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4/28 충무공탄신일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1 - 미국 배우 故 그레고리 펙 기념우표 발행 美배우 故 그레고리 펙 기념우표 발행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과의 명연기를 펼친 배우 고(故) 그레고리 펙을 기념하는 우표가 28일(현지시간) 미국에서 발행됐다. 이 우표에는 펙이 시골 변호사 에티커스 핀치로 분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던 1962년 영화 ‘앵무새 죽이기’ 출연 당시의 사진을 실었다. 1944년 ‘영광의 날들’로 영화계에 데뷔한 펙은 계속 스타로의 길을 질주해 ‘신사협정’과 ‘천국의 열쇠’ ‘정오의 출격’ 등으로 5차례나 아카데미상 후보에 지명됐을 정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최재석 특파원 bondong@yna.co.kr /연합뉴스 2011/04/29 07:42 - 김기창 그림 '단종 영정' - 조선 제6대왕 단종릉 - 장릉
2007 - 비운의 왕 단종, 550년만에 국장 치러져 조선조 비운의 왕인 단종(端宗. 1441~1457) 승하 550년을 맞아 강원도 영월군이 단종의 국장(國葬)을 치렀다. 단종은 조선조 27명의 왕중 유일하게 국장을 치르지 못한 임금이다. 이날 오전9시부터 2시간 동안 계속된 국장에는 주민 자원봉사자 1000여명이 참가했다. 국장에는 국상(國喪)때 쓰였던 큰 상여인 대여(大輿)가 등장했고, 전주이씨 종친회와 전문가 등의 고증을 거친 전통 복식과 각종 소품이 사용됐다. 행렬은 견전(遣奠), 발인반차(發靷班次), 노제(路祭), 반우반차(返虞班次) 순으로 관풍헌을 출발해 창절사를 거쳐, 고혼이 잠든 장릉(莊陵)으로 향했다. 장릉에 국장행렬이 도착한 뒤 단종의 천도를 기원하는 의미로 모형 말인 ‘죽안마’를 불태우고 제향이 올려졌다. 죽안마는 대나무와 한지로 만든 말이며, 1926년 순종 국장 이후 볼 수 없었던 장식물을 80년만에 재연한 것이다. 정동훈 영월군 문화관광과장은 “이번 단종제가 ‘임금 단종이시여 영면하소서’라는 의미에 맞게 후손들이 단종에게 제대로 된 상례(喪禮)를 올려 영면을 기원한 것”이라며 “매년 단종문화제 기간에 국장행렬을 재연해 독특한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 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조선조 6대 임금인 단종은 12살에 왕위에 올랐다가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영월 청령포로 유배됐으며, 17살에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았다. 영월=이혁재기자 elvis@chosun.com /조선닷컴 2007.04.28 15:39 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4/28/2007042800220.html
- 박세리 선수 (공중전화카드)
2003 - 연장불패 박세리 통산 20승 달성 박세리(26.CJ) 가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 투어 입문 6년 만에 대망의 20승 고지를 밟았다.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ctg=14&Total_ID=161273
2002 - 제4차 이산가족 상봉 2002년 4월 28일 북한 금강산에서는 전해 2월의 서울·평양에 이어 남과 북의 부모·자녀, 형제들이 부둥켜안고 반세기 이산의 한(恨)을 풀었다. 이산가족 상봉은 동년 4월 3일 임동원 특사 방북을 통해 이루어졌다. 장소가 협소해 남북한 이산가족들이 시차를 두고 순차적으로 상대측 가족들을 만났다. 남쪽 이산가족 100명이 먼저 금강산에 가서 2박3일 동안 북한의 가족들을 만나고 돌아오면, 북쪽 이산가족 100명을 만날 남한의 가족들이 다시 금강산으로 가서 상봉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날 오후 금강산여관에선 이틀전인 26일 숨진 어머니 어병선(93)씨 대신 상봉단에 포함된 이부자(62)씨를 비롯해 남측 이산가족 99명이 북한의 가족 183명과 단체상봉을 가졌다. 남북 이산가족들은 이날 저녁 북한 적십자회 주최로 금강산여관에서 만찬을 가진 뒤 금강산에서의 첫 밤을 보낸 후 30일 오전 금강산여관에서 북측 가족·친척 183명과의 작별상봉을 끝으로 2박3일간의 짧은 상봉일정을 마치고, 장전항을 떠나 속초로 돌아왔다. 또 5월 1일에는 같은 장소에서 북측 이산가족 100명을 만날 남측 가족·친척 468명이 금강산으로 떠났다가 3일 돌아왔다. /조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대작 `최후의 만찬`이 22년간의 복원 작업을 마치고 1999년 4월 28일 일반에 공개됐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The church and Dominican Convent of Santa Maria delle Grazie)의 홀 벽면에 그려진 `최후의 만찬`은 예수가 12제자와 식사를 하는 모습을 담은 것으로 르네상스 시대 최고걸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다빈치가 1494년~1498년에 걸쳐 완성한 이 그림은 수백년이 지나면서 습기와 먼지등으로 손상돼 왔으며 이에 따라 수백년간 걸쳐 수차례 작업을 했다. 그러나 보수 작업에도 불구하고 작품 색상이 어두워지고 표면이 떨어져 나가는 등 오히려 훼손이 심해지자 1977년부터 전문가들을 동원, 본격적인 복원 작업을 시작해 이번에 완성을 보게됐다. 반면 복원 작업으로 원작품의 예술성이 손상을 입었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비평가들은 이번 복원 작업은 불필요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복원된 그림 자체의 예술성은 인정할 수 있을지라도 복원 작품에서 다빈치의 흔적은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조선
1982 - 미국의 프로 농구선수 크리스 카만(Kaman, Chris) 출생 카만 [Kaman, Christopher Zane, 1982.4.28~ ] Chris Kaman Christopher Zane Kaman (born April 28, 1982, in Grand Rapids, Michigan) is an American-German basketball player for the NBA's Los Angeles Clippers. Kaman stands 7'0" (2.13 m) and weighs 265 pounds (120 kg). He was selected sixth overall in the first round of the 2003 NBA Draft by the Clippers, after a college basketball career at Central Michigan University.
