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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요한이 감옥에 갇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15 말씀하시기를 “그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도다.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시니라.
마가는 갑자기 그리스도의 사역 시작 부분으로 건너뛰는데, 주의 사역은 요한의 투옥 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막 6:17-20에 나오며 해당 본문 주석을 하면서 설명하겠다. 이 본문에서 여러분이 알아야 할 핵심은 요한의 사역이 실질적으로 끝났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광야의 시험에서 돌아오셨을 때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냈고(요 1:35-37), 요한이 헤롯에 의해 끝내 투옥될 때까지 그의 사역은 계속 줄어들고 그리스도의 사역은 증가되는 양상이다(요 3:30).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시간적 순서로 말하자면 막 1:14의 상황은 요한복음 1장 끝에서 4장 끝까지의 일들과 일치한다.
이제 예수께서 본문 14절에서 전파하시는 내용을 보라: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 이 복음은 현재 여러분이 믿고 구원받는 그 복음이 아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행 20:24)이라 불리며 바울은 그 복음의 골자에 대해 고전 15:1-4에 명시해 두었다. 그 내용의 골자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장사됨, 부활에 대한 성경적 사실들이다. 예수께서는 그런 복음을 막 1장에서 전파하신 게 아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전하신 복음은 무엇이었나? "그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도다.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여기에는 피의 대속, 장사됨, 부활, 그에 대한 성경적 진술들은 전혀 나와 있지 않다.
물론 여러분은 본문을 영적으로 적용할 수는 있는데 특히 말미 부분의 회개와 복음을 믿으라는 초청에 대해서 바울의 서신서들에 나타난 교리적 바탕에서 영적으로 적용 가능하다. 마태, 마가, 누가, 또는 요한복음의 시기 동안 그 누구도 로마서에서 빌레몬서에 기술된 교회시대 교리를 알지 못했고 그리스도께서는 막 1장에서 아직 죄인들을 위해 죽으시지 않았다. 게다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예고하신 말씀들도 누군가의 죄들을 위해 죽는 교리와 연결되어 있지는 않았고 최후의 만찬 자리에 가서야 그것이 드러난다(마 26:28). 예수께서는 막 1장에서 자신이 죄인들의 죄들을 대신해서 죽으시고 그들을 의롭게 하기 위해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여기 막 1:15에서 가르치신 내용과 마 4:17의 같은 설교를 비교해 보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도다. 너희는 회개하고." 이 부분 때문에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이 같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 둘이 다르다는 것을 성경에서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첫 번째 차이점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하늘이 아니고 하늘은 하나님이 아닌데, 여러분이 범신론자가 아니라면 그렇게 믿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창조하신 분인데 새들이 날아다니는 첫째 하늘이건(창 1:20) 별들이 떠 있는 둘째 하늘이건(창 1:15-17)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셋째 하늘이건(고후 12:2-4) 모두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둘째, 성령께서 이 두 왕국에 대한 성경적 정의를 내려 놓으셨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 정의는 롬 14:17에 나온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즉 그 나라는 여러분이 입에 넣을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다만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이라."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나라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기 때문이라"(눅 17:21). 그렇다면 그 나라는 외적, 가시적 왕국(눅 17:20)이 아니다.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가려면 먼저 중생, 곧 거듭나야 한다(요 3:5-7).
천국은 그와 같지 않다. 천국에 대한 정의는 예수께서 "침례인 요한의 때로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폭력을 겪고, 폭력을 쓰는 자들이 힘으로 그것을 차지하느니라"(마 11:12)라고 내리셨다. 이 왕국이 폭력을 겪고 힘으로 탈취될 수 있다면 그것은 영적인 나라가 아니다. 천국은 칼과 곤봉, 창, 방패, 활과 화살, 미사일 같은 물리적 무기로(예. 고후 10:4) 탈취될 수 있는 왕국이다.
이 문제를 요약 정리하자면 예수께서는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를 같이 전파하셨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주께서 두 왕국의 왕이셨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장차 성령을 통해 자신의 영적인 몸 안으로 들어올 자들을 위해 영적 왕국을 약속하셨다. 또한 주께서는 자신의 영적 왕국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물리적 왕국도 약속하셨다(마 6:33). 천국은 구약 유대인들에게 거듭 약속되었던 왕국이다(이를테면 사 2, 65-66장; 슼 14장; 시 2, 110편을 읽어보라). 천국의 수도는 예루살렘이 될 것이며(마 5:35) 그것은 새 예루살렘이 아닌 땅의 도성이다(겔 48:30-35 참고. 계 21:12-17).
