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김병연과 아들 김익균의 묘(추정) 답사기/정원대
너브산장|2017.10.14. 21:20
평창읍 천동리 영월 공기리 너머 가는 도마치 양지바른 이름 없는 야산에 김삿갓 김병연의 묘와 아들 김익균의
묘 (추정)답사하면서 주변을 정리하여 봅니다
1. 천동리에 대대로 거주하는 지*한(66) 의하면 부모님 살아 생전 김익균의 묘 벌초를 5년 동안 하였다고 하며
2, 천동리 향토사학자 이*영(75)증언에 의햐면 본인도 공직생활을 마치고 벌초를 계속하다가 고령인 관계로
벌초를 하지 않았다고 함
가, 김익균의 생애
김익균은 천동리(정동) 샘터(현 천동리 낚시터) 옆 양지바른 곳에서 살면서 서당을 하였다고 하며 주민들과 술을
즐겨마셨는데 지*한 증조부님과 같이 마지에서 음주 만취하여 현 은고개(오면지도에는 鞍峙) 넘어 천동리 평창강
섶다리 건너 귀가 하다가 실족하여 사망하였다고 함
평상시 김익균은 내가 죽으면 아버지 산소 밑에 묻혀 지기를 바란다고 하여 동리 주민들이 김병연 산소 밑에
김익균의 묘를 안장 하였다고 함
나. 증언
지*한 증언과 향토사학자 이* 영 증언 일치하고 있으며 벌초를 하였다고 하는 부분은 현장 답사결과 김익균의
묘는 벌초 흔적이 있으나 3m 위에 있는 김병연 묘(추정)에는 주변 소나무등을 보면 불명확한 점이 노출되어 있음
다. 주변 상황
작은 실개천이 있고 영월 공기리 너머가는 옛길(도마치)이 있으며 이름없는 야산 6부 능선에 있는데 묘 앞 안산은
文筆峰이 솟아 있음 (옛날에는 주변이 화전밭이었다고 함)
# 참고사항
김병연의 연고(후손)가 있는 분이 영월 김삿갓 행사를 마치고 방문하기도 하고 미국에 살고 있는 후손들이 산소에
禮을 올리고 갔다고 함
주변의 증언과 천동리와 마지리 서당이 있던 터 등을 종합적으로 생각하여 볼때 전문적인 향토사학자등의
조사(고증)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며 현 추진하고 있는 응암굴 절개산 정비와 같이 추진되어 지기를 바랍니다
# 후세백작님의 발표한 자료와 지역 주민의 증언등을 참고하였으며 후세백작님의 명징한 재답사등 조사가
절실하며 차량 지원과 함께 동행한 **기관 과장님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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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백작 00:36 ![new](https://t1.daumcdn.net/cafe_image/cf_img2/img_blank2.gif)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여기서 앞으로 지시한씨에게 몇가지 고증에... 익균이 42~3세에 사망한것으로 추정됩니다만,, 그 시기는,,
김삿갓의 출생년도에 결혼한 나이 1차 외유후 둘째인 익균의 출생년도가 계산되고 김삿갓의 사망연도에서
그러면 화순에서 김삿갓의 유해를 찾아와 묘를 쓴 년도가 나올수도 있고, 여기에 익균이 평창 천동으로 온 시점을
알 수만 있다면,,,이 시기의 구분에 의해 김삿갓의 묘가 앞으로 주장할 평창의 천동리 도마치 입구가 맞는지 영월
와석리가 맞는지 관건 사항이다.
어렴풋하게나마 이런 시간을 계산도 해 보아야 할진데, 일반적으로 볼때 익균이 천동리로 이사하고 이후에 화순에서
김삿갓의 유해를 모셔왔슬 것이란 점이다.
김삿갓에 대한 일전 본인의 글에서 의문사항을 간추려 보면...
http://blog.daum.net/kkks1/1289영월은 김삿갓을 어찌하고 있는가??(김삿갓은 죽어서 천동리를 다녀간듯,,)
* 영월 동헌에서 백일장을 치렀다는 기록은 어디에 있는자??
*또한 백일장에서 김병연이 장원급제한 기록도 어디에 있는지??
* 김병연은 대역죄인 후손으로 과거급제의 길이 막혔슬텐데..대역죄인의 후손들은 호패를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인가??
김병연이 25세에 과거 준비차 한양에 올라와 과가를 좌절하는 이유는 바로 이 점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는 구한말의 기울어져가는 양반제도에 반항이라도 하듯 양반들을 질티히는 詩들을 그리고 있다.
평민들이나 하층에서 볼때 통쾌한 재미에 방랑시인 김삿갓은 더욱 알려지는 것이다.
*김삿갓의 첫번째 부인은 결혼 8년만에 이곳 와석리에서 사망하였건만 그의 묘는 어디에 있는지??
어느 학계는 그것은 모른채 박영국 당시 영월문화원장이 건의한 김삿갓 묘소는 학계가 맞다고 인정해주는,,,
어떤 학계인지,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지만 아마 그 학계는 천당으로 가는 면죄부 팔면 크게 성공하리라.
학계가 인정헸다는 사실은 1982년도 신문들에 의한것임.
(여기엔 평창출신 역사 소설가 황원갑님은 당시 이런 부분들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익균은 와석리 집으로 가는 노루목에 아버지 김삿갓의 묘를 쓸 정도로 아둔했슬까??
당시 사회는 양반계층의 부조리, 횡포가 만연된 사회에 안동김시가 폐족이라면 점잖은 양반계층의 사대부들도
가만히 있지 않고 린치를 가할 것이란 점에서 이런 깊은 골에 숨어 살면서 그 입구에 우리집 여기요 하고
김삿갓의 묘를 쓴다면,,그곳이 명당도 아닌데,,,지나가는 소도 웃곘다.