Early life http://en.wikipedia.org/wiki/Chris_Kaman
- 가톨릭신문 창간 (공중전화카드)
1969 - 김수환 추기경 서임식 (로마 베드로 대성당) 1968년 5월 29일 명동대성당에서 교구장 착좌식이 엄숙히 거행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9년 3월 교황 바오로 6세가 발표한 새 추기경 명단에 김수환 대주교의 이름이 올랐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탄생한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을 역임했고, 주교회의 산하 여러 분과 위원장과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맡았으며, 1975년 6월 1일부터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했다. “1998년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일했다. 다른 사람들이 점수를 매긴다면 겨우 낙제점을 면할 정도겠지만 내 나름대로는 십자가를 지고 걷는 심정으로 살아왔다. 힘들고 지쳐서 그 십자가를 내려놓고 싶을 때도 많았다. 특히 1970년대와 1980년대 사회 격동기의 한가운데 있을 때, 그로 인해 교회 안에서조차 압력과 비난이 쏟아질 때는 한 사제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감수해야 하는 고통이 어떠했는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평화방송·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김수환 추기경 홈페이지 http://cardinalkim.catholic.or.kr/index.asp
프랑스 제5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샤를 드골이 1969년 4월 28일 사임했다. 이날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그가 제안한 지방자치제 개혁과 상원 개혁안을 52.42%의 국민들이 반대한 것이 사임 이유였다. 부결이 1965년부터 1972년까지 보장된 대통령직의 사임을 강제한 것은 아니었지만 10여일전 한 TV인터뷰에서 "그의 제안이 국민투표에서 거부된다면 사임하겠다"는 공언이 그를 사임하게 했다.
"역대 용장으로 가장 명성을 떨치신 이순신 장군의 424회 탄신일을 맞은 4월 28일에 이 분의 영정을 모신 현충사에서 동 사의 중건준공식과 아울러 기념행사를 거행한다. (우표발행안내) /k-stamp
1967 - 캐시어스 클레이(무하마드 알리) 징병 거부 세계헤비급 챔피언 캐시어스 클레이가 텍사스주 휴스턴 징병국의 육군입대명령을 거부했다. 1967년 4월 28일 휴스턴 징병국에 출두한 클레이는 신체검사에서 합격했지만, `자신은 아랍 모슬림의 선교사`라며 정부가 일반 목사의 병역을 면제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징병을 거부한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WBA는 즉각 클레이의 타이틀을 취소하는 등 클레이의 병역거부는 큰 파문을 일으켰다. 6월 휴스턴연방지구재판소는 클레이에게 5년의 금고와 1만달러의 벌금형을 판결했다. 한편 클레이는 이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반전운동과 흑인해방운동의 상징적인 존재가 됐다. 또한 클레이라는 이름 대신에 이슬람교도로 1964년부터 사용해온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게 됐다. /조선
1948 -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Pratchett, Terry) 출생 프래쳇 [Pratchett, Terence David John "Terry", 1948.4.28~ ] 테리 프래쳇(Sir Terence David John "Terry" Pratchett, 1948년 4월 28일~ )은 영국의 소설가이다. 판타지 장르에서 만화 작품을 많이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키백과
Terry Pratchett Sir Terence David John "Terry" Pratchett, OBE (born 28 April 1948) is an English novelist, known for his frequently comical work in the fantasy genre. He is best known for his popular and long-running Discworld series of comic fantasy novels. Pratchett's first novel, The Carpet People, was published in 1971, and since his first Discworld novel (The Colour of Magic) was published in 1983, he has written two books a year on average. His latest Discworld book, Snuff is the third-fastest-selling novel since records began in the United Kingdom selling 55,000 copies in the first three days. Pratchett was the UK's best-selling author of the 1990s, and has sold over 70 million books worldwide in thirty-seven languages. He is currently the second most-read writer in the UK, and seventh most-read non-US author in the US. Pratchett was appointed Officer of the Order of the British Empire (OBE) in 1998 and was knighted for services to literature in the 2009 New Year Honours. In 2001 he was awarded the Carnegie Medal for his children's novel The Amazing Maurice and his Educated Rodents. In December 2007, Pratchett publicly announced that he was suffering from early-onset Alzheimer's disease. Subsequently he made a substantial public donation to the Alzheimer's Research Trust, and filmed a programme chronicling his experiences with the disease for the BBC.
