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인제대학교교직원 사진동우회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 사진과 문학 스크랩 음악 나그네의 옛이야기 / 신촌블루스(박인수)
풍운 추천 0 조회 5 08.07.07 08:4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나그네의 옛이야기 / 신촌블루스(박인수)

오솔길을 거닐며 옛생각에 젖어 보네
하늘 떠다니는 구름 내마음같다
종일토록 헤매이나
좁은 신작로길 멀리 달려가는
시외버스 먼지속에
옛날 철모르던 아이들 시절
꿈처럼 떠오르네
이젠 다시 못올 아름다운 무지개 시절
풀밭 언덕위로 바람 불어가고
내마음 근심걱정 하나없던 행복한 시절
언제나 다시 다시 돌아오려나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 보면서
옛 노래를 불러보네
텅빈 머리속을 돌아 맴도는
나그네의 옛 이야기
신촌블루스 : 1집 /그대없는 거리 (1988)
봄 비/신촌블루스(박인수)
이슬비 내리는 길을 걸으면
봄비에 젖어서 길을 걸으면
나 혼자 쓸쓸히
빗방울 소리에 마음을 달래도
외로운 가슴을 달랠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눈 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
언제까지 내리려나 마음마저 울려주네
봄비 외로운 가슴을 달랠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눈 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봄비 나를 울려 주는 봄비
언제까지 내리려나 마음마저 울려주네
봄비 외로운 가슴을 달랠길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눈 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요계의 풍운아 박인수
1960년대 중반 미8군가수로 출발해 1970년대 공전의 히트곡 <봄비>로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최고의 솔 가수로 군림했던 풍운아 박인수.
그는 임희숙, 펄시스터즈, 하사와 병장의 이경우 등 후배들의 음악영웅이었다. 가슴에 비수를 꽂듯 애절하고 터질 듯한 가창력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는 무책임한 방랑벽으로 자신의 음악재질을 탕진했던 가요계의 아웃사이더이기도 하다.
최근 저혈당으로 쓰러져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초췌한 모습이 언론에 공개되어 가요계를 발칵 뒤집어 놓기도 한 그는 한국전쟁이 빚어낸 우리들의 일그러진 음악영웅이기도 하다.
본명이 백병종인 박인수는 1947년 9월 3일 평북 길주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때 이북에 부친과 형을 남겨두고 어머니와 함께 남하했다.
하지만 전북 정읍의 열차 안에서 어머니의 버림을 받고 7세 때 고아 아닌 고아가 됐다. 어머니에게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부친은 일본에서 건축 설계를 전공해 중앙청 설계에 참여했던 유명한 건축업자로 대중음악에 관심이 지대해 섹서폰 클라리넷 기타 장구 거문고 등 다루지 못하는 악기가 없고 창도 구성지게 잘 불렀다.
부친의 음악성을 이어받은 어린 박인수는 한번들은 노래는 바로 부를 수 있었기에 기차 안에서 실향민들의 감성을 어루만지는 트로트를 불러 연명했다.
그 후 여러 고아원을 전전하다 문산 미24사단을 거쳐 전라도 고창으로 내려가 초등학교를 다니다 춘천 미군 비행장으로 옮겨 춘천초등학교를 2년 간 다니는 방랑의 유년시절을 보냈다. 이후 서울 후암동 미8군으로 올라와 삼광초등학교 4학년 때 미8군 어린이 교육봉사회에서 미국인 선교사 토마스 엔드류 영의 눈에 들어 1960년 12세 때 미국켄터키 루이스빌로 입양되어 갔다.
미국에서 흑인들이 거주하는 할렘에서 접한 리듬앤블루스나 솔 리듬은 외톨박이의 외로움을 달래주었다. 박인수는 “당시 샘 쿡, 레이 찰스등의 음악을 많이 들었다. 스타이벌스 중학교를 마치기도 전 ‘김치를 먹는다’고 핀잔을 주는 양부모와의 불화가 심해져 어머니를 보고 싶은 마음에 1962년 홀로 귀국했다”고 말했다.
귀국한 그는 미8군내 학교를 다녔지만 학업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시내의 음악감상실을 쏘다니느라 끝내 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이후 박인수는 틈틈이 배운 팝송 레퍼토리와 미국에서 몸에 밴 흑인들의 리듬감으로 1965년 대영프로덕션의 오디션에서 A등급을 받고 8군 무대에 데뷔해 고 최용환이 리더였던 미8군 하우스밴드 코끼리브라더스에서 노래생활을 시작했다.
