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큰돌개혁장로교회 주일예배 ▣주일경독시간 인도: 심진희 집사 ▶시편찬송 시편83편(제네바) 다같이 ▶경 독 시편83편 고린도후서2장 다같이 ▶합심기도 다같이 ① 성령과 말씀의 예배 / 설교자와 회중을 위해 ② 성찬의 예배/ 은혜언약 안에서의 하나님의 영광과 성도의 교제가 풍성하게 드러나는 예배를 위해 ③ 믿음과 순종의 예배/ 배움(교리)과 실천(삶)이 있는 예배를 위해 ▶목사;“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갈1:3) ▶회중;“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2) * 예배부름과 송영 시편107편(제네바) * 니케아 콘스탄티노플신경 다함께 *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제19주일 * 십계명낭독 다함께 * 참회기도 다함께 * 시편찬송 시편4편(B)(연합) 헌 상 심진희 집사 목회기도 담임목사 말씀의 강설 요일2:18-23② 요한일서 강해(39) 주의만찬 민18:18-20 다함께 * 찬 송 찬송가 170장 다함께 * 강복선언 설교자 * 교제의 인사 다함께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12:10) * 표는 기립해주시기 바랍니다. ☞ 헌금은 미리 준비해 미리 봉헌함에 넣어주세요. *주일 오후 교리공부: “성경과 교리”(65) 교리와 함께 읽는 야고보서 본문연구 |
제2부 인간의 구원 제19주일 하나님 아들에 관하여 제50문: 왜 그다음 귀절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고”입니까? 답: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는데 그곳은, 그분이 교회의 머리이시고 성부께서 그를 통하여 만물을 다스리시고 계심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제51문: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그러한 영광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답: 첫째,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지체인 우리들에게 하늘의 은사를 부어주십니다.3 둘째, 그리스도는 그 크신 능력으로 모든 원수들로부터 우리들을 지키고 보호해 주십니다. 제52문:“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재림은 당신에게 어떤 위안을 줍니까? 답: 박해와 고통 가운데 처해 있을 때에도 나는 하늘을 보며 내 대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심으로써 나에게 미칠 모든 저주를 없애 주신 심판의 주를 확신있게 기다립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원수들에게 영원한 형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모든 성도들은 하늘의 기쁨과 영광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
▣성찬본문/ 민18:18-20
▶『 (민18:18-20) 그 고기는 네게 돌릴지니 흔든 가슴과 오른쪽 넓적다리 같이 네게 돌릴 것이니라 (1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 (20)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
▣설교본문/ 요일2:18-23 ②
『 (요일2:18-23)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19)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21)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 (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23)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사랑의 부재공간인 세상과 교회를 구분하는 세 가지 경계선을 살펴보았습니다. 세상은 삼위하나님의 사랑이 없습니다. 반대로 거짓 삼위일체가 역사하는 공간입니다. 하나님을 반역한 인간과 저주받은 세상은 항상 하나님을 모사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본성이 ‘의와 진리와 거룩함’이라면 타락한 인간본성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대체됩니다.
세상은 거짓 삼위일체가 활동하는 공간입니다.
“거짓(적) 그리스도”(요일2:18), “거짓 교회”(19절), “거짓 진리(영)”(22절,4:1)
사도는 연약한 신자들에게 그들이 받은 바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령이 가르치신 진리와 참된 하나님의 교회 안에 머물러야 함을 단단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선을 넘어서면 위험합니다.
금지된 것들에 관하여
▶사도 요한은 목자로서의 애정어린 목소리로 그의 회중을 향해 ‘아이들아!’(Paidiva)(요일2:18상)라고 부릅니다. 그의 회중은 여전히 미성숙한 어린아이와 같은 처지에 있었고, 지속적인 교육과 훈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지역교회의 목회자의 설교 안에는 이런 노파심과 현실적인 염려가 없을 수 없습니다.(고후12:28-29;빌3:2)
▶(요일2:18-19)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19)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문밖에 사자가 있습니다.(잠22:13) 실로 하나님의 집밖에는 사자가 있습니다. 이것은 게으른 자의 변명이 아닙니다. 교회의 터가 되었던 사도들이 고백하는 현실이었습니다.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벧전5:8) 사단은 그리스도의 공동체로부터 지속적으로 밀까부르듯 청구하고 있습니다.(눅22:31) 의심과 불화와 두려움에 빠진 영혼들은 그들이 거한 교회라는 안전지대로부터 분리되도록 지속적으로 유혹받고 있습니다.
