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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알바트로스
제49차 정기합평회
(2023. 2. 16.)
순서 | 제목 | 작가 | 합평 담당 |
1 | 제주의 겨울 바다 | 김영희 | 백금태 |
2 |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김경애 | 변미순 |
3 | 복날 풍경 | 김정래 | 서소희 |
4 | 아주 큰 일 | 김정실 | 안연미 |
5 |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 김미숙 | 엄옥례 |
6 | 까치발 기둥 | 엄옥례 | 오수미 |
7 | 부처가 되다 | 공도현 | 옥경자 |
8 | 당신은 누구신가요 | 서소희 | 이미경 |
제주의 겨울 바다 / 김영희
1. 제주도로 겨울 여행을 계획했다. 출발 날짜가 가까워지니 70년 만의 폭설이 내려 도시 전체가 마비되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설경을 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기상 악화로 비행기가 뜰 수 있을까를 걱정했다. 다행히 출발 전날 폭설이 그쳐 비행기가 이륙했다.
2. 제주의 겨울 여행은 처음이었다. 눈을 마음껏 볼 수 있다는 설렘은 또 다른 기대를 갖게 했다. 눈 내리는 날,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바다를 바라보는 운치 있는 상상은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3.공항에 도착하니 관광지답게 신속하게 도로가 뚫려있었다. 차량으로 이동하며 이국적인 풍광에 하염없이 창밖만 응시했다. 어른 허리께까지 왔던 눈으로 중산간은 설국이 되어 시선을 압도했다. 부드러운 능선을 오르며 행복의 티켓을 손에 쥔 것처럼 가슴이 설렜다. 눈 덮인 세상에서는 누구나 아이가 된다더니 내 모습이 딱 그랬다.
4. 일정에 맞춰 여행이 가능할까를 우려했지만, 동심으로 돌아가 들썩이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처럼 시야가 흐릿했다.
5. 천년을 기다린 용이 승천하기 직전 바다로 떨어졌다는 용두암을 찾았다. 옛적 용 한 마리가 산신의 옥구슬을 훔쳐 달아났다. 화가 난 한라산 산신이 화살을 날려 용을 바닷가에 떨어뜨렸다. 그 벌로 몸은 바닷물에 잠기고 머리는 하늘로 향하여 굳게 했다는 전설이었다.
6.신령스러운 용의 기운을 듬뿍 받으라는 의미였을까. 용두암은 오래 전 우리 세대들의 제주 신혼여행 필수 코스였다. 단체로 신혼여행 온 부부들이 한복을 입고 가이드의 요구에 신랑의 등에 업혀 단체 사진을 찍은 기억이 떠올랐다. 같은 날 새롭게 출발한 그들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7. 오랜 세월 해풍을 꿋꿋하게 맞선 까닭일까.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용머리의 크기는 신혼여행 때 보았던 기억 속의 크기보다 작았다. 비상을 꿈꾸며 위용을 자랑하던 용머리도 오랜 세월 풍상과 거친 비바람의 위력 앞에서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이상향의 가정은 아픔과 시련을 겪은 후 이루어지는 것처럼, 용두암도 수많은 세파와 매서운 추위 속에 어찌 아픔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용두암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8.한산한 바다는 왠지 고독하고 쓸쓸해 보였다. 외로운 겨울 바다에는 고독의 빛나는 결정체인 등대가 옆지기가 되어 주었다. 바다와 등대는 짝꿍이다. 눈발이 날리는 해변을 거닐다 눈에 띄는 카페에 들어갔다. 주인이 추천해주는 ‘땅콩 스무디’를 앞에 두고 바다가 마주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전통 가옥을 개조한 찻집은 제주 바다의 수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9. 탁 트인 해변을 보고 있으니 누구나 이 절경에 마음이 순해질 것만 같았다. 창가에 둔 소라 껍데기에 귀 기울이니 물빛 파도, 녹색 해조류, 흰 포말 등 뒤척이는 소리가 바다 내음과 함께 껍질에 스며들었나 보다. 창 너머로 머리를 휘날리며 바닷가를 걷고 있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10. 수평선을 바라보며 뭉그적거리는 시간은 겨울 바다만의 낭만이었다. 창밖은 눈발과 차가운 바닷바람이 겨울의 정취를 여실히 드러냈다. 카페에서 저물어가는 바다를 바라보며 따스함을 만끽하는 시간은 땅콩 스무디처럼 감미롭고 달짝지근했다.
11. 멍때리는 시간이 즐겁지만 차디찬 바다 냄새도 실컷 맡고, 바람을 만끽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갔다. 불어오는 바람과 눈발에 춥긴 했지만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맞바람을 맞으니 오히려 스트레스가 풀렸다. 소금기 머금은 날것 그대로의 생 바람은 신선한 자극제였다.
12. 하늘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갔다. 구름이 두껍게 깔린 날씨 탓에 웅장한 해넘이를 볼 수 없어 안타까웠다. 구름 사이로 언뜻 얼굴을 내민 일몰은 마지막을 향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열정의 잔해처럼 여겨졌다. 일몰은 사랑이 스미듯 드넓은 바다에 잔잔하게 퍼져만 갔다. 저물어가는 노을이 바람의 미소를 머금고 수평선에서 사라지는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노을은 어느 순간 잔상을 남기고 사라졌다.
13.겨울 바다는 긴 여운을 주었다. 제주에서 겨울 바다를 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마음은 희망에 부풀었고 긍정적이며 너그러웠다. 세상은 호의로 넘쳐나는 것 같았다. 약속도 없이 낯선 시간과 공간에 모였다가 흩어지는 눈발조차도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시간이었다. 여행을 오기 전 불편하고 쪼그라든 감정은 어느새 봄눈 녹듯 마음자리에서 비켜 서 있었다. 제주는 말수 적은 친구의 수수한 안부처럼 따뜻한 울림으로 가슴에 스며들었다. 제주의 겨울 바다는 행복한 감동 그 자체였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김경애
1.남편과 부부의 연을 맺고 산 세월이 반세기가 되어간다. 남편의 자존심을 거스를까봐 한 번도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고 속으로 삭히며 살았다. 그러나 이제는 말 할 수 있다.
