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시기에 겨울 감기를 앎은 사람이 주변에 있었다. 통 연락이 없어 이상하다 생각하며 지나치다. 오후 늦은 시간 산막에 머물며 눈을 치우고 실내로 들어 작업복을 정리한 후 더운물 샤워하고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실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안락의자 곁에 늘 세워두는 이동용 협탁에 전화기가 놓여 있음을 깨 닫고 자리를 옮겨 전화기를 들고 창가에 섰다. 하염없이 날리는 눈보라를 보면서 말문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동안 많이 아펐다는 이야기와 주변 사소한 이야기를 나눈 후 컨디션 회복을 위하여 무엇인가 하자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겨울감기 증세에 시달리고 난 후 따끈한 탕종류를 선택하여 먹은 후 약 두 시간 정도의 하이킹을 즐기면 신체 오감에 대한 컨디션을 끌어올릴 수 있는 경우가 경험적으로 많다. 겨울감기는 목감기가 우선적으로 발병하는 경우가 많다. 목이 괴로우면 호흡기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럴 때 등산을 통해 폐에 자극을 주면 원활한 기능으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우선 날숨과 들숨이 편하면 다른 여타 기관도 덩달아 컨디션이 오르게 된다. 그리고 쉬며 행동을 줄이게 될 경우 근육량이 달아나 걷는 것조차 힘들 경우도 생기는데 이럴 때 가파른 길을 걷고 내려오면 건각이 바로 잡힌다.
단 그런데 이런 행동을 하기에 앞서 성숙된 조건을 준비하는 것을 잊으면 안 되는 것들이 있다., 모자, 장갑, 마스크, 목도리, 보온, 방풍 옷과 따듯한 차 종류, 열량이 높은 약간의 행동식을 꼭 준비하고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고 가는 길에 소요되는 시간도 두 시간 안쪽으로 편성해야 한다. 그리고 내려온 즉시 실내로 이동하여 가벼운 샤워 후 휴식을 취하며 보양식을 챙기면 금상첨화가 되는 것이다. 산막에서 귀경 후 우선 캐나다로 이민 간 친구가 귀국하여 우선 만난 후 연락을 다시 하기로 한 후 전화를 끊었다. 귀경 다음날 서울 모처에서 만난 친구 참 반가웠다. 오랜만에 귀국하여 개인적으로도 바쁜 일정이 많았을 텐데 나를 꼭 보고 가야 한다고 시간을 비워 놓은 것이다. 좋은 부위만을 엄선해 놓은 고깃집으로 옮겨 구워가며 오랜 시간 마주 앉아 술타령을 나누었다. 적당히 과음을 조절해 가며 먹어도 주량이 상당한 날이었다. 이젠 10시간 이상 비행동선이 무척 부담이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니 비슷한 경우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시간 한 동작으로 묶여 있다 보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도 많은 부담이 오는 것은 사실이다.
공유하는 것이 참 많은 것이 친구사이이지만 병드는 것만큼은 피하자는 이야기를 거듭거듭 나누면서 이별의 아쉬움 때문에 겨울 가락국수를 잘 끊이는 집으로 자리를 옮겨 간단하게 요기하고 이야기를 더 나누다 헤어졌다. 다음날 서로 잘 귀가하였는지 챙긴 후 가만히 생각하니 먹은 주량에 비해 숙취가 없었다. 기분 좋게 보고 만나 나눈 일들에는 탈이 없다는 것이 사실로 입증된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에 형편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다.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생각과 행위도 천차만별을 이루는 모양이다.
일전에 약속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계획을 잡았다. 12시경에 만나 점심을 먹은 후 남한산성 북문으로 오른 후 돌아 내려오자 계획을 잡은 후 만나 점심을 챙겼다. 그리고 차를 이용하여 북문으로 접근하기 좋은 황골 능선 아래 주차장으로 다가섰다. 스틱을 꺼내 알맞게 조절한 후 손목, 어깨, 발목과 무릎관절 등을 준비운동으로 풀어놓고 서서히 오르기 시작하였다. 눈 길이 참 좋고 설경이 아름답게 다가왔다. 이쪽 방향 길은 대부분 s자 형태로 길이 꺾어져 있는 곳이 많은 곳이다. 특히 경 시지에는 s자 길이 여러 번 반복해서 길게 늘어져 있다. 그것은 바로 청나라 군대가 침략해 왔을 때 인조는 급하게 궁궐을 버리고 강화도로 피난하려다 길이 막히자 엄동설한을 뚫고 남한산성으로 숨어든 역사와 관련이 깊다. 1636년 12월 14일 인조는 남한산성에 입성한 후 다시 강화도로 가려고 하였으나 길이 미끄러워 포기한 후 남한산성에 눌러 앉는다. 12월 16일부터 청군 4000여 명의 군사가 남한산성 주변에 배치되기 시작하면서 그 후 크고 작은 전투가 시작된다. 작은 전과를 올리고 있던 조선병들은 12월 29일 북문에서 대대적인 전투를 벌여 전투에 참전했던 병사들이 청군으로부터 섬멸을 당하게 된다. 이 전투 후 사기가 꺾인 조정은 화친의 길로 기울기 시작한다. 당시 12월 29일 전투와 관련하여 중정 남한지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술사가 말하기를 – 오늘은 화친과 싸움이 모두 길하다 – 이에
김류가 이 말을 믿고 한편으로 화친을 청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접전을 벌이고자 하였다. 이에 나만갑이 박광에게 말하기를 -싸움을 하려 거든 싸움을 하고 화친을 하려 거든 화친을 할 것이지 하루 동안에 어떻게 화친과 싸움을 할 수 있겠는가? 이는 진실로 노래를 부르고 곡하는 일을 한꺼번에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하였다.
