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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타 기쓰키1 - 나카쓰에서 후쿠자와를 보고 기쓰키에 도착해 윤봉길 의사를 보다!
11월 6일 아침에 오이타현 나카쓰 中津 남쪽 신야바케이 深耶馬 단풍을 구경한 후에 일본 개화기의
선각자 후쿠자와 유키치 의 주택을 보고 나카쓰성 을 구경하는데.... 후쿠자와 유키치
福澤諭吉(복택유길)는 일본의 선각자로 게이오 대학의 설립자이며 만엔권 지폐 에나오는 인물입니다.
그는 난학과 영어를 독학해서는 미국과 유럽을 3차례 방문 하여 서구문명을 접고는 영일사전 을 편찬했으며
서구문명을 소개했으니 1867년 집필한 “서양사정 외편” 에서 시빌리제이션 (civilization) 이라는
개념을 도입 했으니 “문명개화” 로 번역(造語) 했는데 진보, 발전을 향한 보편적 활동이라는 의미라 했습니다.
시빌리제이션 은 시민(civilis) 에서 파생된 것으로 성 안에 사는 사람, 시민권을 가진 사람 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 이며, 또 영어의 컬처(culture) 를 문화(文化) 로 번역하였고 요시다 쇼인,
이노우에 가오루 등과 교류하며 일본의 개항, 개화에 대한 신념을 갖고 적극 주장, 설파 하였습니다.
서구의 liberal 혹은 liberalism 이라는 단어 를 억압되지 않는것, 자기 스스로 권리를 향유하고 누리는 것
으로 보아 “自由(자유) ” 라는 단어로 번역(조어) 했는데,이 한자어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불교 용어 를
참고해서 만들었으니 엄격한 사무라이 사회에 대해 "천황(일왕) 아래에서의 만인의 평등론" 을 주장합니다.
후쿠자와는 회계학의 복식부기 를 일본에 최초로 소개하였고 또한 일본에 근대 보험 제도를 소개한 사람도
후쿠자와 였는데, 1875에 그가 지은 “문명의 개략” 책이 조선에 도입되자...... 1872~3년 박영효,
김옥균, 서재필, 유길준(兪吉濬), 윤치호(尹致昊), 홍영식, 서굉범 등이 그를 찾아가 근대화에 대해 배웁니다.
1882년 7월 23일 임오군란 이 발발하자 후쿠자와는 요코하마 정금 은행에서 17만원의 대출금
을 얻도록 주선해 조선측이 배상금 을 납부할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며 1883년
박영효 에게 시사신보 직원인 이노우에 를 대동해 귀국한 이듬해에 조선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 를 발간하도록 해주었는데 후쿠자와는 윤전기와 활자, 잉크에 종이 까지 주선해 줍니다!
후쿠자와 는 1884년 갑신정변의 기획 및 설계자 로 그가 훈수한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개화파를 처단한 조선
조정을 비난하면서 3일 동안 식음을 전폐 하며 대성통곡했으며 개화파가 망명해 오자 거처를 제공했고
김옥균은 그의 집에서 6개월 간 살았는데 그의 하녀 마츠노 나카를 주니 그녀는 김옥균의 딸을 낳았습니다.
나카쓰역 으로 가서 오이타현 남쪽 바닷가에 오래된 고성과 고풍스러운 무사 저택 거리가 잘 보존되어 있다는
기쓰키 杵築駅 로 가는 기차표를 끊는데 도큐(특급) 소닉 은 기차 요금이 910엔에 특급료 600엔을 합쳐
1인당 1,510엔을 받으니 14시 11분에 출발해 왼쪽으로 혼슈와 규슈를 가르는 해협을 끼고 남쪽으로 달립니다.
오늘 소닉 열차는 의자 밑의 페달을 밟고 180도 좌석의 방향 을 돌릴수 있는데 윗부분에 소 뿔 처럼 생긴
손잡이가 있어 안전할뿐더러 편리한데, 한시간만인 15시 11분에 기쓰키역 (杵築駅) 에 도착해 창구에
앉아있는 역무원 에게 기쓰키성 가는 방법 을 물으니 버스와 택시 중에 이용할수 있다고 말하길래
돌아서니... 스미마셍! 이라고 외치면서 캐비넷 에서 한글 안내지도 를 꺼내 밖으로 황급히 달려 나옵니다?
