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는 마읍(馬邑,안문군 마읍현) 아래 사는 섭옹일(聶翁壹,노인 섭일)을 시켜 [1] 간란(奸蘭)하게 [2]물자를 반출해(出物) [3] 흉노와 교역하게 하고(與匈奴交) [4] 마읍성(馬邑城)을 파는(배신하는) 것처럼 속여 선우를 유인했다. 선우가 이를 믿고 마읍의 재물을 탐내어 10만 기를 이끌고 무주(武州,안문군 무주현)의 새(塞)로 들어왔다. [5] 한나라는 마읍 부근에 30여 만 군사를 매복시켜두고 어사대부(御史大夫) 한안국(韓安國)을 호군(護軍)(장군)으로 삼아 네 장군(※)을 이끌고 매복한 채 선우를 기다리게 했다.
※ 마읍사건은「사기」권108 한장유열전(한안국)에 의하면 무제 원광(元光) 원년(B.C 134)의 일이고,「한서」무제기나「자치통감」에 의하면 무제 원광 2년(B.C 133) 6월의 일입니다.
※ 사마광의「자치통감고이」- “「사기」한장유전에서는 원광 원년에 섭일이 마읍의 일을 계획하였다 했는데「한서」무제기에서는 (원광)2년에 있었던 일이라 했다. 대저 (원광)원년에 섭일이 처음 이 말을 하고 (원광)2년에 의논하여 결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史記韓長孺傳, 元光元年, 聶壹畵馬邑事, 而漢書武紀在二年. 蓋元年壹始言之, 二年議乃決也.)
[1] [색은] 살펴보건대, 위청전(衞靑傳)에서는 “聶壹(섭일)”이라 하였다. 고씨(顧氏)는 “壹이 이름이고, 老를 옛날에 翁(옹)으로 칭했다.” 했으니 그 뜻이 그러한 듯하다.
[4] [집해]「한서음의」에서 “사사로이 새(塞) 밖으로 나가 흉노과 교시(交市,호시.교역)했다.” 하였다.
[5] [색은] 소림(蘇林)은 (무주새武州塞가) 안문(鴈門)에 있었다고 했다.
※ 한안국이 지휘한 네 장군 - 효기장군(驍騎將軍) 이광(李廣), 경거장군(輕車將軍) 공손하(公孫賀), 장둔장군(將屯將軍) 왕회(王恢), 재관장군(材官將軍) 이식(李息) (「한서」무제기)
선우가 한나라 새(塞)로 들어온 후 마읍에서 백여 리 떨어진 곳에 미처 이르지 못했을 때 들에 가축이 흩어져 있으나 돌보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이를 괴이하게 여기니 이에 정(亭)을 공격했다. 이때 안문(雁門)의 위사(尉史)가 [6] 행요(行徼,순찰)하다 적을 발견하고는 이 정(亭)을 수비했다. (위사는) 한나라 군대의 계획을 알고 있었는데 선우가 그를 붙잡아 죽이려 하니 [7] 이에 위사(尉史)가 한나라 군대가 있는 곳을 선우에게 고했다. 선우가 크게 놀라며 말했다, “내가 실로 의심스러웠다.” 그리고는 군을 이끌고 돌아갔다. (새塞 밖으로) 나간 뒤 이르길, “내가 위사(尉史)를 얻은 것은 하늘의 뜻이다. 하늘이 그대를 시켜 내게 말해주게 했도다.”라 하고는 위사(尉史)를 천왕(天王)이라 했다.
[6] [색은] 여순(如淳)은 “(한나라) 율(律)에서는 새(塞) 가까이에 있는 군(郡)에는 모두 위(尉)를 100리에 한 명 두었고, 사사(士史), 위사(尉史)를 각 2명씩 두었다.
[7] [집해] 서광(徐廣)은 “때로 ‘그리하여 (정亭에서 아래로) 내려와 (제반 사정을) 모두 선우에게 고했다.’(乃下,具告單于) 이르기도 한다.” 하였다.
※「한서」흉노전에는 “單于得, 欲刺之. 尉史知漢謀, 乃下, 具告單于. 單于大驚, 曰…”로 정리되어 있는데, 이걸 말하거나「사기」의 다른 본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한나라 군대는 선우가 마읍으로 들어온 뒤 군사를 풀어 치기로 약정했으나 선우가 오지 않았으므로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한나라 장군 왕회(王恢)의 부(部)는 대(代)를 나가 호(胡)의 치중(輜重,짐수레,수송부대)을 공격하려 했으나 선우가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그 군사들이 많으니 감히 출격하지 못했다. 한나라는 왕회가 본래 이 계획을 세워놓고 진격하지 않았다 하여 왕회를 참(斬)했다. [8]
[8] [집해] 한장유전(韓長孺傳) (※한안국韓安國의 字가 長孺임)에 의하면 왕회는 자살했다.
이 이후로 흉노는 화친을 끊고 당로새(當路塞,도로와 맞닿은 새塞)를 공격하고 [9] 왕왕(往往) 한나라 변경을 침입해 약탈하니 그런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흉노는 탐욕스러워 관시(關市)를 좋아하며 한나라 재물을 즐겼고 한나라 또한 여전히 관시(關市)를 통하게 하며 끊지 않고 그들의 뜻에 맞춰주었다. (漢亦尚關市不絶以中之) [10]
[9] [색은] 소림(蘇林)은 “직접 도로에 맞닿은 새(塞)”라 했다.
[10] [정의] 여순(如淳)은 “(방책을) 두루 갖추어 이익으로써 중상(中傷)하려 했다.” 하였다.
마읍(馬邑)에서 용병한 때로부터 5년 뒤 가을(※), 한나라는 네 장군을 보내 각기 1만 기로 관시(關市) 아래에서 호(胡)를 공격하게 했다.
※ 마읍사건 이래 한무제 때 흉노에 대한 첫번째 공격입니다.「사기」위장군표기열전(위청,곽거병)에서는 원광 5년(B.C 130)의 일이라 했는데(元光五年,靑爲車騎將軍,撃匈奴)「한서」무제기나 위청전에 의하면 원광(元光) 6년(B.C 129) 봄의 일입니다. 앞의 마읍사건과 함께「사기」「한서」의 기사들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사기」
「한서」
마읍사건
원광 원년(B.C 134)
- 권108 한장유열전(한안국)
원광 2년(B.C 133)
- 권6 무제기
(한안국열전에선 직접기술 없음)
위청 등의 1차 공격
원광 5년(B.C 130)
- 권111 위장군표기열전
원광 6년(B.C 129)
- 권6 무제기 (또한 ‘봄’의 사건으로 명시)
- 권55 위청곽거병전
※「자치통감」에서는「한서」의 예에 따라 정리함. (즉, 원광 2년 – 원광 6년)
두 사건 사이의 시간간격
「사기」「한서」모두 <흉노전>에서는 ‘5년 뒤’라 하고
<이광전>에서는 ‘4년 뒤’라 함
각각 사건의 연도를「사기」나「한서」어느 쪽을 따르든 <이광전>에서처럼 4년 간격이니 여기서 ‘5년 뒤’라 한 대목은 오기가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한서」에서 굳이 이 부분을 일일이 수정했다는 것은 뭔가 다른 소스가 있었기 때문일테고, 또 위 사건은 원광 6년의 일로 보는게 계속 이어지는 흉노전 내용과도 더 잘 맞아 떨어집니다.「자치통감」도「한서」의 예를 따라 정리하고 있고 개설서들에서도 대체로 그렇습니다.
(거기車騎)장군 위청(衛靑)은 상곡(上谷)을 나가 용성(蘢城)에 이르러 호(胡)의 수급과 포로 7백 명을 얻었다. (경거장군輕車將軍) 공손하(公孫賀)는 운중(雲中)을 나갔으나 소득이 없었다. (기장군騎將軍) 공손오(公孫敖)는 대군(代郡)을 나갔다가 호(胡)에게 패해 7천 여 명을 잃었다. (효기장군驍騎將軍) 이광(李廣)은 안문(雁門)을 나갔다가 호(胡)에게 패했고, 흉노가 이광을 사로잡았으나 이광은 도중에 달아나 되돌아왔다. 한나라가 공손오, 이광을 가두자 공손오와 이광은 속죄금을 내고 서인(庶人)이 되었다.
그 해(B.C 129년, 원광6년) 겨울(※), 흉노 수천 명이 변경을 침입해 약탈하고 어양(漁陽)에서 특히 심했다. 한나라는 장군 한안국(韓安國)을 보내 어양에 주둔하며 호(胡)를 방비하게 했다.
※「한서신주」/ 其冬 – 응당 秋로 적어야 한다. 이때에는 겨울이 한 해의 시작이며, 끝이 아니다. (겨울 10월이 한 해의 시작이므로, 앞에 다른 기사가 있는데 이어지는 뒷 기사에서 ‘그해 겨울’이 되는 건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한서」무제기,「자치통감」에서도 흉노가 변경을 침범하고 한안국에게 어양에서 방비하게 한 것은 원광6년 ‘가을’의 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이듬해(B.C 128년, 원삭元朔 원년) 가을, 흉노 2만 기가 한나라로 쳐들어와 요서태수(遼西太守)를 죽이고 2천여 명을 약탈했다. 또한 호(胡)는 어양태수의 군사 천여 명을 패주시키고 한나라 장군 안국(安國,한안국韓安國)을 포위했다. 한안국이 이때 거느리던 천여 기는 거의 전멸되기 직전이었으나 때마침 연(燕)의 구원군이 당도하자 흉노가 이내 물러갔다. 흉노는 또 안문(雁門)을 침입해 천여 명을 살략(殺略)했다. 이에 한나라는 장군 위청(衛靑)을 보내 3만 기를 거느리고 안문(鴈門)을 나가고 이식(李息)은 대군(代郡)을 나가게 해 호(胡)를 공격하고 수천 명을 참획했다.
