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대장금‘뿐만 아니라 ’허준‘과 ’상도‘로 이어지는 이병훈 PD의 사극에서, 한상궁(양미경)은 가장 독특한 존재이다. 그녀는 주연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현재 시점에서 장금(이영애) 이상의 인기를 누리고 있고, 장금 못지 않은 자기만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매우 다면적인 캐릭터를 가지고 있을뿐만 아니라, 장금이 그렇듯 여성이다. 그리고 이 한상궁의 특징은 ’대장금‘ 전체의 특징과 관련되어 있다. ’대장금‘이라는 드라마에서 ’장금‘이 아닌 ’한상궁‘이 그자신만의 ’스토리‘가 중요하게 여겨졌다는 것은, 이병훈 PD의 사극이 또다른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기존의 이병훈 PD의 작품을 생각해보라. ‘허준’과 ‘상도’는 철저히 ‘성공’의 문제를 철저히 개인과 개인의 문제로 국한시켰다. '허준‘과 ’상도‘의 허준(전광렬)과 임상옥(이재룡)은 타고난 능력이 있었기에 여러 난관을 뚫고 성공할 수 있었고, 더불어 그들의 라이벌인 유도지(김병세)나 정치수(정보석)와의 대결 역시 개인대 개인의 문제였다. 물론 유도지나 정치수는 여러 세력과 끈을 맺어 주인공들을 괴롭히긴 했지만 그런 모함의 중심에는 한 개인의 위기감이나 라이벌 의식이 있었고, 조직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가까웠다. 개인의 품성과 능력에 따라 자기 자신의 위치가 정해지고, 그것은 주인공을 제외하면 변화하기 보다는 거의 완성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주인공마저도 그 소질과 품성만큼은 타고난 것이었다. 허준이나 임상옥이나 재능뿐만 아니라 바른 인성까지 타고난 인물들이었고, 그들은 능력이 안되어 질때는 있어도 도덕적인 판단에 있어서만큼은 틀린 선택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이병훈 PD의 전작들에서, 모든 인간들은 타고난 역량이 상당부분 인생을 결정했었고, 더불어 그만큼 자신들의 자리가 분명했던 것이다.
한상궁의 매력
이병훈 PD의 작품들이 일종의 롤플레잉 게임같은 요소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매번 시험문제를 던지듯 에피소드를 전개시키면서 한단계씩 주인공을 발전시켜나가는 이병훈 PD특유의 전개방식 외에, 이런 캐릭터의 특징이 큰 역할을 했다. 각 캐릭터가 이미 정해진 성격과 재능이 너무도 뚜렷했기에, 각자의 역할이 분명히 정해져 있었고, 그만큼 반대로 캐릭터가 거기서 벗어나는 모습은 보여주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스승은 철저하게 곧고 강직한 스승역할에 충실하고, 주인공은 주인공다운 올바르고 진중한 모습을 보여야 하며, 조연들은 조연 역할만 하면 된다. ’허준‘이 인기를 모을 당시 허준의 모습을 희화화하거나, 혹은 각 조연들의 대사를 패러디한 내용들이 당시 인터넷에 떠돌았던 것은 그만큼 이 작품의 캐릭터들이 각각 한가지 측면에서 분명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허준은 너무 진중하기만 하기 때문에 희화화의 대상이 되고, 여러 조연들은 역시 특정 대사를 유행어처럼 계속 반복하며 자기 역할에 충실했기에 시청자들이 그 특징을 희화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MBC ’다모‘와 '허준’을 비교해보라. ‘다모’는 가장 가벼워야할 마축지(이문식)에게 마저 후반으로 갈수록 엄청난 삶의 무게를 부여했지만, ‘허준’의 조연들은 끝까지 조연이었다. 캐릭터의 발전보다는 그 캐릭터가 할 수 있는 역할에 충실했고, 각자 다른 역할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들이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드라마틱한 사건들을 만들어내면서 주인공을 마지막 단계까지 가도록 만드는 것이 이병훈 PD의 작품이 가진 특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장금’의 한상궁은 이 법칙에서 벗어나 있는 캐릭터이다. 그녀는 역할상으로는 ‘허준’의 유의태(이순재)나 홍득주(박인환)처럼 장금을 철저하게 끌어올리는 스승역할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그녀는 앞의 두 나이든 남자 스승들과 달리 그 자신도 변화하고 발전하는 인물이다. 마치 그 분야에 있어서는 모든 것을 깨우치고 있는 듯 했던 앞의 두 사람과 달리, 한상궁의 캐릭터는 매우 다면적이다. 그녀는 장금을 가르치면서도 정상궁으로부터 또한 가르침을 받는 인물이고, 동시에 장금의 어머니(김혜선)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는 여린 심성의 소유자이며, 장금에게서 장금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자신의 이루지 못한 우정과 모성본능까지 찾으려 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그녀 나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작품 내내 조금씩 변화하는 인물이다. 애초에 완성된 인물이자 근엄하기만 했던 유의태나, 인간적인 면모가 보다 강조되었으나 여전히 ‘스승’의 역할에 한정되어있던 홍득주와는 달리 한상궁이라는 인물 자체가 하나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앞의 두 스승들이 남성적인 근엄함과 능력과 카리스마에 바탕을 둔 상명하달식 지도를 하며 등장인물에게 좀처럼 마음을 내보이지 않고 거리를 두는 것과 달리, 한상궁은 시간이 지날수록 성장하는 장금에게 자기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장금에게는 점점 자율권을 준다. 장금이 한상궁 대신 최고상궁의 경합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각본상의 전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장금이 한상궁에 의해 조금씩 자신의 책임소재를 넓혀 나갔기 때문이다. 한상궁은 처음에는 장금에게 무작정 물을 떠오라고 가르치더니, 그녀가 나인이 되었을때에는 좀더 많은 자율권을 주면서 그녀에게 다양한 일을 맡긴다. 그러면서 장금은 발전하고, 더불어 그 과정을 통해 장금과 한상궁은 서로에 대해 좀더 거리감을 좁히게 된다. 한상궁은 이병훈 PD의 전작들에서 나타난 스승역할의 캐릭터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보다 입체적인 캐릭터라는 표현으로 집약된다. 즉, ‘대장금’은 롤플레잉 게임에서 그 ‘롤’만을 담당했던 캐릭터에게 보다 ‘인간적’인 살을 붙인 것이다.