그리스도께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 두 왕국은 "가까이" 있었는데 그 두 왕국의 왕이신 분이 거기 계셨기 때문이다. 침례인 요한과 예수께서 하신 설교를 듣고 그 유대인들이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메시아로 믿었더라면 주께서는 그들을 먼저 영적인 왕국에 집어넣으셨을 것이요, 그 다음 로마의 카이사를 쫓아내시고 이 세상의 주권을 자신에게 돌리셨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은 주를 거절했고 그들은 백성을 선동하여 주를 대적하게 했다. 그로 인해서 문자적 물리적 천국은 2천 년간 연기되었으며 천국 대신 바울이 가르친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만 이 시대에 남겨지게 되었는데(행 20:25, 28:23, 31) 죄인은 부활하신 구주를 믿고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순종할 때 그 나라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또한 물리적으로 나타날 때가 있을 것인데("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요 3:3) 천국이 나타날 때 그렇게 될 것이며(또한 천국은 폭력과 무력으로 임하게 될 것이다 - 계 19:11-15) 이 시대 성도가 재림 이후에 자신의 유업을 얻기 위해서는 성별된 삶과 섬김, 구주를 위한 고난을 통과해야 한다(행 14:22; 고전 6:9-10; 갈 5:19-21; 딤후 2:12).
이 모든 것들은 성경이 그 본문에서 문맥적으로 말씀하시는 바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독자들에게는 명확한 사실이다. 이 분명한 교리를 혼동시키려 하는 자들은 "히브리 원문"이라던지 "헬라어 원문"으로 달려가서 그것들을 근거로 문맥과 다른 주장을 하면서 그들의 장난감 목마 같은 교리를 입증하려 애쓴다. 이번 경우에 그들이 내세우는 그 "목마"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당나귀 같은 존재로 드러난다.
16 주께서 갈릴리 해변을 걸어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셨으니, 이는 그들이 어부임이라.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들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시니,
18 그들이 즉시 그물들을 버려 두고 주를 따라가더라.
19 주께서 거기서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보셨는데, 그들도 배 안에서 그물들을 깁고 있더라.
20 주께서 곧 그들을 부르시자, 그들은 자기들의 아버지 세베대를 일꾼들과 함께 배에 남겨 둔 채 주를 따라가더라.
본문은 첫 번째 제자들이 부름받는 장면인데 주께서 처음 지명하신 네 제자들은 모두 직업 어부였다. 예수께서는 뜻없이 그렇게 하신 게 아니다. 주께서는 그 어부들을 부르시면서 그들을 "사람들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물고기와 유사성이 있다는 얘기이다(합 1:14).
근본주의적, 보수주의적 "창조과학자들"은 창 1:2, 7:11에 대해 설명하면서 구원받지 못한 과학자들이 납득할 수 있게 하려고 자연과학적 묘사, 즉 대기 위의 얼음 덮개, 지표 밑의 물층 같은 설명들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 구절에서 그 창조과학자들이 놓치고 있는 우주의 형태에 대한 위대한 계시를 찾아낼 수 있다. 알다시피 물고기는 물 아래 산다. 인간들이 물고기와 같다는 것은 이제까지 지구상에 살았던 모든 남녀노소 사람들이 대서양, 태평양을 합친 물을 양동이 속의 물 한방울로 여겨지게 할 정도로 거대한 물층 아래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 우주적 물층은 창 1:2에 최초로 등장하는데 지구는 그 홍수 안에 잠겨 있다가 밖으로 나왔던 것이다(벧후 3:5-6을 해당 주석서에서 찾아보라). 창 1:6-8에서 하나님께서는 "창공"을 만드시는데 주께서는 그것을 "하늘"이라 부르시면서 그 아래 있는 지구의 물들(대양, 강, 지하수)과 창공 위에 있는 물들을 나누신다. 창공 위의 물들은 대기권의 구름, "얼음 덮개" 등과 전혀 무관한 것인데 이는 성경에서 창공이란 해, 달, 별들이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창 1:14-16). 어떻게 이것을 확신할 수 있는가? 시 148:3-4을 보라.
"해와 달아, 너희는 그를 찬양하라. 너희 모든 빛나는 별들아, 그를 찬양하라." 여러분은 문맥을 따라서 읽고 있는가? 이 하늘은 구름이 있는 첫째 하늘이 아니며 둘째 하늘, 곧 우주 공간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실수로 이렇게 말씀하신 게 아닌데 다음 구절을 보라: "너희 하늘들의 하늘들과 하늘들[복수] 위에 있는 너희 물들아, 그를 찬양하라."
이 물들은 알파 드라코니스 별자리 너머에 있다. 이것에 대해 욥 38:30, 계 4:6, 15:2에 묘사되어 있다.
그렇기에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자동적으로 침례교도가 되는 셈이다. 그들은 물 밑에 잠겨 있는 것이다. 또한 "물고기"인 여러분이 "그 위대한 어부"(베드로를 말하는 게 아니다)께 잡혀서 물 밖으로 올라간다면 여러분은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다. 따라서 물침례를 받을 떄 물 아래 내려가는 것(죽음)과 물 밖으로 나오는 것(부활)은 여러분이 장차 어느 날 "유리 바다" 위의 처소로 휴거되리라는 것(계 4:1-6)을 모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침례와 그의 첫 번째 제자들이 어부였다는 사실 역시 하늘들 위의 물층에 대해 암시하는 것이다.
