췌장암 말기라니!
그러니 지난 화요일 저녁 무렵이었다. 친구로부터 카톡이 날아왔다. K였다.
-등이 저려 병원에 갔더니 췌장암 말기란다. 죽기 전에 보고 싶거든 지금 당장 집으로 와라-
이 무슨 날벼락인가? 오 마이 갓! 투명 유리창에 머리를 꽝 부딪친 기분이었다. 멱살 잡히듯 일어나는데 폰이 울렸다. D였다.
“카톡 봣지? 문 소리고?”
“낸들 아나?”
“빨리 가보자!”
D의 목소리는 버석거렸다. 나는 몇 달 만에 택시를 불러 탔다.
“앞산으로 갑시다.”
거리의 풍경이 갑자기 생경스러웠다. 2년 전 암일지도 모른다는 닥터의 농담에도 넋이 날아갔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때도 하늘과 땅과 스치는 바람과 나뭇잎 하나까지도 달라 보였었다. 그 닥터의 농담이 이제는 약이 되었지만…. 죽음이 바로 옆에서 항상 어슬렁거리고 있음을 절감했다.
K는 교단 초임시절 사귄 동네 청년이다. 그때 이미 코 밑에 수염이 숭숭 난 6학년 선도반장이 날 애송이라 깔봤고, 낸들 그냥 넘어갔겠나. 늘씬하게 엉덩이를 패주었는데 엉덩이가 터져 버렸다. 그 애 형인 K가 친구들을 데리고 날 린치 한다고 하숙집을 덮쳤다(그 땐 늘 있는 일이었다). K는 소위 포항동지고 어깨였다. 사전에 눈치 첸 나는 하숙집 할머니에게 부탁하여 떡 벌어진 술상을 차리게 했다. 동네 청년들은 정말 무지막지했다. 복날 개라도 잡으려는지 도리깨, 몽두리, 쇠스랑까지 들고 마당에 들어섰다. 태생적으로 나는 꼬질꼬질하고 쩨쩨한 게 죽기보다 싫었다. 소금 뒤집어쓴 지렁이 신세는 내 스타일 아니었다. 소위말해 ‘쏴라’ 있었다. 군화 ‘물광’ 내듯, 내 딴에는 천하제일개폼을 잡았다. 헤밍웨이도 말하지않았던가. '파멸할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
“형씨들, 부끄럽지 않소? 당신들 중에서 제일 쎈 사람 누구요? 나와 한 판 붙읍시다. 내가 지면 몰매를 쳐도 좋고 이기면 친구 합시다. 방에 화해술을 차려 놓았으니까…. 선생이기 전에 나도 한다면 하는 사람이요.”
“너거들은 구경만 해라.”
그때 나선 게 K였다. 지금도 거방지지만 나 보다 한 뼘은 컸다. 그러나 둘의 싸움은 아주 싱겁게 끝나버렸다. K의 주먹이 몇 번 허공을 갈랐고 내 특기인 킥이 K의 슬개골을 가격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는 주저 않았고 일어나지 못했다. 옆에 있던 D가 4홉들이 소주병 주둥이를 잡고‘대구빠리’를 쳐서 박살을 내곤 병 주둥이에 붙은 칼날 같이 앙카란 유리병 잔해를 들고 날 겨누었다.
“오빠들 왜 이래요? 비겁하게.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죠!”
하숙집 과년한 손녀가 사생결단 D의 앞을 가로 막았고, K도 D를 말렸다. 우린 밤 새워 술을 마시며 도원의 결의를 했고 오늘까지도 철따라 한 번씩 만난다.
몇 번 들른 적이 있는 K의 집에 들어서자 그는 전보다 더 피둥피둥한 모습으로 맞았다. 먼저 온 D와 친구 둘이 날 본체만체 희희 낙락 떡 벌어진 음식상에 코를 박고 있었다. 알록달록 냉장고 바지를 입고 온 친구가 있는가 하면 나이답잖게 그루밍족처럼 차려 입은 친구도 있었다. 이 친구들은 옷차림처럼 생각도 직업도 하나같이 제각각이다.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틈입하는지 그 간격은 조금씩 더 벌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런 풍경은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소파에 걸터앉은 강 양이 눈을 찡긋하며 헤죽거렸다.