이는 ‘대장금’의 대부분의 주요 캐릭터들에게서 모두 나타나는 성향이다. 이 작품에서 스승의 스승 역할을 하는 정상궁(여운계)이나 장금의 적대세력이 되는 최상궁(견미리)과 금영(홍리나)를 보라. 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한상궁과 같은 부분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나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대하는 인물과 상황에 따라 다면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공적인 부분과 사적인 부분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진다. 장고에서 계속 시간을 보내던 정상궁이 최고상궁의 자리에서 결국 쓸쓸히 죽음을 맞는 과정은 그 자체로 한 인물에 대한 역사이고, 최상궁과 금영은 애초에 악인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통해 악인이 되어가는 사람들이다. 최상궁은 장금의 어머니를 모함에 빠뜨릴때만 해도 그것에 괴로워했지만 세월의 흐름속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악인이 되어가고, 금영은 요리하는 것 자체에 즐거워하던 소녀에서 가문을 위해 어떠한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 인물로 변해가지만, 동시에 정호(지진희)에 대한 마음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다른 상궁이나 나인들, 혹은 강숙수(임현식) 부부같은 경우는 여전히 극의 양념 역할로서 몇가지 특징을 가진 성격을 가지고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지만, 메인 스토리라인에 있는 인물들은 이전보다 훨씬 복잡한 성격을 가지고 있고, 여러 사람들과 보다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허준’과 ‘상도’속의 주요 인물들이 말그대로 독야청청하는 인물이었다면, 그들은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자신을 변화시켜나가는 인물들이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각 캐릭터에 대한 몰입도를 높여주게 된다. 시청자들은 장금뿐만 아니라 한상궁의 인생에도 주목하게 되고, 최상궁과 금영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무조건적인 적대감보다는 상당부분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게 된다. 애초에 16회정도에서 죽을 예정이었던 한상궁이 말그대로 ‘첫번째 시즌’을 마무리 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극적있고 비중있는 모습으로 죽게 된 것은 ‘대장금’의 캐릭터가 이전에 비해 얼마나 큰 발전을 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분명히 스승의 ‘역할’만 했어야할 인물이, 스스로 캐릭터를 발전 시켜나가면서 주인공 이상의 매력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시스템을 바꿔라
그리고 이것이 가능케 된 것은 바로 ‘대장금’의 달라진 세계관 때문이다. 앞서 말한대로, ‘허준’과 ‘상도’의 세계관은 철저히 개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개인의 타고난 능력과 재능에 따라 역할이 정해지듯, 대결의 양상도 개인과 개인간의 대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허준과 유도지의 대립은 허준에 대한 유도지의 묘한 열등감에서 시작되는 것이었고, 정치수와 임상옥의 대결역시 이익을 쫓는 정치수와 상도를 쫓으려는 임상옥의 대립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장금’은 다르다. '대장금‘은 한정된 삶의 범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각자 속하게 된 조직에 따라 변화하고, 결국 그 조직이 내세우는 가치관에 따라 서로 대결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대장금‘에서 조직없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최상궁과 금영뿐만 아니라 장금이나 한상궁도 마찬가지다. 한상궁이 최고 상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개인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우연히 조직을 만들 수 있는 권력을 갖게 된 정상궁이 한상궁에게 경합의 기회를 줬기 때문이고, 장금이 무사히 커나갈 수 있었던 것 역시 한상궁과 정상궁으로 이어지는 작은 조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장금을 가르치고, 장금이 열심히만 한다면 최고상궁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려 한다.
