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년 겨울
한 통의 전보를 받은 엄마는 어찌할줄 모르며 허겁지겁 옷을 챙겨 입고는 정거장으로 달려 갔다
전보 내용은 진욱사망 급래 라는 내용 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들어 가기전 외삼촌은 군복을 입고 휴가 나온 모습이 생각이
났고 초등학교 1학년때 외삼촌의 공부방에서 같이 노래를 불렀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군 제대 후 부산대 3학년에 복학후 학기말 고사를 끝내고 그날 자취방에서 연탄 가스로 사망했던 것이다
외삼촌의 사망으로 나는 방학때만 되면 외할머니의 집으로 가게 되었고 혼자 계시는 할머니의 말 벗이 되어 주고 외로움을 달려 주려는 엄마의 배려로 종업식이 끝나자 마자 외할머니의 집으로 달려 갔다
1년에 두어달(여름방학.겨울방학) 동안의 외할머니와의 동거는 그렇게 시작 되었다. 외할머니의 눈가는 항상 부어 있었고 눈 동자의 실 핏줄은 늘 핏기가 서려 있었다. 웃음을 잃었고 ,매일매일 우수에 차 있었다.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종종 한번씩 흐느끼고 계시는것도 자주자주 보게 되었다.
외아들을 잃은 아픔이 생활속 ,몸속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다.
장농속의 수두룩하고 두꺼운 책들은 주인을 잃고 항상 그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할머니의 마음이 상할까봐,어린 나도 외삼촌에 대한 말들은 입 밖에도 내질 않았다.
나와 할머니의 첫해의 동거는 그렇게 서먹서먹 하게 시작 되었다.
학교 생활을 해도 늘 외할머니가 걱정이 되었다.혼자서 어떻게 사실까?
외삼촌이 보고 싶겠지?등등 어린 나의 생각은 외할머니의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생각들이 차차 무디어져 갈 무렵 3학년 겨울 방학이 시작 되자마자 외할머니 집으로 달려 갔다.
반년만에 보는 할머니는 예전의 외할머니가 아니었다.두 눈의 실 핏줄은 곧 터질 듯이 빨겋게 달아 올라 있었고,눈에는 항상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얼마나 울었으면 저렇게 되었겠나 싶어 내 마음도 편칠 않았다.
언제 구입 했는지, 방 한켠에 파란 라디오가 한대가 놓여 있었다.라디오 라도 있었어니, 조금은 덜 외로워 겠지 하며 그나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방학 첫 날 그날은 대연각 호텔의 화재가 뉴스와 함께 하루종일 전파를 타고 있었다.할머니는 젊은 사람 너무 많이 죽는 다고 안타까워 하셨다.
할머니 이 라디오 언제 싸서? 물어보니 응 이거 어디서 가지고 왔다.라며
말 끝을 흐리고 얼버무리 시길래 그렇거니 하면서.생각했다.
할머니와 듣는 법창야화는 섬뜩 하였지만 뒤 이어지는 전설따라 삼천리의 구민 선생님의 정감어린 목소리는 어느덧 포근한 수면을 취하고 있었다.
7시 뉴스의 광장으로 우리의 하루는 시작 되었고 할머니와 둘이서 먹는 아침밥은 연속극을 들어면서 식사를 마쳤다.
MBC 여성살롱 임국희예요 의 임국희 진행자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는 나로 하여금 마음 설레게 하였고 편지 사연등은 내가 결혼 할 때가지만이라도 이 프로그램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내 각시에게 사연을 적어 참여하라고 하기 위해서(그 당시는 남자들의 참여는 거의 없었슴)
빨강 ,파랑 노랑 무지개 마울로 시작되는 어린이 방송은 모글리를 노린다 노린다 모글리는 귀염소년 용감한 소오년 호랑이와 싸우는 모글 모글리.
노래를 따라 부르며 다시 내일의 어린이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방학이 끝날때 쯤이면 외할머니와 헤여 진다는 것은 내게는 큰 고통 이었다
라디오가 있으니 조금은 덜 외롭겠지 생각하면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울산에서 불국사 까지오는 기차에서 혼자 눈물 지우면서 오곤 했다.
다음 겨울방학때는 대왕코너의 화재가 속보로 전해 지면서 겨울 방학 외할머니와의 생활은 시작 되었다.
우리 석이가 올때마다 서울에는 큰 불이 나네 하시면서 걱정스럽게 말씀 하셨다.
외할머니와 나와의 동거는 초등학교 6학년까지 이어졌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고등학교 입시명목으로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대학교 입시라는 이유로
방학이 되어도 잠깐잠깐 할머니만 보고만 왔다
어느때 방학인지는 모르겠지만,TV가 할머니 방에 있었지만 할머니는 자주 보질 않는다고 하셨다.
라디오만 종일 듣는다고 하셨다. 그래서 인지 할머니는 정보에도 밝으셨고 또 한 아시는것도 많으셨다 정치나 심지어 스포츠 스타의 이름가지도 알고 계셨다.두루두루 섭렵하신 것 같았다.
내가 결혼 할 때쯤 할머니의 기력은 예전만 못했지만 외손자의 방문은 늘 그랬듯이 반갑게 맞아 주셨다 하루 밤 자지도 않고 그냥 갈려면 할머니는 섭섭함과 서운함을 표현 하셨다.
정정 하시던 외할머니는 2000년 갑작스럽게 쓰러 지면서 한 많던 이 세상과
작별을 하셨다. 아무도 예상 못한 죽음이라 엄마와 이모의 오열은 장례내내 이어졌고 할머니 혼자서 그 질곡의 세월을 보내고 이제는 그토록 그리던 당신의 아들 곁으로 가셨다.
할머니의 방에는 파란 트랜지터 라디오만 방 한구석에 놓여 있었다.
엄마는 라디오를 쓰다듬어며 우리 욱이 복학 기념으로 내가 싸 준건데 하면서 연신 흐느끼고 계셨다.엄마의 말이 이어 지면서 외할머니는 이 라디오만 들으면 당신 아들이 올것만 같았고 또 라디오 속에 당신 아들 목소리하고 닮은 성우가 있다고 하여 하루종일 라디오를 가까이 하셨다 한다
할머니 이제서야 알았습니다 라디오를 그렇게 가까이 하신 이유를 외삼촌의 유품 이었고 그 안에 외삼촌 닮은 사람이 있었다고..
30여년 그 몸서리치는 세월 먼저 아들을 보내고 혼자 사신 아니 라디오와 함께 사신 외할머니 이제 편히 쉬십시요. 그렇게 그리던 당신의 아들도 하늘 나라에서 만나겠지요.
이번 일요일은 외할머니집 어딘가에 있을 그 라디오를 찿으러 가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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