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장생포 "고래고기" 이야기.
[2022년 9월 22일(음:8월 27일. 일출 6시 18분.일몰18시 30분]
동해상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는 고기압 영향으로
전국이 대체로 맑겠고.
경상권과 전남 남해안, 제주는
가끔 구름이 많겠으며.
곳에 따라 아침 최저기온이
10도 아래로 떨어지는 등
날이 선선하겠습니다.
아침 최저기온은 영상 9도 ~ 18도,
낮 최고기온은 영상 23도~ 26도로
어제보다 높겠습니다
▣...울산의 근대 중심이라면
중구와 함께 울산 동구가 꼽힌다.
중구가 일제강점기 이래
상업의 중심이었다면,
동구는 방어진으로
대표되는 어업의 중심이었다.
장생포 고래문화마을은
고래잡이가 성업하던 1960∼1970년대
장생포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놓은 공간이다.
고즈넉한 어촌마을이었던 방어진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동해안 굴지의 항구로 급성장했다.
울산 ‘동면’에 속한
작은 어촌마을인
방어진은 단숨에
면 소재지가 되더니,
방어진 골목의 일제강점기 전당포의 흔적.
나무로 깎은 창살 안쪽에서
업자가 저당 잡힐 물건을 건네받았다.
아예 지명까지 빼앗아 ‘
방어진면’으로 개명하기에 이르렀고,
급기야 ‘읍(邑)’으로 지위가 격상했다.
내륙의 남목동에 있던
면사무소가 방어진으로
옮겨간 것이 1925년, 동면이.
‘방어진면’으로
이름을 바꾼 건 1931년,
방어진면이 ‘방어진읍’으로
승격한 건 1937년의 일이었다.
방어진은 6년
주기로 덩치를 키웠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서른 가구 남짓의 고즈넉한 어촌마을이.
한창 성어기에 주변 인구가
3만여 명을 헤아리는 항구가 됐으니
가히 멀미가 날 정도의 속도였다.
일제강점기에 방어진이
급속도로 성장했던 건
일본인들이 좋아했던 방어와 삼치,
고등어가 잘 잡혔기 때문이었다.
방어진이란 지명도 물고기
‘방어(방魚)’가 잘 잡혀서
붙여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게다가 방어진은
일본이나 부산과도 가까웠다.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어부의 증가,
조업기술의 발달,
어장 황폐화 문제에 직면한
일본 정부는 자국 어민들의
국외 출어를 장려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 어민들이
방어진에 속속 정착한 이유다.
대부분 일본
오카야마(岡山)현과
가가와(香川)현에서
온 어민들이었다.
일제강점기 방어진에는
한국인보다 일본인
수가 오히려 더 많았다.
1915년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방어진 인구는
446가구에 2076명이었는데,
그중 287가구 1413명이
일본인이었다.
방어진 전체 인구의 68%가
일본인이었던 셈이다.
한국인은 157가구에 661명으로
일본인 숫자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인근 바다에
고등어와 참치떼가 나타날 때면
일본에서 건너온 어선들까지
합세해 방어진항에는
1300∼1400여 척의 배가 몰려들었다....빵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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