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15일은 시민의 날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인천’이라는 이름이 사용된 6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I-view는 인천의 정신적 모델을 발굴하고 인천의 역사 인물을 고증한 ‘인물로 보는 인천사’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동시대에 살지는 않았지만 선조들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그들과 함께 소통하고,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과 소통하며, 미래에 후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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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 독재와 자본 독재를 배격한 평화통일론자
조봉암은 열정적으로 민족운동에 참여한 혁명가였다. 해방 후 '전향'하여 국회에 입성한 뒤 농림부 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지냈고, 두번이나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돌풍을 일으켰다. 공산독재와 자본독재를 모두 배격한 평화통일론자였으나, 그 돌풍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2007년 9월 27일 대통령 소속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1950년대 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사형을 당한 조봉암과 유가족에게 국가가 사과하고 피해 구제 및 명예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한국의 대표적 보수신문마저 “조봉암은 한국에서 처음 사회주민주주의 이념을 추구했던 정치인이며, 전향 후 공산독재에 철저하고 분명하게 반대했고 이런 인물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것은 한국현대사의 그늘”이라고 논평함으로써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비운의 정치가로 알려진 조봉암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열정적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한 혁명가였다. 1919년 3월 자신이 태어나 소년기를 보낸 강화에서 “자유민보(自由民報) 외 10 수종의 불온문서를 작성, 강화읍내에 배포”하다 체포되어 6개월 이상 구금에 처해졌다가 체포된 것이 독립운동의 시초였다.
이후 그의 활동은 민족해방운동에서 사회주의사상을 수용하고 실천하는 활동에 집중되었다. 1925년 박헌영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참당에 참여하여 검사위원․만주총국 책임비서 등으로 활약했다. 특히 그는 1920년대 중반까지 중국 상해와 러시아를 무대로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 국제공산당)과 조선공산당 사이의 연락책으로, 이후에는 민족유일독립당 운동에 전력을 기울이는 민족통일전선운동에 앞장서 사회주의운동을 세계혁명과 조선독립에 결합하려고 노력했다.
인천과의 인연은 그가 1932년 9월 28일 상해에서 한인반제동맹 책임자로 활동하던 중 프랑스 경찰에 체포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봉암은 일본경찰에 신변이 인도된 뒤 7년형을 선고받고 신의주 감옥에서 복역 중 1939년 7월에 출옥했다. 그는 부모형제조차 남아있지 않은 강화행을 포기하고, 어린 딸이 친척집에 얹혀 살고 있던 인천으로 내려가 이때부터 도산정(도원동) 12번지에서 9년을 살았다.
조봉암은 일제가 이른바 사상범을 통제․감시하기 위해 주선한 비강조합의 조합장으로 생계를 꾸렸다. 비강조합은 정미소에서 나오는 왕겨를 모아 연료로 공급하는 곳이었다. 조봉암은 1945년 초 “해외와 연락”했다는 혐의로 헌병사령부에 예비검속되면서 해방을 직감했다. 그는 검속되기 직전인 1943년 12월 3일 강화의 부내면 관청리 550번지에서 분가하여 인천부 도산정(도원동) 12번지로 호적지를 옮겼다.
8․15 당일 출옥한 조봉암은 인천으로 내려가 동지들과 치안유지회를 결성하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를 조직했다. 정치권력의 공백기에 주도적 활약으로 그는 일약 인천의 지도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조봉암은 조선공산당과 선을 긋기 시작했다. 1945년 10월 16일 출범한 인천시 인민위원회에서 그는 아무런 직책도 맡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민족통일전선을 외치면서 인천협동조합․인천시세진흥회 등 ‘다른’ 길로 보폭을 확대해갔다.
1946년 5월 초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에게 보내는 서신이 언론에 폭로되고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인천지부 의장마저 사임한 그는 6월 23일 인천공설운동장에서 민전 인천지부 주최로 열린 ‘미소공위 속개촉진을 위한 인천시민대회’에서 전향 성명서 살포라는 충격적인 방법으로 시민대중을 향해 ‘전향’을 선포했다.
한국 연립정부는 공산당이나 (독립촉성)국민회의 독점적인 정부로 조직되어서는 안된다… 현재 한국민은 공산당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공이나 민전의 정책은 철저히 배격되어야 한다.… 우리는 노동계급에 의한 독재나 자본계급의 전제를 원하지 않는다.
도박에 가까운 조봉암의 정치실험은 이후에 그가 제헌의회 선거에 출마하는 논리가 되었다. 발기인으로 참여했던 민족자주연맹(민련)이 남한 총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방침을 번복하자 그는 무소속 출마를 결심했다. “남한 단독선거가 미소 대결정국의 산물이라면 가능지역에서의 ‘우리의 독립정부’ 수립은 오히려 시급한 과제이며 통일정부 수립도 우리의 독립정부에 의해 제2단계로 모색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조봉암은 인천 을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그는 상대후보가 “나는 공산주의자의 투표로 만약 당선되는 일이 있을 것 같으면 의원의 권리를 포기할 것”이라며, 선거를 이념대결로 몰아가려 하자,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내가 국회에 출마하게 된 것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함이다. 독립운동이란 무엇인가? 곧 외국군대를 철퇴시키는 운동이다… 우리 민족은 좌우 중간을 통일하고 사대주의를 배격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국토 안에서 미소의 전쟁을 방지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민족 자주주의를 고수하여야 한다. 나는 국회에 나가면 남북통일을 위하여 싸울 것이다. 여러분이 남북통일이 좋은 일이라면 나를 지지할 것이요 그를 원치 않는다면 나를 배격할 것이다.
