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산적의 몽골 여행기(2009. 8. 6 - 8. 12)
8월 6일(목)
12시 5분 인천공항을 이륙하였다. 오전 7시 원주를 출발해서 10시 경 아침을 인천공항에서 먹고 난 후다. 이번 여행을 함께 한 사람들이 평원중학교에서 만난 것이 1995년이었으니, 15년 전 30대 중반의 모습에서 50대로 변신한 후 처음 가는 해외여행이다. 세 명이 개인사정으로 함께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공항은 출발지이면서 종착역이다. 출발지가 인천공항 내 뒤편이라 5분간 열차를 타고 이동하였다. 떠남은 만남을 위한 것이다. 누구라도 떠나지 않고 새로운 것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움이란 경험을 말하기도 하고, 사물을 가리킬 때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몽골에서 만날 것은 무엇이고, 어떤 것을 경험할 것인가? 출발은 항상 마음을 들뜨게 만든다. 며칠 후 이곳으로 돌아올 때면 우리는 많이 변해 있을 것이다.
가까운 동남아시아를 가자고 한 것이 이 여행의 시작이었는데, 금강산으로 바뀌었다가 백두산을 목표로 삼기도 했다. 딱히 몽골을 가야할 이유는 없었으나 아무도 다녀오지 않았기 때문에 몽골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다.
몽골항공 OM 302편은 한 석도 비지 않은 말 그대로 만석이었다. 옆 좌석에 김영우씨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그는 미국 국적을 갖고 있는 한국인이었는데, 부인과 자식들은 미국에 살고, 자신은 사업차 서울에 머무르며, 몽골에서 아파트 분양업을 하는 건축사였다. 그는 세 시간 반 동안 자신이 알고 있는 몽골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그것은 책을 통해서는 알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몽골 사람들이 한국을 매우 좋아한다. 소위 한류가 휩쓸고 지나간 것이다. 그런데 몇 명의 한국인들이 아파트 분양 사기를 쳤고 그로 인해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나빠졌다. 요즈음 다시 한국인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기 위해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한국인에 대한 감정은 좋은 편이란다. 그것은 외모에서 풍기는 친근감과 중국인과 일본인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한국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하다고 한다. 한국인은 약 3천 명 정도 울란바타르를 중심으로 살고 있는데, 각종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 중 나이트클럽을 비롯한 술집을 많이 경영하고 있는데, 장기적으로 봐서는 이것도 좋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몽골 인들의 자식에 대한 열정을 우리와 견줘 적지 않다고 한다. 몽골 인들은 남에게 최선을 다하는 민족이라고 한다. 몽골은 270만 정도의 인구인데 우리 한반도의 7.6배의 땅에서 산다고 한다. 그 중 130만 정도가 울란바타르(수도 - 붉은 영웅이란 뜻)에 살고 있고, 나머지가 전국에 흩어져 산다고 한다. 잠시 계산해 보았다. 남한의 약 14배로 친다면 강원도에 약 10만 명 정도가 살 테고 원주시에는 약 5천 명 내외..... 사람이 그리울 것이다. 울란바타르를 제외하면 21개의 아이막이 있고(우리나라의 도청소재지), 513개의 솜(마을- 우리나라의 읍. 면의 개념)이 있다고 한다.
오후 2시 35분 울란바타르의 칭키스칸 공항에 도착했다. 시차가 한 시간 나는 관계로 우리 시간으로 오후 3시 35분이었다. 공항 대합실에는 23세의 예쁜 아가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몽골 이름은 터기 한국이름은 미영인데 디자인을 전공하는 대학 4학년생이었다. 나중에 안 얘기지만 그녀는 초등학교 5, 6학년과 중 1을 인천에서 보냈다고 한다. 큰 고모가 한국인에게 시집온 후로 동생인 아버지가 누나를 따라 인천에서 일했기 때문이다. 그때 온 가족이 다 인천에 살았는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두 딸은 몽골의 할머니 댁으로 돌아오고, 어머니는 아직 인천에 산다고 한다. 어머니가 부쳐주는 돈으로 동생과 함께 대학을 다니고 있는데, 방학 중 아르바이트로 여행 가이드를 한다고 했다. 예쁘고 한국말도 아주 잘했다. 6박 7일의 여행 내내 때 묻지 않은 몽골인의 순수함 그대로의 마음 씀씀이를 보여주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차는 눈에 익은 현대의 스타랙스였다. 이국에서 우리나라 제품을 만나니 왠지 모를 푸근함으로 바뀐다. PALACE 호텔에 짐을 풀었다.
짐을 풀고 시내관광에 나섰다. 울란바타르의 필수코스인 이태준기념공원과 자이승 승전기념탑이다. 이태준 기념관은 연세대학교 의과대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던 중 활동지를 몽골로 옮기게 된다. 당시 몽골 최후의 황제의 성병을 치료해준 것을 기화로 황제의 주치의가 되었고, 몽골 최고의 훈장을 수상했다. 후에 소련의 강점기에 소련군에 의해 살해당하였다고 한다.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공원을 조성한다고 한다. 차창을 통해 기념비를 지나쳤다.
자이승 기념관은 몽골에 침입한 독일군을 옛 소련군과 함께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기념탑이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울란바타르 시내 전경이 한 눈에 보인다. 이 탑 바로 밑에는 이도시의 젖줄이라고 할 수 있을 토올강이 유유히 흐른다. 이 강에 기대어 130만 명이 산다고 생각하니 한강이 있는 서울에는 1500만 명은 살아야 할 것 같다. 강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그저 조그마한 시냇물이라고 부를 만했다. 하지만 사막과 초원의 나라인 몽골에서 이만한 강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기념탑에서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눈에 익은 참이슬을 돌리는 한국사람 한 무리를 만났다. 그들은 여주에서 왔는데, 친구 다섯 가족이 왔다고 한다. 그 중 한명이 바로 몽골여자와 결혼했고, 그들은 친구네 처갓집을 함께 방문한 것이다. 그 몽골 댁은(이제는 한국아줌마) 새색시처럼 우리를 수줍게 대했다. ‘아저씨에게 씨암탉 잡아 줘야한다’고 농담을 건네자 몽골에는 닭을 기르지 않고, 모두 중국에서 수입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 아주머니도 우리의 농담을 이해하고, 그러마고 대답한다. 시집간 모든 여자들이 그리워하는 머나먼 친정집을 새로 사귄 친구들과 함께 방문한 그녀의 심정은 어떠할까?
차를 탄 우리는 수흐바타르 광장으로 향했다. 이 광장은 정부종합청사, 문화궁전, 국립극장 등으로 둘러싸여 있고, 수흐바타르의 기마동상이 있다. 1921년 중국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새 국가의 기틀을 세운 수흐바타르를 기리는 동상이었다. 그 동상 밑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만일 우리에게 공통된 노력과 의지가 있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할 것이 없고, 배우지 못할 것이 없으며, 실패할 것이 없다>
동상 받침과 동상을 호위하고 있는 사자상을 시멘트로 만든 것이 자꾸 눈에 거슬린다. 우리나라의 1970년대를 연상해서인가? 그 때는 그것이 새로운 건축 방법이었으나 시멘트가 녹아내리거나 깨지는 곳이라도 있게 되면 흉물로 변할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광장 건너편으로 우리나라 사람이 지어서 분양하기 위하여 짓다가 중단되었다는 배 모양의 오피스텔이 우뚝 서있다. 그 오피스텔이 무사히 분양되어 우리나라와 몽골사이에 민간외교를 담당하는 상징적인 건물이 되기를 바란다. 이 광장을 정면에서 보면 왼쪽으로 몽한 증권이 있는데, 아마도 한국과 몽골의 합작은행이 아닌가 싶다. 미영에게 물었으나 그녀는 몽골증권에 관하여 잘 모른다고 한다.
길에서 만나는 몽골 인을 우리와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단지 옷차림이나 외양에서 풍기는 냄새 등이 우리와 그들을 구분한다. 시내를 다니는 택시나 버스는 우리나라에서 가져온 그대로 운행한다. 수색을 가는 버스도 있고, 중곡동을 가는 버스도 만났다. 트럭이나 택시 등 우리나라 소도시에 가면 만날 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특이한 것은 운전석이 왼쪽과 오른쪽에 있는 차가 뒤섞여 운행되고 있다. 운전석이 왼쪽에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들여온 중고차이고, 오른쪽에 있는 것은 일본에서 들여온 새 차라고 한다. 즉 중고차는 한국산이요, 새 차는 일제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자동차업계에서 몽골의 시장성을 어떻게 파악하는지는 모르나 조금 자존심이 상하였다. 오고가며 본 것이지만 차는 거의 반반이었다. 이 시장에서 한국 차가 주도권을 잡을 날을 기다린다. 수gm바타르 광장을 굽어보고 있는 칭키스칸의 좌상이 위압적이다.
