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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도여행-#3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벌교를 찾아서
이종원 사진, 글
선배집에서
어제 1시까지 퍼 마셨어도 6시에는 어김없이 일어났다. 오늘 하루 코스를 지도에 그려보고 자료집도 다시 한번 뒤져 보았다. 갑자기 남도땅에 왔으니 준비도 못하고 책만 잔뜩 차에 실은 거이다. 선배형과 아침식사를 마치고 바로 순천을 떠난다.
자...출발..
순천만
여수반도와 고흥반도 사이에 끼어있는 순천만. 남쪽엔 광활한 갯벌이 있고, 북쪽엔 이렇게 갈대숲이 자라고 있다. 포구에 올라서서 사방을 둘러보니 갈대밭이 끝없이 펼쳐진다.
국내 최대의 갈대밭 타이틀 소유자 자격이 있구먼.. 갈대밭만 무려 15만평이나 된다고 하니...원
이렇게 보존된 것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기 힘든 독특한 지형 때문이란다. 발이 푹푹 빠지는 갯벌지대에 갈대가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이 힘들어 이렇게 넓은 갈대밭이 형성된 것이다.
예전에는 이 갈대를 땔감으로 사용했기에 그다지 넓지는 않았다는데....인간이 살기 편해져서 혜택을 보는 몇 안되는 식물이 된 것이다.
갈대숲 한쪽에는 바다로 이어지는 수로가 뻗어있다. 물이 빠지면 갯벌이 보인다는데..지금은 밀물이어서 물이 흐른다.
하늘에는 수많은 새가 날아다닌다.
정수가 "와...백조다." 라고 외치는데... 내가 보기엔 갈매기다.
아마 동화책에서 본 백조가 뇌리에 박혔나보다.
한동안 갈대밭을 쳐다보았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임을 증명할려고..
차 창문을 활짝 열고 정수가 아쉬운 작별인사를 한다.
" 백조야 잘 있어. 갈대도 안녕."
과연 정수는 언제 이곳에 다시 올까?
그리고 아빠와의 추억이 생각날까?
벌교 딸기
전라 지역 딸기 대부분이 이곳 벌교에서 재배된다고 한다. 서울서 먹는 딸기도 한밤중에 날라와 우리 식탁에 올라선다고 한다. 순천에서 벌교가는 도로 곳곳에 딸기밭이 가득하다. 도로가에 좌판이 있어 멈추었더니.. 길 건너에서 주인아줌마가 넘어온다.
그 길은 보통 도로가 아니라 고속도로만큼 차가 씽씽 달리는 위험한 길이다.
" 위험하게 길을 건너면 어떻해요?"
" 저짝편 딸기 파는 아줌마한테 마실 갔다 와 부렀소." 질퍽한 남도의 소리가 들려온다.
'생명을 담보로 한 마실...'
큼직한 딸기를 어찌나 먹음직 스러운지... 붉은 세수대야 한무더기에 덤으로 한웅큼 얻었다. 남도인이 주는 넉넉한 정이다.
조정래의 태백산맥
이번 여정의 가장 큰 목적이 바로 조정래 장편소설의 '태백산맥'의 주무대를 찾아가는 것이다. 거의 3개월동안 10권의 책을 틈틈히 읽었고, 감동의 여운을 각인 시키고자 임권택 감독의 '태백산맥 비디오'까지 보았다. '아리랑'을 통해 김제와 변산반도를 느끼게 되었고, 태백산맥을 통해 이 머나먼 벌교까지 왔으니...난 아무래도 조정래씨의 올가미에 단단히 걸려든 모양이다.
며느리보고 '태백산맥' 10권을 모두 필사하라고 명령을 내릴만큼 그는 이 소설에 애착을 가진다. 힘겨운 역사를 부드럽게 아우르는 재주도 대단하지만 나열된 언어 하나 하나가 생명력을 지니고 있어 필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아리랑'을 거쳐 '태백산맥'의 봉우리를 넘어 근대사를 다루는 소설의 마지막 편인 '한강'에 다시금 기대를 걸어본다. 글쎄 인세를 하도 많이 받아 '체어맨' 승용차에 기사까지 고용한 조정래님이 민중의 아픔을 진솔하게 쓸 수 있을지 기대해보자.
