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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스크랩 일주일 미리 가본 성북동 골목길 여행^^(사전답사후기)
나라사랑청년회 추천 1 조회 49 11.05.19 00: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5월 22일 일요일 성북동 골목길 여행을 앞두고,

지난주 토요일 청년회 여우사랑 대표님과 함께 성북동 골목길 여행 사전답사길에 나섰습니다~!

 

따사로운 햇살과 때로 선선히 불어주는 봄바람, 향긋한 봄내음..

모든것이 봄기운의 행복과 따스함을 그대로 전해 주는 것 같아 여행하는 내내

즐거운 마음만 가득했습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카메라를 좀 좋은것을 들고 갔어야 했는데 아점으로 오랜만에 한 요리인

오무라이스 찍는다고 디카를 놓고 나와 휴대폰 폰카로 찍어서 답사 사진 화질이 너무 너무 아쉬웠습니다~!

22일 본 기행때는 꼭 한두장의 예술 사진을 찍으리라 다짐하면서 답사를 너무도 잘 다녀왔습니다..^^

 

대표님과 한성대 입구에서 1시까지 만나기로 했는데, 아이쿠 아점 챙긴다고 놀다가 늦었습니다 이런 ㅠ

열심히 달려가 대표님과 만나 가장 먼저 찾은곳은 간송미술관...

 

간송미술관은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한 미술관으로 1966년 전형필의 수집품을 바탕으로 하여 한국민족미술연구소 부설 미술관으로 발족하였습니다. 미술관의 규모는 1층과 2층의 전시실을 가지고 있으며 소장품은 한문 서적·고려청자·조선백자·불상·그림·글씨·부도·석탑 등 다양하다. 소장품 중에는 {훈민정음}(국보 제70호)를 비롯하여 유명한 신윤복의 미인도 등이 있다고 전해집니다. 전시 활동은 1971년 '겸재전(謙齋展)'을 시작으로 해마다 봄·가을에 한번씩 특별 전시회를 열고 있고 상설 전시는 하지 않습니다. 올해 봄에는 2011년 5월 15일부터 개관인지라 저희가 답사를 위해 들른 5월 14일에는 개관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지난 가을에 찾고 또 다시 봄에 찾은 간송미술관의 모습은 또 다른 설레임과 산뜻한 기운을 주는 듯 했습니다.

  <<2011년 5월 14일 간송미술관 입구 정문의 전경>>

 

다음으로 발걸음을 옮겨 찾아간 곳은 만해 한용운 선생님이 1933년부터 1944년까지 만년(晩年)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난 곳으로 유면한 심우장입니다. 심우장의 대지의 동쪽으로 난 대문을 들어서면 왼편인

남쪽에 한옥으로 지은 심우장이 북향하여 서 있고, 대문 맞은편에는 벽돌조 단층으로 지은 관리인 주택이

심우장과 직교하며 동향으로 서 있습니다!

 

<<심우장>>

 

만해 한용운 선생님은 1919년 승려 백용성(白龍城) 등과 불교계를 대표하여 독립선언 발기인

33인 중의 한 분으로 참가하여  <3·1독립선언문>의 공약 삼장을 집필한 분으로 유명합니다.

처음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가, 시베리아와 만주를 순력한 후 28세 때 다시 설악산 백담사로 출가하여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다고 전합니다. 1910년에는 불교의 변혁을 주장하는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고, 1926년에는 근대 한국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님의 침묵≫을 펴낸 뒤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에 가담하였으며, 1931년에는 조선불교청년동맹을 결성하였습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심었다고 전하는 향나무>>

 

성북동은 원래 성밖 마을 북장골, 한적한 동네였다고 합니다. 만해는 3·1운동으로 3년 옥고를 치르고 나와 성북동 골짜기 셋방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 승려 벽산(碧山) 김적음이 자신의 초당을 지으려고 준비한 땅 52평을 내어주고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 등 몇몇 유지들의 도움으로 땅을 더 사서 집을 짓고 '심우장'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심우장의 대문 안 바로 왼쪽에는 소나무, 오른쪽에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각각 서 있고, 그 오른쪽 모서리에는 만해가 손수 심은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심우장을 나와 성북동 골목길을 빠져나와 성북미술관을 지나면 바로 왼쪽에 보이는 가옥이 바로

월북작가 상허 이태준 가옥으로 유명한 수연산방입니다. 이태준은 황진이, 왕자호동 등을 집필한 작가이고

수연산방은 본디 이태준의 고택이었으나, 1999년 외종손녀 조상명이 1933년 이태준이 지은 당호인 수연산방을 내걸고 찻집을 열었다고 합니다. 지어질 당시에는 서남향으로 된 방이 세 개였는데, 상허는 각 방에 죽향루, 문향루, 상심루라고 이름을 붙이고 작은 현판을 새겨 문 위에 걸어놓았다고 합니다만 이 가운데 상심루는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고 전합니다.

