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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모노 입은 처녀들을 지나 가부키 극장을 구경하고는 절을 찾아 임종게를 생각하다!
11월 6일 오이타현 북쪽에 있는 나카쓰(中津 중진) 에서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달려서
온천 도시 벳푸 조금 못미쳐 기쓰키역 杵築駅 에 내려서는 기쓰키성 을 찾아
천수각 가파른 층계를 올라 윤봉길 의사의 천장절 홍구공원 폭탄투척 사진을 구경합니다.
성을 내려와 긴 계단을 올라가서 옛날 무사들이 살았던 북태무가저택(北台武家邸宅) 에서 이소야
저택(磯矢邸) 을 구경하고 나오니, 옛날 번청 학교인데 정문인 대문 번교노문 (蕃敎の問)
이 서 있는걸 보고는 또 다른 무사 저택인 능견저 (能見邸) 로 들어가는데..... 오래된 옛 일본
전통으로 지은 무사(사무라이)들의 저택인 부케야시키 武家屋敦(무가옥돈) 는 목조 기와집 입니다.
무가옥돈은 대나무 못 을 썼으며 집 주위에는 황토로 된 흙담 을 둘렀으니...... 집 내부를
구경한 후에 정원을 보는데, 저 나무들은 전형적인 "분재" 라고 보면 좋을라나?
문득 제주 한경면 에 있는 “생각하는 정원” 이란 식물원에 적혀있는 “분재는 뿌리를
잘라주지 않으면 죽고 사람은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빨리 늙는다” 는 글귀가 떠오릅니다.
식물은 화분 속에서도 뿌리 생장을 계속하는데... 화분과 닿는 부분은 갈색으로 변하며 굳어지니
뿌리는 물과 양분을 빨아들이지 못하므로 그냥 놔두면 나무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것이라!
뿌리를 잘라 주고 주기적으로 분갈이를 해 주면 회춘해 수명이 길어지니..... 오래 사는 것
이며, 인간도 낡은 생각을 주기적으로 잘라내야 새롭고 창의적인 생각의 뿌리가 새로 돋아납니다.
새로 돋아난 뿌리로 인해 젊어지는 것인데, 오래된 고정 관념과 아집 을 버리지 못하면 설사
나이가 젊다고 하더래도 생각이 늙어 버리니..... 주위에 사람들이 차츰 떠나가는 것
입니다! 식물의 가지와 잎은 사람으로 치면 기득권 내지 잘나가던 시절 의 기억이니.....
세월이 흐르면 새로운 환경이 주는 스트레스를 이겨내야 새 뿌리와 가지가 돋아나는 것이라!
탈무드는 인간의 생애를 7단계로 나누니 “한 살은 임금님 모든 사람들이 비위를 맞춘다. 두 살은 돼지,
진흙탕속을 마구 뒹군다. 열 살은 새끼양, 웃고 떠들고 마음껏 뛰어다닌다. 열여덟살은 말,
다 자라서 힘을 자랑하고 싶어한다. 결혼하면 당나귀, 가정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가야 한다.
중년은 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사람들의 호의를 개처럼 구걸 한다. 노년은 원숭이,
어린아이와 똑같아지지만 아무도 관심가져 주지않는다. 개처럼 살다가 원숭이 처럼 늙는 것은 서럽다.
그 서러움은 서운함이 되고 서운함은 노여움이 되고 소신은 아집이 된다. 잘나가던 시절의
생각을 잘라내지 못하니.... 마이크 잡아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고, 말이 많아질수록
주위에 사람은 점점 줄어든다. 해서 “나이를 먹을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 고 했을라나?
능견저를 나와 골목길을 걸어 오하라 저택을 지나 스야노사카 언덕길 을 내려와 저지대에 있는
"상인들의 거리" 로 내려서니 기모노를 빌려주는 가게를 발견하는데, 그럼 좀 전에 본 처녀
들은 이 가게에서 옷을 빌렸지 싶은데..... 일본에서는 명절이나 국경일, 성년식과 마쓰리
축제 또는 이런 관광지나 온천에 놀라와서도 즐겨 민족의상인 기모노나 유카타를 입는걸 봅니다.
