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충북 옥천 육영수 생가.정지용 생가.정지용
문학관.옥천 성당.춘추민속관.향수공원.옥천향교
교동저수지.실개천.옥주사마소.옥천 교동리 비석군.현대시의
시성이라 불리우는 정지용 시인의 향수'의 배경이 된 실개천
실개천이 흐르는 생가를 거닐다 보면 저절로 읊조리게
되는'넓은 벌 동쪽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라는 첫 구절을 흥얼거리게 된다. 정지용 생가
정지용 시인이 태어난 생가는1974년
허물어진 후 1996년 7월에야 복원되였다.
복원된 생가에는 돌담과 사립문,초가,우물 등이
자리 잡고 있어 정지용 시인의 어린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정지용 문학관
지용의 兒名은 지용(池龍)이었다.
이 이름은 지용의 어머니가
연못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태몽을 꾼 데서 비롯되었으며,
본명도 이 음을 취해 지용(芝溶)으로 지었다는 것이다.
4대 독자인데다 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방랑생활을 했으니,
그에게 거는 어머니의 기대는 더욱 컸으리라.
그의 부친은 한때
중국과 만주를 방랑하며 한의술을 배웠고,
고향에 돌아와 한의업을 개업하여 재산을 꽤 모았으나,
어느 해 밀어닥친 홍수의 피해로
가세가 갑자기 기울어 가난했다고 한다.
원래 연일 정씨들이 집단촌을 이루며 살던 곳은
충북 수북리 꾀꼴 마을이었는데, 그 본고장에서 살지
못하고 하계리 개천가로 이사를 온 것이다. 그때 지용의
부친은 처가 친척인 송지헌의 농장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지용
“나는 소년적 고독하고 슬프고 원통한 기억이 진저리가 나도록
싫어진다”고 회고한 바 있다.
4대 독자로서 느껴야 했던 숙명적 고독감과
부친의 방랑과 실패, 가난 등으로어린 지용은
불행했다.지용은 17세에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휘문고보는 성적이 우수하고 형편이 어려운 그에게 재학시절에
장학금을 주었고, 졸업 후에도 유학 비용을 부담했다.
유학을 마치고 모교에서 영어 교사로 16년간 재직하였으니 지용은
통산 27년간 휘문과 관계를 맺은 셈이다. 휘문고보 1학년 때부터
문예활동을 시작한 지용은 그의 발안으로 명명된 동인지 요람
(搖籃)'의 산파역을 맡으며 습작활동을 시작했다. '요람'의
동인은 고보와 전문학교 학생들로, 지용과 박제찬,
박팔양, 김화산 등이며, 지용이 간부로 있는
휘문고보의 등사기를 이용해서 제작하였다.
지용은 '요람'에 '정지용시집' 3부에 수록된
동시의 절반 이상을 발표했으며,2학년 때는
서광(曙光)'지에 '인'이라는 소설도 발표하여
일찍부터 문재를 발휘하고 있었다
지용 은
1929년 3월 도시샤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9월에 모교 영어 교사로 취임했다.
취임 후 곧 분가하여 종로에 살림을 차렸다.
기나긴 타국 · 타향살이를 끝내고 마침내 가정이라는
안정된 보금자리에서 생활하게 된 것이다. 그는 12세 때
은진 송씨 재숙(在淑)과 결혼 했지만 15년간이나 헤어져 살았다.
장남 구관(求寬)도 27세 때 얻을 수 있었다. 지용은 이제 학생에서
교사로, 하숙생에서 한 집안의 어엿한 가장이 된 것이다.
지용은 해방 직후 모교의 교사직을 사직하고
이화여전(梨花女專) 교수로 취임했다. 해방 후 그는
거의 시를 쓰지 못했다. 5년 동안 시 '곡마단'과 기념시 2편과
시조 5수 이외에는 작품이 없다.당시 좌우익으로 대립되어 사회가
극도로 혼란했을 뿐만 아니라,민족의 진로와 장래가 불투명한 정치
상황에서 그는 방황했던 것이다.