2.우리는 가문과 가문의 연결로 혼인 했기에 남편과 나는 모든 것을 터놓고 사는 삶이 아니었다. 남편은 선비정신에 얽매여 도리에 어긋나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았고, 나도 남편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어 언행에 조심하며 아내의 역할에 충실했다.
3.신혼을 시조모와 함께 시작해서 둘이 커피 한 잔 마시거나 손잡는 스킨십도 하지 못했다. 휴일 날 식사 자리에서 남편과 직장이야기를 하면서 둘이 웃었다. 시조모가 당신은 늙은것도 서러운데 너희끼리 이야기 한다며 일침을 놓았다. 그 이후부터 남편은 시조모 앞에서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4.시아버지 사후에 사대가 함께 살았다. 시조모, 시어머니, 시동생, 우리식구까지 대가족이었다. 직장 다니며 집안일을 나 혼자 하기에 힘들어서 시어머니께 도움을 청했다. 시어머니는 찬물에 손 넣고 일을 못한다고 거절하며 다른 집 며느리들도 다 직장 다니며 일 한다고 돈 버는 유세하지 말라고 하셨다. 남편에게 어머님이 집안일을 도와주면 좋겠다는 말을 했더니 한 수 더 떠서 맏이로 시집왔으면 각오하라고 했다.
5.어느 날 제사를 지낸 뒤 출근 시간에 쫓기어 시고모에게 뒷정리를 부탁했다. 남편은 그 자리에서 선생은 아이들 시키는 버릇이 있어 집에서도 잘 시킨다며 웃으며 한마디 했다. 하지만 그 말이 나의 가슴 저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앉았다. 남편도 내 편이아니고 말 그대로 남의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더 이상 이집 안에는 내 편이 없음을 인지했다. 그 후로 내입은 점점 닫히고 할 말만 하게 되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애정 표현을 잘 못했다.
6.일 년에 기제사와 차례를 합쳐 열 번, 식구들의 생일, 수시로 드나드는 손님이 있어 먹거리 준비뿐만 아니라 생활비도 만만치 않았다. 남편의 봉급은 통장으로 입금 된다고 봉투도 주지 않아 남편의 봉급이 얼마인지 몰랐다. 한 달 생활비의 부족분을 채워주는 정도였다. 남편도 공과금과 동생 학비며 나 몰래 들어가는 금액이 적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따지지 않았다. 단 둘이 앉아 밥 먹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 서로 머리를 맞대고 미래를 설계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7.나는 알람 소리에 일어나 아침, 점심까지 먹을 식사 준비를 해놓고 출근하였다. 퇴근 전 동료직원들과 잠시 숨통을 조금 틔우고, 퇴근길에 두 손 가득 장을 봐서 저녁상을 차렸다. 설거지를 하고 아이들을 씻기고 나면 아홉시가 훌쩍 넘었다. 그 때부터 빨래며 청소, 연탄불을 갈아놓고 방에 들어서는 시각이 자정에 가까웠다. 핸드폰이 없는 시대라 남편의 퇴근 후 행적을 알지 못했으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8.한 겨울 이른 아침 식사 준비를 하다가 새벽종이 울리면 연탄재와 쓰레기를 버려야 했다. 아직 식구들은 모두 기척도 하지 않아 젖은 손으로 버리고 오면 손이시려 눈물이 쑥 빠졌다. 잠시 남편이 자는 요 밑에 손을 녹이면서 늦게 귀가해 곤히 자고 있는 모습에 손이 시리고 아프다는 말도 못하고 부엌으로 나왔다.
9.귀머거리, 벙어리. 봉사 석 삼년이 끝나는 해 사업에 실패한 둘째 시동생이 빚과 함께 조카와 동서를 데리고 와서 같이 살게 되었다. 안방은 시어른과 막내와 셋째 시동생이 거처하고 둘째 시동생 식구에게 작은 방을 내주었다. 우리식구는 문간방으로 나 앉았다. 식구가 자그마치 열두 명 이었다. 남편과 나는 적금을 모두 해약하고 불편함을 내색도 못한 채 여섯 달을 보냈다.
10.방학이 되어 집에 있는데 남편이 전화로 듣기만 하라면서 대구 가까운 곳으로 전보내신을 내라고 했다. 꼭 된다는 보장 없이 연습 삼아 내신을 냈다. 공교롭게 남편과 나는 같은 날 발령이 났다. 마음의 준비도 없이 당하는 일이라 이 환경을 벗어나는 기쁨보다 어안이 벙벙했다.
11.어른들과 시동생의 따가운 눈초리를 외면하고 시집을 떠나왔다. 손님을 사절하려고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맏이의 책임은 면해지지 않고 신경이 더 쓰였다. 할 수 없이 다시 주택으로 이사를 하면서 시조모와 시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몸은 고단하지만 마음이 편한 선택을 했다.
12.하루에 도시락 다섯 개를 싸 놓고 새벽 여섯시 반에 출근하는 아내를 보지 못하는 남편을 원망도 푸념도 할 여유가 없이 사십년이 훌쩍 지났다. 어른들이 다 돌아가시고 아이들을 출가 시키고 퇴직 하니 둘만의 공간이 만들어 졌다. 그 동안의 남편의 무심한 마음을 말하면 우리 시대는 다 그렇게 생활했다며 합리화 했다. 나의 넋두리를 위로의 말 대신 잔소리로 듣고 먼저 화를 냈다. 충돌이 싫어서 또 참았다.
13.이제는 집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매스컴을 통해서 보고 듣는 소리를 인지하여 아녀자들의 힘든 고통과 남편들의 무심함에 공감을 가지는 것 같다. 나도 그렇게 살았다고 말하면 화내지 않고 미안하다며 들어준다. 지금부터 신혼처럼 새로 시작하자고 한다. 다시 태어나면 나와 다시 만나겠다고 한다. 내가 굳이 싫다고 해도 다시 만나 내가 한 것처럼 다 해 준다고 한다.