직업 어부들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거친 부류에 속한다. 베드로는 말투가 거친 사람이었고 야고보, 요한은 성질이 고약했다(막 3:17; 눅 9:54).
나는 코이 래필드라는 친구를 알았었다. 그는 열다섯 살 때 가출하여 어촌에 살면서 55살까지 어선을 탔다. 그가 설교자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물을 떠나지는 못했다. 그는 여전히 배를 타고 나가 밤새 고기를 잡곤 했다. 그리고 웨인 먼드라는 친구도 있다. 그는 앨라배마에서 어부 일을 했다. 그는 구원받고 설교자로 부르심 받았다. 그는 북부로 가서 한동안 목회를 했지만 결국 앨라배마주 본 세쿠어로 왔고 본 세쿠어 강에서 직업 어부 일을 하면서 목회를 겸하여 했다.
그 친구들은 모두 칼을 휴대하고 다녔고(아마도 고기 손질을 위해서) 칼부림을 벌인 적도 있었다. 그들은 여자들의 영향을 받지 않고 밖에 나가서 거칠고 더러운 일을 하고 다녔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그리고 안드레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너희는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들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17절). 만일 내가 여러분의 "수질"을 점검하여 진짜 그리스도의 제자인지 아닌지 확인하고자 한다면 무엇을 할지 아는가? 나는 여러분의 교리적 입장을 확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날 교리적으로 총열처럼 곧은(동시에 총열처럼 텅 빈) 교회들이 있지만 여러분이 그 담임 목사들과 5분만 대화해 보면 그들은 자기들이 믿는다고 공언하는 것들의 절반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어떤 교회에 다니고 있는지, 혹은 어떤 "정통 교리의 보루"인 신학교를 졸업했는지 묻지 않을 것이다. 많은 크리스찬들이 그들의 사역을 시작하는 동기가 "관심을 받고 싶어서"이다. 그들은 명성을 얻고 싶어서 사역에 발을 들여놓는다. 그들은 "구령 잘 하는 선교 단체"를 보면 그 조직과 관련을 맺고 자신의 이름을 명단에 올려놓은 채로 자기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구령자 행세를 하려 한다. 실제로 그렇다! 밥 존스, 리버티, 테네시 템플, 바이올라, 무디, 클리어워터, 그리고 펜사콜라 기독교 대학의 교수들 중 많은 이들이 근래 20년 간 단 한 명의 혼도 그리스도께 인도하지 않았지만 자신은 그 대학에서 일한다는 이유로 "구령자"인 체 명성을 취하고 있다.
여러분이 진정한 구령자인지 알고자 한다면 나는 한 가지만 점검해 볼 것이다. 여러분은 사람들을 낚는 어부인가? 여러분은 적극적으로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일을 하고 있는가? 나는 여러분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영접시키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여러분이 구령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다면 그리스도의 진짜 제자가 아니다.
내가 밥 존스 대학에서 쓴 학위 논문 제목은 "사도행전에 근거해서 살펴본 실천 신학의 역사"였다. 그 논문의 골자는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 죄인들을 이겨오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면 그가 어떤 믿음의 고백을 하더라도 정통 신앙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사람이 "원본"에서 명한 일들을 하고 있지 않으면서 지난 1,900년 동안 누구도 본 적 없는 잃어버린 문서 더미들(원본 성경)을 믿는다고 공언한다면 그 고백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 논문은 밥 존스 대학에서 나를 지도한 교수들을 겨냥한 것이었는데 이는 그들이 정확히 그렇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복음주의 학교를 세운 건립자(밥 존스 시니어)의 명성 뒤에 숨어서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 박사 학위 심사를 받는 그 시간에 나는 평생 잃어버린 혼들에 대한 부담감을 가져본 일이 없고 한 명의 죄인도 그리스도께 인도해 본 일이 없는 교수들로부터 "밥 할아버지"가 학부에서 가르쳤던 것들, 곧 유아 세례, 무천년주의, 칼빈주의 5대 강령 등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 교수들은 "근본주의자들"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에 전혀 부족함 없는 자들이었다(여느 구원받지 못한 카톨릭 교도처럼). 그들은 자기들에게 봉급을 주는 학교보다 더 높은 최종 권위를 갖고 있지 않은 인본주의 배교자들이었다. 이런 일은 밥 존스 대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미국의 많은 교회들이 신학은 다를지라도 그런 크리스찬들로 넘쳐나고 있다.
여러분은 "사람들을 낚는 어부"인가? 여러분은 잃어버린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어떻게 하고 있는가? 여러분이 하는 일이라는 게 교회 좌석에 가서 앉아 일주일에 1-3번 설교를 듣는 것 뿐이라면 비록 구원받았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닌 것이다.