차를 돌려 전주식당으로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식당에 들어가기 전 수퍼마켓에 들러 칭키스칸 소주와 내일 고비를 갈 때 먹을 물과 각종 간식거리를 샀다. 칭키스칸 소주는 꼭 먹어보고 싶은 술이었다. 막걸리가 주류였던 고려를 침공한 몽골군은 소주라는 새 술을 가져왔다. 지금은 세계 어디를 가나 우리나라 상표를 단 소주를 만날 수 있으나 그 기술은 바로 몽골에서 들여온 것이다. 여러 가지 상표가 있었으나 칭키스칸 소주를 골랐다. 같은 칭키스칸 상표지만 값은 3000투르크부터 23,000투르크까지 다양했다. 우리는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23,000원짜리 고급 소주를 선택했다. 39도짜리 보드카였다. 저녁과 함께 모두 맛을 보았다. 양주에서 나는 탄 냄새나 꼬냑에서 나는 냄새와는 다른 한국의 소주 맛이 났다. 높은 도수의 다른 어떤 술보다 목구멍을 부드럽게 넘어 갔다. 우리는 앞으로 일정동안 먹을 술을 이것으로 정했다. 물론 한국에서 사간 참이슬은 우리 배낭에 그대로 있었다. 전주식당의 음식 맛은 우리나라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곳에서 먹은 꽁치김치찌개, 소고기 조림, 돼지고기 두루치기는 아주 맛있었다.
호텔에 들러 흥균이 형과 몽골에서의 첫 밤을 소주로 메웠다.
8월 7일(금)
엊저녁 빨아 넌 빨래가 아침에 모두 말랐다. 건조한 날씨 덕이리라.
아침 햇살이 맑다 못해 따갑다. 호텔에서 건너다보이는 산기슭에 칭키스칸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테무친이 칭기스칸으로 즉위한 1206년을 원년으로 하여 몽골 개국 8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2006년 시내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자이승기념탑’ 건너편 산허리에 흰 돌로 거대한 칭기스칸의 얼굴을 새겼다고 한다. 아침 식사를 하는 중 최은숙, 한미자 선생이 난리를 친다. 오늘 저녁 작은 공연을 한다고 법석이다. 우리 모두에게 별명을 지어줬다. 대장, 쁘니, 흥, 자이, 킴, 초이, 예, 술..... “누구에게 어떤 칭찬을 하면 칭찬을 받은 사람은 춤을 춰야한다” 는 법도 그녀들 마음대로 정했다. 3박 4일의 고비 투어를 위해 호텔을 나서며 빗이며, 비누, 샴푸 등 1회용품을 챙겼다. 혹시 길에서 만날 몽골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할 예정이다.
어제 저녁을 먹은 전주식당에서 점심도시락을 싣고 10시 울란바타르를 출발했다. 출발이 조금 늦은 것은 몽골인은 10시에 아침 일과를 시작하기 때문에 점심 도시락을 그때서야 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첫날 만난 김영우씨에 의하면 몽골은 세계 10대 자원부국이라고 한다. 그러나 육지로 둘러싸인 관계로 중국이나 러시아를 거치지 않고는 어떤 자원도 밖으로 실어 나를 수 없기 때문에 발전이 더디다고 하였다. 석탄이나 구리, 석유, 텅스텐, 주석, 금 등 각종 지하자원을 발굴해도 비행기로 실어 나를 수 없고, 기차를 이용하자니 중국이나 러시아를 거치지 않고는 수출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김영삼 정부 때 몽골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였고, 그때 대한항공에서 비행기를 제공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한국과 몽골의 교류가 시작되고, 비행기 4대로 국제 항로를 시작했다고 한다. 국제 항로라고 해야 일본에 2개, 한국 1개, 독일 1개, 중국 1개가 전부라고 한다.
몽골 공화국은 17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몽골어를 쓰며 1941년 이후 키릴문자(러시아어 - 우리나라의 이두처럼 음만 채용함)를 사용한다. 국가의 수반은 대통령이며 4년 중임제로 국민이 직접 선출한다. 임기 4년의 국회는 내각책임제로 운영된다. 수상은 대통령이 지명하여 국가최고 회의에서 선출한다. 1992년에 신 헌법이 발표되어 사회주의로부터 자본주의로 전환하고 있는 과정에 있다. 자본주의가 이들을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중국을 예닐곱 번 정도 다녀왔는데, 10년 동안 중국의 변화는 나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몽골역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가이드인 미영씨에 의하면 누구나 국가에 땅을 신청하면 약200평을 무료로 준다고 한다. 결혼식을 하거나 성인이 되었을 때 신청한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땅을 신청한 사람보다 신청하지 않은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만큼 개인 소유라는 낯선 개념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호텔 주변의 인터넷 카페, 생맥주 코너, 미장원, 슈퍼마켓 등은 몽골의 작은 변화를 보여주는 것들이다.
초원길은 어떠할까? 기대 반 설렘 반으로 울란바타르를 벗어나고 있었다. 도시를 벗어나기 전 빠스카(1호차 운전기사)는 차 두 대에 기름을 꽉 채우고, 20리터 빈 통에도 가득 채워 차 지붕에 꼭 붙들어 맨다. 순간적으로 우리의 앞길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담배 한대를 멋있게 피우고 그는 운전석에서 우리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마침내 아스팔트길을 벗어나고 초원길로 들어섰다. 길은 초원 끝까지 이어졌다. 뒤를 돌아보니 울란바타르가 아물아물하다. 그런데 앞은 초원이 이어졌다. 우리를 따라 나서는 것은 초원 가득 눈이 모자랄 정도로 서있는 전신주가 유일했다. 한 시간을 달려도 같은 풍경이었다. 두 시간을 달려도 같은 초원이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문득 초원의 풍경이 바뀐 것을 느꼈다. 끝없이 이어진 초원 같은데 어느 작은 언덕을 넘으면 노란 꽃이 가득 피어 있고 또 한 언덕을 넘으면 파란 색의 이를 모를 풀이 가득하다. 또 한 구비 지나면 듬성듬성 가시나무만 한 뜰이다. 두 시간을 남짓 달리다 2호차가 보이지 않는다. 지평선 차에 내려 우리가 온 지평선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멀리 다른 차 하나가 심심하게 지나쳤다. 20여분 정도 지난 후에 2호차가 먼지를 휘날리며 다가온다. 오랜 친구를 만난 것 같다. 차 뒤를 돌아 여자들이 엉덩이를 까고 초원에 오줌을 눴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다. 한 30분 정도 달려서 이름 모를 어워에 도착해 길에서 점심을 먹었다.
어워란 언덕마다 세운 돌 탑을 말한다. 어디를 가나 언덕을 넘을 때면 어김없이 나타난다. 돌 탑을 세우고 파란 천을 걸어 둔다. 파란 천은 하늘을 뜻하고 탑은 땅을 나타낸다고 한다. 작은 마을을 벗어나도 있고, 저 멀리 마을이 보이면 이 어워가 반드시 있다. 유목민은 늘 떠남으로 시작한다. 오늘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머문 만큼 반드시 떠나야 한다. 방랑자인 유목민들은 자신들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그들의 안전은 오직 하늘만이 알고 있을 뿐 또한 하늘만이 그들을 지켜낼 수 있다. 그들은 파란 하늘을 땅위에 내려앉게 하였다. 그것이 어워이다.
마을 어귀 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1호차 운전석 위에도 파란 천이 달려있고, 길을 달리는 오토바이 운전대에도 파란 하늘을 달고 다닌다. 겸허한 마음으로 하늘의 뜻을 섬기는 이들 - 그들이 몽골인이다.