소설 태백산맥의 '벌교'
벌교를 문외한이 설명하는 것보다 차라리 소설 '태백산맥'에 묘사된 조정래님의 입을 통해서 벌교를 보는
거이 훨씬 나을 것이다.
벌교는 한마디로 일인들에 의해서 구성, 개발된 읍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벌교는 낙안고을을 떠받치고 있는 낙안벌의 끝에 꼬리처럼 매달려 있던 갯가 빈촌에 불과 했다.
그런데 일인들이 전라남도 내륙지방의 수탈을 목적으로 벌교를 집중 개발 시킨 것이었다.
벌교 포구의 끝 선수머리에서 배를 띄우면 순천만을 가로질러 여수까지는 반나절이면 족했고, 목포에서 부산에 이르는 긴 뱃길을 반으로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벌교는 고흥 반도의 순천, 보성을 잇는 삼거리 역할을 담당한 교통의 요충이기도 했다. 철교아래 선착장에는 밀물을 타고 들어온 일인들의 통통배가 득시글거렸고, 상주하는 왜인들도 같은 규모의 읍에 비해 훨씬 많았다. 그 만큼 왜색이 짙었고, 읍 단위에 어울리지 않게 주재소 아닌 경찰서가 세워져 있었다.
읍내는 자연스럽게 상업이 터를 잡게 되었고, 돈의 활기를 좇아 유입인구가 늘어났다 모든 교통의 요지가 그러하듯 벌교에도 제법 짱짱한 주먹패가 생겨났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벌교에 가서 돈자랑, 주먹자랑 하지 말라'는 말이 '순천 가서 인물 자랑하지 말고, 여수 가서 멋 자랑 하지 말라' 는 말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소설책에 이 부분에 밑줄이 쳐 있고. 여백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벌교에 꼭 갈것이다.' 그리고 난 벌교에 서있다.
순천에서 벌교에 갈려면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하는데..그것이 바로 '진트재'다. 여순반란때 진압군이 이 고개를 넘어온 것을 시작으로 벌교 민초들의 아픔은 시작된다. 주인공 김범우가 아버지의 구명운동을 위해서도 이곳을 넘었고. 들목댁이 소화아가씨 면회를 위해서도 이 고개를 넘어섰다..
벌교의 진입로에 들어서니 소설에서 자주 언급된 '회정리' 라는 지명이 나와 얼마나 기분이 묘하던지....
벌교역
가장 먼저 벌교역으로 달려갔다. 권력이 가장 먼저 벌교를 밟는 곳이 바로 벌교역이다. 국회의원, 계엄사령관, 경찰서장이 부임 할 때마다 권력의 추종자들은 아부을 해야만 했고, 또 만인들 앞에서 수모도 당해야만 했다 한쪽에 차를 세우고 소설속에 목격자가 되어본다.
벌교 철교
빨갱이를 그렇게 미워했던 깡패 염상구..그래서 형 염상진을 너무도 증오한다. 그러나 형이 죽고 시신이 경찰서에 걸렸을 때 죽음을 각오하고 시신을 끌어내린다. 형제는 상반된 이념을 가지고 총부리를 겨누지만 결국 형이 죽음으로써 화해한다. 이토록 남과 북의 역사적 비극을 형제의 상반된 삶을 통해 전해준다.
바로 이 철교에서 벌교의 주먹세계를 장악하기 위해 오래 버티기 시합을 한다.
기차가 굉음을 내며 미친듯이 달려오지만 결국 간발의 차로 철로에서 먼저 떨어져야만 했다. 그의 부하들은 염상구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그는 벌교주먹의 천하통일을 이룬다. 오늘날 깍두기 아저씨들의 뿌리는 염상구가 아닐까?
영화 태백산맥을 보고 무지 실망했다. 10권의 분량을 세시간도 채 못되는 러닝타임에 맞추다보니 어려움도 있겠지만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려 배신감마져 느꼈는데...그나마 염상구역을 맡은 '김갑수'의 신들린 연기에 그나마 실망을 상쇄하였다. 예전에 마당세실극장에서 만해 한용운 역을 맡으며 염주까지 집어던지며 열연했던 그 모습을 보게 되다니....