구약 예레미야서에 "사람들을 낚는 어부"에 관한 흥미로운 참조 구절이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유대인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약속의 땅에서 끌어내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렘 16:16에 보면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많은 어부들을 보내리니 그 어부들이 그들을 낚을 것이며..."
막 1:17에 따르자면 그것은 구령자들이 애써 유대인들을 주께 이겨오는 것의 예표가 된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는 주께서 유대인들에게 "어부들", 곧 베드로, 요한을 포함한 열두 사도들을 보내신다. 그 후에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이 스테판을 돌로 치게 하는데 그러자 주께서는 사도 바울을 구원시키시고 그를 이방인들에게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들"(행 9:15)에게도 보내신다. 바울은 소아시아, 그리스, 로마로 가서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롬 1:16) 복음을 전파한다. 그는 유대인들의 모임을 찾아다니며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보다 먼저 복음을 전한다. 사도행전 끝에서 흩어진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거절하게 되고 그러자 성령께서는 그후 1,900년 동안 이방인들에게로 가신다(행 28:25-28). 사도행전이 끝나고 나서 어떤 일이 생겼는지 아는가?
렘 16:16, "...그후에 내가 많은 사냥꾼들을 보내리니 그 포수들이 모든 산과 모든 작은 산과 바위 굴들에서 그들을 사냥하리라."
"어부들"이 유대인들을 낚기 위해 애썼으나 그 민족 전체가 주께 잡히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냥꾼들을 보내셨다. 그 사냥꾼들은 A.D. 70년, A.D. 135년에 와서 그 땅의 유대인들을 쫓아낸 로마인들이었다. 또한 주께서는 7세기에 마호메트교도들을 보내셨다. 암흑 시대에는 카톨릭이 유대인을 죽였다. 19세기에는 러시아인들이 유대인을 죽였다. 주께서는 20세기에 독일 나찌를 일으키셨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는가? 유대인들이 어부들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18-19절의 그물들에 대해서는 누가복음 주석서의 눅 5:2에 설명했으니 그것을 참고하라. 16절의 그물은 투망, 곧 던지는 그물이다. 둥근 형태의 그물 주위에 추가 달려 있기에 그물이 가라앉으면서 고기를 포획하게 되어 있다. 그물을 회수할 수 있게 어부의 손과 그물을 잇는 줄이 있다. 투망은 어깨 힘으로 던지게 되어 있다. 배에 탄 채 그물을 던지기도 하지만 여기 16절에서 안드레와 베드로는 해변이나 물 속으로 약간 들어간 상태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다. 19절의 그물은 아마 후릿그물이나 삼중 망(둘 다 저인망 종류)일 것이다(합 1:16을 보라).
18절: "그들이 즉시 그물들을 버려 두고 주를 따라가더라." 이것은 이 제자들에 대한 세 번의 부르심 가운데 두 번째이다. 첫 번째 부르심은 요 1:40-42에 나온다. 그 첫 번째 만남은 현대식 표현으로 "유명인과의 만남"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안드레와 베드로는 요 1장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났다. 막 1장(또한 마 4장)에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따라오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러자 그들은 그물들을 버려두고 따라갔다. 그러나 눅 5:1-5을 보면 그 네 제자들은 여전히 "파트 타임" 제자들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들은 주와 함께 있지 않은 시간에는 여전히 어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눅 5:10의 부르심을 받고 나서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라가더라"(눅 5:11). 제자들의 부르심에 관해 성경의 묘사에 모순이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배교자들의 주장은 이로써 일축할 수 있다.
여기 18-20절에서 그 제자들은 자신의 일을 부분적으로만 포기하지만 그것도 눅 5장으로 나아가는 한 과정이다. 20절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그들의 아버지를 남겨두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을 보라. 제자도의 요구 조건은 가족보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는 것이며(마 10:37; 눅 14:26) 복음과 그리스도를 위해 가족을 떠나는 것에 대한 보상이 약속되어 있다(막 10:29-30).
21 그리하여 그들은 카퍼나움으로 갔으며, 주께서는 안식일에 곧장 회당으로 들어가서 가르치시니라.
22 사람들이 주의 교리에 놀라니, 이는 주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분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기 때문이더라.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지상 사역 기간 중 "본부"로 삼으시는 성읍인 "카퍼나움"(마 9:1)에 들어가신다. 그 지명은 "나훔의 성읍"이라는 뜻이다. 나훔은 요나와 함께 니느웨에 대한 예언을 남긴 선지자이다. 그 둘은 모두 갈릴리 출신인데, 따라서 그 유대인 랍비들이 요 7:52에서 한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저없이 자신이 그 두 선지자와 마찬가지로 갈릴리 출신임을 확인해 주셨다. 요나는 예수께서 자신과 개인적으로 비교하신 유일한 선지자이며(마 12:40) 예수께서는 대부분의 기적들을 나훔의 고향인 그 성읍에서 행하셨다(마 11:20-23).
