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소년 시절 때부터 인생의 후반기라는 이때까지, 그에게는 변하지 않는 가치관이, 인생관이 있다. 그의 글을 읽어보기로 하자.
”선비처럼 읽기와 쓰기로 만족하는 여생을 보낸다. 하지만 독서를 범처럼 무서워하는 아내는 재미 있는 일도 많을텐데 하필이면 골치 아픈 수필 창작에 매달리느냐고 비아냥거린다. 그래도 이게 내 할 일이라며 가는 길을 바꿀 생각은 없다.
밥도, 돈도 안 되지만 이유 없이 좋아서, 읽고 쓴다. 시답잖아 보이지만 만족하다 보니 어렴풋이나마 행복이란 게 감이 잡힌다. 만족하면 행복하고, 행복이란 만족이란 일념으로 서재라는 좁은 공간을 지킨다.“
나는 이 말에 공감하면서, 아픈 기억도 떠올려 본다. 문학을 한다면 김소월이어야 하고, 이광수이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하는 말 때문이다. 내가 내는 책을 두고, 읽지도 않을뿐더러, 곧장 쓰레기 통으로 들어갈텐데, 책을 왜 내어, 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가 만족하면 행복이다. 나는 글쓰기에서 행복을 느낀다.‘며, 그의 말로 나 자신을 다독거린다. 이것이 팔리지도 않는 책을 내는 나의 변이었다. 이것만 해도 그는 수필작가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다.
나는 수필 ’극과 극‘이, 그가 말하는 ’인생 후반기‘의 의식과 수필세계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하여 수필의 전문을 옮겨왔다. 그가 사는 모습과, 그의 대척점에 있는 아내의 사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아내의 생활을 수용한다는 내용이다. 날이 선 사회비판적인 요소들이 많이 완화되었음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삶에 자신이 만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의 수필세계에 변화를 일으키게 한 요인은 무엇일까? 그의 말을 그대로 옮겨보자.
”아버님의 작품집만은 대를 이어 보관하겠다,는 며느리의 말에 귀가 솔깃해져 여섯 번 째 수필집 상재를 서두르게 되었다.”
그가 말하는 ’인생 후반기‘에 그에게 나타난 크다란 변화는 아무레도 그의 가족에게서 찾아야 하겠다. 그는 안동의 농촌 마을에서 가난한 유년기를 보냈다. 힘들게 일하는 어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등의 가족과 지금 작가가 꾸린 가족의 분위기는 다르다. 향수 속의 유년기 가족이 그리움의 대상이지만 지금의 가족관계는 강한 애정으로 연결되어 있고, 만족과 행복을 주고, 현실의 대상이다. 이런 관점에서 작가를 평한다면, 그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다. 성공이 나와 가치관이 다른 사람도 수용할 수 있는 아량이 생기게 했다고 생각한다. ==>7
일곱 번 째의 수필집은 지금까지 써온 수필을 골라서 실은 선집(選集)이다. 어쩌면 이 수필집만 읽으므로 최중수의 수필세계를 어느 만큼은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선집보다 수필집을 더 선호한다. 선집은 작가가 작품을 선정함으로, 독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만 고른 점도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생각하는 작품세계를 읽어내는데는 더 적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평글은 평글을 쓴 사람의 사유세계임으로 굳이 작가의 사유를 읽고, 그의 사유세계를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곱 번 째의 수필선집도 건너 뛰기로 하겠다.
그러나 수필집을 통해서,최중수가 직접 자신의 수필작법과 수필론을 술회한 글이 있다. 그 글을 읽으봄으로 그의 수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여기에 그 글을 가져와 보겠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수필의 소재나 주제는 직접 체험의 진솔한 고백으로만 알고 있는 수가 많다. 그래서인지 소재 선택도 읽기에 부담이 없는 생활 주변의 이야기나 자기 현시 일변도의 내용이 많다.”
“직접 체험이 아닌 간접 체험의 소재라 해도 수필의 범주에 속할 수 있다는 독자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수필가가 쓴 글이 재미가 없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재미에 치중하다 보면 문학성이 결여되고, 문학성에 중점을 두다 보면 흥미가 없어지는 것처럼 말한다. 누구의 입맛에 맞춰 글을 써야 할까. 이런 고뇌에 빠질 때가 있다.