화려한 비단으로 만든 기모노는 보통 수백만원을 호가하고 장인들이 수공으로 만든 것은
수천만원을 호가한다는데.... 신문에 보니 장인의 전통 대물림이 흔들려서는 일본의
비단 산업이 쇠락의 위기 를 맞고 있다나요? 비단 니시진오리 西陣織(서진직) 는
천년 고도 교토에서 발흥한 장인들의 여러 수제품 가운데서도 최고의 명성을 얻었습니다!
5세기 말에 바다를 건너 일본 땅에 온 한반도 도래인들이 시작한 것으로, 비단은 기모노
제작에 쓰이는 옷감으로 1,500년 전통을 이어왔지만 지금에 이르러 니시진 가족
기업이 속속 문을 닫고 있으니 기술과 노하우가 영원히 사라질 위험에 직면했다나요?
2020년의 기모노 판매액은 1990년의15% 로 급감하였고 200곳 염색공장은 불과 40군데로 줄었다고
합니다. 쇠락의 원인은 비싼 가격과 취향의 서구풍으로 변화에다가 경기 불황에, 또 박봉에 시달리며
10년씩 오야가타(親方) 밑에서 고생해야 하는 도제 제도에 지원하는 젊은이들을 구할수가 없는 것이라?
우리가 화재로 불탄 남대문을 복원하면서 아교나 안료며 쇠못과 전통 톱으로 나무 켜는 법을 복원하지
못한 것과 같은것이라! 그러고는 오래된 일본전통 기와집 이며 또 아기자기한 가게들을 구경하면서
옛 상인들의 거리 큰 거리를 걸어 신마치 에 이르니..... 울긋불긋한 깃대를 내건 건물이 있어 보니
아마도 가부키 극장인 모양인데 현재 공연하는 극들을 선전하는 모양이라 안으로 들어가서 살펴봅니다.
가부키(かぶき) 라는 명칭은 “기울다, 쏠리다” 라는 뜻을 지닌 가타무쿠 (傾く, かたむく) 의 고어 가부쿠
(かぶく) 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가부쿠는 “제멋대로 흔들며 춤을 추다, 기발한 옷차림을 하다”
라는 뜻도 지니고 있으니 배우들은 격식을 벗어난 기이한 행동을 하거나 화려한 의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을 가부키몬(かぶき者) 이라 했는데 이즈모 오쿠니라는 무녀는 당시 유행하던 노래에 가부키몬
의 복장과 무용을 결합하여 새로운 형식의 무용을 만들었으니.... 바로 오늘날의 가부키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가부키는 “노래하고 춤추는 예기(藝妓)” 라는 뜻에서 가무기(歌舞妓), 또는 “기악ㆍ기예 를 뜻하는 기(伎)
자를 써 가무기(歌舞伎) 라고 표기하였다고 합니다. 유녀가 출연하는 여성 가부키를 유조 가부키 라
부르고..... 소년이 출연하는 가부키를 와카슈 가부키라고 하는데 그 내용이 지나치게 관능적이었습니다.
또 가부키 극단 은 원래 남자들의 유랑예인 집단으로 꼭두쇠, 풍물, 버나돌리기, 땅재주,
줄타기, 가면극, 인형극을 놀던 조선의 남사당패 처럼, 매춘을 일삼기도 하였으므로
에도 막부는 풍속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여성과 소년의 가부키 출연을 금지 시켰습니다.
이때 부터 중국의 경극(京劇) 처럼 성인 남자가 여자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전통이 이어져오고 있으니 무용 중심에서 연극 중심으로 옮겨졌다고 하는데, 경극 중에
패왕별희(覇王別姬) 가 유명하니 한나라와 해하의 싸움을 앞둔 항우와 우미인 이야기로
우미인 역은 여장 남자배우로 1918년 상소운이 맡았고 1922년 부터 매란방이 맡았습니다.