유목민은 그들이 갈 길이 아무리 바빠도 반드시 어워를 세 번 돌며 자신의 앞날의 행운을 빈다. 차 안에서 운전사는 어워를 통과할 때 크략션을 세 번 울려 도는 것을 대신한다. 칭키스칸 역시 하늘을 존경하고 전쟁을 시작하기 전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유목민을 대표하는 크리스트교는 포교를 나갈 때 반드시 2인 1조로 다닌다. 그것은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유목민들이 습성일 것이다. 이에 반해 불교는 포교를 나갈 때 반드시 혼자 다녀야 한다. 아마 농경국가에서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배려일 것이다. 요즈음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어워에서 맨 땅에 깔고 앉아 먹는 점심은 맛있었다. 도시락이 우리나라에서 1만 원이라 해도 될 만큼 풍성하게 싸 주었다. 점심을 먹고 떠나려고 하는 즈음 서양인을 실은 찦차가 네 대 도착했다. 반갑게 서로 인사를 하고 그들은 점심 먹을 준비를 했다. 우리는 고비를 향해 다시 출발했다.
고비를 향해 출발하면서 떠남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우리의 일생은 늘 떠남에서 시작한다. 시시각각 다음 순간을 맞이하지만 바로 순간순간을 우리는 떠나야 한다. 인생은 떠남에서 시작해 바로 새로운 것은 만나는 것이며, 만난 것 같으면 바로 보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 세상 모든 존재하는 것은 늘 변하는 것이요 변한다는 것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닌가? 무엇도 머무를 수 없고, 머무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움직인다는 것이며 움직인다는 것을 떠남을 의미하는 것이다.
두 대의 차는 초원으로 우리를 인도했다. 초원은 끝없이 이어졌다. 한 시간 두 시간....... 슬그머니 고요함이 우리를 찾아왔다. 차 안에서 말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저 가끔 덜컹거리는 길 위에 몽골가수가 부르는 노래 소리만 깨어있고 사방은 조용했다. 도시가 주는 부산스러움, 북적거림, 바쁜 스케줄 등은 내 안의 고요를 송두리 채 없애고 항상 쫓기는 마음을 갖도록 만들었는데 조용한 평화가 찾아왔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여기는 어디인가?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무엇 때문이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이 고요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내 안의 이 평화로움은 왜 이제야 깨어나는지?
의문이 끝없이 이어졌다. 하늘엔 구름이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이따금 검은 구름이 나타나고 그 밑을 지날 때는 시원한 바람을 주었다. 고요함과 평화로움은 같은 것일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평화로움을 도시에서 찾는 것은 아닐까?
운전사 바쓰까는 무표정한 얼굴로 길을 잘도 찾았다. 초원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에서 그는 가끔 눈을 돌려 좌우를 한 두 번 살피고는 초원을 달리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길을 찾을까? 유목민의 유전자는 길에 대한 감각을 하나 더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수리 한 마리가 허공을 한가로이 날고 있었다.
몽골의 유명가수가 부르는 노래가 자장가로 변할 때 차가 멈추었다. 갑자기 내린 비로 길에 물이 고여 건너기 어렵단다. 뒤를 따라온 2호차 바퀴가 또 펑크가 나서 1호차 바퀴를 빌어 갈아 끼우고 다시 출발했다. 그들은 단순히 운전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펑크를 때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차를 완전히 분해해서 새로 조립할 정도의 우수한 정비사이기도 했다. 거기에 유목민만이 갖고 있을 법한 내비게이션 유전자(뛰어난 공간지각력) 같은 첨단장비를 소유한 것이다. 그들은 낮에는 해를 보고 길을 찾고 밤에는 별을 보고 방향과 시간을 안다고 한다.
두어 시간 간격으로 양떼나 말떼가 나타난다. 가끔은 소떼도 있다. 염소는 목을 바짝 세우고 풀을 뜯는데 양이란 놈은 무슨 죄를 지은 것처럼 한없이 고개를 숙이고 풀을 뜯는다. 미영씨의 설명에 의하면 염소는 부드럽고 맛있는 새싹을 찾아내는 능력을 가진데 비해 양은 그것이 부족하다고 한다. 염소가 찾아내 맛있게 먹으려 하면 양이 달려들어 함께 먹는다고 한다. 가끔 만나는 양떼조차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멀리 말을 타고 달리는 목동은 우리에게는 관심도 없지만 우리는 그의 뒷모습만 보아도 반갑다. 우리는 계속 달리고 또 달렸다.
점심을 먹고 1시경에 출발해서 무려 네 시간을 달렸어도 아직 끝이 안보인다. 초원 한가운데는 작은 모래 언덕이 생긴다. 언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작은 모래무지라고 할까? 그것은 기이하게도 염소 똥이나 양 똥, 말 배설물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염소 똥 무더기나 말 똥 무더기에 바람이 날린 모래가 이 똥 무더기에 걸려 작은 모래무지가 되고, 모래에 배설물이 묻힐 정도가 되면 어디선가 날아온 씨앗이 이 배설물더미를 바탕으로 싹을 틔운다. 이 작은 싹에는 또 모래가 날아와 쌓이고, 말똥구리, 풍뎅이 등의 작은 벌레의 안식처가 되고, 이것을 노리는 작지만 다양한 설치류가 이 모래 무지위에 구멍을 파고 자기 집으로 삼는다. 이 쥐를 사냥하며 여우과에 속하는 수많은 작은 짐승이 산다. 하늘 위에서는 수리 종류가 이들을 노린다. 이 모래무지가 작은 초원을 이루는 것이다. 똥은 쓸모없는 것을 배설하는 것이고, 이 배설물은 어떤 생물에게는 아주 훌륭한 안식처가 되는 셈이다. 우리는 인간의 기준으로 삶을 바라보는 것에는 익숙해있지만 새나 쥐의 입장에서 혹은 풍뎅이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것일 수 있다.
다시 차는 덜컹거리며 달린다. 차안에서 빠스카의 가족상황에 대해 물었다. 그는 여섯 살 먹은 딸 하나를 키우고 있으며 앞으로 더 나을 계획은 없다고 한다. 몽골에서 자기 차를 소유한 이들은 상당히 부자측에 속하고, 벌이도 좋다고 한다. 현대 중고차인 스타랙스는 우리나라 돈으로 약 1천 만 원 정도에 거래된다고 한다. 그 정도라면 중산층 이상이고, 몽골 1인당 국민소득이 약 500불정도 되는데, 울란바타르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약 2천불 정도라고 한다. 물론 빠스께 같은 사람은 중산층에 속한다. 여름에는 주로 여행객을 상대하고 여행객이 없을 때는 시내에서 택시 업을 한다고 한다. 시내에는 영업용 택시가 따로 있지만 이렇게 자가용 영업을 하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한다.
몽골에는 성이 없고 아버지 이름의 첫 글자를 자식이 쓴다고 한다.
빠스께의 정식이름은 체 바스다르치인데 그냥 빠스께라고 한단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체베네라고 하는데, 빠스께의 체 바스다르치에서 체는 아버지이름의 첫 번째 글자에서 온 것이라 한다. 딸의 이름은 후슬링인데 정식이름은 아버지 이름의 첫 글자인 바스다르치에서 바를 따라 바 후슬링이라고 한다. 물론 아버지 이름의 첫 번째 글자를 따랐기 때문이다.
차는 계속 달리고 있었다. 드디어 480km를 달린 우리 일행은 차강어워 캠프에 도착했다. 10시간 30분의 길고 긴 여정이었다. 10시간 30분을 달리는 동안 딱 두 개의 솜(우리의 읍면 정도- 솜은 약 20-50가구)을 거쳤다. 울란바타르에서 305km를 달려 이르뜬 달라이 솜에서 기름을 넣고, 다시 130km를 달려 새흥어워 솜에서 기름을 넣은 후 20km를 달려 차강어워 캠프에 도착한 것이다. 우리가 짐을 푼 것은 게르였다. 낯설고 생소했다. 작은 게르에 들어가 짐을 풀고 나자 저녁으로 몽골식 국수가 나왔다. 하루에 두 봉지씩 먹기로 계획했던 김치가 네 봉지나 없어졌다. 평소에 나는 소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소고기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싫기 때문이다. 그런데 몽골 음식에는 양이나 소고기가 꼭 나오는데 그리 역겹지 않다. 소외양간에서 사료를 먹으며 스트레스를 받으며 사는 소가 아니라서 그런지 어떤지 그냥 먹을 만하다. 어쩌면 배가 고파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부드럽고 냄새가 덜 역겨운 것은 사실이다.
