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西行長
1555?~1600
1555?~1600
키리시탄(크리스트교도)다이묘로 유명하며,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Augustino).
1. 역사상의 모습 ¶
국내에선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 무장 중 가토
기요마사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인물. 당시 조선에서도 왜장 중에서 제일 유명한 인물 중 하나였다. 임진왜란 관련 조선측
사료에서는 소서행장(小西行長)이나 그냥 행장(行長)이라는 표현으로 등장한다. 다른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와는 앙숙지간이다. 가토는 바로 옆동네의 다이묘인데, 원래 이웃끼리가 더 사이가 안 좋은 법. 상시
접경에서 영토 문제로 다투었다고 한다.
다만 처음부터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히데요시 집권후 지방 다이묘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직신들을 각 지방에 골고루 분배했고
특히 둘의 영지가 있는 규슈는 시마즈가 자리하고 있고 옛
류쇼지 가문의 세력을 등에 엎은 나베시마(鍋島) 가문[1]도 있었기 때문에 직신들 중에서도 제일 믿을 만한(혹은 능력있는) 가토
기요마사와 구로다 요시타카[2], 고니시 유키나가를
배치했다. 특히 가토와 고니시의 영지는 남북으로 붙어 있기 때문에 둘의 연계가 중요했다. 그때 당시만 해도 히데요시의 권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영토로 싸운 기록은 없다. 오히려 히데요시의 구상에 걸맞게 서로 도와가면서 잘 지냈다. 다만 임진왜란 몇 년 전부터
가토가 영지 내 가톨릭 신자들을 박해하면서 가토의 영지 내 신자들이 대거 고니시
측으로 도망, 그들의 처우 문제로 다툰 적은 상당히 많다. 둘의 사이가 벌어진 것은 가토가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울산성
전투에서 고니시가 조선측과의 화친을 위해서 가토의 지원요청을 묵살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가토가 얼마나 한이 맺혔는지 귀국후 만든
구마모토 성은 식수공급용 우물을 900개 정도 팠고 성내 다다미나 외벽재를 죄다 고구마 줄기로 만들어서 유사시 장기간 농성에 대비할 수 있게
만들었다. 몇백년후 시마즈 잔당들이 구마모토성에서 농성을 하기도 했다.
본래 사카이[3]의 상인의 아들이자 자신도 상인으로서 본명은 고니시 야쿠로였다고 한다. 최초 우키타
나오이에를 섬겼으며, 주로 외교시의 사자로 활동하였다. 1581년 우키타 나오이에가 사망한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발탁되었다. 히데요시 밑에서는 후네부교(船奉行)로서 수군을 통솔하였고, 다이묘가 된 것은 1585년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고니시는[4] 군기로 붉은 비단 장막에 하얀색 십자가를 그린 것을 사용했고, 고니시의 휘하 병사들 다수도 천주교 신자였다. 고니시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 그의 진중에는 로마
교황청이 파견한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신부인
세스페데스 신부가 사목했고, 밤마다 미사를 드렸다고 한다. 특히 부장이자 사위인 소
요시토시에게도 가톨릭을 믿으라고 권해서 세례성사를 받게 했고, 요시토시와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외손자 고니시 만쇼는 훗날 신부가 되었다. 고니시의 봉토였던 아마쿠사
제도는 '그리스도의 섬'이라고 불릴 정도였는데, 후에
시마바라의
난의 진원지가 된다.
임진왜란의 선봉장으로 한국에 있어서는 원수라 할 수 있는 인물이지만, 임진왜란
이전에는 대마도주인 사위의 무역문제와 자신의 가톨릭 신앙 등의 이유로 전쟁을 반대하던 쪽의 인물이었다. 이시다
미츠나리 등과 전쟁을 막기 위한 시도도 하였다. 하지만 실패하자 이에 초친 가토에게 보란듯이 가장 먼저 조선에 상륙, 한성을 가장 먼저 점령하고 평양에 주둔하였다.[5]
그러나 이후 1달이나 체재하면서 시간을 허비하다가 이후 이순신의 활약에 의한 보급문제와 명군 등의 등장으로 물러나게 된다. 한성까지도 겨우 후퇴하였고, 행주산성에서 권율의 3천병사에게 대패하기도
하였다.