조봉암의 당선은 전국적인 명망을 가진 그의 명성에 해방 후 대중 속에서 쌓아올린 노력을 인천의 유권자들이 평가해준 결과였다. 제헌 국회의원 선거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는 자리였던 만큼 지역일꾼을 뽑는 기성 국가의 선거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국회에 입성한 그는 초대 농림부 장관, 2대 국회부의장을 지냈고, 1952년과 1956년 대통령선거에 연이어 출마하였다. 특히 진보당(추진위) 후보로 출마한 1956년에는 216만표를 얻는 돌풍을 일으키며 이승만 정권을 위협했고, '진보당 사건'을 불러오며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진보당 사건은 4대 총선을 몇 달 앞둔 1958년 1월 12일, 내무부 치안국이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은 불법이며, 당수인 조봉암이 간첩 박정호와 접선한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수사에 착수하면서 시작되었다. 사건의 쟁점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북한의 통일론과 사실상 동일하다는 것이었다. 즉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평화통일과 근로대중의 단결을 요청하는 진보당 강령은 북한이 선전하는 평화통일노선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한국의 국가원리를 손상시키고 한국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주장이라고 했다. 둘째는 조봉암이 이중간첩으로 활동하던 양명산에게 북에서 온 자금을 받아 진보당의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진보당 사건은 두 쟁점이 병합 심리된 사건으로, 1심에서는 진보당 강령이 대한민국의 기본원리를 손상시키지 않았다고 판시했으나, 간첩죄에 대해서는 양명산의 자백을 토대로 조봉암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반공테러가 난무하는 가운데 진행된 2심에서 재판부는 검찰의 공소 사실을 모두 인정하여 진보당의 정강정책에 국가를 변란할 목적이 내재해 있다고 판시했고, 조봉암의 간첩죄 역시 검찰의 구형대로 조봉암과 양명산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959년 2월 27일 대법원은 진보당 사건에 대한 최종 판결을 내렸다. 먼저 최대 쟁점인 평화통일정책에 대해서는 “헌법에 위반하지 않으며 헌법 제14조 언론자유의 한계를 일탈했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조봉암의 간첩죄에 대해서는 1, 2심과 동일하게 사형을 확정하였고, 1959년 7월 31일 ‘신속하게’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이 집행되었다.
진보당 사건은 1심에서 최종 판결로 가는 과정에서 판결의 기복이 심했고, 진보당의 통일정책이 위헌이 아니라는 이유로 간부들은 무죄선고를 받았음에도 유독 조봉암만 간첩혐의로 사형에 처한 것은 결국 진보당이라는 정당 자체나 정책보다 이 사건이 조봉암 개인의 제거에 목적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2011년 1월 20일에 열린 진보당 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대법원이 조봉암에 대해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이로써 인천이 낳은 거물 혁명가․정치인인 조봉암의 법적인 복권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50년을 짓밟혀 온 그에 대한 진정한 명예회복과 재평가는 살아있는 세대의 몫으로 온전히 남아있다.
[이현주]
○ 참고문헌
정태영․오유석․권대복 편,『죽산조봉암전집』(1~6), 세명서관, 1999
권대복 엮음,『진보당』, 지양사, 1985
이현주,「해방후 조봉암의 정치활동과 제헌의회 선거」,『황해문화』2001봄
박태균,『조봉암연구』, 창작과비평사, 1995
○ 연보
1899.9.25. 창녕조씨 찬성공파로, 경기도 강화군 부내면 관청리 550 출생
1919.3. 강화에서 3․1운동 참가 후 체포
1921.7. 도일하여 무정부주의단체 흑도회를 창립하고 귀국
1922.10. 러시아 베르흐네우진스크의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에 국내대표로 참가
1924.3. 신흥청년동맹, 조선청년총동맹, 혁청단 등의 간부로 활동
1925.4. 조선공산당 창당참여, 중앙검사위원, 고려공산청년회 집행위원
1926.5.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책임비서
1927.4. 민족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집행위원
1929.10. 상해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에 참여
1931.12. 상해한인반재동맹 조직, 책임자로 활동
1932.4. 상해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 7년 징역, 신의주형무소 투옥
1939.7. 출옥, 인천으로 내려감
1945.1. 인천에서 예비검속, 서대문형무소 투옥
1945.8.15. 출옥
1945.8. 인천 경동여관에서 치안유지회 조직.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 조직
1946.2. 민주주의민족전선 인천지부 의장
1946.6. 인천공설운동장에서 민전 주최로 열린 집회에서 ‘전향’ 성명 발표
1947.2. 민주주의독립전선 상임위원
1948.5. 인천 을구에서 제헌 국회의원 당선
1948.8. 초대 농림부장관
1950.5. 인천 병구에서 2대 국회의원 당선.
1950.6. 국회부의장 당선
1952.8. 대통령선거에 출마, 차점 낙선
1955.12. 진보당(가칭) 추진위원회 대표
1956.5. 진보당(추진위) 대표로 대선출마, 차점 낙선
1958.1. 진보당 사건으로 검거
1959.2. 대법원 상고심에서 간첩죄로 사형 선고
1959.7.31. 사형집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