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모음
데칼코마니 / 한이로
내 방엔 거울이 하나
나는 언니였다가 나였다가
서로 다른 옷을 입을 때
살짝 삐져 나오는 다디단 표정
나란히 서면
자꾸 뒤돌아보지 않아도 될거야
우리에겐 곁눈질이 있으니까
이따금씩
거울을 볼 때
나를 잊어버리는데
나는 잘 있니?
학교를 벗어던진 우리는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횡단보도 위로 쏟아진 자동차들 사이로
뿔뿔이
흩어진다
반으로 나눠진 마카롱
사라진 쪽이 너라고 생각하겠지
바닥에 던진 우리의 그림자를 지우느라
붉어지는
늦은 오후의 얼굴들
간호사가 건네는 푸른 옷을
얼굴처럼
똑같이 입고 우리는
사이좋게
캐스터네츠를 악기라고 말하고 난 뒤의 기분을
반으로 접는다
다른 그림찾기와
같은 그림찾기가
다른 말로 들리니?
내 방엔 거울이 하나인데
두 개
매번 언니였다가 나였다가
입 꼬리 살짝, 올
<2023 영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책을 끓이다 / 장현숙
책은 책마다 맛이 다르다
초록 표지의 책에선 식물의 맛이 나고 지구에 관한 책
에선 보글보글 빗방울 소리가 나고 어류에 관한 책에
선 몇천 년 이어온 강물 소리가 난다
곤충에 관한 책에선 더듬이 맛이 나, 이내 물리지만
남쪽 책장은 마치 텃밭 같아서 수시로 펼쳐볼 때마다
넝쿨이 새어 나온다 오래된 책일수록 온갖 눈빛의
물때와 검정이 반들반들 묻어있다 두꺼운 책을 엄지로
훑으면 압력밥솥 추가 팔랑팔랑 돌아간다
침실 옆 책꽂이 세 번째 칸에는 읽고 또 읽어도 설레는
연애가 꽂혀 있다 쉼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누군가와
겹쳐진다 그러면 따옴표가 보이는 감정을 챙겨 비스
듬히 행간을 열어놓는다
새벽까지 읽던 책은 바짝 졸아서 타는 냄새가 났다
책 속에 접힌 페이지가 있다는 건 그 자리에서 눈의 불을
켜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도 일기장이 제일 뜨겁다
그 안에는 태양이 졸아들고 별이 달그락거리면서 끓기
때문이다
책을 끓여 식힌 감상을 하룻밤 담가 놓았다가
여운이 우러나면 고운 채로 걸러내야 한다
그 한 술 떠 삼키면
마음의 시장기가 사라진다
<2023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당산에서 / 신나리
비 오는 새벽 요강을 몇 번이나 비워낸 할머니는 내가
잠에서 깰까 아침이면 부엌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약을 많이 먹어 몸에서 쓴 내가 났다 나한테는 미묘한
매실 냄새가 비가 퍼붓는데도 두 냄새가 멈추지를 않았다
푸른 논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뚫린다던 엄마는 절대
할머니 곁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시골에 살면 우울
증에 걸린다나 나 어릴 때 친구 하나가 너희 엄마
불꺼진 매장에 혼자 앉아있더라 전해 준 적이 있다
할머니는 방에 걸린 무수한 액자들과 함게 살고 있어
나는 양심이 없으므로 엄마에게 몇 마디를 했다 얼마나
불쌍한 지 외로운 지 결국은 심심한지 할머니가
엄마는 고집 있고 성질 나빠 아빠랑 살기 어려웠을 거래
우리는 웃다가 콧물을 흘렸다
다음날 어떻게 잘 지낼지 생각하느라 도통 밤에 잠을
못 잤다 희망을 벗어날 길 없어 욕망을 추스를 틈 없이
이른 아침 아이돌 노래에 맞춰 산책하다 고추밭에서
누군가 칼로 난도질한 복권 여러 장을 발견하기도 했다
내가 죽은 삼촌 방에 앉아 뭘 하는지 할머니는 모른다
노래기 잡고 거미랑 싸우며 그냥 해보는 데까지 해 보는
겁니다 이를 갈면서도 이를 숨기느라 진을 빼고
같이 목욕을 하자더니 결국 혼자 손으로 몸을 문질러
닦았다 나가 있으래서 나가 있었다 할아버지 생전에
할머니가 비누로 씻고 밥을 차리면 비위 상해서 못 먹
겠다고 상을 물렸다고 한다 그깟 소리 듣기 싫어서 그