고니시의 1달간의 체류에 대해서는, 상인 출신이기에 가진 한계라는 설과 고니시의 반전 의사라는 설이 있다. 그
이외에도 보급부족이라는 설도 있다. 단, 당시의 상인은 재력을 바탕으로 한 무력도 갖추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였고, 고니시 자신도 '전투에서는
선봉에서 싸워야 한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전쟁이 늘어지기 시작하자 이시다
미츠나리와 함께, 명과의 강화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고니시는 말빨로 한 이름 하는 명나라의 심유경과 함께 열심히 교섭을 해봤으나, 일본의 조공을 요구하는
명과 조선 8도 중 남쪽 4도(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를 요구하며 명의 황녀를 운운하는 일본 사이에 강화가
가능할 리가 없었다.
결국 고니시와 심유경이 양쪽 정부 모두에게 거짓을 고하고 명에게는 모든 요구조건이 수락되는 대신 도요토미에게 일본
왕 책봉을 내리는 수준으로, 일본에는 명이 마치 일본을 인정한 것처럼 사기를 쳤다. 문맹인 도요토미의 성향을 이용한 대사기극이었으나… 결국
붕괴, 심유경은 목이 잘리고 고니시는 마에다
토시이에, 요도도노 등의 간청으로 가까스로 살아남게
된다.
이후 고니시는 살아남기 위해 한 건을 터트리는데, 가토
기요마사와 내부분열이 일어났다는 거짓 정보로 조선 조정을 통채로 낚아(…)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관직을 삭탈당하고 백의종군하게 만드는 어마어마한 일을
이루어낸다. 이렇게 정유재란에 다시 참전하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노량해전에 대패하면서 후퇴.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벌인 내전에서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지지하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으로 참전하여 잘 싸웠으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과 함께 공격당하여 패배, 가톨릭 신자라 할복을 하지 않고[6], 온갖 수모를 겪은 후 참수되었다. 죽기 전 같은 가톨릭 신자였던 쿠로다
나가마사를 통해 종부성사를 받게 해달라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요청했는데 거절당했다고 한다. 참수시 불교의 승려가 관례적으로 고니시의 머리 위에 불경을 얹고 염불을 했는데 고니시가 "나는 키리시탄이다. 어딜 불교의 것을
나에게 들이대느냐!" 하고는 예수,
마리아를 외치며 죽었다고
한다.
숙적 가토
기요마사의 공격을 받고 있던 우토 성은 끝까지 버티다가 고니시의 처형 소식이 들어오자 항복하고, 성을 지키던 고니시의 동생 유키카게는
할복하였다. 쓰시마 섬 도주 소 가문의 소 요시토시에 시집갔던 딸
마리아는 세키가하라 이후 이연당하여 갓 낳은 아들과 함께 쫓겨났으며,[7]
아들은 모리 가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후 고니시의 가문은 멸문되었으며 고니시의 봉토는 가토
기요마사가 소유하였다. 고니시의 가신들 역시 많은 수가 가토 가로 흡수되었다. 고니시의 우토 성을 점령한 가토는 그 성의 망루 하나를
자신의 구마모토 성에 옮겨 설치하고 "우토 망루"라고
불렀다고 하나, 후대의 연구에 따르면 우토 망루는 원래부터 있었고, 우토 성 출신 가신들이 있는 곳이라 하여 그렇게 부른 것이라 한다.
조선의 전쟁 고아들을 많이 양육했다고 하여 그중 유명한 인물로는 조선인 양녀 오다
쥬리아가 있다. 평양 혹은
순천에서 주운 고아를 양녀로 삼아 이름을 오다로 짓고 가톨릭에 입교시켰다. 고니시의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녀가 되었다가 막부의 천주교 박해로 유배되어 여생을 유배지에 보냈다.