아침부터 저녁 공연을 준비한다고 난리치던 초이나 자이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공연은 ‘언제 하냐?’ 고 하자 내일로 미루었다고 한다. 하기사 자기가 기획하고 자기가 공연하고 자기가 관객이 되는 공연이니까 미루어진들 어떠하리. 샤워를 대강하고 게르에서의 첫날밤을 맞이했다. 비가 후두둑 내리면서 게르의 천장을 닫고 잠을 청한다. 청하는 것이 아니라 잠에 빠져버렸다.
8월 8일(토)
집에서는 아침 6시 50분이면 TV가 저절로 켜진다. TV소리에 눈을 뜨면 이내 지하차고에서 차 빠져 나가는 소리, 자동차의 경적소리, 기차소리, 어떤 날에는 이삿짐 나르는 소리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다. 눈을 뜨니 게르 상부의 지붕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요란하다. 바람 소리에 문득 내 마음 저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소리는 각종 기계가 만들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무슨 울림 같은 소리였다. 이윽고 옆 게르에서도 소리가 났다. 대장이 밤새 떨어져 잔 쁘니에게 옷을 달라는 소리 같았다. 두 사람은 한시라도 떨어져 살 수 없는 사이인 것 같다. 무슨 일이든 둘이 함께 한다. 둘이 서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고, 알려주는 것에 익숙하다. 카메라를 둘러메고 게르 밖으로 나왔다. 흥 선생이 게르에 대하여 이야기 해줬다. 게르는 바닥을 평평하게 한 후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건다. 그 위에 양털로 만든 카펫트 보다 두꺼운 천을 두른다. 물론 위에도 천을 두르는데, 생각보다는 훨씬 따뜻하다. 가운데에는 난로가 놓여 있는데, 이 난로에 불을 넣으면 곧 게르 안이 훈훈해지며, 두꺼운 양털 카펫이 이 온기를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구조이다. 잔 나뭇가지를 밑에 넣고 밑불을 한 후 그 위에 소똥이나 말똥 마른 것을 넣는다. 그 냄새가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다. 몽골 인들은 추운 겨울에는 게르에 살고, 더운 여름에는 아파트에 산다고 한다.
카메라를 둘러메고 나와 여기저기 사진을 찍었다.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고 흥이 한국에서 가져간 누룽지를 끓인다고 포트를 달라고 한다. 포트에 누룽지를 넣고 끓이자 구수한 냄새가 아침 배를 자극한다. 식당에 들어서자 간단한 빵에 계란 부치기, 소시지 등이 아침으로 나왔다. 옆 테이블에서는 대구에서 온 사람들이 아침을 먹고 있는데, 그들은 어제 울란바타르를 출발해서 13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길을 잘못 들어 12시경에 도착했다고 하니 갖은 고생을 한 것 같다. 새삼스레 빠스까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빠스까는 이 초원을 18세 때 처음으로 달렸다고 한다. 지금 35세인데 17년 간 운전을 하며 초원 곳곳을 누볐다고 하니 운전기사를 잘 만난 것도 여행의 행운이라면 행운일 것이다. 아침 식사로 나온 계란 부치기가 뭔지 모를 부드러움을 느끼게 했다. 우유를 넣었는지? 물을 넣었는지? 설왕설래 할 때 미영씨가 답을 줬다. 계란을 풀 때 밀가루를 조금 넣으면 아주 부드러운 계란 부치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아침 식사 후 엉깅히드를 둘러보았다. 엉깅이란 지역이란 뜻이고, 히드란 사원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엉깅에 있는 사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티벳불교의 ‘엉깅 히드’ 는 티벳 불교의 한 사원인 셈이다.
‘엉깅 히드’는 강을 끼고 양쪽으로 발달했는데, 강이 마르면서 사원이 쇠퇴한 것으로 짐작된다. 몽골의 티벳불교는 1937년이후 공산정권이 수립되면서 약 700여 개의 티벳불교는 문을 닫고, 승려들은 환속되었다고 한다. 1990년 자본주의 정부가 수립되면서 다시 관광지로 탈바꿈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엉깅히드에는 승려 한 분이 남아 폐허를 돌보고 있었는데, 마침 지금은 자리를 비우고, 신자 한 명이 사원과 유물을 관리하고 있었다. 한 때는 융성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많은 유물을 보여주고, 여기저기 깨어진 기왓장에서 언듯언듯 드러나는 연꽃 등의 유물은 과거를 그리워하는 듯 했다. 사진을 찍으려면 1달러를 내야 한다고 한다. 나는 1달러를 내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러나 자이는 사원 게르나 유물 게르 할 것 없이 들를 때마다 10달러 지폐를 아무도 모르게 내놓았다. 사원 앞강은 한 때 꽤 많은 물이 흐른 듯 비교적 폭이 넓은 흔적이 있었지만 불행히도 물이 흐르지 않았다. 강 건너편에는 몇몇 게르가 아직도 있었으나 이쪽에 비해 별반 사정은 나아 보이지 않았다. 물의 소중함을 우리는 모르고 지낸다. 흔히 이야기하는 지구온난화나 사막화 등을 여기에 와보니 실감할 수 있다. 융성했던 한 사원이 불과 20여 년의 짧은 세월에 문을 닫아야 한다고 생각해 보라.
오늘은 고비 사막을 달려야 한다. 고비 사막으로 알고 있던 내 상식이 잘못되었음을 미영씨의 설명에서 알 수 있었다.
‘고비’ 란 물이 없어 풀이 자라지 않는 거친 땅이라는 뜻이다. 즉 황무지를 말한다. 우리가 고비 사막이라고 하면 흔히 모래사막을 생각하는데, 고비에는 여러 개의 모래사막이 있긴 하지만 그 넓이는 아주 작고, 대부분은 모래가 아닌 암석 사막인 것이다. 모래사막을 몽골 인들은 엘스라고 하였다. 고비는 전체를 서부, 중앙, 남부로 나뉘는데 몽골어로 표현하면 ‘서부고비’는 ‘도로노고비’, ‘중앙고비’는 ‘돈도고비’ 혹은 ‘만달고비’, ‘남부고비’는 '오문고비‘라고 한다. 그 크기가 동서로는 약 1600km, 남북으로는 약 1000km에 이른다. 짐을 싸서 차에 싣고 우리는 고비를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의 일정은 ‘엉깅 탈’(엉깅 뜰이란 뜻이다)이란 돈도고비(중앙고비)에서 오믄고비(남부고비)까지 달리는 것이다. <참고로 엉깅골은 엉깅 강을 말한다.> 먼지 나는 사막길을 시속 90에서 100km로 달린다고 생각해 보라. 두 시간을 달리면서 우리는 마주 오는 차 두 대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벌판을 마음껏 달렸다.
한참을 달리던 우리 눈에 갑자기 거대한 호수가 나타났다. 아니 호수에 잠긴 산이 나타났다. 차에서 내려 호수를 감상하느라 둘러보니 앞쪽만 아니라 좌우로도 길고 긴 호수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신기루였다. 흡사 호수 한 가운데 커다란 산이 떠 있는 것 같은 환상적인 광경이 연출되었다. 카메라의 셔터를 정신없이 눌러댔다. 흥의 설명에 의하면 아침 햇살이 퍼지고 대지에 내려앉았던 이슬이 증발되면서 일정한 높이까지 오르게 되는데 그 높이의 공기는 아직 더워지지 않아 거울 구실을 하면서 증발되는 수증기를 비춘다고 한다. 그러면 흡사 물처럼 보여 신기루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너무나 신기하고, 너무나 환상적이었다. 신기루는 많은 생각을 하게했다.
내가 50년 동안 찾은 것은 무엇인가?
지금의 내 생활은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가?
지금의 생활을 계속해야 할 의무가 있는가?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 때마다 아주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었고, 그 일을 해결하느라 늘 정신이 없었고, 그런 것들에 대해 속상해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했는데, 지나고 보면 그저 없었어도 아무런 불편이 없을 것이었고, 그 때 그렇게 가슴 아프게 생각했어야 했나? 내 모든 혼을 바쳐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그런 것으로 이뤄졌다. 지금 또 다시 고민하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몇 년이 지나면 그저 그렇고 그런 일이 아닐까?
우리 앞에 나타난 신기루 같은 존재가 아닌가? 내가 이뤘다고 생각했던 것을 돌이켜 보면 이뤄낸 것이 아니었고, 내가 실패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돌아보면 실패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저 그것은 당시의 신기루였을 뿐이었다.