버스는 오래 기다려야 하기로 택시를 타고는 기쓰키조 杵築城 (기쓰키성) 까지 가는데 택시는
시내로 들어서니 거리에 기모노 차림의 처녀 들이 사진을 찍느라고 난리도 아닌데....
저 비단으로 지은 기모노 는 너무나도 화려해서 보통은 수백만원 이고 고급은 수천만원 을
호가 한다는데, 처녀들이 무리지어 입으니 참 볼만한데 옷을 빌려주는 집 이 있는 모양 입니다.
그러고는 기쓰키성 에 당도했는데 기사는 차를 세우지 않고 꼬불꼬불한 언덕길을 굽이굽이
올라가서는 천수각 바로 앞까지 가서는 멈추니 3천엔이라! 여기 기쓰키는 모리에
만을 내려다 보는 불교 신앙 의 마을이자 언덕길의 성시 마을 로 산책하기 좋은 동네 입니다.
무사 저택 과 상가 거리를 걸어 올라가면 3만 2천석 마쓰다이라 松平 가문의 영화 가 느껴진다는데 일본
의 성들은 한결같이 도시 내에 위치 하지만 전란으로 날을 새는지라 하나같이 이처럼 높은 언덕
위에 세워지는게 불문율로 "해자" 를 깊게 파서 물을 채우고는..... 적군이 성문 을 통과해도 “ㄷ"
자로 된 꼬불꼬불한 통로 를 오르도록 되어있으니 수비군은 3면에서 침입자를 사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 부부는 계단을 올라 500엔을 내고 천수각 안으로 들어가는데 여기 기쓰키성(杵築城 )
텐슈가쿠(천수각) 도 일본의 여느 성 처럼 5층 으로 되어 있는데, 기쓰키 요리나오
공이 1394년에 축성한 성으로 이후 주인이 바뀌어 도쿠가와씨의 방계인 마쓰다이라
(松平, 도쿠가와씨의 옛 성씨) 가문의 거성이 되었는데..... 1970년에 개축하였다고 합니다.
성은 해변에 지어진 탓으로 3면이 개펄 이고 출입구는 한곳 뿐이니 옛날에 방어 하기에는 그저 그만
이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천수각의 엄청 가파른 층계 를 올라가니 화려한 갑옷과 투구가 진열
되어 있으니 일본이 무사, 사무라이들의 나라 라는걸 느끼는데 그외에도 벽에는 산수화 같은
그림들이 걸려 있으며..... 그 옆에는 일본 각지의 유명한 성들의 천수각 사진이 걸려 있는걸 봅니다.
성에 걸린 그림 중에는 매 사냥 에 이용했던 매의 사진이 참으로 섬세하네요! 매사냥 은 우리나라
에도 성행했지만 유라시아 초원 유목민족의 전통 이기도 한데.... 그런데 ? 어, 이게 누구야...
천만 뜻밖에도 이 외진 곳 에서 "윤봉길 의사" 를 만납니다? 아니 윤봉길 의사가 왜 여기에???
“上海 の 天長節 祝賀式場 爆彈 が 投げられる 直前である ”상해 천장절 축하식장 폭탄을 투척
하기 직전 모습“ 사진인데......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가 일본 도쿄에서 일왕
(천황) 에게 폭탄 을 던져 살해하려다가 실패하자 상하이 일대는 복잡한 정세 에 빠지게 됩니다.
쇼와 일왕(천황) 생일인 天長節(천장절) 기념식이 열리던 소화 7년인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 가 김구 선생의 지시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였으니....
그 쇼와 일왕(천황)은 64년간이나 재위해서 죽었는데, 4월 29일을 휴일에서 빼면 섭섭
하다고 해서 일본에서는 지금도 미도리노히(녹색의 날) 라고 식목일로 기념 하고 있습니다.