본문을 보면 "주께서는 안식일에 곧장 회당으로 들어가서 가르치시니라"라고 나온다. 눅 4:16에서는 그것을 "자신의 관례"라 부르고 있으며 눅 4:17-21의 가르침은 "성경을 올바로 나누는 것"의 전형적인 예이다(누가복음 주석서의 해당 주석을 보라).
이 모든 배경이 유대적이며 기독교적인 것이 아님을 주의하라. 이곳은 유대인들의 회당이지 교회가 아니다. "율법과 선지서들" - 구약 성경 - 이 읽혀지고 있었고 신약은 거기 없었다(행 13:15).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친 것은 신약 교회의 경배와 무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활용해서 동족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다(고전 9:20). 신약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이 아닌 주의 첫날에 모이는데(고전 16:2; 행 20:7) 그들의 구주께서 그 날 부활하셨기 때문이고(마 28:1) 성령께서 강림하신 날도 주의 첫날이기 때문이다(행 2:1-2 참고. 레 23:16). 따라서 안식교도들은 헛수고하고 있는 것이다.
22절: "사람들이 주의 교리에 놀라니, 이는 주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분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기 때문이더라."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이 권위가 있었던 데 반해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권위가 없었다. 그들은 성경에 정통한 자들로서 성경의 글자수가 얼마인지도 세고 있었다. 그들은 현대의 성경 학자들과 같은 자들이었다. 성경에 관해 가장 박식하다고 할 수 있는 자들이 그들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성경을 가장 잘 안다고 자처하는 그들이 성경에 대한 믿음이 가장 떨어지는 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2천 년이 지나도 달라진 것은 없다. 주요 기독교 대학의 교수들과 "박사들"은 자기들의 견해나 그들이 신뢰하는 견해보다 더 나은 권위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들의 권위는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라"에 근거하지 않고 학자들이 동의하는 주장, 곧 인본주의에 근거해 있다. 학자들은 성경에서 자신이 이해할 수 없거나 믿지 않는 것에 맞닥뜨리면 자신들의 무지와 불신에 맞추기 위해 본문을 개정해 버리는 쉬운 방법을 택한다.
창 1:1 이래 항상 문제의 핵심은 권위에 있었다: 누가 책임을 지는가? 우주를 경영하는 분이 누구인가(사 14:13-14)? 누가 국가를 이끄는가? 누가 가정의 주인인가? 누가 교회의 주인인가? 최종 권위가 사람들의 관심사인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성경이 최종적인 권위지요."라고 말한다. 물론 카톨릭 교회는 전통과 교황을 성경과 대등한 자리에 놓는데 그것은 허튼 짓이다. 그 셋은 동등할 수가 없다.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시고 전통과 교황은 저렇게 가르친다면 어느 편을 따라야 맞는지 누가 결정하는가? 트렌트 공의회와 교황 피오 9세에 따르면 교황이 결정한다. 그렇기에 카톨릭의 최종 권위는 성경이 아닌 교황인 것이다. 여러분은 비슷한 현상을 여호와의 증인, 제7일 안식교, 몰몬교, 기타 이단 종파들에서도 볼 수 있다. 이단 종파의 가르침과 성경이 모순되면(몰몬경, 찰스 러셀이나 엘렌 G. 화이트, 메리 베이커 에디의 성경의 열쇠 같은 저서들) 그들은 이단 교리를 성경보다 앞세우며 그들의 종파의 권위가 성경보다 위에 있게 만든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우리는 성경 외의 어떤 권위도 거부합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말하는 성경이 어떤 성경인가? 어떤 성경을 최종 권위라 부르는 것인가? 모든 역본들이 최종 권위가 될 수 있는가? 여러분이 근본주의, 보수주의, 혹은 복음주의자라면 여러분의 진짜 최종 권위가 무엇인가? 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다른 성경은 저렇게 말씀한다면(이를테면 요 1:18; 딤전 3:16; 요일 5:7; 골 1:14; 눅 2:33; 행 4:27, 30) 어떤 성경이 옳은지 누가 결정하는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만 어떤 것이 자신의 말씀이고 어떤 것이 아닌지 결정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풋내기들은 일어나서 이렇게 말한다. "원본의 단어들은 이렇게 되어 있다..." "킹제임스 성경의 이 표현은 매우 불행하게도 잘못 되어 있다" "더 나은 번역은..." "이것은 최상의 사본이 아니며" 그 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는가? 그는 하나님을 우롱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스스로 결정하고 있는데 그 사람 자신이 최종 권위를 자처하는 것이다.
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번역 성경들은 오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박사님들은 대답해 보라. 어떤 성경이 진짜 "성경"인지 말이다(롬 1:2; 딤후 3:15). "네, 나는 이 성경의 번역을 좋아하지만 저 번역본을 좀 더 선호하고 추천은 또 다른 성경을 하겠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선 것이다. 어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 결정하는 순간 여러분이 최종 권위가 되는 것이다.
