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신치 치의인(人信雉 雉疑人)
사람은 꿩을 믿지만 꿩은 사람을 믿지 않는다
人 : 사람 인(人/0)
信 : 믿을 신(亻/7)
雉 : 꿩 치(隹/5)
雉 : 꿩 치(隹/5)
疑 : 의심할 의(疋/9)
人 : 사람 인(人/0)
인신치 치의인(人信雉 雉疑人)
사람은 꿩을 믿지만 꿩은 사람을 안 믿어.
치수인 인우치(雉隨人 人友雉)
꿩이 사람을 따르고 사람이 꿩의 벗이 돼.
꿩은 예부터 사람들에 의한 사냥 깜의 가장 쉬운 대상물이 되어왔다. 꿩은 언제부터인가 산닭(山鷄)이라고 불러왔다. 거기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꿩은 마을에 가까운 동산에서 살면서 멀리 깊은 산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산을 넘어 강과 바다를 건너서 다른 나라로 옮겨가지도 못한다. 봄이 되면 농부가 씨 뿌린 밭고랑의 콩을 파먹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농가에서 기르는 닭처럼 10여개의 알을 일정기간 품었다가 병아리를 까는 것이 닭과 유사하다.
설문법(說文法)에서 보면 '꿩'이라는 글자를 '화살 시(矢)' 변에 '새 초(隹)'를 써서 '꿩 치(雉)'라고 한 것은 화살처럼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갈 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꿩은 닭과는 판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닭은 사람과 친근감을 지니고 집 뜰과 울안에서 살아간다.
일본어에서 닭을 '니와도리(庭鳥)'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주인이 주는 모이를 먹고 주인이 마련해 준 닭장에서 야숙(夜宿)을 하며 보호를 받는다. 그 은혜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암탉은 거의 날마다 달걀을 낳아준다. 그래서 닭을 가계(家鷄)라고 한다. 닭은 성계(成鷄)가 돼도 집밖으로 도망가는 예가 전여 없다. 끝내는 사람의 영양식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꿩은 다르다. 꿩은 울안애서의 사육은 가능하지만 반개방식(半開放式) 사육도 불가능하다. 1년간 울에 가두어 놓고 사육해도 문만 열면 다 달아나 버린다. 한 마리도 울로 돌아오는 놈이 없다. 이것이 꿩이 지니는 DNA인상 싶다. 사육해준 주인에 대한 고마움도 생각지 않고, 먹는 것 때문에 자존심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이 꿩이 지니는 지조(志操)인상 싶다.
꿩 잡는 매도 주인이 주는 먹을 것을 받아 먹으며 꿩을 잡아 주인에게 받친다. 꿩은 매와 같은 보담성이 없다. 그것이 꿩이 지니는 특성이다. 그 지조를 높이 평가하여 그것이 선비의 지조이어야 한다고 했다.
공자의 연보를 살펴보면 동 시대의 선배인 노자(老子)에게 두 번 예방하여 문답을 나누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그 때마다 방문 예물로서 꿩을 가지고 갔다. 그때부터 스승에게 예방 선물로 꿩을 전했다는 전통이 이어져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선비들은 꿩을 준비하기 어려워서 닭을 예물로 대신했다고 한다. 그래서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은 적어도 2.500여년 이어져 온 속언(俗諺)이다.
사람은 꿩의 지조를 믿어오고 있지만 꿩은 사람과 친근해지지 아니하고 의심을 지닌 채 피해 날아갈 뿐이다. 그래서 인신치(人信雉), 치의인(雉疑人)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유투브 방송에서 꿩과 친구가 된 청소년이 꿩과 더불어 정답게 시가지를 산보하는 모습을 보았다. 마치 애견이 주인을 따르듯이, 꿩이 목줄도 없이 주인을 졸졸 따르는 진귀한 광경을 본 많은 행인들이 넋을 잃고 바라보면서 별난 일이라 한마디 식 하는 것을 들었다. 참으로 신기했다. 그 경위를 말해주는 청소년의 이야기를 듣고 감탄했다.
어느 날 길옆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주저 앉아 있는 장기(雄雉) 한 마리를 발견했다. 옆으로 다다가도 움직이지 않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 꿩을 품에 안고 온 몸을 살펴보니 한쪽 다리에 부상이 있었다.
집에 데려다가 담요에 폭 싸서 재우고 먹을 것을 주고 물을 주고 아픈 다리에 붕대를 감아주고 약을 발라주었다. 꿩의 본성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신음소리도 내지 않고 불편하거나 아프다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아 더욱 마음 안타깝기만 했다고 한다.
다음 날 청소년이 방을 나가려 했더니 꿩이 절룩거리며 그의 뒤를 따라나서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 길로 꿩을 품에 안고 병원으로 가서 의사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의사로부터 친절한 진단과 치료를 받았다. 의사도 말 하가를,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면서 놀랬다는 것이다.