그 이듬해(B.C 127년, 원삭2년), 위청이 다시 운중(雲中)을 나가 서쪽으로 진군해 농서(隴西)에 이르러 호(胡)의 누번(樓煩), 백양왕(白羊王)을 하남(河南)에서 공격하고 호(胡)의 수급과 포로 수천 명, 소(牛)와 양(羊) 백여만 마리를 얻었다. 이에 한나라가 마침내 하남(河南) 땅을 차지하여 삭방(朔方)에 축성하고 예전 진(秦)나라 때 몽념(蒙恬)이 만든 새(塞)를 보수하며 하수에 의거해 방비를 굳건히 했다. 한나라는 또한 상곡(上谷)의 궁벽하고 외떨어진 조양(造陽) 땅을 버려 호(胡)에게 주었다. (漢亦弃上谷之什辟縣造陽地以予胡) [1] 이 해가 원삭(元朔) 2년(B.C 127)이다.
[1] [집해] 什의 음은 斗.「한서음의」에서 “외떨어지고 궁벽하여 호(胡)와 가까웠다는 말.” 이라 했다. [색은] 살펴보건대 맹강(孟康, 魏)은 “외떨어지고 궁벽하여 호(胡)와 가까웠다.” 했다. 조양(造陽)이 즉 궁벽하고 외떨어진 땅에 있었다는 말이다. [정의] 살펴보건대, 궁벽하고 깊숙이 외떨어져 있어 흉노의 지경에 들어가 있는 것이 조양(造陽) 땅이니 이를 버려 호(胡)에게 준 것이다.
(원삭元朔 2년, B.C 127 봄) 흉노가 상곡, 어양을 침입해 관리와 백성 천여 명을 살략했다. 장군 위청(衛靑), 이식(息出)을 보내 운중을 나가 고궐(高闕)에 이르게 하니 [안사고 왈, 산 이름이다. 또는 새塞 이름이라고도 한다. 삭방의 북쪽에 있었다.] 마침내 부리(符離)에 당도해 [안사고 왈, 막북(幕北)의 새(塞) 이름] 수천 급을 참획했다. 하남(河南) 땅을 거두고 삭방(朔方), 오원군(五原郡)을 설치했다.
그 뒤 겨울(B.C 126년, 원삭3년), 흉노의 군신(軍臣) 선우가 죽었다. 군신선우의 동생인 좌록려왕(左谷蠡王) 이치사(伊稚斜-5대 선우)가 [1] 스스로 즉위해 선우가 되고는, 군신선우의 태자 어단(於單,or 오단)을 [2] 공격해 격파했다. 어단(於單)이 달아나 한나라에 항복하자 한나라가 어단(於單)을 섭안후(涉安侯)에 봉했으나 몇 달 뒤에 죽었다. (※)
[1] [색은] 伊穉斜(이치사). 穉의 음은 持+利. 斜의 음은 士+嗟. 추탄생(鄒誕生, 남조 양梁)은 음이 直+牙라 했다. 穉斜(치사)는 호인(胡人)들의 말로 그 실제(발음)에 가깝게 취한 것으로 보인다.
[2] [색은] (單의) 음은 丹.
※「사기」 권20 건원이래후자 연표(建元以來侯者年表) – 섭안(涉安). 흉노선우의 태자로 항복해 (원삭) 3년 4월 병자일에 후로 봉해짐. 후(侯) 어단(於單) ([색은] 음은 丹) 원년. 5월에 죽었고 후사가 없어 봉국이 폐지됨. (涉安. 以匈奴單于太子降侯. 三年四月丙子,侯於單(索隱音丹.)元年.五月,卒,無後,國除.)
이치사(伊稚斜) 선우가 즉위한 뒤 그 해(B.C 126년, 원삭3년) 여름, 흉노가 수만 기로 침입해 대군태수(代郡太守) 공우(恭友)를 죽이고 천여 명을 약탈했다.
그 해 가을, 흉노가 또한 안문(鴈門)을 침입해 천여 명을 살략(殺略)했다.
그 이듬해(B.C 125년, 원삭4년), 또 대군(代郡), 정양(定襄)[1], 상군(上郡)을 각기 3만 기로 침입해 수천 명을 살략(殺略)했다. 흉노 우현왕(右賢王)은 한나라가 하남(河南) 땅을 빼앗아 삭방(朔方)에 축성한 것을 원망하니 수차례 변경을 침범해 약탈하고 아울러 하남(河南)을 침입하고 삭방(朔方)을 침요(侵擾)하여 매우 많은 관리와 백성들을 살략(殺略)했다.
[1] [정의]「괄지지」에서 “정양(定襄)의 옛 성이 삭주(朔州) 선양현(善陽縣) 북쪽 380리 되는 곳에 있다.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정양군(定襄郡)은 고제(高帝)가 설치한 것이다.” 했다.
그 이듬해(B.C 124년, 원삭5년) 봄, 한나라가 위청(衞靑)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삼아 (※) 여섯 장군(※)과 10여 만 명을 거느리고 삭방(朔方), 고궐(高闕)을 나가 호(胡)를 공격하게 했다. 우현왕(右賢王)은 한나라 군대가 능히 당도하지 못할 것이라 여겨 술을 마시고 취해 있었다. 한나라 군대가 새(塞)를 나와 6-7백 리를 가서 밤중에 우현왕을 포위했다. 우현왕이 크게 놀라 몸을 빼내 도주하고 여러 정기(精騎,정예기병)들이 왕왕(往往) 그 뒤를 따라 떠났다. 한나라가 우현왕의 무리인 남녀 1만 5천 명과 비소왕(裨小王) 10여 명을 붙잡았다.
그 해 가을, 흉노가 1만 기로 침입해 대군도위(代郡都尉) 주영(朱英)을 죽이고 천여 명을 약탈했다.
※ 엄밀히는 이 전투에서 세운 공으로 기존의 거기장군에서 대장군으로 오릅니다. (「사기」위장군표기열전)
※ 위청이 거느린 여섯 장군 / 「사기」위장군표기열전 - 그 이듬해인 원삭(元朔) 5년 봄, 한나라가 거기장군(車騎將軍) 위청(衞靑)에게 명해 3만 기를 거느리고 고궐(高闕)을 나가게 했다. 위위(衞尉) 소건(蘇建)을 유격장군(游擊將軍), 좌내사(左內史) 이저(李沮)를 강노장군(彊弩將軍), 태복(太僕) 공손하(公孫賀)를 기장군(騎將軍), 대상(代相) 이채(李蔡)를 경거장군(輕車將軍)으로 삼고 이들을 모두 거기장군의 영을 받으며 함께 삭방(朔方)을 나가게 하고, 대행(大行) 이식(李息), 안두후(岸頭侯) 장차공(張次公)을 장군으로 삼고 우북평(右北平)을 나가게 하니, 이들이 모두 흉노를 공격했다. (其明年,元朔之五年春,漢令車騎將軍靑將三萬騎,出高闕;衞尉蘇建爲游擊將軍,左內史李沮爲彊弩將軍,太僕公孫賀爲騎將軍,代相李蔡爲輕車將軍,皆領屬車騎將軍,俱出朔方;大行李息﹑岸頭侯張次公爲將軍,出右北平:咸擊匈奴.)
그 이듬해(B.C 123년, 원삭6년) 봄, 한나라가 다시 대장군(大將軍) 위청(衛靑)을 보내 여섯 장군(※)과 10여 만 기(騎)를 거느리게 했다. 그리하여 두 차례 정양(定襄)을 나가 수백 리를 가서 흉노를 공격해 그 앞뒤로 1만 9천여 급을 참획했으나 한나라 또한 장군 둘(※ 전장군 조신, 우장군 소건)과 3천여 기를 잃었다. [1] 우장군(右將軍) 건(建)(→소건蘇建)은 몸을 빼낼 수 있었으나 [2] 전장군(前將軍) 흡후(翕侯) 조신(趙信)은 싸움이 불리하자 흉노에게 항복했다.
※ 여섯 장군 /「사기」위장군표기열전 - 그 이듬해 봄, 대장군 위청이 정양(定襄)을 나가며, 합기후(合騎侯敖) 공손오(公孫敖)를 중장군(中將軍), 태복(太僕) 공손하(公孫賀)를 좌장군(左將軍), 흡후(翕侯) 조신(趙信)을 전장군(前將軍), 위위(衞尉) 소건(蘇建)을 우장군(右將軍), 낭중령(郎中令) 이광(李廣)을 후장군(後將軍), 우내사(右內史) 이저(李沮)를 (※「한서」위청전에서는 좌내사로 표기) 강노장군(彊弩將軍)으로 삼아 이들을 모두 대장군에 속하게 하니 수천 급을 참수하고 돌아왔다. 한달 남짓 뒤, 모두 다시 정양(定襄)을 나가 흉노를 공격해 만여 명을 참획했다. (其明年春,大將軍靑出定襄,合騎侯敖爲中將軍,太僕賀爲左將軍,翕侯趙信爲前將軍,衞尉蘇建爲右將軍,郎中令李廣爲後將軍,右內史李沮爲彊弩將軍,咸屬大將軍,斬首數千級而還.月餘,悉復出定襄擊匈奴,斬首虜萬餘人.) / 이때 장건(張騫)도 교위로 종군해 길을 안내하였고 또 이전 서역에서 활약한 공으로 이 해 3월에 박망후(博望侯)로 봉해짐.
[1] [집해] 서광(徐廣)은 “도합 3천일 따름이다.” 했다.
[2] [정의] 건(建)은 소무(蘇武)의 부친이다.
