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지코 여행3 - 메카리코엔 공원의 노퍽광장에서 간몬 해협을 바라 보다!
8월 12일 시모노세키 에서 페리를 타고는 5 ~ 6분 만에 모지코 門司港 항에 내려서 30분
가량을 걸어 드디어 간몬 해협 에 위치한 메카리 코엔 和布利 公園 공원에 도착합니다.
공원은 간몬해협 을 내려다 보는 언덕 위에 있으며 전망대 테라스 에서는 시모노세키 까지
볼 수가 있고 세계평화 파고다 외에 메카리 신사 도 바닷가에 접해있는 곳 입니다.
우리 부부가 도착한 곳은 공원 아래 노퍽광장 ノ-フォ-ク 廣場 인데, 미국 버지니아주
노퍽시 의 이름을 따서 붙인 광장으로.... 간몬 해협의 경치 를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외국의 도시 이름을 딴게 특이한데, 하기사 뭐 우리나라와 중국도 같은 이름의 도시가 있으니
호남 에다가 평양, 강릉, 광주, 청주, 전주, 동래, 함양, 양양, 단양, 영주, 안산 등 인가 합니다.
밤에는 조명 이 들어온 간몬대교의 야경 은 최고로 친다는 곳이지만.... 지금은 낮이라
간몬 해협 건너 시모노세키의 스카이라인 을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시모노세키 야경 은 이곳 말고도 바다 건너 저편 히노야마 코엔 火の山 公園 에
올라도 간몬 해협 関門海峽 과 모지코 門司港 까지 절경 이라고 합니다!
노퍽 광장 에서 간몬 해협 関門海峽 을 바라 보노라니..... 한나라, 당나라, 명나라는 물론
이고 청나라 중기인 18세기 까지만 해도 동양이 서양에 뒤질바 없었으나.....
산업혁명에 성공한 유럽에 1840년 아편전쟁 패배 로 동양의 맹주 청나라 가 무너집니다.
그리고 10여년 후에 1854년 미국의 페리 제독 이 흑선을 이끌고 태평양을 넘어와
도쿄만을 봉쇄 하자 , 함포사격 그 막강한 무력 앞에 무릎을 꿇고는.....
260년간 이어온 쇄국정책을 폐지 하고 개항 을 받아들인 에도의 도쿠가와 막부 라!!!
서양 오랑캐(미국) 에게 일본이 무릎을 꿇다니.... 일본의 혼이 더렵혀 졌다면서 그게 분하다고
일본 270개 번 중에서 조슈번 등이 尊王攘夷 (そんのうじょうい, 존왕양이) 를 외치며
무진전쟁 반란 을 일으켜서 260년간 지속된 에도 막부를 타도하는 "메이지 유신" 을 합니다.
조슈번(야마구치) 과 사쓰마번(가고시마) 에 히젠번과 도사번 5천명 반란군은 교토에서 1만 5천
도쿠가와 막부군을 쳐부수고 에도로 진격후 동북일본과 북해도 하코다테 전투까지 승리해
신정부를 세웠으나... 결국 서양의 힘을 인정 하고 이토 히로부미 등 유신의 주역들은 배를
타고 태평양과 대서양 을 건너서 2년간 미국과 유럽을 시찰 하며 서양의 문물 을 도입 했지요!!!
영어등 수천개 단어를 한자로 번역 하니 국어, 영어, 수학, 과학, 사회, 정부, 국민, 민족 에다가
민주주의, 수도, 자동차, 자전거, 전기, 기차, 철학, 외과, 주식회사, 사장, 자유, 개인, 낭만...
중국은 그 전부터 따로 번역했으니 일본이 번역한 단어 기차는 화차 로, 자동차는 기차 로,
주식회사는 유한공사 로 사장은 총경리 로 지하철은 디테 로 엘리베이터는 전제 로 번역합니다.
또 일본은 개항후 무역회사 를 세워 중국의 "東道西技 동도서기" 처럼 "和魂洋才
화혼양재" 를 외치며 서양문물 을 받아들이던..... 여기 19세기
“개화기의 현장인 모지코 門司港(문사항)” 에 서니 불현듯 떠오르는게 있습니다!
여기 북규슈 고쿠라 동쪽 모지코 門司港 에 주둔하던 일본군 제 14 연대 병사들은 117년
전인 1907년 7월 25일 바로 이 항구 모지코에서 배에 올랐던 것입니다? 그들은
다음날 부산에 상륙 하였고, 닷새뒤 1907년 8월 1일 서울의 조선 군대가 해산 된후
전국 8 군데 주둔한 조선군 진위대 (250명씩 총2천명) 를 해산 시키는 임무 를 맡았습니다.
8월 1일 통감부는 조선 중앙군 6천명을 해산 시키기로 하고 사전에 조선인 연대장과 대대장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서 당일 맨손으로 집결 하라 하니..... 대부분의 조선군은 시키는대로
3달치 월급을 은사금으로 받고 해산 했으나 1연대 1대대대장 박승환이 자결 한 것을 계기로
고급장교는 몸을 사렸으나 하급장교와 하사관과 병사들이 격분해 무기고를 부수고 무장을 합니다.
그러자 2연대 1대대 병사중 일부 가 되돌아오니 1천명 으로 일본군은 9중대와 10중대가 출동하고
7중대와 12중대가 달려와 남대문 문루에 기관총 을 설치하고 사격하니... 2연대에 이어 1연대
1대대도 항복 하는데, 조선군은 70명이 전사하고 100명 부상 그리고 500명이 포로 가 됐으며
3백명이 탈출하여 도망치면서 시가전 이 있었는데, 일본군 피해는 4명 전사에 30명 부상 입니다!
조선군이 670명 희생자 를 낸 반면에 일본군 희생자는 34명 으로 차이가 큰데 일본군의 무력은
1875년에 증명됐으니.... 강화도는 1866년 프랑스 병인양요, 1871년 미국 신미양요 에 이어
1875년 일본군함 운양호의 침범 을 받는데, 조선군 초지진이 포격하자 대포 2문을 장착한
운양호 는 초지진을 초토화 하고 영종진에 도착하여 포격한 후에 육전대 22명을 상륙 시킵니다.
첨사 이민덕이 이끄는 450명 조선군은 대포와 총을 쏘았으나 22명 일본군 육전대는 대포 2문 지원사격
으로 뻘밭에 상륙해 험준한 성벽을 기어오르니 조선군은 전사 35명에 포로 16명을 남기고 도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