한국의
개신교 목사들이 임진왜란
때 고니시를 막은 이순신을 사탄 취급한다는 얘기가 돌기도 했다. 발단은 이러하다. 누군가 순복음교회 신앙 상담 게시판에 낚시성 질문을 올리고
낚시에 걸린 담당자가 "고니시를 물리친 우리 조상들이 잘못한 것"이라는 희대의 병크 답변을 하여, 짤방화되어 사방으로 번졌다.[8] 개신교는 애초에 가톨릭과 동질 종교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점[9]을 생각하면, 순복음 담당자의 국사에 대한 상식부족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이순신 장군이 했던 명언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오,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다."라는 말은 성경에도 나오는 말이기에, 일부 개신교 목사들은 이순신 장군이 그리스도교 관련 서적을 접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10]
참고로, 이와 같은 주장(이순신 사탄설(…))에 대한 가톨릭의 입장은 무시 혹은 코웃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임진왜란이 무슨 천주교의 전파를 두고 벌어진 종교 전쟁도 아닐
뿐더러, 그렇다고 하더라도 가톨릭은 황사영의 예에서 보듯 신앙을 위한 국가 생존권의
부정을 배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설령 고니시가 임진왜란을 '거룩한 십자군 전쟁(…)'으로 생각했고, 어떻게어떻게
해서 이순신이 전사하고 선조가 붙잡혀서 조선이 사분오열 풍비박산이 났으며, 그 덕에 고니시의 주도로 한반도에 가톨릭이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이걸 가지고 가톨릭이
고니시를 성인 취급한다던가 하는 일 따위는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학살자 혹은 전쟁광으로 비난을 받았으면 받았지… 당장 십자군
전쟁에 대한 가톨릭의 입장만 찾아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참다운
신앙인이었다며 긍정적으로 보는 한국인 신자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 # OME
그리고 앞에 언급된 황사영의 경우도 순교자로 존경하며 성인으로 시성을 추진하는 신자들이 소수지만 있다.(…) 다만 링크의 경우
'고니시가 침략을 한게 잘했다'는 투로 서술된 게 아닌,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신앙생활이 모범적이었다는 뜻이다. 또한 고니시가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시성(…)되었다는 카더라가 은근히 퍼져있는데, 전혀 근거없는 개소리이다. 가톨릭 성인목록을 살펴봐도
전혀 언급조차 안되어있다. 당연하지만 임진왜란도 전국시대 다이묘들의 전쟁도 세키가하라
전투도 종교전쟁은 아니다. 고니시가 처형을 당한 것도 어디까지나 세키가하라
전투 패배 후 처형이었지, 종교적 순교는 아니었다. 고니시를 성인으로 만들 건덕지라곤 '개인적으로는 독실했던 가톨릭 무인'이라는 점
밖에 없다. 참고로 널리 알려진 것과는 달리 양녀인 오다 쥬리아도 복자품에 오르거나 성인품에 오르지는 않았다. 물론 두 부녀 모두 매우 독실한
신자인 것은 사실이다. 고니시의 고향인 사카이 시(市) 공식 사이트에서 한국어로 고니시가 소개되어 있다. # 이에 따르면 사카이에 고아원, 나병 요양원을 세우는 등 사회복지 사업에 힘썼다고 되어 있는데, 이를 볼 때
개인으로서는 꽤 도덕주의적인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사이트에서 한국인들에게 한국어로 임진왜란의 선봉이라고 말하기는 뭐했는지 그
대목은 빠져있다(…)
2. 창작물에서의 고니시 유키나가 ¶
의외로 일본 창작물보다는 한국 창작물에서 더 좋은 대접(?)을 받는 편. 일본에서는 한국에 잘 알려진 것처럼 가토
기요마사와 라이벌로 몰아가기도 하지만 어째 인지도 면에서는 가토에게 밀리는 느낌. 승자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그래서인지
대중매체에서도 잘 등장하지 않지만 묘하게도 여성향에서는 인기가 좋은 편이다.
선봉장으로서 부산진성,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탄금대 전투에서 조선의 주력군을 괴멸시키는 등 임진왜란 초기의 충격과 공포를 담당했다는
점과 전쟁반대, 국서 위조 등 입체적으로 해석할 건덕지가 많은 캐릭터이기에 한국에서 대우가 좋다. 임진왜란 발발 몇년 전부터 쓰시마
사람들과[11] 전쟁을 막으려 시도를 했던 것이나 동래성 전투에서 송상현과의 일화,[12] 송상현의 전사후 장례를 후하게 치뤄주고, 심유경과 함께 전쟁을 끝내려 노력한 점, 전쟁에서 부모를 잃은
조선 아이를 양녀로 거둔 일화 때문인지 한국에서는 호의적으로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적어도 '싸움질만 할줄 아는 무식한 왜놈들' 이미지는
아니었다. 사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도 가토보다는 고니시의 이미지가 비교적 좋은 편이기도 했다. 각종 에피소드를 비롯해 후에 조선, 명과의 화친을
주도한 것을 봐도 여타 무식한 왜장들보다는 조선 조정이 좋아할만한 소양을 갖추고 있었던 것 같다. 일단 한문을 알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메리트다[13]
그러나 고니시가 전쟁을 막으려 한 것은 철저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였지 천주교 신자라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고니시가 임진왜란의 선봉장이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강화회담 때의 사기행각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철저히 그 시대의 논리와 상황에 맞추어 행동한 인물이다. 또한 섣부르게 평화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에도 신중해야한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인 조선인
양녀의 경우도 한국과 일본 천주교 일각에서는 존경하는 경우가 있지만, 애초에 전쟁이 아니었으면 조선에서 천주교와 상관없이 부모님을 잃은 고아가
되지 않고 가족들과 살았을 인물이었고 양녀로 받아들인 것도 일종의 포로라는 점에서 모순이 있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그 아이를 양녀로 거둬들이지
않았다면, 짐승같은 일본군에 의해 잔혹하게 윤간 후 살해되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14] 고아를 받아들인 고니시의 이러한 행동을 비난하는 것은 과도하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전쟁은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잔혹한 행동이 암묵적으로 묵인되는 시기이고, 그 기간에 최소한의 이성을 갖추기란 상당히 어려운 것이다. 인류 역사에 남은
잔혹한 전쟁은 히틀러, 김일성, 도요토미
히데요시같은 광적인 1인자들의 주도로 이루어졌고, 이들과 반대로 전쟁을 막고자 필사적으로 몸부린친 인물들도 있었다. 고니시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또 제2차
진주성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는 미리 조선측에 알려 백성들을 대피시키자고 주장했다.
