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솔바람이 된 소년소설가 김상남
박 일(아동문학가)
소로마(솔ᄆᆞ)!
그의 아호이며 필명이다. 고향 소나무에 부는 마파람(남풍)이란다. 문학 감수성을 키워준 고향에 대한 향수를 품고 살았다. 김동환은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시 「산 너머 남촌에는」 부분)’라고 했으니, 뭔가 가득 실어올 것 같은 봄이 그리워진다.
그는 김수로왕 74세손이다. 왕손에 대한 자긍심이어서 간혹 이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1937년 남해송남(송정) 해수욕장이 보이는 미조마을에서 태어났다. 진주사범을 졸업하고, 부산에서 교사시절을 보냈다.
새천년이 되면서 아호를 즐겼다. 『어린이문예』(2004. 9/10)에 「외톨이는 없다」, 『화전』 창간호(2005년)에 실린 소설 「만가」, 『어린이글수레』(2006 봄)의 「조각난 동심을 찾으려고」 그리고 『남강문학』 제5호(2013)의 꽁뜨 「진주 비빔밥」과 제6호의 꽁트 「세세년년-29장」 등은 ‘소로마’로 발표했다.
1995년에 부산아동문학인협회장(2년 임기)을 맡았다. 그때 ‘깊은 바다에서 건져 올린 잠수부의 소라도 소중한 자양분이지만, 우리가 만든 시 한 편은 어린이의 마음에 아롱져 내일을 살아가는데 길을 밝히는 꺼지지 않는, 불씨가 될 것입니다’라며 아동문학의 중요성을 설파하기도 했다. 연간집 『바닷속 작은 마을』과 『바다를 담은 풍선』을 펴냈고, 동화 「아버지는 아기곰」과 「청룡 뚝에서 청룡을 따라」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때는 본명이었다. 그러나 회장직을 떠난 후에는 연간집에 작품 발표를 하지 않았다. 고문직을 맡아 이사회 참석을 하면서 동정을 보여주었지만, 2020년 1월 이사회 참석이 마지막이었다. 막걸리 한 병이면 즐겁고 행복했다.
2004년에 부산아동문학인협회 까페를 개설하면서 ‘소로마 김상남 서재’ 방도 만들었는데, 작품보다 유머나 자질구레한 삶의 이야기들로 채웠다. 아마 이 방이 창작 고뇌의 해방구였거나 탈출구였는지 모르겠다. 예를 들면 ‘사오정 강도’라는 제목 아래 ‘바보집에 든 강도 멍청한 바보를 보자 장난기가 발동... "꼼짝마! 문제 맞추면 돈만 빼앗고 그냥 가겠다. 삼국시대는 무슨 나라들로 이뤄졌냐. 10초를 세겠다.” 말끼도 모르는 바보, 칼은 무서운 줄 알아서 엉겁결에 "배 째실라고 그려?” 한 것이 ‘백제, 신라, 고구려’로 들려 위기를 넘겼다나…’ 이런 활동도 494회 ‘글자 고치기’(2016년 01, 02) 이후 멈추고 말았다.
그의 기억력은 천재급이다. 한번 입력되면 놀랄 정도로 정확하다. 그래서 ‘걸어다니는 문학사전’이라 했다. 등단 연도와 경로, 그리고 그 사람의 문학적 업적과 교우 관계를 환히 꿰고 있다.
귀가 어두워지면서 참여가 어려웠고,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까 문자로 소통했지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치매까지 겹쳐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2023년 봄에 방문한 동화작가 김상곤 선생은 정확하게 기억하더라고 증언한 걸 보면 인지의 상태가 다를 수도 있나 보다.
등단과 문단 활동
1953년 『학원』에 소년소설 「산딸기 익는 마을」이 당선 되고, 소설 「산포도」 로 제4회 학원문학상을 받았다. 1975년에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출토기出土記」와 동화 「비둘기」가, 문공부 주최 장편아동소설 공모에 「꽃댕기」가 당선되었다. 화려한 등단이었다.
진주사범 재학 시 글쓰기를 해야겠다고 결심한다. ‘진주에 있는 국비장학생이 다니는 학교에 가게 되었는데 나보다 나이가 적은 녀석들이 어찌나 영어와 수학을 잘하는지 그만 질려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글쓰기밖에 없었다.’고 한 걸 보면, 글쓰기로 그들과 차별화하려고 했나 보다.
수상은 문공부 창작문학상(1975), 해강아동문학상(1982), 한국아동문학상(1989), 영남아동문학상(2005), 실상문학상(2009), 부산 원로문학상(2018)과 국민훈장-목련장 등이다.