꿩의 건강은 좋아졌다. 그리고 꿩은 그 청소년을 떨어지지 않고 따르기 때문에 그 청소년은 어쩔 수 없이 꿩의 생활 동반자가 되었다고 한다. 사람이 해칠 마음이 없으면 짐승도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人無害心, 獸不害人)고 했다.
꿩은 아마도 그 청소년이 보여준 측은지심(惻隱之心)에 감동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흥부가 보여준 따듯한 마음을 애절히 느꼈던 제비처럼 말이다. 여하튼 우리는 기록상으로 보아 꿩과 친할 수 없는 춘추시대부터 2.500여년 이래, 처음으로 꿩이 의인벽(疑人癖)을 버리고 사람을 신뢰하는 모습을 보게 된 셈이다.
예부터 꿩과 기러기와 닭은 사람으로 하여금 배워야 할 상징성이 있다고 했다. 꿩은 선비다운 기질을 지니고, 닭은 천성적으로 타고 난 오덕(五德: 文武信勇仁)을 지녀고, 기러기는 스스로 생활철칙으로 지키는 사덕(四德: 和行節義)을 지닌다.
설명을 좀 가한다면, 만물의 영장이라 자처하는 인간도 충고(忠告)와 뇌물(賂物) 중, 충고는 기피하면서도 뇌물을 싫어하지는 않는다(呻吟語 참고). 그러나 꿩은 먹을 것과 같은 뇌물을 어떤 경우에도 지조와 바꾸지 않는다.
약설(略說)하면, 닭들은 흩어져 놀다가도 주인이 모이를 주면 예외 없이 "곡 곡 곡" 하면서 모든 닭들을 불러드려 함께 모이를 먹는다, 이를 닭의 견식상호(見食相呼)라고 한다(漢詩外傳 참조).
그리고 기러기는 계절 따라 먼 여행을 하면서 큰 놈은 선두에, 작은 놈은 뒤를 따르면서 신호의 대화를 나누며 팔자행열(八字行列)로 질서 있게 비행한다. 이를 안행(雁行)이라 한다. 만약 짝을 잃게 되는 기러기가 있다면 그는 평생 홀로 지낸다. 수절(守節)을 한다.
사람들은 "홀로 다니는 이를 짝 잃은 기러기처럼 왜 혼자냐"고 한다. 기러기에서 여유한 말이다. 예로부터 우리 속담에 막말도 많지만, 꿩이나, 닭과, 기러기기를 빗대서 '꿩 같은 놈', '닭 같은 놈', '기러기 같은 놈'이라는 비속어를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 자처하면서도 때로는 맹자에서 이야기하는 양능(良能)과 양지(良知)를 송두리째 저버리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탐욕과 명예욕과 집단적 세욕(勢慾) 때문에 자신의 처지가 불상(不祥)해져 가는 것조차 되돌아 보려하지 않는 이가 많은 듯하다. 겸해서 자학과 부도덕과 악행도 불사한다.
조광조 선생의 말대로 하늘과 인간의 사이는 먼듯하면서도 실제는 가깝다(天人之間 似遠而實邇)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비록 오만불손의 기개를 떨쳐버리지 못했다 하더러도 꿩과 닭과 기러기의 덕성(德性)을 한번 쯤 되뇌어볼 줄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다.
꿩에서 얻는 교훈
부모자식 관계는 농부와 곡식으로 비유된다. 농부가 곡식을 잘못 가꾸면 결국 굶주림의 환난을 겪게 되고, 자식을 잘 가르치지 못하면 필경에는 위험한 화란(禍亂)을 초래한다. 곡식을 잘 가꾸고 자식을 잘 가르치는 법을 어찌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조선 초기 대학자였던 사숙재 강희맹은 아들의 교육을 위해 훈자오설(訓子五說)을 짓는다. 아비가 자식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기에 사숙재가 지은 이 글은 오늘날 독자에게 교훈을 전달하는 교술 갈래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훈자오설 중 성질이 음탕하고 싸우기를 좋아한다는 꿩에 비유한 '삼치설(三雉說)'의 내용이다.
수풀에 숨어서 피리로 암컷소리를 내며 미끼로 삼은 수컷을 움직이면 암컷과 함께 있는 것으로 착각한 욕심 많은 다른 수컷이 화를 못 참아 미혹에 빠지는 경우로 닥칠 재앙을 잊고 다가와 단번에 잡히는 경우이다.
이런 유형은 자신의 내면이 이기심으로만 가득 차 있기에 방탕하며 부모나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도 않아, 엄히 가르치지 못하고 마땅히 꾸짖을 수 없으며, 부끄러움조차 없기에 죄의식 없이 잘못을 저질러 스스로 죄의 그물에 걸리는 경우로 평생 지혜를 깨우치지 못하고 비참한 삶을 살게 된다.