경극 주연 여배우가 남자인줄 모르고 사랑한 서양인 이 있었으니 미국에서 태어난 중국인
David Hwang 씨가 쓴 M. Butterfly 인데..... 여장 배우 Song Liling 을 사랑한
프랑스 외교관 Rene Gallimard 로 여배우가 남자인줄 뒤늦게 알고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미국에서 태어나 살면서 동양인 이라고 인종차별 을 경험했던 데이비드 황 은 푸치니 가 쓴
Madame Buutterfly 는, 서양 남자에게 순정을 바친 일본 게이샤가 배신당해 죽는 등
서양인들이 동양인을 멸시하고 비웃는데 반해 무지한 서양인을 비웃는 의도로 썼다고 합니다.
태평양전쟁 이후에는 극장이 폐쇄 되거나 상연 작품에 제한을 받는등 각종 규제가 이루어지니 가부키
공연은 위축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통 문화로서 가부키 본래의 양식 을 지켜가는 것이 중요
하다는 각성이 일어나면서 1965년 가부키는 중요 무형문화재 로 지정되고 공연도 성행한다고 합니다.
가부키 극장 을 나와 신마치 까지 걸어 괸광안내소 인가 싶어 찾아 들어간 건물에는 엄청 넓은
면적에다가..... 부서 마다 많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어 당황 합니다. 되돌아 나와 건물 정면에
상호를 보니 市役所(시역소) 라고 적혀있으니 우리 같으면 이 도시 기쓰키 시청인 모양이네요?
그 옆에 酒造碑(주조비) 라는 비석 을 보는 데..... 예전에 여기 이 장소는 술을
빚는 양조장 이었나 봅니다? 그러고는 옛 무사 저택 부케야시키(武家屋敦)
중에 두번째인 남태무가저택 (南台武家邸宅) 을 보러 남쪽 언덕을 오릅니다.
3분도 채 오르지 않아 오른쪽에 덴만사 天滿社(천만사) 라고 적힌 신사 가 있기에 들어가서 구경하는데
소를 조형한 동상 이 보이고 석등이며 도리이가 서 있으니 붉은색 도리이 에다가..... 단풍 마저
붉으니 잘 어울리는데 본전 혼덴은 다른 신사와 다를게 없으나 평소엔 신관이 주재하지 않는 모양이라?
오래된 옛 도시 에 아무도 없는 신사 에서 이리저리 홀로 돌아 다니자니...... 자연히 쓸쓸한
마음이 들어 회상에 잠기는데.... 오랜 세월이 구름 처럼 흘러 이제는 퇴락해 버린 여기
옛 무사의 마을에서 신관도 근무하지 않는 신사를 둘러보자니 문득 고독 해지는 것 이네요.
루이제 린저 의 소설 “삶의 한가운데” 에 보면 여주인공 니나는 자신을 사랑하는 슈타인 박사
에게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 에 대해 이야기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
하면 마음을 쏟아버리고 나면 우리는 이전보다 더 비참하고 두배나 더 고독 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속을 드러내보이면 보일수록 타인과 더욱 가까워진다고 믿는 것은 환상
입니다. 대화 는 서로를 이해하게 하지만 고독을 덜어줄 수는 없는 것 이지요!"
또 안창홍 화백 이 그린 애로틱한 고독 은 여자가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병든 반려견을 안고 불편한 사각형 좁은 의자에 위태롭게 앉아있는 모습 인 데.....
이는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인 고독 을 에로틱하게 표현한 것이지요! 오늘 적막한 기운 마저 감도는
신사와 그 옆에 절을 둘러보는 내 마음이 그러하니.... 인생 空手來空手去 ( 공수래공수거 ) 라!!!
