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인생 창 47:1-12(75) 510.508
꼭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을 22년만에 만나 보게 된 야곱의 기쁨을 무엇으로 표현하기 힘듭니다. 그 순간 야곱과 요셉 부자의 극적인 상봉 장면은 가히 인정의 극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창 46:29-30) 요셉이 그의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의 목을 어긋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고 했습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격스런 상봉을 마친 요셉은 바로 왕을 뵙 때 하는 일을 물어보거든
이렇게 말할 것을 당부합니다. (창 46:31-34) 요셉이 그의 형들과 아버지의 가족에게 이르되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내 형들과 내 아버지의 가족이 내게로 왔는데 그들은 목자들이라 목축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하리니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 고 일러주었습니다.
아버지와 형들에게 당부하기를 마친 후, 요셉은 바로에게 가서 고하기를 '나의 아비와 형들과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가나안 땅에서 와서 고센 땅에 있나이다' 하고, 형들 중 5인을 택하여 바로에게 인사를 올리게 했습니다. 바로는 '너희의 생업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대답하기를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고, 그들이 또 바로에게 고하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종들이 이곳에 우거하러 왔사오니, 청컨대 종들로 고센 땅에 거하게 하소서' 라고 요셉이 일러준 대로 바로에게 요청하였습니다.
바로는 요셉에게 '네 아비와 형들이 네게 왔은즉, 애굽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땅의 좋은 곳에 네 아비와 형들로 거하게 하되 고센 땅에 그들로 거하게 하고, 그들 중에 능한 자가 있는 줄을 알거든 그들로 나의 짐승을 주관하게 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요셉은 형들에 이어 다음에는 아버지 야곱을 바로에게 인도하여 서게 하였습니다. 7절에 보면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10절에도 (10)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행하였던 축복은 단순한 문안 인사가 아닙니다. 구약 시대 족장들의 축복 권은 일찍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에 근거한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은 그러한 축복 권을 가지고 그 동안 바로가 베풀어 준 호의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개인의 번영과 안녕을 비는 축복을 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 권세, 세상의 부, 세상의 영광으로는 바로가 세상의 제일가는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하나님의 종으로 축복하는 자격, 축복하는 권한은 야곱이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 당시의 애굽은 부로나, 권세로나, 문화로나, 무역으로나 천하 제일가는 강대국이었는데, 바로는 그러한 나라의 왕좌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서 기근이 심하여
애굽땅에 우거하기 위하여 내려온 야곱은 아무 부도 없었고, 권세도 없고, 풍채도 없고, 참으로 보잘것없는 한 사람의 노인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 축복의 권한은 바로에게 있지 않고, 야곱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바로에게 축복하였고, 바로는 야곱에게 축복을 받았습니다. (히 7:6-7)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멜기세덱과 아브라함, 야곱과 바로 그들 중 누가 더 높은 자인가? 오늘날도 그러합니다. 축복의 자격과 권한은 세상의 부자나 권세자에게 있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하나님의 종들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야곱의 축복을 받은 애굽왕 바로는 야곱에게 '네 연세가 얼마뇨?' 하고 물었습니다. 야곱은 그 순간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끼며 바로에게 대답하기를 (9)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생애와 그 조상들의 생애를 '나그네길'이라고 묘사합니다. 이 시간에는 나그네 인생이란 제목으로 성령님의 깨달은 은혜가 있으시기를 예수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첫째는 야곱은 그의 생애를 나그네길이라 했습니다.