14.이제는 어떤 말이라도 할 수 있어 지난날의 서운함이 스르르 녹아내린다. 앞으로 남은 시간 서로 보듬으며 지내리라.
복날 풍경 / 김정래
1. 이글거리는 태양은 멈출 줄 모르고 불화살을 내려 쏟는다. 매미 울음이 지칠 줄 모르고 하늘 끝으로 치솟으며 폭염을 감아올렸다가 풀어 놓는다. 짜증스럽게 덥다.
2. 스마트폰 벨이 울렸다. 직장 생활을 함께 했던 친구 한태서 오랜만에 온 전화라 반갑게 받았다. 복날인데 얼굴도 볼겸, 점심이나 하자고 했다.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좋다고 대답을 보냈다.
3. 열두 시에 Y농협 앞에서 세 친구가 만났다. 한 동안 뜸했던지라 악수를 나누는 손에 힘이 더했다. 달마다 한 번씩 가졌던 친목 모임도 코로나 등살로 막힌 지 오래 되었다. 그 와중에도 건강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어디로 갈까?”, 묻는 말에 한 친구가 모(某) 삼계탕 집으로 가면 어떠냐고 했다. 그 집은 이름 난 곳으로 평소에도 점심시간엔 줄을 서야 했다.
“밥 한 끼 먹자고 줄서 기다리는 것은 질색이다”라고 하니 그럼 갈빗집으로 가자고 합의가 되었다.
4 .갈빗집을 향하면서 친구는 “오늘 같은 날은 보신탕이 재격인데”하면서 지난 한때 복날이면 문전성시를 이루던 보신탕집이 떠오르는지 입맛을 다셨다. 그 시절 복날에는 개고기가 보양식의 으뜸이었다. 오죽하면 ‘복날 개 팔자 같다’는 말이 생겨 났을까! 몸을 보양하여 더위에 지치지 않고 삼복더위를 잘 넘기라는 조상의 지혜가 애완견을 지키겠다는 극성에 밀려 삼계탕이 덮어썼다.
5. 전화한 친구가 몇 번 갔다던 갈빗집은 도심 밖인데도 주차장부터 만원이었다. 이백 평은 됨직한 식당 안은 남녀노소로 가득했다. 카운터에서는 번호표를 발급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 가하는 표정을 지으니, 친구는 오늘 같은 복날은 맘먹고 찾아가는 집은 어딜 가나 다 마찬가질 거라고 했다. 번호표를 들고 입구에서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6. 이쑤시개를 물고 나오는 사람들을 배웅하면서 번호표를 확인하며 차례를 신경 써야 하는 심사가 편치 않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보신이 만족하다는 표정이었다.
7. 한참이 지난 뒤에야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자리를 잡아 갈비찜을 시켰다. 야채와 반찬은 셀프라고 해서 지지만큼 입맛대로 챙겨다 놓았다. 대기하던 시간에 비해 갈비찜은 빨리 나왔다. 음식은 먹음직스러웠다. 손님들은 나고 들고 계속 북적였다.
8. 건너편 자리에 칠십대 할머니와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손자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가위로 뼈를 가려 고기를 손자에게 건너 주니 손자는 “할머니 잡수세요. 하고 도로 할머니 그릇에 가져다 놓았다. 할머니는 먹지 않고 손자가 먹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입가에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9. 지금 맞은편에서 할머니와 같이 갈비찜을 먹고 있는 손자는 할머니에게 어떤 손자일까, 생각에 잠겨 있는데, 옆에서 열심히 가위질을 하던 친구가 “맛이 별로야” 하면서 쳐다보았다. “아니” 고개를 젓고 한 점 집어 입에 넣은 갈비찜이 더 달달하게 느껴졌다.
10. 계산대에서는 카드를 빼들고 서로 계산을 하겠다고 밀고 당기는 시비가 있었다. 결국 전화를 건 친구가 주선을 자기가 했다고 권리를 주장하는 바람에 둘이는 말문이 막혔다.
배를 넉넉히 채우고 나오는 발걸음에는 힘이 실렸다. "더위야 물러가라 !“
아주 큰 일 / 김정실
1.언제나 작심삼일이 되기에 이번에는 계획 없이 새해를 맞이했다. 아침에 떠오른 해를 바라보고 있는데 정인보 선생님의 새해노래 ‘온 겨레 정성덩이 해 돼 오르니’ 하고 저절로 노래가 나왔다.
2.아침마다 떠오르는 정성덩이를 보면서 알찬 한 해가 되기를 바랐다. 여태까지 하지 못한 많은 일들이 있지만 이 한 가지 일만은 이번에는 하겠다는 마음을 다졌다.
3.오늘 날까지 혼자서 음식점에 밥 먹으러 들어가 본적이 없다. 요즈음 혼 밥을 먹는 사람들이 대다수라고 하지만 아직까지 밖에서 혼 밥에는 자신이 없었다. 무언지 모르게 혼자서 밥을 먹으로 음식점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처량함을 느끼게 하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4.장도 볼 겸 점심을 해결 하기위한 생각으로 봉덕시장으로 갔다. 바깥쪽으로 난 상점들은 손쉬운 먹을거리인 떡볶이와 김밥 어묵과 튀김종류에 사람들이서서 먹고 있다. 차마 그렇게는 먹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시장 안으로 들어갔으나 선뜻 들어갈 만한 음식점도 없었다.
5.한 끼 안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장만 봐서 그냥 집으로 갈까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먹는 것이 아니고 혼자서 음식점에 들어간다는 큰일을 해결하는 것 이 목적이다. 남구청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할매 순대국밥과 사골 곰탕, 콩나물 국밥 뭉텅이 고기 집 등 여러 음식점 앞을 지나서 영대병원 사거리까지 갔다. 배도 약간은 고팠다.