『我日本往晋州兵馬三十萬, 恐不能當, 修書密報。』 今本府之民, 預避其鋒銳。 彼見城空人盡, 卽撤兵東回.[15][16]
명나라와 일본이 화평조약을 맺은 와중에 뜬금없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진주 공격을 명하자 일본 장수 어느 누구도 그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당시 명나라 사신 신분이었던 심유경이 부산에 있을때 이야기한 대목이다. 물론 화평약속을 깨는 공격이기에 반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미 다 끝난 마당에 무의미한 살상은 의미가 없다고 미리 적진에 이야기한 것이니... 판단은 알아서.
『我日本往晋州兵馬三十萬, 恐不能當, 修書密報。』 今本府之民, 預避其鋒銳。 彼見城空人盡, 卽撤兵東回.[15][16]
명나라와 일본이 화평조약을 맺은 와중에 뜬금없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진주 공격을 명하자 일본 장수 어느 누구도 그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당시 명나라 사신 신분이었던 심유경이 부산에 있을때 이야기한 대목이다. 물론 화평약속을 깨는 공격이기에 반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미 다 끝난 마당에 무의미한 살상은 의미가 없다고 미리 적진에 이야기한 것이니... 판단은 알아서.
정리하면, 고니시의 이익은 쓰시마의 이익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것은 분명하다. 순전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전쟁을 막으려 했다는 것도 물론 맞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과도하게 부당하게 비난하는 측면도 있다. 적어도 당시 다른 장수들보다는 앞장서서 이
무의미한 전쟁을 끝내려 무진장 노력했던 것은 사실이다. 애초에 전쟁을 명령한건 고니시가 아니었고 얘가 안쳐들어 왔어도 다른 누군가가 그자리를
대신했을 것이다. 그 당시 사람들 정서상 위에서 공격하라는데 항명할 사람도 별로 없고.
애초에 사카이 상인 집안 출신이기 때문에 일찍이 외국과의 교역을 통해서 당시 조선과 명나라의 국력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이묘로서 전국시대를 종결하는 히데요시의 전쟁에 동조하는 것은 당연한 행동이었지만, 허무맹랑한 조선과
명 정벌에는 애초부터 반대했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일본에서도 그다지 언급도 없고 높이 평가되지 못하지만 애초에 평범한
장수였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선봉장으로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러가지로 생각해볼 점이 많은 인물임은 분명하다.
2.1. 각종 소설들 ¶
일본의 소설가 엔도 슈사쿠의
<숙적>이란 소설에 꽤 옹호조로 등장하고 있다. 엔도 슈사쿠가
<침묵> 등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작품을 많이
썼다는 점을 감안하면 고니시에게 호의적인 시각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참고로 <숙적>이라는 작품은,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의 온갖 애증관계를 히데요시의 시종이던 젊은 시절부터 세키가하라
전투의 패배 후 고니시가 죽는 시점까지 묘사하고 있다. '면종복배'라는 고니시의 이미지는 여기서 형성되었다. 또한 고니시의 아내 이토가
히데요시를 독살하는 듯 강렬한 인상을 주기도 하였다.
임진록에서는 소서,
소섭, 소서비, 소지섭 등의
이름으로 괴물화되어서 김응서와 대결한다. 잘 때 눈을 뜨고 잔다거나 목을 베어도 그 목이 날아와 도로 붙기 때문에 잘린 단면에 재를 뿌려야
한다는 식이다. 히드라? 심지어 고니시의 수청을 든 평양 기생 계월향은 김응서가 소서를
죽이자 "내 뱃속에 소서의 자식이 있는데 마저 죽여야 한다"는 이유로 자신까지 죽이라고 청한다. 김응서가 계월향의
배를 찌르자 태아는 튀어나와서 허공을 날아다니며 맴돌다가 떨어져 죽는다. 태아가 "아비의 원수를 갚으려 했는데!"