야곱은 자신을 가리켜 다른 세계를 향한 여행자로 보았다는 점입니다. 야곱의 이러한 고백은 그의 신앙을 표현하는 말로서, 천국을 믿는 확신에 가득 찬 그의 믿음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히 11:13-14)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나그네 인생을 행위대로 판단하신 하나님 앞에 삶을 살 것을 말합니다. (벧전 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하면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며 살 것을 권면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선을 행하며 살라고 했습니다. (벧전 2:11-12)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나그네요, 인간의 연세는 그 나그네 길의 세월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하룻밤 장막에 머묾과 같고, 하룻밤 여관에 머묾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들이 잘 부르는 복음성가 이세상은 나그네길과 같은 우리네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루를 지내며 힘든 일도 있고 할 일도 많이 쌓였는데 항상 바쁘게 살지만 10년을 뒤 돌아 보며 아니 일 년을 돌아보면 정말 이렇게 빨리 지냈나 생각이 들어갑니다. 엇그저께 봉영교회에 부임한 것 같지만 벌써 11년이 되어 갑니다. 생각해보면 성도님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또한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교회가 제공하는 모든 것을 놓고 떠나야할 시간이 올 것입니다. 이처럼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 땅의 삶에 대해서 영원히 누리고 살 장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땅에 믿음으로 갖게 되는 영원한 본향이 성도들에게 준비되어 있음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는 분명히 외국인과 나그네이므로, 다윗왕의 고백처럼 (시 84: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이처럼 우리의 나그네 길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를 사모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는 이 나그네길의 세월을 험악하게 보내었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야곱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정말 야곱은 한평생 고통스런 삶을 살아 왔습니다. 그의 조부 아브라함도, 그의 아버지 이삭도 야곱처럼 고생하지는 않았습니다. 형에게서 장자권을 속여 빼앗은 날로부터 인생의 온갖 쓰디쓴 일들이 그에게 밀어닥치게 되었으니, ①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하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②사랑하는 아내를 얻기 위해 14년 동안이나 긴긴 머슴살이를 하야야 했고 ③간교한 장인으로 인해 품삯을 열 번이나 속임 당하게 되었고 ④외동딸이 이방인 청년에게 욕을 당하는 슬픔도 겪었으며
⑤그 일을 복수하기 위해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앙갚음을 한 아들들 때문에, 또 다시 생명의 위험을 당하게 되었고 ⑥7년간의 고달픈 머슴살이를 수일같이 여길 만큼 사랑했던 아내 라헬이 해산을 하다가 죽는 것도 보았으며 ⑦그 라헬이 낳은 요셉이 죽은 줄 알고 22년간이나 슬픈 세월을 보내기도 했으며 ⑧장자 르우벤이 자기의 첩 빌하와 간통하는 패륜도 보았으며 ⑨그 동안 기근 속에서 온갖 두려움과 불안을 맛보기도 했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고통스럽고, 쓰리고, 아픈, 불행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기가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한 것입니다. (욥 14:1-2)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 이라고 했습니다. 또 모세는 우리 인생의 시간이 날아간다고 말합니다. (시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왜 이렇게 인생은 고통스런 일이 많을까요? 인간 세계에 죽음이 찾아오고, 고난이 찾아 온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죄의 결과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고난이 많은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만일 인생이 전혀 고통을 모르고,
그저 즐겁고 평안하고 행복하기만 한다면, 하늘나라를 사모하지도 아니하고, 여기 이 세상에서만 평안히 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부자의 고민이 있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대로 고민이 있으며 직장인이나 일반인 모두 고민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고통스런 세상에서 영원히 살려 하지 말고, 영광스러운 하늘나라를 사모하며 살고, 준비하며 살라고, 이 세상에는 괴로움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송가 479장에 '괴로운 인생 길 가는 몸이 평안히 쉬일 곳 아주 없네, 걱정과 고생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 갈 내 고행 하늘나라' 라고 한 것입니다.
바로는 야곱 가족의 요구대로 고센 땅, 곧 후일 라암세스로 불리는 곳을 내어 주고, 여러 가지로 후한 대접을 하는데, 이것은 다 요셉에 대한 바로의 총애와 신뢰입니다. 고센 땅에서 누린 야곱의 생활은 모처럼 안락하고 평안했습니다. 험악한 세월을 살아온 야곱에게는 참으로 모처럼 맛보는 평안한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러한 평안함 속에서도 서서히 다가오는 생의 최후를 느끼고 있었고, 이제 죽음에 대한 준비로서 자신의 장례를 위한 유언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지금은 요셉의 치세가 그들의 생명과 삶을 보장하지만 그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창 47:29-30)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야곱의 또 다른 귀한 신앙의 일면입니다. 그가 죽은 후에 가나안 땅에 묻히기를 소원한 것은, 단순히 그 땅이 고향이기 때문에서만이 아니라,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은 하늘나라의 모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가나안 땅에 묻히고 싶어 한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을 죽은 다음에라도 떠나지 않으려고 하는 간절한 그의 심정을 나타낸 것임과 동시에, 하늘나라를 사모하는 그의 신앙적인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자신의 전 생애를 맡기고, 오로지 그 소망 속에 살아온 야곱, 오늘의 우리에게도 이러한 믿음이 성도의 가장 크고 귀중한 기업이 되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아버지의 유언대로 해 드리겠다는 요셉의 맹세를 듣고 난 야곱은, 퍽이나 안심한 듯이 자기의 침상 머리에 엎드려서 하나님께 경배하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그 육신은 노쇠하였으나 그 신앙은 노쇠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셋째는 나그네 인생의 결론입니다.