저서는 『봄부터 걸린 고뿔』(1983. 제일문화사), 『흰구름 먹구름』(1986, 효성사), 『이사가는 비둘기』(1992, 보리밭), 『백마 타고 온 사람』(1993, 삼익출판사), 『하느님, 2월에는 하루만 더 주세요』(1994, 윤성), 『보석이 열리는 콩나물』(1995), 『산골 아이의 자동차』(1995, 보리밭), 『춤추는 과녁』(1999, 대산), 『잘 가라 폭탄 갈매기야』(2007, 두손컴) 등이다.
부산아동문학인협회장, 부산문협부회장, 한국아동문학가협회 부회장, 부산소설가협회 사무국장, 화전문학회장, 남구문학회장, 남강문우회장, 전국문예창작인연합 상임위원, 현대시절가조연구회 자문위원, 불교문인협회 자문, 서포김만중선생숭모회 감사 등을 역임했다.
김문홍 소설가와 대담한(2014. 6) 내용 중 일부(근황과 등단 시절)만 옮긴다.
김문홍: 안녕하십니까? (중략) 김 선생님의 안부와 근황을 자주 묻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말 끝머리엔 “참 능력 있는 작가인데 요즘 글을 쓰지 않아 안타깝습니다.”라고 푸념을 하곤 합니다. 요즈음 글은 쓰고 계십니까, 아니면 글을 통 쓰지 않으시는지요?
김상남: (전략) 아동문학계의 나의 위상이 겹쳐져 많이 우울했습니다. 닳아빠진 구두 뒷굽을 갈고 있는 신기료장이가, 마치 200자 원고지를 메꾸어도 동화가 안 되어 쓰레기통에 버리는 나보다는 훨씬 낫다 싶었습니다. 사흘이 멀다 하고 새 신으로 바꿔 신는 세태에 오래도록 두고 신는 ‘꼬까신’을 어찌 한 번 만들어 볼 수 없을까 하고 늘 밤잠을 설칩니다. 김박사께서 저에게 쏟는 관심의 반에 반도 못 갖는 저의 무심함이 때로는 자괴감을 넘어 채찍으로 저를 압박하기도 합니다. 짚어 주신대로 통 글을 쓰지 않습니다. 쓰지 않는다기보다 못 쓴다는 표현이 맞겠습니다. (후략)
김문홍: 문단 등단 무렵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1970년대 중반에 중앙일보사에서 발행하던 《소년중앙》문학상에서 동화가 당선되면서 등단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광복 30 주년 기념 현상공모에서 장편 아동소설 『꽃댕기』가 당선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중략) 등단 당시의 에피소드 같은 재미있는 얘깃거리도 궁금합니다.
김상남: 당선통지서가 문공부로 되돌아가자 호구조사를 해서 겨우 필명 ‘김어진’(아내의 이름)의 남편이었던 저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고향에서 받으시고는 저에게 간단한 격려편지와 함께 보내셨는데, “문공부에 기고한 작품이 당선되었다. 더욱 면려하기 바란다. 부친”이라고 씌어 있더군요. 곧 문공부에 전화해서 당선이냐, 가작이냐부터 물었습니다. 퇴근해 아내에게 알렸더니 딸아이들을 불러 울면서 “이제 너희들도 대학공부까지 할 수 있다. 아버지가 글 쓰면 된다.” 하던 말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중략)
500장 가량이었는데 겨우 반쯤 쓰니 마감일이 다 돼 부산역 앞의 ‘여원 타자교실’에 갔습니다. 낙서와 다름없는 초고를 타자로 쳐 달라 주문하고 나머지 부분을 마무리 짓는데, 타자 강의를 맡은 원장님이 넘기는 쪽쪽 치길래 나중에는 메모지를 보며 구술口述을 했습니다. 당선되면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고 책도 출간해 준다는데, 사실 초고가 아직도 내 머리 속에만 있고, 오래 된 글이라 당선작 타자원고가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학원』 잡지에 연재하다가 이 잡지의 폐간과 함께 「꽃댕기」의 연재도 중단했습니다. 타자 친 작품을 들고 부산역으로 가다가 흥분한 나머지 광장에서 택시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걷다가 맞부딪쳤지만 툭툭 털고 운전수에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봄비가 내렸는데 그만큼 기분이 좋았다 할까요. 마감을 넘겼다고 안 받아주면 출판사에 팔아넘길 작정이었습니다. 문공부에서는 시골서 직접 갖고 오니 접수는 하는데 그냥 가라기에 접수증을 요구했습니다. (중략)
「꽃댕기」 상금으로 집도 장만했지만 그 집이 지금은 제칠일안식교회의 목사님이 삽니다. 아내가 저승에 가고 「꽃댕기」의 메모장도 2층에 불이 나면서 사라졌지만, 아직 동백꽃과 산호수 나무는 그대로 있는지 궁금합니다. 가보고 싶어도 왠지 울음이 터질 듯해서 한 번도 가지 못 했습니다.