Background
1947 - 토르 헤이에르달의 뗏목 콘티키호, 페루의 카야오 항을 떠나 항해 시작 중세의 잉카제국에서 사용한 뗏목을 본뜬 콘티키(Kon-Tiki)호로 1947년 4월 28일 페루의 카야오항을 출발하여 같은 해 8월 7일 동폴리네시아 군도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 경험을 토대로 《태평양의 아메리카 인디언 American Indians in the Pacific》(1952)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폴리네시아인이 동남 아시아에서 이주해 왔다는 종래의 학설에 대하여 폴리네시아 문화의 페루 발상설(發祥說)을 주장하였으며, 또한 폴리네시아인의 티키(Tiki 태양신) 숭배는 잉카의 신(新)콘티키에서 유래한 것이라 하였다. 그 후 갈라파고스제도·이스터섬 등을 탐험 ·조사하였고, 1969년에는 고대 이집트인의 중남미 도항의 가능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파피루스선(Papirus 船) 라(Ra)호로 모로코를 출발하여 대서양 횡단에 성공하였다. (헤위에르달) /네이버
콘티키호 [Kon-Tiki]
노르웨이 탐험가 T.헤위에르달이 잉카 시대의 제조법으로 만든 뗏목. 남태평양제도에 사는 폴리네시아인(人)의 기원을 조사하기 위해 헤위에르달(Thor Heyerdahl) 일행이 1947년 페루에서 폴리네시아의 라로이아 환초(環礁)로 가는 항해에 사용한 뗏목의 이름이다. 콘티키란 페루어로 ‘태양신’을 의미한다. 콘티키호는 바람과 해류를 따라 표류하여, 4월 28일~8월 7일까지 4,300해리(약 7,964 km)를 항해하였다. 뗏목의 바닥은 갈대로 엮었고 선실은 가벼운 대나무를 사용하였으며 돛을 달았다. 가벼운 선체로 인해 왠만한 파도에도 잘 견뎠으며 항해를 시작한지 97일 만에 폴리네시아 앙가타우 섬에 도착했다. 원주민의 도움을 받아 다시 항해를 계속했고 100일만에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헤위에르달의 항해목적은 남아메리카에 살았던 사람들이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 섬으로 건너갈 수 있었던 것을 실증하는 것이었다. 이후 남아메리카의 문명이 태평양 여러 섬의 주민과 문명에 영향을 주었다는 학설이 채택되었다. /네이버
[Expeditions] First Expedition to Polynesia, 1937~38
The RA II Expeditions, 1970.5.17~7.12
1945 - 무솔리니 처형
- Michael Wittmann and Kurt Knispel (출처 - 카페 필테마)
1945 - 독일의 군인, 전차 격파왕 쿠르트 크니스펠(Knispel, Kurt) 전사 크니스펠 [Knispel, Kurt, 1921.9.20~1945.4.28] Kurt Knispel (20 September 1921 – 28 April 1945) was a Sudeten German Heer panzer loader, gunner and later commander, and was the highest scoring tank ace of World War II with a total of 168 confirm!!ed tank kills; the actual number, although unconfirm!!ed, may be as high as 195. He is counted with Johannes Bölter, Ernst Barkmann, Otto Carius and Michael Wittmann as being one of, if not the, greatest tank aces of all time.[ Childhood http://en.wikipedia.org/wiki/Kurt_Knispel
독일 전차 격파왕의 겸손 쿠르트 크니스펠[1921년 9월 20일 -1945년 4월 28일]은 구 독일 육군의 최대 전과를 올린 전차 격파 왕이다. 전차 격파의 탑 에이스들이 많은 독일 육군에서도 최고의 기록이지만 실제는 이보다 더 많을 것이라는 것이 전우들의 회고다. 이 독일 기갑의 본좌는 비트만 중위나 오토 카리우스 중위에 비하면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독일 전차 격파의 탑 에이스들이 주로 장교들이지만 그는 다른 에이스인 바르크만과 같은 부사관 출신이었다. 그에 관한 전기가 있지만 당사자를 면담하거나 구술을 받지 않고 쓴 것이라 모호하고 과장된 것이 많다. 생존한 오토 카리우스 중위가 쓴 ‘진흙탕 속의 타이거’라는 자전적 전투 기록과 너무 느낌이 다른 책이다. 그의 적 전차 격파 기록은 소련 전차들을 상대로 수립된 것이다. 그가 공인 받은 적 전차 격파 기록은 무려 168량이나 된다. 볼수록 경탄스런 전과이다. 이렇게 대량의 적 전차를 격파하기 위해서 전차 몇 량이 맞붙는 소규모 전차전은 말 할 것도 없고 쿠르스크 전차전처럼 시야가 훤히 트인 평원에서 몇 십 몇 백량의 전차가 얽히고설켜 서로 치고 받는 난전식 전차전도 여러 번 겪었다는 이야기인데 매번 살아남았다는 것이 기적같이만 생각이 된다. 적의 후미를 물고 사격하는 공중전과 달리 전차전은 적 전차를 정면에서 공격하는 것으로서, 어느 순간에 자신이 조준하고 있는 전차에 되려 반격 당할 수도 있는 위험성이 있다. 