때부터 물로만 문질러 닦았다는 데
이도 없고 밥 먹고 솟아야 할 기력도 권태도 없어 보이
는 할머니와 저녁을 먹는다 기름 친 음식이 먹고 싶어
우유에 탄 진한 커피도 마시고 싶어 죽겠는 와중에 어
김없이 체한다 할머니가 내 커다란 배를 문질러 준다
늙은 엄마를 사랑하지 못할까 눈물 찔끔 흘리는 내게
희망이 절망이 될까 한 글자 쓰는 데 벌벌 떠는 내게
마을의 수호신 장승처럼 너무나 큰 할머니 끈질긴 여름
밤 비는 쏟아지고 미물들이 발광을 한다
할머니 옆에 꼭 붙어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 우뚝 선
자존심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2023 한경 신춘문예 시 당선작>
드라이아이스 / 민소연
-결혼기념일
평생 함께 하겠습니다
짙은 약속을 얼떨결에 움켜쥐었을 때
새끼손가락 끝에 검붉은 피가 모였을 때
치밀한 혀를 가지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어떤 밤엔 마침내 혀를 쓰지 않고도 사랑을 발음했다
맺혔던 울음소리가 몇 방울 떨어지고
태어나고
수도꼭지를 끝까지 잠갔다
한밤중엔 그런 소리들에 놀라서 문을 닫았다
너무 규칙적인 것은 무서웠다 치열하게
몸을 움직이는 초침 소리나
몸을 웅크린 채 맹목적으로 내쉬는 너의 숨소리가
그랬다
거듭 부풀어 오르는 뒷모습을 보면서 호흡을 뱉었다
어쩌면 함께 닳고 있는 것 같았다
박자에 맞춰 피어오르는 게 있었다 입김처럼
희뿌옇고 서늘했다
숨을 삼키다 체한 밤이면 너를 깨웠다
내기를 하자고 했다
누가 더 먼저 없어질 것 같은지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해보자고 했다 너와 나는 모두
내가 먼저일 거라는 결론을 내려서
우리는 오래도록 같은 편이 되었다
내가 죽은 척을 하면 너는 나를 끌어안았다
서로의 등 뒤에서 각자의 깍지를 움켜쥐었다
영원한 타인에 대해 생각했다
손끝에 짙은 피가 뭉치면
동시에 숨을 전부 내쉬었다
품 안에서 녹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살갗이 들
<2023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저녁의 하울링 / 김용문
C19는 여전히 계엄이고
세상 멀리서 보면 평화로워 보인다
내일에 기대며 겁없이 지나가는 시간이
외상값처럼 쌓여간다
낮이 다 빠져나간 사람들이
어둠을 털고 둥지로 모여 서로를 확인하고
빛이 술래가 불안한 밖은 경적이 닦달한다
타인을 자꾸 베끼던 낮이 유치해졌고
저녁이 오면 사람들이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내 묵비권은 방어가 아니고 해방이다
비로소 나도 하루를 열십자로 짜개며
울림과 허기가 거처에서 뒹구는
구부러진 생과 면을 한 냄비 끓인다
밀도가 촘촘해진 감성지수와
높아진 엥겔지수와의 충돌에
목울대에선 어느 것이 먼저 넘어갈까
생의 절댓값은 왜 이리 박한지
나를 증명할 용기가 점점 없어져 간다
<2023 세명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멜로 영화 / 이진우
서른다섯 번을 울었던 남자가 다시 울기 시작했을 때
문득 궁금해집니다
사람이 슬퍼지려면 얼마나 많은 복선이 필요한지
관계에도 인과관계가 필요할까요
어쩐지 불길했던 장면들을 세어보는데
처음엔 한 개였다가 다음엔 스물한 개였다가
그 다음엔 일 초에 스물네 개였다가 나중엔 한 개도
없다가
셀 때마다 달라지는 숫자들이 지겨워진 나는
불이 켜지기도 전에 서둘러 남자의 슬픔을 포기해
버립니다
이런 영화는 너무 뻔하니까
안 봐도 다 아는 이야기니까
이 사이에 낀 팝콘이 죄책감처럼 눅눅합니다
극장을 빠져나와 남은 팝콘을 쏟아 버리는데
이런 영화는 너무 뻔하다고
안 봐도 다 아는 이야기라고
누군가 중얼거립니다
이런 얘기들은 등뒤에서 들려오곤 하죠
이런 이야기들의 배후엔 본적도 없는 관객을 다 아는
세력이 있죠
문득 다시 궁금해집니다
뻔한 것들엔 아무 이유도 없는지
안 봐도 안다는 말에 미안함은 없는지