’허준‘과 ’상도‘가 이미 정해져 있는 ’제도‘안에서 그것을 초인적으로 돌파하는 개인의 영웅담을 그렸다면, ’대장금‘은 그런 초인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는가를 보여주면서, 그것이 곧 조직의 가치관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상 어디건 조직, 혹은 단체는 만들어질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초인이라 해도 혼자서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고, 그 초인이 만들어지는 것 역시 조직을 통해서이다. ’허준‘에서 허준과 유도지가, ’상도‘에서 임상옥과 정치수가 달라지는 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상황과 선택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대장금‘에서 장금과 금영이 달라지는 이유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어느 조직에 속하느냐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디든 조직이란 중요하고, 조직의 가치관과 사람을 키우는 방법은 더욱더 중요하다. 조직의 가치관이 사람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고, 사람의 능력은 그 조직의 육성 방법에 따라 결정된다. 정상궁과 한상궁으로 이어지는 궁궐내의 ’소장파‘가 주장하는 것은 공정한 경쟁과 요리 자체의 즐거움이고, 최씨가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조직은 개인과 조직의 영달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금영은 ’출세하기위한‘ 비법을 전수받고, 장금은 ’요리를 잘 만들기 위한‘ 교육방법에 따라 매우 자유롭게 길러진다. 그리고 그렇게 자란 장금이 생각시가 되고 나인이 되는 사이, 정상궁은 장금이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최고 상궁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려 한다. 장금이나 한상궁이 최고 상궁이 되는 것은 그 개인의 능력과 교육뿐만 아니라 시스템의 개혁이 있을때 가능한 것이고, 그것은 한 사람이 아닌 조직의 수장으로서 최고상궁이 나서야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대장금은 개인의 성공기라기보다는 조직의 개혁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 조직의 더 나은 가치관을 찾아나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것이 보다 바른쪽으로 가야만 모든 사람들이 제대로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장금의 인생을 보라. 그녀는 얼핏 보기에 최상궁과 금영에 의해 삶이 뒤틀어지는 것 같지만, 정확히 말해 그녀의 인생은 철저히 최씨 가문과 그와 결탁한 정치권이 만들어낸 견고한 조직의 힘에 의해 핍박받았던 삶이다. 나인시절 그녀의 어머니를 죽을뻔하게 만든 것도 최씨가문이 주도가 된 상궁세력에 의해서였고, 결국 그녀를 죽인 것 역시 최씨‘가문’이었다. ‘허준’과 ‘상도’에서 음모를 진행시키는 것이 ‘나쁜’ 사람에 의해서였다면, ‘대장금’에서 최씨 가문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은 개인의 욕심뿐만 아니라 조직의 커넥션을 지키기위해 힘을 쏟고, 더불어 매우 당연하게 자신들의 이익이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장금’에서 최씨가문-제조상궁-제조대감으로 이루어진 궐내 커넥션은 매우 당연하다는 듯 특혜를 누리고, 이병훈 PD의 전작들보다 훨씬 더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내세운다. 개개인으로 볼때 그들은 하나같이 잘났고, 나름의 카리스마도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다. 최상궁이나 금영은 물론, 제조상궁(박정수)이나 오겸호 제조대감(조경환)이나 모두 공적인 일에서는 매우 유능한 인물들이고, 사람을 제대로 부릴줄도 안다. 그들은 절대로 무능하거나 욕심만 가득한 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이 침해 당하는 순간, 조직의 힘을 빌어 자신의 적을 공격한다. 사람 개개인이 선하고 악한 문제가 아니라, 조직의 이익, 그리고 조직이 가져다주는 권력이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두려워하지도 말고 안될거라고 하지도 마라
그래서 ‘대장금’에서 장금이 겪는 시련은 개인의 능력으로 돌파하기엔 너무나 강하고 견고하다. 그것을 깰 수 있는 방법은 그런 음모와 방해를 사전에 차단시킬 수 있는 공정한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고, 소수자들이 그것을 주창할 때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그 개인들의 힘과 의지를 하나로 결집시키는 것이다. 최고 상궁 경합을 주저하는 한상궁에게 “두려워하지도 말고 안될거라고 하지도 마라.”라고 외치는 정상궁의 말은 이 드라마의 태도를 그대로 집약시켜 말해준다. 그들의 조직은 너무나 견고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고, 그 조직에 밀려난 힘없는 다수들은 그들에 의해 계속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소수자들은 계속 그 견고한 조직에 부딪쳐야 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들이 그 조직만이 독점하는 시스템에 합류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 장금이 아무리 음식솜씨가 뛰어나도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장금의 재능이 한상궁에 의해 발견되고, 한상궁은 정상궁에 의해 도전의 기회를 잡게 된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것은 보다 정확한 원리원칙을 세우고, 다른 조직까지도 그 원리원칙속에서 포용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상궁들의 반발이 있는한 한상궁이 최고 상궁이 되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상궁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또다른 조직인 내금위의 도움을 얻어 잊혀진 제도를 바로 세우고, 그것을 통해 모든 조직을 통솔하는 것이다. 