조신(趙信)은 원래 호(胡)의 소왕(小王)이었는데, 한나라에 항복하자 한나라가 그를 흡후(翕侯)로 봉했었다. (※) 전장군(前將軍)으로 임명되어 우장군(右將軍)과 군대를 합쳐 분행(分行)하다 (與右將軍并軍分行) [3] 단독으로 선우의 군대를 조우하였으니 이 때문에 전멸당했다. 선우는 흡후(翕侯)를 얻은 뒤 그를 자차왕(自次王)으로 삼고 [4] 자신의 누나를 처로 삼게 하고는 그와 더불어 한나라에 관해 모의했다. 조신이 선우를 가르치길, ‘더욱 북쪽으로 사막을 건너가(絶幕) [5] 한나라 군대를 유인해 피로하게 만들고 그들이 극도로 지쳤을 때를 기다려 공격하며(徼極而取之) [6] 새(塞) 가까이 가지 말라’고 했다. 선우가 그 계책을 따랐다.
그 이듬해(B.C 122년, 원수元狩 원년), 호(胡)의 기병 1만이 상곡(上谷)을 침입해 수백 명을 죽였다.
[5] [집해] 응소(應劭)는 “幕(막)은 沙幕(사막)으로 흉노의 남쪽 경계.”라 했다. 찬(瓚)은 “沙土(사토)를 幕(막)이라 하고 直度(곧장 건넘)를 絶(절)이라 한다.” 했다.
※「한서음의」등 주석서에서 臣瓚曰, 瓚曰 등으로 인용되는 인물에 관해, 안사고는「한서」서례에서 씨족을 알 수 없으나 그 시대는 진나라 초로 보인다고 했고,「사기색은」에서 사마정은 晉 초 인물인 부찬(傅瓚)으로 보았습니다. “살펴보건대, 즉 부찬(傅瓚)을 말한다. 유효표(劉孝標)는 (그가) 우찬[于瓚,「진서」교감기에서는 于瓚(우찬)으로 전해지는 것은 干瓚(간찬)의 오기로 봄]이라 했으나 이는 잘못이다. 하법성(何法盛)의「진서」晉書에 의하면 우찬은 (동진) 목제 때 대장군이 되었다가 주살되었고「한서」에 주(注)했다는 말은 없다. 또한 그가「한서」에 注하며「녹질령」祿秩令과「무릉서」茂陵書를 인용하기도 했으나 이 두 책은 서진(西晉) 때에 망실되었으니 우찬이 볼 수 있는 책이 아니다. 필시 부찬(傅瓚)임을 알 수 있다.「목천자전 목록」에 의하면 부찬이 교서랑(校書郞)이 되어 순욱(荀勗)과 함께「목천자전」을 교정했으니 즉 서진(西晉) 때에 해당하여 우찬의 앞 시대이고「무릉서」등을 볼 수 있었다. 또한 臣이라 칭한 것은 그가 비서(袐書)의 직책을 맡았기 때문이다.(※ 신 아무개가 아룁니다..하는 식으로 주해를 단 것을 ‘신 아무개’ 그대로 인용했다는 말임)” (索隱案:卽傅瓚, 而劉孝標以爲于瓚, 非也. 據何法盛晉書, 于瓚以穆帝時爲大將軍, 誅死, 不言有注漢書之事. 又其注漢書有引祿秩令及茂陵書, 然彼二書亡于西晉, 非于所見也. 必知是傅瓚者, 案:穆天子傳目錄云傅瓚爲校書郞, 與荀勗同校定穆天子傳, 卽當西晉之朝, 在于之前, 尙見茂陵等書. 又稱「臣」者, 以其職典袐書故也.)
[6] [색은] 살펴보건대, 徼(요)는 要(요,기다리다)다. 그들이 피로해져 극에 달했을 때를 기다려 공격한다는 말이다. [정의] 徼의 음은 古+堯. 徼는 要다. 한나라 군대가 피로해져 극에 달했을 때를 기다려 공격하고 새(塞) 근처에 머물지 말라는 것.
이듬해(B.C 121년, 원수2년) 봄, 한나라가 표기장군(票騎將軍) 곽거병(霍去病)에게 1만 기를 거느리고 농서(隴西)를 나가게 하니 언지산(焉支山,or 연지산)을 지나 [1] 천여 리를 가서 흉노를 공격해 호(胡)의 수급과 포로 1만 8천여 급을 얻고 휴도왕(休屠王,or 휴저왕)을 격파해 제천금인(祭天金人)을 빼앗았다. [2]
[1] [정의] 焉의 음은 烟.「괄지지」에서 “언지산(焉支山)은 일명 산단산(刪丹山)으로 감주(甘州) 산단현(刪丹縣) 동남쪽 50리 되는 곳에 있다.「서하고사」西河故事에 의하면 흉노가 기련(祁連), 언지(焉支) 두 산(山)을 잃자 노래하길, ‘우리 기련산(祁連山)을 잃었으니 우리 육축(六畜,여섯 종의 가축)이 번식(蕃息)할 수 없겠구나. 우리 언지산(焉支山)을 잃었으니 우리 부녀(婦女)들이 안색을 잃었구나.” 하였으니 그들이 슬퍼하고 애석해함이 이와 같았다.” 했다.
[2] [집해]「한서음의」에서 “흉노가 제천(祭天)하던 곳은 본래 운양(雲陽) 감천산(甘泉山) 기슭에 있었는데 진(秦)나라가 그 땅을 빼앗자 뒤에 휴도왕(休屠王)의 오른쪽 땅(서쪽)으로 옮겼으니 이 때문에 휴도왕이 제천금인(祭天金人)을 가지고 있었으며, 하늘에 제사지내는 사람의 모습을 본뜬 것이다.(象祭天人)” 했다. [색은] 위소(韋昭)는 “금인(金人)을 만들어 제천(祭天)할 때 주(主,신주나 위패 같은 걸 말하는 듯)로 삼았다.” 했다. 최호(崔浩)는 “호(胡)가 제사지낼 때 금인(金人)을 주(主)로 삼았으니 지금의 부도금인(浮圖金人,불상)이 바로 이것이다.” 했다. 또한「한서음의」에서 “금인제천(金人祭天)은 본래 운양 감천산 기슭에 있었는데 진나라가 그 땅을 빼앗자 휴도왕의 오른쪽 땅으로 옮겼으니 이 때문에 휴도왕이 제천금인을 가지고 있었으며 하늘에 제사지내는 사람의 모습을 본뜬 것이다.” 했으나 사실은 그러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살펴보건대, (한나라가) 휴도왕의 금인(金人)을 얻어 뒤에 감천(甘泉)에다 둔 것이다. [정의]「괄지지」에서 “경로신사(徑路神祠)가 옹주(雍州) 운양현(雲陽縣) 서북쪽 90리 되는 곳의 감천산(甘泉山) 기슭에 있고 본래 흉노가 제천(祭天)하던 곳인데 진나라가 그 땅을 빼앗자 뒤에 휴도왕의 오른쪽 땅으로 옮겼다.” 했다. 살펴보건대, 금인(金人)은 즉 지금의 불상(佛像)으로 이것이 그 유법(遺法)이며 이를 세워 제천할 때 주(主)로 삼았다.
그 해 여름, 표기장군이 다시 합기후(合騎侯→공손오公孫敖)와 함께 수만 기로 농서(隴西), 북지(北地)를 나가 2천 리를 행군해 흉노를 공격했다. 거연(居延)을 지나 [3] (※) 기련산(祁連山)을 공격해 [4] 호(胡)의 수급과 포로 3만여 명, 비소왕(裨小王) 이하 70여 명을 노획했다.
[3] [색은] 위소(韋昭)는 “(거연居延은) 장액(張掖)(군郡)의 현.”이라 했다.
※ 거연(居延) /「한서」무제기 안사고 주 - 안사고 왈, 거연(居延)은 흉노 중에 있는 지명이다. 위소(韋昭)는 장액군에 있는 현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장액군에 둔 거연현은 획득한 거연 사람들을 안처(安處)해 이 현을 설치한 것이다. (師古曰:「居延, 匈奴中地名也, 韋昭以爲張掖縣, 失之. 張掖所置居延縣者, 以安處所獲居延人而置此縣.」) /「한서신주」- 거연(居延)은 물 이름이다. 지금 감숙성 경내의 산단하(山丹河)다. (정겸丁謙의 설)
※ 하서 4군의 설치 /「한서」무제기
: 당시에 이곳이 한나라의 영역은 아니고 흉노의 영역이었고, 이른바 하서 4군(무위,주천,장액,돈황)은 이무렵 하서 원정과 이 뒤에 나오는 흉노 혼야왕의 투항과 관련해 뒤에 설치된 것입니다.
(원수元狩 2년인 B.C 121) 가을, 흉노 혼야왕이 휴도왕(or 휴저왕)을 죽이고는 [안사고 왈, 昆의 음은 下+門. 屠의 음은 儲.] 그 무리를 아울러서 거느리고 도합 4만여 명으로 와서 항복했다. 다섯 속국(屬國)을 설치해 그곳에 거처하게 했다. [안사고 왈, 무릇 속국이란 말한 것은 그 국(國)의 호칭을 존속시키며 한나라에 속하게 하니 이 때문에 속국(屬國)이라 했다.] 그 땅으로 무위(武威), 주천군(酒泉郡)을 설치했다. [안사고 왈, 무위는 지금의 양주(涼州)고, 주천은 지금의 숙주(肅州)다.]
② 장액군, 돈황군
乃分武威、酒泉地置張掖、敦煌郡, 徙民以實之.
(원정元鼎 6년=B.C 111년 가을, 공손하, 조파노 등이 출병해 2천여 리를 행군했으나 흉노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온 뒤) 그리하여 무위, 주천 땅을 나누어 장액, 돈황군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옮겨서 이곳을 채웠다.
[4] [색은] 살펴보건대「서하구사」西河舊事에서 “(기련)산은 장액, 주천의 두 경계 상에 있고 동서로 2백여 리, 남북으로 백 리에 달하고 소나무와 잣나무, 오목(五木,다섯 종의 나무)과 아름다운 물과 풀이 있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서늘해 가축을 기르기에 적합했다. 흉노가 두 산을 잃자 노래하길 ‘우리 기련산(祁連山)을 잃었으니 우리 육축(六畜)이 번식(蕃息)할 수 없겠구나. 우리 연지산(燕支山)을 잃었으니 우리 가부(嫁婦,부녀)들이 안색을 잃었구나.’ 했다.” 하였다. 기련(祁連)은 일명 천산(天山)이고 또한 백산(白山)이라고도 한다.