이 경계 밖에는 위선과 기만(거짓), 그리고 왜곡(오류)이 있습니다.(요일1:6,8,10) 적그리스도의 지휘아래 일사분란하게 세상은 돌아갑니다. 그리고 교회를 미혹합니다. 위선자들과 거짓으로 자신을 포장한 영혼들, 그리고 모든 오류에 동조하여 거짓 진리를 따라 행하는 사람들이 참 교회를 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도의 노파심어린 잔소리(?)는 자녀를 낳고 길러본 부모들은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 아이를 양육할 때 부모들은 ‘해야 할 것’에 대한 가르침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에 관한 가르침에 더 익숙한 법입니다. 자녀들은 먹지 말아야 할 것, 만지지 말아야 할 것, 가지 말아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먼저 배워야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애굽에서 건져내신 자기 백성들에게 거룩한 계명을 주실 때 이 계명에는 따뜻한 부성적 사랑이 녹아있었습니다. 십계명은 온통 ‘하지 말라’는 금령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출20:1-17) 이 금령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율법을 대하면서 대부분 엄격하고 두려우신 군주적 하나님의 굴절없는 의지를 상상하지만 이것은 부당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십계명의 서론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20: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종 된 집에서 인도한 네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이 아직 살갑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다음의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호11:1-4)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2)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3)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4)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자기 백성을 이끌고 나오신 이래로 그분은 어린 유아에게 걸음을 가르치듯 인격적이고 사려 깊은 양육자셨다는 것과 그분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인 말씀으로 그들을 가르치셨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줄’이란 소의 입에 물린 자갈과 끈을 의미합니다. 마치 농부가 소의 입에 물린 끈을 통해 의사를 소통하고 이끄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이라는 방식으로 그분의 뜻을 전하셔서 이끄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목자가 지팡이와 막대기로 그 양과 의사소통을 하듯이 말입니다.(시23:4)
십계명은 하나님의 ‘사랑의 줄’입니다. 어린아이 같은 자기 백성을 말씀으로 가르쳐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부성입니다.
그렇다면 십계명 안에 가득한 금령들은 다른 어조로 들리지 않습니까? 어린아이들에게 위험을 경고하고, 먹지 말고, 만지지 말고, 가기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하여 경고하시는 자애로운 잔소리(?)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법을 거역하려는 부패한 본성이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만일 홍해에서 갓 태어난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수행해야 할 과업과 책임을 명령하셨다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은 하나씩 천천히 그들에게 걸음걸이를 가르치십니다. 그들에게 해로운 것과 유익한 것을 가르치십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그 백성의 연합된 신분은 이렇게 천천히 그분과의 인격적인 사귐(코이노니아)을 배우고 훈련하도록 ‘광야’라는 공간으로 이끌고 계시는 것입니다. 실로 칼빈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학교라고 부른 것은 적절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죄를 가르치고, 세상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먼저 가르쳐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일그러지고 엄격하고 두려운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애로움과 따뜻하신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호02:14)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시간과 공간, 존재의 경계알기
지난 주에 살핀 코이노니아의 부정적인 경계선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동일한 권면의 말씀을 신자가 위치하게 된 복된 현실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것입니다. 사도가 가르치는 이 코이노니아의 긍정적인 경계는 거듭난 신자들이 속해 있고 머물러야 하는 ‘존재의 경계선’입니다. 하나는 ‘마지막 때’라고 일컫는 시간의 경계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로 일컫어지는 교회, 곧 공간의 경계입니다.
첫째는 시간의 경계선입니다.
▶(요일2:18)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둘째는 공간의 경계선입니다.
▶(요일2:19)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시간과 공간은 모든 피조물들의 존재양식입니다.1) 시간과 공간 없이 피조물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천국에서도 동일하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처음 세상을 창조하실 때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창1:1)고 선언합니다.
첫째 창조에도 그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두 번째 창조(재창조로서의 구속)에도 구원받은 신자들이 거하는 구속의 시간과 공간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이 경계선 밖의 세상(죄인들)과 이 경계선 안의 교회(의인들)는 이미 종말론적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태어나 복음 안에서 구속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비록 우리의 몸은 여전히 이 세상에 속해 있고 신자의 삶의 현실은 여전히 지상적입니다. 우리는 아직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들이 이미 영적으로 새로운 공간과 시간 안에 들어가 있다고 선언합니다.