그가 그런 전차전에서 적 전차를 168량이나 격파한 것은 검객처럼 상대방에게 자기 살을 베게 내주고 적의 뼈를 베는 필사의 대전차 전차 전법을 썼다는 이야기다 쿠르트는 독일 태생이 아니다. 체코 변경에서 태어난 독일계 주민이었다. 독일과 체코의 국경선 일대 수데텐란드는 독일인들이 거주해서 그러나 히틀러가 체코를 독일로 합병하자 독일 국민이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 자동차 공장에서 앞으로 훌륭한 기계공이 될 꿈을 가진 도제(徒弟)생활을 하며 기술을 연마하다가 1940년 독일 군에 입대했다. 그는 기갑병과로 전입되어 독일 마르크 형 여러 전차를 거쳐 마르크 4전차로 전차병 마지막 단계 교육을 받아 이수한 것은 1941년 6월 11일 이었다.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던 바르바로사 작전부터 그는 전차의 포수로 참전했다. 쿠르트는 독소 전쟁의 여러 전선을 전전했다. 야르제프에서 전투의 첫 맛을 본 그는 스타린그라드 전역(戰域)과 레닌그라드 , 그리고 코카서스 전선에서 실전을 겪으며 경험을 쌓았다. 1943년 1월말, 그는 푸트로스의 기갑 학교에서 타이거 전차를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그때 그는 이미 적 전차 12량을 파괴한 경험 많은 전차장이 되어 있을 때였다. 그와 막강 타이거 전차와의 결합은 미래 탑 에이스의 출현을 가능케 했다. 신형 전차의 교육을 마치고 신편한 타이거 부대는 다시 동부전선으로 급파되었다. 부대는 유명한 쿠르스크 전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뤘다. 동부 전선에서 몇몇 주요 전투에 참여했던 그의 부대는 다시 본국으로 소환되어 타이거 2 전차로 재장비했다. 부대는 노르만디 상륙작전에 성공한 후 내륙으로 깊숙이 치고 들어오는 미 영 연합군을 막도록 급파되었다. 그는 노르만디에서 독일군을 따라 퇴각하면서 카엔에서 연합군과 큰 전차전을 했다. 그러나 대 소련 전쟁의 사정이 다급해지자 쿠르트의 부대는 다시 동부 전선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도 독일은 소련에게 밀리기 만하는 암담한 실정이었다. 이런 암담한 전황에서 독일 기갑부대는 강철 같은 단결심을 발휘하며 악착같이 거대한 소련의 군사력에 저항했다. 쿠르트는 밀려오는 적과 수없는 격전을 했다. 메조투르, 토로크젠트미크로스, 세그레드, 케크스케메트 그리고 그란 교두보 전투는 물론 기우라, 니트라, 바브 케슬등의 전투다. 세계 현대 전차전에서 이정도의 격심하고 다수의 전투를 경험했던 전차 부대도, 전차장도 없었다. 위의 한 전투에서 쿠르트는 단숨에 적 전차 24량을 격파해서 독일 군부를 놀라게 하였다. 수많은 전투에서 전차 168량을 격파한 이 경이의 투사에게도 종말은 찾아왔다. 그는 1945년 4월 28일, 우스티츠에서 전사했다. 전쟁이 끝나기 단 열흘전이었다. 여기서 독일 격파왕인 그의 전과를 살펴보자는 것이 아니다. 그는 공식 적 격파 전차가 168량이지만 비공식적으로는 195량까지 도달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위 평가다. 쿠르트는 경탄할만큼 겸손했다. 누구든 같은 부대 동료 전차장이 쿠르트가 격파한 적전차를 “그것은 내가 격파했어!“하고 주장하면 쿠르트는 아무 항의도 안하고 “자네 말이 맞겠지”하고 선선히 전과를 양보했다는 것이다. 쿠르트는 전차의 승무원들이 불평을 해도 그는 웃으며 그들을 달랬다고 했다. 사실 전차전은 공중전과 달라서 어느 특정 적전차가 어떤 아군 전차의 포에 격파 당했는지 판단하기가 무척 혼란스러운 경우가 다반사다. 이 전과 다툼이 부대의 결속과 사기를 훼손할 수도 있었다. 말한 대로 전차전은 자신의 살을 적이 베이게 하고 적의 뼈를 베는 죽기 아니면 죽이기의 사력을 다한 전투의 결과이다. 그러나 그런 전과를 동료에게 선선히 내주는 것은 자기 목숨도 공짜로 내 줄 수도 있다는 극한의 대범함이다. 사실 전투중의 전과 다툼은 어느 나라건 육해공군 어느 분야건 공통 된 것으로 때로는 추태로 까지 발달할 수가 있다. 역사적으로 최대로 유명했던 전과 다툼은 1943년 남태평양 부인 상공에서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 五十六]를 격추했던 P-38 조종사 사이에 있었다. 야마모토를 격추했다는 공식 인증을 받은 렉스 바버 중위에게 토마스 램파이어 대위가 이의를 걸고 넘어지면서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져서 그날 출격한 전우는 물론 참전 조종사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전과 다툼이 사실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로서 오히려 당연함에도 쿠르트는 그의 대범한 양보심이 그의 비범한 전과에 앞서 병사들의 귀감이 된다. /울프 독 06/26/2010 07:48 http://blog.yahoo.com/_FSPWQCFAYUX7FJJWIKZQDA2PBU/articles/198413