이무렵 흉노 또한 대군(代郡), 안문(鴈門)을 침입해 수백 명을 살략(殺略)했다. 한나라가 박망후(博望侯→장건張騫)와 이장군(李將軍) 광(廣)(→이광李廣)을 시켜 우북평(右北平)을 나가 흉노 좌현왕(左賢王)을 공격하게 했다. 좌현왕이 이장군(李將軍)을 포위하니 (이광의) 병졸은 4천명 가량으로 거의 다 죽었으나 (이광군이) 죽인 흉노(虜)의 숫자는 또한 이보다 더 많았다. 때마침 박망후(博望侯)의 군대가 구원하기 위해 도착하니 이장군(李將軍)은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한나라는 수천 명의 군사를 잃었다. 합기후(合騎侯)는 표기장군과 약속한 날짜에 늦었으므로 박망후(博望侯)와 함께 모두 사형에 처해져야 했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인(庶人)이 되었다.
그 해(B.C 121년, 원수2년) 가을, 선우는 혼야왕(昆邪王), 휴도왕(休屠王)이 서방(西方)에 거처하며 한나라에 의해 수만 명을 참획당한 것에 분노하여 그들을 불러서 주벌하려 했다. 혼야왕과 휴도왕이 두려워하여 한나라에 항복할 것을 꾀하자 [1] 한나라는 표기장군(票騎將軍)(→곽거병)으로 하여금 가서 그들을 영접하게 했다. 혼야왕이 휴도왕을 죽이고 그 무리들을 아울러 거느리고는 한나라에 항복하니 모두 4만여 명이었고 10만이라 칭했다.
그리하여 한나라가 혼야왕을 얻게 되자 농서(隴西), 북지(北地), 하서(河西)에서 호(胡)의 침범이 더욱 줄어드니, 관동(關東)의 빈민(貧民)들을 흉노로부터 빼앗은 하남(河南)의 신진중(新秦中)(or 하남과 신진중)으로 옮겨서 채우고 [2] 북지(北地) 서쪽의 수졸(戍卒)들을 절반으로 줄였다. (※)
그 이듬해(B.C 120년, 원수3년), 흉노가 우북평(右北平), 정양(定襄)을 각기 수만 기로 침입해 천여 명을 살략(殺略)하고 떠났다.
[1] [집해] 서광(徐廣)은 “원수(元狩) 2년이다.” 라고 했다.
[2] [색은] 여순(如淳)은 “(신진중新秦中은) 장안(長安) 이북, 삭방(朔方) 이남에 있었다.” 했다.「한서」식화지(食貨志)에서 “빈인(貧人)들을 옮겨 삭방 이남의 신진중(新秦中)을 채웠다.”했으니 바로 이것이다. [정의] 복건(服虔)은 “지명으로 북지(北地)(군郡)에 있었고 넓이가 6-7백 리에 달했다. 장안 북쪽, 삭방 남쪽에 있었다.「사기」에 의하면 진시황이 몽념을 보내 호(胡)를 북쪽으로 몰아내 비옥한 땅 7백리를 차지하고는 내군(內郡,중국 내지의 군郡)의 인민들을 이곳으로 옮겨 충실하게 하고 신진중(新秦中)이라 불렀다.” 하였다.
※「사기」권111 위장군표기열전
居頃之,乃分徙降者邊五郡故塞外,[一]而皆在河南,因其故俗,爲屬國. [二]
[一]正義五郡謂隴西、北地、上郡、朔方、雲中,並是故塞外,又在北海西南.
[二]正義以降來之民徙置五郡,各依本國之俗而屬於漢,故言「屬國」也.
(혼야왕이 항복한 뒤) 얼마후 항복한 자들을 변경 5군(五郡)의 예전 새(故塞) 바깥으로 옮기니 모두 하남(河南)에 있으며 그들의 원래 풍속에 따르게 하여 (다섯) 속국(屬國)을 설치했다.
[1] [정의] 5군(五郡)은 농서군, 북지군, 상군, 삭방군, 운중군을 말하며, 아울러 예전 새(塞)의 바깥이며 또한 북해(北海)의 서남쪽에 있었다.
[2] [정의] 항복해온 백성들을 5군(五郡)으로 옮기고, 각자 그들 본국의 풍속에 따르면서 한나라에 속하게 하니 이 때문에 ‘속국(屬國)’이라 칭했다.
※「자치통감」호삼성 주 – 5군은 농서, 북지, 상군, 삭방, 오원을 일컫는다. 예전 새(故塞)는 진(秦)나라가 예전에 흉노와 접경하던 새(塞)이다. 진나라가 몽념을 시켜 흉노땅을 빼앗아 변관(邊關)이 (북쪽으로) 더욱 개척되었는데 진나라 항우의 난 때 묵돌이 남침하여 (다시) 중국과 예전 새(塞)에서 접경했다. 그러다 위청이 하남(河南)을 거두어 변관(邊關)이 다시 옛 몽념 때로 돌아갔다. 예전 새의 바깥(故塞外)라는 이르는 것은 그 땅이 북하(北河)의 남쪽(=하남)에 있었다. (五郡謂隴西,北地,上郡,朔方,雲中也. 故塞, 秦之先與匈奴所關之塞. 自秦使蒙恬奪匈奴地而邊關益斥, 秦,項之亂, 冒頓南侵與中國關於故塞. 及衞靑收河南, 而邊關復蒙恬之舊. 所謂故塞外, 其地在北河之南也.)
그 이듬해(B.C 119년, 원수4년) 봄, 한나라에서 모의하기를 ‘흡후(翕侯) 조신(趙信)이 선우를 위해 계책을 세워 막북(幕北,사막 북쪽)에 거처하면서 한나라 군대가 능히 당도하지 못하리라 여기고 있다’ 하였다. 이에 말을 배불리 먹이고(粟馬) 10만 기를 일으키니 사사로이 짐을 지고 뒤따르는 말(私負從馬)이 모두 14만 필에 달했고 [1] 이는 양중(糧重,치중,짐수레)이 포함되지 않은 수치다.(糧重不與焉) 대장군 위청(衞靑), 표기장군 곽거병(霍去病)에게 군대를 반으로 나눠 이끌게 하니, 대장군은 정양(定襄), 표기장군은 대(代)를 나가 사막을 건너 흉노를 공격하기로 함께 약속했다.
[1] [정의] 옷과 양식을 부담(負擔)하고 사사로이 모집되어 뒤따르는 자가 모두 14만 필이었다는 말이다.
선우는 이 소식을 듣자 치중(輜重)을 매우 멀리 보낸 뒤 정병(精兵)을 이끌고 막북(幕北)에서 기다렸다. 한나라 대장군과 하룻동안 접전했는데 날이 저물어 큰 바람이 일자 한나라 군대는 좌우익의 군사를 풀어 선우를 포위했다. 선우는 이 싸움에서 한나라 군대를 당해낼 수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니 마침내 혼자 몸으로 장기(壯騎,씩씩한 기병) 수백과 함께 한나라 포위망을 허물고는 서북쪽으로 둔주(遁走,몸을 피해 달아남)했다. 한나라 군대가 밤새 추격했으나 붙잡지 못하고, 그 도중에 모두 1만 9천 급을 참획하고 북쪽으로 전안산(窴顏山)의 조신성(趙信城)까지 [2] 갔다가 되돌아왔다.
[2] [집해] 여순(如淳)은 “조신(趙信)이 전에 흉노에 항복하자 흉노가 성을 쌓아 이곳에 거처하게 했다.” 하였다.
선우가 달아날 때 그의 군사들은 왕왕(往往) 한나라 군대와 서로 뒤섞여 선우를 뒤따랐다. 선우가 오랫동안 그의 대다수 무리와 서로 만나지 못하자 흉노 우록려왕(右谷蠡王)은 선우가 죽었다고 여겨 스스로 선우로 즉위했다. 진짜 선우가 다시 그의 무리들을 만나자 우록려왕은 이내 선우 호칭을 버리고 다시 (옛 직위인) 우록려왕으로 돌아갔다.
한나라 표기장군(驃騎將軍)은 대(代)를 나가 2천여 리를 가서 좌현왕(左賢王)과 접전했다. 한나라 군대가 호(胡)의 수급과 포로 도합 7만여 급을 얻었고 좌현왕의 장수들은 모두 둔주(遁走)했다. 표기장군은 낭거서산(狼居胥山)에서 봉제를 올리고(封) 고연(姑衍)(산)에서 선제를 올리고는(禪) 한해(翰海)까지 갔다가 [1] 되돌아왔다.
[1] [집해] 여순(如淳)은 “한해(翰海)는 북해(北海)의 이름”이라 했다. [정의] 살펴보건대 한해(翰海)는 스스로(별도로) 하나의 큰 바다 이름이고 뭇 새들이 깃털을 떨어뜨려 알을 품고 새끼를 기르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 翰에는 새의 깃털이란 뜻이 있음)
※ 한해(翰海) –zdic 漢典에서는 ‘몽골고원 동북쪽의 북해(北海), 즉 지금의 바이칼호’라고 해설하며 흉노열전 이 기사를 예로 들었고,「한서신주」에서는 ‘대막(大漠)의 별명으로 지금의 몽골 경내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후 흉노가 멀리 달아나 막남(幕南,사막 남쪽)에는 왕정(王庭)이 없게 되었다. 한나라는 하수를 건너고 삭방(朔方)으로부터 서쪽으로 영거(令居)에 이르기까지 [1] 왕왕(往往) 수로를 뚫고 전관(田官)과 이졸(吏卒,관리와 병졸) 5-6만명을 두어 (※) 점차 잠식하니 그 땅이 흉노 (옛 영토의) 북쪽과 접하게 되었다. [2]
[1] [집해] 서광(徐廣)은 “(영거令居는) 금성(金城)에 있었다.” 했다. [색은] 서광은 “금성에 있었다.” 했다. 지리지에서는 장액(張掖)(군)의 영거현(令居縣)이라 했다. 요씨(姚氏)는 令의 음이 連이라 했다. 소안(小顔, 안사고)은 그 음이 零이라 했다.