두 번째 경우는 위와 같은 방법으로 유혹하면 못 본 척 하다가 같은 행동의 반복에 결국 욕망을 못 참고 미혹되어 미끼 쪽으로 다가오나 미리 경계심으로 방비를 하기에 완벽하게 속여야 겨우 잡을 수 있는 경우이다.
꿩 중에서 조금 영리하여 자신에게 닥칠 재앙을 미리 짐작하고 있는 경우로, 이미 한두 번 미혹되어 고생하고 뉘우치면서도 오히려 그 감정에 빠져 다시 부끄러움을 잊고 전철을 밟아서 마침내 재앙의 그물에 걸리는 두 번 덮쳐서 잡는 부류이다.
끝으로 사람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하늘로 날아올라 숲 속으로 들어가는 경계심이 많은 꿩의 경우이다.
욕심이 적고 경계심은 앞서는 까닭에 사람을 꺼려해서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다. 온갖 술책을 다 써서 겨우 가까이 오게 했을지라도 그 민첩한 모양새가 마치 신과 같아 어떻게 기회를 잡아 술책을 펼 수도 없다. 꿩 중에서 가장 영특해 해로움을 멀리하는 종류이다. 이런 유형은 품성이 단정하고 굳건해 맑게 갈고 닦음을 좋아하고, 음탕하고 황당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멀리한다.
위에서 열거한 세 종류에서 첫 번째 인간형은 내면이 일그러진 욕망으로 가득차서 결국 그로 인해 자신이 미혹에 빠졌다는 사실도 모르기에 부끄러움도 없다. 혹시 있다고 해도 고칠 생각이 없는 극우나 극좌의 진영론자, 죄의식 없는 강력범죄자, 직을 이용한 부패나 비리의 공직자나 위정자들, 정의와 공정을 외치며 스스로 정한 규정을 이익에 따라 헌신짝처럼 팽개치는 부류들이다.
미혹에 빠져 후회하면서 또 다른 유혹에 넘어가는 부류는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위정자나 관료로서의 자질이 없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장식품에 불과하다.
끝으로 뉘우쳐 후회할 줄 알기에 유흥을 단절하고 부정한 권력에 굴하지 않으며 올곧은 선비정신을 좇아 날로 새롭게 갈고 닦아 평생 재앙을 모면하는 이상적인 형이다. 이렇듯 15세기 꿩에 비유한 사숙재의 교훈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꿩의 교훈
수꿩은 어느 한 산에 한 마리밖에 살지 않는다. 일부다처이긴 하지만 자신이 행세하는 영역 밖에 사는 남의 각시 꿩들을 넘보거나 추파를 던지는 법이 없다. 이렇게 남녀 유별하다 하여 시어(詩語)에서 꿩을 덕조(德鳥)라 곧잘 읊었던 것이다.
만약 바람기 있는 암컷이 옆산의 남의 서방 꿩에 추파를 던지는 일이 있으면 수놈끼리 피투성이의 결투를 벌인다. 어느 한쪽이 죽거나 두 마리 다 죽거나 하는 사생 결단이지, 약세(弱勢)라 하여 도중에 도망치거나 하는 법이 없다 한다.
옛날 무신들이 머리에 꿩깃을 꽂고 다닌 이유는 바로 사생 결단하는 수꿩의 용기를 숭상하고 본뜨기 위한 것이라 한다. 또한 자신이 활동하고 지배하는 영역을 보호 사수하는 영역 감각이 대단한 속성도 무신이 꿩깃을 꽂고 다니게 한 요인이라고도 한다. 옛 병법에 보면 수꿩이 지배하는 영역 그대로를 요새화하면 난공불락이라 하여 치성(雉城)들을 많이 쌓고 있기도 하다.
꿩이 우리 한국인의 인상에 좋게 아로새겨진 데는 그밖에 강인한 모성애 때문이기도 하다. 산불 속에서 제 새끼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으면 새끼를 구하기 위해 불 속으로 날아들어 타 죽거나, 알을 품고 있는 도중 산불이 나면 불에 타 죽을지언정 날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꿩의 습성이다.
뿐만 아니다. 은혜를 입으면 보은한다는 새로도 알려져 있다. 구렁이한테 감겨 죽어가고 있던 꿩을 살려준 한 서생에게 그 꿩이 죽음으로써 보은한 설화에서 치악산(稚岳山)과 상원사(上院寺)의 이름이 연기(緣起)되고 있다. 혼돈과 죄악된 세상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작은 미물이지만 좋은 귀감을 남겨준다.
상원사 보은설화
경상도 의성에 사는 한 나그네가 과거를 보러 한양에 향해 떠났다. 치악산 기슭 오솔길을 걸어가는데 숲 속에서 꿩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잔솔밭 아래 커다란 비단 구렁이가 꿩을 잡아 먹으려고 똬리를 틀고 있었다. 나그네는 구렁이에게 잡아 먹히려는 꿩을 불쌍히 여겨 활을 당겨 구렁이를 쏘아 죽였다.