“어서 오이라. 장난 한 번 쳐봤다.”K는 영 어색한 폼으로 멍청하게 서 있는 내게 손을 쑥 내밀며 말했다. 솔직담백함과 유쾌함은 여전히 ‘럭키 보이’였다.
“니가 보고 싶어 연극 한 번 해봤다. 이래 안하문 어이 만나겠노?”
나는 K의 손을 뿌리치고 그의 슬개골을 걷어찼다. K는 무릎을 잡고 거실을 구르며 엄살을 놓았다.
“야가 또 사람 잡네. 옛날에는 왼발을 조져 비만 오면 욱신거렸는데, 오늘은 오른쪽 까지 조지네!”
나는 도리어 K를 째려보고 ‘인생의 진정한 매력은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장난의 매력’이라는 보들레르 말을 떠올리며 친구들 사이에 코를 디밀었다. 음식은 거의 낙지 일색이었다. 낙지 연포탕에 산낙지, 탕탕이, 호롱구이, 갈낙탕에 이름도 모르는 낙지 요리도 있었다. 완전히 포르노 푸드고 말해서 낙지의 변주였다.
“너거들 늙어서 힘 못쓸까봐 강 양이 특별히 만든 거다. 강 양 고향이 전남 해남 아이가. 다 먹고 강 양한테 검사 받아라.”
K는 스스럼없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딸만 셋이다. 가족 모두 미국에 산다. 건설업을 해 돈도 꾀나 벌었는데 부인 따라 미국에서 몇 년 살더니 도저히 못 견디겠다며 지금은 앞산 밑에 있는 빌라에서 혼자 산다. 그 나이에‘못된 짓(?)’은 다 골라하면서. 그는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에게 나침반을 맞추며 살았다.
강 양이 오디오를 틀었다. ‘글루미 선데이’였다. 이 곡은 레조 세레스 라는 작곡가가 실연의 아픔을 생각하며 지은 곡이란다. 가슴속이 서늘해지고 음산한 기운이 약간 도는 가락이지만 D 덕분에 익숙했다. 영화도 있다. 롤프 슈벨 감독이 만든 동명의 영화 ‘글루미 선데이’는 1935년 부다페스트를 배경으로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일로나(에리카 마로잔)를 둘러싼 세 남자의 이야기다. 다정함과 자신감을 겸비한 남자 자보(조아킴 크롤)와 그의 연인 일로나가 운영하는 부다페스트의 작은 레스토랑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새로 취직한 피아니스트 안드라스(스테파노 디오니시)는 아름다운 일로나에게 첫 눈에 반해 자신이 작곡한 노래 ‘글루미 선데이’를 선물한다. 일로나의 마음도 안드라스를 향해 움직이자 차마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던 자보는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한다는 그녀를 받아들인다.
한편, ‘글루미 선데이’는 음반으로 발매돼 엄청난 인기를 얻지만 연이은 자살 사건에 관련되어 있다는 스캔들에 휩싸인다. 실제로‘자살자의 찬가’라는 별칭으로 전 세계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을 자살하게 만든 전설적인 노래다. 레코드로 출시 된 지 8주 만에 헝가리에서만 이 노래를 듣던 이들 중 187명이 자살했으며, 이 곡을 연주하던 단원들이 드럼 연주자의 권총자살을 시작으로 모두 자살하는 기이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수백 명을 자살하게 한 노래라는 타이틀로 공전의 히트를 치지만 작곡가 레조 세레즈 또한 투신자살 하면서 사람들에게 저주받은 노래라는 인식이 확고해졌다. 결국헝가리 정부에 의해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설상가상 부다페스트는 나치에 점령당하고 일로나를 사랑한 또 한 명의 남자, 한스(벤 베커)가 독일군 대령이 되어 레스토랑을 찾아온다. 이제는 셋이 평화로운 삼각관계를 공유한다. 일로나는 진정 차등 없이(?) 세 사람과 진한 섹스를 나눈다. 돌아가며…. 그러나 남자들은 모계사회의 일원처럼 손톱만한 불평도 없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우정은 더욱 돈독해진다.