년 6.25사변 때 서울에 있다가 북괴군에 끌려나가 문화선무대에
참여했다고 하며 1953년 전후에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육영수(陸英修 : 1925 ~ 1974
육영수 여사는 1925년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에서
아버지 육종관씨와 어머니 이경령 여사 사이에서
1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형제는 오빠인 육인수,
언니 육인순,동생 육예수가 있었다. 육영수 여사가 태어
나시기 전 어머니 이경령 여사께서 꿈을 꾸셨는데 마당 안의
연못에서 큼직한 자라가 기어 나와 이경령 여사의 품에 덥석 안기는
바람에 엉겁결에 두 팔로 자라를 품에 안았다고 한다. 육영수 여사가
태어나신 교동집은 삼정승집이라고 불렸다.
이 집은 1600년대 김정승에 이어 송정승,
리고 민정승이 살던 300년 이상 묵은 고가로서
옥천군 청성면 능월리에서 살던 아버지 육종관 씨는
920년 당시로는 막대한 금액인 이만오백원의 돈을 주고
이 집을 사서 1921년 이른 봄 이곳으로 이사해 왔다.아버지가 소문난
부호로 부유한 가정에 있었으나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고 온유한 성품을
지녔다. 옥천읍내 죽향국민학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배화여고를 졸업한 뒤
옥천여자중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50년 전란으로 부산에 피난중일 때
육군중령 박정희와 혼인하여 슬하에 지만·근혜·근영 등 1남2녀를 두었다.
1961년 박정희 장군이 5.16군사 쿠테타를 주도하여 성공한 뒤
1963년 10.15 총선거에서 6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연임됨에 따라
대통령 부인으로 11년간 내조하였다. 검소한 안 살림과 우아한 품위로
대외적인 활약을 하였으며, 숨어서 남이 못하는 일을 많이 하여 덕망을 쌓았다.
만년의 공직은 양지회 명예회장과 자연보존협회 총재였으나
평소 재야 여론을 수렴하여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를 계속하는 가운데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는 말도 들었다. 남산에 어린이 회관을 설립하는가
하면, 서울 구의동 일대에 어린이 대공원을 조성하고 정수
기술직업훈련원 설립을 비롯하여 재해대책기름조성과 정
신박약아 돕기 운동 등 그늘진 곳을 직접 찾아다니며
사회복지사업에 분망한 일과를 보내었다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창간과
서울대학교 기숙사 정영사를 건립하였다.
경향 각처의 여성회관 건립은 물론 연말마다
고아원 · 양로원을 위문하여 따뜻한 구호의 손길을
미쳤고, 1969년부터 전국에 87개소나 되는 음성나환자
정착촌을 만들어 재생의 길을 터주었다. 세계적인 영부인으로서
또한 국모로서 부족함이 없는 너무나 휼륭하고 존경스러운 육영수
1974년 8.15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거행된제29주년 광복절 기념식장
단상에서 박정희 대통령께서 경축사를 하시던 중 북한의 지령을 받은 저격범
문세광이 쏜 총탄에 머리 관통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겼으나 5시간이 넘는 수술
끝에 생을 마쳤다.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에 희생양이 된 격이어서
애도 인파가 청와대에 연일 쇄도하였는데
국민장 영결식이 8월 19일 오전10시 중앙청 광장에서
각국 조문사절과 내외인사 3,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되고 이날 오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우리시대가 낳은 훌륭한 어머니와 아내로서 이상적인 한국의
여인상을 국민의 가슴속에 심어놓고 간 것이다. 육영수 여사의
동상은 옥천군 옥천읍 문정리 여성회관 옆에 건립되었다. 이곳에서는
매년 육영수 여사가 서거한 8월 15일을 기하여 지역주민과 유족, 박사모
회원들과, 정수장학회 관계자, 박정희 대통령 고향분들께서 찾아와 추모행사를
가지고 있으며, 11월 29일에는 탄신일을 기념하는 숭모제를 개최하고 있다.
한 나라의 대통령 영부인이라는 항상 소박하고 성실한 내조자로서 한국 주부상을
내외에 과시하고 나머지 삶의 시간 전부를 이 땅의 가엾은 동포들을 위한 사랑과
봉사에 바치다가 간 육여사의 죽음은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고귀한 죽음이였던
것이다.