이날 날씨가 다소 화창하여 군사들 얼굴에 생기가 났다. 김류가 동서남북 네 성의 장수를 불러 명하기를 – 남성 아래에 적의 진영이 매우 엉성하니 각각 정예군을 내어 무찌르도록 하라- 하였다. 네 성의 장수들이 좋지 않은 계책이라고 극구 말렸지만 김류는 듣지 않고 친히 장졸을 거느리고 북문에 앉은 채 대장의 깃발과 북을 세우고 병기를 휘두르면서 싸움을 독려하였다.
총수 300여 명이 북문에서 산기슭을 따라 내려가니 성 아래 계곡이 굽어 돌은 곳에 오랑캐의 기병들이 곳곳에 매복하고 있었다. 오랑캐는 다섯 군데에서 출군 하여 100 여기는 고군의 남쪽 4-5 백보 되는 거리로 물러가 주둔하는 한편 약간의 군사와 소, 말을 머물러 놓고 우리 군사를 유인하였다. 김류가 깃발을 휘두르며 진군할 것을 명령하였지만 우리 군사들이 산을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김류가 비장 유호를 시켜 진군하지 않는 자들을 목을 베개 하자 이에 유호가 만나는 사람마다 함부로 찍어 죽였다. 이에 어영 군 300여 명이 비로소 내려가서 미끼로 머물러 놓은 군사와 우마를 취하였는데 오랑캐는 못 본 척하였다. 우리 군사가 성책을 넘어 인솔하는 장수가 없어 대오가 헝클어지면서 진을 이루지 못한 채 제각각 오랑캐와 싸웠다. 김류가 또한 화약과 탄약을 절약하기 위해 쏘는 대로 지급하도록 하였기에 때문에 총을 쏠 때마다 화약을 청하는 소리가 골짜기를 흔들었다.
오랑캐가 비로소 말을 채찍질하여 돌입하였는데 나는 것처럼 빨랐고 복병이 사방에서 일어나서 곧장 우리 군사와 충돌하였다. 이에 우리 군사는 총 한방, 화살 한번 쏠 겨룰 없이 순시 간에 300여 명의 군사가 섬멸되어 돌아온 군사가 없었다. 별장 신성립, 지여해, 이원길 등이 모두 죽었는데 오랑캐 군사는 죽은 자가 겨우 두 사람뿐이었다. 처음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 송책을 불사르면 우리 군사가 진격하는데 거칠 것이 없을 것이다- 하니 김류가 명하여 불사르게 하였다. 오히려 송책이 타버린 후에 오랑캐가 우리 군사를 공격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이 전투가 바로 뼈아픈 법화골 전투이다.
유호가 또한 초관에게 죄를 돌려 제대로 퇴군하지 못했다 하여 베어 죽이니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게 여겼다, 김류가 스스로 싸우다가 스스로 패배하고는 허물을 돌릴 곳이 없게 되자 북장성 원두표가 구원하지 않은 탓이라는 핑계를 대어 장차 극죄에 처하려 하자 좌상 홍서봉이 말하기를 – 수장이 군율을 어기고서 부장에게 죄를 돌려서야 되겠는가- 하자 김류가 마지못해 대궐에 엎드려 대죄 하였고 원두표의 중군을 장을 쳐서 거의 죽게 하였다. 이로부터 조선군은 사기가 저하되어 더 이상 출전하려는 뜻이 없어졌고 조당에서도 또한 화친하는 것에 전념하게 되었다.
12월 29일 당시 청군은 산성 포위 병력은 8천700명이었으며 한양 약탈병력은 1만 1천 명이었다.
1월 1일은 청나라가 탄천에 진을 쳤으며 그 숫자가 30만 명에 이르렀다 누런 우산을 펴고 성의 동쪽 망월봉(벌봉)에 그들이 올라 성 안을 내려다보기 시작하였다. 이후 수차례 전투는 이어졌고 전세는 갈수록 남한산성이 불리해져 갔다. 1월 29일 최명길이 척화를 주장하는 신하 교리 운집과 수찬, 오달제를 잡아 국서를 갖고 청나라 진영으로 갔다 이어서 삼전도로 내려가 인조는 굴욕의 시간을 보낸 후 전쟁은 종료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심양으로 끌려갔고 세자와 세자빈 그리고 봉림대군도 불모가 되어 그들과 함께 떠났다.