나도 한 번 가보았지만 헝가리 부다페스트는 영화 촬영지로 유명하다. 고풍스러운 건축물과 아름다운 경관 덕분에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어 많은 감독들이 이 도시를 사랑한다. 도나우 강의 세체니 다리를 건너 어부의 요새에 자리한 주인공 자보와 일로나가 운영했던 레스토랑 '군델'은 아직도 영업 중이였다. 영화 속 옛 건축물도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친구 D도 영화 속 자보와 같은 신세다. 그는 대구시내 이름 난 시장 마다 정육점을 운영하고 있다. 떠꺼머리 총각시절 대구로 올라와 정육점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다 이젠 어엿한 점주다. 그는 어느 정도 기반을 잡을 때쯤 가냘픈 여인을 만나 사랑을 나누었고 결혼했다. 3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아내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는다. D와 사귀기 전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고, 그 남자는 학생운동으로 감옥살이를 하다 출옥 했는데 병들고 갈 곳 없어 자기가 돌봐 주어야 한다고 했다.
“여보, 그 사람은 고아에요. 몸을 추수릴 동안 우리 집에서 간호 해주고 싶어요. 아님 제가 집을 떠나야 해요. 당신이 이해해줄 순 없나요?”
D는 그녀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그녀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D는 그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세월이 얼마인가. 지금까지도 셋은 한 집에 살고 있다. 소주병 주둥이를 잡고‘대구빠리’를 쳐서 박살을 내던 D는 어디로 갔나.
언젠가 고등어 회를 안주삼아 D와 단둘이 술잔을 기울인 적이 있었다. 고등어 등처럼 푸르렀던 젊은 날 얘기를 나누다 술이 취하자 그는 속내를 비췄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루의 3분의1 정도는 머릿속 나사가 풀린 상태로 살아왔다면서, 자신의 생활에 대해 좀처럼 비집고 들어갈 틈을 내주지 않았는데 그날은 토악질하듯 툭툭 내뱉었다. 그 토악질은 허무라는 정조에 닿아 있었다. 오랜 가뭄이 든 저수지의 밑바닥처럼 황량했다. 그리곤 그가 말했다.
“내 삶은 고양이가 한 차레 갖고 논 실타래처럼 뒤엉켜 있어. 언젠가 풀리면 내 이야길 니가 글로 써주라. 이 불가역적인 삶을….”
알고 보면 세상에 정상적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삶 또한 그렇다. 삶은 공평치 않는 법이다. 누군가는 누리지만 누군가는 견디고 버티는 것이다.
글루미 선데이 이렇게 끝난다.
Dreaming,I was only dreaming I wake and I find you
asleep In the deep of my heart
dear Darling I hope That my dream never haunted you
My heart is telling you How much I wanted you
나는 깨어나 내 심장 깊이 잠들어 있는
당신을 찾는 꿈을 꾸었지요.
내 꿈이 당신을 유혹하지 않았기를….
내가 얼마나 당신을 원했는지 내 심장이 속삭이네요.
첫댓글 노후에도 세밀한 기억력으로 이런 현란한 글을
표출하는 자네의 글 솜씨가 놀랍고 부럽네...
이런 나이에 친구의 글을 읽는다는게 참 행복인것 같다
지난 세월 어디쯤 살았을때인가~그루미 선데이 테입을 구할려고 돌아 다니다 찾지 못했는데 대구백화점 뒷쪽 어느 음반점 구석에서 찾았다
빨간 레벨이 붙은 테잎이었인데 첫인상에 반한 여인 같은 느낌이었다
말 그대로 그루미 선데이였다 나는 자네처럼 노래의 배경을 다 알고 찾은게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그 노래를 듣고
자살을 했다는 것 밖에 몰랐다 마치 젊은 베르테르 를 읽고 노랑쪼끼가 유행되고 많은 젋은이들이 자살 했다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노래와 배경 음악이 음산 하면서도 애수에 휩싸이는 음율이 가슴을 파고들던 시절이 있었구나
친구가 고맙다
영화도 함 봐라. 난 두 번 봤다. 가슴이 식으면 골로 가는 기다.
가슴이 식지 않아 못죽고 살아났다
K,D 두 친구가 무무의 현란한 글을 불러 내었구나....ㅡ義 峰ㅡ
다시 한 번 잘 읽고 가오. 생생히 그린듯 치밀하게 표현한 맛있는 글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