6.영대병원으로 올라가는 왼쪽 길에 본 죽 음식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 집을 보는 순간 몸이 아프거나 밥이 먹기 싫을 때는 자주 사들고 오는 것이 본 죽의 음식이다. 들어가서 사들고 올 수는 있는데 어째서 혼자 들어가서는 먹을 수가 없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다잡고 누름단추를 눌렸다. 점심시간이 지나서 인지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아 창가 자리로가 앉았다.
7.새싹 비빔밥을 시켜놓고 찬찬히 음식점 안을 흩어 보았다. 좌석마다 사람들이 있으나 혼자서 밥을 먹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또한 혼자 밥 먹는 사람을 안쓰럽게 보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괜히 혼자의 생각이라는 마음이 들지만 그래도 마음은 그렇게 느긋하지는 않았다.
8.혼자서 먹는 밥이 무언지 모르게 어색해 녹두죽 한 그릇을 포장해 달라고 주문을 했다. 다시 장을 보기위해 봉덕시장 쪽으로 가면서 나의 습관을 짚어 보았다. 커피숍은 혼자서 잘도 들락거린다. 옷이나 가방 신발 그 외의 생활용품의 물건들을 살 때는 어떤 누구와도 함께하지 않는다. 취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 이주 정도 혼자서 윈도쇼핑 한 다음에 산다. 언제나 친구들과 수다를 떨면서 구매한 물건들은 결국은 사용하지 않게 된다. 며 해전에 친구들과 구매한 가방 두 개 중 한 개는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며칠 있다 친구에게 선물이라며 주었다. 아직도 사용하지 않은 가방 한 개는 몇 년째 옷장에서 잠을 자고 있다.
9.동서를 막론하고 밥을 먹는 시간만큼은 편안하고 느긋함을 갖는다. 가족들이 식탁에 모여 앉으면 자연적으로 자기의 생각과 하루의 생활을 이야기를 하게 된다. 차츰 차츰 제 갈 길들을 가다보니 핵가족이 되었다. 어느 집이나 둘이 아니면 혼자서 식탁에 앉게 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닌 것 같다.집에서는 어떤 때는 제왕처럼 식탁을 차리기도 하지만 보통은 큰 쟁반에 차려 텔레비전 앞에서 느긋하게 먹는 것이 편하다. 먹을 때는 편안함과 느긋함이 있어야 한다.
10.음식점의 상태를 상, 중으로 놓고 본다면 상위 상은 조용해서 느긋하고 편안하게 먹을 수 있어서 좋으나 너무 비사다. 내가 좋아하는 회 초밥을 언제나 포장해서 가지고 올 수 밖에 없다. 중위 중, 보통 음식점은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어 혼자서는 도저히 자리를 잡고 앉을 수도 없지만 빨리 먹어야 한다는 것이 부담을 준다. 이러다보니 혼자서 음식점 다니는 것에 익숙해져 있지가 않다. 김밥집도 혼자 들어가서 먹는 것이 어색히 포장해서 갖고 온다. 어떤 때는 점심을 못 먹을 때가 있다. 하루 세끼 중 점심을 가장 잘 먹으라고 했는데 말이다.
11.이런 생각을 하면서 걷다보니 봉덕시장 입구까지 왔다. 본 죽 쇼핑백의 녹두죽을 보면서 오늘은 장을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녹두죽이 알맞은 한 끼의 저녁이 되기 때문이다.
12.봉덕시장에서 영대병원 사거리까지는 버스로 한 코스다. 그 길을 왕복했으니 다리가 무직해 옴과 동시에 발에 아픔이 왔다. 그래도 마음은 느긋하면서 편안했다. 해야 갰다고 마음먹은 아주 큰일은 한 것에 대한 뿌듯함 인 것 같았다. 이제부터는 어디를 가든지 혼자라서 점심을 굶는 일은 없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 김미숙
외출에서 돌아와 집 안으로 들어가려다 현관 앞에 잠시 멈추어 선다. 신발을 벗으려할 때 안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3학년인 둘째 아이가 입시에 매달려 매일 어깨가 처져 있었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피아노를 치고 있다. 흐름을 끊지 않으려고 그 자리에서 못 박힌 채 귀를 기울인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이었다. 옆집에 놀러 갔다 온 후 갑자기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졸라댔다. 건반을 두드리는 친구의 모습이 보기 좋았던 모양이었다. 다음날부터 아이는 피아노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배움의 진도는 느렸다. 몇 년을 연습했지만 바이엘에 머물러 있었다. 학원에 다니기 싫거든 그만 다니라고 했더니 오히려 피아노를 사 달라고 했다. 집에 피아노가 있으면 연습도 많이 하고 눈에 띄게 잘 칠 수 있다고 졸랐다. 남자아이라서 계속 칠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중학생이 될 때까지 배운다면 사 주겠다며 달랬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이는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꾸준하게 악보를 들고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에 약속대로 생일 선물로 피아노를 사주었다. 그 무렵 아이는 클라리넷까지 배우고 싶다고 했다. 피아노에만 집중하라고 설득해도 소용없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피아노 연주를 했고 밤새도록 클라리넷 연습에 몰두했다. 이삼 년이 지나자 클라리넷을 다루는 동작이 어느 예술가 못지않았다. 덩달아 나는 색소폰에 입문하게 되었다.
어느 해 가을, 문학회 출판기념회에서 나는 색소폰을 연주하게 되었다. 초보 실력에 걱정을 태산처럼 하자 아들이 구원 투수로 나섰다. 나대신 연주를 하겠다는 것이다. 미안하기도 했지만 고맙기도 했다. 막상 아이가 연주를 하겠다고 무대에 세웠지만 나는 좌불안석이 되었다. 연주하는 동안 가슴이 졸여서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혹시나 ‘삑사리’가 날까 봐 손에 땀이 흥건했다. 틀린 곳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여러 곡을 부르고 나서 당당히 무대에서 내려왔다.