다시 차는 달리고 있었다. 이제 침묵은 낯설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난 사건이 생각이 났다. 아침 면도를 하기 위해 세면장에 들렀는데, 한국에서 온 여행객이 불평을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세면대의 물이 자기 마음대로 나오지 않았고, 수도꼭지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나를 돌아보면서 자기의 의견에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후진국이라 이 모양이죠? 참 짜증납니다. 이러니 후진국을 벗어나지 못하지요?” 별 것 아닌 수도꼭지 때문에 그는 여행을 망치고 있었다. 나는 못들은 척하고 면도를 하는데 그는 다시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마침 지하수를 끌어오는 수도관에서 나뭇잎이 섞여 나오자 그는 “참 짜증나요. 다신 오고 싶지 않은 곳이죠? 이러니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 거요. 선진국 되긴 틀렸지요?” 나는 그를 돌아보며 한마디 했다. “설악산에 가도 수도꼭지에서 그런 것 나올 때 있거든요” 그는 갑작스런 나의 말에 당황해 했다. 아마도 두 가지로 생각 했을 것 같다. 나를 몽골 인으로 짐작했거나 혹은 그 캠프의 관계자로 알았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는 서둘러 그 자리를 떴다. 그 일이 갑자기 생각났다. 고생을 하기 싫으면 몽골 올 돈으로 서울 좋은 호텔에서 한 일주일 묵어도 될 것이고, 제주도를 가면 그 돈으로 황제처럼 1주일을 보낼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였다. 선진국에서 온 사람이란 수도꼭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그런 문화를 용인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있는 사람을 선진국 사람이라고 해야 하는데, 단순히 돈이 많은 것으로 선진국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아니 지금 갑자기 그 사람의 말에 나를 되돌아보니 나 역시 선진국을 단순히 돈이 많은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뒤에다 혼자 이야기 했다. 우리가 소주를 만들 줄 모를 때 그들은 우리에게 소주 만드는 법을 가르쳐줬고, 여러 가지 문화를 전해주었다고.......세상은 돌고 도는 것임을 꼭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생각은 달리는 벌판 위에 내리쬐는 햇볕처럼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선진국 사람인 나는 무엇을 가졌는가? 내가 가진 자격증은 여기서는 아무런 쓸모없는 것이었다. 국사 선생은 단지 한국에서만 사용할 수 있을 것이고 운전면허증, 부동산 뚜쟁이를 할 수 있다는 자격증은 몽골에서는 한 마리의 양을 사고파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수 백 마리의 양이 어쩌다 남의 것과 섞일 때가 있는데 이들은 자기 소유의 양을 정확하게 분리한다고 한다. 대학 졸업장은 그것을 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교사 자격증은 길 한 복판에 나를 놔두었을 때 집을 찾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결국 내가 가진 것은 내가 가진 것을 인정하는 사회에서나 쓸모 있는 것이 되고, 인간은 그 환경을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들이 생각하는 돈과 우리가 생각하는 돈의 가치와 정도는 서로 다를 것이다. 특별한 조건에서 우리의 삶은 알게 모르게 규정되어 버리는 것이다.
두 시간 반을 정신없이 달려서 12시 50분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바얀작이라는 곳이다. ‘바얀’은 ‘많다’는 뜻이며, ‘작’는 나무 이름이다. 작 나무는 잎 대신에 줄기가 발달하고 증산작용을 하는 잎보다 물을 흡수하는 뿌리부분이 더욱 발달되어 있는 나무라고 한다. 바얀 작이란 작나무가 많은 곳을 뜻한다. 그러나 이것도 사막화 현상으로 인하여 그 나무조차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몇 그루만이 남게 된 것이다. 우리는 거북이 모양의 아름다운 식당에서 점심식사로 몽골식 소고기 비빔밥을 먹었다.
공룡화석 출토지라는 곳은 생각보다는 엉성했다. 사막 한 가운데 어떻게 그런 황토가 쌓일 수 있었을까? 하는 경이로움은 있었으나 커다란 황토 산을 본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관광지로 개발이 안된 것인지 관광지로 개발할 수 없는 것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자연사 박물관에 이곳에서 출토된 공룡화석이 있다는 설명을 듣고 또 다시 달렸다.
다시 오후 2시 50분 우리는 멀츠그 엘스에 도착했다. 고비 한 가운데 있는 모래사막이다. ‘멀츠그’란 ‘작은’이란 뜻이고, ‘엘스’는 ‘모래’를 말한다. 고비 한 가운데 있는 모래사막을 말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고비 사막이란 맞지 않는 말이다. 50° 가까운 경사의 모래언덕 정상에 오르려니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뒤편은 90° 가까운 모래 절벽이다. 정상에 오르니 갑자기 모래 바람이 온 몸을 때린다. 이 강하고 거친 바람은 모래 구름으로 변해 모래 언덕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고 하루 저녁에 없던 모래 언덕을 만든다고 한다. 모래 알갱이는 입, 코며 옷 속으로 파고 들어온다. 간신히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데, 낙타 떼가 나타났다. 낙타를 태워주고 돈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게르로 이동하여 간단히 우유차를 대접 받고 낙타를 탔다. 쌍봉낙타는 고비가 원산지라고 한다. 혹은 물렁물렁한 것이 생각보다는 부드러웠다. 처음 타는 낙타라 걱정되기도 했으나 즐거운 마음으로 경험을 했다. 자이가 탄 낙타를 모는 어린 소녀가 자이에게 노래를 시키고, 자신도 한 곡을 뽑았다. 중학생쯤은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내가 옆으로 가자 나에게도 노래를 시켰다. 나는 한오백년을 한곡 폼 나게 불어 제켰다. 답으로 그 애와 나의 보조 아이가 함께 몽골의 민요를 부르는 듯 했다.
여행은 계속되었다. 옐링암 계곡이다. 옐링암이란 몽골말로 독수리계곡이란 뜻이다. 황량한 벌판의 끝에 이런 산이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흥의 설명에 의하면 셰일로 이루어진 바위산이라고 한다. 계곡 입구에는 수많은 쥐구멍이 있고, 이 쥐를 노리는 여우과 동물이 가끔 보였다. 때마침 해가 지는 시간이라 산 정상에만 해가 비추어 그 장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갖가지 야생화에 나는 처음으로 카메라 접사를 이용해 이름 모를 꽃들을 찍어보았다. 계곡 속은 찬 물이 흐르고 있었고, 열흘 전까지는 얼음이 있었다고 했으나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보아 열흘 전이 아니라 10년 전에는 얼음이 나왔는데, 이제는 온난화 현상으로 얼음이 얼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밀양의 얼음 계곡을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도 얼음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계곡을 따라 무명화가와 무명 조각가가 각종 그림과 조각품을 허름한 천에 얹어 팔고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몇 장의 그림과 조각품을 산 후 계곡을 나왔다. 이름 없는 무명작가의 그림이면 어떻겠는가? 몽골의 냄새만 풍긴다면.......
캠프에 도착하자 어제보다는 물 사정이 나은 화장실과 샤워실이 우선 마음에 든다. 조금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샤워를 한 후 몽골 전통식인 허르헉이라는 음식을 먹게 되었다. 허르헉이란 양고기를 부위별로 잘라 감자나 당근을 넣고 달군 돌로 익힌 고기를 말한다. 외부에서 불을 전혀 넣지 않고 단지 달군 돌로 고기를 익힌다는 것은 생각해내기 어려운 요리 방법이다. 고기와 함께 고기를 익힌 돌을 함께 가져다준다. 뜨거운 돌을 좌우로 번갈아 가며 손을 뜨뜻하게 하면서 먹어야 제 맛이 난다고 한다. 아마도 고기를 맨손을 먹는데 기름이 굳지 않으라고 한 것 같기도 한데, 건강에 좋다니 모두 손에 들고 먹는데 그 맛이 일품이다. 한국에서 가져간 참이슬은 참으로 귀한 이슬이었다. 여자들을 위해 포도주 한 병을 주문했다. 갑자기 2호차 운전기사가 일어나 고기를 들고 와 골고루 분배한다. 미영에게 그 의미를 물으니 가장 맛있는 부위는 혼자 먹으면 안 되고 골고루 나누어 먹는다고 한다. 유목민족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했음을 알 수 있다. 농경민족은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엄격한 위계질서가 필요했다면 이들은 누구 하나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한 명이 권력을 독점하면 아니 되었을지도 모른다. 1호차 기사는 뼈를 깨서 골수를 내서 우리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옛날 인간의 조상이 힘이 없었어도 그들의 두뇌를 발달시키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던 원시의 힘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세상 모든 동물 중에서 뼈의 골수로 단백질을 보충한 것은 인간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감히 만수의 제왕으로 우뚝 선 것이 아닌가? 먹이사슬의 가장 상위를 차지한 것은 골수에서 나온 단백질 때문이리라.
