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고려를 침범하여 괴롭혀 왔던거란을
완젼 소탕하였다 . 1218년 9월 거란군이
은주(殷州:殷山)로부터 남하하여 강동성에 입거(入據)하자, 몽골은 원수 합진(哈眞)이 이끄는 1만의 군대와 동진의 장수 완안 자연(完顔子淵)이 이끄는 2만 명의 병력을 연합하여 “거란군을 토멸하고 고려를 구한다”고 성언(聲言)하고 동북면으로 내려와 적의 거성(據城)인 화주(和主:永興) ·맹주(孟州:孟山) ·덕주(德州:德川) ·순주(順州:順川)를 차례로 쳐부수고 적의 주력이 있는 강동성으로 쳐내려왔다
그러나 때마침 많은 눈이 내려 군량의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동의 적은 성벽을 굳게 닫고 공격군을 피로하게 하려 하므로 몽골 장수 합진은 서북면원수부(西北面元帥府)에 사람을 보내어 군량을 요구하면서, 거란을 소탕한 뒤에 여 ·몽 양국이 형제의 의를 맺을 것을 약속하는 통첩을 칭기즈칸의 이름으로 전해 왔다. 한편 고려 조정에서는 그들의 참뜻을 의심하여 공동작전을 하는 데 주저하였으나, 다음해인 1219년(고종 6)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侯) 윤공취(尹公就) 등이 화의를 맺자는 첩문(諜文)을 가지고 몽골군영에 가고, 몽골에서도 답례의 사자를 보내어 서로 동맹의 뜻을 굳게 하였다. 또한 서북면원수 조충은 십장군병(十將軍兵) ·신기(神騎) ·대각(大角) 및 내상(內廂)의 정병을 거느리고 몽골군과 합세하였다.
강동성의 포위작전에 있어 적의 도피를 막기 위하여 미리 성 주변에 너비 ·깊이 각 10자의 못을 파고 공격하자 적장 등 40여 명이 성을 넘어 연합군에 항복하는 바람에 성 안의 적의 괴수 함사(喊舍:王子)는 목을 매어 자살하였고, 그의 관인(官人) ·장졸(將卒) ·부녀 등 5만여 명이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였다
무신 난을 일으키다 , !
역대 군왕들의 숭문천무(崇文賤武) 기품이 조성되어, 과거제도를 채택하면서 문(文)을 숭상하고 무신을 천시하였다. 특히 성종 이후 대외투쟁에 공헌한 무신은 군(軍)의 최고 지휘관에 오르지 못하고 그 직에 문신이 등용된 점, 998년(목종 1) 개정전시과(改定田柴科) 제정 때 무관의 품계를 낮추고, 1014년(현종 5) 문신 황보 유의(皇甫兪義)가 문신에게 줄 녹봉이 부족하다 하여 경군(京軍)에게 지급할 영업전(永業田)을 박탈하자, 이에 격분한 무신 최질(崔質)·김훈(金訓) 등이 반기를 들고 황보 유의·장연우(張延祐) 등을 귀양보내고, 일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왕가도(王可道)에게 피살되었다. 이후 인종 때는 무신 교육기관인 무학재(武學齋)를 폐지하였다. 묘청의 난 이후에는 무신 멸시풍조가 더욱 조장되어, 무신의 대우는 역부(役夫)와 같았다. 특히 의종은 향락생활에 도취하였고, 문신의 교만은 극심하였다.
김돈중(金敦中)은 아버지 부식(富軾)의 권세를 믿고 견룡대정(牽龍隊正) 정중부(鄭仲夫)의 수염을 촛불로 태웠으며, 의종의 보현원(普賢院:장단) 행차 때 대장군 이소응(李紹應)이 젊은 문신 한뢰(韓賴)에게 뺨을 맞는 모욕적인 일이 생겼다. 이에 분노한 정중부는 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 등과 함께 문신들을 살해하고 의종을 폐하여 거제도로, 태자를 진도로 귀양보내고, 왕의 동생 익양공(翼陽公) 호(皓)를 왕으로 맞이하였는데, 이가 명종이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가 집권하여 무신독재 정권을 확립하였으나, 무신간의 반목으로 정중부는 1179년(명종 9) 경대승(慶大升)에게 살해되고, 집권한 경대승은 1183년에 병사하였다.