개인의 능력보다는 조직의 힘이, 조직의 힘보다는 공정한 시스템의 확립이 더욱 큰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대장금’은 바로 그런 변화를 원하는 사람(그리고 그 사람들로부터 길러진 인물)과 그것을 지키려는 자의 싸움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것은 이병훈 PD의 시각 변화를 의미한다. 이병훈 PD가 ‘허준’과 ‘상도’에서 주장한 것은 매우 도덕적인 한 인간에 관한 것이었다. 아무리 세상이 불합리하더라도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은 성공할 수 있고, 그 사람이 놀랄만큼의 도덕성을 가졌을때 세상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병훈 PD의 세계관이었다. 하지만 ‘대장금’에서 이병훈 PD는 바로 그런 인간을 키워내는 것이 조직과 제도이고, 그 조직과 제도속의 교육이라고 말한다. 믿을 수 없는 성공을 만들어내는 것은 개인의 초인적인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지만, 그 능력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조금이나마 숨통이 틔여진 제도 때문이다. 그래서 ‘대장금’은 이전보다 훨씬 더 바로 지금의 현실에 대입할 수 있는 여지가 많고, 이것은 ‘대장금’의 캐릭터적인 특징과 결합되어 이전보다 훨씬 강한 몰입감을 줄 수 있게 되었다. ‘허준’과 ‘상도’의 주인공들은 똑똑하고 올바르긴 했지만 그들은 너무나 완성되어있고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인물들이었기에 하나의 사람으로서 느낄 수 있는 재미가 부족했고, 더불어 그들의 말은 옳기는 하나 현실에서는 적용하기 힘들정도로 원론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나 ‘대장금’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상황에 대해 고뇌하고 불안해하며, 견고한 조직을 가진 적은 한 개인의 능력만으로 상대하기엔 너무나 강력하다.
그래서 ‘대장금’속의 세계는 우리가 지금 사는 현실과 상당히 닮아있고, 그만큼 이입될 수 있는 여지가 크다. 우리는 세상속에서 모든 것을 바꿔놓을 정도의 초인은 만나기 힘들지만, 반대로 조직속에서 망가지는 능력있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고, 그 조직의 힘 때문에 온갖 불합리한 일을 당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들은 지금의 조직과, 그 조직의 근간을 유지하는 제도가 바뀌길 원하지만 그럴 힘은 없다. 재능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 쓰여야할 곳은 바로 거기이다. 그들이 두려워하지도 않고, 안된다고 생각하지도 않을때 시스템은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나마 갖게 된다. 이병훈 PD의 전작들이 지독할정도로 잘난 사람들의 모범적인 성공사례들이었다면, ‘대장금’은 그 잘난 사람들의 성공이 있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들과, 그 조건을 갖춰나가면서 변화하는 시스템의 모습에 보다 비중을 둔다. ‘대장금’의 캐릭터들이 현실 정치와 비교되는 것은 ‘대장금’이 의도했다기보다는 추구하는 바 자체가 요즘의 불합리한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병훈 PD가 ‘허준’부터 ‘대장금’에 이르기까지 사극을 통해 사회에 어떤 ‘교훈’을 던져주고 싶었던 것이라면, ‘대장금’은 그중 가장 현실적이면서 깊고 넓은 교훈을 전달하고 있다.
궁녀들의 디 아워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대장금’의 축을 이루는 조직과 개인간의 문제가 궁녀라는 독특한 조직세계를 통해 구체화되면서 이전의 이병훈 PD의 작품들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었던 독특한 매력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 ‘허준’의 내의원의 세계나, ‘상도’의 만상과 송상과 달리, ‘대장금’속 궁녀들이나 궁궐안 사람들의 이야기는 앞의 두 작품보다 더욱 넓은 폭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훨씬 더 폐쇄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정상궁의 말대로 궁이라는 세계는 넓고 화려하지만, 더불어 외부와 차단된 세계이고, 더불어 그 안에서는 철저하게 조직의 논리를 따를 수 밖에 없는 곳이다. 의원이나 상인의 세계는 그것을 그만두면 끝이다. 꼭 그곳에 속해있지 않아도 의원도 계속할 수 있고, 상인도 계속 할 수 있다. 하지만 궁안에서의 생활은 다르다. 그곳을 떠나는 순간,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기반을 잃어버린다. 궁에서 궁녀로 살던 사람들이, 혹은 관료로 일하던 사람들이 궁에서 쫓기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그들이 궁안에서의 생활을 책임져줄 힘센 조직과의 커넥션은 더욱 강해질 수 밖에 없고,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친다. 주요 인물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민상궁(김소이)처럼 그다지 비중이 크지 않은 인물도 어느쪽에 붙어야 하느냐를 두고 고민하게 된다. 그만큼 궁안에서의 조직이란 다른 곳보다 훨씬 더 사람의 인생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고, 더불어 한번 들어오면 은퇴하거나 한상궁을 비롯한 여러 상궁들처럼 ‘죽어’나가기전까지는 나가기도 힘들다. 그렇기에 조직의 힘은 대를 이어 계속되고, 더불어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삶 역시 계속된다.