눈이 제법 쌓여 있었다. 공략의 대상 된 북문,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길에서 벌어진 당시 전투에 대한 역사 기록물을 반추하며 서서히 고도를 높여 나갔다. 병자호란을 경험한 조정에서는 남한산성을 재정비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망월봉에서 쏜 대포에 혼란을 겪었던 기억을 살려 본성에 덧붙여 외성을 새로 쌓기 시작하여 망월봉까지 성에 포함시킨다. 우리가 걷는 길에서 그 성곽이 바로 정면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옆으로 법화사라는 절터도 보인다. 특히 겨울철에는 활엽수들이 빈 공간을 만들어 주어 너무 잘 보인다. 법화사 전투에서 사망한 청태종의 처남 양고리 장군은 조선군 원두표 장군의 계략에 말려 전사한 곳에 매부 청태종이 법화사를 지었다는 곳이다. 법화사지는 현재 문화재자료 제86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중이다. 아래 사진은 법화사 대웅전 아래에 있는 부도탑 모습이다.
급경사를 치고 오르자 드디어 성곽과 마주하게 되었다. 오른쪽으로 성곽을 따라 경사지를 오르면 서문 옆에 동암을 이용하여 산성으로 들어갈 수 있고 우측으로 돌아가면 길쭉한 외성 안으로 들어 가 산성밖 산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이곳은 바로 남산과 한강 너머까지 한눈에 보이는 곳이다. 이곳에 봉수대를 만들어 놓았다.
현재 북문은 재건축 중이라 사용할 수 없다. 원래 공시한 공사기간 보다 늘어지고 있다. 문화재를 복원하거나 해체 후 다시 복원하려면 예정한 기일보다 공기가 점점 늘어지는 것이 상례다. 그 이유는 발굴해야 할 유물들이 발견되어 공사의 발목을 잡는 경우가 참 많다. 원래 산성이나 도성에 북문은 열지 않고 닫는 것이 상례였다. 북문을 열어두면 풍기문란이 생긴다는 이유에서인데 이보다 북쪽 오랑캐가 쳐들와 능욕을 당하는 여성들에 대한 보호목적에 기인한 의식이라는 설이 강한 편이다. 세월이 바뀌면서 실용주의에 입각하여 한양도성 북문 숙정문도 열었고 남한산성 북문인 승전문도 열어 두었다. 북문 뒤 배경 도시가 급속하게 발전하여 이곳으로 찾는 이들이 많을 것이라는 예상에서 산성 내 거주하며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의 요구가 반영된 것이다. 그리고 법화골 전투에 패배 후 남한산성 성문들 이름도 다 바뀐다 특히 북문은 패배의 쓰라림을 극복하라고 승전문으로 바꿨다. 이때가 바로 정조대왕 때였다. 역사의 뒤 안 길을 살피며 오르다 보니 어느새 높고 길게 늘어진 성곽가 마주하게 되었다.
성외곽을 돌아 나가다 원점회귀 목적으로 되돌려 소나무가 울창한 숲길을 이용하여 내려섰다. 소나무 가지에 걸려 있던 눈뭉치들이 솔바람에 밀려 머리 위로 한 움큼 떨어지면서 나비가 되어 흩어지는 눈의 빛에 오색이 창연하였다. 눈과 소나무의 너무 멋진 조합이었다. 불현듯 추사 선생이 제주도 유배지에서 그린 세한도가 떠 올랐다. 간결함에 극치, 여백을 예술로 승화시킨 멋진 작품이라 이를 공감한 동북아의 많은 지식인인들이 다투어 자신의 마음을 부전지에 적는 영광을 누리려 달려들어 그림의 길이가 저절로 길어졌다는 세한도, 새삼 그 마음가치가 팽창되어 창대해진다. 소나무 그늘에서 점점 멀어지는 산 길에서 나는 추사를 연모하고 있었다. 충만보다는 여백을 사랑해야 할 나이가 된 탓일 것이다. 눈을 털고 스틱을 접어 집에 넣은 후 지퍼를 채웠다. 그리고 오른손을 들어 동행인에게 악수를 청하였다. - 폐 좀 열렸는지요? 호흡이 좋으면 만사도 좋은 것입니다. - 그렇다고 공감한다. 요즈음 들어 참 쓸쓸한 행색이 깊게 다가오는 지기다. 평생의지하며 살던 사람이 떠나고 부터 바끤 모습이다. 모든 것이 힘든 형극으로 다가 온다. 새해벽두 다시 마음과 폐를 열어두는 피정 같은 산행을 약속한 후 지하철 역 지나는 길에 내려 주어 귀가 길이 참 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