익균은 그렇게 무식했슬까?? 익균은 천동리에 기거하면서 서당의 훈장도 하였는데...
이러한 의문사항 때문에 본인으로서는 김삿갓 유적지를 다녀가고 싶지 않다. 그것은 왜냐하면 김삿갓 유적지를
놀러 간다는건 속는 기분에 무식하단 생각 때문이다.
본인은 언젠가 말한데로 평창 주변의 영월 김삿갓 유적과 정선 아리랑, 봉평의 메밀꽃 놀이에는 앞으로도 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바보가 아니란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월은 본인의 이러한 의문사항을 포괄적으로 답을 주어야 발전적인 문화로 미래가 보장될 것이다.
다음으로 평창으로 이사한 익균의 천동리 집은 응고개를 내려와 휘어지는 여울을 건너 땅콩밭을 지나가면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데..약 50여m엔 친구 지씨네 집이 있다고 증언하는데..
김삿갓의 둘째 아들 익균은 앞에고 산이고 뒤로 돌아보아도 숨이 막힐듯 지척에 산이 가로막는 와석리의 고립된
생활에서..
정말 밭 한뙈기도 못붙일 공간속에서 이제 세월은 조금 지나 홍경래 난은 조금 잊혀지는듯하여 조금 한숨을
쉬며 조그만 마을로 이사를 하게되고 그는 화전민들이나 민초들 사이네 한문도 알고 학식이있어 동네 훈장도
하게되며 조금의 노잣돈도 마련할 수 있어 아버지를 찾아 대구, 진주등지로 서너번 찾아 나서게 될 수 있었던
것이지 와석리에서는 농토도 없이 재원마련도 어려웟슬듯 싶다.
* 김삿갓의 첫째아들 학균은 형 병호에게 양자를 보냈지만 형이 일찍 사망하게 되고 또한 학균도 사망하여 둘째
익균이 김삿갓 김병연 집안의 가업을 잇게된다.
이렇게 익균의 천동리 생활은 조금 경제적 여유속에 자유로운 생활이었던듯 하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엔
진도리에서 술이 만취되어 응고개를 내려와 집으로 오는도중 얼어붙은 섶다리에서 미끌어져 물레 떨어져 옆집
친구 지헌조 옹(사망)이 찾아갔슬땐 이미 사망하였고 그는 죽으면 아버지(김삿갓) 묘 아래 묻어달라 하여 김삿갓
묘 3m 아래에 묘를 썼다 한다.(지시한씨의 증언에 정원대님의 채록)
당시 익균은 젋은 나이에 42세 전후일듯하며 두 아들 택진(20세)와 작은 아들 영진이가 있었는데 택진은 영진이
서당 공부를 위해 나무도 해다 팔았다 하는데, 당시엔 천동 앞이나 하평의 미륵땅에 신작로란 길이 있기 전이라
나무를 해서 지게에 지고 읍내까지 오기란 강을 두서너번 건너야 했기에 아마도 동리에 허드레 일이라도
닥치는데로 하여 영진의 뒷바라지를 하였다 한다.
16세에 영진은 불문에 입적하여 건봉사(강원도 고성)에서 4년간 공부끝에 서울 인근의 절로 옮겨와 수도중에
궁월의 어느 나인이 그 절의 신도로 준수하고 영민한 젊은 스님이 김삿갓의 손주라고 고종인금님에게 이야기 하였다.
당시의 고종은 아리랑을 즐겨하였으며 또한 이야기를 즐겨듣는 편인데 김삿갓의 일화들을 재미있게 들었던 바
그의 손주를 데려오라 하였다.
그리고 고종은 영진이를 보자 그 자리에서 불가 입적호적을 파내어 주며 또한 증조 할아버지로 인한 데역죄인의
폐족을 삭제하여 사면을 시켜 주었으며 궁내 관리로 임용한다.
처음엔 궁내부 주사로 있었으며 고종이 시종을 거쳐 홍천군수와 경흥부사까지 오른다. 이후 일제 강점기라 고양
양주에서 사업에 양주장과 목재, 산림사업에 전념하여 그의 아들 경한이는 부자가 되어 춘궁기엔 동네에 곡식도
희사하여 송덕비가 세워졌다 한다.
경한이는 죽고 그의 아들 김삿갓의 증손이 양평에 거주하며 2년전엔 아마도 4세손까지 집안 식구들이 도미에서
천동리를 찾아와 큰 절을 올렸다 한다(증언의 채록에 의함)
이제 문제는 영월의 김삿갓 묘역 유적에 김삿갓 유골이 없다면 아닌 김싯깃은 살아생전에만 방랑한 것이아니라
김삿갓은 무슨 변고에 죽어서도 근 100여년 그의 유골은 사회로 부터 멀리 운둔해야 방랑을 하고 있는 것일까??
김삿갓은 죽어서도 방랑이 전말의 운명이었던듯 자신은 비록 슬프지만 한줄의 詩를 넘어서서 일상의 쓰림도,
몰락하는 양반들의 횡포와 부조리에 대항해서 풍유와 해학의 詩로 민초들의 마음속 구멍을 뚫어주던 詩仙으로
다시금 우리 곁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그의 후손들은 도미하여 묘소 참배도 어려운 실정에 내왕자도 없이 발길도 끊갸 죽어서도 외로움속에 있는 그의
묘소를 이제라도 알았다면 우리의 답답한 속을 긁어주는 詩仙으로 다시금 다가올수 있도록 발걸음도 총총히
그곳으로 돌려봐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