그렇기에 ‘대장금’에서 ‘궁녀’란 신분은 주요 인물들 못지 않게 또 하나의 주인공 역할을 한다. 궁녀들은 궁안에서도 가장 폐쇄적이고, 더불어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조직이다. 그렇기에 모든 궁녀들은 좋든 싫든간에 궁녀가 가지고 있는 세월의 무게를 지고 살아야 한다. 장금의 삶 자체가 전대의 궁녀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한상궁이 자기 인생의 스토리를 가질 수 있는 것도 그녀가 궁녀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궁녀들이 가지고 있는 폐쇄성은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역사를 만들어나가도록 하고, 그렇게 대대로 이어지는 궁녀들의 삶은 한 개인만으로 만들 수 없는 수많은 사건과, 표현할 수 없는 세월의 힘을 느끼도록 만든다. 만약 궁안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궁녀라는 특수한 상황안에서 ‘평생’을 함께 보내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연생이 그토록 장금을 위하는 것이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못했을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한상궁이 장금의 어머니와 장금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애정도 그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한상궁과 장금의 어머니가 쌓았던 우정과 최상궁간의 라이벌 관계가 다시 장금과 연생(박은혜), 금영으로 이어지는 것은 단순한 설정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궁녀라는 조직세계가 가지고 있는 힘과 그에 얹힌 세월의 힘은 모든 사람들의 인생을 만들어내는 가장 근본적인 힘이 된다.
그리고 ‘대장금’은 그 부분을 드라마를 이끄는 가장 중요한 동력원중 하나로 사용하고 있다. ‘대장금’의 스토리의 중심이었던 한상궁과 장금, 그리고 장금의 어머니의 관계를 보라. 그것은 그들이 궁녀이기에 나올 수 있는 절절한 이야기이다. 폐쇄적인 조직, 그것도 언제 어떻게 꼬투리가 잡혀 죽을지 모를 곳에서 믿고 의지할 것은 가장 친한 친구 뿐이다. 그래서 그 친구를 어떻게든 지켜주고 싶었지만 결국 실패한 사람은 왠지 그 친구를 생각나게 하는 아이에게 애정을 쏟으며 그 아이를 친 어머니 이상으로 키우게 된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지만 동시에 궁녀라는 조직의 ‘역사’의 일부로서 살아가고, 그 역사속에서 희생됐던 수많은 일들은 자신들의 절절한 한으로 남게 된다. 한상궁과 장금의 어머니의 이야기가 그다지 많이 표현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로인해 괴로워하는 한상궁의 마음이 그토록 잘 전달될 수 있었던 것은 한상궁이 계속 궁녀의 삶을 살면서 그 속에서 과거의 일을 떠올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상궁이 궁을 물러날 때 궁에 대한 회고를 하는 장면이나 장금이 만두를 만들 당시 사건을 일으켰던 어떤 나인과 상궁과의 이야기는 이를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한명의 궁녀를 감쪽같이 죽이고, 그 궁녀의 아이를 계속 키울 수 있을만큼 궁녀는 폐쇄적인 조직을 살고 있고, 그 안에서 자신의 ‘인생’을 보낸다. 퇴궐을 앞둔 노 상궁의 말대로, ‘그것이 바로 궁녀’인 것이다. 그래서 ‘대장금’의 스토리는 단순한 개인과 개인의 반복되는 대결이 아니라 한명의 인생, 더 나아가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강렬한 힘을 가진다. 한상궁과 장금이 결국 자신과 상대방의 관계를 알고 달려나가는 장면이 그토록 강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끼리의 관계뿐만 아니라 한상궁의 일생이, 그리고 장금의 어머니의 인생이 그 밑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매우 자주 등장하는, 궁녀들이 모두 모여 절을 하는 모습은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힘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여성들의 일, 여성들의 우정, 여성들의 사랑