그리고 길을 재촉하여 가는데 해가 저물었다. 깊은 산중에서 해가 저물어 부득이 인가를 찾게 되었다. 어두워서 찾아낸 집은 어느 이름모를 절간이었다. 문을 들어서면서 주인을 찾으니 이상하게도 소복을 입은 여인이 나타났다. 나그네는 하룻밤 자고 가기를 간청했다.
여인은 쾌히 승낙하면서 방으로 안내했다. 여인은 저녁밥을 차려다 주고 대접을 융숭히 해줬다. 저녁밥을 든 나그네는 피곤이 몰려 곧장 깊은 잠에 빠졌다. 잠 속에서 몸이 부자유스러움을 느꼈다. 눈을 떠보니 커다란 구렁이가 온몸을 칭칭 감고 있었다.
나그네는 놀라 "아무리 미물일지라도 죄 없는 선비를 해치려고 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소리쳤다. 그러자 구렁이는 두 갈래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손님은 오늘 오시다가 도중에서 살생을 했소. 구렁이는 내 남편이오. 그를 죽였으니 임자도 마땅히 죽음을 당하여야 하오" 하고 대답했다.
나그네는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살려 달라고 빌었다. 그러자 구렁이는 "절 뒤 종루에 종이 있는데 그것을 세 번만 울리면 살려줄 수가 있소"하고 조건을 내놓았다.
나그네는 자신의 활 솜씨를 믿고 그까짓 종쯤은 문제없이 맞춰 소리는 낼 수 있을 것이라도 믿고 날이 새기만을 기다렸다. 날이 밝자 나그네는 절 뒤뜰에 나가보았다. 그랬더니 구렁이가 이야기한대로 종루가 있고 그 끝에는 종이 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 종루는 어찌나 높은지 다른 종루와는 달랐다.
나그네는 화살을 뽑아 시위에 걸고 힘껏 당겼다. 그러나 첫 화살은 종에 미치지 못하고 떨어지고 말았다. 둘째 화살도 첫 화살처럼 종을 미칠 듯 미칠 듯 하다가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나그네는 마지막 화살을 뽑아 있는 힘을 다하여 다시 종을 향해 쏘았다. 마지막 화살도 종에 미치지 못하고 그냥 떨어지고 말았다.
나그네는 이제는 할 수 없이 구렁이에게 죽음을 당해야겠구나 하고 탄식을 하면서 발걸음을 돌리려던 때였다. 그런데 이게 웬 변고인가? "뗑! 뗑! 뗑!" 하고 종루에 종이 세 번 울리는 것이었다. 종이 울리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구렁이의 변신인 소복한 여인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려 나그네는 위기를 면하게 됐다.
나그네는 종소리가 난 것이 하도 이상해서 종루 밑을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그곳에는 꿩 세 마리가 머리가 터져 죽어있었다. 전날 살려준 꿩을 식솔들이 은혜를 갚기 위해 나그네의 위험을 구하고자 머리로 종을 치고 죽은 것이었다.
이후부터 이 고장 사람들은 이 산 이름을 꿩의 보은을 한 산이라 하여 '꿩 치(雉)' 자를 써서 치악산(雉岳山)이라고 바꾸었다 한다.
치악산에 한 쌍의 구렁이가 나타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치악산의 상원사 주지스님은 욕심이 많고 속세사람과 같은 데가 많았다.
어느 해 신종(新種)을 만들기 위해 장안 십만 집에서 그 집 식구대로 숟가락 하나씩 거두어 들였다. 이 주지스님은 처음에는 불심 그대로 종을 만들려고 했으나 견물생심이라 슬며시 탐욕이 생겨 걷어들인 숟가락 중에서 절반쯤은 숨겨두었다.
그뿐 아니라 거두어 들인 숟가락 중 절반만 들여 종을 하나 만들었다. 높다른 종각을 짓고 종을 매달았다. 서라벌 황룡사의 신종만은 못해도 나라의 태평과 안녕을 빌기에는 손색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거창한 시종식(試鍾式)을 갖게 됐다. 식구 수대로 숟가락을 바친 시주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어 이 큰 종의 첫소리를 들으려 했다.
몰려온 사람들은 큰 종의 모습을 보고 모두 스님의 노고를 칭찬했다. "참으로 수고했습니다. 스님이 공덕이 아니었던들 이렇게 큰 종을 만들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내용도 모르고 칭찬이 자자했다.
맨 처음 종을 치는 것은 스님이 손수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종을 쳐도 종소리가 나지 않았다. 연거푸 몇 차례 종을 쳐보았으나 바위를 때리는 소리만큼도 나질 않았다 모여있는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하늘에서부터 부처님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저주의 목소리였다. 그 스님은 부처님의 저주를 받아 구렁이가 된 것이다.