※「한서」지리지를 찾아보면 장액군이 아니라 ‘금성군 영거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금성군은 한무제의 아들인 소제(昭帝) 시원(始元) 6년 (B.C 81)에 천수군, 농서군, 장액군에서 2현씩을 갈라 처음 설치되었으므로 이 당시에는 금성군은 없었습니다. (取天水、隴西、張掖郡各二縣置金城郡. /「한서」권7 소제기) 그리고 무위, 주천군을 갈라 장액군, 돈황군이 신설되기 전이기도 하므로, 영거현의 위치로 볼 때 이때에는 무위군 소속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참고로 한나라 초기 흉노와의 전쟁으로 서쪽 변경을 개척하고 새로 설치된 이 무위, 주천, 돈황, 장액, 금성군을 ‘하서 5군’이라 통칭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른바 ‘한사군’과 서로 비슷한 성격의 변군입니다.
※「한서」,「자치통감」중화서국본의 표점을 따랐습니다. (往往通渠置田官, 吏卒五六萬人)
[2] [정의] 흉노가 전에는 사막에 왕정(王庭)을 두었는데 이제 멀리 사막 북쪽으로 옮겨가니 (한나라가) 다시 이땅을 잠식하여 한나라 경계가 흉노 옛 땅의 북쪽과 연접(連接)하게 되었다.
당초 한나라의 두 장군(※위청, 곽거병)이 출격해 선우를 포위하여 참획한 이가 8-9만에 달했으나 한나라 사졸(士卒) 중 물고(物故)된 자 [1] 또한 수만에 이르고 한나라의 군마도 십여 만 필이 죽었다. 흉노가 비록 피해를 입고(病) 멀리 떠났으나 한나라 또한 말이 부족하여 다시 출병할 수 없었다. 흉노는 조신(趙信)의 계책을 채용해 한나라에 사자를 보내 좋은 말로써 화친을 청했다. 천자가 이를 의논하게 하자 어떤 이는 화친을 말하고 어떤 이는 끝내 신하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1] [색은] 한나라 사졸이 물고(物故)되었다. 살펴보건대,「석명」(釋名,후한 유희劉熙)에서 “한나라 이래로 죽음(死)을 물고(物故)라 했으니 만물이 썪어 옛 상태로 돌아갔다는 것(物就朽故)이다.” 했다. 또한「위대방의」(魏臺訪議)에 의하면 고당숭(高堂崇)이 대답하길, “선사(先師)에게 듣기로, 物(물)은 無(무)고 故(고)는 事(사)이니, 다시 事에 능하지 못하다는 말이라 하였습니다.” 했다.
승상장사(丞相長史) 임창(任敞)이 말했다,
“흉노가 바야흐로 격파되어 곤궁해졌으니 의당 외신(外臣)으로 만들어 변경에서 조청(朝請,조현朝見;봄에 조현하는 것을 朝,가을에 조현하는 것을 請이라 함)하게 해야 합니다.”
한나라가 임창(任敞)을 선우에게 사자로 보냈다. 선우가 임창의 계책을 듣고는 대노해 그를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 이전에 한나라에 흉노사자가 항복하는 일이 있으면 선우 또한 번번이 한나라 사자를 억류해 이에 상응케 했다. 한나라가 바야흐로 사졸과 군마를 다시 거두어 모으던 중 때마침 표기장군 곽거병이 죽었고 (※곽거병 죽음은 원수6년인 B.C 117 ; 위청은 원봉5년인 B.C 106년에 죽음)이에 한나라는 오랫동안 북쪽으로 호(胡)를 공격하지 않았다.
오유(烏維) 선우가 즉위한 지 3년 째(B.C 111년, 원정6년), 한나라가 이미 남월(南越)을 멸한 뒤 예전 태복(太僕)이었던 (부저장군浮沮將軍) 공손하(公孫賀)를 보내 1만 5천 기를 거느리고 구원(九原)을 나가게 하니 2천여 리를 가서 부저정(浮苴井)에 이른 뒤 [1] 돌아왔으나 흉노인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 한나라는 또한 예전 종표후(從票侯)였던 (흉하장군匈河將軍) 조파노(趙破奴)를 보내 만여 기를 거느리고 영거(令居)를 나가 수 천 리를 가서 흉하수(匈河水)에 이른 뒤 [2] 돌아왔으나 또한 흉노인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
[1] [색은] 苴의 음은 子+餘. 신찬(臣瓚:신찬 설명은 윗부분 참조.편의상 성명인 것처럼 표현했습니다.)은 “(부저정浮苴井은) 구원(九原)에서 2천 리 떨어져 있고 한여지도(漢輿地圖)에 보인다.” 했다.
[2] [색은] 신찬(臣瓚)은 “물 이름으로 영거(令居)에서 천 리 떨어져 있다.” 했다.
※「사기」권111 위장군표기열전에서 위청, 곽거병의 비장들을 서술하는 부분에 의하면 이때 공손하는 浮沮將軍, 조파노는 匈河將軍입니다. 작전을 펼칠 목적지를 장군 이름으로 삼은 것인데 浮苴를 浮沮로도 표기한 셈입니다. (「한서」무제기에서도 浮沮將軍으로 표기) 당시 흉노어를 음차하는 과정에서 서로 차이가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 이 출병 직후에 무위군, 주천군을 나누어 장액군, 돈황군이 설치됩니다. (「한서」무제기)
이무렵 천자가 변경을 순수(巡狩)하여 삭방(朔方)에 이르러 18만 기를 늑병(勒兵,통솔)하며 무절(武節)을 과시하고는 곽길(郭吉)을 선우에게 사자로 보내 넌지시(風) 고하게 했다. (※) 흉노에 도착한 뒤 흉노의 주객(主客)이 [1] 사자로 온 뜻을 묻자 곽길은 예의바르고 겸손하게 좋은 말로 말했다, “제가 선우를 뵌 뒤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한서」무제기에 의하면 무제가 삭방을 순행하고 흉노에 사자를 보낸 것은 원봉(元封) 원년(B.C 110)의 일입니다.
[1] [집해] 위소(韋昭)는 “사자와 내객을 주관하는 관직”이라 했다. [정의] 관직의 이름으로 (한나라의) 홍려경(鴻臚卿)과 같다. (※ 대홍려는 9경의 하나로 빈객의 접대를 관장했음)
선우가 곽길(郭吉)을 만나자 곽길이 말했다,
“남월왕(南越王)의 머리가 이미 한나라 북궐(北闕)에 내걸렸습니다. 지금 선우가 능히 전진해 한나라와 싸울 수 있다면 천자께서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변경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그리 하십시오.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남면(南面)하여 한나라의 신하가 되십시오. 어찌 헛되이 멀리 달아나 막북(幕北)의 춥고 고달프고 물과 풀도 없는 땅에 숨어 계십니까? 그리해서는 안됩니다.”
말을 마치자 선우가 대노해 곧바로 접대한 주객(主客)을 참(斬)하고는, 곽길을 억류한 채 돌려보내지 않고 그를 북해(北海) 근처로 옮겼다. [2] 그러나 선우는 끝내 한나라 변경을 침입하려 하지는 않았고 사졸들과 군마를 쉬게 하며 기르고 사렵(射獵,활을 쏘아 하는 사냥)을 익히며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 좋은 말과 감언(甘言)을 하며 화친을 청했다.
[2] [정의] 북해(北海)는 즉 상해(上海)다. (뒤에 사자로 갔다가 억류된) 소무(蘇武) 또한 이곳으로 옮겨졌다.
한나라가 왕오(王烏) 등을 사자로 보내 흉노를 엿보게 했다. 흉노의 법에서는 한나라 사자가 절(節,부절)을 떼어놓고 얼굴에 먹물을 들이지 않으면 궁려(穹廬)로 들어갈 수 없었다. 왕오는 북지(北地) 사람으로 호(胡)의 풍속에 익숙하니 그의 절(節)을 떼어놓고 얼굴에 먹물을 들이고는 궁려로 들어갔다. 선우가 그를 총애하여 감언(甘言)을 하며 허락하는 것처럼 속이며 (그를) 위해 태자(太子)를 한나라로 들여보내 볼모로 삼게 하여 (爲遣其太子入漢爲質) [1] 화친을 청할 것이라 했다.
한나라가 양신(楊信)을 흉노에 사자로 보냈다. 당시 한나라는 동쪽으로 예맥(濊貉), 조선(朝鮮)을 함락해 군(郡)을 설치하고 [1] 서쪽으로는 주천군(酒泉郡)을 두어 [2] 호(胡)와 강(羌)이 통하는 길을 격절(隔絶)시켰다. 한나라는 또한 서쪽으로 월지(月氏), 대하(大夏)와 통하고 [3] 공주(公主)를 오손왕(烏孫王)의 처로 삼게 하여 (※) 흉노 서쪽의 원국(援國,도움이 되는 나라.우호국)을 떼어냈다. 또한 북쪽으로 농지를 더욱 늘려 현뢰(胘靁)에까지 이르러 새(塞)를 만들었으나 [4] 흉노는 끝내 이에 관해 감히 말하지 못했다.
[1] [정의] 즉 현도(玄菟), 낙랑(樂浪)의 두 군(郡)이다.
[2] [정의] 지금의 숙주(肅州)다.