아이는 음을 듣는 청각이 뛰어났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률을 듣고 좋다 싶으면 컴퓨터로 다운로드하여서 바로 연습을 하곤 했다. 한참동안 연습에 몰두한 아이는 내게 들려줬다. 아이가 들려주는 연주는 어느 날, 저녁을 먹고 TV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주인공들의 이별 장면이 나왔다.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헤어져야 하는 장면이었다. 내용도 슬펐지만 음악이 너무나 애절했다.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익숙한 멜로디였다. 여학교 때 내가 즐겨 듣던 음악이었다. 새벽녘까지 음악에 빠져서 늦잠을 잤던 기억도 되살아났다. 하지만 제목이 퍼뜩 떠오르지 않았다. 같이 보고 있던 아이가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곡이라고 했다.
그 기억 때문이었을까. 갑자기 음악을 즐겨 듣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이는 내가 음악을 듣고 있으면 악기는 어떤 것인지 그 악기가 들려주는 고유의 리듬이 갖는 감성과 울림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설명했다. 아이의 음악적 감성이 나에게 옮겨졌다. 귀담아듣는 선율은 감동 그 자체였다. 아무 생각 없이 듣는 것과 해설을 들으면서 듣는 음악은 다른 느낌이었다.
단풍이 아주 곱게 물든 어느 해 가을이었다. 만학도로 대학을 다니면서 초등학교에서 독서지도를 한 적이 있었다. 시골 학교에서 처음 시도하는 독서 수업이어서 전교생이 다 몰려왔다. 수업 경험이 없었던 나는 당시 가르치는 노하우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수업 준비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틈을 내어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내용 전달을 위해서 공부하다 보니 늘 파김치가 되었다.
그날도 어깨가 처져 있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나면 기가 다 빠지는 것 같았다. 집에 돌아오면 긴장되었던 마음이 풀어져서 녹초가 되었다. 동시에 허기를 느꼈다. 가족을 위한 저녁식사는 뒤로 미루고 나의 허기부터 면하려고 평소엔 한 개도 다 먹지 못하는 라면을 두 개나 끓였다. 배가 고파서 기다릴 수가 없었다. 설익은 라면을 후후 불면서 입으로 가져갔다.
펄펄 끓는 라면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입 속에서 뱅뱅 돌았다. 뜨거운 라면에 입천장이 데고 나니 허한 감정과 배고픔의 허기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때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충혈된 나의 눈을 보고는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고 피아노 앞으로 다가갔다.
피아노의 맑은 울림이 방안에 가득 퍼졌다.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였다. 잔잔한 음악소리에 감동이 일었다. 아이가 치는 피아노 소리를 듣자니 순식간에 허기가 사라졌다. 세네 살 적 피우는 재롱을 보면서 평생 받을 보상을 다 받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아이는 또 한 번의 감동을 주었다.
한창 공부에 몰두해 있는 지금, 아이는 수능 준비생이지만 내가 조금만 힘든 모습을 보여도 음악의 소리로 나에게 재롱을 피운다. 피아노를 치던 녀석이 힐끗 돌아본다. 현관 앞에서 귀 기울이고 있던 어미를 의식한 모양이다. 아이와 눈이 마주치자 내 얼굴에 미소가 번져 난다.
까치발 기둥 / 엄옥례
1.오호! 쓰러지지 않을까. 사극 속 중전마마의 가채 쓴 모습이다. 상체의 중압감에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유구한 세월에 단청 색은 휘발되었어도 화려한 조각과 새처럼 날아갈 듯한 지붕은 건재함을 보여준다. ‘노악산 남장사露嶽山 南長寺’라고 문패를 단 일주문 앞에 섰다.
2.중압감이 느껴지는 일주문에 다가서서 요리조리 살펴본다. 여럿의 나무 기둥이 무거운 지붕을 이고 섰다. 아름드리 원기둥은 일주문의 양쪽을 받치고, 일주문의 사방으로는 원기둥의 반의반쯤 되는 보조 기둥이 지붕을 괴고 섰다. 지붕을 받치던 원기둥이 오랜 풍상으로 넘어질세라 보조 기둥을 덧대었나 보다. 마치 등짐을 나누며 오순도순 살아가는 가족의 모습이 그려진다.
3.그런데 대체 이것은 뭐람? 원기둥에 엉덩이를 찰싹 붙인 채 지붕을 받치고 섰다. 다른 기둥들은 크기만 다를 뿐 그저 곧고 둥글기만 한데, 이 기둥은 휘어진 모양 그대로 지붕을 괴고 있다. 바투 다가서 보니 장난기 가득한 용의 얼굴이 조각되었다. 이 별난 기둥은 보조 기둥의 하나인데 이름이 ‘까치발 기둥’이란다. 식구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던 막내가 촐랑대며 머릿속에서 까치발로 걸어 나온다.
4.그 옛날, 부모님은 연년생으로 낳은 자식 다섯 명을 키우고 있었다. 농사지으랴, 가축 키우랴, 여름이면 양잠하랴 손발이 쉴 새 없었기에 더 이상의 아이를 키울 여력이 없었다. 그렇게 짬을 낼 수 없는 와중에도 덜컥 여섯째를 만들어버렸다. 어머니는 도저히 키울 수 없다며 새 생명을 떼어낼 심산이었다.
5.중병이 나야 병원을 찾던 그 시절, 중절 수술은 생각지도 못하던 때였다. 어머니는 잉태를 알고부터 해가 지면 집 옆에 있던 무덤에 올라가서 구르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태아가 어머니를 꼭 붙잡고 있자, 다음에는 뒷산에 올라가서 굴렀다. 나무에 찔리고 돌부리에 멍들면서도 유산작전을 감행했지만, 뱃속의 명줄은 어머니와 떨어질까 봐 찰싹 붙어서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곧 삼신할머니의 뜻이라 여기며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나쁘게 마음먹었던 그간의 일이 걸려 바쁜 와중에도 수시로 따스한 손으로 불룩한 배를 쓰다듬었다.