흑인 특유의 한에 찬 노래들을 기막히게 소화해 내는 가창력으로 화양, 유니버샬, 대영 등 미8군의 쇼프로덕션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며 키보이스, 샤우터즈, 데블즈, 바보즈 등 수많은 미8군 밴드들의 객원가수로 활동했다.
이후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박인수는 일반무대와 미8군 여군들의 스타로 떠오르며 라이브무대의 황제로 통했다. 소문을 들은 신중현은 1967년 박인수를 찾아와 음악인연을 맺었다.
신중현은 “박인수는 영어 발음이 좋고 손을 비비며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노래 부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했다. 1966년 ‘키보이스’와 함께 청계천 3가 센츄럴 호텔 나이트클럽에 진출한 이후 1970년대 중반까지 청계천 3가 맘모스 나이트클럽, 타워 나이트클럽, 미도파 살롱 등 에서 활동하며 일반무대에서도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대학생 등 젊은 층과 살롱에 몰래 들어온 고등학생들이 그의 음악에 특히 열광했다.
첫 음반녹음은 1969년 여대생 듀엣 펄시스터즈의 <나팔바지> 취입 때 백 코러스로 참여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1970년에 결성된 신중현 그룹 퀘션스의 데뷔앨범에 취입한 봄비가 대히트를 하면서 폭발적인 대중적 인기를 거머쥐었다.
신중현곡 봄비는 1969년 그룹 덩키스의 보컬 이정화가 차분한 보컬로 먼저 노래했지만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같은 곡을 여러 가수에게 취입시켰던 신중현은 폭발적인 솔 창법으로 노래하는 박인수에게 봄비를 부르게 해보았다. 적중했다.
당시 대중들은 “이정화는 봄비고 박인수는 소낙비”라며 다이나믹한 박인수의 봄비에 열광했다. 박인수는 “아이고 세상에. 여대생들이 한 두명 따라 다닌 게 아니야. 밤새도록 집으로 전화하고 찾아와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며 당시의 인기를 전해준다.
1972년 결혼해 후암동에 거주한 박인수는 딸을 낳으며 처음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했다. 생활의 안정을 찾은 그는 소울과 사이키델릭 등 새로운 양식의 음악을 이 땅에 수혈하는 음악전도사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박인수는 “한대수와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1960년대 말 무교동에서 한대수의 통기타 반주에 맞추어 함께 노래를 하곤 했다”고 비화를 전해준다. 그는 선후배를 가리지 않고 “음악공부를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정작 자신도 “공부가 부족해 창법에 아쉬움을 느꼈다”고 한탄한다. 1975년 가요계의 대마초 파동은 박인수의 인생에 거대한 먹구름을 몰고 왔다.
 1975년 박인수는 대마초파동에 연루돼 활동금지의 족쇄를 찼다. 그는 “대마초는 1970년 초 20일 정도 피우다가 대연각 호텔 육교 위에서 던져 버리고 그 후 왜관의 미군부대에 나갈 때 제일 독한 월남제 대마초를 마지막으로 피우고 한번도 입에 대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보적인 그의 독집음반들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발매금지가 되는 고통이 이어졌다. 설상가상 첫 부인이 이혼선언을 하고 미국으로 떠나버려 가정도 깨져 버렸다. 자유분방했던 그는 좌절감에 공연펑크를 일삼고 잠적해 버리는 외톨박이로 변해갔다.
당시는 김추자도 노래할 때의 묘한 손짓 때문에 간첩으로 몰려 곤혹을 치렀을 만큼 반공정신이 드높았다. 홀로 서울 원효로에서 살던 박인수는 몇 번씩 간첩으로 오인되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는 고초를 겪었다.
집에서 릴 테이프로 음악을 듣고 노래하기 위해 헤드폰을 끼고 있는 모습을 창문 너머로 매일 본 마을주민들이 비밀 무전을 하는 것으로 착각해 ‘영어를 잘하는 수상한 간첩’으로 신고를 한 웃지 못할 해프닝이었다.
당시 박인수는 외모 때문에 ‘블루스 박’으로 불렸다. 1970년대 중반 어느 날 단성사에 이소룡 영화 정무문을 보러 갔다. 길게 줄을 선 관객들 끝에 서 있는데 암표를 팔던 장사꾼이 “이소룡하고 똑같이 생겼다”고 소리치자 구경꾼이 모여들었다.