술과 허르헉으로 배를 채운 우리를 찾은 것은 뜻밖에도 아르바이트 대학생이었다. 그는 미영과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 캠프에서 일하며 저녁이면 여행객을 대상으로 노래를 불러 주고 팁을 받는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쾌히 그를 받아들여 몽골 노래 몇 곡을 들었다. 우리를 위해 그는 팝송으로 ‘let it be'를 불러 주었다. 우리가 아는 유일한 노래였다. 그날 밤 그에게 준 팁 10불은 그의 앞날에 큰 돈으로 변할 것이다. 젊다는 것은 기죽지 않고 자신을 파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변변치 않은 것이라 해도 말이다. 그의 앞길에 좋은 일이 있기를 바랬다.
별이 쏟아진다는 초원에 누었으나 오늘 저녁도 먹구름이 끼어 별 볼일이 없었다. 별 대신 잠이 쏟아진다.
8월 9일(일)
원래 오늘 두 시간 정도로 예정되어 있던 독수리 계곡을 어제 저녁 본 관계로 아침에 시간이 많이 남았다. 미영이 할머니가 살고 계시는 곳은 우리가 오늘 가야 할 오믄고비(남부고비)의 아이막(도청 소재지)인 달라자가가드이다. 미영이가 한국에서 돌아와 할머니와 함께 살던 곳도 이곳이고 고등학교를 다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삼촌과 막내 고모도 역시 이곳에 산다고 한다. 우리는 할머니 집을 구경하기로 했다. 미영이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보더니 가능하다고 한다. 점심 역시 고모가 운영하는 음식점에서 먹기로 하고 아침 9시에 캠프를 출발하였다.
할머니에게 드릴 선물로 보드카와 사탕 그리고 한국에서 가져간 컵라면을 준비하였다. 한 시간 내내 미영이는 할머니 생각에 잠긴 듯 했다. 아마도 돌아가신 아버지와 한국에 있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더할 것이다. 할머니는 우리를 많이 기다린 듯하다. 아마 손녀딸이 돈을 버는 모습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애처로울 것이다. 죽은 아들을 대하듯 우리를 성심껏 대해줬다. 일반 가정에 들러보니 게르 안에는 달라이 라마 사진을 걸고 불상을 모시고 있었다. TV, 냉장고를 비롯한 각종 전자 제품도 있고, 장한 어머니 상을 수상했다는 기념품도 걸어 놨다. 한국으로 시집간 첫 딸이 나은 외손자 사진을 꺼내 우리에게 보여준다. 평소에는 혼자 살지만 작은 아들과 두 딸이 같은 도시에 살기 때문에 외롭지는 않다고 하였다. 그래도 큰 손녀 딸이 오니 갖가지 과자며, 우유 차를 내 놓고, 정성을 다해 편하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네 할머니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할머니 댁을 나온 우리는 시내 관광을 나섰다. 시장과 양품점 은행과 미용소 우리 마을에 있는 것은 모두 있었다. 법원 건물도 있고, 기계 수리점도 있었다. 이 도시에는 세 개의 학교가 있는데 초중고가 모두 한 울타리에 있으며, 건물만 달랐다. 무작정 학교에 들어가 구경을 하자고 하였다. 방학 중이었지만 초등학교 학생들 몇몇이 나와 공부하고 있었다. 나머지 공부 혹은 보충수업을 받는 중이라고 하였다.
여선생님 두 분은 성실하고 친절하게 학교에 대해 소개해 주었다. 우리는 기념 사진을 찍고 교실에 들어가 아이들과 놀기도 하였다.
시장에서는 능금을 샀는데, 모두 중국에서 수입한 것이란다. 두어 시간을 보내고 나니 더 이상 갈 곳도 없다. 식당에 오니 고모와 미영이는 점심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다. 삶은 양고기를 양배추에 싸서 다시 기름에 살짝 튀긴 요리인데 아주 맛이 있었다. 러시아식이라는 설명을 곁들였다. 일요일이라 식당 문을 열지 않는데 조카딸을 위해 특별히 문을 열었다고 한다. 이 식당에서 미영씨는 고등학교 다닐 때 고모를 도왔다고 한다. 고모나 미영씨나 서로에게 할 말이 많았을 것이다.
점심을 먹고 다시 돈도고비(중앙고비)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20여 분을 가다가 미영이가 핸드폰을 고모네 집에 놔두고 왔단다. 전화를 해서 고모부와 고모가 직접 가져 오는 동안 킴이 체했다고 해서 초원 한복판 엎드리게 한 후 흥이 치료한다고 발로 밟고 난리가 났다. 아마도 고모를 한 번 더 보려는 마음을 알았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없는 미영씨가 자꾸 눈에 채인다. 두어 시간을 달려 이름 모를 작은 솜에 쉬었다. 작은 구멍가게에 들르니 70년대식 하드를 판다. 몽골 여자들은 대체로 덩치가 크다. 부족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몽골족은 덩치가 크고, 하체가 길다. 가게를 보는 아주머니의 키가 170은 넘어 보인다. 우리도 옛날 자그마한 면 소재지에서 작은 가게를 한 적이 있다. 그때의 시절로 되돌아 간 것처럼 마음이 즐겁다. 여자들이 화장실에 들른 후 거적문이 달려있는 화장실에 갔다. 대부분 초원에서 아무데나 볼 일을 보았기 때문에 시골 화장실에는 처음 들어갔다. 그 바닥이 매우 깊었다. 우리네 시골 화장실은 밑이 보이거나 심지어 돌 두 개만 있는 곳이 많았는데, 깊이가 거의 5, 6m는 족히 돼 보인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농경민족에게 인분은 거름으로 요긴하게 쓰이는데 비하여 유목민에게 인분은 거의 쓸모없을 것 같다. 깊이 파서 사용한 후 묻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조용한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며칠 사이에 몽골인에 대한 많은 상념이 생겼다. 내가 본 몽골인은 초원의 지배자였다. 자연에 의존해 살지만, 파괴하지 않고, 초원의 지배자로 최후의 포식자로서의 삶에 익숙한 것이다. 몇 년 전 안데스 산맥을 간 적이 있다. 잉카나 마야 모두 자연에 의존해 살지만 자연을 완전히 정복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그들은 대부분 독수리와 퓨마 그리고 뱀을 숭배했다. 잉카나 마야인만이 아니라 안데스를 터전으로 살아가던 많은 부족들은 공통으로 위의 세 동물을 숭배하고 두려워했다. 아마도 정글과 산악지대를 살면서 그 동물들이 인간의 삶을 위협했으리라는 짐작이 갔다. 이에 비해 몽골 인들은 초원을 장악하고, 양과 염소와 말을 부리며 다른 동물로부터 이들을 보호하며 최후의 포식자로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숭배하는 어워란 하늘을 뜻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워에 건 푸른 색 천이 하늘이지만 하늘만이 자신의 상대일 뿐 지구상의 어떤 동물로부터 위협을 느끼지는 않는 것이다. 안데스를 여행하면서 동물과 인간의 조화를 느꼈다면 인도를 여행했을 때의 느낌은 이것과는 조금 달랐다. 인도를 여행할 때 나는 신의 세계를 느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신과 연결했다. 쥐도 원숭이도 까마귀도 신이 될 수 있었다. 인도 전역은 인간과 신의 접점이고 인간과 신의 어울림이었다. 이번 몽골 여행에서는 동물도 아닌 신도 아닌 하늘과 인간의 어울림이라는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이다. 곳곳에 있는 어워, 게르 안과 차안, 그리고 가게에 걸려있는 푸른 천을 보면서 하늘이 거기 있음을 알 수 있었다.
