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년은 혜은이의 해였습니다. 신데렐라라는 말보다 혜은이를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요? 섹소폰을 멋지게 부르던 길옥윤(패티 김과 이혼한 뒤, 길옥윤은 패티 김에게75년 이혼 뒤 마지막으로 <후회>(윤정희 주연의 동명영화도 만들어집니다. 역시 고모를 따라 동네의 동시상영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습니다. 공항이 나오고, 사랑하는 부부가 서로 헤어져 아내(윤정희)가 파리로 떠나고, 뭐 그런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라는 노래를 지어주고(멋지지 않습니까?이혼한 전 아내에게 자신들의 심경을 담은 노래를 지어주는 옛남편, 그리고 또 이를 기꺼이 받아 부르는 옛아내. 예전 사람들은 이처럼 그 나름의 멋과 풍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떠납니다.
길옥윤이 패티 김 이후 다시 발견한 신인이 혜은이였습니다. 원래 사랑을 하다 헤어지면 그 다음번에는 이전에 만난 사람과 정반대의 사람을 만나는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 길옥윤도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혜은이는 패티 김과는 정반대의 이미지였습니다. 그러나 혜은이는 70년대말 컬러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직전, 이른바 비디오 스타의 `맹아'와도 같은 구실을 한 가수이기도 합니다. 길옥윤은 어쩌면 그 나름대로 시대를 읽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길옥윤에게 발탁된 혜은이는 76년 <당신은 모르실거야>(얼마전 핑클이 리메이크한 그 노래)로 데뷔합니다. 그리고 77년 <진짜진짜 좋아해>가 두번째 히트곡입니다. 이 노래는 교복입은 갈래머리 임예진 주연의 청소년물 동명영화의 주제가로 쓰입니다. 76년 어느날, 혜은이를 텔레비전으로 처음 봤던 날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저는 `야, 저렇게 예쁜 누나 처음 봤다'며 멍하니 텔레비전을 쳐다봤습니다. 70년대말을 강타한 짧은 단발머리인 `혜은이 머리'를 유행시킨 시점입니다. 청자켓과 청바지를 입은 혜은이는 당시 흑백텔레비전으로 보기에도 피부에 적지않은 트러블이 보이는 등 어린 제 눈에도 `피부가 안 좋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지만 동글동글하지만(이때만 해도 요즘같은 갸름한 얼굴보다는 동그스름한 얼굴이 더 각광받았습니다) 갸름한 얼굴선과 약간 밑으로 눈꼬리가 처져 웃을 때는 눈이 반달 모양이 되는(웃는 모습이 지금의 탤런트 서민경과 비슷한 것 같기도) 예쁜 얼굴이 대중들에게 크게 어필했습니다.
또 당시만 해도 가수라면 노래가 최우선이라는 점 때문에 워낙 가창력 있는가수들이 쟁쟁했기에 `혜은이는 노래 못 부른다'는 꼬리표가 따라다녔지만,저는 미성이 빼어난 혜은이가 자기 나름의 영역에서는 나름대로 일가를 이룰정도는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혜은이를 볼 때마다 올리비아 뉴튼존의 명성에 가려 빼어난 외모와 가창력에도 불구하고 빛이 바랜 시나 이스턴이 연상됩니다.
혜은이는 77년 <당신만을 사랑해>라는 대곡을 발표하면서 인기가 최고조에 오릅니다. 당시 서울가요제라는 국내 가수들만 참가하는 무대가 있었는데,여기에서 혜은이는 당시 여자가수계의 지존이었던 이성애를 누르고 대상을차지합니다. 새로운 인물의 탄생 순간이었습니다. 소매없는 흰 드레스(흰색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흑백 텔레비전에는 그렇게 비쳤습니다)를 입은혜은이가 너무 좋아 마치 작은 새마냥 펄쩍펄쩍 뛰어오르고, 백발이 성성한 길옥윤이 두 팔을 한껏 벌리고 혜은이를 끌어안고 뺨에 뽀뽀를 하고. 그리고 길옥윤이 두 눈을 감고 색소폰을 불고, 그 옆에서 물기젖은 검은 눈망울의 혜은이가 노래를 시작하는 장면은 마치 <서편제>에서 북채를 잡은 소리꾼 유봉과 눈먼 딸 송화에 비유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예선격인 이 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혜은이는 도쿄 가요제에 이 곡을 갖고 나갑니다. 하지만 수상에는 실패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국뒤 많은 인터뷰를 하는 등 그의 인기에는 흠집을 남기지 않을 정도로 그는 최고조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당시 도쿄가요제 대상곡은 영국의 3인조 그룹(남1, 여2/그룹명은 기억나지 않습니다)의 였습니다.