상원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이며 해발 1,200m에 있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 이 창건하였다는 설과 신라 말 경순왕의 왕사였던 무착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오대산 상원사에서 수도하던 중 문수보살에게 기도하여 관법(觀法)으로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창건 이후 고려 말에 나옹 혜근(惠勤)이 중창하였고 월봉, 위학, 정암, 해봉, 삼공, 축념 등이 이곳에서 수도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왕들이 국태민안을 위한 기도처로 삼았다. 6·25전쟁 때 모두 불타버린 것을 1968년에 중건하였다. 1988년 대웅전을 다시 짓고, 범종각과 일주문을 신축하였다.
현재 건물은 상원사 대웅전(강원문화재자료 18)과 심우당, 심검당, 범종각, 요사채, 객사 등이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동서에 신라 석탑 양식을 따른 상원사지 석탑 및 광배(강원유형문화재 25)가 있다.
이 설화는 시대 미상의 보은(報恩)형 전설이야기로 관동지역에서 구전 유포되어 온 얘기를 지금은 불교설화가 되어서 전해오는 치악산과 상원사의 전설이야기가 된 것이다. 이 설화가 우리에게 전해주려는 교훈은 남에게 입은 은혜를 져버리는 그런 배은망덕한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전해주려는 전설 얘기라고 할 수 있다.
날 짐승인 꿩이 받은 은헤를 다시 그 꿩이 되돌려줘 베푼 보은으로, 선비가 그 꿩의 은혜에 선비가 다시 보답하기 위해 치악산이라는 산과 상원사라는 절을 있게 해서, 이곳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배은망덕한 짓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 꿩을 교훈으로 해서, 배우라고, 그렇게 이름까지 지어서 치악산과 이 절을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 人(사람 인)은 ❶상형문자로 亻(인)은 동자(同字)이다.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서 있는 것을 옆에서 본 모양을 본뜬 글자. 옛날에는 사람을 나타내는 글자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썼으나 뜻의 구별은 없었다. ❷상형문자로 人자는 '사람'이나 '인간'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人자는 한자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글자이기도 하다. 상용한자에서 人자가 부수로 쓰인 글자만 해도 88자가 있을 정도로 고대 중국인들은 人자를 응용해 다양한 글자를 만들어냈다. 이전에는 人자가 두 사람이 등을 서로 맞대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해석을 했었지만, 갑골문에 나온 人자를 보면 팔을 지긋이 내리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었다. 소전에서는 팔이 좀 더 늘어진 모습으로 바뀌게 되어 지금의 人자가 되었다. 이처럼 人자는 사람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부수로 쓰일 때는 주로 사람의 행동이나 신체의 모습, 성품과 관련된 의미를 전달하게 된다. 그래서 人(인)은 (1)사람 (2)어떤 명사(名詞) 아래 쓰이어, 그러한 사람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사람, 인간(人間) ②다른 사람, 타인(他人), 남 ③딴 사람 ④그 사람 ⑤남자(男子) ⑥어른, 성인(成人) ⑦백성(百姓) ⑧인격(人格) ⑨낯, 체면(體面), 명예(名譽) ⑩사람의 품성(稟性), 사람됨 ⑪몸, 건강(健康), 의식(意識) ⑫아랫사람, 부하(部下), 동류(同類)의 사람 ⑬어떤 특정한 일에 종사(從事)하는 사람 ⑭일손, 인재(人才)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어진 사람 인(儿),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짐승 수(兽), 짐승 수(獣), 짐승 수(獸), 짐승 축(畜)이다. 