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https://brunch.co.kr/@eeessay/117
주말에 카페에 갔다. 친구와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어디선가 귀가 찢어질 것 같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카페의 모든 사람이 그쪽을 쳐다봤다. 어린아이가 호루라기를 분 거였다. 나는 아이 곁에 보호자가 있는 걸 확인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다시 “삑!!” 소리가 났다. 한번은 몰라도 두 번 나서는 안 되는 소리였다. 이번엔 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다시 한 번 모든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사람들의 눈초리가 느껴졌는지, 아이의 보호자가 아이를 향해 손짓했다.
“쉿.”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호루라기를 들어 올려 입에 넣었다 빼며 간헐적으로 그걸 불었다. 보호자는 두 번에 한 번 꼴로 아이를 지도했다.
“쉬잇.”
물론 카페에서 호루라기를 불도록 내버려 두어야만 하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라면, 처음 아이가 호루라기를 분 순간에 제지하며 그걸 빼앗았을 거다. 아이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준 것을 깜빡한 나를 자책하면서.
그 애는 그걸 불고 싶었을 수 있다. 애들은 원래 그러니까. 그러나 그곳은 호루라기를 불 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 부모는 왜 아이의 호루라기를 빼앗지 않았을까.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 않고 공공장소에서의 규칙을 지키는 것보다 제 아이의 자유의지를 꺾지 않는 게 더 중요해서였을까.
비슷한 사례는 사오정 입 속의 나방처럼 쏟아져 나온다. 젊은이더러 제발 철 좀 들라느니, 요즘 애들은 답이 없다느니 하는, 전근대부터 전해져 오는 유구한 어린이의 특성을 문제 삼으려는 게 아니다. 원래 애들은 그렇다.
그러나 자녀의 내적 평화가 너무나도 중요한 나머지 그 모든 미숙한 행동들을 결코 바로잡을 생각이 없는 부모는 확실히 자기 자신을 되돌아봐야 한다. 아이를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키워내야 하는 부모로서의 책임을 방기 할 뿐만 아니라 그걸 돕는 교사의 역할까지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기똥찬 말을 들었다. ‘가정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내 자녀는 사회에서 상처받으며 독학한다’는 거였다. 맞는 말이다. 부모가 아무리 아이를 귀하게 키우려 안간힘을 써도, 아이는 종국에 이 거친 세상을 사는 법을 배우고야 만다. 그걸 가정과 학교에서 배우느냐, 혹은 사회에서 상처받으며 독학하느냐의 차이일 뿐. 아이 마음에 굳은살이 생기게 하지 않겠다는 부모의 욕심은 한동안 아이의 고양감을 드높일 테지만, 그 애는 '사는 게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걸 깨닫는 순간 부모가 꾸며준 세상과 진짜 세상 사이의 낙차를 겪어내야 한다. 원래 사는 게 그러니까.
가끔 막연하게, 어쩌면 포모증후군이 가장 만연한 영역은 육아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이를 낳는 순간 꼭 해야만 하고, 잘해내고 싶고, 겪어본 적 없는 사랑이 온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분야. 경험이 많지 않은만큼, 잘 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비교하고 확인하며 정성을 쏟는 분야.
애지중지 키운 아이는 부모의 우주가 된다. 부모는 본인이 겪어온 투박한 세상과 그 속에서 상처받은 기억들을 떠올리며, 자기 자녀에게만은 그런 기억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고로 아이는 사랑으로 점철된 무균실에서 배양된다. 세상이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장갑을 끼지 않고 그 아이를 대하는 순간 부모는 심장이 내려앉는 공포를 느낀다. 네가 뭔데 감히 내 아이에게 상처를 주냐, 는 게 그들이 화나는 주된 이유다.
그리고 이런 기조는 출산율이 바닥으로 처박은 국가의 정책과 아주 잘 맞아 들어간다. 어린이 한 명 한 명이 너무 귀한 나머지 어린이들의 인권은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신장된다. 고등학생은 화장실에서 교사를 불법촬영하더라도 퇴학조차 되지 않는 반면, 교사는 현장체험학습 중 학생에게 사고가 났다는 이유로 기소당하는 식이다. 운과 우연과 도로사정을 통제해서 어린이의 안전만큼은 어떻게든 보장하라는 게 국가의 요구인데, 고작 선생 나부랭이더러 무슨 수로 ‘사고’를 막으라는 건지 모를 일이다.
