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성도여러분,
시편은 복있는 사람과 그와 연합한 의인들과 악인들의 영적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악인들은 복있는 사람인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받은 자인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기를 거절하고 그에게서 매인 것을 풀고 결박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실로 악인들은 뱀의 후손의 편에 서서 여자의 후손를 대적하고 제거하려 합니다. 시편은 이런 악인들의 길이 아니라 의인의 길에 서서 여호와의 그의 기름부음받은 자인 아들에게 입맞추며 주님밖에는 나의 복이 없음(시 16:2)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인들을 봅니다. 더 마음이 상하는 것은 그 악인들이 세상에서 성공을 누리며 득세한다는 것입니다. 주님 밖에 나의 복이 없음을 마음으로 고백하는 의인들은 혼란스럽습니다. 세상의 복은 악인들이 다 차지하고 그들이 더 잘 되는 것을 볼 때 나의 믿음과 주님의 복주심에 대해서 의심하기도 합니다. 거기다 주님은 이 악인들에게 대해서 왜 가만이 팔짱만 끼시고 방관자처럼 앉아 있기만 하시는가? 하면서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 하나님이 진정으로 지금도 다스리시는가? 의심하게 됩니다.
이런 고민과 당황스러움은 모든 믿는자에게, 의인들에게, 오직 주님 밖에 복이 없음을 고백하는 주님의 신실한 성도들에게도 여전한 의문으로 남아있습니다. 왜 주님은 악인들을 번성하게 하시나? 왜 저런 악인들을 심판하지 않으시는가? 대체 하나님은 지금 이 상황에 어디 계신 것인가? 하는 수많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1,2차 세계대전중에 그 많은 사람들이 죽음으로 내 몰릴 때, 특별히 유태인 900만명중 600만명이 집단으로 살상 될 때에 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신 것입니까? 그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 때 하나님은 대체 무엇 하고 계신 것입니까? 일제가 중국 난징에서 30만명 넘게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 할 때, 일제가 신사참배하지 않는다고 기독교인들을 감금하고 고문하고 학살할 때,북한이 이 나라를 침략해 기독교인들과 민간인들을 죽일 때,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북한의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하시고 그 악인들을 왜 가만히 두시는 것입니까?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지금 직장에서 믿지 않는 상사와 동료가 득세하고 힘을 발휘하는데, 악한 계획과 방법들이 있어야 성공한다는 말이 우리 사회에 공공연한 사실인데, 왜 믿는 자의 자녀가 어려움에 처하고 공부도 상위권이 아니며, 그에 반해 믿지 않는 자들은 물질적으로나 건강상으로나 미래의 투자나 자녀의 직업과 결혼등 모든 점에서 탄탄대로인가? 이런 질문들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시편 본문으로 다음과 같은 제목과 내용으로 설교하고자 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악인들의 행태와 그들의 핵심 사상
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간구
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확신
4.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리시고 일으켜 세우셨다
오늘 본문은 악인들의 교만한 행태로 시작합니다. 악인의 행동의 특징은 교만입니다. 2절에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가난한) 자를 심히 압박” 합니다. 2절의 가련한 자를 ESV는 가난한 자(the poor)로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8절 가련한 자(the helpless), 9절의 가련한 자( the poor), 10절의 가련한 자(the helpless), 12절의 가난한 자(the afflicted), 14절의 외로운 자(the helpless), 17절의 겸손한 자( the afflicted), 18절의 고아와 압제당하는 자(the fatherless and the oppressed)와 같은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10편의 가련한 자는 가난한 자이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압박받고 고통받는 고아와 같은 사람입니다. 참으로 그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고, 그들을 공감해 주고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고 도와야 하는 대상입니다. 그런데 악인들은 그들앞에서 교만합니다. 교만할뿐 아니라 그들을 심하게 압박하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악인들의 이 교만은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바로 그들이 번성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5절에 “그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합니다. 6절에 그들은 마음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아니”한다고 자신하여 말합니다. 여기 두 절의 중요한 단어가 “언제든지( all times)와 대대로(”all generations)입니다. 언제든지 번성하고, 모든 세대마다 대대로 환난을 만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복이요 번성입니까? 그런데 그것이 악인들에게는 교만의 근거가 된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 그렇게 교만해져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또한 교만한 것입니다. 그들은 교만하여서 3절에는 이런 일까지 합니다. “악인은 그의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며 탐욕을” 부립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욕심이 많고 탐욕스러운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그것이 대단히 성공적인 삶인 듯이 자랑합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식자랑, 아파트 자랑, 차 자랑, 미모자랑, 학식자랑, 돈자랑들을 합니까? 그것이 마치 자신이 대단해서 된 듯이 자신들의 탐욕과 욕심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탐욕과 욕심을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서 자랑하는 것입니다. 오직 돈이 모든 것이라는 것이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끊임없이 소비됩니다. 자신들도 티비에 나오는 저 사람처럼 되고 싶은 욕망과 탐욕을 자극합니다. 그들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고 환난을 당하지 않을 견고한 성을 지은 사람처럼 묘사됩니다. 그 자리까지 올라가기까지 많은 고생과 고난은 종교적 간증마냥 감동이 되는 것은 그들이 그 위치에 그 부를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그 위치와 부를 소유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고생은 단순히 고생일 뿐입니다. 저는 때론 그 연예인들이나 매스미디어의 부를 자랑하는 자들의 모습이 우리 교회의 모습과 오버랩되는 때가 가끔있습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교회, 만족하지 못하는 교인들, 목사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욕심을 자랑하고 탐욕을 부립니다. 단지 겉으로는 고상한 척 하는 연기할 때가 참 많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것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악한 자들일 것입니다.