空手來空手去是人生 (공수래공수거시인생)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여
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 (생종하처래 사향하처거) 날때는 어느곳에서 왔으며, 갈때는 어느곳으로 가는가
生也一片浮雲起 (생야일편부운기) 나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인 듯 하고
死也一片浮雲滅 (사야일편부운멸) 죽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것
浮雲自體本無實 (부운자체본무실) 뜬 구름 자체는 본래 자체가 실이 없나니
生死去來亦如然 (생사거래역여연) 죽고 사는 것도 역시 이와 같도다
獨一物常獨露 (독일물상독로) 그러나 여기 한 물건이 항상 홀로 드러나
湛然不隨於生死 (담연불수어생사) 담연히 생사를 따르지 않네!
나옹화상 (懶翁和尙) 의 누님이 동생 나옹에게 읊었다는 "부운(浮雲)" 이라는 선시
로... 태어남과 죽음을 한조각 뜬구름 (一片浮雲 ) 의 기멸(起滅) 에 비유한 것이지요!
태어남은 한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은 한조각 구름이 사라지는 것 인데
뜬구름 자체는 본래 실(實)함이 없나니, 태어남과 죽음도 모두 이와 같다네
여기 한 물건이 항상 홀로 있어, 담연히 생사(生死) 를 따르지 않는다네!
신사를 나와 이웃에 있는 사찰 겐쇼지 玄昌寺(현창사) 절 을 구경하다 보니 문득 고승들이 입적 할
때에는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 을 후인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이나 글인 "임종게(臨終偈)"
가 떠오르는데..... 임종게는 달리 열반게(涅槃偈) 나 열반송(涅槃頌)· 입적게(入寂偈) 라고도 합니다.
속박과 번뇌 미망과 아집에서 벗어난 적멸의 순간에 직접 전하는 마지막 한 마디 이기
때문에 고승의 임종게 는 오래도록 세간의 화제가 되니, 선승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
처음으로 내뱉는 오도송(悟道頌) 이 화려하고 비유적인 반면에 임종게는 수수 합니다.
서산 대사 휴정(休靜) 은 "삶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짐이라 /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으니
/ 죽고 살고 오고 감이 모두 그러하다.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然)"
현대의 고승 중에서는 성철(性澈) 의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산 채로 아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生平欺狂男女群 彌天罪業過須彌 活陷阿鼻恨萬端 一輪吐紅掛碧山)"
선불교를 중흥한 경허 스님이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한 오도송(悟道頌) 은
콧구멍이 없는 소가 된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삼천세계가 다 내 집 임을 알았다.’
또 최근에는 조계종 전 총무원장인 자승스님이 소신공양(燒身供養)을 했다는데, 그가 남긴 임종게는
"생사가 없다 하나 생사 없는 곳이 없구나.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으니 인연 또한 사라지는
구나" 라는 열반송을 남겼다고 조계종은 전했는데 문득 해안 스님의 말과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1961년이던가요? 해안 스님이 부안 내소사에서 자신의 장례식 을 스스로 치르면서 했던 말이 생각났던 것
입니다. “生死於是 是無生死 생사어시 시무생사 ” 불교 반야심경 에 나오는 말로 “생사가 여기서 나왔으나
여기에는 생사가 없다” 의역하면 “ 죽고 사는것은 마음에서 나왔으나, 이것에는 생사가 없다” 정도 될러나?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서암(西庵) 은 제자가 열반송 을 묻자, "나는 그런 거 없다.
정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 고 해라. 그게 내 열반송이다."
라고 했는데 김제 금산사 조실인 월주 스님도 임종게를 남기지 않은 예에 속합니다.
절을 나와서 다시 언덕을 올라가니 삼거리가 나오는데 팻말을 보니 南台武家屋敦跡 (남태무가
옥돈적) 이라..... 일본에서는 성(城) 이 있으면 반드시 그 아래에 "무사들의 거리" 가 있습니다!
이런 거리의 무사 저택을 부케야시키 武家屋敦 (무가옥돈) 라고 부르는 것이니... 조금 전에
우리가 북쪽 을 보았으니 이제는 남쪽 차례 이네요? 골목길을 걸어 오래된 옛 무사의
저택 을 보는데..... 그 중에 몇몇 집은 개조 를 하여 찻집이며 가게 로 사용하는 것을
봅니다. 언덕에 서니 대문에 杵築 かとりく 敎會 라고 적힌걸 보니 그럼 성당 인가 보네요?