[3] [정의]「한서」서역전에서 “대월지국(大月氏國)은 장안성에서 11,600리 떨어져있다. 본래는 돈황(燉煌), 기련(祁連) 사이에 거주했는데, 묵돌(冒頓) 선우가 월지를 격파하고 노상(老上) 선우가 월지왕을 죽이고 그의 머리(두개골)를 음기(飮器,술잔)로 쓰니 이에 월지가 멀리 떠나 대완(大宛)의 서쪽을 지나 대하(大夏)를 공격해 신복시키고 규수(嬀水) 북쪽에 도읍하여 이를 왕정(王庭)으로 삼았다.” 했다.
[4] [집해]「한서음의」에서 “현뢰(胘靁)는 지명으로 오손(烏孫)의 북쪽에 있었다.” 했다.
흉노는 오손(烏孫)이 한나라와 교통한다는 말을 듣고 노하여 오손을 공격하려 했다. 또한 한나라가 오손에 사자를 보내고는 그 남쪽을 나가 대완(大宛), 월지(月氏)에 이르러 서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다. [안사고 왈, 抵(저)는 至(지)다. 屬의 음은 之+欲.] 이에 오손이 두려워하며 사자를 보내 말을 바치며 한나라 공주에게 장가들어 서로 곤제(昆弟,형제)가 되기를 원했다. 천자가 신하들에게 물으니 이를 의논하여 허락하되 필히 먼저 빙(聘,혼수)을 들인 뒤에 여자를 보내야 한다고 했다. 오손이 말 1천 필을 빙(聘)으로 삼았다. [안사고 왈, 빙재(聘財)를 들인다는 것] 한나라 원봉(元封) 중(B.C 110-105) 강도왕(江都王) 건(建)의 딸 세군(細君,사람이름)을 공주로 삼아 처로 주었다. 승여(乘輿)와 황제가 쓰는 물품을 하사하고, 관속(官屬), 환관(宦官), 시어(侍御)하는 자 수백명을 갖추어주었고 선물로 보내주는 것이 매우 풍성했다. 오손의 곤막(昆莫)(※)이 그녀를 우부인(右夫人)으로 삼았고 흉노 또한 여자를 보내 곤막의 처로 삼게 하니 그녀는 좌부인(左夫人)으로 삼았다. (※ 이후로 오손이 한나라의 동맹국이 되어 흉노를 압박하는데 협력합니다. 애초에 월지국에게 기대했던 역할을 오손이 대신한 거죠.)
※ 곤막(昆莫)은 오손의 왕호(王號)로 ‘선우’와 비견되는 것이며, 당시 곤막의 이름은 엽교미(獵驕靡)입니다. 뒤에는 ‘오손왕’을 뜻하는 곤막을 곤미(昆彌)로 칭하는데 이에 대해 안사고는 昆莫에서 ‘昆’, (獵)驕靡 에서 ‘靡’를 취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음이 통하므로 靡=彌로 간주) (昆莫本是王號, 而其人名獵驕靡, 故書云昆彌. 昆取昆莫, 彌取驕靡. 彌、靡音有輕重耳, 蓋本一也. 後遂以昆彌爲其王號也.)
이 해 흡후(翕侯) 조신(趙信)이 죽자 한나라의 용사(用事,집정)한 자들은 흉노가 이미 쇠약해졌으니 가히 신종(臣從)시킬 수 있다고 여겼다. 양신(楊信)은 그 사람됨이 강직(剛直), 굴강(屈强,굴하지 아니함.굳건함)하였고 평소 귀신(貴臣,존귀한 신하)이 아니었으므로 선우가 그를 친애하지 않았다. 선우가 그를 부르자 절(節)을 떼어놓으려 하지 않으니 선우는 이에 궁려 밖에 좌정한 채 양신을 만났다.
양신(楊信)이 선우를 만난 뒤 설득하며 말했다,
“화친하고자 하신다면 선우의 태자(太子)를 한나라에 볼모로 보내십시오.”
선우가 말했다,
“예전 약속과 다르오. 예전 약속은 한나라가 늘 옹주(翁主)를 보내고 일정한 품등의 증(繒,비단), 서(絮,솜), 식물(食物,음식)을 보내 화친하고 흉노 또한 다시 변경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소. 그러다 이제 예전 약속을 거슬러 나의 태자를 볼모로 삼으려 하니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오.(無幾矣)” [5]
[5] [정의] 幾의 음은 記. 예전 약속을 거스르는 것은 바라는 바가 아니라는 말.
흉노의 풍속에서는 한나라 사자가 중귀인(中貴人,지위가 높은 중신)이 아니고 유선(儒先)인 것을 보면 [6] 유세하러 왔다고 여겨 그의 언변(辯)을 꺾고, 젊은 사람이면 암살하러 왔다고 여겨 그 기세를 꺾었다. 매번 한나라가 흉노를 침입하면 흉노도 번번이 이를 되갚았고, 한나라가 흉노 사자를 억류하면 흉노 또한 한나라 사자를 억류해 반드시 상응하게 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6] [집해] (儒先에서) 先은 先生(선생)이다.「한서」에는 儒生(유생)으로 적혀 있다.
양신(楊信)이 돌아온 뒤 한나라가 왕오(王烏) 등을 사자로 보냈다. 흉노가 다시 감언(甘言)으로 아첨하며 한나라 재물을 많이 얻어내고자 하여 왕오를 속여 말했다, “내가 한나라에 들어가 천자를 만나고 면전에서 서로 형제를 맺고자 하오.” 왕오가 한나라로 돌아와 보고하자 한나라는 선우를 위해 장안에 저(邸,내조한 제후가 묵는 관사)를 지었다. 흉노가 말했다, “한나라 귀인(貴人)이 사신으로 오지 않으면 나는 그와 더불어 참된 말을 하지 않을 것이오.” 흉노가 그 귀인(貴人)을 사자로 보내 한나라에 도착했다가 병이 들었는데 한나라가 약을 주어 치유하려 했으나 불행히 죽고 말았다.
이에 한나라가 노충국(路充國)에게 2천 석 관원의 인수(印綬,관인과 인끈)를 패용하여 그의 영구(喪)를 호송하고 수천 금에 달하는 후한 폐물을 지니고 가게 하며 이르길, ‘이 사람이 한나라의 귀인(貴人)’이라 했다. 선우는 한나라가 자신의 사자를 죽였다고 하며 노충국을 억류한 채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때까지 한 여러 말은 선우가 다만 왕오를 헛되이 속인 것일 뿐, (몸소) 한나라로 들어오거나 태자를 볼모로 보낼 뜻은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흉노는 여러 차례 기병(奇兵,기습군.<->正兵)을 시켜 (한나라) 변경을 침범하게 했다. 이에 한나라는 곽창(郭昌)을 발호장군(拔胡將軍)으로 삼고 착야후(浞野侯)와 함께 [1] 삭방(朔方) 동쪽에 주둔시켜 호(胡)를 방비했다. 노충국(路充國)이 흉노에 머문 지 3년 만에 선우가 죽었다.
[1] [집해] 서광(徐廣)은 “(착야후浞野侯는) 조파노(趙破奴)”라 했다.
※「한서」무제기 – (元封 4년 = B.C 107년) 가을, 흉노가 약해졌으므로 마침내 신복(臣服)시킬 수 있다 하여 사자를 보내 이를 설득했는데 선우의 사자가 (한나라로) 왔다가 경사(京師,수도)에서 죽었다. 흉노가 변경을 침범하니 발호장군(拔胡將軍) 곽창(郭昌)을 삭방에 주둔케 했다. (秋, 以匈奴弱, 可遂臣服, 乃遣使說之. 單于使來, 死京師. 匈奴寇邊, 遣拔胡將軍郭昌屯朔方.)
아선우(兒單于)가 즉위하자 한나라는 사자 두명을 보내 한 명은 선우를 조문하고 한 명은 우현왕을 조문하여 그 나라를 이간시키려 했다. 사자가 흉노로 들어오자 흉노는 그들 모두를 선우에게로 보냈다. 선우가 분노하여 한나라 사자를 모두 억류했다. 흉노에 의해 억류된 한나라 사자가 앞뒤로 10여 무리(輩)에 이르렀고, 흉노 사자가 오면 한나라 또한 번번이 억류하여 서로 상응하게 했다.
이 해(B.C 104년, 태초太初 원년), 한나라가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를 보내 서쪽으로 대완(大宛,or 대원)을 정벌하였고 인우장군(因杅將軍) 공손오(公孫敖)에 명해 [1] (※) 수항성(受降城)을 쌓게 했다. [1]
[1] (杅의) 음은 于.
※ 인우장군 因杅將軍 /「한서」무제기 주 – 복건(服虔) 왈, (因杅는) 흉노의 지명으로, 정벌할 곳에 의거해 장군의 이름을 지었다. 안사고 왈, 杅의 음은 羽+俱. (服虔曰:「匈奴地名, 因所征以名將軍也.」 師古曰:「杅音羽俱反.」)
(당초) 그해 겨울, 흉노에 큰 눈이 내려 가축이 많이 굶어죽거나 얼어죽었고 선우가 나이가 어리고 살벌(殺伐)을 좋아하니 국인(國人)들 대다수가 불안해했었다. 좌대도위(左大都尉)가 선우를 죽이고자 하여 사람을 보내 한나라에 은밀히 고했다, “나는 선우를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하려 하나 한나라가 너무 멉니다. 한나라 군대가 와서 나를 맞이한다면 거사하겠습니다.” 당초 한나라가 이 말을 들었으므로 수항성을 쌓게 했던 것인데 여전히 거리가 멀다 여겼다.
※ 앞에서도 말했듯 이때까지는 冬十月을 한 해의 시작으로 삼다가 이 해인 태초 원년(B.C 104)에 夏正으로 바꾸어 태초 2년부터는 春正月을 한 해의 시작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위 본문 사건은, 태초원년 시작(겨울) – 흉노에 큰 눈이 내리고 좌대도위 밀서 – 이에 호응하기 위해 여름에 수항성 축조 (「한서」무제기) – 이듬해 봄 태초2년…의 순서입니다.