 

<<봄내음이 가득한 수연산방 실외 테라스>>

 

수연산방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놓은 누마루가 보입니다. 이곳에서 상허 이태준은 <달밤> <복덕방> <영월영감> <까마귀> 등의 명문들을 집필했습니다. 그리고 이 집을 짓고 고치고 가꾸는 중에 겪은 일들을 《무서록》에 담았습니다. 무서록無序錄. 상허가 쓴 글들을 아무 순서 없이 묶었다 해서 지은 이름이랍니다. 이 책엔 무심한 듯 담백한 문체로 성북동 생활을 담은 글들이 많습니다.집 짓는 인부로는 너무 나이든 이들이 와 속으로 걱정하였는데, 두고 보자니 참으로 일을 잘하더라는 이야기. 그 일꾼들이 서로 이야기하는 중에 종로통에서 양떡으로 만든 고뽀에 으수 덛물진 푸석 얼음인, 얼쿠다 못 얼쿤, 물이 한 사발이나 들었을라나 한, 고작 물에 설탕 좀 타 얼쿤 앗씨구리를 사먹었는데 값이 물 열 지게 값인 이십 원이나 하더라는 이야기등등이 바로 그것이지요^^

<<심우장에서 수연산방까지의 성북동 길 지도>>

 

여행 당일날 기행에 함께하는 이들과 함께 이번에는 꼭 차를 마셔보자는 요량으로

일단 수연산방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모과차 한잔씩과 전통떡 하나를 주문합니다.

차가운 모과차는 한잔에 7천원, 떡은 5천원이니 그리 싼편은 아닌듯합니다만,

내외부 분위기나 봄날씨등등을 고려하면 절대로 한번쯤은 놓칠수 없는

성북동 골목길 여행에서 꼭 부려봐야할 한번의 여유인듯 합니다.

 

<<수연산방에서 마신 모과차와 전통떡^^, 아이스모과차는 7천원, 전통떡은 5천원>>

 

<<수연산방 안에서 차 마시면서 여우사랑 대표님! 나중엔 꼭 아줌마 누나말고

여친이랑 함께오라는 말을 남겼더랬죠^^>>

 

<<수연산방 메뉴 첫장에 나와있는 상허 이태준선생>>

 

<<수연산방 나오기전에 마지막 대표님의 썩소사진 한장^^>>

 

이렇게 여유로이 차가운 모과차로 목을 축이고, 따사로운 봄볕도 충분히 쐬이고

이태준 선생의 정취가 가득한 곳에서 걸어나와 다시 성북동 길을 떠납니다!

다음으로 향할 곳은 바로 성북동 기행의 백미 길상사!

그런데..... 수연산방에서 길상사까지의 길에는 험난함이 한가지 있습니다.

바로 바로 지름길도 없는 가파른 언덕길을 넘어야만 길상사에 도착할 수 있다는 사실!

날은 덥고, 바람도 갑자기 잦아들고 택시를 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이 언덕꼭대기까지는 택시가 올라오지 않는다는 대표님 말에 절망하며 그냥 묵묵히 걷기로 합니다.

그런데.. 아스팔트 바닥 정말 덥고 가파르더이다..

특히나 길상사 가는 길 내내 보이는 웅장한 대사관저의 모습들은 그야말로 너무도 웅장한 저택들이 많아

빈부의 격차를 느끼기에 충분하기에 더욱 그렇게 느낀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아주 잠시일뿐, 언덕길을 올라 길상사에 도착하면

마치 무릉도원에 도착한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길상사 정문의 전경>>

 

바람선선하고, 마음 편안한 바로 이곳!

이곳이 무릉도원이 아니면 바로 어디가 무릉도원이겠습니까?

 

<<부처님 오신 날이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 길상사 내부에는 신도들이 소원을 담아 달고간 연등이 가득>>

 

길상사(吉祥寺)의 역사는 매우 짧으면서도 그 설립 계기가 특이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사찰은 1960년대와 70년대 그리고 80년대 말까지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최고급 요정의 하나였던 대원각 자리에 세워진 사찰로서 성북동 깊숙한 산자락의 대원각 주인이었던 김영한 여사가 7000여 평의 대지와 건물 40 여 동 등 1천억원대의 부동산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해 길상사로 탈바꿈하게 되었습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국의 사찰을 돌아볼 수 있는 공간으로도 유명하며, 불도체험, 수련회 등의 프로그램과 고사리손의 미술대회 및 대중가수의 콘서트까지 개최하는 등 도심속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이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 길상사 내부에는 신도들이 소원을 담아 달고간 연등이 가득>>

 

한시절, 6 - 70년대 요정정치의 숨은 비화가 서린 대원각, 이제 김자야님(김영한, 법명 길상화)의 기증으로 길상사로 명하고 도심속의 숲...그리고 누구나 잠시 머물러 산보와 묵상을 할수 있는 공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김자야 (김영한) 님께서 범정스님께 이절을 시주하시면서 "없는것을 만들어서 드려야 하는데 있는것을 내놓는 것이니 의미가 없습니다"라고 겸손하신 말씀을 새기며, 아울러 "그사람(백석 시인을 칭함) 생각 언제 많이 나셨나요?" 라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라고 조용히 말씀하셨다고 하신 그 회상이 절을 돌아보는 곳곳에 큰 애처로움으로 함께 하는 듯 합니다.