애굽의 바로 앞에 선 야곱은 네 연세가 얼마뇨? 라는 질문에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야곱은 분명히 그의 생애를 나그네 길로 보았으며, 자신은 본향을 찾아가는 순례자로 여겼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인생을 바로 본 것입니다. 사실 야곱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나그네 인생들입니다. 미국의 어떤 사람 자동차에 붙은 스티커에 다음과 같은 글을 붙이고 다녔다고 합니다. '인생은 짧다. 후식부터 먹어라(Life is short:eat dessert first) 디저트(후식)는 맛있다(특히 단 것을 좋아하면) 샐러드부터 제 코스대로 먹고 있으면
후식이 나오기도 전에 인생이 끝날 수도 있으니까, 격식 차릴 것 없이 우선 맛있는 것부터 먹어 치우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고 싶은 것부터 하라는 것입니다. 인생이 짧다는 감각주의, 찰나주의, 현금주의, 쾌락주의 인생관을 대변합니다. 이것은 이사야의 인생관과 정반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인생은 짧다' 라는 점에서는 동의합니다. 그래서 (사 40:6-8)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기서 인생이 풀의 꽃과 같이 덧없고 짧기 때문에, 영원한 것을 바라보고, 변치 않는 약속인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사는 것이 가장 귀한 것임을 교훈해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날 인생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일본의 강철 노동조합 총회에서 '표준 노동자의 생활 설계' 라는 것이 채택되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18세에 회사에 취직, 25세에 22세의 여성과 결혼, 27세에 득남, 30세에 득녀, 60세에 퇴직, 75세에 작별, 아내는 77세까지 산다' 또한 몇 가지 사항이 보충되어 있는데
'25세에 방 하나 짜리 아파트, 30세에 방 두 개 짜리 아파트, 35세에 세개짜리 아파트, 40세에 자기 주택 구입, 한 달에 한 번씩 온 가족이 드라이브, 남편의 골프 역시 한 달에 한번' 등입니다. 이러한 기사를 읽으면 어쩐지 마음이 편지 않습니다. 과연 인생이 그것뿐일까요? 그렇게 끝내고 말아도 산 보람이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누더기 가사 장삼 한 벌을 남기고 떠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많은 재물을 남기고 떠나기도 하지만, 여하튼 모두 떠나가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떠날 준비를 잘하며 살아야 합니다. 가지고 가지 못할 것 대신,
가지고 갈 것을 잘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천국은 돈 갖고 못 갑니다. 지식 갖고도 못 갑니다. 명예 갖고 못 갑니다. 몇 년 전에 타계한 이성철 스님처럼 벽만 바라보고 살아도 못 갑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가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야곱은 그의 일백 삼십년 나그네 길이 험악한 세월이었다고 述懷했습니다. 환난과 슬픔을 너무도 많이 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당한 많은 환난은 그를 연단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성화의 한 방편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야곱처럼 인생의 거친 들에서 모질게 부는
환난의 비바람에 시달리는 성도들에게 성령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괴롬 인하여 천국이 보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나그네 인생 여정이 끝날 때 주님의 은혜로 천국에 당도하여, 생명 수 강 맑은 시냇가에 백합 피고, 흰옷을 입은 천사 찬송가 부르고, 영광스런 면류관을 받아쓰게 될 때, 세상 고생 꿈에 본 듯 잊어버리게 되는 복을 다 받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첫댓글 감동을 주는 귀한 말씀 은혜 받게 된 것 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