학교는 점점 더 따뜻해지고 있다. 학생을 대하는 교사의 말도, 행동도 그렇다. 딱 그만큼 학부모의 속은 쉽게 상한다. 난 그게 사회가 그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따뜻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건강하게 자라는 적정 온도를 용납하지 못하니 아이들의 정신력에 더하여 부모의 속까지 자꾸만 짓무르는 거다.
그러니 그들은 교사가 자녀를 볼 때 ‘웃지 않아서’ 속이 상한다. 학부모에게 보내는 교사의 문자에 이모티콘이 들어있지 않아 속이 상하고, 알림장에 ‘빨간색’ 볼펜으로 글씨를 써서 속이 상한다. 시험지의 문제를 하나하나 동그라미 치지 않고 한 페이지에 한 개의 큰 동그라미만 그려서 속이 상하고 자기 아이가 마피아 게임에서 마피아를 하지 못해서 속이 상한다. 학교에서 똥을 싸고 온 자녀 똥꼬에 똥이 묻어 있어서 가슴이 찢어지고 아이에게 물만 주고 이온음료는 주지 않아서 억장이 무너진다.
학교는 자꾸 속이 썩어가는 학부모의 전화를 받느라 바쁘다. 그들의 속이 상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창의적이라 예방책이 없기 때문이다.
5학년인 우리 아이가 목이 마를 텐데 물을 잘 챙겨 마시는지 챙겨봐 달라, 아이가 아침에 집에서 속상한 일이 있었으니 마음을 어루만져 달라, 아이가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는데 학교에 가기 싫은 건지 이야기 좀 나눠달라, 내가 학부모 상담에 가지 못해서 아이가 속상해하는데 선생님이 달래 달라, 왜 우리 애한테 인사하라고 가스라이팅하냐, 아이가 체육시간에 힘든 활동을 못할 텐데 체육선생님께 직접 말씀드리기 부끄러워하니 담임선생님이 말씀해 달라, 애가 주머니에 손 넣고 말한다고 해서 ‘빼고 말하라’고 하는 건 너무 강압적이다, 아이 방과후학교 신청시키고 싶은데 우리 애 좀 설득해 달라, 왜 상처에 메디폼 안 붙여주고 밴드를 붙여주냐, 우리 애가 학교 외부에서 상을 받았는데 자부심 느낄 수 있도록 교실에서 시상해라, 선생님이 다른 친구를 공개적으로 칭찬해서 우리 아이가 의기소침해하고 불편해한다, 우리 애가 학교에 지각 안 하게 해 달라, 지각 할 수도 있지 왜 혼내냐, 우리 애 글씨가 엉망인 건 담임 탓이다, 우리 애는 연필 잡는 습관이 있는데 왜 바른 자세를 강요하냐, 영어 단어 외우게 하니까 애가 스트레스받는다, 우유가 차갑다, 우리 애가 왜 앞자리에 앉아 있냐, 담임 마스크가 검은색이라 좀 그렇다, 우리 아이 반 친구들이 궁금하니 다른 학생들 사진 찍어 올려라, 학교 주차장에 왜 주차를 하냐, 담임 전화번호가 뭐 얼마나 대단한 개인정보라고 그걸 안 알려주냐. 뭐 이런 식이다.
교사들은 이 도시 괴담 같은 민원들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다. 자녀가 뭔가를 잘 못하는 건 잘 가르치지 못한 교사 탓인데, 뭔가를 가르치려고 하면 ‘왜 애가 싫다는데 억지로 가르치냐’는 민원이 동시에 날아든다. 학교더러 모든 걸 해내라고 요구하지만 학교를 한 치도 믿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발가락 물집이 된 기분이다. 그냥 뭘 하든 못마땅하고 거슬리는 존재인 거다.
읍소하건대, 교사에게 모든 걸 ‘해달라’고 요구하지 말고, 아이가 할 수 있도록 교육하길 바란다. 직접 교육하기 힘들면 교사에게 가르칠 권한이라도 허하길 빈다. 목이 마른데 물이 없으면 선생님께 말씀드리라고 가르치고, 체육 수업 때 하는 활동이 너무너무 힘들면 선생님께 직접 말씀드릴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힘든 일을 대신해주는 게 사랑이 아니다. 언제까지 대신해줄 건가. 스무 살? 쉰 살? 부모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평생 대신해 주거나 적당한 시기에 가르치거나. 만약 후자를 선택할 거라면 지금이 적기다. 심지어 어린이들은 말도, 자전거도, 삶의 태도도 훨씬 빨리, 잘 배운다. 아이를 과소평가하지 마라. 당신의 자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유능하다.
