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초석: 교회신문 > 제 1149호 시험에 들지 않는 방법은 기도뿐이다 (눅22:39~4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8:9).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예수님은 내세의 축복뿐 아니라 이 땅의 문제, 우리가 직면한 현실적인 문제까지 다 해결해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현실과 동떨어진 복음은 장식품에 불과합니다. 지금 병으로 죽게 되었는데, 지금 먹을 것이 없는데, 지금 삶이 엉망진창이고 힘들어 죽겠는데, 죽음 다음의 천국을 논한다면 그 천국이 마음에 와 닿겠습니까? ‘지옥이 이보다 더하겠어? 그럴 능력 있으면 지금 나 좀 살려줘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공생애의 2/3 동안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신 것입니다. 먼저 그 시대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충족시키신 후에 ‘현존하는 문제도 해결하신 하나님은 내세의 문제까지 해결하신다’는 믿음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다 해보셨지 않습니까? 잘 살아보려고 밤잠 안자고 일도 해봤고, 안 먹고 안 쓰며 자식 하나 잘 되라고 학원도 보내고, 기러기 신세가 되면서도 유학도 보내보았고, 사업 좀 키워보겠다고 이리저리 뛰며 무던히 애써봤지 않습니까? 그러나 잘 됩디까? 아니요, 갈수록 ‘아! 내 힘, 내 능력으로는 안 되는 구나.’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손들고 ‘도와 달라, 살려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 우리의 소원을 성취하실 분도 하나님이시요, 생사화복도 다 하나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또 누군가는 그러겠지요. 그게 기복신앙이라고. 잘못된 거라고. 여러분, 세상의 종교와 우리 기독교가 뭐가 다른 줄 압니까? 저들은 이 땅에서 고행하며 스스로 진리를 터득해가지만, 우리는 전지전능하신 분의 전적인 은혜로 이 땅에서도, 죽어서도 천국 생활한다는 것이 다른 겁니다.
솔직히 당장 내일 애들 등록금이 없는데, ‘세계 평화’나 ‘구원’의 기도가 나옵니까? 가식이지요. “아버지, 내일 애들 등록 마감입니다. 안 주시면 애들 학교 못 다녀요. 돈 주세요. 돈이요 돈!” 이것이 진실한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믿음의 선친들도 그랬습니다. 엘리야가 왜 가랑이 사이로 머리가 들어가도록 간절하게 기도했습니까(왕상18:42)? 3년 6개월 동안 비가 안 내려서 기도한 것입니다. 극히 현실적인 문제이지요. 하갈이 방성대곡하며 기도한 것도 당장 아들이 목말라 죽게 되어서고요(창21:16),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 각오하고 기도한 것도 자기 민족이 멸절될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히스기야가 학처럼 비둘기처럼 사무치게 울면서 기도한 것은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병에서 낫고자 함이었습니다(사38:14). 다윗이 침상을 적시며 왜 기도했느냐,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 받을까봐 그런 겁니다(시6:6). 우리 예수님도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십자가를 질 능력을 달라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히5:7). 현실적인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것은 결코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기도 안 합니까? 급한데, 방법이 없는데 왜 안 구합니까? 그래서 고난 중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건강하지 못하는 것이고, 가난한 거고, 그래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겁니다. 기도의 부족은 모든 것의 부족입니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16장 23~24절을 통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기도 안 해서 못 받는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아서 그 모양 그 꼴로 산다는 겁니다.
또 시편 107편에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시107:10~11)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지존자의 뜻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엡6:18),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33:3), 이것입니다. 그런데 안 하니 어쩔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대로, 지존자의 뜻대로 부르짖으면, 기도하면, 구하면 하나님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시고’(시107:14),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 빗장을 꺾으시고’(시107:16),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어 우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신다’ (시107:20)고 하셨습니다. 어떤 문제든 다 해결해주신다는 겁니다.
정말 그럴까요? 엘리야가 그렇게 기도했더니 3년 6개월 닫혔던 하늘을 열었고, 하갈은 눈이 밝아져 옆에 펑펑 솟는 샘물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아들인 이스마엘의 장래를 약속받았으며, 에스더는 아하수에로 왕을 감동시켜 풍전등화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려내고 부림절을 맞았습니다. 히스기야는 어찌 되었나요? 그의 통곡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그의 수명을 15년이나 연장해주셨고, 다윗은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가 되었으며, 우리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를 능히 지고 죽으사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가장 위대한 사람은 기도로 하나님을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인생은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광야 길입니다. 광야에서는 모세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모세는 홍해 앞에서도, 고기가 없을 때도, 물이 없을 때도, 적들에게 길이 막혔을 때도 기도했습니다.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기도한 것입니다. 그 기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내셨고,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절대 부도나지 않고, 기도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렘33:3). 때로는 골방에서 은밀히 기도하십시오(마6:6). 애통하며 눈물로 기도하고(시126:5), 감사로 기도하십시오(빌4:6).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런 그분도 이 땅에 오셔서 기도의 일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할 때 사십일을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마4:2). 그리고 예수님은 동트기 전에 일찍 일어나셔서 새벽기도를 하셨습니다(막1:35). 또한 기적과 이적을 행하신 후에도 한적한 곳에 이르러 저녁에 기도하셨고(눅5:16), 산에 오르사 기도하셨고(마14:23),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땀방울이 핏방울로 변할 정도로 애절한 기도를 하셨습니다(눅22:44). 그리고 십자가상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인자의 삶을 마감하셨습니다(눅23:34).
저 역시 기도의 일생을 살고 있습니다. 언젠가 해외선교팀원인 한은택 목사가 교회 신문 칼럼난에 이렇게 쓴 적이 있습니다. “집회에 나가보면 목사님은 일찍 주무시지도 않지만, 주무시기 전에도 기도요, 새벽같이 이른 시간에도 그 기도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저녁 집회를 앞두고도 또 기도다. 식사 시간을 제외하곤 거의 하나님 앞에 기도하신다. 집회 때마다 항상 성령의 역사하심은 기도의 힘임을 알 수 있다. 목사님 방에 들어가 보면 마치 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방처럼 깨끗하다. 침대 시트조차 걷지 않고 주무시는지 침대와 침대 밑에 깔린 겹쳐진 타월에 선명하게 찍힌 두 무릎 자국이 보일 뿐이다. 목사님의 오늘은 바로 거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입니다. 그랬기에 물 없는 사막, 눈 덮인 산야를 걸으면서도 38년을 건재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마지막까지 잘 갈 수 있는 방법 (벧전4:7), 만사형통의 길, 시험에 들지 않는 길은 기도 외에 없습니다(눅22:46).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8:18). 할렐루야!
불이 꺼지기 전에 기름을 부어라
기도는 우리의 생명선이다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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