그리고 반대편 아래쪽 으로 내려가는 길은 데라마치 寺町(사정) 인 데, 지도를 보니
주택가에 절 이 요토쿠지, 쇼가쿠지, 묘토후지, 안주지, 조쇼지, 묘케지 이니....
바로 여기 위에 겐쇼지 까지 합하면 이 좁은 동네에 절이 모두 7사나 되는데, 오늘
오전에 나카쓰에서 좁은 구역에 절이 무려 14개나 몰려있더니 일본 풍습인가 봅니다?
그러고는 남쪽 무사거리를 뒤로 하고 덴진자카 언덕을 내려가서는 상인거리
신마치 에 도착해서 가부키 극장 앞에 이르렀는 데, 공연이 끝난건지....
가부키 배우들 과 관람객들이 서로 뒤엉켜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고는 나카마치 도로변 벽에 붙어 있는 영화 포스터 를 보는데... 일본 영화, 연합 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라? 1941년 12월 하와이 진주만 공격을 진두지휘한 일본의 제독 입니다.
일본 해군은 1941년 12월 항공모함 전단이 북태평양을 횡단해 화와이를 기습하는데 당시
일본은 항공모함이 8척으로 미국의 4척 보다 많았던데다가... 일본의 제로 전투기는
미군 항공기 보다 훨씬 우수했고, 거기에 조종사들의 전투훈련과 기술이 한수 위 였습니다.
야마모토 제독은 거함 거포주의가 주류 였던 당시 분위기에서도 일찌감치 항공모함 을
만들어 해군 항공대 를 창설한 테크노크라트 이기도 했으니, 조슈 출신이 중심인
육군과는 적대적이었던 사쓰마 출신이 다수인 일본 해군은 항공기 생산에 치중합니다!
야마모토는 미국과 전쟁을 반대했으나 전쟁이 결정되고 일왕(천황)이 승인하자 이왕 전쟁을
할것이면 진주만 미국 태평양 함대 항공모함을 선제 기습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니
야마모토 는 1941년 11월 26일 함재기 4백 14대를 적재한 6척의 항공모함 과
전함 2척, 순양함 4척, 구축함 9척, 잠수함 3척, 유조선 8척을 홋카이도에서 출항 시킵니다.
나구모 중장이 지휘하는 일본 연합 함대는 미군에 들키지 않고 12일간 항해끝에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 진주만 에서 전함 12척을 침몰 시키고 항공기 188 대를 파괴하는등 하와이
기습은 성공이었으나.... 마침 필리핀에 항공기등을 싣고 보급 을 나간 탓에 진주만에는
미국 항공모함 들이 없었으니 만약 항공모함들이 격침되었다면 전쟁은 달라졌을 것 입니다?
야마모토 는 "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것은 아닐까" 라고 중얼거렸다고 전해집니다. 다음해
1942년 4월 18일 미 항모에서 출격한 장거리 폭격기 두리틀이 도쿄를 폭격 하고는
기름이 부족해 돌아올수 없으니 중국땅으로 불시착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비난에 직면한
야마모토는 하와이까지 진격해 두리틀 가능성을 차단하려고 미드웨이섬 점령을 계획합니다.
태평양 산호초 해전에서 항모 즈이가쿠와 쇼가쿠가 손상을 입어 수리중이니... 진주만 공격에 참가했던
6척 항모 중에 4척만으로 미드웨이로 향하는데, 미국도 항모 요크타운이 손상을 입었으니 동원할수
있는 항모는 2척에 불과 하다고 보고 경항모 2척도 알류산 열도로 분산시키는 실수를 저지르는데,
미국은 요크타운을 긴급수리해 3척이 방어에 나서니 일본은 4척이 아니라 8척 모두 동원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일본 암호가 해독된 것이니, 미 해군 첩보대는 일본이 공격하려는 "AF" 를 미드웨이로
보고 해수 정화장치가 고장났다는 무전을 쳐서 웨이크섬에 주둔 중이던 일본 첩보대가
감청해 상부에 보고한걸 재감청하고 이후 공격시기와 항공모함 숫자 까지 까지 알아내서는
미드웨이섬에 비행기 150대를 긴급히 증파하고 정찰기가 하루 먼저 일본 함대를 발견 합니다.