그래서 ‘대장금’이 전작들을 집필했던 최완규 작가가 아닌 여성인 김영현 작가에 의해 집필된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물론 성별에 따라 작가의 성향을 분류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지만, 적어도 ‘대장금’에서만큼은 여성인 김영현 작가가 궁녀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여성의 관점에서 풀어나가는 것이 작품의 큰 매력으로 작용한 듯 싶다. 이미 이전부터 이병훈 PD의 작품에 나오는 여성들은 악녀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든 것을 남자에게 의존하는 것도 아닌, 자신의 능력과 주체성을 가진 모습으로 묘사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김영현 작가는 단지 모범적인 여성상을 만드는데서 그치지 않고 남성과는 또다른 여성간의 ‘관계’와 ‘감정’을 예민하게 잡아낸다. 엄격한 분위기속에서 거리를 두었던 남성들의 사제관계와 달리 한상궁과 장금의 관계는 엄격하면서도 보다 부드럽고, 세월이 흐를수록 보다 풍부한 관계를 맺게 된다. 장금이 크기전까지 그들은 엄격한 사제지간이었지만 그들은 어느순간부터 마치 다 큰 딸과 어머니처럼 친구 비슷한 느낌도 주고, 더불어 약간의 연인과 같은 느낌마저 준다. 이것은 성적인 측면의 문제가 아니라 단체생활속의 여성이 만들어낼 수 있는 특유의 분위기이자 정서이다. 그들은 같은 상황의 남성들에 비해 부드럽고, 남성처럼 ‘동지의식’을 겉으로 강하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대신 서로에 대한 많은 대화를 통해 서로의 일상을 챙기면서 또다른 우정을 쌓아간다. 궁안에는 모함을 꾸미는 정난정이나, 그에 무작정 당하는 한숨쉬는 여자들만 있는게 아니었다. 그곳에는 자신의 직업에 모든 것을 걸고, 우정과 연대의식을 보여주는 여성들도 있었다. ‘대장금’의 핵심 스토리중 하나인 한상궁과 장금의 이야기는 여성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만약 남성이라면 그것은 처절한 복수의 스토리가 어울렸겠지만, 궁안에서 사는 여성이라는 특수성은 그것을 여성의 ‘한’으로 풀어내고,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은 친구에 대한 그리움은 한상궁과 장금을 나이를 초월해 하나의 소녀적인 감성으로 묶는다. 만약 남자였다면 한상궁이 장금에게 “네가 필요해!”라고 말하는 것이 그렇게 자연스럽고 절절한 감정을 담을 수 있었겠는가. 김영현 작가는 이병훈 PD가 보다 발전적으로 넓혀놓은 토대위에, 여성과 궁녀라는 작품의 특수성을 솜씨있게 조화시키고 있다.
이런 김영현작가의 능력은 캐릭터와 에피소드라는 측면에서도 잘 발휘된다. 이병훈 PD의 작품에서 가장 큰 장점이 마치 롤플레잉과 같은 구성속에서 캐릭터가 조금씩 계속 커나가면서 끊임없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며 생기는 흥미라면, 가장 큰 단점은 바로 그것이 패턴화된다는 사실이다. 에피소드가 반복되면서 대부분의 승리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주인공에게 돌아가고, 그러는 사이 주인공은 거의 초인이 되며, 점점 더 등장인물들의 행동은 예측되기 쉬운 방향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것은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캐릭터들의 특성과 맞물려 어느순간부터 지루해지고, 더불어 희화화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현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결과가 뻔해지는 것이다. 게다가 보통 이런 드라마는 디테일하면서도 계속 새로운 이야기를 전개시켜나가야 하는데, 한국 드라마에서 그렇게 지치지 않고 에피소드를 제공하는 드라마가 나오기는 힘들다. ‘허준’이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중후반부터 지나치게 늘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이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장금’은 그것을 각본의 완성도로 거의 극복하고 있다. 이것은 이병훈 PD의 작품의 약점인 캐릭터와 에피소드의 문제를 해결하는데서 비롯된다. 장금은 이병훈 PD의 작품들중 가장 ‘재미있는’ 주인공이다. ‘허준’과 ‘상도’의 주인공들이 극의 재미를 책임지기 보다는 극을 끌어가는 역할이었다면, 장금은 그 두가지를 동시에 하고 있다. 그녀의 굴곡많은 어린시절과 그것에 이어지는 그녀를 둘러싼 여러 비밀들은 시청자들이 장금의 인생에 대해 흥미를 가지도록 하게 만들고, 보다 ‘인간적인’ 면모가 강조된 장금의 캐릭터는 드라마의 호흡을 조절할 수 있도록 만든다. 이미 완성되어있는 존재나 다름없던 허준과 임상옥과 달리, 장금은 도덕적으로 뛰어난 인물이라기 보다는 그저 요리하는 것이 즐거운 인물이고, 신중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나이의 ‘소녀’답게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길 좋아한다. 언제나 밝고 긍정적일뿐만 아니라 궁금한게 있으면 자신의 몸에라도 직접 효과를 시험해볼 정도로 막무가내인 면도 있는 장금의 캐릭터는 숨막히는 음모와 비극이 점철되어있는 ‘대장금’의 톤을 너무 무겁게 빠지지 않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이병훈 PD의 전작들에서 이런 역할들이 몇몇 조연 캐릭터에 편중되었던것과 달리, ‘대장금’에서는 장금을 통해 보다 자연스럽게 드라마의 톤이 조절되고 있고, 이것은 시청자들에게 기대한 것 이상의 재미를 안겨준다.