혜은이는 귀국 후 이곡을 번안해 또 한차례 인기를 끌었습니다.77년 가수왕을 탈 때의 혜은이는 지금까지 36년 가수왕 수상자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모습을 남겼습니다. 당시 초등학생인 저까지도 누구나 이번 가수왕은 혜은이라는 것을 예상했는데도, 혜은이는 가수왕이 발표되자 눈물을 펑펑쏟으며(거의 통곡에 가깝게) `엄마'라고 외치고 엉엉 울었습니다.
본명 김성주라는 제주도 촌가시내가 지나온 짧은 삶이 주마등처럼 떠올랐겠죠.
혜은이는 78년 들어서는 <감수광>, <뛰뛰빵빵>(혜은이의 노래로 알려져 있지만 이 노래는 원래 60년대 후반 다른 가수가 부른 노래를 혜은이가 리메이크한 것입니다) 등으로 인기를 이어가지만 77년의 인기가 워낙 강렬했던 탓에수그러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늘 인기 뒤에 따라붙는 온갖 스캔들이 혜은이를 집요하게 따라다녔죠. 혜은이는 이후 이렇게 고백한 적 있습니다. `아, 이젠 정말 끝장이구나'라고 생각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그러나 그때마다 혜은이는 거기까지 오르느라 감내한 지난 세월을 떠올리며`내가 여기에서 주저앉으면 사람들은 정말 내가 그러했다고 생각할 것'이라며 다시 용기를 내고, 그럴 때일수록 더 방송에 나오고 활동하면서 그런 스캔들에 꿋꿋이 싸워나갔습니다. 78년의 주춤했던 인기도 그런 스캔들 영향이 컸다고 봅니다. 혜은이는 한때 거식증 비슷한 증세로 영양실조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간 적도 있습니다. 79년 혜은이는 조금 있다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79년 혜은이는 또한번 가수왕을 차지합니다. 78년까지는 10대 가수 가요제는 매년 10월말쯤에 열렸습니다. 그래서 11~12월 히트곡을 가진 사람은 상대적으로 손해를 보게 됐죠. 김만중의 <모모>, 들고양이의 <마음 약해서> 등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지만 이들이 10대 가수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도 이때문입니다. 그런데 79년 10대 가수 가요제(10월30일)를 불과 몇 일 앞두고, 10.26 사태가 터집니다. 당시 오락방송 모두 금지, 스포츠행사 모두 금지(고교야구 대제전 - 고교야구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이때, 대학과 실업에 진출한 선수들이 모교의 유니폼을 다시 입고 경기를 벌이는 대회를 79년에 벌이려고 했습니다만, 무산됐죠. 개인적으로 이때 얼마나 아쉬웠는지. 나중에 이 부분을 다시 이야기할기회가 있으면 하겠습니다) 조처가 떨어집니다. 10대 가수 가요제도 당연히 무기한 연기됐습니다. 그리고 10대 가수 가요제는 이때부터 12월31일로 정해집니다. 저는 당시 10.26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79년 가수왕은 혹 조경수가 차지하지 않았을까도 생각해봅니다. 조경수는 당시 <행복이란>, (빌리지 피플의 팝송을 번안) 등으로 데뷔 이후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습니다. 가요인기 순위에서 두 곡이 1, 2위를 차지하는 주가 계속됐습니다. 당시 사회자는 `남진, 나훈아 이후 이런 적은 처음이다'라고 했습니다. 조경수는 80년에도 번안곡 <징기즈칸>을 내놓았는데, 이때 논란이 벌어집니다. 우리나라를 침공한 징기즈칸을 위인이라고 묘사하며 노래할 수 있느냐는것이 하나였고, 또 하나는 언제까지 번안곡이 우리 가요계를 휩쓸게 할거냐는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방송사는 조경수 이후부터 번안곡은 가요순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조처를 취했습니다.