6월 3일 기함 야마토의 통신 감청반은 미드웨이섬에서 미군이 발신하는 항모 호출 신호를 잡았으니,
야마모토 사령관은 앞서 가는 나구모 기동부대에 전달하도록 지시했으나.... “무선 봉쇄” 상태라
결국 전달을 포기하는데 항모의 통신 안테나는 전함의 안테나 보다 못한지라 기동부대에서는 감청
하지 못했으니 만약 나구모 부대가 정보를 전달받았더라면 미드웨이 전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일본 항모의 도모나가 공격대는 급강하 폭격기 36기, 수평 폭격기 36기, 제로 전투기 36기
합계 108기 였는데, 일본군 해병대가 상륙 작전을 실시할 날짜를 6월 7일로 잡았으니
그전에 미드웨이섬의 전투력을 섬멸하려는데, 미 항모 출현에 대비해 격납고에 어뢰로
무장한 함상 공격기는 대기상태로, 함재기 수용을 위해 미드웨이섬 방향으로 항해합니다.
도모나가의 일본 전투기들은 미드웨이에 도착해 암호 해독으로 인해 대기중인 미군기의
선제 공격을 받고 공중전이 벌어지자, 실전 경험이 풍부한 노련한 조종사들인 일본
제로 전투기는 미 해군 버팔로기 20기 중에서 13기 그리고 와일드 캣 2기 등
15기를 격추하고 미드웨이의 저유소, 비행정 격납고, 전투 지휘소, 발전소를 폭격합니다.
07시 55분에 도네에서 발진한 1호 정찰기는“적 항공기 15기가 아군 함대를 항하여 이동중.” 이라는
급전을 발신하자 공중에서 전투초계 중이던 제로기에 6기의 제로기가 더 발진하였는데, 미군
공격대는 미 항모 요크타운에서 발진한 10기 였으니... 일본 기동함대는 잔류한 제로기 21기
에게 출격을 명하는데, 이후 미군 해군과 육군 항공대는 일본 기동함대 항모를 연이어 공격해 옵니다
항모 아카키와 도네에서 미군기에 대공사격을 했고 제로기 10기도 공격에 가세하였으니
항모 아카키에게 저공으로 접근한 미 뇌격기 6기중 3기가 격추되고 남은 3기중 2기는
어뢰투하 후에 격추되자...... 일본군은 미 항모에 대비해 어뢰를 장착하고 대기하고
있던 함상 공격기들을 미드웨이 공격을 위한 폭탄으로 무장전환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때 함대 엄호의 제로기 편대들이 미 공격대와 공중전을 치루고 연료 보급과 실탄 장전을 위해
항모에 귀환하고 있었으며, 미드웨이에 공격을 가한 도모나가 대위의 1차 공격대도 귀환 하고
있었으니..... 일본 항모들은 무장전환 작업이 있던 비행 갑판아래 격납고나 비행 갑판은 극히
혼란한 상황이 되어 가고 있었으니, 미 해군 기동부대는 공격 타이밍을 저울질 하고 있었습니다.
미해군 17 기동부대 플렛처 소장은 “남서 변침, 수색 공격하라.” 한시간후 아침 7시에 16 기동대
스플루언스 소장도 항모 엔터프라이즈와 항모 호넷에 공격 명령을 내리는데 나구모 기동부대는
미군 공격대가 날아오고 있는 긴박한 순간에서야 적의 위치를 알게 되었으니 여기서 일본 패배
의 원인을 볼수가 있는데, 미 항공대가 접근하자 전함 기리시마는 갑자기 연막 차장을 개시합니다.