7시 40분이 돼서야 돈도고비의 아이막인 만달고비에 도착했다. 차에 기름을 넣고는 우리 캠프가 있는 박 가지링 촐로로 이동하였다. 약 70km 떨어진 곳이라 한 시간이면 되리라 생각했는데, 길이 좁고 땅이 고르지 않아 두 시간이 훨씬 더 걸렸다. 그러나 이 길을 오랫동안 잊지 않을 것이다. 너무나 환상적인 초원에서의 일몰을 보았기 때문이다. 필리핀 마닐라 항, 캄보디아 밀림, 홍도 산위에서 본 일몰이 아름다웠다. 부석사와 안면도에서 본 일몰도 생각이 났다. 초원 전체를 빨갛게 물들이다가 일순간 암흑으로 밀어 넣는 황홀하면서 무서운 일몰이었다. 초원에서 해가 지자 어둠이 지척에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알아챘다. 산 위에서 해가 지면 잠시 동안은 어둡지 않지만 초원은 이와는 달랐다. 게르에 도착하니 이미 어두웠다. 간신히 짐을 옮기고 나서 저녁을 먹었다. 가져간 소주도 동이 나고, 체력도 바닥을 드러낸다. 날씨는 썰렁했다. 관계자에게 부탁해서 난로에 불을 넣었다. 약간의 팁을 받은 후에 나뭇가지 서 너 개를 더 넣어 준다. 오늘 밤에는 별을 보았으면 했지만 끝내 하늘은 우리에게 쏟아지는 별을 보여주지 않았다.
두런두런 얘기하던 흥의 코가 게르 천장을 울린다.
8월 10일(월)
늦은 아침을 먹고 박 가지링 촐로의 기암 괴석을 구경했다. 국립공원이라 몽골의 그랜드 캐년이라고 한다. 아직 미국의 그랜드 캐년을 가보지는 못했으나 쁘니의 설명에 의하면 그랜드 캐년은 아주 볼만하다고 한다. 단순히 기암 괴석인 줄 알고 출발했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바위에 암각화가 그려져 있다. 산양의 그림과 여러 동물의 그림들이 보인다. 우리 인간이 생태계의 최고봉의 자리에 앉은 것은 바로 이 기록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보다 날래고 빠른 호랑이나 사자가 만약에 그들의 사냥을 위한 각종 자료를 그림이나 글로 표현해서 후손에게 전했다면 우리가 그것들을 이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냥법이나 사냥감이 많은 곳을 작성해서 후손들에게 넘겨줄 수 있었던 유일한 동물이 바로 인간이 아닌가?
수십 만 년 전 그들의 정보를 후손에게 남기기 위하여 아니 후손이 아닌 다른 동료들에게 남기기 위하여 바위에 새긴 구석기 시대의 산양의 모습이 너무도 선명하게 남겨져있다. 이 그림은 이름 모를 어느 구석기 사람이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뚜렷한 증거이다.
어느 글에선가 읽은 적이 있는데 20대만 거슬러 올라가면 나와 관계있는 사람이 20억 명이라고 한다. 즉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20억 명인 셈이다. 30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60억 명으로 늘어난다고 한다. 그 60억 명의 할아버지 할머니 중 한명이라도 사고나 동물의 습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나는 없는 셈이다. 그런 생각은 지금의 나를 다시 되돌아보게 만든다. 지금의 나는 무엇인가? 어떠한 인연으로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것이며 과연 내가 무슨 일을 하기 위하여 여기에 사는 것인지? 만약 내게 주어진 임무가 있다면 과연 그것은 무엇인가? 여기저기 그려져 있는 작은 그림은 많은 상념을 내게 남긴다. 경치가 아주 그만이었다.
바얀 블로그 캠프에는 볼 것이 많았다. 돌멩이로 주차 표시를 한 주차장이며 나무가 그대로 화석이 되어버린 규화목도 잊지 못할 것이다. 캠프 주변의 낮은 언덕에는 산양이 조각되어 있다.
여기저기 둘러보던 우리는 동굴이 있다는 소리에 동굴을 찾던 중 국립공원 관리인을 만났다. 그는 친절하게 우리를 동굴로 안내했다. 천연동굴을 기대하던 우리는 그 동굴이 천연이 아니라 수정이나 무슨 광물을 채취하던 인공 광산임을 알고 실망했다. 게다가 우리를 안내했던 그 관리인은 입장료를 내라고 한다. 가이드와 한참 실랑이를 하였지만 가이드는 어쩔 수 없이 입장료를 내고 말았다. 재수 없으면 관리인에게 입장료를 내고, 관리인을 만나지 않으면 그냥 구경해도 되는 곳이었다. 11시 30분 우리는 고비를 떠나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울란바타르를 간다고 하니 저절로 신이 났다. 이 고비를 벗어나는 것이 그렇게도 반가울 수가 없었다.
차는 다시 고비를 달리고 초원을 가로 지른다. 고비를 달리고 초원을 가로 지를 수 있는 것은 그곳이 비어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뜰이 나무나 돌로 가득 차 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며 지금처럼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늘에 떠 있는 수리 한 마리나 들을 달리는 사슴 한 마리도 새삼스러워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심지어 차 앞을 가로 지르는 작은 쥐 한 마리도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노란 꽃은 노래서 예뻤고 보라색 꽃은 보라색이라서 볼 만 했다. 자연은 그냥 아름다운 것이지 새삼스레 무슨 설명이나 해석을 붙여야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닌 것을 이제 이 여행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노자는 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는 텅 비어있다.
그러나 아무리 퍼내어 써도
고갈되지 않는다.
그윽하도다!
만물의 으뜸 같도다.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얽힘을 푸는 도다.
그 빛이 뛰처남이 없게 하고
그 티끌을 고르게 하네
맑고 또 맑아라!
저기 있는 것 같네
나는 그게 누구의 아들인지 몰라
하나님보다도 앞서는 것 같네
넓디넓은 들판을 차는 끝없이 달리고 있었다. 사방은 고요했고, 뙤약볕은 사정없이 내리 쬐고 있었다. 세 시간을 달려 오후 두시 반에 작은 솜에 도착했다. 그곳은 여행자를 위하여 음식을 파는 약 10여 채의 음식점이 있는 아주 작은 솜이었다. 순전히 몽골식으로 점심을 먹어야 했다. 음식을 만드는 동안 우리는 여기저기 동네 구경을 했다.
한 삼십 여 분이 지난 후 두 가지 음식을 내놨다. 삶은 국수에 양고기를 삶아서 고명으로 얹은 요리와 양고기를 깍두기처럼 썰어서 삶은 국에다 밀가루를 반죽해 구운 호떡같이 생긴 음식이다. 우리는 밀가루로 국수를 만들어 먹기 위해 고명을 얹는데 비해 몽골식 국수는 양고기를 먹기 위해 국수를 조금 섞은 것이다. 또한 양고기 국이라고 하기에는 양고기가 너무 많다. 양고기가 90%정도이고 나머지가 국물이다. 고기를 먹다 너무 기름지면 아무 것도 들지 않은 밀가루 호떡을 조금 찢어 국물에 담갔다 먹는 것이다. 우리는 마지막 남은 김치 두 봉과 파래 김을 꺼내 양고기를 싸 먹었다. 가이드와 운전기사에게 미안할 정도로 음식을 먹지 못했다. 운전기사는 이런 광경에 익숙한 듯 비닐봉지를 가져와 남은 음식을 싸달라고 한다. 아마 그들에게는 이 낯선 이방인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할 것 같다. 너무 잘 살아서 몽골 음식을 안 먹는 것인지 아니면 입에 맞지 않아 못 먹는 것일까? 하지만 그것은 보통 몽골인이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닌 듯싶었다. 남은 음식을 모두 싸가는 것을 보니 귀한 음식인 것 같다. 음식을 먹기 전에 내오는 수태차가 이제는 정겹다. 여섯시에 몽골 전통공연을 예약해 놓았기 때문에 서둘러 차를 몰았다.