후세인 [Hussein, Saddam, 1937.4.28~2006.12.30] 티그리트 출생. 카이로대학과 바그다드대학을 졸업하고 1957년에 바트당(黨)에 입당하였다. 1959년 카셈 정권에 의해 대통령암살음모사건으로 체포되었으며, 1964년 알레프 정권에 의해 체포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1969년 쿠데타에 참가하여 혁명평의회 부의장이 되었고, 1979년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90년 8월 쿠웨이트를 기습 점령하였으나, 미국을 비롯한 다국적군의 공격(걸프전)으로 1991년 2월 패배하여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2003년 이라크가 보유한 대량살상무기(WMD)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미국과 이라크간 전쟁이 발발하였고 전쟁에 패하여 바그다드 교외로 도주하였지만 미군에 체포되어 전범재판에 회부되었다. 2006년 11월에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그해 12월 30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naver
- 'Anthropometry of the Blue Period' - 'Fungus Sculpture'
니스 출생. 누보 레알리슴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1958년 ‘허공’전시회를 열어 화제를 모았고, ‘인터내셔널 클라인즈 블루’라 이름 지은 푸른 하늘, 깊은 바다의 색조를 즐겨 썼으며, 금박(金箔)·불·물·공기 등 그리스의 철학적 원소를 사용하였다.
"청색은 바다와 하늘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 이브 클라인
- Zambia 10 Kwacha (Banknote)
카운다 [Kaunda, Kenneth David, 1924.4.28~ ] 잠비아 독립운동의 지도자로백인 지배하의 로디지아-니아살란드연방에 극력 반대, 1960년 통일국가독립당(UNIP)을 결성하고 당수가 되었다. 1964년 10월 영국으로부터 잠비아가 독립함에 따라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69년 8월 구리광산의 국유화에 착수하였고, 1970년 9월 아프리카통일기구 의장이 되었다. 1971년 1월 영국연방수뇌회의에서 영국연방원칙선언 초안을 제출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한 영국의 무기수출 재개에 대한 항의운동의 선두에 서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다른 아프리카 신생독립국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복잡한 문제에 직면하였다. 특히 정치적 폭력사태가 일어나자 1973년 1당체제를 확립하였다. 그후 계속되는 국내의 경기침체와 정치적 ·사회적 불안 등의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1978년과 1983년 대통령직에 재선되었다. /naver
- BOLTON W. DAVID JACK 1923 FA CUP FINAL Football
1923 - 1923년 FA컵 결승전 [1923 FA Cup Final] 1923년 FA컵 결승전(1923 FA Cup Final)은 1923년 4월 28일 영국 런던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볼턴 원더러스 FC와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 간의 1922~23년 FA컵의 마지막 축구 경기다. FA컵(Football Association Challenge Cup, 축구 협회 챌린지 컵) 같은 잉글랜드 축구 역사의 초기 컵 대회의 대표적인 표본으로 뽑히는 이 경기는 1923년에 완공된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첫 축구 경기로 기록되어 있다. 영국 국왕 조지 5세가 우승팀에게 경기 후 트로피를 수여하기 위해 관중석에 자리했다. 각 팀은 결승전까지 5라운드씩을 치렀다. 볼턴 원더러스는 3라운드 2차전부터 마지막 3경기에서 데이비드 잭이 경기마다 홀로 한 골씩 터뜨리고 팀은 무실점으로 골문을 틀어막으며 모두 1:0 승리를 거두며 결승전에 올랐다. 하위 리그 소속이었던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는 풋볼 리그 2부 이하의 하위리그 팀들을 상대했는데, 이 때는 잉글랜드 축구에서 축구 팀들을 실력 별로 여러 리그로 나누기 시작한 시기였다. 웨스트 햄은 4라운드에서 사우샘프턴 FC 3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간신히 물리쳤지만 그 다음 준결승전에서는 5골을 퍼부으며 더비 카운티 FC에게 완승을 거두고 결승전에 진출했다. 이 대회 결승전은 축구 자체보다 125,000명 정도 되는 웸블리 스타디움의 수용인원을 훌쩍 뛰어넘은 엄청난 인파로 인한 큰 혼란 때문에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추정 300,000여 명의 관중들이 입장하면서 경기장의 테라스까지 꽉 차서 사람들이 넘칠 정도였고, 관중들은 선수들이 경기하는 경기장 안 피치까지 내려가기 까지 했다. 