용례로는 뛰어난 사람이나 인재를 인물(人物), 안부를 묻거나 공경의 뜻을 표하는 일을 인사(人事),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인권(人權), 한 나라 또는 일정 지역에 사는 사람의 총수를 인구(人口), 세상 사람의 좋은 평판을 인기(人氣), 사람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여 이르는 말을 인류(人類), 사람의 힘이나 사람의 능력을 인력(人力), 이 세상에서의 인간 생활을 인생(人生), 학식과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인재(人材), 사람의 수효를 인원(人員), 사람으로서의 됨됨이나 사람의 품격을 인격(人格), 사람에 관한 것을 인적(人的), 사람을 가리어 뽑음을 인선(人選), 사람의 힘이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을 인위(人爲), 사람의 몸을 인체(人體), 사람의 얼굴의 생김새를 인상(人相), 한 사람 한 사람이나 각자를 개인(個人), 나이가 많은 사람을 노인(老人), 남의 아내의 높임말을 부인(夫人), 결혼한 여자를 부인(婦人), 죽은 사람을 고인(故人), 한집안 사람을 가인(家人), 장사하는 사람을 상인(商人), 다른 사람을 타인(他人), 널리 세상 사람의 이야깃거리가 됨을 일컫는 말을 인구회자(人口膾炙), 인간 생활에 있어서 겪는 중대한 일을 이르는 말을 인륜대사(人倫大事), 사람은 죽고 집은 결딴남 아주 망해 버림을 이르는 말을 인망가폐(人亡家廢),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있다는 뜻으로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이나 오래 살고 못 살고 하는 것이 다 하늘에 달려 있어 사람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인명재천(人命在天), 사람의 산과 사람의 바다라는 뜻으로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모인 모양을 이르는 말을 인산인해(人山人海), 사람마다 마음이 다 다른 것은 얼굴 모양이 저마다 다른 것과 같음을 이르는 말을 인심여면(人心如面), 여러 사람 중에 뛰어나게 잘난 사람을 두고 이르는 말을 인중사자(人中獅子), 여러 사람 중에 가장 못난 사람을 이르는 말을 인중지말(人中之末), 사람의 죽음을 몹시 슬퍼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인금지탄(人琴之歎),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뜻으로 사람의 삶이 헛되지 아니하면 그 이름이 길이 남음을 이르는 말을 인사유명(人死留名), 사람은 곤궁하면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사람은 궁해지면 부모를 생각하게 됨을 이르는 말을 인궁반본(人窮反本),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니라는 뜻으로 사람의 도리를 벗어난 사람을 일컫는 말을 인비인(人非人), 인생이 덧없음을 이르는 말을 인생무상(人生無常), 사람의 근본은 부지런함에 있음을 이르는 말을 인생재근(人生在勤),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이 짧고 덧없다는 말을 인생조로(人生朝露), 남의 신상에 관한 일을 들어 비난함을 이르는 말을 인신공격(人身攻擊), 아주 못된 사람의 씨알머리라는 뜻으로 태도나 행실이 사람답지 아니하고 막된 사람을 욕하는 말을 인종지말(人種之末), 남이 굶주리면 자기가 굶주리게 한 것과 같이 생각한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여겨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함을 이르는 말을 인기기기(人飢己飢), 인마의 왕래가 빈번하여 잇닿았다는 뜻으로 번화한 도시를 이르는 말을 인마낙역(人馬絡繹), 얼굴은 사람의 모습을 하였으나 마음은 짐승과 같다는 뜻으로 남의 은혜를 모름 또는 마음이 몹시 흉악함을 이르는 말을 인면수심(人面獸心), 사람은 목석이 아니라는 뜻으로 사람은 모두 희로애락의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목석과 같이 무정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인비목석(人非木石), 정신을 잃고 의식을 모름이란 뜻으로 사람으로서의 예절을 차릴 줄 모름을 이르는 말을 인사불성(人事不省) 등에 쓰인다.
▶️ 信(믿을 신)은 ❶회의문자로 䚱(신)은 고자(古字), 㐰(신), 孞(신),은 동자(同字)이다. 人(인)과 言(언; 말)의 합자(合字)이다. 사람이 말하는 말에 거짓이 없는 일, 성실을 말한다. 옛날엔 사람인변(亻)部에 口(구)라 썼으며(㐰), 또 말씀 언(言)部에 忄(심)이라 쓴 글(䚱) 자체도 있다. ❷회의문자로 信자는 '믿다', '신임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信자는 人(사람 인)자와 言(말씀 언)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믿다'라는 뜻은 人자와 口(입 구)자가 결합한 㐰(믿을 신)자가 먼저 쓰였었다. 이후 소전에서는 口자가 言자로 바뀌면서 본래의 의미를 더욱 명확하게 표현한 信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사람의 말은 믿을 수 있어야 하고 거짓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信자는 '믿다'나 '신뢰하다', '신임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信(신)은 ①믿다 ②신임하다 ③맡기다 ④신봉하다 ⑤성실하다 ⑥~에 맡기다 ⑦확실하다 ⑧마음대로 하다 ⑨알다 ⑩신의(信義), 신용(信用), 신표(信標) ⑪편지(便紙ㆍ片紙), 서신(書信) ⑫정보(情報) ⑬증거(證據), 기호(記號) ⑭서류(書類) ⑮소식(消息), 소식을 전하는 사람 ⑯확실히 ⑰정말로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믿을 시(恃),믿을 양/량(諒),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의심할 의(疑)이다. 