6.어느 해 마당의 감나무 잎이 햇살을 튕겨낼 듯 빳빳해질 즈음, 막내가 우렁차게 울음보를 터트리며 세상에 나왔다. 언니는 안방에서 산파 할머니의 시중을 들었고, 나와 동생들은 창밖에서 숨죽이며 커튼 사이로 막내가 태어나는 신비로운 광경을 지켜보았다.
7.막내는 먼저 태어난 형제들에 비해 눈도, 입도 작고 얼굴은 길었다. 원기가 왕성해서 잠시도 궁둥이를 붙이고 있지 않아 가족은 이름 대신 ‘촐랑이’ 라고 불렀다. 누나, 형들이 식물의 성질이라면 막내는 동물의 기질에 가까웠다. 눈만 뜨면 동네에 나가 놀았다. 누구보다 먼저 기상해서 나가 놀다가 배가 고파야 집에 와서 밥을 챙겨 먹고, 또 나가서는 해가 져야 집에 돌아왔다. 귀가하는 막내의 주머니는 늘 구슬과 딱지로 불룩했다.
8.먼저 태어난 오 남매는 입이 짧아 간식거리가 있어도 어머니가 챙겨주지 않으면 손대지 않았다. 막내는 누나, 형들 몫까지도 자기 주머니에 넣어 두고 먹었다. 형들이 아끼는 옷이나 신발도 마음대로 입고, 신고 나갔다. 출타하여 돌아올 때는 옷과 신발이 더럽혀졌거나 찢긴 상태이기 일쑤였다. 어머니는 그런 막내의 머리통에 콩하고 소리가 나도록 꿀밤을 먹이면서 목청을 돋우며 “요누무 자슥, 별나기도 별나제” 하며 혀를 끌끌 차기도 했지만, 모성애와 지은 원죄가 있었기에 치마폭으로 감싸주곤 했다.
9.아버지는 당시에 농사도 지으면서 조그만 농기구 가게도 운영했다. 위의 다섯 자식은 고등학교부터는 대처로 보내서 공부시켰다. 그와 달리 막내는 고향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시키고 가업을 물려줄 요량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래 누나, 형들이 공부하고 있는 도시의 학교에 원서를 내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합격통지서를 보여 주었다.
10.개구쟁이로만 알았던 막내는 철이 들자 제 할 일을 알아서 척척 해냈다. 누나, 형들과 같이 지내면서 대학도 스스로 선택하고 졸업했다. 원하던 직장에도 뚫고 들어갔다. 직장에서 경험을 쌓은 뒤, 사업 길로 들어서서 뽀마드 바른 머리가 제법 어울리는 사장님이 되었다. 오래도록 공부하고 있는 형들을 뒷바라지하느라 등이 휘어지는 부모님에게 일찍부터 힘이 되었다. 가족 행사가 있는 날이면 평소에 자주 먹지 못하는 음식을 공수해 오기도 하고, 거금을 쾌척하기도 한다. 형제들은 스스로 풀지 못하는 일이 생길 때면 두루 경험 많은 막내를 찾곤 한다.
11.부모님이 은하수를 다리를 건넌 후, 기일이면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어머니 기일은 휴가철이어서 산소에서 제사를 모시고 고향에서 함께 휴가를 보낸다. 이번에도 막내는 문어와 장어, 쇠고기를 바리바리 싸와서 펼쳐놓는다. 누나, 형들은 기특한 막내의 등을 두드려준다.
12.돌아보면 식구 모두 가족을 위해 나름대로 용을 썼다. 시골 살림치고는 먹고 사는 일이 어렵지 않았으나, 우리들의 교육비가 부모님의 등골을 휘게 했다. 그런 부모님의 등짐을 나누려고 언니는 결혼을 하고도 공부하러 온 동생들을 보살폈고, 맏동생은 혼자 힘으로 바다 건너까지 가서 공부했다. 그 아래 여동생은 내가 결혼하는 바람에 직장에 다니면서 남아있는 형제들의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중간에 낀 남동생도 꿈을 이루어 우리 집을 빛내기 위해 오랫동안 공부하느라 애썼다.
13.이제, 막내의 머리카락도 희끗희끗하다. 형제들은 늙어버린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울가망한 기분에 젖어 든다. 우리가 세상을 떠난 뒤, 다음 세대에도, 그다음 세대에도 누군가는 둥근 기둥이 되고, 누군가는 까치발 기둥이 되어 오순도순 살아가기를 바라는, 소망의 단지를 끌어안은 모습이다.
부처가 되다 / 공도현
1 그동안 아버지는 종교를 갖지 않았다. 할머니와 어머니 그러니 아버지의 어머니와 아내가 절에 출입하셨고 며느리인 아내마저 불교가 모태신앙이다. 평생을 절에 다니는 여자들 속에서 살았지만 아버지는 불자가 되지 않으셨다.
2 지금도 성균관 유도회 대구본부 자문위원회 회장이라는 대구 유림의 최고 어른 자리에 있고, 곡부 공씨 종친회장까지 지내며 공자님 그늘에서 평생을 지내다 보니 내세를 믿는 종교를 가지기가 머뭇거려졌다. 작년에 다니는 문학회에 한 분 계시던 연장자가 돌아가시어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모양새가 되고 보니 아버지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3 지난 동짓날 어머니를 따라 청*사에 다녀오셨다. 청*사는 절이 생기자 그때부터 어머니가 다니시던 절이다. 햇수로는 50여 년이 된 말 그대로 우리 절이었다. 아버지는 묫자리를 보는 마음으로 절을 한 바퀴 둘러보셨다. 그러기를 십 분이 지나 삼십 분이 흐르자 말없이 어머니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4 어머니가 미리 주지스님에게 남편이 절에 다니려 하니 좋은 말씀 좀 부탁한다고 말했음에도 중요한 분들 면담하느라 순서가 밀린 꼴이 되었다. 구순 노인이 찬바람 속에서 삼십 분 넘게 서있었으니 서운하다 못해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5 평생을 비교적 특별 대접받고 살아온 아버지로서는 청*사의 처사에 몹시 서운해하셨다. 물론 아버지의 꼰대의식도 문제였지만 절의 응대가 매끄럽지 못한건 사실이었다. 처음 허허벌판에 절이 지어졌을 때만 해도 교장선생님 사모님이라고 주지스님이 버선발로 나오곤 했는데 주위가 상전벽해되어 대구의 강남이 되자 배가 불러서인지 퇴직사모님은 안전에도 없었다.