말에 올라탄 경찰들이 경기 시작을 위해 피치 위의 관중들을 올려 보내려고 투입되었는데, 이때 경찰이 탄 말 중 밝은 색의 말이 이 날의 상징이 되었다. 결승전 경기는 관중들이 피치를 둘러싸고 서있는 동안 45분 늦게 시작했다. 경기에선 시작하자마자 웨스트 햄이 강한 공격을 시도했으나 이후 볼턴이 강팀의 위력을 과시하며 경기를 지배하고 2:0 승리를 거뒀다. 세 경기 연속골을 터뜨렸던 볼턴의 데이비드 잭이 경기 시작 2분 만에 상대 수비 공백을 틈타 선제골을 넣었고, 후반전에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잭 스미스가 추가골을 넣어 승리를 장식했다. 결승 경기 전 행사 때문에 영국 하원에서 논쟁이 있었고 다음 결승 경기들을 위한 안전 대책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 경기는 “흰 말 결승전”(“White Horse Final”)으로 불리며 2007년에 새로 건축된 웸블리 스타디움에는 화이트 홀스 브리지(White Horse Bridge)를 지어 이 경기를 기념하기도 한다. 결승전까지의 경기 /위키백과
1920 - 러시아의 식물학자, 생리학자 티미랴제프(Timiryazev, Kliment) 사망 티미랴제프 [Timiryazev, Kliment Arkad'evich, 1843.6.3~1920.4.28] 러시아의 식물생리학자.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 1866년 페테르부르크대학을 졸업한 후 식물의 광합성을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1868∼1870년 독일에 유학하여 헬름홀츠, 분젠 실험실에서 연구하였다. 1869년 페트로프 농업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식물의 광합성이 빛의 양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이론적 ·실험적으로 밝혔다. 1877년 모스크바대학 교수가 되어 다윈설의 보급에 힘썼다. 1902년 자유사상 때문에 강의의 정지명령이 내렸으나, 러시아 혁명 때에는 신정부를 위하여 활약하였다. /네이버
1912 - 영국의 전쟁영웅, 정보원 오데트 할로우(Hallowes, Odette) 출생 할로우즈 [Hallowes, Odette Sansom, 1912.4.28~1995.3.13] (참고) [역사 속의 인물] 여성 스파이 오데트 할로우 네덜란드 영화 '블랙북'(2006년 작)은 2차대전 중 독일군에게 가족을 잃은 여성이 스파이로 변신, 맹활약을 벌이는 내용이다. 시나리오는 실존 인물인 오데트 할로우(1912~1995)에게서 모티브를 얻어 쓰여진 듯하다. 영화에는 노출과 폭력이 난무하지만 실제 스파이 활동은 은밀하고 조용하게 이뤄지는 탓에 다소 싱거운 느낌이다. 그녀는 프랑스 알마인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점잖은 영국 남자를 동경했다. 19세 때 영국 남자와 결혼해 영국으로 건너갔다. 2차대전이 발발하자 남편은 징집됐고 자신은 영국 정보국으로부터 스파이 활동을 요청받았다. 고민 끝에 세 딸을 기숙학교에 보내고 훈련을 받고는 1942년 프랑스에 몰래 상륙했다. 처칠 총리의 사촌이자 스파이 두목 피터 처칠에게 자금을 건네주고 활동을 돕다가 다음해 게슈타포에 체포됐다. 모진 고문을 받고 강제수용소에 끌려갔으나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종전 후 풀려나 보니 남편은 이미 전사했고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은 처칠이었다. 그와 결혼했으나 1956년 이혼했다. 전쟁 고아와 미망인을 돕는 사업에 헌신하다 1995년 오늘, 죽었다. 영화 같은 삶을 산 강인한 여성이었다. 박병선 사회1부장 /매일신문 2010.03.13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0821&yy=2010
토레즈 [Thorez, Maurice, 1900.4.28~1964.7.11] 12세 때 북프랑스의 파드칼레현(縣)에 있는 탄광촌에서 광부가 되었으며 1919년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하여 사회당에 입당하였다. 1920년 사회당과 결별하고 프랑스 공산당 창립에 참가하였다. 1929년 국민의회 의원, 모로코전쟁에 반대하여 투옥되고, 1930년 당 서기장, 1934년 반(反)파시즘 인민전선의 결성에 진력하는 등 뛰어난 지략과 실전력을 발휘하여 국제공산주의운동 내부에서도 지도적 지위를 확립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1940년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대독저항운동에 활약하다가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1943년 모스크바로 망명하였다. 1944년 드골의 파리 해방과 더불어 귀국하여 이듬해 총선거에서는 공산당이 하원의석 586석 중 153석을 차지하여 제1당이 되었고, 드골 내각에 국무장관으로 입각하였다. 이후 F.구앵, G.비도, P.라마디에 등 각 내각의 부총리가 되었으나 동서냉전이 격화되자 1947년 라마디에 내각에서 밀려났다. 1961년 서기장에 재선, 1964년 건강이 악화되어 서기장직을 W.로셰에게 물려주고 요양을 위해 크림반도의 얄타로 가던 중 배 안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저서에 《인민의 아들 Fils du Peuple》(1937) 《프랑스의 정치》(1949) 등이 있다. /naver