우리의 관계는 상영시간이 지난 티켓 한 장일 뿐이므
로
텅 빈 극장엔 불행과 무관한 새떼들이 날아다니고
있을테지만
그것들은 다른 시간대로 날아가지 못합니다
가끔 이유 없이 슬픈 꿈을 꾸기도 합니다 사랑하고
있을 때도 그랬습니다
<2023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볼트 / 임후성
코끼리를 보라
꼬끼리끼리는 볼 수 없는 코끼리를 보라
꼬리를 위해 서 있는 네 번째와 세 번째 다리를 보라
걸음을 뗄 때 발을 남기고 벗겨질 것만 같은 발의 접힌
거죽을 보라
달라붙어 있지 않고
그것은 끌려다닌다
우리의 난제였던 바깥이다
실체는 헐렁헐렁하다
그 안에서 기관을 해제하는 망치질 같은 코끼리의
걸음을 보라
눈앞에 직접 정의된 코끼리를 보라
걸을 때마다 부서지고 있지 않은가
간신히 어금니로 연결되어 있지만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지 않은가
코끼리 안으로 들어가지 마라
안과 바깥은 서로에게 통증이 그지없다
뒤쪽 숲을 보라
나뭇잎들이 가지에 붙어 벌어졌다 오므라들었다 한다
나무 주위를 맴돌며 탈출이 어려운
바람의 원숭이들을 보라
가장 가까운 붉은색을 볼 수 없는 원숭이의 눈을 보라
저 영특한 종족은 의혹의 못에 박힌 매혹이다
이때 고개를 돌려 완전한 불의 형태로 시간을 태우는
대관람차를 보라
오전의 하품 같은 간격을 보라
회전의 무의미 아래 네게 권해지는 네 머릿속을 보라
주차장에서 마주친 사 년 전 그 사람을 보라
하천이 흐르는 대로변에서
다리 아래로 유혹해
교량의 접합부마다 극렬하게 박힌 볼트를 해가 질 때
까지 함께 보았던 그 사람을 보라
그가 너를 찾아 나섰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볼트 하나를 갖고 있다
그와 상관없이 혼자서 한 번 더 다리를 건너라
다리는 흔들거린다
그 아래를 보라
조그만 구멍을 남기고 녹슨 생략이 있다
<2023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백자가 되어가는 풍경 / 김혜린
물레 위에서 점토를 돌린다
선생님은 마음의 형태대로 도자기가 성형된다고
말했다
점토가 들어가는 물레가 있고
물레는 원을 그린다
물레가 빚어내는 바람이 원의 형태로 부드럽게
손을 휘감는다
생각하는 동안 점토는 쉽게 뭉그러지고
도자기는 곡선이지만 원은 아닌 형태로 성형된다
가끔 한쪽으로 기울고 일그러진다
그러는 동안 창밖의 개들은 풀밭 위를 빙글빙글 돈다
꼬리를 쫓으며 도는 개의 주변으로 풍경이 둥글게
말린다
부드럽고 단단한 개의 몸속에서 튀어나오려 하는
수백 개의 동그라미들
개들을 보면 사람은 마음속으로 무엇을 그리며 사는
지 궁금해졌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잘 재단된 옷을 입고
같은 사이즈의 길을 걷는다
지도를 보지 않아도 언젠가 집으로 연결되는 길에서
길을 잃는 방법을 잃어버린 동네에서
구획이 잘 나누어진 길을 직선으로 가로 지른다
어느새 공원은 개들이 풀어놓은 동심원으로 가득 찬다
나는 원을 그리는 법을 배운다
꼬리에 시선을 두고 여백에 시선을 두고 선에 시선을
두고
시선을 한 곳에 집중하면 더 많이 돌 수 있다
넘어지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 내 손끝과 반대쪽 손끝 사이의 거리를 잰다
선은 아름답게 구부러져 있다
원이 아닌, 모든 곡선을 그리고 있다
아직 백자가 어떤 모형으로 구워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정성 들여 유약을 칠한다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길에서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은
희고 맑다
어느새 풍경은 백자가 되어 있다
<2023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박스에 든 사람 / 박장
손을 잡아야 잠을 잘 수 있었다. 방지턱을 넘는 버스.