용례로는 믿고 받드는 일을 신앙(信仰), 믿고 의지함을 신의(信倚), 믿음성이 있는 사람을 신인(信人), 믿고 일을 맡기는 일을 신임(信任), 믿고 받아 들임을 신수(信受), 믿음직하고 착실함을 신실(信實), 변하지 않은 굳은 생각을 신념(信念),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신도(信徒), 옳다고 믿는 마음을 신심(信心), 믿고 따라 좇음을 신종(信從), 믿어 의심하지 아니함을 신용(信用), 남을 믿고 의지함을 신뢰(信賴), 상을 줄 만한 훈공이 있는 자에게 반드시 상을 주고 벌할 죄과가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벌을 준다는 뜻으로 곧 상벌을 공정하고 엄중히 하는 일을 이르는 말을 신상필벌(信賞必罰), 돼지나 물고기 등 무심한 생물조차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신의의 지극함을 이르는 말을 신급돈어(信及豚魚), 옳다고 믿는 바대로 거리낌 없이 곧장 행함을 일컫는 말을 신심직행(信心直行), 꼭 믿어 의심하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신지무의(信之無疑), 믿음은 움직일 수 없는 진리이고 또한 남과의 약속은 지켜야 함을 이르는 말을 신사가복(信使可覆), 성서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고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의 신앙을 공적으로 나타내는 일을 일컫는 말을 신앙고백(信仰告白), 신앙을 가지고 종교에 귀의하는 영적 생활을 이르는 말을 신앙생활(信仰生活), 위정자가 나무 옮기기로 백성을 믿게 한다는 뜻으로 신용을 지킴을 이르는 말을 이목지신(移木之信), 미생의 믿음이란 뜻으로 우직하게 약속만을 굳게 지킴 또는 융통성이 없이 약속만을 굳게 지킴을 비유하는 말을 미생지신(尾生之信), 친구 사이의 도리는 믿음에 있음을 이르는 말을 붕우유신(朋友有信), 벗을 사귐에 신의으로써 사귐을 일컫는 말을 교우이신(交友以信), 반은 믿고 반은 의심함 또는 믿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심함을 일컫는 말을 반신반의(半信半疑), 무슨 일에나 승낙을 잘 하는 사람은 믿음성이 적어 약속을 어기기 쉽다는 말을 경낙과신(輕諾寡信) 등에 쓰인다.
▶️ 雉(꿩 치, 짐승 이름 사, 땅 이름 이, 키 작을 개)는 형성문자로 垁(치)는 고자(古字), 鴙(치), 鴩(치)는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새 추(隹; 새)部와 음(音)을 나타내는矢(시, 치)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雉(치, 사, 이, 개)는 ①꿩(꿩과의 새) ②담, 장원(牆垣) ③넓이의 단위 ④쇠고삐(소의 굴레에 매어 끄는 줄) ⑤주사위의 눈 ⑥물건이 뒤섞인 모양 ⑦풀을 베다 ⑧목매다 ⑨다스리다 ⑩평정하다 ⑪벌여놓다 그리고 ⓐ짐승의 이름(사) 그리고 ㉠땅의 이름(이) 그리고 ㊀키가 작다(개)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꿩 적(翟)이다. 용례로는 꿩과 토끼를 치토(雉兔), 꿩의 알을 치란(雉卵), 꿩의 꽁지 깃을 치미(雉尾), 꿩과 생선을 치선(雉鮮), 꿩을 수 놓아 만든 휘장을 치장(雉帳), 꿩의 고기로 만든 산적을 치적(雉炙), 꿩과 닭을 치계(雉鷄), 꿩고기를 넣고 끓인 국을 치탕(雉湯), 생치구이로 저민 꿩고기를 여러가지 재료로 양념하고 주물러서 구운 반찬을 치구(雉灸), 꿩김치로 꿩을 삶은 물과 동치미 국물을 똑같이 타고 삶은 꿩고기를 넣은 음식을 치저(雉菹), 새치로 젊은 사람의 머리에 섞여 난 흰 털을 사치(射雉), 말린 꿩의 고기를 건치(乾雉), 몸의 빛깔이 흰 꿩을 백치(白雉), 말리거나 익히지 아니한 성한 꿩을 생치(生雉), 새해 선물로 보내는 꿩을 세치(歲雉), 수꿩으로 장끼를 웅치(雄雉), 봄 꿩을 춘치(春雉), 집의 닭을 미워하고 들의 꿩을 사랑한다는 뜻으로 아내를 소박하고 첩을 좋아함 또는 좋은 필적을 버리고 나쁜 필적을 좋아함을 가계야치(家鷄野雉), 봄철의 꿩이 스스로 운다는 뜻으로 제 허물을 스스로 드러내어 화를 자초함을 이르는 말을 춘치자명(春雉自鳴), 토끼 그물에 꿩이 걸린다는 뜻으로 소인은 계교로 좌에서 벗어나고 군자가 도리어 화를 입음을 이르는 말을 토라치리(兔羅雉罹), 개에게 물린 꿩이라는 뜻으로 아무런 이유없이 뜻밖의 화를 입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견색지치(犬咋之雉), 꿩 먹고 알 먹는다는 뜻으로 한 가지 일을 하여 두 가지 이익을 얻음을 이르는 말을 식치식란(食雉食卵) 등에 쓰인다.