소화다리
다리에는 '부용교'라고 쓰여있는데...소설 때문인지 예쁜 어감때문인지 사람들은 소화다리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실은 일왕 히로히또 때 (昭和) 만들어져서 소화다리라고 부른 것이다.
좋은 어감과는 달리 이 다리 밑에서 무수한 양민이 좌익으로 몰려 총살을 당했다. 벌교가 빨치산의 통치를 받았을 때는 지주와 경찰들이 죽어간 곳도 바로 이곳이다. 지금은 비록 볼품없는 다리지만 비극의 상징이며 눈물의 다리인 것이다. 사진을 찍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힐끗 쳐다본다. '건설교통부에서 나온 사람인가?' 라고 생각을 할 지도 모르지.
벌교 홍교 (보물 304호)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홍교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것이 바로 벌교 홍교다. 이 다리는 선암사 승려가 만들었다고 하는데..아름다운 승선교의 비밀을 이곳 홍교에 적용했을 것이다.
원래 벌교 (筏橋) 의미는 '뗏목다리'란다. 홍교 이전에는 뗏목으로 된 다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홍교는 한눈에 봐도 튼튼하게 짜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치 가운데 놓여 있는 용두석이 이채롭다.
홍예란?..윤용현님 글 퍼옴
홍예란 무지개 같이 휘어 반원형의 꼴로 쌓은 구조물로 다리 고분 석빙고·성문 등에 쓰였던 건축물을 말하며, 구름다리 무지개모양 아치형이라고도 부른다.
홍예는 경사를 이룬 사다리꼴이나 곡선의 형태로 다듬은 돌이나 벽돌로 쌓은 조적조(組積造)를 통하여 구성되는 것으로 단일의 평면에 존재하는 간격을 서로 연결하는데 사용되는 건축적 수법이다.
홍예는 구조적으로 덮고, 지지하고, 버티는 3가지 작용을 수행한다. 홍예 구조물은 필연적으로 쐐기 형태의 기계적인 속성에 의존하며 일반적으로 홍예석이라 불리는 쐐기모양으로 생긴 돌 또는 벽돌(塼)을 옆으로 연속적으로 쌓아나가면 홍예가 형성된다.
홍예는 응력의 관점에서 보면 기둥과 유사한데 이는 주요 응력이 압축력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기둥과 보로 연결되는 구조는 홍예가 발견되기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었으나 기둥과 기둥 사이에 올려지는 보는 수 척(尺)을 넘을 경우 지지될 수 없기 때문에 홍예의 발견은 대단히 중요한 기술적 발전으로 볼 수 있다. 어느 홍예교나 홍예석의 수는 홀수이며, 중앙 홍예석을 중심으로 양쪽의 수와 모양이 대칭이다.
중도들판
벌교 읍내를 벗어나 언덕 마루에 올랐다. 바로 중도들판이 한눈에 보인다.
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지주와 소작인은 목숨을 건 싸움을 하지 않았던가? 6.25때 공산주의자 염상진은 이 땅의 무상분배를 실천했고, 전세가 바뀌자 소작농들은 죽음의 대가를 치루어야만 했다.
땅 욕심 때문에 술도가 정현동 사장은 이 논두렁에 바닷물을 끌어 들였고 분노한 농민들의 낫질세례로 받고 죽어간 곳도 바로 이 중도 들판이다.
땅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지만 더불어 탐욕까지 가져다주는 양면성서을 지니고 있다.. 분배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계급투쟁의 양상까지 치달은 것이 6.25전쟁임을 작가는 맹렬히 주장한다.
저 들판너머에 뻘이 형성되어 있고 전국 최대의 꼬막을 생산하고 있다.
' 대부분의 조개는 그 껍질이 매끈거리게 마련인데, 꼬막의 껍질은 수
없이 많은 골이 패어 있었다. 기와지붕과 똑같은 골이 쥘부채의 살처럼 퍼져 나가고 있다. '
조정래님은 꼬막을 이렇게 표현했다. 난 한 많은 벌교 사람의 주름살로 보고 있는데....가끔 서울서 찰진 꼬막을 씹을 때마다 난 벌교를 생각한다.
