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게네스 (Ὀριγενες, 185년 경 - 254년 경)
오리게네스는 AD 3세기에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활동한 그리스도교 신학자이다. 플라톤 철학에 능통한 철학자 출신이었다. 또 그는 무척 뛰어난 언어 실력으로, 무려 6개의 언어를 대조하여 정리한 성경책 <헥사폴라>를 편집하였다. 이는 후대에 히에로니무스가 히브리어. 헬라어 성경을 민중어인 라틴어로 번역한 것보다 더 큰 공이다. 다만 아쉽게도 현재는 실전되어 남아있지않다. 왜 실전되었을까? 그가 이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단이 되면서 오리게네스의 저작류와 그의 사상을 추종한 신학자들의 책이 모두 불에 타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의 저작은 대부분 라틴어 번역본이나 요약본으로 밖에 남아 있지않는 실정이다.
오리게네스는 분명 뛰어난 신학자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이단적인 사상을 나타내었고, 특히 아리우스파의 효시적인 모습을 보이기도했다. 마치 동전의 양면성을 뚜렷하게 지녔던 신학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 오리게네스의 생애.
오리게네스는 AD 185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알렉산드리아는 항구 도시로 수많은 철학이 유입되기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다. 아버지 리오데네스는 그리스도교에 귀의했다. 그래서 자연스래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교 사상에 빠져든 것 같다.
오리게네스는 피가 한창 끓는 청년 시절.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아버지 리오데네스가 감옥에 가 순교를 하자, 뒤를 이어 순교를 하고자 밖을 나설 준비를 했다. 그러나 남편을 이어 아들을 잃고 싶지 않았던 그의 어머니가 오리게네스의 옷가지와 신발을 모두 숨겨버렸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순교를 하지 못했다.
이후 청년 오리게네스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의 교리 문답 학교에 들어가 수학을 했다. 그리고 얼마후 세베루스 황제 박해 때 클레맨스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되었다. 교리 문답 학교의 교사가 공석이 되자, 자연스래 학교의 수석이었던 오리게네스가 교사직을 맡게되었다. 오리게네스는 지나치게 금욕을 추구했다. 같은 청년 신분인 여학생과 접촉할 때, 성적인 욕구를 없애기 위해 스스로 고자가 되었다.
오리게네스는 여기서 성경을 강해한 책들을 많이 냈다. 그의 책이 라틴어 번역본이나 요약본으로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장문인 것은. 문장을 일일히 자세하게 설명할려던 오리게네스의 습관 탓이다.
오리게네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데메트리우스를 불쾌하지 않게 하기 위해 만사에 조심이었다. 그러나 성직자가 되지 않으면 설교에 제약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팔레스타인 카이사리아 지방으로 내려가 성직자가 되었다. 그러자 데메트리우스는 오리게네스를 불쾌해하며 출교하였다(이미 알렉산드리아에서 황제의 명으로 쫓겨난 적이 있긴하다). 그러자 오리게네스는 알렉산드리아 교리 문답 학교를 버리고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팔레스타인에서 활동을 하던 오리게네스는 250년 감옥에 들어가 고문을 당한 뒤, 3년 뒤 고문의 휴유증으로 티레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2. 오리게네스의 추종자.
오리네게네스는 무척 뛰어난 신학자였다. 오리게네스를 추종한 교부(敎父)들이 몹시 많다. 특히 알렉산드리아 주교였던 키프리아누스는 오리게네스의 책을 부를 때," 나의 스승을 모셔오시오"라고 말하며 존경심을 나타내었다. 장님 디디무스와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는 오리게네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그의 성경 해석법을 거의 사용하진 않았어도 오리게네스의 많은 책을 수집했다(大 바실리우스가 오리게네스의 책을 추천함).
한편 오리게네스를 적대하는 반대자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몹수비에아의 데오토레투스를 꼽을 수 있는데. 그는 오리게네스를 몹시 싫어하였으며 무척 비아냥거렸다. 데오토레투스를 뒤이은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오리게네스를 직접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즐겨한 우의적(友誼的) 해석을 거의 택하지않았다. 한참 뒤의 인물이지만 다마스쿠스의 요한은 <정통 신앙>에서 오리게네스의 사상을 절대 따르지 말아야한다며 혹독한 악평을 하였다.
즉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계가 오리게네스를 중점으로 두 파로 갈렸다는 말이다. 오리게네스 쪽은 알렉산드리아 신학. 데오토레투스는 안티오키아 신학을 형성했다.
3. 오리게네스의 성경 해석.