들으라, 여러분, 나는 킹제임스 성경을 "선호"하기 때문에 그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킹제임스 성경 안에 있는 어떤 내용들이 거기 없었다면 하는 쪽을 "선호"하기도 한다. 여러분은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럭크만?"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내 "마음에 숨겨 둔 모든 사악함"을 알고 있다(왕상 2:44). 그 성경 안에 있는 어떤 구절들은 내 옛 성품에 거슬리는 줄 나는 안다. 나는 내 마음 속에 성경에 대한 적대감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솔직히 말하는 것이다. 신학자들은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개정하면서 그 행위를 "선하고 거룩한" 동기로 포장한다. 그들의 마음은 한밤중의 석탄 창고처럼 어둠으로 차 있다.
나의 최종 권위는 한 권의 책이며 나는 그 책을 여러분에게 소개할 수 있다. 그것은 한 권의 책으로 조합된 적이 없는 잃어버린 고문서 조각들이 아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나의 최종 권위이다. 내게는 성경의 말씀이 맞다 틀리다라고 결정할 권한이 없다. 나는 내가 읽는 성경의 말씀들을 사람의 의견이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으로 받는다(살전 2:13). 나는 나 자신의 교리와 실행을 이 성경에 맞추어 교정하고 그 외 다른 것은 참고하지 않는다.
23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영을 지닌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질러,
24 말하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소서.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이 우리를 멸하려고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 줄 아나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시니이다.”라고 하니라.
25 그때 예수께서 그를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잠잠하고 그에게서 나오라.”고 하시니,
26 그 더러운 영이 그에게 발작을 일으키고 큰 음성으로 소리지르며, 그에게서 나오더라.
27 그러자 모두 놀라서 서로 물어 말하기를 “어찌된 일인가? 얼마나 새로운 교리인가? 그가 더러운 영들에게조차 권위 있게 명령하시니, 그들이 그에게 복종하는도다.”라고 하니,
28 즉시 그의 명성이 갈릴리 주위의 온 지역에 두루 퍼지니라.
사역 기간 중 최초로 그리스도께서 "더러운 영"과 조우하시는 장면인데 그 악령은 경배하는 회중 가운데 있다. 여러분이 만날 수 있는 가장 힘센 마귀들은 술집, 스트립쇼장, 포르노 극장에 있지 않다. 가장 센 마귀들은 일루미나티, 로마 클럽, 빌더버거, 국제 은행가들, 의회, 대통령 집무실, 대법원, 유럽연합, 혹은 UN에도 있지 않다. 성경에 따르면 지구상에서 악한 영들이 모이기를 가장 선호하는 장소는 그 종교 창녀(바티칸: 계 18:2-3) 안이다.
새로운 "성서들"을 만들어내는 번역자들과 개정자들은 자기들이 하는 작업이 마귀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러분은 다른 어느 곳보다 그들의 자리에서 사탄을 잘 찾아낼 수 있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창 3:1) 말씀에서 끄집어 내서 거짓으로 적용한다(눅 4:10-11). 여러분이 그 증거를 보고 싶다면 게일 립링거가 쓴 뉴에이지 성경 역본들이라는 책을 보라. 여러분은 그 책에서 "더 분명하고 정확한" 역본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로채어 마귀에게 넘겼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예를 들면 NIV와 NASV가 계 22:16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사용된 칭호를 가져다가 사 14:12의 사탄에게 붙여 놓은 것).
막 1장으로 돌아와서: "말하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소서" - 복수인 것을 보라. 앞절에서 "더러운 영"(an unclean spirit)이라고 단수였던 것이 여기서는 복수인 악령들로 나타난다. 가다라의 마귀들린 자도 마찬가지이고("내 이름" - 단수 - "은 군단이오니, 이는 우리가 많기 때문이니이다" - 복수[5:9])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공중의 새들"(복수)(4:3-4; 그 새들이 4:15에 가서는 단수 "사탄"으로 언급되고 있다)도 그렇다. 마귀는 많은 더러운 영들(복수)로 구성된 하나의 영(단수)이다.
24절: "말하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소서.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상관이 전혀 없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성읍의 "점치는 영"을 지닌 소녀가 그의 "복음 전파 사역"에 동참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행 16:16-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귀들이 주님의 정체성에 대해 증거하는 일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셨는데(눅 4:41) 이는 그 일이 주의 사역에 대해 부정적인 선입견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마 12:24에서 바리새인들이 주를 어떻게 비방했는지 보라). 그리스도인이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같이 메지 말"(고후 6:14)아야 할 이유가 거기 있으니 "그리스도가 벨리알과 어찌 조화를"(고후 6:15) 이루겠는가? 그럴 수 없다.