독립운동가 범재(凡齋) 김규흥(金奎興.1872~1936)
한국인 최초로 신해혁명에 참가한 독립운동가
홍콩에서 향강(香江) 잡지 발간
옥천 죽향초등학교 전신인 창명학교 설립
애국지사 선정. 대통령상 수상. 건국훈장 수여
벽화는
지용캐릭터 작가로 잘 알려진 만화가 김윤 선생 작품이다.
올해 마지막달도 반이 지나갔다.
나이들수록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시간의 흐름이 20대엔 시속
20km,60대에는 60km로 흘러 가는것처럼 느껴진다
한다.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자극에 노출되는보다는
반복되는 일상이 이어지고 뇌의 쾌락 호르몬인; 도파민
(Dopamine) 분비량이 년륜을 더할수록 줄어들기때문에 같은
시간임에도 더 빨리 지나가는것 같이 느껴진다 한다. 시간이 빨리
지나든 늦게 지나든 이제 우린 조금씩,조금씩.버리고 비워야 할 나이이다.
푸르름보다 단풍이 더 고운 나무들처럼 우리 삶의 노을도 젊은 시절의 푸르름
못지 않게더 아름답고 따뜻하게 마무리되길 마지막 달 12월을 보내며 간원해본다
대한민국 근대 문화유산 2002년 2월 28일
등록문화재 제7호로 지정됨 충북 지역에 남아
있는 유일한 1940년대 천주교 성당 건축물
천주교 天主敎)란 천주를 믿는 종교란 뜻으로
가톨릭을 이르는 말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법통을 따르고 그 교의(敎義)를 신봉하는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파 로마 교황(敎皇)을 수장으로 받들며,개신교(改新敎) 및
그리스 정교회(Greece正敎會)와 함께 기독교의 3대 교파의 하나이다.
가톨릭은 일반적.보편적이라는 뜻의 그리스어'katholikos'에서
유래된 말로 천주교가 먼저 전해진 중국에서 하느님을 天主라고
부른것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 들여 사용함.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주신 주님 우리는 십자가의 길.
사랑의 길을 통해 당신 사랑의 삶을 묵상하였습니다.
당신의 삶은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 죽음을 통해
당신을 뵙게 되는 그 날까지 새롭게 신앙을
사는 삶이 되어야 함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주여
당신은 고통도 그리고 죽음까지도
당신 사랑의 불가마 속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보석으로
변케하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신뢰하고 사랑하여
십자가를 사랑의 마음으로 지고 갈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소서"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마태 10 : 39) 하신 말씀을 생활하게 해 주소서 아멘
- 십자가의 길 마침기도 중에서
정지용(鄭芝容 : 1902~?)
시인. 옥천읍 하계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영일 정씨
1923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9년 일본 경도의 동지사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그 직후부터 귀국하여 모교의 교원으로 재직하였고,
1945년 광복 후에는 경향신문 편집국장,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으나
조선문학동맹에 가입하였으며,
그 중앙집행위원에 선입되었으나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수립후 전향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하였다.
충북 옥천읍에서 북동쪽으로 10리쯤 떨어진 곳에
곧게 뻗어 나간 산줄기, 일자산(一字山)이 있다.
이 산의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여실개천을 이루고 있는데,
이 개천을 건너는 다리가 청석교(靑石橋)이다.
지용은 1902년 6월 20일, 이 다리 바로 옆에 있는 촌가에서
한약상을 경영하던 연일 정씨 태국(泰國)을 아버지로 하고,
하동 정씨 미하(美河)를 어머니로 하여 4대 독자로 태어났다.
세상이 배배 꼬여 혼돈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얼마나 더 꼬이고 꼬여야 끝이 보일까...?
불신과 실망으로 닫혀버린 문 서로가 상생하는
화합의 문이 새해엔 활짝 열리길 기원하며...
행복의 문 하나가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닫힌 문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우리를 향해 열린 문을
보지 못한다.
- 헬런 켈러
첫댓글 다녀갑니다 수고하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