하고 말까지 한다. 그런데 이 '소서비'가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으로 나오는 판본도 많다. 또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가신 나이토 조안이 소서비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우혁의 왜란종결자에는 나름 개념있는
악역으로 나온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전쟁에 회의를 느끼고 있다.
웃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향한 충성과 무의미한 살상 사이에서 갈등하며 많은 고뇌를 한다. 닌자를 통해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마물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귀무자? 닌자양반이 불경 적은 속옷으로 마수 방어하는걸 보고 자신도 성모송을 속옷에 적어서 사용한다. 그게
불경
2010년 타계한 故 김성한 작가의 소설 7년 전쟁에 자주 등장한다.[17] 이 소설에서 고니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중요한 인물이며 분량도 많다.[18] 초반에는 쓰시마 사람들과 도요토미와 엮어서 자주 나오고 임란 이후 평양까지는 조선의 입장에서
서술되어 있어서 진격 상황만 묘사되었다. 이후 평양성에 주둔하면서 동시에 명나라의 심유경이 등장하고부터 비중이 많아진다.
작가는 임진왜란을 기존의 조선의 일국사(一國史)적 측면이 아니라 삼국 간의 국제전쟁(7년전쟁)으로 바라본다. 일본인이라고 깎아내리지 않으며, 조선인이라고 옹호하지 않는 중립적인 묘사가 두드러지는데 고니시 유키나가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나름 혜택(?)아닌 혜택을 본 인물이다.[19] 전쟁 자체보다 외교전에 주력하여 소설을 쓴 작가의 성향상 고니시나 심유경이 핵심 인물이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 밖에 없다.
작가는 임진왜란을 기존의 조선의 일국사(一國史)적 측면이 아니라 삼국 간의 국제전쟁(7년전쟁)으로 바라본다. 일본인이라고 깎아내리지 않으며, 조선인이라고 옹호하지 않는 중립적인 묘사가 두드러지는데 고니시 유키나가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나름 혜택(?)아닌 혜택을 본 인물이다.[19] 전쟁 자체보다 외교전에 주력하여 소설을 쓴 작가의 성향상 고니시나 심유경이 핵심 인물이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 밖에 없다.
2.2. 한국의 사극들 ¶
아마 한국 사극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일본인 중 한 사람. 8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한자를 그대로 읽어
소서행장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80년대 중순 당시 엄청난 제작비로 만들어 인기를 끌던 MBC의 사극 조선왕조
5백년-임진왜란편에서도 소서행장이란 이름으로 나온바
있다. 배역은 성우 정승현 씨[20]. 사실 16세기 조선인들이 그를 고니시라고 부를 이유가 없으므로 소서라고 부르는 게 고증에
맞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정승호가 상당히 절륜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초반부에는 배우가 그동안 자주 맡았던 배역처럼 소심하고 서민적으로 보이며,
이순신에게 매번 당하고 "이이이순신~ 이이이이이이순신"을 되뇌며 이를 가는 악역으로 나오지만, 중반부에서 히데요시의 침략을 막으려는 일들이
비중있게 다뤄지며, 한산대첩에서 이순신의 승리가 단순한 하나의 전투에서 승리가 아니라 조선군에게 희망을 줘서 전세를 바꿀 것이라는 분석을 하거나
이순신에 대한 반간계를 계획하는 등 이래저래 지장의 분위기를 풍긴다. 일본군 무장 중에서는 그나마
입체적으로 나오는 편.
2.3. 임진록 시리즈 ¶
HQ Team 의 RTS 게임
임진록 시리즈에서 제작진이 애착이 있는건지(?) 대대로 등장하는데, 임진록에서는 시나리오 도중 '구출해야 하는' 장수로 등장한다. 대략 화친을
위해 동래성의 김시민을 만나 스스로 조선군과 접촉을
시도했는데 조선 신하들이 화친을 강력히 반대할까봐 고니시를 인질로 잡아 한성까지 데려간다.(...)
