘의 신주류를 형성한다고 보는 견해로 평가받고 있다.
홍윤숙은 여류시의 전통적인 양상인 감상주의적 애상을 탈피하고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문제와 삶의 권태감, 도시문명에 대한 비판, 어둠과 삶의 비리성을 풍자하면서 목소리 거센 피의 도전을 과감히 발산하고 중년 여성의 허위의식을 신락히 풍자하는 등의 특성을 보이는 이른바 한국여류시의 지성적 축제의 한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따라서 홍윤숙 시의 특성을 고찰함으로써 1950년대 한국여류시의 한 맥을 정리하고자 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 된다. 홍윤숙의 문단 데뷔는 195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원정>이 당선됨으로써 본격화된다. 그러나 1947년 문예신보에 <가을>이, 1948년에 신천지에 <낙엽>이 발표되었다. 이러한 시의 발표만으로 문단 데뷔를 인정한다면 등단은 1947년이 되는 셈이다. 홍윤숙은 김남조와 함께 1950년대의 한국여류시를 개화시킨 여류 시인이었고, 30년의 시작 과정을 통하여 많은 시의 변모과정을 보여 주었다. 초기 여류시의 한 특성인 넘치는 감상적인 애련 속에 그리움을 노래하였다.
김남조 시의 특성은 사랑이다. 주지하는 바 그의 사랑 시학은 그의 문학관인 동시에 삶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인간이면 가지게 되는 사랑의 문제는 감수성이 날카로운 여성 시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독특한 사랑의 아가로 출발한 그의 사랑시는 30여 년의 주제로 뿌리내리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30여 년의 시문학은 변모과정에 있어 오로지 한 가지 형으로 고착되었다고 판단하여야 될까. 아직도 그의 창작열은 고조되어 있고 끊임없는 변화 속에 조금씩 그 양상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지만,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사랑 자체를 벗어나고 있지 않다.
그가 발표한 시집은『목숨』(1953),『나아드의 향유』(1955),『나무와 바람』(1958),『정념의 기』(1960),『풍림의 음악』(1963),『겨울바다』(1967),『설일』(1971),『사랑초서』(1974),『빛과 고요』(1983),『바람세례』(1988), 등 11권이다. 그의 산문집『잠시 그리고 영원히』(1964)를 시작으로 10권이 넘는 수필집을 통하여 시로써 못 다한 삶. 사랑, 종료와 문학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다. 김남조 시를 사랑의 시라고 규정하는 것은 일반화된 듯하다.
허영자는 김남조 시의 주제는 사랑이며, 그 내용은 기도의 정신이다 라고 하였으며 필자는 사랑과 생명의 시인으로 오세영은 영과 육의 갈등이 빚어낸 정신적 부하물로, 김재홍은 사랑과 구원, 또는 갈망과 기도의 시라고 요약하였으며 김종해는 사랑의 절대적 가치부여에 김남조 시의 근원적인 맥락이 있다고 본다.
그의 사랑 시학을 이해하기 위하여 열 권이 넘는 산문집 속에 나타나는 시관과 사랑관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시관
① 지난 날 아픔과 목마름의 화상의 정착지이다.
② 불투명의 우울로 해저에서 진주를 캐려고 내젓는 손짓이다.
③ 고독과 그리움, 연모와 갈망의 정신.
④ 적시의 서정
⑤ 인간의 생명 속에 잠재해 있는 흥성스러운 음향의 잔치를 도발하고 발굴하는 것이다.
⑥ 삶의 발걸음이 지나간 다음의 낙수이다.
⑦ 영혼의 결정이다.
⑧ 종교이며 신앙이다.
⑨ 말의 은유, 말의 우회, 말의 숲속에 나의 진실을 숨기는 그 비방이다.
⑩ 하나의 영감과 두 개의 치기, 셋의 감상과 네 개의 우매를 배합한 것이다.
김남조는 이미지보다 의미를 중요시하게 생각한다. 때문에 그의 시는 진솔한 자기 삶의 증언과 묘사를 통하여 자신의 사랑과 삶을 나타내고 있다. 김남조 시의 변화양상은 생명에서 사랑으로, 그 다음은 구원으로 연결되고 있다. 처녀시집『목숨』을 발간에서 세 번째 시집『나무와 바람』 이 발표된 1950년대의 6.25전쟁 이후의 파괴와 참혹한 정신의 분열과 불안과 방황 속에서 끈질긴 생명의식의 노래를 통하여 자력구원의 의미망을 확충시키고 있다. 그의 사랑 시학은 초기의 생명의식의 살아 있음의 생존적인 계기에서 시작되어 우정과 사랑의 기쁨 속에서 이 세상과 사람을 깨달아 왔고 때로는 에로스에 몸을 떨기도 하고 아가페적인 존재론에 머물기도 하였으나 통회 속에서 참다운 사랑과 구원을 찾을 수 있었다.
김남조는 1920년대의 김명순, 김일엽, 나혜석 등의 여류문학에 이어 1930년대의 노천명을 잇고 50년대의 황폐한 이데올로기와 고난 속에서 영원한 생명의 활력소인 사랑을 노래하여 1960년대의 여성 시를 있게 한 현대시사의 위상을 가진다.
홍윤숙, 김남조 외 50년대 활동한 여성시인으로 김지향, 김후란, 박정숙 강계순, 박정희, 박현령, 추영수, 추은희, 최선령, 함혜란 등이 있다. 김지향은 1956년 시집『병실』을 출간, 그후 원시적 생의 욕구를 상징적 수법으로 포착, 시각적 이미지 형성으로 시의 회화성을 추구하는 작품을 쓰고 있다. 대표작에『별』『막간풍경』『사랑』『검은 야회복』『속의 밀알』『아침 뜰』『소꼽놀이』『숲으로 간다.』 등이 있다. 처녀시집에 50년대 발표한 시집으로『막간 풍경』이 있다. 흔히 여성시인들이 범하기 쉬운 감성의 위험을 넘어서서 독자의 세계를 개척해 나가고 있다. 『여류시』와 『시법』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후란은 1959년 현대문학에 <오늘을 위한 노래>가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풍은 상징주의적 수법으로 현실감각과 사회의식을 예리하게 표현하고 있다. 대표작에 『목마』『장미』『윤사월』 등이 있다. 강계순은 1959년『사상계』 신인현상문예에『풍경화』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사상계에『역두에서』를 발표하면서 의욕적인 시작활동을 보였다. 작품 경향은 다분히 베를레에느적인 상징시풍을 초기부터 드러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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