"당신이 우리를 멸하려고 왔나이까?" 이것은 맞는 말이다(요일 3:8). 그러나 그 당시는 아니었다. 갈보리에서 사탄은 심판받았고(요 16:11) 그리스도께서는 "정사들과 권세들을 벗겨 내어" 갈보리에서 그들을 이기셨지만(골 2:15) 옛 뱀의 머리는 아직 상하지 않았고(창 3;15) 재림 때에 그렇게 될 것이다(롬 16:20). 그러나 기억할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 기간은 초림과 재림이 공백없이 함께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 하에 있었기에 그 악령이 쓸데없는 질문을 한 것은 아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신 줄 아나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시니이다." 그렇기에 모든 마귀들은 "근본주의자"이다. 마귀들은 모든 선한 카톨릭교도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처녀 출생과 신성을 믿는다. 첨언하자면 모든 마귀들은 모든 선한 카톨릭들과 같이 구원받지 못했다(약 2:19).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행위는 여러분을 구원시키지 못한다.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그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셨고...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또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셨다"는 것을 거침없이 고백할 수 있다. 그런 사실들에 대해 지적 동의를 한다고 해서 구원받지 못한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자신의 구주로 영접할 때(요 1:12), 또한 그 분이 십자가에서 치르신 희생만이 여러분의 구원의 조건이라고 믿을 때(롬 10:9) 구원을 받는다. 저주받은 마귀와 구원받지 못한 카톨릭 신자는 이 점에서 구원받은 죄인과 같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당신이 누구신 줄 아나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시니이다." 그렇다면 마귀들은 마호메트와 그의 추종자들보다 훨씬 나은 센스가 있는 것이다. 11절에서 설명했었지만 마호메트는 하나님께 아들이 있는 줄도 알지 못했다. 마호메트와 마귀는 일신론이라는 부분에서는 의견이 일치하지만(약 2:19) 마호메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에 대해서는 마귀보다 무지했다.
25절: "그때 예수께서 그를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잠잠하고 그에게서 나오라.”고 하시니,"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역자가 마귀를 쫓아내는 과정을 보면 얼마나 단순한지 모른다.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와 논쟁하지 않으셨고 장시간 대화하지도 않으셨다. 성수, 묵주, 기도문, 마귀들린 자를 괴롭게 하는 것, 은사주의자들이 하듯이 마귀들린 사람의 머리나 다리를 때려서 넘어뜨리는 형태의 구마 의식 같은 것도 치러지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더러운 영에게 입을 닫고 나가라고 하셨고 그것은 순종했다.
6절에 보면 마귀가 그 숙주에게서 나갈 때 고통을 유발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런 현상은 9:26에서도 발견된다. 가학피학성 성애는 마귀 들림의 증상 중 하나이다(5:5).
이 일에 대해 회당 안에 있던 회중들은 반응은 놀라움과 경탄이었다(27절). 두 친구 사이에 일상적으로 하는 인사는 이렇다: "뭐 새로운 일 있냐?" 그렇다, 여기서는 진짜 "새 일"이 발생했다("얼마나 새로운 교리인가?"). 이런 일은 이전에 없었다(마 9:33). 여러분이 구약 성경 전체를 찾아보아도 누군가 마귀들을 쫓아낸 일은 없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마 12:22에서 눈멀고 벙어리된 마귀를 쫓아내시자 그것을 본 사람들은 구약에 그런 일이 없었던 줄을 알기 때문에 예수께서 메시아라는 것을 즉각 알아차릴 수 있었다(마 12:23).
"얼마나 새로운 교리인가?" 행 17:18-19에서 보면 아테네의 구원받지 못한 헬라 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메시지가 "새로운 교리"라고 생각했다.
"그가 더러운 영들에게조차 권위 있게 명령하시니, 그들이 그에게 복종하는도다." 여기서 또 한번 권위의 문제가 대두된다(22절 주석을 보라). 그리스도께서는 마귀를 제어하는 권세를 사도들에게도 나눠주신다(눅 9:1). 그래서 이 권능은 "사도의 표적들"(고후 12:12) 중 하나로 막 16:17에서 언급된다. 이후에 마가복음에서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이 능력을 사탄에게서 온 것으로 간주하는데(3:22) 그 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해 경고하신다. 물론 은사주의자들과 오순절파는 이 시대에 그 죄를 지을 수 있다고 오인하고 있다(뒤에 나올 3:28-30 주석을 보라).
"즉시 그의 명성이 갈릴리 주위의 온 지역에 두루 퍼지니라"(28절). 주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신 것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능력을 주셔서 행하게 하셨다. "칠십 명"의 제자들은 전도 여행에서 돌아와 그리스도의 이름에 마귀들이 복종했던 일을 보고하며 기뻐했다(눅 10:17). 그러나 예수님의 편에서는 그 일이 그들에게 있어 가장 기뻐할 일은 아니었다. 그들이 정말 기뻐해야 할 이유는 그들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기록된 것이었다(눅 10:20). 다음 번에 여러분이 어떤 어리석은 은사주의자가 "가난 마귀"를 쫓아내는 것에 대해 떠벌리는 것을 듣거든 이 내 말을 기억하라. 그 사기꾼들은 사람들을 구원받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며 단지 그들의 "양떼에게서 최대한의 양털을 벗겨내는 데" 관심이 있다.