임진록 2에서는 그냥저냥한 장수로 등장한다. 검을 사용하고, 그런만큼 적절한 체력과 적절한 공격력을
보유한...물론 업그레이드를 하면 사용할 수 있는 풍백술은 지상군과 해군 유닛, 그리고
건축물들에게 꽤 위협이 된다. 회오리 바람을 소환하는데 범위 내로 들어가기만 하면 데미지가 후두룩…. 한마디로 건물에 데미지가 들어가는 사이오닉
스톰. [21]처음엔 없었다가 나중에 패치로 추가됐지만 밸런스 붕괴를 막기 위한 것인지 초반에 뽑을 수 있는
본체와는 달리, 가장 마지막 테크에 있는 세이쇼오의 등용과 기술을 완료해야 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다.
후속작인 스탠드 얼론 팩 임진록 2+ 조선의 반격에서는 명의 이여송, 조선의 곽재우 다음가는 흉캐가 되어서 돌아왔다. 검 영웅이라서 폭마혈도[22]를 장착할 수 있는데 또 마법 영웅이라고 기본 마나도 있어서
악세서리칸의 마법력을 퍼센트 단위로 올려주는 아이템을 장착하고 죽지만 않으면 영구적으로 늘려주는 용왕탕도 몆번 먹여 적진에 투하시킨 다음 폭뢰격
두세번만 쓰면 본진이 거의 원폭을 맞은
수준의 시망…. 일본 동족전이라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상호 고니시 깽판 그나마 이여송이나 곽재우마냥 말을 타고 다니지는 않아서 스피드는
느린데 어차피 수송기를 탈 것이기 때문에 스피드 그런 것은 안 중요하다. 테러만 잘 하면 됐지...그리고 풍백술도 여전하다. 검중에
용비늘검이라는 마법력을 200 추가시켜주는 아이템이 있어 이걸 장착하고 원거리서 풍백술 좀 쏴주고 도망가면, 쉽고 빠르게 적의 자원채취와 보병
유닛 학살을 겸할 수 있다. 처음에는 풍백술의 가치가 과소평가되어 잘 안쓰였지만 이후 초반부터 고니시를 빨리 띄워 정면교전과 자원채취를 방해하는
게릴라를 겸하며 용비늘검을 포함한 아이템빨을 기다려 그 아이템빨로 정면교전에서 압승하는 운영이 개발된 이후 지금은 일본의 유일신으로 거듭났다.
폭뢰격 테러보단 풍백술이 안전하면서도 더 무섭고 짜증난다
2.4. 거상 ¶
천하제일상
거상에선 말을 탄 채로 쌍검을 사용하는 장수로 등장한다. 기마무사 레벨 50부터
경우 전직 가능. 쌍검난무라는 기술을 사용하는데, 자기 주위의 적들을 지속적으로 타격하는 기술이다. 중복사용이 가능하여 스타크래프트의
지우개처럼 쓸 수
있다. 요즘은 고니시가 몹보다 먼저 지워진다 레벨 90부터 2차장수 세쓰노카미[23]로 전직시킬 수 있다. 일직선으로 돌격하여
적들을 관통하면서 일격을 가하는 기술을 쓰는데 상당히 강력하다. 하지만 몹이 한 픽셀만 움직여도 허공을 가르는 칼
여담으로 이 2차장수 세쓰노카미의 배경 스토리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 고니시가
고향으로 내려가 은둔하다가 용마를 보고 전 재산을 털어서 그 용마를 샀다는 내용. 배경스토리가 역사를 뒤엎는 것으로도 모자라
판타지 소설 수준이다...
2.5. 코에이 게임 ¶
지휘봉의
행방에서는 상인 출신이라 주판을 들고 있다. 비주얼 신장 150cm, 비주얼 연령 43세, 취미는 돈계산. 꽤나 계산적인 성격이나 그것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이묘로서 가신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한 것. 패색이 짙어지자 불필요한 희생을 막기 위해 항복한다. 세키가하라 후
역사대로 처형당하지는 않고 안코쿠지
에케이와 함께 상인으로 해운업을 운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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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 유키나가 |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한국인들에게 흔히 알려진 무관의 이미지보다는 정치력이 B급인 문관으로 등장하지만 전투나 지모도 크게 낮은 편은 아니다. 노부나가의 야망 혁신에서는 후네부교를 맡았던 경력 때문에 수군 적성이 S를 찍기도 했다. 다른 시리즈에서도 그랬는지 추가바람.천도에선 수군이 없어졌기 때문에 쓰기 힘든 수준으로 떨어졌다. 다만 철포능쳑치가 괜찮기 때문에 군소다이묘에 후반시나리오를 한다면 쓸만하다.(특히 후반부 모리 가문이나 우키타 가문으로 플레이 한다면 중요한 인재풀중에 한명이다.)
