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외 2편)
안명옥
그녀는 문을 꼭꼭 닫아걸고 있다
아래위로 문이 있는 여자
문을 열면
불이 켜지는 여자
문 밖이 뜨거울수록
더욱 단단하게 문을 닫고 사는 여자
몸속에 있는 것들이
혹여 녹거나 상할까 두려워
문을 꼭꼭 걸어 잠근 채
어둠을 키우고 사는 여자
많은 유효기간들을 담아 두고서
유효기간을 과신하는 여자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윙하는 소리를 내며 경계하는 여자
24시간 풀가동되면서
차가워져 냉장고가 된 여자
식구들의 먹을 것을 대주느라
독한 여름을 견디는 여자
그녀가 잠그고 있는 것들은
언젠가는 모두 썩어 없어질 것들
코드를 뽑아버리면
없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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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몇 마디 나눠보고 표정 보면 대충 보이고
심지어 걸음걸이를 보아도 보여
점집이나 차려놓고 몇 마디 이야기 나누고
슬며시 운명이야기를 해주면 되지 않을까 허허, 하여간.
퇴직한 노시인의 인터뷰 글을 읽다가 나도 하여간, 허허,
문득 생전 처음 가본 정월 초하루 점집 일이 떠오르는데
하도 힘들어하는 걸 보고 선배가 나를 데려간 곳이 광화문 점집이었다
나의 생년월일 태어난 시를 적고
남편과 아이들을 적고 나니 하여간,
보살은 부채를 펴고 흔들며 오래 주문처럼 중얼거리더니
길게 하품을 한 후 신수를 봐주는 것이었는데
물조심하란다, 또 뜨거운 물 조심하란다.
남편과 헤어지려는데 어찌해야 되느냐 물으니
헤어지려면 5년 전에 헤어졌어야지
이제껏 고생했는데 조금만 더 참으면 조금씩 풀릴 거란다
하여간, 애들 때문에 살고 연민으로 살았다는 말은 너무 상투적이어서
침묵만 하다가
돌아와 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 전하는데
법원에 있어야 할 서류를 남편이 슬쩍 넘겨주고 가는데.
하여간, 그 점집 보살님 말씀을 부처님 말씀으로 믿고 보니
하여간, 나를 향해 울리는 범종소리 같기만 하더니
범종에 새겨진 연꽃문양이 아지랑이처럼 가물거리는데
울려나오는 소리는 찌들고 숨넘어가는 소리나
시련 속 꽃이 피어나듯
다시 살고 있게 하는 힘이 되는데, 하여간
지금 생각하니 누구라도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을까,
그 날 3만원이 아깝지 않은 복채로 여겨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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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칼은 너무 많은 생각을 가질 때 위험하다
칼을 잡을 때 오른손은 방향을 잡고
왼손은 힘을 줘야 한다는데
생각이 많아서인지 방향을 잃어버린 칼에
마음만 베어나간다
칼을 내리칠 때마다
내가 칼이 되었다
자를수록 더 잘라지지 않는
칼질은 내 심장의 혈압처럼 방망이질하고
내 몸속 새겨진 칼자국이 혈관을 타고 다닌다
칼을 보면
이상한 식욕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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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명옥 / 경기 화성 출생, 성균관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졸업, 한양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 석사과정 중퇴. 2002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서사시집『소서노』, 시집『칼』. 현재 고양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과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