문학성이 있는 글이라고 재미가 없으란 법이 없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아무리 수필이라고 해도 100% 사실로 그리기는 어렵다. 사실을 바탕으로 쓰는 게 수필이지만 악의적인 내용이 아니라면 소재에서 약간 벗어난 얘기 쯤은 수용했으면 한다.”
이 말은 읽기에 따라 오해를 불러 올 수도 있으리라 싶다. 그러나 내가 읽은 최중수의 수필에서 그가 사실에서 벗어난 이야기도 하였는지 모르지만, 거짓이라는 느낌을 받은 것은 없다. 그의 수필쓰기에 자기의 수필론을 잘 적용해서 그런지는 모를 일이다. 앞에서 말한 간접체험에 자기 나름의 해석을 하는 정도로 이해하기로 했다.
어쨌거나 그는 수필에서 ’재미‘라는 것을 말했다. 그 부분은 공감한다. 수필의 구상 단계부터 실재로 이야기 만들기에서 재미 있게 표현하는 것을 염두에 두어라는 뜻으로 알겠다.
여덟 번 째의 수필집은 2022년에 발간한 ’그게 궁금하다.‘ 이다. 그의 머릿글을 보면 코로나로 대한민국이 마스크를 하고 엎드려 있을 때 호흡기가 좋지 않은 작가도 방안에 칩거하여 쓴 글로 엮었다고 하였다. 여기서도 작가는 늘상 해온 말을 되풀이 하고 있다.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장난감으로 노는 아이처럼 읽기와 쓰기로 지낼 요량입니다.‘ 라고 하였다. 최중수의 수필은 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이 쓴 글이 절대 아니다. 그는 수필에 삶의 행복을 건 사람인데, 아이들의 놀이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나는 그의 2022년도에 발간한 수필집에 관심을 가졌다. 왜냐면 이 수필집은 그가 가장 최근에 발간한 수필집이기 때문이다. 1996년에 발간한 첫 수필집부터 그의 글을 보아 온 나로서는, 최근의 수필에서는
어떤 변신을 하였을까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수필집은 다섯 장(章)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첫 번 째가 ’백도가 익을 무렵‘이었다. 나는 첫 장에 실린 몇 편의 글을 읽고 실망했다. 왜냐면, 과거에 대한 향수심리가 여기서도 중심 주제였기 때문이다. 그의 글쓰는 솜씨가 나빠졌다는 것이 아니다. 아니 더 세련된 점도 있었다. 요약하면 첫 수필집에서 쓴 형식과 다르지 않았다. 그에게서 새로운 수필 기법 내지 내용의 전개를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초기 작품이 유년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주제였다면, 이번에는 과거와 오늘을 비교하면서 옛날이 그립다는 식으로 전개한 것이 다른 점이다. 향수심리를 이용하면 현대사회를 비평하는 글일 것이다. 그러나 향수심리라는 큰 틀로 묶어버리면 초기의 작법으로 되돌아가버렸다는 생각이다. 내가 최중수의 수필세계를 조명하면서 일관된 흐름을 보이는 것은 향수심라고 했다. 내 말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는 것처럼 옛날을 그리워한다. 백도 이야기를 통해서 자연무위의 야생화를 좋아한다는 것이나, 노인이면 겪어야 하는 사고나 질병 이야기도 상투적이어서 참신하지 않다. 이런 이유로 실망했다는 것이지, 글솜씨가 나빠서 실망한 것은 결코 아니다.
두 번 째 장에서는 오늘의 사회 문제를 다루었다.
시골이 아닌 도회지에서 살아가고 있는 작가의 사람 사귀기에서, 노부부의 가정 생활, 부모와 자식 사이에 일어나는 문제들, 아이들의 교육에 어머니의 지나친 간섭 등등등을 다루었다. 구 세대인 우리의 눈에 부정적으로 비친 것은 당연하다. 이런 문제는 그의 수필을 읽지 않더라도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내용들이다. 일반화되어 있는 내용이나 주제를 수필로 쓰기는 어렵다고 한다. 왜냐면, 수필은 감성을 자극하여 감정을 움직이게 해야 하는데,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에는 독자들이 쉽게 감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독자가 쉽게 감동받지 않는 내용으로 감동하게 하는 것은 작가의 능력이다. 독자들이 생각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이야기 하기, 독자들이 몰랐던 사실을 일깨우므로 감동을 받게 한다. 이것을 ’지적 감동‘이라고 하였다. 수필은 ’지적 감동‘을 활용하라고 하였다.