박인수는 “극장에서 내 얼굴을 보더니 무료입장을 시켜 주었다”고 웃는다. 1982년 두 번째 결혼을 해 아들을 낳는 등 가정을 꾸렸지만 여대생들과 어울려 다니자 두 번째 부인도 호주로 이민을 떠나버렸다. 1980년 해금이 된 박인수에게 검은나비의 기타리스트였던 김기표가 음반작업을 제의해 왔다. 불후의 명곡 <당신은 별을 보고 울어보셨나요>라는 독집 음반이 탄생했다.
박인수는 “1980년대에는 이은관이 장고를 치고 거문고에 픽업을 달아서 성주풀이를 방송에서 부르기도 했다. 이은관이 창을 불러 보라 하여 연습해보니 미국의 리듬 앤 블루스와 별 차이가 없었다. 흑인들의 한스런 창법은 우리 판소리와 통하는 면이 있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정착생활에 익숙하지 않았던 그는 지방극장가의 쇼 무대를 전전하며 선후배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신세로 전락해 갔다.
1987년 8월 이정선, 엄인호가 주축이 된 신촌블루스와 인연을 맺으며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한국 록그룹 페스티발’에 함께 나섰다. 신촌블루스의 세션으로 7분40초의 롱버전 <봄비>를 열창하자 “역시 박인수”라는 탄성이 터져 나올 만큼 재기 무대는 성공적이었다.
이후 1988년 KBS TV 젊음의 록 콘서트와 1989년 KBS TV 연예가 중계에 한영애와 하사와 병장 출신 이경우와 함께 출연을 하는 등 방송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1989년 데블스의 리더였던 연석원과 선배가수 김준이 음반제작을 제의해 와 마지막 독집이 된 <뭐라고 한마디 해야할텐데>를 의욕적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상의도 없이 잠적해 버리는 무책임한 방랑벽이 다시 꿈틀거리며 스스로 음악무덤을 팠다. 출연펑크를 일삼는 박인수에게 출연업소인 홀리데이 인 서울은 해고 통고를 했다. 노래외에는 살아가는 방법을 몰랐던 그는 주위에 민폐를 끼치는 가요계의 미운 오리로 전락했다. 1994년 MBC주부가요열창에서 출연요청이 왔다.
하지만 방송출연을 위해 목욕을 하던 박인수는 저혈당으로 쓰러져 연세대 세브란스 응급실로 실려간 이후 가요계에서 또다시 사라져 버렸다.
그 후 가수에서 목사로 변신한 윤항기의 선교원에 기거하던 박인수는 1998년 겨울 이경우가 운영하는 속초 블루노트 재즈클럽에 걸인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경우는 주유소, 영어학원, 지역의 야간업소, 무의탁 노인들이 머무는 양로원 등에 취직을 주선해 정상적인 생활인으로의 터전을 마련해 주려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2000년 가을 서울로 떠나간 박인수에 대해 “객사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고 나돌았다. 그런 그가 2002년 봄 생과 사의 기로에서 허덕이는 병자의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타났다.
자신들의 음악영웅의 처참한 모습에 가수 임희숙과 이경우는 7월 9, 10일 이틀 동안 등촌동 88체육관에서 <리멤버 박인수>라는 박인수돕기 모금공연을 가수분과위 주최로 열었다. 그를 돌보던 일산 행복의 집 정봉인 목사는 수술 전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와의 재회도 주선했다.
박인수는 “나는 헛 살았다. 돈에 너무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제는 음악 자체가 허무하다. 내 육신에서 받아들일 만한 노래가 없었다. 나를 아직도 기억해주는 팬들이 있어 고맙지만 정신이 엉뚱한데 가 있어서 내 음악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숨을 내쉰다.
그러나 그는 “요즘 아이들 노래는 거의 댄스음악이고 랩인데 엉터리다. 스텝이나 창법이 오리지널 랩이 아니다. 예전에 방송국에서 만난 서태지와 아이들에게 충고를 하기도 했다”며 후배 가수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요즘 가수 중에는 신효범의 창법이 독특해. 옛날로 보자면 김추자 급”이라고 칭찬도 아끼지 않는다. 수술 후 건강을 다소 회복했지만 온전한 상태가 아닌 박인수는 불우한 성장환경으로 뒤틀려 버린 황폐한 삶을 이겨내지 못한 한국전쟁의 희생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소울 가수임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