6 우리는 아버지께 처가와 가까운 약수암을 권했다. 해인사의 말사로 처가 고인들의 영령이 모셔져 있는 절이다. 나도 장모님 모시고 해마다 몇 번씩 찾았고, 돌아가셨을 때는 그 절에서 49제를 지냈다. 가야산 해인사라는 명산 큰절의 곁에 있고 큰스님이 처가와 인연이 각별하여 남 같이 대하지는 않을 거라는 말로 부모님의 반승낙을 받았다.
7 잔설이 남아 있고, 일기예보에서 몇 년 만에 가장 추운 날이라고 외출을 자제하라는 날에 부모님과 우리 부부 그렇게 네 사람이 약수암을 찾았다. 날을 미룰까도 생각했지만 주말이 아니면 시간을 내기 힘들고 다음 주에는 아버지에게 다른 약속이 있었다. 걱정했는데 두 분이 눈에 굴러도 될 만큼 옷을 겹겹이 입으신 모습에 안심이 되었다.
8 해인사 톨게이트를 벗어나자 처가동네가 보였다. 스치듯 지나가는 사이에 아내는 부모님께 야로의 이곳저곳을 설명했다. 가야산 산문에 이르자 높다란 소나무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해인사를 바로 앞에 두고 오른쪽 좁은 길로 접어들면 양지바른 곳에 약수암이 자리하고 있다. 차에서 내리자 매섭던 바람도 잦아들고 햇볕이 따사로이 비추어 마치 딴 세상에 온 듯 평화로웠다.
9 절에 발을 들이자 포근한 경내가 우리를 반겼다. 대웅전에서 어른들은 삼배를 하고 우리는 백팔배를 올렸다. 우리를 기다리는 동안 두 분은 합장을 하고 부처님께 기도를 드렸다. 대웅전을 나와 큰스님이 기다리는 승방으로 갔다. 스님은 차를 끓여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차가 한순배 돌자 스님은 아버지에게 부처님께 무엇을 빌었냐고 물었다.
10 아버지는 잠시 머뭇거리다 "아내와 애들에게 고생시키지 않고 죽도록 해주시고, 죽을 때까지 요양원 같은 데 안 가고 집에서 지내도록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이제 살아도 몇 년 남았겠습니까. 살 동안이라도 답답할 때마다 바람 쐬러 갈 수 있게 해 주시고, 철마다 제철 음식 맛보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이절에 오니까 마음이 참 편안해집니다. 내집처럼 자주 들리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11 가만히 듣던 스님이 욕심이 과하다며 핀잔을 주었다. 그러면서 처사님의 부처님은 어지시니 소원을 들어주실 겁니다며 덕담을 하였다. 그 순간 스님과 눈이 마주쳤다. 지긋이 바라보며 부처가 되겠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부처님께 빌었지만 그 소원을 들어줄 사람은 부처님도 스님도 아닌 바로 나였다. 스님은 나의 대답을 재촉하였다. 나는 그러겠노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12 나는 부처가 되었다. 득도하지 않고도 부처가 될 수 있었다. 부처님께 비는 간곡한 소원을 들어준다면 부처가 아니겠는가. 팔자에도 없었으나 해인사 약수암 큰스님의 뜻으로 부처가 되었다. 아직 쌓은 내공이 미약하여 부모님 모시는 일만 하겠으니 중생들은 기다리지 말고 다른 부처를 찾길 바란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 서소희
1. 이번에는 보랏빛의 리시안샤스군요. 어제 꽃병이 사라졌기에 걱정을 했답니다. 혹시 이제부터는 엘리베이터 앞에 있던 꽃을 볼 수 없는 것은 아닐까 하고요. 어제가 지나고 오늘 꽃병이 다시 나타났네요. 아, 역시, 짧은 감탄사가 튀어 나오더군요.
2. 처음 꽃을 보던 때가 생각나요. 어느 날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향기가 났어요. 자연스레 누가 있나 싶어 뒤를 돌아봤지요. 아무도 없었어요. 방향제가 아닐까 싶어 천정벽도 봤답니다. 물론 방향제도 아니었어요. 자연스레 시선이 밑으로 흘렀지요.
3. 모퉁이 구석자리, 하얀 꽃병에 꽂혀 있더군요. 설마 저 작은 묶음의 꽃에서? 허리를 깊이 숙이며 코를 가까이 가져가 봤어요. 아, 그 꽃의 향기더군요. 그 순간 나는 마법에 걸린 것처럼 ‘꽃향기를 맡으면 힘이 솟는 꼬마자동차’라는 만화 노래가사를 흥을 거렸답니다.
4. 꽃향기는 이유 없이 나를 기분 좋게 만들더군요. 아마 나를 비롯해 이곳을 지나다니는 대부분의 사람이 행복했을 겁니다. 인공적이지 않는 향기는 그런 마법을 지녔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예쁜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알기에 당신은 이렇게 꽃을 놓아두는 것 아니겠어요.
5. 언제부터 꽃이 놓여있었을까요.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있는 듯, 없는 듯, 이곳이 원래부터 자신의 자리라는 듯 자연스레 놓여 있었지요. 꽃묶음은 크지는 않았어요. 묶음이라기보다 두서너 개의 가지였어요. 아마 꽃꽂이를 잘하는 분이 아닐까 싶어요. 왜냐하면 그 모양새가 깔끔했고 주위 벽과 잘 어울렸으니까요.