70년대가 절정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의 문학은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이육사 시 「절정」 부분) 있었다. 그 여세는 90년대까지 이어진다. 그런 절정이 오히려 글쓰기를 어렵게 했거나 과작의 원인이 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문학회 활동(창립 등) 등에서 존재감을 뽐냈다. 창립에 관여한 문학회만 해도 ‘부산아동문학가협회’ ‘부산소설가협회’ ‘화전문학회’ ‘남강문우회’ 등이다.
특히 ‘부산아동문학가협회’는 1977년 ‘우리는 안일한 창작태도보다는 오히려 치열한 작가정신(프로정신)을 높이 사고’자 조직했고, 그 해 동인지 『하얀 뱃고동』을 상재했는데, 그에 실린 동화 「쫓겨난 여우」는 당시 여당이었던 공화당의 언론 탄압 정책을 비판했다는 내용을 담았다고 해서 검열을 당하기도 한다. 1984년 부산아동문학인협회에 흡수된다.
대표작품집 『봄부터 걸린 고뿔』
저서 8권 중 창작동화로 발표한 저서는 『이사가는 비둘기』, 『백마 타고 온 사람』, 『하느님, 2월에는 하루만 더 주세요』, 『보석이 열리는 콩나물』, 『산골 아이의 자동차』 그리고 『잘 가라 폭탄 갈매기야』(2007, 두손컴) 등이다.
이미 ‘아동소설의 달인’이라고 소개한 바 있듯이, 그는 소년소설가다. 넓은 의미의 동화는 신화, 전설, 민화 등 아동을 위해 씌어진 초자연적 성격의 옛이야기류를 모두 포함한다. 좁은 의미의 동화라고 하면 보다 현대적 성격의 동화 개념을 분명히 하면서 제한된 영역으로 범주를 좁히게 된다. 아동 독자를 염두에 두고 창작된 산문문학을 말하며 창작동화(생활동화)와 소년소설이 그것들이라고 했으니, 소년소설도 동화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정치적⋅사회적 혼란과 전쟁에서 오는 각박한 현실이 동심에 미친 영향으로 말미암아 아동들은 좀 더 현실적인 읽을거리를 요구하게 되었고, 이러한 사실은 환상적이며 실질적 본격동화의 위기를 불러와 소년소설이 현저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동화관은 동화는 직관적인 새김, 따뜻한 가슴이어야 용해되는 특이한 언어구조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미 굳어진 인식체계나 감성으로는 동화의 비상식적 문법이나 환상조작술에 당혹감을 느낄 뿐이다. 그리하여 동화에 투영된 세계는 현실과 멀다고 보거나 황당하리라는 혐의로 동화의 순기능마저 위축당하기도 하는데 못내 안타깝다라는 것이다. 동화가 갖는 환타지 공간은 현실로부터의 탈출하면서 딴 세계로 안내한다. 그러나 현실과 동떨어진 환타지 세계에 대해서는 상당한 거부감이나 당혹감을 보인다. 그래서 의인화 소설 기법도 즐겨 사용했으리라.
『봄부터 걸린 고뿔』은 그의 장편소년소설이다. 11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추리기법을 도입하여 긴장감을 준다.
구성 단계와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발단은 제1부 ‘낮에 꾼 초록꿈’이다. 주인공 바로는 4의 4반 학생인데, 담임교사의 병휴직으로 학급이 해체되고, 학생들은 분반되어 흩어진다. 그는 1반으로 들어가지만 적응이 안 돼 수업시간에 잠을 자 혼나기도 한다. 그러나 <초록별>의 쪽지를 받은 게 있고 그게 궁금하다.
전개 부분은 제2부 ‘초록별이 보낸 쪽지’에서 시작된다. 바로는 초록별에 관심이 생기면서 초록별이 누구일까 탐색하기 시작한다. 쪽지에서 ‘다섯’이라는 숫자를 자주 쓴다는 것을 알고 5와 관련 있는 친구들을 의심하기도 한다. 학급이 해체되기 전에는 교무주임이 와서 수업을 했지만 학급이 정돈되지 않았고, 잠시 대체강사가 왔을 때 릴레이를 많이 하여 학급대항 릴레이에서 우승을 하기도 한다. 초록별의 지시를 따르기도 했지만 초록별에 대한 궁금증은 증폭한다. 그래서 삼호가 그립다. 그는 전학갔지만 의사소통이 잘 되었던 친구였다. 하루는 수업뺑소니도 한다. 학교에 갔지만 선생님이 없는 곳은 어디든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자성대 공원으로 향한다. 이미 다른 아이들도 몇 있었다.
