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아스카 문화의 담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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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전반에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꽃피운 일본 최초의 불교문화인 아스카 문화는 당시 정치의 중심이 나라 분지 남쪽 아스카[飛鳥]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붙었다.
아스카 문화를 일으킨 사람은 스이코 천황의 조카이던 쇼토쿠 태자라고 알려져 있다. 쇼토쿠 태자는 당시 섭정 자리에 있었다. 쇼토쿠 태자는 한반도로부터 제도와 문물 등을 수입하여 일본 국내의 체제를 정립 혁신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관료제를 확립하였으며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왕권을 강화하면서 천황이라는 칭호도 이때부터 썼다고 한다.
문화적인 면에서는 불교문화를 많이 받아들였다. 이 시기 꽃 핀 아스카 문화는 백제 문명의 연장이라고 할 만큼 한반도로부터 많은 문물을 수입하여 이를 일본에 정착시켰다. 건축과 조각, 회화 등이 한국에서 건너간 승려, 학자들의 영향으로 발전하였다.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도 이 시기에 한국학자들에 의해 일본에 전해졌다. 앞서 6세기경에 백제에서 건너간 아직기와 왕인 등이 일본에 초기 유교를 전했다면 7세기 들어서면서 좀 더 차원 높은 유교 학문에 대한 욕구에 맞추어 지식인 학자와 승려들이 대거 일본으로 초빙되어 건너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일본에 초빙되어 아스카 문화를 꽃피우는데 기여한 사람 중에 담징도 있었다.
담징은 초기 일본에 전해진 유교를 한 차원 더 끌어 올릴 수 있는 5경에 달통한 학자로서 일본의 학문 발전에 영향을 미쳤고 더불어 자신의 회화 재능으로 일본 미술사의 발전을 앞당겼던 것 같다. 그가 전해준 종이와 먹 제조법이 일본의 학문과 회화사에 일조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그에 더하여 그는 호류사의 금당에 벽화를 그렸다고 전한다.
석가·아미타·미륵·약사 등으로 구성된 사불 정토도인 이 금당벽화는 경주의 석굴암, 중국의 윈강 석불과 함께 동양의 3대 미술품으로 유명했으나, 1949년에 불타 버리고 말았다. 현재 호류사 금당에 있는 그림은 불타버린 그림을 복원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금당벽화가 화재로 소실되기 전까지는 이 그림이 담징이 그렸다고 말해졌지만, 이후로는 그 회화 풍이나 제작방법, 호류사의 역사 등을 들어 담징의 그림이 아니라는 의견이 우세해지고 있다.
호류사 금당 벽화는 누가 그렸을까?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cc.phinf.naver.net%2Fncc02%2F2011%2F4%2F13%2F278%2F7px.jpg) 일본의 학계는 호류사의 금당 벽화를 아잔타석굴벽화, 서역과 둔황, 원강석굴, 고구려 등을 거친 회화의 정수로 평가하면서도 그 화가는 불명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첫 번째로 금당벽화 제작 시기와 담징의 생몰일이 아귀가 잘 들어맞지 않는 탓이다. 호류사는 쇼토쿠 태자 당시 지어졌다고는 하나 670년 큰 불에 탔으며 현전하는 건물들은 이후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렇게 되면 631년에 죽은 담징은 이 새로운 건물에 그림을 그릴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1905년 일본 학자에 의해 호류사가 조사되면서 재건립 기록이 사실이 아니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가, 최근에 호류사 인근에 그보다 앞선 시기에 지어진 절의 건물터가 발견되면서 그 건물터가 원래 호류사이고 지금 것은 670년 이후 새로 지어진 것이라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
또 하나는 그림의 제작 기법과 화풍이 요철법과 채색법에서 서역 화풍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당시 고구려 고분의 벽화 제작 기법에서도 나오는 것으로 이를 두고 단순히 서역의 화풍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1989년 호류사의 오중탑에서 금당벽화의 화가와 동일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그린 것으로 추측되는 관음보살상의 그림이 발견되기도 하였는데 일본 학계는 이 또한 담징의 작품으로는 보고 있지 않다.
물론 호류사의 건립과 금당벽화 등에서 한반도의 영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금당벽화의 작가가 담징 한 사람이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다는 것이 1980년대 이후 일본 학계의 중론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