악인들의 교만은 자신의 욕심을 자랑하고 탐욕을 부리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의 교만은 하나님에게까지 이릅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배반하고 멸시”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교만하고 욕심을 자랑하고 탐욕을 부려도 “여호와는 감찰하지 않는다”면서 교만한 얼굴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높아서 자신들에게는 미치지 못하고 그 앞에 있는 대적들도 자신을 해하지 못한다면서 멸시합니다. 그 악인의 마음을 대변하는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입니다.(4절)
이것이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들의 모든 생각과 마음속 저변에 흐르는 핵심 가치 사상은 하나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은 없다. 그것도 모든 사상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이미 창세기 6장에 하나님이 세상 이 땅위에 사람지으셨음을 한탄하신 내용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신 것이 그것입니다.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과 여기 시편 10편의 “그의 모든 사상”은 같이 대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이 악한 것입니다. 악인들은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멸시하고 자신들의 모든 것을 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이것이 실상은 어리석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시 14:1) 그들은 실로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고후 10:5)으로 가득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에 하나님은 나의 모든 행동과 생각을 살펴 보시지 않는 분이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실상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며 악인입니다. 저는 요즘 믿는 자들의 자녀가 믿지 않는 자들과 결혼하는 것을 보거나 믿는 부모의 자녀가 믿지 않는 자의 자녀와 결혼을 반대하지도 않고 허락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도 실상은 하나님이 없다라고 생각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믿는자가 믿지 않는자와 결혼할 수 있고, 믿는 부모가 그들의 결혼을 허락할 수 있습니까? 제가 요즘 더 결혼 문제를 강조하는 것은 우리 아이들이 실제로 믿지 않는자와 교제하고 결혼까지 이르는 경우를 주변에 많이 듣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중국에서 있는데 거기서 북한 외교관과 만나서 사랑에 빠졌다고 합시다. 그리고는 그 사람이 북한의 엘리트이니 결혼한다고 합시다. 여러분 중에 그래 니가 사랑하는 사람이니 결혼해라 하고 허락할 사람 있습니까? 아니 정신이 온전한 대한민국의 젊은이라면 어느 누가 지금 북한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과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그 교제의 열매로 결혼한다고 하겠습니까? 왜 북한 사람은 안되면서, 여기 믿지 않는 사람하고는 됩니까? 어차피 사랑은 국경도 없고 다 같은 것 아닙니까? 북한 가면 개고생이고 인생 끝난다 하니까 사귀지도 결혼하지도 않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믿지 않는자와 결혼하면 그의 영혼은 영원한 지옥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것인데, 그것이 결혼후 많아야 100년 사는 인생이 아니라 영원한 지옥 불구덩이로 들어간다면 북한보다도 더 한 지옥불구덩이로 들어간다면 반대하고 막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북한 사람은 안되고 왜 믿지 않는 자와는 결혼합니까? 바로 그들이 경제력이 있고 직업이 탄탄하고 인물이 좋고 성격이 좋고 자신에게 잘해 주니까 그런 것입니다. 이 사람하고 결혼하면 자신이 언제든지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으며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생각하니까 결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한 자들이 그들의 마음에 말하는 것이고 거기에는 하나님은 전혀 없습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이라는 아는 믿는 부모나 믿는 자녀가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하고 예수님을 잘 믿게 해야 합니다. 지옥 불구덩이에 들어가서 슬피 울며 이를 간다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으니 오직 남는 것은 자신 뿐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교만하고 자신의 것을 자랑합니다. 그들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충만합니다. 그의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습니다. 포악은 사납고 악독한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잔해는 혹독하였던 어떤 현상이 남긴 흔적을 말합니다. 그들의 혀 밑에 잔해와 죄악이 있으니 그들이 말하는 말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의 거룩성이 없고 하나님의 법이 없으니 악한 마음의 생각이 입 밖으로 나오고 혀 밑에 그것이 가득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법이 없으니 그들에게 남은 것은 포악하게 무죄한 자를 죽이고 그의 눈은 가련한 자를 엿보아서 그들에 것을 빼앗아 그들의 욕심과 탐욕을 취합니다. 그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행하는 포악질은 마치 사자가 자기 굴 은밀한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사자보다 나약한 희생물인 가련한 자가 오면 자신이 친 함정인 그물을 끌어당겨서 가련한 희생물을 잡아먹듯이 마을 구석진 곳에 앉아서(사자처럼)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사자가 잡은 희생물을 은밀한 곳으로 끌어다가 먹듯이) 잡아 먹을 가련한 자를 엿봅니다.(8-9절) 이 악인들을 움직이는 동력은 거짓과 포악입니다. 거짓으로 속여서 희생물을 잡는 사자처럼 속여서 포악짓을 가난한 자들에게 하는 것입니다. (10절)
2. 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간구