위기 부분은 제6부 ‘자료실에서 만난 괴물’부터다. 책가방은 갖고 집에 갈 거라고 석양에 학교에 갔다가 전달부 아저씨께 들켜 자료실에 감금되고, 거기서 괴물을 보기도 한다. 그 괴물의 환상 때문에 괴로움을 겪는다. 바로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이며 누나 셋을 두고 있다. 아버지가 부산 근교 학교에 있기 때문에 주말에만 오신다. 바로는 3학년 때는 공부도 잘했고 부급장을 하기도 했다. 초록별의 쪽지는 수시로 날아왔다. ‘하얀 소녀는 학교에 있다’는 내용이 어쩌면 자료실의 괴물(해골 모형)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서무실에서 타자치는 누나에게 갔다가 ‘보고 싶은 4-4 어린이들에게’라는 편지를 본다. 담임 선생님의 정체도 알게 된다.
절정부분은 제9부 ‘토요일 오후의 가출’부터다. 토요일 오후에 옥수수 밭에서 메뚜기를 잡다가 삼호를 만난다. 3월 중순인가 하순에 밀양으로 전학을 간 친구다. 삼호는 학교는 가지 않고 궁도를 한다고 했다. 둘이 활터가 있는 명지동으로 향한다. 21번 버스를 타고 탐험하는 기분으로 떠난다. 을숙도에서는 마침 ‘제1회 낙동강 철새 보호 백일장’이 열리고 있었다. 바로는 동시 한 편을 적어 제출한다. 둘은 을숙도 갈대밭을 헤매다 길을 잃고 배를 놓친다. 밤이 다가오는데 밀렵꾼들에게 쫓기는 누나를 발견한다. 그는 조류탐사 온 대학생이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고 사방도 어두웠다. 셋은 힘을 합쳐 밀렵꾼들과 대항한다. 밀렵꾼들은 손전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표적이 되었다. 삼호는 고무줄 시위를 만들어 갈대화살 끝에 볼펜 촉, 머린 핀 등을 붙여 그들에게 쏘며 저항했다. 위기의 순간이었다. 통통배 소리가 들리고, 기적 같이 헬리콥터가 날아왔다. 바로의 동시가 장원이 되어 매스컴을 타는 바람에 바로의 아버지가 을숙도에 있다는 것을 간파하여 경찰에 신고할 수 있었다. 밀렵꾼들은 체포되고 이들은 병원으로 실려 갔다.
결말은 제11부 ‘별을 쏘는 활터’다. 여름 방학 직전에 담임 선생님이 오셔서 흩어졌던 친구들이 모였다. 삼호도 내일부터 학교로 데려오라고 했다. 삼호가 있다는 구봉산으로 갔다. 그는 활터에서 화살을 줍는 시동이었다. 화살은 몇 개씩 쏘느냐는 질문에 다섯 개라는 대답을 들었고, 삼호가 초록별 과녁을 맞추는 행동 등에서 초록별의 정체를 추리한다. 하얀 소녀는 운동장에 설치된 독서상이라는 것도 찾아낸다. 그곳에 숨겨두었던 쪽지도 찾아낸다. 결국 초록별은 학교에서도 공부가 안 되는 떠돌이별이었고, 4의 4반을 재건하는데 앞장서고 싶은 아이였다. 봄부터 걸린 고뿔도 어느새 물러가 버렸다.
책 끝에 ‘아동문학은 어머니의 젖처럼 가장 좋은 단백질로만 이뤄줘야 디는 것이지 간식이나 대용식 역할밖에 되지 않는다면 아동문학의 소임을 다했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라고 했다. 이 작품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이 작품에 대한 자평은 ‘내 작품을 다시 읽으니 나는 문장이 아주 경쾌하고 묘사가 잘 되었다고 자만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어째 줄거리가 안 떠오를까. 아마 표현 쪽이 승하지 않나 여겨지더군요. 문체는 이제 바꿀 수도 없고 그대로 내 식을 고집할 수밖에 없는데, 하원(김문홍) 선생이 문장이 좋다니까 기분이 아주 유쾌합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중언부언해도 재미가 나야 하는데, 재미가 문장의 상관성이 좀 의아해서 줄거리 구성에 치중해야겠다고 여깁니다.’