장금이는 언제나 웃는다
만약 장금의 캐릭터가 아니라면 시청자들은 언제 이병훈 PD의 작품에서 주인공이 그토록 귀엽게 웃는 것을 보겠으며, 주인공이 스승에게 ‘애교’를 떠는 것을 볼 수 있겠는가. 꼭 재능있는 주인공이라고 해서 무게잡고 점잖을 필요는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 주인공이 심각한 일을 소화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장금이 큰 일을 겪을때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것은 그녀가 여전히 소녀적인 감수성을 가진 상태에서 아직 다 성장하지 못했기에 더욱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그녀는 아직 재능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아직은 어린 소녀에 가깝고, 큰 일이 닥칠때마다 어쩔줄 몰라한다. 그렇기에 그녀가 고민하는 모습은 허준이나 임상옥보다 더욱 불안할뿐만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반응이 나온다. 허준이나 임상옥이라면 시련에 대해 자신의 잘못을 자책하며 더욱 굳세게 나갈 것을 결의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완성되지 못한 장금은 한상궁으로부터 혼나면 그것 때문에 시무룩해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고민을 스스럼없이 얘기한다. 그래서 장금의 캐릭터는 이전의 주인공들과 같은 안정감은 덜하지만, 그대신 보다 인간적이고 다양한 에피소드를 끌어낼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 이병훈 PD의 작품에서 주인공이 다른 인물들과 농담을 주고 받으면서 장난을 친다는 것 자체가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리고 이영애는 이런 장금의 캐릭터를 상당히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영애는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는 이미지에 맞춰 장금의 분위기를 다운 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약간 과정스럽게 보일 정도로 장금을 밝게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볼때 적절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장금은 밝을때는 재미있다가 어두울때는 너무 비극의 여주인공이 되어버리는,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이런 장금이 겪는 에피소드의 다양성이다. ‘대장금’이 발전한 것은 한 인물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캐릭터뿐만이 아니라 그 묘사와 에피소드의 디테일이다. 한 회에서도 수많은 정보들이 나올뿐만 아니라, 그 정보들은 모두 하나의 에피소드를 만들어낸다. 장금이 궁에 입궐한 후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보라. 그 유명한 홍시 에피소드부터 물에 관련된 에피소드, 그리고 크고 나서 벌어지는 금계이야기부터 한상궁의 죽음까지, ‘대장금’은 끊임없이 장금에게 다양한 사건들을 제공하고, 그것은 너무나 촘촘이 이어져있기에 그것이 장금의 일상 아닌가 싶을 정도의 느낌마저 준다. 장금이 한상궁을 도와 최고 상궁 경합을 치루는 에피소드를 보라. 재료 구입부터 요리 과정에 이르기까지 거의 한회 간격으로 각각의 에피소드가 등장하고, 그 에피소드는 명료한 결론으로 넘어간뒤 곧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장금의 에피소드는 아니지만 한상궁의 재경합 에피소드가 단 한회만에 종결되고, 그뒤에 곧바로 한상궁이 수랏간을 장악하는 에피소드로 진행되는 것은 이 작품이 얼마나 촘촘하게 에피소드를 연결해나가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그 에피소드의 전개 흐름역시 이전에 비해 훨씬 정교한 모습을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볼때 장금이 시련을 겪고 그것을 극복한다는 틀은 같지만, 곳곳에 배치되는 한상궁과 장금의 스토리라인은 그런 에피소드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장금의 어린시절 재능을 보여주는 스토리가 반복될 쯤에는 한상궁과 정상궁의 스토리가 전면에 부상하며 스토리를 다음단계로 넘기고, 그 다음에는 정상궁의 죽음으로 극적인 전개를 만들며, 그 뒤에는 한상궁과 장금의 이야기로 작품의 흐름을 끝까지 끌어올린다. 에피소드만큼이나 다양한 전개를 가진 중심 스토리라인이 존재하게 되면서 ‘대장금’의 각각의 에피소드는 장금의 뛰어남을 부각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전체적인 스토리라인의 일부가 되어 반복적인 느낌을 상당부분 줄여준다. ‘허준’과 ‘상도’의 메인 스토리가 이미 결과가 뻔한 상태에서 에피소드를 채우기 위한 흐름에 가까웠다면, ‘대장금’의 메인 스토리는 그 자체로 흥미를 유발할만큼 디테일하게 꾸며져 있다. 최상궁이 장금의 어머니가 남긴 서첩을 보고 모든 것을 추측하게 되는 과정을 보라. 최상궁의 회상을 통해 그동안 스쳐 지나가는것만 같았던 부분들은 모두 일종의 복선 역할을 하게 되고, 그것이 하나씩 쌓이면서 종합되는 순간 최상궁이 놀라는 장면은 마치 스릴러 영화의 한 장면처럼 처리된다.