최중수의 수필세계를 말하자면, 그의 가치 판단이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가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인품을 갖추었다고 하겠다.
세 번 째 장에는 코로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코로나는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하였던 질병이었고, 국가의 방역 대책으로 국민들이 많은 고통을 겪었다. 이때 발간된 수필집은 거의 대부분이 코로나를 다루었다. 최중수의 수필집에도 코로나 이야기가 많다. 코로나 때문에 바깥 출입이 제한되어서 글쓰기를 많이 한 탓인지,, 여기서는 글쓰기의 고뇌를 다룬 내용도 많다. ’양산을 든 남자‘에서는 노인병인 백내장에 따르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이것도 새로운 내용은 아니라고 하겠다. 그에게는 고통스런 경험이지만 우리 노인이 일상사에서 흔히 겪는 일을 수필로 표현하였다. 너무 흔한 내용이라서 독자의 시선을 끌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독자의 시선을 끌려면 그만의 독특한 내용이 담긴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최중수의 글을 떠나서, 이때의 수필에 코로나 이야기가 왜 많을까, 라고 생각해보았다. 낯선 경험이었으므로, 작가의 감성에 충격으로 다가왔고, 때문에 많은 글이 발표되었으라고 본다. 개개인이 코로나를 경험하는 내용이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50보, 100보 정도 차이라 여겨진다. 그렇다면 내가 쓰는 코로나 이야기는 다른 작가가 쓴 이야기와는 100보다 더 멀리 보이도록 조금 달라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다른 사람과 별다른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차이가 없는 이것 또한 최중수의 수필세계이다.
그러나 수필이 ’지적 감동‘을 준다는 캐캐묵은 이론을 다시 꺼낸다면, 코로나를 일반인이 겪는 보편적인 경험을 피력하는 것을 넘어서서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였으면 싶다.
그 외에는 인간사에서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었다.
그렇다면 세 번 째 장에서도 신선한 소재와, 남과 다른 주제를 드러낸 것은 없다고 하겠다. 이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의식세계를 최중수도 공유한다는 것이 최중수의 수필세계이라는 것이다.
네 번 째 장은 개인의 이야기보다는 국가의 문제, 종교와 테러 문제 그리고 국가 정책이라고 해야할 문제를 다루었다. 그리고 정쟁 이야기도 다루었다. 아마 공직 생활을 오래 하였으므로 친숙한 문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독자에게는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보기로, 자연재해, 공해, 미세 먼지 등은 국민을 통치하는 국가에게는 중요한 문제이지만, 일반 독자들에게는 자신의 문제로 느껴지는 강도가 약하다. 일반적으로 이런 소재로 글을 쓰면 컬럼 글이 되기 싶다고 하였다. 이럴 경우는 조금 가공을 하더라도 국민보다는 개인화 하여 더 많은 독자들이 관심을 가지도록 글쓰기를 해야 하리라.
다섯 째 장에서도 어려운 인간사 이야기도 나오지만, 코로나 이야기가 많다. 여기서 최중수의 수필세계를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세계를 최중수도 공유한다고 하는 것이 무난할 것 같다. 아쉬운 점이라면 수필은 개인의 이야기이고, 개인의 독백 문학이라고 하기 때문에 개인으로서 그만의 사유세계가 표현되었으면 싶다. 그만의 사유세계가 수필가의 수필세계가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소개한 그의 수필관을 여기에 다시 가져와 보면, 수필의 소재로 직접 체험이 아닌, 간접 체험도 가능하다고 하였다. 문학성도 중요하지만, 글 읽기에서 재미를 주는 것도 강조하였다. 간접 체험은 ’지적 공감‘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코로나 이야기에 지적인 요소도 가미하여 좀 더 재미있고, 읽을거리가 있는 수필을 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본다. 이러한 그의 수필관으로 글을 쓴다면 그만의 수필세계를 구축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코로나 뿐만아니라 그가 다룬 여러 사회 문제를 소재로 하는 수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만의 수필세계를 구축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