예젠잉 [葉劍英(섭검영), 1897.4.28~1986.10.22] 광둥성[廣東省] 출생. 1927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 해 장제스[蔣介石]의 반공쿠데타에 대항하여 일어난 광둥폭동에 제4교도단을 거느리고 참가하였으며, 그 후 홍콩을 거쳐 독일과 소련에 유학하였다. 1931년 귀국하여 장시[江西]소비에트구에 들어가 홍군 제1방면군 참모장, 홍군학교 교장을 거쳐 대서천(大西遷)에 참가하였다. 1936년 시안[西安]사건 후에는 홍군 시안 판사처 주임을 지냈으며, 항일전쟁 중에는 팔로군 참모장으로서 린뱌오[林彪]를 도왔다. 중국공산당 정권수립 후에는 베이징구[北京區] 군사관제위원회 주임, 베이징 시장, 광둥 군구사령관, 광저우[廣州] 시장 등을 역임하였다. 문화대혁명 후에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 당 정치국 위원,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회 위원, 국방위원회 부주석 등 당 ·군 ·정부의 요직에 있었으며, 군사과학원 원장을 겸임하였다. 린뱌오가 실각한 후에는 군의 제1인자가 되었고, 1978년 제5차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는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82년 당 정치국 상무위원, 1983년 국가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을 지냈으며, 1985년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naver
살라자르 [Salazar, António de Oliveira, 1889.4.28~1970.7.27] 처음에는 성직자 교육을 받았으나 코임브라대학에서 정치학을 배우고 1916년 동 대학 경제학교수가 되었다. 1926년 장군 카르모나의 쿠데타가 성공하여 재무장관으로 기용된 후, 1932년 수상이 되었고, 국민통일당을 조직하여 1당독재를 추진하였다. 1936년 이후의 에스파냐내란에 대해서는 프랑코측에게 유리하게 움직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중립을 지키면서도 영국과의 경제관계의 단절이 두려워 연합국측을 원조하였다. 전후에는 미국에 접근하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맹하였고, 1951년 대통령선거에서 로페스가 당선된 후에도 정계에의 지위를 지켰다. 국제적 대립에 편승하여 외교적 지위의 향상에 노력하다가, 1968년 뇌혈전증(腦血栓症)으로 물러났다. /nave
배리모어 [Barrymore, Lionel, 1878.4.28~1954.11.15] 미국의 배우 일가인 배리모어家(The Barrymores)는 영국 배우 모리스 배리모어(Maurice Barrymore, 1847~1905)와 미국 여배우 조지애너 에머 드루(Georgiana Emer Drew, 1856~93) 사이에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3남매가 특히 유명하다. 장남 라이어널(1878~1954)은 소년시절부터 무대에 서서 인기배우가 되었으나, 차츰 영화에 집중하다가 1925년 이후는 영화에만 전념하였다. 그의 누이동생 에설(1879~1959)은 미모와 뛰어난 연기력을 칭송받으며 셰익스피어극과 H. 입센의 《인형의 집》에 출연하여 명성을 떨쳤다. 1928년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극장(에설배리모어극장)이 뉴욕에 세워졌고, 그녀 자신의 출연으로 첫 무대의 막이 올랐다. 그녀의 동생 존(1882~1942)은 처음에는 개그와 가벼운 희극에 출연하였으나, 얼마 뒤 셰익스피어극의 《햄릿》 《리처드 3세》 등 고전극의 배역을 맡았다. 존의 세 자녀 가운데 2명도 배우가 되었다. /naver
1837년 6월 18세의 나이로 영국여왕이 되었다. 그런데 하노버가에서는 여자의 왕위계승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이 시점에서 1714년 이후 계속되던 영국 하노버의 동군연합(同君聯合)은 없어졌다. 동군연합이란 각각 별개의 두 나라가 서로 독립을 침범하지 않고 동일한 군주를 추대하여 연합해 있는 것으로, 영국에서는 몇 번 있었다. 1840년 2월에 외사촌인 작센 코부르크 고타공가의 앨버트와 결혼하였다. 1841년에는 황태자(나중의 에드워드 7세)가 태어났고, 또 몇몇 자녀를 얻었다. 여왕은 널리 국민의 존경을 얻은 현모양처로서 행동하였고, 떨어져 있던 왕가의 평판을 회복하였다. 남편인 앨버트는 공적인 면에서도 여왕의 좋은 협력자가 되어 정당제가 혼란하였던 1840∼1850년대에 정치면에서 여왕을 보좌하는 한편으로 1851년의 런던세계박람회를 성공시키는 등 과학기술과 예술의 진흥에도 힘썼다. 1861년 앨버트가 병으로 죽자, 그 후 여왕은 공적인 무대에 등장하는 것을 피했으나, 정치에는 강한 관심을 계속해서 가졌다. 자유당의 W.E. 글래드스턴을 싫어하였고, 보수당의 B. 디즈레일리를 총애하였다. 그리고 디즈레일리의 정책을 지지하여 1876년에는 인도 여제(女帝)도 겸하였다. /yahoo