벌교를 떠나며
다시 차를 몰고 보성으로 향한다. 중간에 '조성면'이 보인다... 한때 해방구였지. 염상진과 심재모 중위가 이곳을 탈환하기 위해 치열한 머리싸움을 벌인 곳이지. 결국 조성 때문에 강등 당하는 모함도 겪었지만....
염상진이니 이태식이니 수많은 영웅들은 결국은 죽어갔지만 외서댁이니 하대치같은 민초들은 죽지 않고 민중들의 가슴속에 오랫동안 남아있는 것으로 소설은 결말을 맺고 있다. 아쉽게 벌교를 떠나지만 시대의 아픔을 어깨에 짊어진 채 벌교를 벗어난다.
율포해변
벌교에서 보성가기 전 845번 지방국도가 보인다. 이 도로를 따라가면 율포해변이 나오는데..이 도로야말로 남해의 아름다움을 한 몸에 느낄 수 있다.
한가로운 농촌 풍경을 보면 예쁜 서정시를 듣는 착각에 빠지며, 난반사된 어촌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사실 율포와 보성차밭은 작년에 가본 적이 있어 그냥 지나칠려고 했지만 정수에게 바다와 드넓은 차밭을 보여주고 싶은 생각에 핸들을 꺽은 것이다.
율포해변
싱싱한 갯벌이 펼쳐져 있다. 변함없이 한가한 어촌 풍경이다. 고깃배는 어제 밤에 무리를 했는지 한편으로 뉘여 쉬고 있다. 마치 강아지가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쉬는 것처럼....
정수 손에 바다물을 적시게 하고 싶었다.
쫀득한 뻘을 지나 가장 가까이서 본 바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풍요를 느낀다.
녹차 해수탕까지 정수와 달리기 시합을 해본다.
늙은 아비가 싱싱한 젊은이에게 어찌 이길소냐?
보성차밭
율포에서 18번 국도를 타고 굽이굽이 올라가면 그 고개가 바로 '봇재' 라는 곳이다. 산 정상부터 끝없이 펼쳐지는 이랑을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정수의 휘둥그레한 표정을 보면서 묘한 뿌듯함을 느낀다.
차 잎을 한 웅큼 따고 입에 넣고는 그 맛에 놀라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정수의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밭고랑 사이를 잘도 뛰어다닌다. 정수 잡으러 다니는 것만으로 오늘 하루 운동량은 끝.
보성의 차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일제 때 일본인이 차를 재배할 수 있는 적지를 찾다가 이곳을 발견한 것이다. 차가 잘 자라려면 날씨가 따뜻해야 하고 비가 많아야 되는데 ...이곳은 비록 강수량이 부족하지만 대륙성 기후와 해양성 기후가 교차하는 곳이어서 안개가 끼어 그 습기가 비를 대신해준다고 한다.
결국 이곳은 전통 한국 차의 원류는 아닌 것이다. 쌍계사 근처의 목압마을이야 말로 한국 차의 원류라고 주장하는데..아마 '잭설차'라고 불렀던가?
대한다원
봇재를 넘을 때는 운전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한다. 굽이굽이 도는 고갯길도 아슬아슬 하지만 워낙 아름다운 절경을 간직하고 있어 한 눈팔면 차밭으로 굴러 떨어지기 쉽상이다.
고개를 넘자마자 좌측에 '대한 다원' 이 나타난다.
이곳 역시 차밭이 아름답지만 난 쭉쭉 뻗은 입구 가로수가 애간장을 태워놓는다. 차밭 반대편으로 가면 아가씨 다리통 만한 대나무가 하늘을 치솟고 있다. 보통 그걸 놓치는 사람들이 많다.
이곳은 산책하는 맛이 일품이다. 차향을 입에 물고 사랑하는 딸과 손을 잡고 거니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아..여기가 그 유명한 SK텔레콤 광고에 나왔던 그 길이구나. 작년엔 하도 사람이 많아서 사진 한방 찍지 못했는데.. 유행이 조금 지나 방문하는 것도 여행의 지혜다..
다음 일정지는 구산선문의 하나인 장흥 보림사...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