공격기들은 미드웨이에서 날아온 해병항공대의 비행기들로 헨더슨 소령이 지휘하는 미드웨이섬의 미
해병대 소속 돈트레스 16기 급강하 폭격대가 쇄도했던 것인데, 폭격대는 일본 항모 히류와 소류를
조준했으나 일본 제로 전투기의 요격을 받고 헨더슨 소령 기를 포함한 8기의 SBD 폭격기가 격추
되었으며 B-17 4발 폭격기 17기는 아카키, 소류 및 히류를 노렸으나 단 한발도 명중시키지는 못합니다.
마지막 미드웨이에서 출격한 미 해병대의 빈디케이터 폭격대가 공격했는데..... 일본기동함대가
제로 전투기들의 엄중한 엄호를 받는 사실을 알고 공중호위가 약한 전함 하루나를
노렸으나 큰 피해를 입히지 못하고 1기가 격추되었으니.... 제로 전투기의 호위가 강해서
명중탄은 없었는데 이때 소류의 공격대를 선두로 미드웨이 1차 공격대가 귀환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미드웨이 2차 공격대가 출격 준비를 완료해 갑판에서 정렬한 상태였는데 야마구치소장은 미 항모
발견 소식에 “일분일초를 다투는 위급한 상황이다. 1차 출격했던 도모나가 대위의 100 여기의 회수
를 포기 하더라도 즉시 전 항모 공격대를 발진 준비가 급하다.“ 라고 건의했지만 돌아오는 1차
공격대를 수용하는 것이 먼저냐, 2차 공격대를 발진 하는 것이 먼저냐 아님 적 항모들을 부수기 위한
어뢰 출격이 먼저냐의 3가지 결정을 놓고 격심한 갈등이 있었으니 갑판은 대혼란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이때 항모 함대 상공에 도착한 미드웨이 1 차 공격대 함재기들은 연료가 거의 고갈되어가는 상황
이었으니 100기 함재기들과 200여명의 노련한 조종사들을 바다에 수장시켜야 하는 상황이라
겐다 미노루 항공 참모는 비행사들이 죽어가는 것을 차마 눈을 뜨고 볼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1차 공격대 함재기 회수가 급선무라고 강행했는데.... 새로 출현한 미군 항모 부대가
공격대를 발진시키더라도 전투 초계 제로 전투기 부대가 잘 방어 하리라고 보았기 때문 입니다.
귀환하는 미드웨이 공격대를 수용하고 그후 기동부대 공격대를 발진시키기로 결정했는데 이때 항모 공격용
어뢰를 장착하고 비행갑판에서 대기중인 공격기들은 전혀 없는 가운데 08:37 나구모 기동부대는 미드웨이
1차 공격대를 수용 시작했으니 도네 4호 정찰기가 추가정보를 보내온 것은 08:55 으로 체공시간 10시간
인 수상정찰기는 귀환 중이었으며, 일본은 미드웨이 1차 공격대를 수용한 시각은 09:30 이니 공격대 발진
준비를 서두르던 09:20 왈드론 소령의 항모 호넷 뇌격대 14기가 기동부대의 상공 에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뇌격대는 항모 아카키에 목격되었고 엄호하던 제로기 8기가 요격하자 제로기를 무시하고 아카키에
육박하였으나.... 일본초계 전투기의 요격 능력은 막강했으니 모두 격추 되었으며 연이어 린제이
소령의 엔터프라이즈 뇌격대 14기가 나구모 부대 상공에 도달해 항모 카가를 노렸으나.... 일본
제로기들의 공격을 받아 10기나 격추당했으며, 10:00 일본 항모 소류에서 발진한 스이세이가
미 함대를 발견했으니 함대의 위치는 도네 4호기가 보고한 위치와 무려 100km 차이가 있었습니다.