그 이듬해(B.C 103년, 태초2년) 봄, 한나라가 착야후(浞野侯) 조파노(趙破奴)를 보내 2만여 기를 거느리게 하고는 삭방(朔方)을 나가 북쪽으로 2천여 리를 가서 준계산(浚稽山)에까지 갔다가 [1] 돌아오기로 약정했다. 착야후가 약정한 곳에 도착한 뒤 좌대도위(左大都尉)가 거사하려 했으나 발각되니 선우가 그를 주살하고는 좌방병(左方兵)을 일으켜 착야후를 공격했다. 착야후는 행군 중에 수천 명을 참획하고 돌아오다가 수항성(受降城)에서 4백 리 되는 곳에 미처 이르지 못했을 때 흉노병(匈奴兵) 8만 기가 그를 포위했다.
[1] [색은] 응소(應劭)는 “(준계산浚稽山은) 무위현(武威縣) 북쪽에 있었다.” 했다.
착야후가 밤중에 몸소 물을 구하러 나오자 흉노가 몰래(閒) 그를 사로잡고는 이를 틈타 그 군대를 급격(急擊)했다. (당시) 군중(軍中)에서는 곽종(郭縱)이 호(護,호군護軍), 유왕(維王)이 거(渠,거수渠帥)였는데 [2] 이들이 서로 모의하여 이르길, “여러 교위(校尉)들이 장군을 잃었고 (이 죄로) 주벌될까 두려워하여 (한나라로) 되돌아갈 것을 권하는 이가 아무도 없다.”하였다. 군(軍)이 마침내 흉노에게 전멸되었다. 흉노 아선우(兒單于)가 크게 기뻐하며 이에 기병(奇兵)을 보내 수항성(受降城)을 공격했으나 떨어뜨리지 못하니 변경을 침입했다가 물러갔다.
[2] [정의] 거수(渠帥)였다. (※ 항복한 흉노병의 수령 / 王延海 譯注)
이듬해(B.C 102년, 태초3년), 선우가 스스로 수항성(受降城)을 공격하려 했으나 미처 도착하기 전에 병으로 죽었다.
兒單于立三歲而死.子年少,匈奴乃立其季父烏維單于弟右賢王呴[一]犂湖爲單于.是歲太初三年也.
[一]集解音鉤,又音吁. 索隱音鉤,又音吁.
아선우(兒單于)가 즉위한 지 3년 만에 죽었다. 아들이 어렸으므로 흉노에서는 그의 계부(季父,작은 아버지)인 오유선우(烏維單于)의 동생인 우현왕 구려호(呴犂湖,or 구리호-8대 선우)를 세워 [1] 선우로 삼았다.이 해가 태초(太初) 3년(B.C 102)이다.
구려호(句黎湖) 선우가 즉위하자 한나라에서는 광록(훈) 서자위(徐自爲)를 보내 오원(五原) 새(塞)를 나가게 하니 [1] 수백 리에서 멀게는 천 리까지 가서 성(城), 장(障)을 쌓고 정(亭)을 배열하여[2] 여구(廬朐)에까지 이르렀다. [3] 그리고 유격장군(游擊將軍) 한열(韓說), 장평후(長平侯) 위항(衞伉, 위청의 아들)을 그 곁에 주둔시키고, 강노도위(彊弩都尉) 노박덕(路博德)에게 거연택(居延澤,호수 이름) 가에 축성하게 했다. [4]
[1] [정의] 즉 오원군(五原郡)의 유림새(榆林塞)다. 승주(勝州) 유림현(榆林縣)에서 40리 되는 곳에 있었다.
[2] [정의] 고윤(顧胤, 唐)은 “장(鄣)은 산 중의 작은 성이고 정(亭)은 후망(候望)하며 거처하는 곳이다.” 했다.
※ 장(鄣)/「한서」무제기 안사고 주 – 안사고 왈, 한나라 제도(漢制)에서 매 새(塞)의 요처(要處)에 따로 성을 쌓아 사람을 두어 진수(鎭守)하고 이를 일러 후성(候城)이라 했는데 이것이 즉 장(障)이다. (師古曰:「漢制, 每塞要處別築爲城, 置人鎭守, 謂之候城, 此即障也)
[3] [집해] (朐의) 음은 衢이다. (여구廬朐는) 흉노의 지명이거나 또는 산 이름이다. [색은] 복건(服虔)은 “흉노의 지명”이라 했다. 장안(張晏)은 “산 이름”이라 했다. [정의]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오원군(五原郡) 고양현(稒陽縣)에서 북쪽으로 석문장(石門鄣)을 나오면 광록성(光祿城)이 있고 (※ 광록훈 서자위가 만들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 또한 서북쪽으로 가면 지취성(支就城), 또 서북쪽으로 가면 두만성(頭曼城), 또 서북쪽으로 가면 호하성(虖河城), 또 서북쪽으로 가면 숙로성(宿虜城)이 있다. 살펴보건대, 즉 성(城), 장(鄣)을 쌓고 정(亭)을 배열하여 여구(廬朐)에까지 이른 것이 이것이다. 복건(服虔)은 “여구(廬朐)는 흉노의 지명”이라 했다. 장안(張晏)은 “산 이름”이라 했다. (※「한서」흉노전에서는 “盧朐”(노구)로 표기.)
[4] [정의]「괄지지」에서 “한나라 거연현(居延縣)의 옛 성이 감주(甘州) 장액현(張掖縣) 동북쪽 1,530리 되는 곳에 있고 (이곳에) 한나라 때 차로장(遮虜鄣)이 있는데 강노도위(彊弩都尉) 노박덕(路博德)이 쌓은 것이다. (「한서」이릉전에 의하면) 이릉(李陵)이 패하자 차로장(遮虜鄣)에 도착하여 (서로 기다리도록) 사중(士衆,사졸)들과 약속했으니 즉 이곳이다. 장로(長老)가 전하기를 (차로)장(鄣) 북쪽으로 180리 되는 곳이며 거연(居延)의 서북쪽에 해당하는 곳이 이릉이 싸운 곳이라 했다.” 하였다.
그 해(B.C 102년, 태초3년) 가을, 흉노가 정양(定襄), 운중(雲中)을 대거 침입해 수천 명을 살략(殺略)하고 여러 (녹질) 2천 석 관원을 격파한 뒤 떠났고, 돌아가는 길에 광록(光祿,광록훈 서자위)이 쌓은 성(城)과 정(亭), 장(障)들을 파괴했다. 또한 우현왕(右賢王)에게 주천(酒泉), 장액(張掖)을 침입하게 하여 수천 명을 약탈했다. 때마침 임문(任文)이 [1] 공격하여 이를 구원하니 그들이 노획한 것을 모두 잃고 물러갔다.
[1] [집해]「한서음의」에서 “(임문任文은) 한나라 장수”라 했다.
이 해, 이사장군(貳師將軍,이광리)이 대완(大宛)을 격파해 그 왕을 참(斬)하고 돌아오니 선우가 이를 차단하려 했으나 미치지 못했다.
그 해 겨울, 수항성(受降城)을 공격하려 했으나 때마침 선우가 병으로 죽었다.
呴犂湖單于立一歲死.匈奴乃立其弟左大都尉且鞮[一]侯爲單于.
[一]索隱上音子餘反,下音低.
구려호(呴犂湖) 선우가 즉위한 지 1년 만에 죽었다. 이에 흉노에서는 그의 동생인 좌대도위(左大都尉) 저제후(且鞮侯-9대 선우)를 세워 [1] 선우로 삼았다.
저제후(且鞮侯) 선우가 즉위한 뒤 한나라 사자 중 항복하지 않은 노충국(路充國) 등을 모두 한나라로 되돌려보냈다. 선우가 처음 즉위하여 한나라가 자신들을 습격할까 두려워하니 이에 스스로 일컫기를, “나는 어린아이니 어찌 감히 한나라 천자(天子)에 비견되겠는가! 한나라 천자는 내 장인(丈人,노인,연장자) 뻘 되는 항렬(行)이다.[1]” 하였다. 한나라는 중랑장(中郞將) 소무(蘇武)를 보내 선우에게 후한 예물을 선물했다. 선우가 더욱 교만해져 예(禮)가 매우 거만해지니 이는 한나라가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그 이듬해(B.C 100년, 천한天漢 원년), 착야후(浞野侯) 조파노(趙破奴)가 달아나 한나라로 돌아왔다.
[1] [정의] (行의) 음은 胡+朗.
※ 王延海 譯注에서는 이 문단 이하는 사마천 이외 뒷사람에 의해 추가된 것이 아닌지 의심된다고 했습니다.
그 이듬해(B.C 99년, 천한2년), 한나라가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를 보내 3만 기(騎)로 주천(酒泉)을 나가게 하니 천산(天山)에서 [1] 우현왕(右賢王)을 공격해 호(胡)의 수급과 포로 1만여 급을 얻어 돌아오는데, 흉노가 이사장군을 대거 포위해 (이광리는) 거의 빠져나오지 못할 뻔 했다. 한나라 군사는 10 중에 6, 7이 물고(物故)되었다. 한나라가 다시 인우장군(因杅將軍) 공손오(公孫敖)를 보내 서하(西河)를 나가게 하니 강노도위(彊弩都尉,노박덕)와 탁야산(涿涂山)에서 합류했으나 [2]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1] [정의] (천산天山은) 이주(伊州)에 있었다.