▶️ 疑(의심할 의, 안정할 응)는 ❶회의문자로 어린아이가 비수(匕)와 화살(矢)을 들고 있어 위험하여 걱정하니 의심하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疑자는 '의심하다'나 '헷갈리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疑자는 匕(비수 비)자와 矢(화살 시)자, 疋(발 소)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疑자는 이러한 글자의 조합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갑골문에 나온 疑자를 보면 지팡이를 짚고 고개를 돌린 사람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옆으로는 彳(조금 걸을 척)자가 있으니 이것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길을 헤매고 있는 사람을 표현한 것이다. 疑자는 이렇게 길 위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리거나 주저하는 모습으로 표현한 것으로 '헷갈리다'나 '주저하다'는 뜻을 갖게 되었지만, 후에 '의심하다'나 '믿지 아니하다'와 같은 뜻이 파생되었다. 그래서 疑(의, 응)는 경서 가운데서 의심이 날 만한 것의 글 뜻을 설명시키던, 과거(科擧)를 보일 때의 문제 종류의 한 가지의 뜻으로 ①의심하다 ②헛갈리다 ③믿지 아니하다 ④미혹되다, 미혹시키다 ⑤두려워하다 ⑥머뭇거리다, 주저하다 ⑦괴이하게 여기다 ⑧비기다(=擬) ⑨같다, 비슷하다 ⑩견주다(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알기 위하여 서로 대어 보다) ⑪시샘하다 ⑫헤아리다, 짐작하다 ⑬의문(疑問) ⑭아마도 그리고 안정할 응의 경우는 ⓐ안정하다(응) ⓑ한데 뭉치다(응) ⓒ집결하다(응) ⓓ멈추다(응)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의심할 아(訝),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믿을 신(信)이다. 용례로는 의심하여 분별에 당혹함을 의혹(疑惑), 의심하여 물음을 의문(疑問), 마음에 미심하게 여기는 생각을 의심(疑心), 의심스러워 괴이쩍음을 의아(疑訝), 의심하여 두려워함을 의구(疑懼), 서로 의심하여 속 마음을 터 놓지 아니함을 의격(疑隔), 의심스러워 마음이 어지러움을 의란(疑亂), 의심하고 업신여김을 의모(疑侮), 반신반의 함을 의신(疑信), 의심하여 망설임을 의애(疑捱), 의심하여 어김을 의위(疑違), 의심하여 두려워함을 의파(疑怕), 의심하여 놀람을 의해(疑駭), 의심쩍고 명백하지 못함을 의회(疑晦), 의심하며 놀람을 의경(疑驚), 의심스러운 생각을 의념(疑念), 의심스러운 일의 실마리를 의단(疑端), 꺼리고 싫어함을 혐의(嫌疑), 의심나는 점을 물어서 밝힘을 질의(質疑), 마음속에 품은 의심을 회의(懷疑), 의심스러움이나 의심할 만함을 가의(可疑), 크게 의심함을 대의(大疑), 의혹을 풂을 결의(決疑), 어려워서 의문스러움을 난의(難疑), 의심이 많음을 다의(多疑), 괴상하고 의심스러움을 괴의(怪疑), 의심을 받음이나 혐의를 받음을 피의(被疑), 의심스러운 바를 환히 깨달음을 오의(悟疑), 시기하고 의심함을 제의(懠疑), 의심쩍은 생각을 가짐을 지의(持疑), 의심이 생기면 귀신이 생긴다는 뜻으로 의심하는 마음이 있으면 대수롭지 않은 일까지 두려워서 불안해 함을 이르는 말을 의심암귀(疑心暗鬼), 의심을 품는 일을 행하여 성공하는 것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의사무공(疑事無功), 의심이 나는 일은 억지로 자세히 캘 필요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의자궐지(疑者闕之), 반은 믿고 반은 의심함 또는 믿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심함을 이르는 말을 반신반의(半信半疑), 많은 사람이 다 의심을 품고 있음을 이르는 말을 군의만복(群疑滿腹), 믿음직하기도 하고 의심스럽기도 함을 이르는 말을 차신차의(且信且疑), 여우가 의심이 많아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는 뜻으로 어떤 일에 대하여 의심이 많아 결행하지 못함을 비유하는 말을 호의불결(狐疑不決), 어렵고 의심나는 것을 서로 묻고 대답함을 일컫는 말을 난의문답(難疑問答), 여름의 벌레는 얼음을 안 믿는다는 뜻으로 견식이 좁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하충의빙(夏蟲疑氷), 여우가 의심이 많아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는 뜻으로 어떤 일에 대하여 의심이 많아 결행하지 못함을 비유하는 말을 호의미결(狐疑未決), 죄상이 분명하지 않아 경중을 판단하기 어려울 때는 가볍게 처리해야 함을 이르는 말을 죄의유경(罪疑惟輕)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