오리게네스는 우의적 해석을 즐겨 사용했다. 그는 플라톤 철학을 연마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 교리 문답 학교의 교사였기 때문에 학생의 질문에 상당히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 때문에 그의 저작이 라틴어 요약본으로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루한 까닭이다(문득 원문이 훼손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있겠지만. 헬라어 원본과 비교했을때 라틴어 요약본은 그의 메세지를 함축적으로 잘 번역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훼손은 거의 없거나, 심하지 않다).
한편 오리게네스는 구약을 주석할 때 우의적 해석을 많이 사용했는데, 이는 신약의 바울 서신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구약의 도덕적 문제를 회피할려는 노력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는 <여호수아 강론>에서 가장 잘드러나는데, 그는 여리고 학살을 실제 사건이 아니라고 보았다. 오리게네스는 여리고를 누가 복음의 선한 사마리아 사건과 대조를 하며 여리고를 세상의 죄로 해석하였다. 즉 오리게네스에게 여리고 학살은 세상의 죄를 죽이라는 숨겨진 영적 의미다. 이로써 오리게네스는 구약의 사건을 실재하지 않는 기사로 만드면서도, 영적인 의미를 빼내어 해석하는 교묘한 해석 작업을 한 것이다. 이것은 교부들의 눈에 좋게 보일리가 없었다.
몹수비에아의 데오토레투스는 오리게네스의 해석을 따르면, 창조 기사와 아담의 타락.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모두 우의적인 사건으로 실재 사건이 부정된다며 오리게네스를 비난했다. 이후 오리게네스를 존경하면서도 그의 해석을 사용하지 않는 중도파 교부들이 등장했다. 대표적으로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다. 또 한편으로 히에로니무스는 초반기에는 오리게네스를 존경했으나, 후반기에는 격양되게 오리게네스가 이단이라고 주장했다.
4. 오리게네스에 대한 이단 결정.
AD 4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주교와 사제가 작은 논쟁을 벌인 것이, 어느새 황제가 개입해야할 정도로 대규모 논쟁으로 번진 적이 있었다(니케아 공의회). 그 시작점에는 오리게네스가 있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알렌산드로스는 小논문을 발표했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등하다라는 것이 논지였다. 그러자 사제였던 아리우스가 알렉산드로스의 논문을 조목 조목 반발하였다. 이 둘의 근거는 성경도 있겠지만, 단연 오리게네스였는데. 그의 주장을 서로 다르게 해석한 것이다. 무슨 말이나면 오리게네스는 삼위일체를 인정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면서도, 성령과 성자 간 차등이 있다는 주장을 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에 대해 현대 학자들은 오리게네스가 니케아 회의 때 까지 생존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필시 알렉산드로스를 지지했을 것이다고 했지만, 함참 그전에 죽은 고인(故人)이었다. 죽은 자는 아무런 말이 없다. 그래서 몇백년간 오리게네스가 이단인지 말이 많았지만, 성경 해석계의 태조(太祖)격이라 그 누구도 오리게네스를 이단이라고 단언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4세기 말에 사라미스 주교 에피파노이스가 오리게네스를 이단으로 단죄하였고, 뒤를 이어 기회주의자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락투스가 요한 크리소스토모스와 오리게네스를 이단이라고 주장했다.
아무튼 이 사안은 AD 6세기까지 가게되었다. 당시 황제는 유스티아누스였는데, 그는 경건한 그리스도교 교사라는 거룩한 망상(?)에 빠져있었다.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533년 개최한 콘스탄틴폴리스 공의회에서 최종적으로 오리게네스를 이단이라고 파면을 하면서, 오리게네스의 저작과 그의 추종자들의 책이 불에 타게되었다. 아이러니하게 몹수비에아의 데오토레투스의 책도 불에 탔는데, 그 또한 아리우스의 효시로 이단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5. 글을 마치며.
오리게네스의 생애와 그의 영향력을 잠시 짧게나마 알아보았다. 오리게네스는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수많은 영향을 그리스도교 신학자에게 끼쳤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는 무척 뛰어난 신학자였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교 정통 교리 면에서 애매모호한 삼위일체론의 논지를 주장했었고, 윤회설과 비슷한 교리를 가르쳤었다. 거기다 추종자 이집트 수도승들에 의해 수정되거나 잘못 해석되어 오리게네스의 주장이 상당히 왜곡되어졌다. 이런 면을 보여 결국 6세기 황제의 의해 이단으로 파면되는 수치를 맞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의 신학적 영향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그가 이단으로 파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서적이 상당수 현존하고 있음이 그 증거다. 따라서 오리게네스가 동전의 양면성을 지닌 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교부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이단이라는 단순한 평가에서 벗어나서. 현대에 다시 정당하게 그를 재평가하는 것이 옳은 태도일 것이다.
오리게네스는 고대 교부들 뿐만 아니라 현대 그리스도교 신학자. 성도 등 모두에게 재조명되어 다시 훌륭한 스승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