10:10 요크타운 제 3뇌격대 12기가 나구모 부대 상공에 도착했으니 뇌격대는 구름에 가려진 3척의
항모 보다 앞에서 노출 된 항모 히류를 공격했지만 일본 제로기의 공격에 10기가 격추되고
2기는 연료 부족으로 해면에 불시착하였는데, 남동쪽에서 저공으로 공격해온 뇌격대를 영격하느라
일본 전투기들은 모두 남동쪽 해역 저공에 몰려들어 일 기동부대 상공의 고공은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미드웨이 섬에서 2차례, 미 항모 3척에서 발진한 뇌격대등 5차례의 공격이 일본함대를 명중
시키지 못하고 괴멸되고 난 뒤..... 맥클러스키 소령이 지휘하는 엔터프라이즈 급강하
폭격대 32기가 해역 상공에 진입해 역사적인 급강하 폭격을 시작하는 때에, 항모 요크타운
폭격대가 바로 후속해 왔으니.... 나구모 함대는 최악의 순간에 더블 펀치를 맞게 된 것입니다.
맥클러스키 소령의 엔터프라이즈 공격대는 남서쪽 상공에서 돌입했고, 레슬리 소령의 요크타운 공격대는
북서쪽에서 돌격했으니 이 상공의 초계 제로 전투기들은 남동쪽 저공으로 몰려가 있었거나 항모에 착함
하여 보급을 받거나 급유 중이었습니다. “적기! 급강하!” 카가의 견시가 미군기를 발견하고 비명 지르듯
경고했지만 때는 늦었으니 두 편대로 부터 급강하 공격을 받은 항모 카가는 네 발의 직격탄 을 맞았습니다.
대화재가 발생하였으며 폭탄 한발은 함교 부근에 낙하하여 함 지휘부 간부를 전사시켰고 베스트
대위등은 항모 아카키를 향하여 급강하 하였는데 투하한 폭탄들 중에 명중한 폭탄은 단
한발이었지만 치명타를 입혔으니 비행갑판 엘리베이터를 관통하고 함의 엔진 터빈 에 맞자
폭발로 인해 화재는 연료와 폭탄을 적재한 항공기들로 가득찬 상부 격납고 전체로 확산시킵니다.
엔터프라이즈 폭격대가 두척의 항모를 해치우는 동시에 레슬리 소령이 지휘하는 요크타운 폭격대는
항모 소류를 공격해 세발의 폭탄을 명중시켰으니.... 최대의 피해를 입고 20분만에 퇴함 명령이
내려졌으며 히류도 공격했으나 명중탄을 내지는 못했는데, 기습에 성공했지만 미군 폭격대
도 30기 중에 14기가 격추 되었으며 단 6분 만에 "일본 기동부대는 결딴나고 역사는 바뀌었습니다."
일본 해군은 미드웨이 해전 에서 항모 4척이 모두 격침당함으로써 이후 수세에 몰리는데.....
암호 해독이 안돼 기습에 성공 했거나, 8척 항모를 다 동원 했거나 또는 정찰기를 자주
띄웠거나 아님 미드웨이 점령과 미 항모격침 2가지를 다 하려고 욕심을 부리지만 않았다면
미드웨이 공격에 성공후 하와이도 점령했을 것이니 태평양은 일본 수중에 떨어졌을 것입니다?
1943년 4월 18일 야마모토 제독은 태평양 부건빌 섬의 일본군 전선을 시찰 하기
위해 라바울에서 비행기 로 출발했는데.... 시간 관념이 너무 철저한게 불행
이었습니다. 당시 미군은 미드웨이 해전 이후 일본군의 암호를 모조리 해독
하고 있었고 야마모토의 전선시찰도 미리 알고 있었으니 격추를 당해 전사 합니다.
미군은 라이트닝 전투기로 야마모토를 공격 하면서도 암호를 해독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며칠
전부터 전투기를 출격시키고 있었습니다. 일상적인 전투 초계 활동 중에 우연히 야마모토를
격추시킨 것으로 인식 시키기 위해서 였으니.... 피격 후에도 일본군은 암호가 해독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벳푸 가는 기차를 타러 기쓰키(杵築)역으로 갑니다. 나의홈 : cafe.daum.net/baik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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