"갈릴리 주위의 온 지역" 이 단락은 사 9:1-2을 영적으로 가져와 적용할 수 있는데 사실 이사야서의 그 내용은 재림과 관련된 본문이다. 그럼에도 성령께서는 마 4:13-16에서 그 본문을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에 관련된 초림 관주로 적용하셨다(마태복음 주석서의 그 부분을 보라).
29 그후 그들이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갔는데
30 그때 시몬의 아내의 모친이 열병으로 누워 있더라. 그들이 곧 주께 그 여인에 관하여 말씀을 드리더라.
31 주께서 오셔서 여인의 손을 잡고 일으키시니, 열병이 즉시 그 여인에게서 떠나가고 여인이 그들을 섬기더라.
회당에서의 사역을 마치신 후에 예수님과 그의 네 제자들은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사는 집을 방문한다. 성경 기록의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들은 이 부분과 요 1:44를 비교하면서 모순이라고 하는데 요 1:44에는 카퍼나움 대신 "안드레와 베드로의 성읍인 벳세다"라 되어 있어서다. 그러나 이런 의문 제기를 하는 자는 자신의 성경에 대한 무지와 함께 그가 실생활과 괴리된 백면서생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윗의 성읍"은 다윗이 태어나서 자란 성읍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베들레헴 - 눅 2:4) 다윗이 왕으로서 통치한 성읍도 될 수 있다(시온 - 삼하 5:7, 9). 또한 어떤 사람이 자기 고향 성읍에서 떠나 직업을 구하러 다른 성읍으로 갈 수도 있는 것이다. 벳세다는 안드레와 베드로가 태어난 고향 성읍이며 카퍼나움은 그들이 어부 직업에 종사하며 머물던 성읍이다. 그들이 일종의 사업가 개념으로 어부일을 하고 있었다면 그들은 양쪽 성읍 모두에 집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시몬의 아내의 모친이..." 그의 무엇이라고?! 이게 정말 사실인가? 본문은 시몬 베드로에게 아내가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사실이다(고전 9:5)!
여러분이 보다시피 첫 번째 "교황"이 기혼자가 아닌가? 맞다. 첫 번째 교황에게 아내가 있고 장모도 있었다면 왜 그를 계승했다는 자들은 그렇지 못한가? 1,500년 동안 그들 교황 패거리가 "거룩한 아버지"를 자처하면서 시몬 베드로의 후계자 행세를 한 것은 다 사기였던 것이다! 시몬 베드로는 결혼했을 뿐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성호를 탈취하지도 않았으며(요 17:11) 추종자가 자기 발 앞에 엎드리거나 그의 반지에 키스하는 일도 하지 못하게 했다(행 10:25-26). 그는 "교황의 권위에 따라"(ex cathedra) 교리를 선포하지도 않았고(벧후 1:20)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사장이라 가르쳤고(벧전 2:5, 9) 자신이 아닌 예수께서 교회의 반석이라고 말했다(벧전 2:6-7). 그는 성경을 최종 권위로 간직했으며(벧전 1:23-25; 벧후 1:19) "무오한 교회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31절의 치유가 즉각적이었음에 주목하라. 주께서 행하신 치유에는 "장시간 기도", "헐렁한 의복", "반복적인 안수"가 불필요했다. 누군가 자기에게 사도적 치유의 은사가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면 "병자에게 안수하면 그들이 회복되리라"(16:18)를 실행해야 한다. 치유는 피치유자의 믿음에 달려 있지 않다(야고보서 주석서에서 5:14-15 주석을 보라).
"그때 시몬의 아내의 모친이 열병으로 누워 있더라. 그들이 곧 주께 그 여인에 관하여 말씀을 드리더라." 여기서 "곧"(anon)이라는 단어는 영어에서 고어체 부사로서 "곧, 잠시 후에"라는 뜻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이 집 문간에서 주께 그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집에 들어가서 그녀의 열병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이는 그 부인이 몸이 아파서 일행의 식사 대접을 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해하기에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이 구절을 더 확실히 이해하도록 이런 구절을 "재번역"할 필요는 없다. 여러분은 성경에서 36,000 단어(NASV), 혹은 64,000 단어(NIV)를 삭제하거나 그 과정에서 믿음의 근본에 관한 주요 교리들을 공격할 필요가 없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사전에서 그 단어를 한번 찾아보는 것이다. 성경 출판업자들이 정말 여러분을 돕고 싶다면 그들은 여백에 각주 정도를 집어넣으면 되는 것이었다. 여러분은 킹제임스 성경에 가끔 나오는 고어체 단어를 분명하게 만들기 위해 323개의 서로 상충되는 권위들을 만들어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 성경이 고어체라는 것이 1880년 이래 매 6개월마다 한 번씩 새 역본들을 내놓는 그들의 빌미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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