왕웅(김홍일)이 만들어 폭발시험까지 한 도시락 폭탄을 투척해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대장 과
상하이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 등을 즉사 시키고 제 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에다가 주중 공사 시게미쓰 등에게 중상 을 입혔던 일대 거사 였습니다. 그 직전에 일본군은
"상하이 사변" 을 일으켜서는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대장 은 중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붙잡혀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은후 일본으로 호송되어 총살되었으니
동해(일본해)의 가네자와시 노다야마 에 암장되었는데, 궂이 멀리 가네자와에 까지 끌려가서
총살된 것은 중상을 입은 우에다 중장의 9사단 주둔지가 가네자와 였기 때문이라? 장개석 이
" 중국의 100만 대군 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한국의 한 의사 가 능히 하다니 장하다" 라고 할 정도로 이
의거는 이봉창 의거와 더불어 중 측의 한국 독립 운동에 대한 인식 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댓가를 치뤄야 했으니, 윤봉길의사 폭탄 투척후 일본경찰의 추격을 피해 임시정부는 1932년
상하이에서 도주 하는데 5월 항저우 - 가흥 - 전장 - 장사 - 광저우 - 류저우 를 거쳐 7년 후에
1939년 3월 장개석의 도움으로 중경 에 정착해 한숨을 돌리고 이듬해 광복군을 창설했으나
재정이 열악하니 광복군은 끝내 일본군과 단 한차례의 전투 도 치르지도 못하고 해방을 맞이합니다!
그러고는 그 다음 사진을 보는데, 전함 에 줄지어 선 미군 앞에 연미복 차림 의
동양인들과 일본군 장교들? 저건 틀림없이 1945년 9월 2일 일본군이
미군등 연합군에게 항복 하기 위해서 전함 미조리함 에 도착하는 그 모습 입니다!
항복식 장소 가 육상이 아니고 하필이면 여기 바다에 떠 있는 협소한 미조리 함상
이냐 하면.... 당시 트루먼 대통령의 고향이 미조리주 라마 이고 또
맥아더 원수의 고향 이 아칸소주 리틀록의 미조리 마을 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연합군은 맥아더 원수 외에 영국, 프랑스, 네델란드,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중국과 소련 대표가
서명했고 일본 을 대표해서는 외상 시게미쓰 마모루 와 육군 참모총장 우메스 미치로 가 항복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 되었으며 그후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연합국 48개국 과 일본국이 참가해 전쟁을 마무리 했는데..... 한국은 태평양전쟁(1941년 12월
하와이 기습 ~1945년 8월 15일) 에서 일본과 교전한 적이 없는지라 연합국이 아니어서 참가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모자를 쓰고 연미복 차림에 지팡이 를 짚고 서있는 저 일본 외상 시게미쓰 마모루 (重光葵) 는
다리가 많이 불편한 것 같은데.... 그도 그럴것이!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천장절 행사에 일본 총영사 자격으로 참석했다가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다리를 잃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윤봉길 의사 상해 폭탄투척 사진과 2차 대전시 미조리함 석상에서 항복하는 사진
이 도대체 왜? 여기 기쓰키 성에 걸려 있는가 하는 의문이 곧 풀리는 것이니....
그건 바로 외상 시게미쓰 마모루의 출생지가 이곳 오이타현 기쓰키 이기 때문 입니다!
또 저 시게미쓰 마모루 는 우리나라 굴지의 재벌 롯데 그룹의 신격호 회장 부인의 외삼촌 이라는 확인
되지 않은 소문이 있었으니.... 신격호씨는 도일하여 다케모리 하츠코 竹森初子 와 결혼
하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육군 대령으로 사이판에서 전사했고 어머니의 오빠 가 시게미쓰 마모루 라는?
저 시게미쓰 마모루는 도쿄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무기징역 을 받았으니 미인이었던 부인은 맥아더 원수를
찾아가 울면서 감형을 호소 합니다. 맥아더가 차가운 반응 을 보이자 그녀는 시게미쓰가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썼던 일기책 5권 을 꺼내 보이며 외상도 태평양전쟁을 반대했다고 말해 7년형으로
감형 되었던 것이지요? 영국의 속담에 "미인의 미소는 굳게 잠긴 자물쇠도 열리게" 만든다고 했던가요?