이 소설의 배경은 어느 초등학교다. 그가 체험했거나 근무한 학교였을 게다. 담임교사의 병휴직으로 4-4반이 해체되면서 각 반으로 분산된다. 담임교사가 안 계신 공간은 학교가 아니었다. 그래서 학교에 흥미를 잃게 된 아이들이 많아졌다. <초록별>은 떠돌이별 같은 그 학급아이들의 은유이기도 하지만, 4-4반을 되찾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노력하는 숨은 주인공(삼호)이었다. 이의 정체를 숨기면서 추리소설처럼 재미있게 이야기를 이끌어갔고, 아이들과 학교의 갈등은 아이들이 피해를 입는 구조지만, 학교 운영의 편의에서 아이들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주제)를 강하게 던져준다. 아이들과 담임교사의 건강한 교류가 아이들 성장에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바로와 보이지 않는 <푸른별> 사이에서 겪는 갈등은 긴장감과 재미를 주기 위한 고도의 서술 전략이었다. 서술방식도 화려체는 아니다. 또한 그의 유창한 지식을 거침없이 노출시키기도 한다. 제11부에서 국궁을 쏘는 방법 등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비정비팔非丁非八, 흉허복실胸虛腹實 등 한자어가 14개나 나온다.
갸륵한 영애
부산아동문협까페 그의 서재에 오른 글 중의 한 편이다. 동화작가 손수자 선생이 보낸 편지글(2005. 10, 24)이다.
소로마 선생님.
어제 부산아동문학인협회 세미나에서 값진 말씀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삶과 문학에 대한 애정, 그리고 작가로서의 열정 또한 후배들이 본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 생. 결. 단. 임. 전. 무. 퇴
잊지 않겠습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쓰려고 하면 좋은 글이 되지 못함은 사생결단, 임전무퇴의 그 정신으로 작품을 쓴다면 아마 역작이 나오리라 생각됩니다.
부산아동문학 가을세미나(2005년 2월 23일)가 산성마을 전원집에서 있었다. 이 날 그는 특별강연에서 문학가는 충무공의 정신과 ‘사생결단 임전무퇴’의 신념으로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바 있다. 촌철살인 같은 이 말씀에 갈채를 받았다.
원고청탁을 받았다. 자료 없는 글은 쓸 수 없다고 했더니, 화전문학회 박윤덕 회장은 “걱정 마십시오. 자료 준비는 됐습니다.”라고 한다. 그가 주소지로 방문을 했고, 그 집 주인이 큰딸과 교류한다면서 연락이 닿아 자료를 보내왔다는 것이다. 부쳐온 자료는 저서 8권(『보석이 열리는 콩나물』 제외), 『한국창작동화선집』 1권, 『어린이문예』(2011, 가을)와 ’77아동문학선집 『하얀 뱃고동』 등 11권이었다.
이 자료를 건네받고 갑자기 두려움 같은 것이 밀려왔다. 소년소설의 달인이며 문학 원로인 그의 문학세계를 표현하기에는 내 지혜가 너무 미천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4녀 1남을 두었다. 이들은 『봄부터 걸린 고뿔』을 상재할 때 함께 참여했었다. 첫째 빛나라는 표지그림을, 둘째 슬기론은 안표지 그림을, 셋째 보라미는 차례그림을 그렸고, 넷째 새로미는 속글씨를 썼다. 막내 슬바센나는 표지글씨를 썼다. 그렇게 우애를 다져왔기 때문일까?
큰딸 빛나라는 J고교 국어교사다. 일찍이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아버지를 건사하는 일은 그의 책임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결혼도 물리쳤고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요양보호사 역할을 다하고 있다. 문학가 아버지를 지키려는 노력이 갸륵하기 그지없다.
끝으로 『어린이문예』에 실린 그의 말을 옮긴다. 문학가들이 지녀야 할 자세에 관한 말씀이다.
글쓰기는 자기세계의 확장이고 자아실현이지 생업으로써는 승산이 없다. 모름지기 자기수양으로 재능을 발휘하는 쪽이 건전하다. 나는 글쓰기를 생활수단으로 삼았으니 화살이 과녁을 빗나간 셈이다. 또한 다소의 재능을 자인할지라도 마치 노동을 하듯 매일 구상하고 써야하는데 그럴 근면성이 없다면 한갓 정신적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문예창작도 신약을 발명하는 일만큼 인류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어야지 그저 놀이갯감을 양산하는 것이 되어서는 사회적인 해악일 뿐이다.
(2023. 06)
첫댓글 ※이 글이 발표되기 전에 영면(2023. 11.10)하셨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존경하는 선배님이었는데 정말 안타깝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극락왕생을 기원합니다.
김상남 선생님,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