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수필 아플 때는, 여행(두 번째 양양) / 모성숙

[고유진]

아플 때는, 여행(두 번째 양양)

                                                                                                         모성숙

여행을 준비하다 보면, 가져가는 짐의 내용과 빛깔로 여행의 깊이를 가늠해 보게 된다.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병원의 검사 결과가 다시 나빠진 어느 날, 두 번째 짐을 쌌다. 첫 번째보다 더 훌륭해진 짐 싸기. 짐을 싸면서 짐조차 정직해질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겉멋을 빼고 진짜 내가 필요한 것들을 싸는 데도 정직이 필요하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삶에 있어서 ‘그럴 것만 같아서’라는 허구를 빼고 나면 나에게 남은 것은 얼마큼이나 될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샀던 책을 집에 남겨두고 나니 정직한 짐가방이 홀가분해졌다.

동해안의 한 부분을 진하게 걷기로 마음을 정하고, 낙산해변과 설악해변, 정암해변을 지나 물치항을 선택했다. 왔다 갔다 왔다 갔다. 늘 익숙하게 바라보는 건물들을 배제하고, 바다와 나무와 길을 눈에 담았다. 너무 비슷해서 그냥 지나치는,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그림들이 속마음을 보일 때, 내 마음에 가득한 그것들의 정체가 서운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씩씩한 척을 했더니, 괜찮아진 줄 알고 어느새 걱정의 무게를 줄여가는 가족들이 서운했다.

울 수 없는 마음에 웃었더니, 의미도 모른 채 따라 웃는 친구들이 마냥 서운했다.

혼자 들어간 밥집에서 김치찌개를 시키고 앉아, 일인 밥상을 차리는 것이 얼마나 큰 손해인지 큰 소리로 푸념하는 사장님의 넋두리를 들으며 한없이 서운했다. 서울에서는 화가 날 일인데 왜 여행지에서는 서운한 것일까 생각하면서 불편한 밥을 먹게 만든 그 사장님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내게 온 그 질병은 ‘모순’이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잘 쉬어야 한다는데 잠이 오지 않았고, 잘 먹어야 한다는데 입맛이 없었다. 나만 알고 있는 그 모순들에게, 그 모순들을 굳이 내 앞에 놓아주신 그 분께 서운했다.

하루에 스쳐 가는 수만 가지의 감정들이 뒤죽박죽 엉망진창이던 어느 날, 만신창이가 되어서 사방을 향해 서운해하고 있던 내 모습이 가관이라는 것을 알아버리니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물치항을 걷다 보면 사람보다 물새들이 더 자주, 많이 눈에 들어왔다. 다리 위에서 바다를, 바다에서 이어지는 하천을 바라보다가 새들에게 마음을 주었다. 모여서 함께 움직이는 무리의 새들.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조금 떨어진 덤불 뒤 혼자 덩그러니 멈춰선 한 마리가 보이고, 한참의 시간을 바위 위에 그림처럼 앉아있는 한 마리가 보이고. 그 속에도 사연이 있어 보였다. 답을 알 수 없는 문제. 무엇인가를 궁금해하는 내 모습에 여전히 살아있음을 느끼는 나.

그 느낌을 부여잡고 물치항 뒤편으로 숨어있는 식당을 찾아갔다. 감자가 덩어리로 들어있는 칼국숫집. 식사 시간대에는 줄을 설 정도로 북적거리지만, 혼자여도 웃어주시는 사장님이 있는 곳이라 마음 편안한 집이었다. 천천히 먹어도 괜찮을 집이라 생각되었지만 늘 열심히 전투적으로 식사를 했다. 혼자인 내게 웃어주시는 사장님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자리를 빨리 비워드리는 일이었다. 자꾸 늘어가는 모순들.

결국은 여행도 사람이 함께일 수밖에 없는지 되묻는 시점이 되자 나의 정직함에 속도가 붙었다. 그 시절 내가 정말 잘못했던 사람이 있구나. 그때 그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정말 지긋지긋하게 오래가는구나. 지금 이 상황에도 너무 절절하게 보고 싶은 사람이 있구나.

그 당시에는 몰랐던 진실들이 줄을 선다.

진실해진 몸뚱아리로 동해대로의 짧은 한 구간을 걸으며 생각까지 투명해지는 것을 느낄 때 가끔씩 행복했다. 멍한 행복이었다.

물치항 바다가 보이는 길가 커피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양양 그곳, 카페 이룸>

작은 커피집에서 내가 받은 위로는 셀 수 없을 만큼인데,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느낌 때문에 수시로 들러 곰곰이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잘 만들어진 커피라고 해도 이렇게 감동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도무지 이 집의 정체는 무엇인가.

아침 7시 30분 문을 열자마자 내가 정한 의자에 앉아 관찰을 했다. 출근길에 들러서 커피 한 잔을 선택하는 사람들. 여행길의 낯선 아침을 빵과 커피로 계획한 사람들.

밝은, 어둔, 무색 표정의 사람들이 들어왔는데 마주 선 사장님은 한결같았다. 그저 집중. 마주 선 손님에 집중. 손님의 필요에 집중. 손님의 마음에 집중. 손님의 상황에 집중.

누군가가 나에게 집중한다는 기분 좋은 느낌은 가끔 무너질 듯 절절한 여행길에 선 내게도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모든 사람은 다 마음 한편에 같은 바람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짧게 스치는 순간, 사소한 한 마디 말에도 정말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제대로 된 친절은 상대방의 마음을 읽으려 애쓸 때 생겨나는 것을 배우고 나니 이제껏 내가 행했던 친절함의 껍데기가 우수수 떨어진다.

마음이 담긴 집중으로 따뜻함이 채워지는 공간. 그 안에서 데워지는 나.

그렇게 마음이 열리고 나니 사장님 내외분께 자꾸 말을 걸고 싶어졌다.

맥락 없는,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와 질문들. 그래도 적절하게 유지되는 거리들. 다시 찾아오는 데 방해되지 않도록 갖춘 예의들.

시간이 지나면서 보이는 그대로, 보여지는 그대로 마음을 내려놓는 나를 관찰하는 재미가 생겨났다.

택배로 받은 몸에 좋은 음식들을 나누고, 좋아해서 넘쳐버린 잡동사니들도 나누고, 그보다 더 귀하고 좋은 것들을 나누어 받고.

그렇게 난 회복되고 있었다.

여행 중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선물이다. 나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는 여행 중에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담기는 사람이라면 선물일 수밖에 없다.

여행은 장소와 장소 안에 담긴 사람이라는 것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