두 시간을 더 달리자 드디어 초원을 벗어나 아스팔트길에 올랐다. 아스팔트길이라고 해야 덜컹거리기는 매한가지다. 다섯 시에 나흘 만에 팰리스호텔에 도착하니 집에 온 것 같은 안도감이 흐른다. 짐을 내리고 곧바로 극장으로 향했다. 한국에서 여행을 계획할 때 일정에 꼭 넣어야 한다고 한 것이 이 민속공연이다. 우연한 기회에 KBS에서 후미에 대한 내용을 보고는 몽골에 갈 기회가 있으면 반드시 봐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시간에 맞춰 극장에 들어갔다. 여행을 하다보면 여러 민속 공연을 접하는데 대부분의 극장 무대는 높고 객석은 낮은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몽골의 이 극장은 무대가 낮고 객석이 높아 내려다 볼 수 있는 작은 극장이었다. 관객은 총 200여 명 남짓 들어간다. 그래도 극장이 꽉 찼다. 관객은 후미와 전통악기에 대하여 알고 오는 관광객이 전부였다. 공연은 관객 모두를 압도했다. 특히 후미는 너무나 신기했다. 바람의 소리 같기도 했고 인간과 자연을 잇는 소리 같기도 했다. 어린 소녀 둘이 하는 서커스를 볼 때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공연이 끝나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중에 갑자기 예가 코피를 흘린다. 저녁 식사로 몽골식을 하려고 했으나 급히 한식으로 바꾸었다. 많은 여행을 다녀도 코피를 흘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마 힘에 부친 여행이었나 보다. 고비를 달리는 것이 쉽지 않았으리라. 식사 후에 간단히 호텔 옆의 바에서 생맥주를 한잔 하고 들어오니 예는 이미 떨어져 잔다.
8월 11일(화)
아침 9시까지 정신없이 자고 일어났다. 며칠간의 황무지여행이 무지 피곤했다. 황무지와 사막이 다르다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했다. 시내에 들어 온 어제 이야기를 조금 더 해야겠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낮을 늘려 살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모른다는 것은 도시 생활이 시작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도시의 환한 불빛은 우리의 낮 시간대를 늘렸고, 그 늘린 시간만큼 일을 하고 수다를 떨고, 정신을 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밤이 많다는 것은 자기와의 시간을 함께 한다는 것이고,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간이 많은데 비하여 낮 시간이 길어졌다는 것은 자기와의 시간보다는 타인에 대한 시간을 많이 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나를 잃어버리고, 남의 눈과 남의 의견에 맞추어 사는 것이다. 자신을 잃어버리고, 타인의 규정에 의해 나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닐까?
도시의 생활이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발전이라고 생각하는 전깃불을 비롯한 낮의 연장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지난 3박 4일의 생활보다는 도시의 생활에 익숙한 나를 발견한 것도 이번 여행의 한 소득이리라.
나를 잃어버리고 사는 생활인 것이다.
아침 9시에 테를지로 출발했다. 가는 도중에 어워 근처에서 장사를 하는 몽골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이제 전형적인 상인의 모습이었다. 우리가 만난 어떤 몽골인보다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다. 그는 약간의 영어와 약간의 한국어를 섞어서 물건을 팔려고 애썼다. 그의 얼굴에서 노련함을 보았다. 그의 노련함을 갖고 한국에 온다면 아직은 서투른 장사꾼이겠지만 어쩌면 우리나라에서도 통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번 몽골여행에서 가장 여운이 남는 것은 그들의 순수함이다. 순수함이란 인간을 보고 인간으로 대하는 모습 말이다. 사람을 보고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번 여행에서 그런 것들이 오히려 생소하게 느껴졌다. 상인이 사람을 처음 만날 때 돈으로 보거나, 회사원이 사람을 만날 때 책임질 사람으로 보거나 닥쳐올 인생의 조력자로 사람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세일즈맨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업의 한 부분을 메워주는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그들은 우리를 그렇게 보는 것 같지 않았다. 어느 순간 그것을 느꼈을 때 나는 다른 사람을 어떻게 보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테를지가 아름다운 것은 우선 넓은 초원 때문이었다. 골프를 치지는 못하지만 옆에 있는 골프장이 아주 작게 느껴졌다. 테를지 초원에서 잠시 주위를 돌아보아도 36홀 짜리 골프장 대 여섯 개는 쉽게 조성할 수 있는 초원이 있다. 그 초원에 흩뿌려져 있는 이름 모를 꽃들은 색다른 광경을 보여주었다. 승마체험이 우리를 기다렸다. 누구나 몽골을 생각하면 말을 연상할 것이다. 여기까지 와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 말을 타는 것이다. 한 시간 남짓 말을 타면서 솜다리라고 불렀던 에델바이스를 비롯한 수많은 꽃을 구경했다.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다양한 동식물이 사는 까닭이리라. 만약에 예쁜 한가지로 초원이 가득 채워졌다면 우리는 얼마나 지루하게 생각했을까? 테를지에서 말을 타고 거닐며 초원에는 잔디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다양한 꽃과 식물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말은 아주 잘 훈련되어 있었다. 나같은 초보자라도 누구나 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점심으로 고기가 가득 들어있는 호쇼르(군만두)를 먹었다. 고기를 싫어하지는 않지만 매일 고기를 먹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원주에서 사 간 마지막 컵라면을 대신 먹었다. 테를지를 떠나 울란바타르로 돌아오는 길에 작은 선술집 게르를 찾았다. 말 젖으로 만든 아이락은 우리나라 막걸리 같았다. 그러나 술 맛은 약간 신맛을 냈다. 안주로는 몽골의 전통과자를 주었는데 옛날 시골에서 막걸리 한잔에 김치 한 조각으로 안주를 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넓적하게 생긴 50대쯤으로 보이는 아주머니는 익숙한 솜씨로 마유주를 휘젓는 포즈를 취하고는 사진을 찍어주는 여유를 부린다.
게르가 시원한 이유를 설명해주며, 한 손으로는 술잔을 돌리는 모습이 우리나라 선술집의 아주머니와 다르지 않았다. 게르에 걸려있는 양고기가 생소했다. 양을 부위별로 각을 떠서 빨랫줄 같은 줄에 널었다. 날씨가 건조하기 때문에 상하지 않고, 그늘에서 말리는 것 같았다. 그 맛을 보고 싶었지만 건조된 고기는 없고 혹시 그것을 그냥 먹으라고 할까봐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울란바타르 시내에 들어와 자연사 박물관과 간단히드를 보았다. 자연사 박물관은 세계 최초의 육식 공룡을 전시하고 있다. 세계에는 7개의 같은 시기의 공룡 화석이 있는데 그중 다섯 개가 몽골에서 발견되어 전 세계에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코뿔소 뼈대, 들소, 말, 거북 등 자연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인상 깊었던 것은 경기도에서 재빠르게 바다가 없는 몽골에다 바다 속을 재현해 놓은 전시관을 개설한 것이다. 아마도 경기도 안산의 자연사 박물관에는 몽골에서 가져온 몇 개의 화석이 있을 것이다. 그 재빠름에 한국인이 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간단히드는 라마 불교사원으로 정식 명칭은 ‘간등케그친른 히드’라고 한다. ‘완전한 즐거움을 주는 사원’이라는 뜻이다. 간단히드 내에 있는 24미터의 불상이 위압적이다. 사진기 셔터를 딱 한번 눌렀는데 5000투르크를 내라고 한다. 그 돈을 주자 사진을 찍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울란바타르에서 가장 크다고 하는 백화점을 들러 기념품을 샀다. 무엇을 살까 망설이던 우리는 몽골에서 가장 흔하고 자랑스러운 것이 가죽이며 그 가죽 공예품이 많았다. 몽골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징키스칸이 새겨져 있는 가죽 공예품을 샀다. 몽골에서 마지막 저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몽골리언 바비큐라는 음식이다. 각종 고기와 야채를 내 식성에 맞게 골라서 요리사에게 가져다주면 그것을 볶아주는 요리이다. 필리핀에 갔을 때 먹어본 요리인데 몽골에 와서 정식으로 먹어 보았다. 와인 한잔과 더불어 먹은 특별식이었다. 몽골에 와서는 주로 징키스칸 보드카를 마셨는데, 맥주 맛도 괜찮았다. 맥주는 일찍부터 이곳에 진출한 독일 때문에 발달했다고 한다.
아쉬운 마지막 밤이 깊어갔다.
8월 12일(수)
아침에 남았던 누룽지와 햇반, 김을 모두 먹었다.
오늘은 캐시미어 공장을 방문하고 집으로 갈 일만 남은 것이다. 두 군데의 캐시미어 공장을 들렸는데 하나는 고요 캐시미어 공장이었고, 한 군데는 고비 캐시미어 공장이었다. 그들이 가장 많이 수출하는 공산품이라고 했다. 기념품으로 머풀러 한 장을 사들고 우리는 공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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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새록새록하게 그리워지는 몽골을 이야기해준 내용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