문제는 능력치 인플레가 심한 코에이 게임에선 어정쩡한 수치를 가진 만능형 케릭인 고니시가 설 자리가 없다.
(합산 능력은 낮지 않지만 특화된 능력이 없다. 차라리 능력치 총합으로는 고니시보다 딸리는 후쿠시마가 더 쓸모가 있다.)
게임에선 50-50-50보다 100-0-0이 더 쓸모있다. 쉽게 말하자면 장비의 무력을 잘라서 지모나 정치에 줄 미친 사람은 없다.
차라리 지모,정치를 잘라서 무력에 올인할지언정...
백만인의 신장의 야망에서 합전 78 내정 85로 그럭저럭 쓸만한 능력치지만 문제는 특기가 내정계인 산술과 지원. 대난전 이벤트에선 짝퉁 노부나가화...
태합입지전 5에서도 그럭저럭
쓸만한 문관. 상인 출신이라 그런지[24] 산술과 변설 적성이 높아서 군자금조달이나 매입, 매각 등 재정 관련 주명을 수행하기 딱 좋다.
가신으로 두고 있으면 돈도 잘 벌어오는 편. 하지만 전투 쪽으로는 능력치가 좋지는 않고 병과적성 중 수군 적성은 높지만 해적을 하지 않는이상 별
쓸모 없는 능력치라... 천주교 신자임을 보이는 듯 여기서는 목에 십자가를 걸고 있다.이 게임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아버지인 고니시 류사도
상인 직업으로 등장하며 플레이도 가능하다.
전국무쌍
시리즈에는 4편까지 출연하지 않은 상태. 가토도 3편에서 등장했는데 안습. 단, 100만인의 전국무쌍에는 출현했는데, 서양풍의 복장을
하고, 주판을 들고 있는 채로 나왔다.
2.6. 마계전생 ¶
마계전생 OVA에서는 고니시의 비참한 최후에
원한을 품은 고니시의 가신이 아마쿠사
시로 도키사다를 배후조종하여 시마바라의
난을 일으키고 반란 실패 후 죽어가던 아마쿠사에게 마인으로 전생할 것을 제안하고, 어린아이들마저도 학살한 야규
쥬베이에 대한 원한[25]에 사무친 아마쿠사가 이를 받아들여, 아마쿠사를 사랑하던 가신의 딸을 제물로 마인으로 전생하는
내용이 나온다.
2.7. 효게모노 ¶
9권에서 첫 등장. 외모는 현존하는 초상화나 동상의 이미지를 거의 그대로 따르며, 어딘가 한군데씩은 똘끼가 있는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 비교적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다. 기질이 호방한 다른 다이묘들과 달리 신중하다 못해 소심해보이기까지 할 정도.
명의 심유경과는 함께
상인의 독립국을 건설하기로 의기투합한 베프 수준이며, 심유경과 함께 기본적으로 주전보다 주화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이시다
미츠나리와 같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간계로 구워삶아보려다 실패하는 장면도 잘 묘사되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로는 등장이 좀 뜸해진 상태. 아마 역사적 수순대로 이시다 미츠나리 편에 붙어 상인 독립국의 야망을 불태우다 비장하게 최후를
맞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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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방자 비의 외가.
- [2] 통칭 구로다 간베. 조선에 출병한 구로다 나가마사의 아버지
- [3] 지금의 오사카. 이것 때문에 칸사이벤을 사용한다는 동인설정이 붙기도 한다. 사카이 쪽이 아니라 산요 지방, 현재 고베, 히메지, 오카야마 지역이라고도 한다.
- [4] 사실 어린 시절에는 신앙심이 깊지 않았으나, 독실한 가톨릭 무장인 다카야마 우콘과 친교를 맺고 나서 신앙심이 깊어졌다고 한다. 이때를 기점으로 거의 사람이 달라져서, 거만했던 행동이 사라지고 온화하고 겸손한 성격이 되었으며 오사카에 한센병 요양원을 세우고 고아원 사업에 힘썻다고 한다.
- [5] 평양에 주둔하면서 조명연합군과의 전투 도중 동생과 사촌을 잃기도 하였다.
- [6] 가톨릭에서 자살은 금기사항. 같은 가톨릭 신자였던 안중근 의사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그 자리에서 자결하지 않고 재판을 통해 사형당한 것도 이 때문이다.
- [7] 그래서 고니시 마리아의 아들은 외가의 성씨를 따라 고니시 만쇼가 되었다.