그런데 일본외상 시게미쓰 마모루 외에도 여기 오이타현 출신 유명인사 가 있으니 사회당
의원으로 일본 총리 를 지낸 무라야마 도미이치 인데 그는 1995년 총리 시절에 중의원
에서 식민지 지배를 사죄하는 결의 를 통과시킨후 총리 자리를 걸고 내각에서
자민당 출신 국회의원들의 동의 를 거쳐 만장일치로 "무라야마 담화문" 을 발표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 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諸國)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저는 미래에 잘못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의심할 여지도 없는 이와 같은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여기서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의 뜻 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
의 마음을 표명합니다. 또 이 역사로 인한 내외의 모든 희생자 여러분에게 깊은 애도의 뜻 을 바칩니다."
오이타현의 어촌 에서 어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도쿄로 상경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 도쿄상업학교
야간부 를 나와 메이지대학에 들어가 학도병으로 징집된 무라야마 는 태평양전쟁후 여기
오이타현에 사회당 출신 시의원을 시작으로 1972년 국회의원에 당선돼 중의원 8선의원을
지냈는데 1990년 버블 붕괴후 혼란속에서 자민당 고노 총재와 연립 정권으로 총리 가 됩니다!
2013년 아베 내각이 무라야마 담화를 재검토 할 움직임을 보이자 무라야마씨는 아베 내각을 신랄
하게 비판 했는데 그는 정치생명을 걸고 사죄담화를 추진했기에 "일본의 양심" 이라 불리는
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친필 서명 사죄편지 를 보낸 첫 총리로 아시아 여성기금 을
발족시키기도 했으,나 한국은 성에 차지 않은 탓에 그를 공격하니 일본 우익 좋은일만 시킵니다!
그런데 저 시게미쓰의 전임 으로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전쟁 개전시 와 1945년 초반 종전 협상 을 담당
했던 일본 외상은 도고 시게노리 이니.... 임진왜란 때에 남원에서 끌려간 도공 들의 우두머리인
박평의의 후손 박수승 이 1886년 일본에 귀화 하니 그 아들 박무덕이 개명한 이름이 도고 시게노리 라!!!
두명의 외상은 종전후 함께 극동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A급 전범 으로 유죄 를 받았습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시게미쓰 마모루 는 맥아더 원수를 만난 부인의 청원 덕에
5년후에는 석방되어 정치를 재개하여 일본 우익 자민당의 뿌리 가 되었고, 도고 시게노리
는 5년후 스가모 감옥에서 옥사 했으니.... 정치하는 자, 미인인 부인을 두어야 하는 걸까요?
그러고는 계단으로 기쓰키성 의 천수각 상층부 에 올라 창밖으로 썰물로 개펄 로 변한
바다를 내려다 보고는 천수각을 내려와 기쓰키성을 나오는데 여긴 높은 언덕이라
수비를 위해 이렇게 언덕에 축성 했겠지만..... 덕분에 앞이 탁트이는 전망 이 좋네요?
정원에는 많은 비석 들이 세워져 있으니.... 얼핏 보아도 메이지 백년기념과 경로기념비에
효자비와 효녀비 등이 보이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죽은 나무에서 새로운 가지 가 나온지
오래된 기이한 모습의 나무며... 法政大學(법정대학) 창립자 현창비 를 지나 성문을 나섭니다.
법정 대학 이라면 도쿄에 있는 사립 명문 호세이 ほうせい 대학 을 말하는 것일러나? 그림판
에서 사진을 확대해보니 성씨가 金丸 이니 가네마루 라?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이름이 가네마루 데쓰 로, 1880년 도쿄에 도쿄법학사를 설립 했다고 하는데....
도쿄 이치가야에 있는 호세이 대학 은 현재 학생수가 무려 3만명에 달하는 사립 명문 이라?
가네마루등 설립자들 은 파리 대학 교수 보아 소나드의 제자 라고 하니 그런 이들이
메이지 유신기 에 "자유와 진보" 라는 프랑스 법정신 을 들여와서는
군부의 군국주의자들에 맞서서 "민권운동" 을 했던 진취적인 사람들 이었나 보네요?