※ 천산 /「한서」무제기 주 – 진작(晉灼) 왈, 서역에 있고 포류국(蒲類國)에 가까웠으며 장안으로부터 8천여 리 떨어져 있었다. 안사고 왈, 즉 기련산(祁連山)이다. 흉노에서는 하늘(天)을 기련(祁連)이라 일컬었다. 祁의 음은 巨+夷. 지금 선비어(鮮卑語)도 여전히 그러하다. (晉灼曰:「在西域, 近蒲類國, 去長安八千餘里.」 師古曰:「即祁連山也. 匈奴謂天爲祁連. 祁音巨夷反. 今鮮卑語尙然.」)
[2] [집해] 서광(徐廣)은 “涂의 음은 邪”라 했다. [색은] 涿의 음은 卓이고 涂의 음은 以+奢. [정의] (탁야산涿涂山은) 흉노 중에 있던 산이다. (※「한서」흉노전에서는 “涿邪山”으로 표기)
또한 기도위(騎都尉) 이릉(李陵)에게 보기(步騎,보병과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거연(居延)을 나가게 하니 북쪽으로 천여 리를 가서 선우와 조우해 어울려 싸웠다. 이릉이 (적군) 만여 명을 살상했으나 병기와 군량이 다하여 (원래 있던 곳을) 벗어나 돌아오려 했는데, 선우가 이릉을 포위하여 이릉이 흉노에 항복하니 그의 군대가 거의 전멸하였고 (탈출해) 한나라로 돌아온 자는 4백명이었다. 선우가 이에 이릉을 귀하게 대접하고 자신의 딸을 처로 삼게 했다.
이로부터 2년 뒤(B.C 97년, 천한4년), 다시 이사장군(貳師將軍,이광리李廣利)에게 기병 6만, 보병 10만을 거느리고 삭방(朔方)을 나가게 했다. 강노도위(彊弩都尉) 노박덕(路博德)은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이사장군과 합류했다. 유격장군(游擊將軍) 한열(韓說)은 보기(步騎) 3만 명을 거느리고 오원(五原)을 나갔다. 인우장군(因杅將軍) 공손오(公孫敖)는 기병 1만, 보병 3만 명을 거느리고 안문(雁門)을 나갔다.
흉노가 이를 듣고 그 누중(累重,처자식과 재산)을 모두 여오수(余吾水) 북쪽으로 멀리 옮기고 [1] 선우가 10만 기를 이끌고 여오수 남쪽에서 기다려 이사장군과 접전했다. 이사장군은 벗어나 군을 이끌고 돌아가려다 선우와 연이어 10여 일 동안 싸웠다. 이사장군은 그의 집안이 무고(巫蠱) 사건으로 족멸되었음을 듣고 이로 인해 군사들을 합쳐 흉노에 항복하니 [2] (한나라로) 돌아온 자는 천 명 중에 한 두명에 불과했다. 유격장군은 소득이 없었다. 인우장군은 좌현왕(左賢王)과 싸웠으나 싸움이 불리하자 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1] [집해] 서광(徐廣)은 “余는 斜로도 적혀 있고 (斜의) 음은 邪”라 했다. (※ 余吾水 vs 斜吾水) [색은] 서광(徐廣)은 “余는 斜로도 적혀 있고 음은 邪”라 했다.「산해경」에서 북선(北鮮)의 산은 선수(鮮水)가 이곳에서 나오는데 북쪽으로 흐르다 여오(余吾)로 유입된다.” 했다. [정의] 累의 음은 力+爲. 重의 음은 丈+用.
※「한서신주」에서는 ‘여오수’를 지금 몽골의 烏蘭巴托(울란바토르) 부근의 土拉河(툴라 강)이라 했습니다. 툴라 강은 서쪽으로 흐르며 울란바토르(당시 선우정單于庭으로 추정)를 지나 북쪽으로 흘러 오르콘 강(鄂爾渾河)에 유입되어 바이칼호로 들어가는 강입니다.
[2] [집해] 서광(徐廣)은 “「사기」장상연표와「한서」를 살펴보건대 (이 해가 아니라) 정화(征和) 2년(B.C 91)에 무고(巫蠱) 사건이 처음 일어났고 정화 3년에 이광리가 상구성(商丘成)과 함께 출병해 호군(胡軍,흉노군)을 공격했다가 패하여 항복했다.” 하였다.
※ 이 대목은 모두 천한天漢 4년(B.C 97)의 기사인데 이광리는 이때에는 싸움에 진 뒤 되돌아왔고, 이광리가 흉노에 항복한 것은 서광의 주석에서처럼 그 7년 뒤인 정화 3년(B.C 90)에 출병했다 패했을 때의 일입니다. (「한서」무제기, 이광리전, 흉노전 등) (사마광도「자치통감고이」에서 이 대목이 오류임을 지적하고 있음) 참고로 사마천은 대략 B.C 91년 무렵 [사기]를 완성하고 B.C 90년 무렵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말년의 일을 혼동했거나 후대에 보완, 편집한 이의 착오로 보입니다.
이 해 [3] 출병하여 흉노를 공격한 한나라 군대 중 그 공이 많고 적고를 말할 만한 자는 없었고 공이 있어도 (손실에) 맞먹지는 못했다. [4] 조서를 내려 태의령(太醫令) 수단(隨但)을 체포하니, 이는 이사장군의 집안이 족멸(族滅)되었음을 말해 이광리가 흉노에 항복하게 했기 때문이다. [5]
[3] [집해] 서광(徐廣)은 “천한(天漢) 4년(B.C 97년)”이라 했다. [정의] 이 대목 이하와 위로는 이사장군이 그의 가족에 관한 일을 들었다는 대목(貳師聞其家)까지는 천한 4년의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아는 바를 착오한 것으로 보인다.
[4] [정의] 御의 음은 語. 그 공(功)이 서로 어당(御當)하지 못한다는 것. (※ 손실을 상쇄할 정도는 아니라는 말)
[5] [색은]「한서」에서 “이듬해(B.C 96년, 태시太始 원년) 저제후가 죽고 장자(長子)인 호록고(狐鹿姑-10대 선우)가 선우로 즉위했다.” 하였다. 장안(張晏)은 “호록고 선우 이래로 모두 유향(劉向), 저선생(褚先生,저소손褚少孫)이 기록하고 반표(班彪,한서를 지은 반고의 부친)가 찬(撰)하여 그 뒤를 이었으니「한서」흉노전에 상, 하 양권이 있게 되었다.” 했다.
공씨(孔氏,공자)가「춘추」를 지으면서 (노나라) 은공(隱公), 환공(桓公) 사이의 일은 명료하게 적었으나 (자신의 시대인) 정공(定公), 애공(哀公) 때에 이르러서는 애매하게 적었으니 [1] 이는 자신과 가까운 당세(當世,당대)에 관한 글이므로 찬미하지 않고(罔襃), 꺼리고 피하는 문사(文辭)를 썼기 때문이다. [2] 세속에서 흉노에 관해 말하는 자는 요행히 한 때의 권세를 구하고 (徼一時之權) [3] 힘써 아첨하여 자신의 유세하는 말을 진언하며 (而務讇納其說) [4] 편벽한 의견으로 저들과 우리를(흉노와 한나라를) 상세히 고려하지 못하니 [5] 이것이 근심스럽구나. 장수(將率)들은 [6] 중국이 광대(廣大)한 것을 믿고 기세를 떨치고 인주(人主,임금)는 이에 의거해 계책을 결정했으니 이로써 공(功)을 세움이 깊지 못하였다. 요임금이 비록 현명했으나 (혼자 힘으로는) 사업(事業)을 일으켜 성공하지 못했으니 우(禹)를 얻은 뒤에야 구주(九州)가 안녕을 얻었다. [7] 장차 성통(聖統)을 일으키려면 오로지 장상(將相,장수와 재상)을 가려 뽑아 임무를 맡기는데 달려 있을 뿐이로다! 성통(聖統)을 일으키려면 오로지 장상(將相)을 가려 뽑아 임무를 맡기는데 달려 있을 뿐이로다!
[1] [색은] 살펴보건대, 나라의 악(惡)을 (적기를) 꺼리는 것이 예(禮)다. 중니(仲尼,공자)가 정공, 애공에 출사했으니 이 때문에「춘추」를 저술하며 당세를 직설적으로 논하지 않고 그 말을 애매하게 한 것이다.
[3] [집해] 서광(徐廣)은 “徼의 음은 皎”라 했다. [색은] 살펴보건대, 서(徐)는 (徼의) 음이 皎라 하고 (※) 유백장(劉伯莊, 唐)은 음이 叫라 했으나 모두 틀렸다. 살펴보건대 그 글자는 의당 음이 僥이다. 徼(요)는 求(구)이니, 한 때의 권총(權寵,권세와 총애)을 구한다는 말이다.
※ 서광을 말하려는건데 원문에서 廣 자가 빠진거 같습니다. 중화서국 표점본에도 徐라고만 되어있는데 거기에 고유명사 표기를 해놨습니다.
[4] [색은] (說의) 음은 稅.
[5] [색은] 살펴보건대, 흉노를 도모하는 일에 관해 유세하는 자들이 모두 한 때의 권행(權幸)을 구하여 다만 아첨하며 그 유세하는 말을 진언하는데 힘쓸 뿐, 스스로 편벽한 뜻에 치우쳐 종시(終始,시종,시말)와 이해(利害)를 상세히 고려하지 못함을 근심한다는 말이다.
[6] [집해]「시경」에서 “彼己之子(피기지자)”라 했다. [색은] 彼己(피기)라는 것이 시인(詩人)이 풍자하며 말한 “彼己之子”가 바로 이것이다. 장수(將率)는 즉 번쾌(樊噲), 위청(衞靑), 곽거병(霍去病) 등을 가리킨다.
[7] [정의] 요임금이 비록 현성(賢聖,성현)이었으나 능히 혼자 다스리지 못하니 우(禹)를 얻은 뒤에야 구주(九州)가 안녕을 얻었다는 말이다. 무제(武帝)가 현명한 장상(將相)을 뽑지 못하고 아첨하는데 힘쓰는 소인배의 허황된 주장을 받아들여 여러 차례 흉노를 정벌하여 이로써 제민(齊民)들을 피폐하게 했음을 풍자하였다. 그러므로 태사공(太史公)은 우(禹)의 성스러움이 태평(太平)을 이루어낸 것을 인용해 당대의 허물을 비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