더불어 부모가 직접 아이와 얘기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아이가 너무 귀해서 나라에서 대신 키워주겠다는 게 최근 정책의 흐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모의 역할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요즘 왜 이렇게 일어나기 힘들어하니, 혹시 무슨 일이 있니, 엄마가 학부모 상담에 못 가서 속이 상하구나, 다음에는 꼭 갈게, 방과후 학교 수강했으면 좋겠는데 네 생각은 어떠니, 우리 딸 상 받았네, 축하해, 오늘 가족끼리 외식할까. 이런 식의 칭찬과 공감과 마음 읽어주기는 가정에서도 할 수 있다. 아니, 가정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소통은 가정에서 해야만 한다. 도대체 왜 자녀와 소통할 소중한 기회를 교사에게 양보하는가.
그리고 배우는 과정은 원래 힘들고 귀찮고 짜증 난다. 본능을 거슬러야 하기 때문이다. 연필 잡는 습관을 고치는 것도, 영어 단어를 외우는 것도, 친구가 칭찬받는 걸 지켜보며 솟구치는 질투심을 달래는 것도, 사람을 보면 인사를 하는 것도, 어른 앞에서 굳이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말하는 것도 그렇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수반되는 감정이 때로 불쾌할지라도, 야생 늑대인간으로 클 게 아니라면 참고 배워야 한다. 고난을 극복할 힘은 고난을 극복해봐야 길러진다. 아이가 마냥 기분 좋게 살게 하는 게 교육의 목표가 아니다.
또한 아이들은 타인과 섞여 살 수밖에 없다. 아이는 자기 삶의 주인공이지만 세상의 주인공은 아니다. 고로 앞자리에 앉을 수도 있고 뒷자리에 앉을 수도 있다. 공동생활을 하는 학교에서의 부상 처치는 집만큼 정성스러울 수 없다. 부러진 팔에 연고를 발라놓는 수준의 엉터리 처방이 아니라면 민원을 참아주기 바란다. 아이가 걷는 모든 길의 차를 치워버릴 수 없으며 주차장에는 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 내 아이의 초상권만큼 다른 아이들의 초상권도 중요하다. 담임 전화번호는 개인정보다. 왜 알려주지 않냐고 욕할 일이 아니다. 교사는 내 아이가 필요할 때마다 전화하는 24시간 대기조가 아니라 교육자일 뿐이다. 내 아이에 맞게 모든 세상을 최적화시킬 수 없다. 세상을 아이에 맞추라고 소리치기 전에 아이가 세상에 맞춰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아이는 사는 내내 부대낄 거다.
마지막으로, 별 거 아닌 일은 별 거 아닌 일로 넘어가야 부모 본인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담임 마스크가 검은색이라도, 알림장 글씨가 빨간색이라도 아이들의 인생에 큰 트라우마를 남기지 않는다. 시험지에 큰 동그라미가 한 개이든, 작은 동그라미가 다섯 개이든 그 문제를 맞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번 마피아 게임에서 마피아를 못 했으면 다음에 하면 된다. 똥꼬에 똥이 묻었으면 똥 닦는 법을 다시 가르치고 속옷을 빨면 된다. 별 일 아니다.
학교에서 뭘 가르칠 수가 없다는, 아니 그전에 도저히 살 수가 없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학생인권조례 폐지 움직임이 일자마자 정치권에선 부지런히 ‘학생인권특별법’을 내놨다. 이제 학교는 좀 더 박살이 날 거다. 이때껏 상술한 모든 사례는 법에 의거하여 아동학대로 시비가 걸릴테고, 무고를 입증해 내는 법적 다툼 과정은 교사의 몫일 테니까.
나는 학생을 학대할 생각이 없다. 가르치고 싶을 뿐이다. ‘세금을 받으면서 왜 일을 하지 않냐’는 말은 이럴 때 해야 한다. 누구든 해주길 바란다. 교사에게 왜 가르치지 않냐고 묻고, 가르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지금의 현실에 대해 듣고, 적어도 학교에서만큼은 가르칠 수 있도록, 그래서 아이들이 사회에서 상처받으며 독학하지 않도록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또한 부모는 아이의 사회생활과 배움을 방해하지 말고 한걸음 물러서야 한다. 그거야말로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자 행해야 할 책임이다.
**제목에서 밝혔듯 이 글은 일부 '몬스터 페어런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훌륭한 부모님들이 많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
첫댓글 와.. 민원 읽기만 했는데도 미쳐버리겠는데 선생님들은 어떻게 견디고 받아주는거야? 욕이 절로 나오네..
저게 실제 민원들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