내 키를 덮는 그림자. 엄마는 보이지 않고 내 손엔
엄마의 검지만 쥐어져 있었다.
눈 뜨면 구석일 때가 많았다.
나는 주문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의 면도기와 골프공,
설렁탕을 담는다. 여섯 살 때 내가 잃어버린 휴게소를
클릭한다. 얼굴의 푸른색은 휴대폰에 옮겨둔다.
산소에 간다. 캔커피와 꽃을 산다. 살수록 비굴해진다.
더 비굴해지기로 한다. 그렇게 주문을 건다. 주문은
많은 걸 해결해준다.
써보지 않은 양식의 글을 쓴다. 흰 봉투에 넣어 책상에
올려둔다. 이력서는 모두 폐기한다.
택배는 내가 받고 내역서는 그가 받는다. 방금 도착한
복숭아가 물러 있다. 상처가 잘 보이도록 사진을 찍는다.
스티로폼 박스에 반품이라 쓴다. 뽁뽁이로 싸맨다.
구겨, 몸을 넣는다.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에 아이스팩을
끼운다. 뚜껑을 닫는다.
칼로 뜯지 마세요. 던지지 마세요.
아무도 열어주지 않아 나는 나를 열고 나온다. 뜯긴
머리카락을 털어낸다. 팔과 다리의 얼룩을 눌러본다.
운송장 번호가 없다. 받는 사람이 지워졌다. 상자를
열고 다시 몸을 넣다가,
그를 주문한다.
<2023 매일신춘문예 당선작>
귤이 웃는다 / 백숙현
인도 여행에서 돌아온 친구가 담배를 돌렸다
담배에서 녹차 맛이 났다
가볍고 부드러운 음악이 흘렀다 연기처럼 가벼워지고
싶었다
외투를 벗었다
양말을 벗었다
묶었던 머리를 풀어헤치고 스카프를 휘날리며
춤을 추었다
친구들이 킥킥대며 웃었다
그들을 향해 탁자에 있던 귤을 던지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머리에 명중하자 웃음소리가 더 높아졌다
벽이 눈물을 흘렸다
깨진 귤들이 바닥에 뒹굴었다
창문은 창문
탁자는 탁자
술잔은 술잔
귤은 귤
그러므로 나는 나
브레지어를 벗어 던졌다
도마와 밥솥을 집어 던졌다
저울과
모래시계와
금이 간 저울
때 묻은 경전과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던졌다
담배 한 개비 다 타들어 가도록
나는 던져버릴 게 너무 많았다
*가브리엘 가르세아 마르케스의 소설
<2023 강원일보 신춘문예>
레드문 / 권영유
개기월식이라는 뉴스에 옥상으로 가본다
붉은 달이 초콜릿 듬뿍 묻힌 초코파이 같다
한 입 베어 문 그때
평화동에 산 적 있다 절취선 같은 골목 따라가면 노인이
돋보기안경으로 거스름돈 꺼내주던 구멍가게가 나왔다
초코파이 한 상자 어김없이 한 봉지씩 우물거리는 밤
별들도 그 부스러기였다 네가 갈래? 내가 갈까?