 

<<법정스닙이 말씀하신 무소유...>>

 

<<봄의 따뜻한 기운이 가득한 길상사>>

 

길상사를 찬찬히 돌아보고 뭔가 한껏 정화되는 기분과 마음으로 길상사를 나서 최순우 옛집으로 향합니다.

최순우 옛집은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며, 미술사학자인 혜곡(兮谷) 최순우(1916년 ~1984년)가 1976년부터 1984년까지 거처하였던 한옥입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로 유명하며 한국미에 대한 빼어난 안목을 가졌던 최순우는 이 집에 본인이 생각하는 한국적 아름다움을 담아 넣으려 했다고 전합니다.

 

 

 1984년 최순우가 죽은 뒤 딸 최수정이 살고 있다가 성북동 빌라 건축 붐 때문에 보존이 어려워져, 한국내셔널트러스트와의 교류 끝에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이 관리하는 시민문화유산 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2002년 12월 시민 성금으로 매입한 뒤 보수·복원 후 2004년 4월부터 일반에게 개방되었고, 2006년 9월 19일 등록문화재 제268호로 지정되었으며  매입금액은 7억8천만 원이었으며, 보수 비용은 2억 원이 들었다고 합니다. 규모는 대지 395.042㎡, 건평 101.92㎡이며, 건물 2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 대청과 사랑방에 유품을 상설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 집은 1930년대에 지어진 근대 한옥으로, ‘ㄱ’자 모양의 바깥채와 ‘ㄴ’자 모양의 안채가 맞물린 튼 ‘ㅁ’자 모양의 경기 양식에 따르고 있습니다. 바깥채에는 서고와 다용도실이 있다. 서고는 그 소장품이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되어 지금은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의 사무국으로 사용되고 있고 처마 끝에는 최순우가 스위스 여행에서 가져온 소방울이 풍경 대신 달려 있다고 하는데 현재에는 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다용도실은 현재 전시실, 회의실 등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안채에는 사랑방, 안방, 건넌방이 있다. 사랑방은 최순우의 집필 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랑방 위의 현판에는 "杜門卽是深山(두문즉시심산, 문을 걸어 잠그니 바로 이곳이 산중 깊은 곳)"이라고 최순우의 글씨로 쓰여 있습니다. 뒤뜰로 난 사랑방 문 위에는 “午睡堂(오수당, 낮잠 자는 방)”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 평소 스스로를 “오수노인(낮잠 자는 노인)"이라고 부르길 좋아했던 최순우가 단원 김홍도의 화첩에서 따온 글씨라고 합니다. 뒤뜰을 향해 난 창과 문에는 한자로 쓸 용(用)자와 비슷한 모양의 용자살이 걸려 있는데, 이는 뒤뜰을 감상하는 데 있어 가장 아름다운 양식이 용자 문양이라 생각한 최순우가 직접 걸어둔 것이라 전합니다.

 

우리것의 아름다움, 우리 한옥의 고풍스러움을 한껏 느껴서인지 최순우 옛집을 나오면서는 웬지 모를 마음의 평화가 이어집니다. 길상사에서 느꼈던 평화로움과 한가로움이 이어져 오는듯 합니다. 최순우 옛집을 나오면서 최순우 옛집은 평일은 오후 4시까지 주말은 5시까지 밖에 개방하지 않는다는 말에 대표님과 기행 루트의 변경이 불가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래도 최순우 옛집을 가장 먼저 들러야할것 같은 예감.^^

 

이렇게 대장정의 사전답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선잠단지를 잠시 둘러봅니다.

선잠단지는 누에치기를 처음 했다는 중국 상고 황제(皇帝)의 황후 서릉씨(西陵氏)를 누에신(蠶神)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 합니다. 조선시대 500년간은 농업과 잠업을 국가의 기간 산업으로 삼았기 때문에 농업을 주관하는 신을 동대문구 제기동의 선농단(先農壇)에서, 잠업을 주관하는 신은 선잠단에 모시고 국가에서 매년 제사를 지냈던 것입니다. 나라에서는 농사와 양잠을 권장하기 위해 국왕은 친경(親耕)을 하고, 왕비는 궁중 안에 단을 꾸며 내명부ㆍ외명부들을 거느리고 친잠례를 거행하였던 것으로 전합니다.

 

이렇게 몇시간을 꼬박이 걸어 성북동 골목길을 구석 구석 살펴보면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이보다 더 빼곡히 들어차있는 서울의 한복판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어떠신가요? 

5월 22일 일요일 나라사랑청년회 여우사랑과 함께 성북동 골목길에서

또 하나의 봄을 만나지 않으시렵니까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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