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산은 덩치로 보면 관산성 전투의 현장으로서는 협소하다. 전쟁사 전문가들은 당시 백제·가야·왜 연합군의 전사자 수가 무려 29,600명이라는 사서의 기록을 근거로 신라의 병력은 적게 잡아도 연합군과 비슷했거나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신라와 백제연합군의 병력을 합치면 최소 6만 명 이상이 이 부근에서 혈전을 벌였던 것이다.
▲ 안남면 도농리에 위치한 중봉 조헌 선생의 묘소. 임진왜란 당시 금산에서 칠백의병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렇지만 요즘엔 향토사를 하는 이와 동행하지 않으면 보통 사람들은 그 흔적을 되짚기 어렵다. 이정표는 물론이요, 흔한 추모비도 하나 없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성왕의 죽음은 안타까움만 더한 채 이렇게 묻혀있었다. 그렇지만 얼마 전부터 이를 아쉬워한 옥천 주민들은 성왕을 위해 관산성 근처의 국궁장에서 국궁대회를 열고 있다. 또 지난 봄엔 국궁장에서 성왕 추모제도 지냈다.
옥천문화원에 알아보니 이 행사는 문화원이 아닌 백제사에 관심이 많은 개인들이 십시일반으로 경비를 모아 치른 것이라 한다. 옥천군이나 옥천문화원에도 예산이 책정되어 있지 않아 내년 행사가 열릴지도 알 수 없는 일이라 덧붙였다. 아직 패자인 성왕을 위로할 준비가 덜 된 것일까.
성왕은 비록 패자이긴 해도 백제를 부흥 시킨 인물이다. 또 관산성 전투는 상승하던 국운도 순간의 실수로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신라의 배신에선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는 국제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깨닫게 하는 표본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연을 적은 ‘백제 성왕 사절지’라는 비석 하나 세우는 게 뭐 어렵겠는가. 옥천군의 관심을 기대한다.
▲ 중봉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서당인 이지당. <사진=옥천군청>
자, 살벌한 전투 이야기에 마음이 무거워졌다면 금강으로 가보자. 정지용 시인이 복권되기 전인 1980년대까지만 해도 옥천은 그다지 내세울 것 없는 고을이었으나 그나마 금강 덕에 체면치레를 할 수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는 그래서 큰 인기를 끌었다.
서울서 내려가다 보면 꼭 쉬어야할 지점에 있기도 했지만, 금강 덕분에 당시만 해도 전국에서 가장 풍치 좋은 휴게소로 꼽혔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옥천’이라고 하면 어딜까, 고개를 갸웃하다가도 ‘금강휴게소’라 하면 아, 그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북 장수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은 충북 영동의 양산팔경을 지나 옥천을 관통하며 굽이돌아 대청호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옥천의 9개 읍면 가운데 2/3인 이원·동이·청성·안남·안내·군북의 6개면을 적시고 흐르는 금강은 옥천 자연의 상징이다.
그래서 옥천 여정에서 금강 드라이브는 필수다. 고당리엔 ‘높은벌’이 있고, 합금리엔 정겨운 강마을이 오순도순 펼쳐지고, 청마리엔 삼한시대의 제신탑·솟대·장승이 남아있다. 또 비포장을 지나 지수리에 이르면 독락정(獨樂亭)이라는 정자가 반기고, 그 뒤로 솟은 둔주봉(384m) 정상으로 발품을 팔면 한반도 지형도 감상할 수 있다.
▲ 군북면 석호리 대청호 자락에 세워져 있는 청풍정. 이곳엔 구한말의 개혁가 김옥균과 그를 사모했던 기생 명월에 대한 애절한 사연이 전한다.
만약 금강변을 둘러보지 않는다면 비록 구읍에서 정지용 시인을 만났다 해도 옥천의 절반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길손은 이번 여정에서 금강변에 승용차를 세워놓고 밤을 꼬박 지새웠다. 추석을 앞둔 달은 제법 살이 올랐고, 강으로 쏟아지는 달빛은 그야말로 교교했다. 다리 위에선 밤낚시 나온 가족이 견짓대를 들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고, 강 건너 바위틈에선 사내 하나가 다슬기를 잡느라 랜턴을 들고 강물을 뒤지고 있었다.
투망을 들고 나온 사내는 첫 투망질에 은어 몇 마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는 “이건 잡고기요” 하면서 강에다 도로 휙 던져버렸다. 그는 쏘가리를 노린다고 했다. 원래 전국의 어느 강이든지 투망은 불법이다. 걸리면 벌금도 수백만 원에 이른다. 이 옥천 고을에선 투망어업 허가를 받은 사람들만이 투망질을 할 수 있다. 그들은 관광객들의 착오를 막기 위해 항상 ‘투망어업’이라 쓰인 조끼를 입고 투망을 던진다.
투망허가 조끼를 입지 않은 사내는 자신의 불법이 찔리는지, 길손에게 괜히 투망을 하면 벌금이 얼만데 자신은 근처가 고향이라 괜찮다는 둥, 그럴 바엔 아예 투망을 만들지 말라는 둥 이런저런 이야기를 실없이 풀어놓았다. 외롭게 객지생활을 하는 사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시간이 흘러 달이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했는데도 사내는 쏘가리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달이 밝으면 고기가 안 나오지요.” 그러고 보니 다리 위에서 견짓대 낚싯줄을 풀었다 감았다 하던 이들의 살림망도 거의 비어있었다. 사내는 달이 너무 밝다며 또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냥 산책만 즐기는 길손에겐 이 달빛이 좋았다. 내일모레가 추석이라 해도 아직 푸른 기운이 남아있는 산기슭의 나무이파리들은 달빛을 받아 반짝거렸고, 강물은 화려한 황금비늘을 두르고 있었다.
새벽 무렵. 또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물안개. 새벽이 가까워오며 피어오른 물안개는 서서히 달빛도, 산도, 강도 모두 감추었다. “제기랄!” 여명이 밝았을 때 사내는 투망에 묻은 물안개를 툭툭 털어 자신의 트럭 뒤에다 내던지듯 실었다. 떠나려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밤새 달빛을 받으며 도란거린 사이 아닌가. 재미 좀 봤냐고 물었다. 사내는 대답 대신 빈 살림망을 가리켰다. 사내의 푸념 같은 엔진 소리가 물결 따라 흘러가자 강변은 다시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