이후 천민 출신 이의민(李義旼)이 집권 발호하다가, 1196년 최충헌(崔忠獻) 형제에게 살해되었다. 최충헌의 집권에 이어 최우(崔瑀)·최항(崔沆)·최의(崔)가 대를 이어 집권하였다. 1258년(고종 45) 유경(柳敬)·김준(金俊)에게 최의가 살해되어, 4대 62년 만에 최씨 무단통치는 끝나고 왕정이 복고되었다. 김준 → 임연(林衍) → 임유무(林惟茂) 등의 무신세력은, 1270년(원종 11) 강화도에서 개경(開京)으로 환도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이와 같이 90년간의 무신통치로 농장 확대, 노비 증가, 사회질서 붕괴, 하극상(下剋上) 풍조로 인한 천민의 난 등으로 암흑시대가 출현하였다.
우리나라의 지방관제 ...
알고 계시나요 , ?
고려시대 기구 개편의 연혁을 보면 983년(성종 2) 12목(牧), 995년에 10도(道)·3경(京)·5도호부(都護府)·8목(牧)·양계(兩界)가 설치되고, 1018년(현종 9) 전국을 도와 양계로 나누어 그 밑에 4도호(都護)·8목을 비롯해 군(郡)·현(縣)·진(鎭) 등을 설치하였다. 5도제(道制)가 전국적으로 정착된 시기는 예종(睿宗)·인종(仁宗) 이후이다.
지방행정기구의 운영상의 내용을 보면 3경은 풍수지리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서, 태조 때는 개경(開京)과 서경(西京)을, 성종 때는 동경(東京:慶州)을 설치하였으며, 문종 이후 동경 대신에 남경(南京:서울)을 넣었는데, 서경에는 분사제도(分司制度)를 두어 왕이 머무를 경우 정무처리를 할 수 있게 하였다.
경기는 특수행정구역으로 전시과의 사전(私田) 지급의 대상지로 삼았으며, 5도는 일반 행정구역으로, 도 밑에는 주(州)·현을 두고 군·현에 한하여 외관(外官)을 파견하였는데, 이들을 주군(主郡:領郡)·주현(主縣:領縣)이라고 하였다.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군(屬郡)과 속현(屬縣)이 더 많아 외관이 없는 속군과 속현은 외관이 파견된 군현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지배하였다.
최하층인 촌(村)과 천민집단으로 구성된 향(鄕)·소(所)·부곡(部曲)은 현에 소속되어 향리(鄕吏)가 직접 다스렸다. 향리는 일반 평민이나 천민집단의 조세·공물의 징수와 노역징발의 사무를 관장했으며, 일품군(一品軍)의 장(長)이 되기도 하였다. 영향력이 있는 향리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사심관제도(事審官制度)와 기인제도(其人制度)를 실시하였다. 군사적 특수지역인 양계(兩界)는 진(鎭)과 촌(村)을 두어 군사적 체제를 갖추었는데, 외관은 진까지 파견하였다.
요즘 새로 나타나는유행 !
모란무늬 같은 꽃무늬이며, 수막새에는 외눈박이, 암막새에는 쌍눈박이 무늬가 특이하다.
인터뷰 .
나 ; 네 먼저 모르시는분들을 위해
소개를 부탁해도 될까요 ,?
고종 : 네 . 당연하죠
이름은 철 초명은 진질, 자는 대명.천우.
강종의 맏아들이며 . 어머는 원덕태후유씨.
비는 희종의 딸 안혜태후 유씨 입니다 .
나 ; 아 ...... 정말 자세히 알려주셧네요
1212년 태자에 책봉되어 이듬해
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셧는데 .
어떠신지 .....
고종 ; 이런걸 말해도 될지는 모르겟지만
독재정치로 실권을 잡지못해 답답합니다
나 ; 아 그러셧군요
고종 ; 실례지만 이제 제 업무를 봐야하기
때분에 다음에 다시 인텨뷰 하는게
어떨까요
나 ; 아 지금까지 해주신것도
감사드립니다 .......
이날은 심기가 불편하신거같아
인터뷰를 짧게 마쳣다 .
하지만 나라를위해 열심히
노력하시는 우리의 고종
열심히 하는만큼 결과가 따라주기를....
첫댓글 읽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