크라우스 [Kraus, Karl, 1874.4.28~1936.6.12] 보헤미아 출생의 유대인. 빈에서 활약하였다. 잡지 《횃불 Die Fackel》(1899∼1937)을 발행하였고, 종횡무진한 기지와 통렬한 풍자로 모든 영역의 부패 ·타락상을 비판하여, 찬탄과 원한의 표적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언어의 순수성을 보전하기 위하여 정열을 쏟았으며, 아포리즘집(集) 《선언과 반론 Sprüche und Widersprüche》(1909)과 평론집 《만리장성》(1910) 등이 있다. 일생을 바친 평론생활 배후에 있는 《시집 Worte in Versen》(9권, 1916∼1930)을 비롯한 서정시는 엄격한 어법(語法)에 의하여 고전적 품격을 나타낸다. 희곡 《인류 최후의 나날 Die letzten Tage der Menschheit》(1922)은 환상 속에 경종을 울린 반전(反戰)의 서(書)이며, 만년의 작품 《제3의 발푸르기스의 밤 Die dritte Walpurgisnacht》(1952)에는 히틀러 시대에 대결하는 분노가 엿보인다. /naver
아세르(아서르) [Asser,Tobias Michael Carel, 1838.4.28~1913.7.29] 토비아스 아세르(Tobias Michael Carel Asser)는 네덜란드의 법학자이다. 1899년에 열린 제1차 만국평화회의에서 상설중재재판소의 결성에 기여한 공로로 1911년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1913년 사망 전까지 헤이그 국제법 아카데미의 설립을 도왔다. /위키백과
1813 - 러시아의 장군 쿠투조프(Kutuzov, Mikhail) 사망 쿠투조프 [Kutuzov, Mikhail Illarionovich, 1745.9.16~1813.4.28]
러시아의 군사령관.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1812)을 격퇴했다(→ 나폴레옹 전쟁). 14세 때 하사로 러시아군에 입대해 폴란드(1764~69) 및 투르크(1770~74)와의 전쟁에서 전투경험을 쌓았다. 크림에서 6년간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장군 밑에서 복무하면서 전략과 전술을 배우고 1784년에는 소장이 되었다. 1774년 심한 머리 부상을 입고 한쪽 눈을 잃었지만 1787~91년의 러시아 - 투르크 전쟁에서 적극적으로 활약했다. 이 전쟁 이후 여러 가지 외교·행정직을 맡았으나 1802년 불신을 받게 되자 고향으로 은퇴했다. 그러나 3년 후 러시아가 나폴레옹에 대항한 제3차 동맹에 가담하면서 알렉산드르 1세는 그를 다시 불렀다. 1805년 11월 11일 뒤렌슈타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으나 알렉산드르의 압력으로 아우스터리츠 전투(12. 2)에 가담해 참패를 당하고 사령관직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는 곧 그를 몰다비아 주둔군 사령관으로 복귀시켰다. 투르크에 몇 차례 패배를 안겨준 뒤 1812년 5월 28일에는 러시아측에 유리한 조건으로 러시아 - 투르크 평화협정을 체결했다(부던레부쿠레슈티 조약). 6월에 나폴레옹군이 러시아를 침공했다. 8월 9일 당시 육군원수였던 그는 전러시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다음날 공작작위를 받았다. 그는 러시아 군사력을 아껴두기로 결심하고 프랑스군 앞에서는 후퇴하면서 소규모 전투만 치르면서 전투를 제한했다. 그의 판단은 옳았지만 여론의 압력에 못 이겨 9월 7일 보로디노에서 큰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전투는 우열을 가릴 수 없었으나 쿠투조프는 병력의 반 이상을 잃고 남동쪽으로 후퇴, 결국 프랑스군의 모스크바 입성을 허락했다(→ 보로디노 전투). 그러나 나폴레옹은 러시아와 협상하는 데 실패하고, 모스크바에서 겨울을 나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에 10월에 모스크바를 떠났다. 쿠투조프는 나폴레옹군이 비옥한 남쪽 행로로 가지 못하게 차단했고(말로야로슬라베츠 전투, 10. 24), 와해 지경에 있던 프랑스군을 침입 당시 그들이 폐허로 만들었던 길로 도주하게 함으로써 큰 전투를 치르지 않고 적을 몰락시켰다. 나폴레옹군이 베레지나 강을 건넌 뒤(11. 26~28) 그는 폴란드와 프로이센까지 추격해들어갔고 프로이센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브리태니커 |