자매끼리 서로 떠넘기다 마지못해 사러갔던 그 가게,
초코파이만큼은 늘 채워져 있었다 날마다 야금야금
갉아먹는 열다섯, 빈 봉지 털어보듯 용돈도 털려갔다
속을 채우고 담아도 늘 고팠던 그때의 정은 오직 초코
파이
온리온자리를 찾아본다
그 자리 뜯어보면
열 두 개의 촉촉한 정이 있다
<2023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시소 / 김현주
올라가는 것을 동경한 적이 있나요
덜컥 파랗던 하늘이 정지 영상으로 멈추기 직전까지
가장 먼 곳을 밟기 바로 전
힘차게 발을 뻗는 것과
마음을 멀리 두는 건 또 다른 일이라
어디를 향해 올라가는지 물어본 적이 없어요
롤러코스터와 대관람차를 탈 때
목적지를 묻지 않는 것처럼
오래전 죽은 나무로 만든
시소 위에 앉아서 말이에요
놀이터는 높이에 묶인 유배지
멀리 떠나지 못한 놀이들이 박혀 있어요
아이들은 숲보다 낮은 그네를 타고
얕은 철봉을 돌아 둥글게 떨어져 내리죠
눈이 없는 기린과 입 벌린 녹색의 악어 사이
차가운 높낮이로 기울어지는 그림자 속에서도
물이 흐르고 빛은 형체를 그려요
어둡게 올라가는 나는 짧은 시간의 끝에서
당신보다 더 빨리 늙어가는 중입니다
하지만 가끔,
내려가 보는 거예요
동그랗게 짓이겨진 이끼의 위치 아래
녹슨 용수철과 나비의 날개
매몰된 습지가 자유롭게 부유하며 떠오르도록
발 디딤이 없는 한 칸마다
당신을 향한 깊이가 높이로 기화하고
비명처럼 자라는 어린 잎들이
밤새 날고 있다는 착각으로 웅성거리도록
당신이 내리면 허공,
나는 어느새 제한된 공중으로 떠오릅니다
<2023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 / 이예진
금값이 올랐다
언니는 순금을 팔러갔다
엄마랑 아빠는 이제부터 따로 살 거란다
내가 어릴 때, 동화를 쓴 적이 있다 내가 언니의
숙제를 찢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언니도 화가
나서 엄마의 가계부를 찢었고 엄마는 아빠의 신문을
찢고 아빠는 달력을 찢다가, 온 세상에 찢어진 종이가
눈처럼 펄펄 내리며 끝난다
손금이 사라진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집에 남고 싶은 것은 정말로 나 하나뿐
일까? 언니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더는 찢을 것이 없었다 눈이 쌓이고 금값이 오르고
검은 외투를 꽁꽁 여민 사람들이 거리를 쏘아 다녔다
엄마는 결국 한 돈짜리 목걸이를 한 애인을 따라갔지
아빠는 한 달에 한 번 서울에 오겠다고 했다
따로 따로 떨어지는 눈과
따로 노는 낡고 지친 눈빛을
집이 사라지고 방향이 생겼다
<2023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묘목원 / 권승섭
버스를 기다린다 신호가 바뀌고 사람이 오가고
그동안 그를 만난다
어디를 가냐고
그가 묻는다
나무를 사러 간다고 대답한다
우리 집 마당의 이팝나무에 대해 그가 묻는다
잘 자란다고
나는 대답한다
그런데 또 나무를 심냐고 그가 묻는다
물음이 있는 동안 나는 어딘가 없었다
없음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무슨 나무를 살 것이냐고 그가 묻는다
내가 대답이 없자
나무는 어떻게 들고 올 것이냐고 묻는다
나는 여전히 말이 없다
먼 사람이 된다
초점이 향하는 곳에 나무가 있었다
잎사귀로는 헤아릴 수 없어서
기둥으로 그루를 세야 할 것들이
무수했다
다음에 나무를 함께 사러 가자고
그가 말한다
아마도 그 일은 없을 것이다
언젠가 그를 나무라 부른 적이 있었는데
다시금 지나가는 비슷한 얼굴의 나무는
<2023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버터 / 박선민
추우면 뭉쳐집니다
펭귄일까요?