▶(요0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히12:22-24)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사도는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들이 굳게 거해야하는 경계선을 그어 줍니다. 이 경계선은 그들의 영혼의 안전이 보장된 유일한 안전지대를 확보하는 것입니다.(시12:5)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사도는 지금이 ‘마지막 때’라고 선언합니다. ‘마지막 때’(ejscavth wra)란, 이 세상 역사의 종국을 의미하는 종말론적인 시간을 의미합니다. 이 마지막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역설적이게도 사도는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그 시침(時針)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출현했을 때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고, 이것은 세상나라의 종국을 의미하는 종말론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종말은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오신 것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이 그리스도의 출현을 예고하면서 천국이 가까왔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천국을 가지고 오신 분이시며 그로 인해 세상은 이미 심판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영혼은 이미 심판아래 있는 것과 같다고 경고합니다.
▶(마3:8-10)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그리스도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계22:13)이십니다. 그분은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요14:6)임으로 생명의 현재이십니다. 또한 그분은 ‘부활이고 생명’(요11:25)임으로 종말의 현재입니다. 천국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어 그분 자신이 곧 천국입니다.
▶(눅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The kingdom of God is among you)."
그러므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은 메시야의 표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종말)이 지금 이 땅에 임한 것을 선포하고 시위하는 것이었습니다.
▶보십시오. 그리스도는 종말을 가져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과 구원을 구분 안에서 맞이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사람의 몸을 취하시고 오셨을 때 천상에서는 이 종말의 출현을 찬양했습니다.
▶(눅0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하나님의 영광은 창조와 구속의 목적입니다. 땅의 평화(샬롬)는 그의 피조물들의 완전한 구속의 성취를 의미합니다.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이미 종말은 예고되었고 이미 성취된 것처럼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지상에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를 종말론적인 공동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지금 요한의 공동체는 그리스도에 대한 역사적 경험이 없는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한 번도 그리스도를 만나거나 그분의 일을 목격한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요한의 공동체는 이제 그 종말을 상기시키는 역사의 시침(時針)을 확인합니다. 그것이 적그리스도의 출현입니다. 적그리스도가 출현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앞서 오셨음을 반증하는 증거가 아닙니까? 언제나 짝퉁은 진품을 추종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은 역설적으로 교회가 믿는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분이 가져오신 하나님의 나라를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지만 사도 요한의 회중은 이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그들이 이미 그리스도의 나라 안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거짓 그리스도’ 곧 ‘온갖 이단과 거짓과 오류들’ 앞에서 오히려 큰 확신과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시간의 경계선 안에 있는 신자들의 확신입니다.
▶(요0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일0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시계는 물리적인 시간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시간은 이미 멈춰있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곧 복음 안에서 그 종말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아는 지식이 종말의 끝, 곧 시간의 끝을 봅니다.
▶노아는 120년을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는 항상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하나님의 심판과 종말을 예언합니다. 회개와 믿음으로 초청했습니다.(벧후2:5)(히11:07) 노아는 항상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을 인식했습니다. 그에게는 이미 종말은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의 삶의 뿌리에 놓인 도끼와 같았습니다. 노아는 이 심판의 시간을 미루지 않습니다. ▶(눅17:26-27)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경건의 사람, 에녹을 보십시오. 그도 예외 없이 이 시간의 경계 안쪽(마지막 때)을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오늘이었습니다. 그래서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그에게 300년의 하루는 언제나 종말의 시간이었습니다. 그에게 이미 종말은 시작되었기에 세상과 함께 하루도 살아갈 수 없었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창5:22-24)
해에게서 소년에게
성경의 모든 참된 신자들 곧 지상의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의 시간, 곧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날은 ‘주의 날’이요 ‘심판의 날’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이 세상이 영원할 것이라고 설득시킵니다. 죄인들은 세상을 사랑함으로 시간의 연속을 영원이라 부르지 시간의 단절 곧 종말을 믿지 않으려 합니다.
▶(벧후03:04)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그들은 이 구속의 시간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현재를 갈망할 뿐입니다.
▶넥스트의 리더 보컬인 신해철씨의 노래 중에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곡이 있습니다. 이 노래는 젊은이들을 향한 전형적인 비전메이커의 응원가라고 할 수 있는 노래입니다.