다시 혜은이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혜은이는 79년 3집(?, 맞는 것 같습니다)에서 <제3한강교>, <새벽비> 등을 크게 히트시킵니다. 특히 <제3한강교>는 청소년층으로부터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혜은이는 이 시기 예전보다 더 발랄해졌습니다. 스캔들의 상처를 뿌리친 덕에 더 강건해졌구요. 표정도 더 밝아졌습니다. <제3한강교>는 자칫하면 금지곡이 될 뻔도 했습니다. `어제 처음 만나서 사랑을 하고 우리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라는 부분 때문이었습니다. 달라진 성모랄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는데 심의위원들이 받아들이긴 힘들었나 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우리들은 맹세를 하였습니다'로 바꿔 간신히 심의를 통과했습니다. <제3한강교>의 압권은 `뚜루뚜룻뚜, 하~' 하는 일종의 장식구 부분이었는데, 사실 멜로디도 평범하고, 음계도 이전의 4분의 3박자 트로트에 팝적인 부분을 가미해 4분의 4박자로 바꾼 정도의 이 노래를 당시 신세대(당시에는 신세대라는 단어는 없었습니다) 노래처럼 보이게 만든 것은 멜로디가 아니라 리듬 때문이었습니다. 80년대 이후 가요의 흐름이 과거의 멜로디 위주에서 리듬 위주로 바뀌는 시대였습니다. 각 성부(聲部)가 나름대로 엄격한 규칙성을 유지하는 것에 주안점을 줬던 전통가요의 그 나름의 대위법을 무시하고, 한 박자 쉼표로부터 노래를 시작하는 당시로선 파격적 리듬을 도입하고, 음을 위에서 콕콕 찍어서 부르는 클래시칼한 가요가 아니라 음을 아래에서 끌어올리는 듯한 파격적 리듬이 <제3한강교>를 이전의 가요와 다른 색깔을 띄게 만든 것입니다.(구구한 설명이 길었습니다)
<새벽비>도 <제3한강교>의 연장선 같은 노래입니다. 79년 가수왕을 차지할 때의 혜은이는 77년에 비해 훨씬 세련됐지만, 이때도 혜은이는 펑펑 울었습니다. 77년 23살, 79년 25살. 지금 생각하면 사실 이때의 혜은이도 지금의 장나라와 비슷한 연령인 것 같지만 질곡의 세월을 산 탓에 장나라의 얼굴이 투명한 천진난만함으로 가득찼다면, 혜은이는 노래의 외양은 장나라와 비슷하지만 일종의 `한'(恨) 같은 것이 언듯언듯 비춰보였습니다. 그 `한'이 경쾌한 멜로디에 적절히 녹아들어 상대적으로 장나라보다는더 깊은 맛을 느끼게 만든 것 같습니다.
글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새해 인사를 이처럼 가요계로 시작해도 괜찮나 모르겠네요. 저의 유년시절 가수왕 편람은 여기서 일단 끝맺고, 80년 조용필 시대의 본격적 등장으로 시작되는 저의 청소년 시절 가수왕 편람은 다음 편에서 소개하겠습니다.
첫댓글 글을 읽다보니 확실하게 알고 있는 부분이 더 많네요..근데 뛰뛰빵빵이 리메이크 곡이란건 처음들어보고요(리메이크곡 아닙니다.) 제3한강교가 3집?--ㅋ 7집인데.. 그렇지만 분석은 잘 한 듯합니다.
치밀한 분석자료이네요 아무리 혜은이님 박사인 우리들도 이렇게 적나라한분석 참 힘들것같은디 루크님 귀한자료 정말 잘보았습니다 미처 모르는 부분도 있네여 권태호님이 뉘신지 참 많이 알고 계시네요
잘 읽었습니다.. 그시절이 절로 떠오르는 군요. 하지만 혜은이씨의 본명은 김성주가 아니라 김승주죠.. 아마도 오타였겠죠~~
길옥윤이 패티김과 이혼 후 지어준 노래는 후회가 아니고 '이별'이지요.
길옥윤씨가 혜은이씨를 처음 만났을 때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모르실거야가 1년만에 히트되자 (길옥윤씨가 곡만 보내와 두분이 만나기 전에 이미 취입했다고 합니다) 길옥윤씨가 다시 귀국하게 되고 같이 활동하게 된 거지요.
처음에는 길선생님이 혜은이씨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헤은이는 노래 못한다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는 것은 잘못 안 것 아닐까요?
ㅎㅎ 저도 yang 님의 이야기 들은적이 있는데...다 지나간 추억이네요...그립네요...숏카트 바람 머리 언니...^^
아~ 그리워라...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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