‘허준’과 ‘상도’의 스토리가 계속 주인공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면, ‘대장금’의 스토리는 그보다 더욱 복잡할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굴곡있는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단지 주인공을 위험에 빠뜨리고 구원하는 것 뿐만 아니라, 초반부터 쌓아온 이야기들을 통해 흐름을 조절해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절정에 달한 순간, ‘대장금’은 한상궁의 죽음을 통해 첫 번째 절정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한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대장금’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에 가까운 난제를 얻게 되었지만, 그것은 그만큼 이전의 스토리가 하나의 흐름속에서 성공적으로 풀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모’가 사극안에서 헐리웃 영화와도 같은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법을 보여주었다면, ‘대장금’은 지금까지의 대하사극이 부닥칠 수 밖에 없었던 한계, 즉 이미 정해진 결과내에서 계속되는 등장인물들의 대립외에 어떤 방법으로 드라마를 이끌 것인가에 대한 해결책을 보여준 것이다.
맛의 달인, 맛의 진수를 향해 정진하다
그리고 발전한 각본과 더불어 이병훈 PD의 연출역시 진일보했다. 그는 이 작품에서 드디어 내용뿐만 아니라 비쥬얼로도 사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게 되었다. 단지 아름다운 배경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음식 하나하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정성스레 촬영하고, 궁녀들이 모두 모여있을때 풍겨나오는 단정한 군집의 미를 표현하여 그 집단의 특성을 표현하게 되면서 이병훈 PD는 작품의 분위기를 보다 분명하게 영상으로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음식 재료 하나하나를 만들어나가는 그 과정의 섬세함이나, 다른 사극에 비해 훨씬더 공들였음이 드러나는 다양한 궁중 식기들의 영상은 그 자체로 하나의 그림이 된다. 하나의 손이 수많은 재료들을 하나의 음식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은 얼마나 진지하고 우아한 것인가. 이병훈 PD는 스케일은 크지만 듬성듬성 틈이 보이는 화면보다 오밀조밀한 정성이 들어간 영상이 훨씬 아름다울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또한 그가 ‘허준’부터 보여준 사극과 현대적인 감각의 조화는 ‘대장금’에서 거의 극에 달한 느낌이다. 최상궁이 장금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보여주는 스릴러의 반전을 밝히는듯한 편집기법이나, 강덕구의 행동에 맞춰 빠른 속도로 영상을 돌리고, 거기에 기타 연주와 인도리듬을 기반으로한 힙합리듬을 등장시키는 모습등은 이제 사극이라는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장면에 어울리는 것은 마음대로 쓰는 이병훈 PD의 연출력을 보여준다.
이런 이유로, ‘대장금’을 이병훈 PD의 전작들의 연장선상에‘만’ 있다고 보는 것은 작품의 형식에 묻혀 그 내용물을 보지 못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한식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에게 왜 양식도 하지 않고 한식만 하냐고 불평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병훈 PD는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스타일을 더욱 깊게 연구하고, 다양한 소재를 끌어모은뒤, 보다 넓고 깊어진 관점에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었고, 그것은 새로운 조력자의 힘을 얻어 이전에 보여주지 못한 매력을 가지게 되었다. 전혀 다른 맛에 도전한 것이 아니라, 더욱 깊은 맛을 내는데 주력한 것이다. 물론 ‘대장금’이 종영까지 성공적인 드라마로 남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거의 일주일내내 촬영해야 분량을 맞출 수 있는 제작환경에서 지금처럼 모든면에서 디테일한 매력이 살아날지는 의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의 결과만을 놓고보면, ‘대장금’은 올한해 나온 드라마중 순수한 완성도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의 도덕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앞서있는 작품중 하나임에는 분명하다. ‘대장금’의 독만드는 장인은 독 하나를 만들때마다 심혈을 기울인다. 아마 그의 그런 자세가 그의 독에서 세월의 연륜을 느끼게 하고, 더 나아가 독 하나를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 아닐까. ‘대장금’을 보면, 이병훈 PD가 이제 비로소 그 단계에 접어든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첫댓글 다 맞는 말이네요...^^*
대장금을 정확히 분석한 좋은 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