- [8]
- [9] 기독교 간 화해 운동도 가톨릭의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다. 세계적으로는 루터교나 감리교 등 적지 않은 개신교 종파들과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한국에서 이에 화답하는 개신교 종파는 몇몇에
불과하다. 특히 한국에서 정통을 자처하는 대다수의 개신교 종파들은 이에 대해 아예 관심조차 없다.
하긴 속성 자체가 가톨릭과 타 종교까 그 자체이니. - [10] 이 말을 이순신 장군의 오리지널이라 아는 사람도 많지만, 사실 이 말은 <오자>에서 인용한 말이다. 이순신 장군 역시 "병법에 이르기를"로 시작하고 있다. 다만 오자에 나오는 원래 표현은 '필사즉생 행생즉사'다.
- [11] 고니시는 대마도주였던 소 요시토시의 장인이기도 하다.
- [12] 戰則戰矣 不戰則假道:죽을래 비킬래?//戰死易 假道難:죽고말지 못비켜ㅅㅂ
- [13] 당시 히데요시는 물론이고 거의 대부분의 왜장들은 한문을 몰랐다. 한문을 모르는 것뿐만이 아니라 자기 이름도 일본어로 쓸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 [14] 실제로 임진왜란때 일본군과 명군의 여자를 다루는 방법이기도 하다. 강간후 살해가 기본 행동방침.
- [15]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이번에 진주로 가는 우리 일본 군대가 30만 명이나 되니 아마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편지를 보내어 은밀히 알려』 진주 백성들로 하여금, 미리 예봉(銳鋒)을 피하게 하라. 그렇게 하면 우리 일본 군대도 성이 텅 비고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는 곧 철병(撤兵)하여 동쪽으로 돌아올 것이다.
- [16] 선조 40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7월 10일(임술) 8번째기사
- [17] 이 소설은 사실 90년대 초반 이후 절판되었다가 2012년 이십여년만에 5권으로 재출간되었다. 전쟁 자체보다 외교 문제를 많이 다룬다. 임란 수년 전부터의 일본과 쓰시마의 상황이라든가, 1593년즈음부터 정유재란 직전까지의 심유경과 고니시의 행적등을 집중적으로 다룬 책이다.
- [18]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선조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부터 힘없는 백성들까지 객관적으로 묘사된다. 등장인물도 엄청많다. 그중에서도 고니시의 비중이 많다.
- [19] 오히려 작가는 고니시나 가토같은 무장들보다는 '무능한 통치자는 용서할 수 없는 죄인임'을 밝히며 당시 삼국의 지도자들, 즉 조선의 선조, 명의 만력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 [20] 용의 눈물에서 정몽주 역,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 정승화 참모총장 역을 맡았다.
- [21] 사실 데미지 자체가 잘 박히는건 기병인데 보병 유닛들의 맷집이 워낙 약하고 물량위주로 운영하는데다 풍백술의 지속시간이 길어서 보병학살용으로도 잘 쓰이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일꾼에게도 잘 먹힌다. 해상전에서도 장수가 나서는건 제한되어 있으므로 쏠쏠하게 도움이 되겠지만 건물 자체를 터뜨리기 위해 쓰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 [22] 폭뢰격, 즉 범위 내 메카닉과 건물들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주변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는 기술이 생기는 검 무기다.
- [23] 고니시 유키나가의 관직이 셋츠노카미였다.
- [24] 1575년 패도의 장 플레이 시에는 아예 직업이 상인이다. 아버지 아래에서 일하게 된다.
- [25] 사실 쥬베이는 아이들을 죽이지 않고 그냥 지나갔지만 그 직후 나타난 가신이 아이들의 목을 친 후 아마쿠사에게 쥬베이가 죽였다고 거짓말을 한 것인데 이로 인한 분노로 폭주하는 아마쿠사의 초능력에 위기에 빠진 쥬베이가 아이들의 목을 이용해 그를 쓰러뜨렸다.
첫댓글 한국의 개신교 목사들이 임진왜란 때 고니시를 막은 이순신을 사탄 취급한다는 얘기가 돌기도 했다. 발단은 이러하다. 누군가 순복음교회 신앙 상담 게시판에 낚시성 질문을 올리고 낚시에 걸린 담당자가 "고니시를 물리친 우리 조상들이 잘못한 것"이라는 희대의 병크 답변을 하여, 짤방화되어 사방으로 번졌다.[8] 개신교는 애초에 가톨릭과 동질 종교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점[9]을 생각하면, 순복음 담당자의 국사에 대한 상식부족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이순신 장군이 했던 명언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오,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다."라는 말은 성경에도 나오는 말이기에, 일부 개신교 목사들은 성경책을 접했다고 떠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