그렇다면 이렇게 악인들이 거짓과 저주와 포악으로 잔해하는 이 상황에서 신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절입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의외입니다. 간구의 내용이 확신이 부족한 듯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왜? 라고 묻는 질문조의 기도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매번 확신에 차 있어야 된다는 설교를 많이 들은 사람일수록 이 기도는 당혹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신실하게 믿는자가 하나님의 악인들이 득세할 때 바로 반응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당황하며 고민하면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아니며, 또 우리에게 완전하게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시지도 않았으며, 하나님이 완전하게 알리셨다고 해도 우리는 온전히 믿고 신뢰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여정가운데 매순간 고민하고 방황하며 혼란스럽습니다. 그것은 부끄럽거나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온전한 사람이기에 더 이 상황에 하나님이 숨으시고 멀리 서 계신 것 같아서 그 하나님이 속히 움직이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악인들이 득세하고 악인들이 가련한 자를 압제하며 악인들이 모든 생각에 하나님이 없다는 사람과 교제하며 사귀며 그들의 말에 더 귀 기울이면서 그들과 어울려 사는 사람이 신앙인 행세하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득세하는 세상을 보면서 슬퍼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슬퍼하기는커녕 내 일이 아니다 면서 무관심하게 자신의 이익과 번성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진실로 악인은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교회 안에도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고, 하나님이 감찰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않는다는 사람들, 그래서 그들의 자녀의 교육이나 미래의 설계에 전혀 하나님과 교회가 없으며, 그들의 결혼과 미래 삶의 가치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다 하나님이 없다고 마음으로 말하는 악인인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간구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법이 무시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행하지 않는 교만한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자들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악인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이 보지도 않고 심판하지도 않으며 가난한 자를 잊었다고 여깁니다.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11절) 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라고 분명히 증거합니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신다고 분명히 증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이제 일어나시기를 구합니다. 12절입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악인들은 주님이 아무것도 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조롱하지만 주님은 일하시는 분입니다. 일어나다와 손을 든다는 것은 행위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일은 바로 가난한 자들의 소리를 들으시는 것과 악인들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여기 가난한 자들은 단순히 경제적으로 궁핍한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여기 악인들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자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에 가난한자가 빈궁한 자이거나 악인들이 경제적으로 부유한 부자라면, 지금 모든 부유한 자는 악인들이요, 다 심판의 대상이 되고, 가난한 것이 경제적으로 빈궁한 자라면 지금 가난한 자는 다 천국을 소유할 것입니다. 여기 가난한 자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요, 의인의 회중에 있는 무리들입니다. 물론 경제적 가난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악인들도 부유한 것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부유한자가 가난한 자를 돌 보는 것이 하나님의 법인데 그것을 부유한 자가 행하지 않으니 악인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악인들의 행태를 조목조목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들의 교만, 탐욕, 욕심,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 그들의 속 생각들, 그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대하는 사자가 희생물에게 대하듯 하는 행동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없으니 하나님이 자신을 감찰하지도 보지도 않으시며 학대받는 가난한 자들을 잊으셔서 이 재앙과 환란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분으로 여기는 하나님으로 여기는 악인들의 태도를 다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기도를 해야 합니다. 악인들이 득세하고 심령이 가난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들이 환난과 원한을 품고 사는 이 현실을 보면서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 그들의 고통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갚아주시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그런는 내 일도 아니고 나와 상관없는 일이니 내가 알 바 아니다 하면서 오직 자신에 관련된 일만, 사실 그것은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위한 기도일 것인데, 그것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다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내용도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고 하나님이 멸시당하는 것과 하나님이 보지 않으시고 감찰하지도 않고 그들 생각에 하나님이 없다는 바로 하나님이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내용의 중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내 문제에 대한 나의 고통, 나의 고민, 환난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악인의 압박의 곤경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지 않고 자신의 욕심을 자랑하는 저들의 행태를 보면서 그들의 속 생각을 드러내면서 하나님이 이것에 대해서 반응해 주실 것, 그러니까 기도의 내용이 내가 아니라, 이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과 존재에 대해서 기도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의 많은 내용은 실상 기독교이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뿐이지 불교에 있으면 부처를 하나님의 대용으로 불러서 기도해도 될 정도의 기도를 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복적 기도요, 하나님을 수호신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도를 하는 사람들의 행태를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 하면, 다른 사람이 어려움이 닥쳤다거나 교회가 어렸거나 기독교회나 신자가 어려움을 당해도 내 일이 아니니 관심이 없습니다. 교회가 어떻게 되든, 목양을 하는 목사의 삶이나 설교가 어떻게 되는 관심 없습니다. 그것은 내 일이 아니니까 관심 둘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목사가 할 일이고, 나는 내 것만 잘 취하면 그만이고 그것은 남의 일일 뿐입니다.