♬눈을 감으면 태양에 저편에서 들려 오는 멜로디
내게 속삭이지
이제 그만 일어나 어른이 될 시간이야
너 자신을 시험해 봐 길을 떠나야 해
니가 흘릴 눈물이 마법의 주문이 되어
너의 여린 마음을 자라나게 할 거야
남들이 뭐래도 네가 믿는 것들을 포기하려 하거나
움츠려 들지마 힘이 들 땐 절대 뒤를 돌아보지마
앞만 보며 날아가야 해
너의 꿈을 비웃는 자는 애써 상대하지마
변명하려 입을 열지마 그저 웃어 버리는 거야
아직 시간이 남아 있어 너의 날개는 펴질 거야.♫
삶과 세상은 결코 인간에게 관대하지도 않고 친절하지도 않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일종의 전사가 되는 경험입니다. 지면 죽고, 계속 전진하는 자는 언젠가 날개를 펴고 비상하게 될 거라고 격려합니다. 저는 젊은이들을 향한 이런 류의 가르침에 불편함을 느낍니다. 저는 이런 인생관을 어두운 낙관주의, 비관적 승리주의라고 부르겠습니다. 세상과 맞서 싸우라는 이런 식의 독려가 조금은 사람들에게 힘을 불어넣을지 모르지만 이 가인(歌人)은 삶의 단회성을 무책임하게 무시합니다. 시행착오는 단 한번뿐인 인생에서는 ‘그래도 되는’ 미덕이 아닙니다. 이 노래의 결론은 그들의 희망과 위로가 얼마나 헛된 소망에 기초해 있는지 보여줍니다. “저 모든 별들은 너보다 먼저 떠난 사람들이 흘린 눈물이야, 세상을 알게 된 두려움에 흘린 저 눈물이, 이 다음에 올 사람들이, 널 인도하고 있는 거지...” 세상에 진 것 같아도 그 실패는 하늘에 별처럼 빛나고, 다음 생에 태어날 그 사람들에 의해 삶은 더 진전되고 나아질 거라는 일종의 예언인 셈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진실은 삶이 단회적이며 영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흘린 눈물과 실패와 좌절이 하늘의 별이 되어 빛나고 다시 다른 생에서 삶은 계속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은 그저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유감스럽지만 삶은 그렇게 영속적이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그의 아이들에게 말합니다.
▶(요일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 왜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지 아십니까? 왜 복음이 사람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되는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불편하기 짝이 없는 진실, ‘삶은 단회적이다!’라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의 기회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찰라같은 세상은 가능성의 공간이 아니라 죄와 비참의 상태로 가득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작동되는 악의 질서와 체계입니다. 여기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습니다. 이런 절망의 공간에서 소망을 노래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이 땅에서 인간의 순수한 욕망들도, 불굴의 의지도, 수많은 눈물들도 사도는 ‘정욕’의 불꽃놀이에 불구하다고 말합니다. 세상이 사라질 때 흔적도 없이 사라질 잔인할 만큼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시간의 홍해 이편에 있는 여러분, 저 애굽의 시간 안에 있는 가련한 영혼들에게 말해주십시오. 나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그 하나님을 알기 전까지, 그리고 나의 삶의 목적과 이유인 ‘하나님의 뜻’을 알기 전까지 인간에게는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요일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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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만이 무시간적, 무공간적 존재이며, 모든 피조물은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한다. ‘시간과 공간은 모든 창조된 존재들의 필수불가결한 존재양식’이다. (바빙크, 개혁교의학 개요,)
▣말씀의 반추를 위한 생각들
▣ 시편으로 기도하기!(피터 버미글리)
시편84편
1. 오 전능하신 하나님,
옛 선진들은 그 시절 당신의 장막을 위하여 지정해 두셨던 그 장소에 나아가려는 소망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그와 똑같은 열망으로 나아갑니다. 곧 교회가 회복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기를, 그리고 경건한 회중들이 합법적으로 모여 당신을 높이는 찬송을 올려드리며, 거룩한 교리를 귀 기울여 듣고, 성례들을 올바르게 받을 수 있도록 당신이 허용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왕, 우리의 하나님이시여, 언젠가 우리가 마침내 그곳에서 기뻐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하므로 우리가 당신에게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의 행복이 무엇이든지 이생에서는 오직 경건한 자의 거룩한 모임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의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하신 아버지시여,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당신이 원하셨던 바로 그 모습대로 우리가 당신의 집을 만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옵소서. 악한 자의 장막에서 오랫동안 거하는 것보다 혹은 이 세상의 온갖 쾌락들로 가득 차 있지만 불법적으로 소집된 곳에서 머물러 있는 것보다, 당신의 집에서 단 하루를 사는 것이 우리에게는 한층 더 행복할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빛이며 성태이시니, 땅 위에서 당신을 영화롭게 하도록 우리를 모아주셔서, 마침내 하늘의 영원한 장막들에서 당신에게 가까이 갈 수 있으리라는 우리의 소망이 자라게 해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