두 종류 온도만 있으면
버터는 만들 수 있습니다
뭉쳐지는 힘엔 추운 거푸집들이 있습니다
마치 온도들이 얼음으로 바뀌는 일과 흡사합니다
문을 닫은 건 오두막일까요?
마른나무에 불을 붙이면
그을린 자국과 연기로 분리됩니다
창문 틈새로 미끄러질 수도 있습니다
문을 콱 걸어 잠그고 연기를 뭉쳐줍니다
고온에 흩어지는 것이 녹는 점과 비슷합니다
초록색은 버터일까요?
버터는 원래 풀밭이었습니다
몇 번 꽃도 피워 본 경험이 있습니다
어떤 목적들은 집요하게도 색깔을 먹어 치웁니다
이빨에 파란 이끼가 낄 때까지
언덕과 평지와 비스듬한 초록을 먹어 치웁니다
당나귀일까요?
홀 핀이 물결을 반으로 가릅니다
개명 후 국적을 바꾼 귤이 있습니다
노새는 두 마리입니다
한쪽의 양이 너무 많거나
갑자기 차가운 밖으로 밀려나면
두 개의 뿔이 돋아납니다
그래서 당나귀의 울음은 무게를 느끼지 못합니다
저울의 일종일까요?
버터는 뜨거운 프라이팬의 바닥에서 녹습니다
녹기 전에는 잠시
사각의 모양이었습니다
다방면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만
책상과 주로 이별에 쓰이는 인사를 닮기도 했습니다
안녕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안녕의 모양은 제각각이라
한평생 뒤집어도 맞는 짝을 연속해 찾기란 어렵습니다
자신과 다른 모양을 가진 인사에
분명 트집을 잡고 있을 것입니다
부서졌군, 다른 말로 교체해달라는 뜻입니다
삐뚤어졌군, 새 말로 달라는 뜻이고요
밀항선을 타고
전 세계로 스며들었습니다
버터 한 덩어리에는 항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난파된 배에서 떨어져 부유하다가 유빙처럼 발견된
버터도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유빙이 가로지른 국경선을 분석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랜 시간에 걸쳐
버터가 녹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창문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버터가 사각인 이유는
창문에 넣고 굳혔기 때문입니다
악천후를 뚫고 달리는 창문은
격렬한 속도입니다
<2023 경향 신춘문예 당선작>
세계, 고양이 / 김현주
손끝에 떨어진 작은 눈물 한 조각에
지구 반대편 수만 년 전의 빙하가 서서히 녹고 있다
흩어지는 만년설 사이로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파란
눈동자
작게 너울거리는 심장소리가 빼꼼히 나를 올려다본다
휘둥그랑 투명한 수염을 휘날리며
다정히 나의 세계에 뛰어들었던 고양이는
지금 어디쯤 있을까
강렬한 축문처럼 나를 감싸던 고양이가 사라진 지금
나는 달빛 한 조각의 자비도 없는 세상에 포위되었다
언제쯤 돼야 이 지긋지긋한 것들로부터 탈출할 수 있
을까
무쇠 신을 끌며 터벅터벅 걸어가는 길고 긴 북극의 밤
에는
길도 없고 이정표도 없고 고양이도 없다
가시처럼 불행의 취기만 가득 담은 냉담한 숨결을 통과
하며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을 지난다
쇄빙선도 깨지 못한 얼음에 갇혀
일각고래와 청새치 바다거북이 가라앉은 심해 한가운
데를
혼자 일렁이는 밤
천리라도 따라가고 만리라도 따라간다는
낯익은 이별가에 목이 메인다
동그랗게 떠있는 그곳을 향해
차가운 유빙과 얼어붙은 별들을 데리고 간다
먼지처럼 부서져 내리며 솟아오르는
나, 또는 고양이라는 세계
<2023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첫댓글 옮겨왔습니다. 조금씩 천천히 감상해 보세요.
선생님 덕분에 좋은 글 감상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