3. 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확신
시인은 악인들의 말과 그의 속 생각을 하나님께 아뢰면서 하나님에 대한 확신에 찬 고백을 합니다.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여러분들은 이런 악인의 말에 동의하십니까? 그래 하나님은 세상이, 교회가 이렇게 되는 것 보니 주는 감찰하지도 않는다니까? 그러니 나는 내가 알아서 살거야. 내가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나를 보지도 않고 살피지도 않아. 하나님은 기독교에서 살았다고 하지 실상은 모든 종교에는 신이 있듯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람들이 만든 신의 이름이지 실상은 아무것도 하시지도 못해. 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행한다면 여러분은 다 악인들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런 악인들의 생각에 확신에 찬 고백을 합니다. (14-15절)
“주께서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이시니이다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때까지 찾으소서”
진실로 주님은 여전히 항상 보십니다. 항상 감찰하십니다. 항상 언제든지 갚으시는 분이시며 고아를 돌보시는 분입니다. 외로운 자가 의지할 유일한 분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런 의식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보시고 감시하시고 살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재앙과 원한 가운데서도 숨으시고 멀리서시는 분이 아니라, 여전히 지금도 보시고 계시고 악인들의 행동에 대해 갚으시며 외로운 고아와 같은 가련한 자들을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멀리서시고 숨어계신 듯이 보여서 악인들처럼 교만하여 자랑하고 거짓과 포악으로 잔해를 남기는 자가 아니라, 항상 하나님은 날 보시고 계시고, 나를 살피시며 도우시는 분이야 라고 고백하며 그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주님의 일어나십시오. 하나님이여 손을 드십시오.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십시오 하며 기도하고 주님밖에는 복이 없음을 깨닫고 그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주님은 악인의 팔을 꺾으시고 악한 자의 악을 더 이상 찾아 낼 수 없을 때까지 찾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니 이방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할 것입니다.
진실로 주님은 겸손한 자의 소원과 기도를 들으시며 그들의 마음을 견고하게 하시고 그들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며 고아와 압제당하는 자들을 위하여 심판하셔서 다시는 세상에 속한 자가 위협하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으로 의지하는 고아와 압제당하는 자와 같은 가난하고 가련자를 하나님이 이 험난한 세상에서의 위협에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 주님께 우리는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외로운 고아와 같은 자들이지만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이 계시고 우리를 보살피시고 우리의 원수를 갚아주실 것을 확신하면 이 세상에서 영적전장에서 담대하게 싸워야 합니다.
4.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리시고 일으켜 세우셨다
성도여러분, 진실로 악인들의 교만과 악행과 그들의 입에 거짓과 포악이 충만한 것을 당하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입에 가득한 거짓 증언과 그들의 포악과 왕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도둑인 사람을 풀어달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온오는 본문 1절과 같이 소리쳤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진정 예수님은 어찌하여 라고 소리치셨고, 버리셨나이까 하심으로 버림받았음을 고백했습니다. 악인들에 의해서 예수님은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앞에서 가련한 자가 되었습니다. 악인들은 가련한 자를,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고아와 같이 압박받는 가련한 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저주와 거짓과 포악만이 가득하고, 그들은 교만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이 하나님이 그를 죽음 가운데서도 견고케하신 것이고, 그를 도우신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은 이 악인들의 팔을 꺾으시기 위해 일어나시고 손을 드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악인들의 팔을 꺾으셨습니다. 뱀의 머리를 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영원한 온 세상과 우주의 왕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성도여러분, 예수님보다 더 악인들이 포악과 거짓과 저주를 받은 분은 없습니다. 우리의 고난이 아무리 크고 환난이 거세다 해도 예수님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고난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을 의지했다면 우리는 이 작은 환난과 곤경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직 주님밖에는 나의 복이 없으며 나를 도우실 분은 하나님뿐임을 고백하고 그분이 모든 것을 다 갚아주시고 이 세상이 위협하지 못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도 동일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