6. 무엇보다 꽃은 우리가 쉽게 보는 꽃이 아니었답니다. 내가 아는 꽃은 라일락, 진달래, 목련, 백일홍, 이질풀, 장구나물, 쑥부쟁이, 개망초······. 그러고 보니 나도 많은 꽃을 알고 있네요. 당신이 놓아두는 것은 이런 꽃이 아니랍니다. 라넌큘러스, 마트리카리아, 델피늄, 루피너스 등등 이름도 어렵더군요. 내가 아는 꽃이 영희, 경자, 정숙이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면 당신이 놓아두는 꽃은 엘리자베스, 케이트, 멜리사처럼 혀가 꼬이는 이름이에요. 꽃 이름을 어떻게 아냐구요? 컴퓨터를 뒤져보거나 꽃을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았답니다.
7. 기억을 더듬어 보니 처음에는 작은 화분을 갖다 놓았던 것이 생각났어요. 맞아요. 그때는 엘리베이터 앞이 아니라 입구 현관문 밖이었지요. 세 개의 주먹만 한 화분에 작은 꽃들이 피어있더군요. 그때는 무심히 흘려 봤답니다.
8. 언제인지 모르겠으나 작은 화분이 사라지고 엘리베이터 앞 구석에 꽃병이 놓였던 것이었죠. 하루, 이틀 혹은 두어 달 그렇게 놓여있겠거니 생각했지요. 꽃은 시들기 전에 바뀌더군요. 그러다 말겠거니 여겼답니다.
9. 벌써 사 년입니다. 내가 이 아파트에 이사 오면서 부터 보아왔으니 말입니다. 어찌 이렇게 한결 같은 마음으로 꽃을 놓아두는가요. 때로는 귀찮기도 할 텐데, 가끔은 당신 곁에만 놓아두고 혼자서 즐겨도 충분할 텐데요. 무엇보다 꽃값이 아까울 법도 한데 말입니다.
10. 사람은 누구나 변덕스런 마음이 있어요. 나부터도 처음에는 좋은 마음으로 시작하지만 하다보면 게을러지고 귀찮아지기 마련이니까요. 누군가를 위해서 한번쯤, 혹은 두서너 달 꽃을 놓아 둘 수는 있지요. 그 마음이 사 년 동안 변하지 않기는 쉽지 않답니다. 어쩌면 당신은 내가 이사 오기 전부터 현관입구에 꽃을 놓아두었는지도 모릅니다.
11. 처음에는 아주 작은 것, 사소한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긴 시간을 보면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변하지 않는 그 마음은 용기와 부지런함과 타인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당신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까요. 타인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옛 성인들은 묘심妙心 혹은 지심至心, 심심深心이라고 했지요. 그 묘하고 깊은 마음을 닮아보고 싶습니다.
12. 나는 꽃을 사는 것에 돈을 쓰지 않아요. 요즘 꽃값도 만만치 않답니다. 아니 예전부터 꽃값은 내게 만만치 않았어요. 꽃을 돈 주고 사는 것이 사치처럼 여겨진답니다. 그렇다고 꽃을 싫어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무척 좋아합니다. 누가 꽃을 싫어할 수 있을까요. 단지 꽃값이 싸지 않아서 쉽게 살 수 있는 형편이 못될 뿐입니다.
13. 만약 누군가가 돈을 주며 나를 위해 꽃을 사라고 하면 ‘그 돈으로 다른 것을 사면 안 되겠느냐’고 묻을 겁니다. 그만큼 꽃을 사는 것은 우선순위에서 밀린답니다. 그 누군가가 ‘꼭 당신을 위해 꽃을 사라’고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나를 위해 꽃을 살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 꽃을 보며 행복해 할 겁니다. 당신이 그 누군가가 아닐까요. 당신은 나에게 매일 꽃을 보여주니까요.
14. 삶이란 사람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지요.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람을 만납니다. 하지만 근래에 사람을 만나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사람이 사람을 피하는 기이한 현상도 생겼답니다. 특히나 아파트라는 구조는 옆집 사람 얼굴보기가 쉽지 않아요. 이웃과 단절된 아파트에서 당신의 작은 꽃묶음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어요.
15. 오며 가며 엘리베이터 앞을 지날 때는 마음이 따스해집니다. 당신이 놓아둔 꽃이 보는 사람을 따스하게 만들어요. 몇 개의 꽃송이로 공간은 충분히 밝아지고 아름다워집니다. 그리고 나도 따뜻함을 풍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따듯한 사람이 되는 것 아닐까요. 불가에는 이런 게송이 있답니다.
16.성 안 내는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 마디 미묘한 향이로구나
17. 나도 향기가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 첫 걸음이 ‘성 안내는 얼굴’ 이 아닐까요.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쉽지 않은 일이에요. 언제 내 속에 있는 뾰족한 내가 튀어 나올지 모르니까요. 그래서 혼자 웃는 연습을 해 본답니다. 연습뿐만 아니라 실제로 사람과의 만남에서도 자주 웃어야겠어요. 대화에서도 날카로운 말을 던지지 않으려 노력해야겠지요. 있는 듯, 없는 듯, 당신이 구석에 놓아둔 꽃처럼, 눈여겨봤을 때 비로소 환해지고 따스함을 풍기는 사람으로 그렇게 살고 싶답니다. 제발 이 마음이 변치 않았으면 좋겠어요.
18. 엘리베이터 앞에 서면 항상 당신이 궁금합니다. 궁금하지만 당신을 찾아보지는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무엇이든지 신비에 쌓여있으면 더 많은 상상을 하게 하게 만드니까요. 그냥 친절한 ‘묘심’으로 기억하고 싶어요. 그래요. ‘묘심’이라는 이름이 딱 좋겠네요. 서로를 모른 채 이 정도의 거리에서 당신에게 고마워할 겁니다. 그래도 여전히 궁금하네요. 당신은 누구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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