이제 황토로 벽 을 바른 일본식 전통 목조 기와집 이 늘어서 있는 고색창연한 무사들의 마을
인 부케야시키(무사 거리) 로 가야하니 청연신사 를 구경한 후에 옛날에는 해자
였을 강에 걸린 다리를 지나니 가게가 보이고 오른쪽 언덕으로 올라가는 긴 계단 이 보입니다.
간조바노사카 계단 을 걸어 올라가노라니 양켠으로 1~2층 짜리 일본 전통 목조기와집 이 보이는데.... 바로
전국 각지에 남아 있는 무사 거리 라! 일본에서는 옛 무사들의 저택 을 부케야시키 武家屋敦
(무가옥돈) 라고 부르는데.... 이 도시엔 두곳에 무사거리 가 있으니 여긴 北台武家邸宅 (북태무가저택) 이라!
일본에는 가마쿠라, 마쓰모토, 다카야마, 가네자와, 야마가타현의 가쿠노다테, 마쓰야마,
구라시키, 야마구치, 모지코, 우스키, 미야자키현의 오비, 비와호수 나가하마,
아이치현의 이누야마, 사사야마, 후쿠이, 시라카베등 많은 도시에 무사 거리 가 있습니다.
오래된 옛 일본 전통의 가옥 부케야시키 武家屋敦(무가옥돈) 는 목조 기와집으로..... 대나무 못 을 썼으며
집 주위에는 황토로 된 흙담 을 둘렀습니다. 우선 첫 번째 들른 집 은 300엔의 입장료를 받는
이소야 저택 磯矢邸 인 데... 다다미 방이 열 개쯤 되는데 내부는 정갈하면서도 깔끔 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큰 가구는 없고 단지 무사복과 칼, 몇가지 소품 에 그림과 꽃꽂이 등 소박한 모습을 구경하고는 정원 을 둘러
보니.... 소나무등 분재 가 볼만합니다. 이소야 磯矢邸 저택은 오래전 藩政時代(번정시대) 인 1763년
에 지어진 집 으로 1800년에 화재 로 소실된 후에 1824년에 이르러 복구 되었다고 하는데 센고쿠
시대는 물론이고 에도막부 270개 번에 번주와 가신에 사무라이는 대대손손 세습제로 번주 를 모셨습니다.
그런데 사무라이 侍(시) さむらい 는 원래 귀족을 가까이서 모시며 경호 하던자 들이라고
하는데, 헤이안시대에 무사계급이 발달하여 셋칸케(攝關家)와 잉(院) 등에서 경호 를
위해 무사를 채용하게 되자, 점차 사무라이의 명칭이 무사 일반 을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에서는 낭당(郞黨) 을 거느리고 기승(騎乘)의 자격 이 있는 무사 를 일컬었고
형벌도 일반 서민과는 구별 되었다는데, 무로마치(室町)시대에서도 상급무사 를 지칭
했는데 에도(江戶)시대에는 사농공상(士農工商) 신분에서 사(士) 에 속하는 자 를 말합니다.
그러나 무가 사회 내부에서는 보다 엄격하게 이 명칭을 사용 하였는데, 막신(幕臣) 중
에서는 쇼군가 직속으로 만석 이하 무사인 하타모토(旗本) 를 가리켰으며... 그
아래 가치(徒) 와 주겐 (中間 무가의 고용인) 등의 하급 무사 와는 구별 하였다고 합니다.
에도 막부시대 270개 제번(諸藩) 의 가신 중에서도 주고쇼(中小姓) 이상의 무사 를 말하며
무사 중에서도 비교적 상층계급을 사무라이 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무가(武家) 를
주군(主君) 으로 섬기지 않는 특수한 사무라이로 궁가(宮家) 에 봉사하는 미야 사무라이,
(宮侍 궁시) 격이 높은 절 몬제키(門跡) 에 봉사하는 데라 사무라이(寺侍) 등이 있었다네요?
저택을 나와서는 거리를 걸어서 들어간 곳은 옛 번청 학교 인 데..... 정문인 대문 蕃敎の問
(번교노문) 이 덩그렇게 서 있는 모습을 봅니다. 일본도 1603년 에도 도쿠가와 막부
시대는 통일되어 전쟁이 없는 평화시대 이니... 칼 대신에 유학으로 나라를 다스린 흔적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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